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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교실 뒤에 반 아이들의 그림이나 공작품을 전시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때는 그랬다. 손재주가 없어 미술시간만 되면 한숨부터 났던 나도 딱 한 번 초록 부직포 위에 내 그림이 붙어본 적이 있다. 손을 그리라고 했다. 우물쭈물하다 집에까지 가지고 갔지만 학교에서 안 되던 그림이 집에서라고 될 턱이 있나. 도저히 안 되겠어서 왼손을 쫙 펴 도화지에 대고 윤곽을 따라 그렸다. 손금을 대충 슥슥 채우고 음영을 조금 넣어 지긋지긋한 미술숙제를 갈음했다. 그런데 아뿔사, 그 그림이 교실 뒤에 떡하니 나붙었다. 누가 봐도 도화지에 손을 대고 그린 걸 알 만한데 선생님은 왜 수작들을 놔두고 내 그림을 붙여주셨을까. 자랑스럽기는커녕 난감하고 당혹스러워 그림이 붙은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그게 몇 학년 때 일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그 손그림만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림을 위시한 미술은 그렇게 늘 내게 열패감을 안기는 분야였다. 당연히 살면서 딱히 미술관에 가거나 그림을 찾아보지 않았다. 너무 모르고 싶지는 않아 그림을 다른 것과 접목해 풀어 설명하는 그림에세이는 즐겼던 편이다.
책은 좀 읽었다. 서울 삼촌네 사셨던 할아버지가 명절을 쇠러 집에 오실 때면 우리 형제들은 아무리 밤 늦은 시간이어도 초롱초롱 눈을 밝혔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시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하고 가방에서 나온 예닐곱 권 책 중에 서로 마음에 드는 걸 고르려고 난리북새통이었다. 책을 읽고 나면 독후감을 써서 아버지께 제출하고 상금도 받았다. 그때 우리가 가장 열광했던 것은 계림문고 세계명작 시리즈였다. 곽아람이라는 작가는 생소하지만 책과 함께 만난 그림들을 풀어낸다는 책 소개에 크게 끌렸다. 목차에 등장하는 책 제목이 거의 들어본 것이라 더 좋았다. 작가가 어릴 때부터 고전을 자연스레 접하는 환경이었다는 데 묘한 동질감을 느꼈지만, 분명 나도 그책을 읽었는데 저런 구절이 있었나 싶어지면서 조금씩 밀린다는 기분이 들더니, 작가로부터 책과 관련된 역사와 책의 구절 그리고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그림을 제시받자니 작가의 인문과 예술의 소양이 상당하구나 싶어 패배감이 들었다. 그리고... 글에서 꽤 인생의 내공이 묻어나는데 나이가 30대 초반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녹아웃! 얼마 전 어떤 화가의 그림을 보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첫경험이었다. 조지아 오키프라고 했다. 꽃과 동물의 두개골, 사막, 산 등의 자연물을 당시 유행하던 그 어떤 화풍과도 다르게 그린 화가, 20살 연상의 유부남이자 조지아의 멘토이며 뮤즈였던 유명 사진작가 스티글리츠와의 염문으로도 유명한 여성. 포털 검색창에 조지아 오키프를 입력하고 이미지를 클릭하면 화면 가득 펼쳐지는 강렬한 그림들이 숨을 멎게한다. 곽아람 작가의 이 책을 읽고 조지아 오키프의 특정 작품을 연상했다고 쓸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대신 최근에 그림과 관련해 알게 된 두 사람을 어떻게든 엮고 싶어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들을 훑었다. 음... 곽아람 작가를 위의 화려한 그림들과 연결하기는 좀 어려울 듯하고... 이거면 어떨까?
모범생이었고 (64쪽) 여러 주인공 못지않게 복잡다단한 감정을 지녔(32쪽)지만 무미했던 (71쪽) 어린시절을 보냈던 곽아람. 누군가의 첫사랑이기보다는 '마지막 사랑'이고 싶고 (89쪽), 여성적인 매력을 한껏 발휘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아는 것이 페미니즘의 본령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112쪽)으며,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면서도 생활인으로 살아가야만 (235쪽) 하는, 그래서인지 희망에 관한 한 냉소적(241쪽)이고 고지식 (277쪽)하며 착한 아이 콤플렉스 때문에 화를 잘 내지 못하는 (311쪽) 사람으로 자신을 묘사하는 곽아람. 곽아람 작가는 겉으로는 냉정하고 까칠해보일 수 있으나 안에서는 열정이 부글부글 끓어 금세라도 밖으로 터져나올 듯한 느낌이다.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 <Blue and Green Music>의 꽃잎들이 시새워 밖으로 향하듯. 억지라고 하겠지? 당연히 억지다. 그저 미술의 '미'자도 모르는 문외한이 최근 비슷한 시기에 그림과 관련하여 크게 관심을 가지고픈 두 대상을 만난 것을 기념하고 싶었을 뿐이다. 조지아 오키프는 1986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여태껏 나와 있는 그림과 생애를 알아가는 맛이 있겠고, 곽아람 작가의 이 책은 약 십 년 전에 쓰였는데 최근에 신작이 나왔다고 하니 그사이 작가의 생각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확인해볼 수 있을 것 같아 크게 기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