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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철학이란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 원리 즉 인간의 본질, 세계관 등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또한 존재, 지식, 가치, 이성, 인식 그리고 언어, 논리, 윤리 등의 일반적이며 기본적인 대상의 실체를 연구하는 학문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철학이라는 용어는 고대 그리스어로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α)에서 유래하였는데, 여기서 지혜는 일상생활에서의 실용하는 지식이 아닌 인간 자신과 그것을 둘러싼 세계를 관조하는 지식을 뜻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의 대항은 자연이었는데, 소크라테스 시기에는 인간의 혼을 연구 대상으로 하였으며, 특히 윤리 문제가 관심 대상이었습니다. 중세에는 신의 철학의 대상이었고, 근대에는 인간 지식의 근원이 철학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강조되면서 철학이 대중과의 거리가 멀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철학이 대중과 함께 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독일의 저명한 대중철학자 빌헬름 슈미트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내고 그로 인해 삶은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를 사유하고 숙고하던 그리스 철학이 찾아낸 삶의 기술의 전통이 사라졌다고 주장합니다. 그 결과 상실감, 피로감, 우울증, 강박증, 가치 및 정체성의 혼란 등 오늘날 현대인들이 흔히 겪는 병리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고대철학으로부터 삶을 다스리는 기술을 복원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슈미트는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에서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을 인용하여 ‘삶의 능력을 다시금 가능하게 해주는 답변을 얻기 위해 삶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는 사유의 공간으로의 소풍’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가능한 답변들의 실천적 측면에서, 습관, 쾌락, 고통, 분노, 시간, 죽음과의 소통을 통한 기술들의 단련에 반어(反語, 아이러니), 부정적 사고, 마음의 평정과 같은 기술의 단련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제가 작년에 아팠던 까닭인지 질병에 관한 사유에서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자신의 질병과 소통해야 한다”는 몽테뉴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왜냐하면 질병은 삶의 한 구성요소이고 삶에서 시민권을 갖고 있으므로 존중해서 취급해야 한다는 것(96쪽)”입니다. 어떨 때는 질병이 약이 되기도 하므로 그저 제압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가능한 질병의 요구에 응하고 따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노발리스(Novalis)의 경우 질병으로부터 삶의 기술을 수업하는 길을 보았다고 합니다.
몇 년 전부터 긍정심리의 효과에 대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면서 매사를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좋다는 경향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부정적으로 사고하기를 권합니다. 긍정적 사고는 ‘포괄적인 육체적, 정신적 쾌감’에 도달하기 위한 ‘자기실현의 매우 근본적인 방법’이라면서, 현대적 인간은 ‘풍족한 생활, 번영, 건강을 향한’ 강력한 지향을 가지고 있어 ‘행복해지는 것에 대한 일종의 강반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긍정적 사고 자체가 큰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일종의 오해라고 주장합니다.
긍정적 사고를 할 경우, 매사가 잘되리라는 희망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인데, 막상 결과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때의 실망감이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정적 사고는 오히려 지나치게 부풀어 오른 희망에 거리를 두는 것으로 체념이 아니라 최악의 경우를 가상하여 보다 나은 방향의 결과를 얻기 위해 대책을 마련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셈이니 긍정적 사고의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종의 신중함을 긍정적 사고와 대비해서 볼 때는 부정적 사고인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앞서 질병에 관한 사유를 소개했습니다만, 삶의 기술로서 건강관리가 필요하다는 사유도 있습니다. 건강의 반대는 질병이 아니라는 생각도 제시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수많은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병든 사람의 소망은 어쩌면 오로지 하나 다시 건강해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삶의 기술의 목적은 아름다운 삶을 마련해주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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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여러 힘에 맡겨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마무리하는 주체는 우리 자신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당위성을 지닌다. 이 책은 우리가 삶의 기술을 알면 삶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더 나아가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삶의 기술 철학>에서 출발한다. 삶을 살면서 부딪히는 문제에 대해 선택의 여지와 가능성을 열어 놓고 소망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실존에 개입하고 실존을 의식적 수련의 대상으로 삼는 삶이다.
저자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어떻게 철학과 맞닿아 있는지 증명하기 위해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철학으로의 소풍>(1959)을 제시한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과 관련한 일들은 철학에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일치를 꿈꾸는 사랑 이후 타자와 알 수 없는 거리를 느끼는 순간, 무한한 행복을 경험한 뒤 갑작스럽게 전복하는 덧없음을 통해 폐허 속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쾌락과의 소통 이후 더욱 진하게 다가오는 개인의 실존과 유한성은 우리를 철학으로 안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유는 절망의 낭떠러지를 앞에 두고서야 전개된다."
철학하는 삶은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다. 우리가 삶의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놀랍게도 삶의 한계인 죽음 덕분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루한 삶에 한계를 지어주는 죽음은 삶을 생생하게 반전시킨다는 점에서 고마운 경계다. 결국 철학하는 삶의 기술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며 영리하게 사는 삶의 기술이다.
철학하는 삶의 주체는 시도하는 실존적 삶을 산다. '시도'하는 삶을 살았던 사상가 몽테뉴와 니체는 훌륭한 본보기다. 몽테뉴는 글쓰기 양식을 실존 양식의 하나로 기초를 세우며 에세이, 시론이라는 이름의 특별한 탐색적 글쓰기 양식을 만들었다. 경험과 시험을 통한 앎으로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지식을 얻은 몽테뉴는 <수상록>을 남겼다. 니체 역시 이성을 벗어나는 우연성인 '개연성'을 수용하기 위해 노력하며 시론적, 실험적 실존의 구성요소로 삼았다. "삶의 주체의 일관성은 우연성을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함께 연관을 맺고 삶과 자기의 영원한 쇄신요소로 우연을 이용한다."
현대인은 행복에 대한 일종의 강박관념을 갖고 산다. 하지만 감정의 역설은 긍정하는 데 비례하여 부정의 힘이 커진다는 데 있다. 철학하는 삶의 기술은 부정적인 사유의 강점이 긍정적인 사유를 포괄하고도 남을 만큼 깊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칸트의 말처럼 "매번 평범한 것만 기대하는" 사람은 "그 결과가 희망에 거슬리는 경우가 드물고, 오히려 예기치 않았던 완전성으로 깜짝 놀라게 하는" 이득을 얻게 된다. 긍정적인 사유는 철학적 개입이 들어설 여지가 없고 성찰적인 삶의 기술의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삶의 기술 철학은 개인의 자기 형성을 위한 것이다. 결국 철학에 기반한 자기 형성은 미셸 푸코가 고대의 철학적 삶의 기술에 대한 작업에서 언급한 '실존의 미학'이란 개념에 이른다. 그것은 자기강화와 실존의 형성, 선택 행위, 판단력의 감수성, 가시적인 아름다움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20세기 말 인구에 회자되던 '긍정적인 것'만이 긍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불쾌한 것, 고통스러운 것, 추악한 것을 통해 '부정적인 것'도 긍정적인 것 못지않게 삶에 가치를 지닌 것으로 저자는 통찰한다. 일시적인 소비에서 행복을 찾는 타자화된 삶에서 벗어나 실존적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풍성한 책이다.
(이 리뷰는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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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태어나 주어진 시간만큼 살다가 죽습니다. 물론 태어나고 죽는 것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살아가는 것만큼은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를 BCD라고도 합니다. 태어나고(Birth) 죽는(Dead) 사이의 삶은 선택(Choice)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삶 역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요소들이나 힘에 맡겨지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선택하는 바에 따라 삶이 결정되는 것이므로, “삶을 제때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으로부터 ‘아름다운 삶’까지도 만들어내는 진지한 시도” 즉, 삶의 기술을 체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에 담긴 생각입니다. 인간의 삶에 대하여 사유하는 학문이 철학입니다. 따라서 삶의 기술 역시 철학적으로 사유할 이유가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기술’이라는 부제는 이 책의 원제목 ‘Schönes Leben: Einführung in die Lebenskiunst'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저자의 또 다른 저서 <삶의 기술철학>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점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책은 <삶의 기술철학>을 따라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작품을 근거로 삼아 ’철학으로의 소풍‘을 시도한다. 다시 말해 삶의 능력을 다시금 가능하게 해주는 답변을 얻기 위해 삶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는 사유공간으로의 소풍을 시도한다.” 모두 20개의 장으로 구분하여, 도입부의 3개의 장을 할애하여 이 책의 기획의도를 담았습니다. 철학으로의 소풍과 삶을 가져다주는 시간의 기다림, 그리고 삶의 기술로의 철학이 주체적 삶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점을 설명합니다. 그리고는 습관, 쾌락, 고통, 죽음, 시간, 시도, 격정 혹은 분노, 모순, 부정적 사고, 멜랑콜리, 불안과 평정, 생태적 삶, 가상공간, 건강관리, 쾌활함 등 15가지 삶을 결정하는 요소들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시도합니다. 그 결과에 따라서 ‘아름다운 삶’, 즉 행복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삶의 기술의 목적을 마지막으로 다시 설명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을 인용하여 이야기를 시작합니다만, 삶의 요소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니체 등 앞선 철학자들이 정리한 사유를 인용하여 설명을 전개합니다. 특히 아름다운 삶에 관하여 설명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에 대한 일곱 가지 규정을 인용하여 행복에 대한 나름대로의 숙고를 해보라고 권유합니다. 적어보면, 1. 행복은 선택 가능한 선이다, 2. 행복은 하나의 특수한 행위이다, 3. 행복은 얽힘 가운데의 삶이다, 4. 행복은 세 가지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5. 행복은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어떤 것이다, 6. 행복은 ‘충만한 삶’이다, 7. 행복은 신적이다, 등입니다. 저자는 삶의 기술은 개인의 부흥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위대한 유토피아 시대에 공동체의 신격화 가운데 파멸의 위기에 몰렸고, 희망이 부재한 시대에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끌어갈 것을 강요당한 개인의 르네상스’를 맞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이 부분은 금세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과연 위대한 유토피아 시대는 도래한 적이 있었던 것인가 싶습니다. 삶의 기술의 목적을 설명한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삶의 기술이라는 실존의 미학에 있어서 몇가지 관점을 소개합니다. 자기강화, 실존의 형성, 선택행위, 판단력의 감수성, 그리고 주도적 관점이라고 할 아름다움의 실현 등 다섯 가지입니다. ‘철학적 영혼의 치유사’라는 어려운 개념의 직업을 가진 바 있으며, 철학의 대중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는 저자입니다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철학은 역시 어렵다는 생각을 재확인한 그런 책읽기였던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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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숙고는 삶의 기술에서의 기술에 대해, '숙련된 삶'에 대해 그리고 의식적인 삶의 운영을 위해 한몫을 할 수 있다. 근거와 논증을 탐구하고, 개념들을 해명하고, 구조와 그것에 근본적으로 연관되는 사항들을 발견하고, 조건들을 숙고하고, 가능성들을 분석하는 것은 철학적인 행위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삶이 처한 상황을 해명하는 데 보조 역할을 할 수 있다. 철학은 일어난 일을 이해하는 데, 한 개별자가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가지고 있지 않은지를 좀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1쪽에서 발췌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책이었다. 대학에서 철학 강의도 수강한 적이 있고, 철학서도 몇 권 읽어보긴 했지만 사실 철학과 삶의 접점을 찾기는 힘들었다. 물론 나의 공부가 부족한 탓도 있겠으나, 철학이라고 하면 형이상학적인 학문이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철학이 삶이 되고 삶이 철학이 되는 경이로운 순간"을 이야기한다.
이 책의 저자는 빌헬름 슈미트로 인문학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사람이다. 그는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철학과 역사학을 공부한 뒤,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인데, 2004년부터는 독일 에르푸르트대학교의 객원교수로 재직중이다. 유럽과 중국, 한국에서도 활발한 강연 활동을 펼치면서 철학을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데 힘쓰며, 삶의 기술에 관한 여러 저술 활동으로 2013년 스위스 에그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도 그의 다른 책처럼 대중적이면서 깊이가 있다. 흔히 대중적인 철학서라고 하면 지식의 맛만 보여주는 얕은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빌헬름 슈미트의 책은 그런 류의 책이 전혀 아니다. 깊은 맛이 우려나오는 전통차와 같다고 할까.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지만, 결국 어려운 내용을 이해하게 되고 삶을 성찰하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읽으면서 이 책은 마치 균형잡힌 철학 에세이집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고통의 의미와 의의를 해석하고 이해하려 하는 고통의 해석학이 일체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에 해석 활동은 결과보다 더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그 활동안에서 무관심이 끝나고 우리가 시작되었음이 표현되고, 자기가 다시금 자신에 동화되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의미(연관들)에 대한 질문과 의의(고통의 중요성)에 댛나 질문은 스스로에 대한 염려의 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해석 작업은 생리학자나 심리학자에게만 맡겨질 것이 아니다.
-본문 90쪽에서 발췌
이 책은 매우 흥미롭게도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의로의 소풍Excursion into Philosophy>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철학과 더불어 미술작품까지 깊이있는 해석을 이끌어낸 저자의 박식함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호퍼가 근대철학이 거부했던 것을 제공했다고 이야기한다. (38쪽부터) 삶의 문제를 제시하기 위한 공간, 정지와 자신과 자신의 시대를 조화하기 위한 공간, 마지막으로 자신에 대한 작업과 삶의 기술을 만들어내기 위한 공간이 그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현대의 징후는 삶의 기술의 결여라고 본다. 저자는 여기에서 철학의 중요성을 발견해내는데, 철학이 삶을 다스리는 기술에 대한 자체의 전통적 연관을 다시 발견해낸다면 삶에 대한 성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저자는 철학에 대한 이런 새로운 이해가 삶의 기술 철학의 관심사라고 주장한다.
나는 철학을 틈틈이 공부해오면서도 사실 철학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 첧학은 무용성을 띄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가치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인문학의 쓸모없음을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철학이 유용한 학문이기를 바랐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나는 철학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된 것 같다. 저자는 나를 철학이 인간의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라는 것을 납득시키고 말았다.
저자는 284쪽에서 자율적 해석학의 특권을 가진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의 해석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계속해서 이런 해석을 위해 주체는 자신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거리두기는 자신과 자신의 삶을 외부에서 보듯 바라보고, 그때껏 살아온 삶을 요약하고, 그 삶의 연관을 해석하고, 실존에 기본적 의미와 '행복'이라는 개념을 부여하고, 아름답고 참된 삶의 이해에 이것들을 관련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나의 삶에 대해 거리를 두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책을 읽는 동안 절실하게 느꼈다.
이 따뜻한 책을 언제나 오랫동안 읽고 싶다. 뿌리까지 훤히 보여주는 한 그루 나무처럼 나도 삶의 뿌리를 더 단단히 내리고 어제보다 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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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는 ‘지하인’이 나온다. 지하인이라고 하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 골방에 갇혀 사는 부정적인 인간을 말한다. 하지만 도스토엡스키가 말하는 지하인은 도덕적이며 획일적인 세계에 반대한다. 자신만의 학문적인 논리를 펼치며 지하인은 2×2=4가 꽤 괜찮은 녀석이라면, 2×2=5는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2×2=4는 수학적으로 정해진 규칙이며 논리가 명확하다. 우리가 이렇게 2×2=4를 믿으며 그럭저럭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의심할 수 없다. 삶에 의욕 없이 무기력하다면 죽음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2×2=5는 수학적으로 오답이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고 오히려 말장난을 하는 것 같아 정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하생활자의 진심은 다른 데 있다. 바로 2×2=5가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바쁘게 살다보면 피곤함에 지쳐 더 이상 삶의 설렘도 없다.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구나,를 깨닫게 된다면 그만큼 인생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하인이 2×2=5가 사랑스럽다고 말해도 아무런 감응이 없다. 그래서 더욱 머릿속이 혼란해진다. 정말로 2×2=5는 비정상일까?
이러한 문제의식에 빌헬름 슈미트는『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에서 ‘반어의 기술’로 답한다. 철학적 영혼의 치유사로 활동했던 저자가 말하는 반어의 기술은 모순을 다루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와 공존하면서도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삶이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모순을 참고 살아야만 하는데 쉽지 않다. 모순을 생각할수록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가볍게 일탈하거나 무겁게 반항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반어의 기술은 가볍거나 무겁지 않다. 대신 거리를 두거나 중재한다. 그러면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실을 깨닫게 된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말을 빌리자면 반어의 ‘본래의 고향’은 철학이기 때문이다.
삶이 피곤하다는 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삶이 팍팍하거나 희망이 없다면 자기를 파괴하거나 착취하고 만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바닥을 치는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견디며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지는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때로는 도망가거나 환상에 빠져 절망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저자 말대로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기술’이지 않을까? 즉,
삶의 기술의 효과를 본 사람은 충만한 삶을 이끌어간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더 철저하다. 왜냐하면 자신과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삶의 ‘근거들’을 이해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는 성공한 그리고 가능한 다양한 경험이라는 넓은 지평에서, 열정적인 동시에 명철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52p)
우리가 꿈꾸는 것만큼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꿈의 이면에는 삶의 부조리함을 깨닫게 된다. 부조리한 삶을 흘러가는 대로 산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성찰할 수 없다. 그래서 철학은 삶을 빛나게 한다. 궁극적으로 아름다운 삶을 추구한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삶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자신의 작품이어야 한다. 이러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저자는 고통, 쾌락, 죽음, 불안을 지나 마지막으로 행복에 이르는 철학으로의 소풍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철학으로의 소풍을 말하면서 굳이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1959)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침대에 있는 두 사람의 일상적이면서도 약간은 당황스러운 작품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를 철학으로 안내한다. 호퍼가 말했듯 “한 작품 안에 얼마나 많은 사상과 자극이 들어갈 자리를 잡는지” 불문명하다. 철학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의 취양에 제격이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는 제목과 주제가 명확하며 긍정적이다. 반면에 <철학으로의 소풍>는 제목과 주제가 모호하고 부정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에는 뭔가 특별한 삶의 기술이 있다. 바로 철학은 얽힘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더불어 사는 관계망이다. 자기 염려만으로 자기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철학은 학문적인 지식이 아니라 삶의 지식이다. 삶의 지식은 삶을 해석하며 이해하는 것이다. 끝으로 철학은 삶을 쾌활함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쾌활함은 단순히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유쾌함과 불쾌함의 사이, 긍정과 부정의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균형 잡힌 삶은 살고 있을까? 균형은 삶을 후회하지 않고 충만하게 한다. 이제 더 이상 균형은 평범하지 않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삶의 기술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자기강화는 이런 것이 아닐까. 최선, 최악의 상황에서도 쾌활함을 느끼며 ‘철학으로 소풍’을 떠나는 것이다. 2×2=5는 사랑스럽다.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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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자 빌헬름 슈미트의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 - 1967)의 회화작품을 근거로 삼아 철학으로의 소풍을 시도한 책이다. 호퍼는 미국 출신의 화가로 사실주의 작품을 많이 그렸다. '철학으로의 소풍(Excursion into philosophy)'이란 그림이 있다. 저자에 의하면 아름다운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관성의 법칙에 따라 단순히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실존에 개입하고 실존을 의식적 수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철학으로의 소풍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림질로 빳빳하게 줄을 세운 바지를 입은 한 남자가 이마에 깊이 주름살이 팬 얼굴과 긴장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심사숙고하고 있고 등 뒤 침대 겸용 소파에는 반라의 여인이 등을 보이고 누워 있는 그림이 '철학으로의 소풍'이다. 그림의 남자가 취한 자세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와 비슷하다. 저자가 말했듯 플라톤은 개인이 결코 실망하지 않을 참된 아름다움이라는 이념을 지향하려면 관능적 쾌락을 직접 경험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19 페이지) 저자는 소외에 대해 새삼스럽게 언급하는 것은 신과의 보편적 소통과 연결을 추구하는 시대의 뼈저린 아픔이라 말한다.(25 페이지) 철학으로의 소풍은 정확히 실존이 문제가 되는 순간에 일어난다.(27 페이지)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을 보고 철학적 사색을 펼친 '철학으로의 소풍'은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의 한 챕터이다. 이 책에는 저자의 농밀한 사유의 향연이 발휘되는 글들이 빼곡하다. 가령 '쾌락 누리기'란 챕터를 보자. 이 챕터에서 저자는 염려와 쾌락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며 염려 자체는 쾌락의 완전한 향유를 추구한다는 주장을 편다. 쾌락을 이야기한 저자는 고통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저자에 의하면 고통의 일시적 자극이 없으면 삶에는 쾌락은커녕 활기조차 없다.(82 페이지) 이 챕터에 다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에 의하면 두 명의 개별자는 각자 자신의 고통에 골몰한다.(93 페이지) 저자는 근본적으로 고통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파괴적인 방식과 생산적인 방식이 그것이다. 이 두 작용 방식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저자는 우리는 근대가 고통을 추방했을 뿐만 아니라 죽음조차 망각했다는 이야기를, 다시 말해 죽음이 근대적 삶으로부터 제외되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말한다.(99 페이지) 저자는 한계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죽음과 친밀해지는 무엇보다 삶을 위해 자유로워지고 죽음을 가볍게 해주는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105 페이지) 저자의 글은 일상적인 것들 가령 시간 사용하기, 부정적으로 사고하기,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등에 대한 방법을 알리는 글들이다. 그러면서도 철학자들의 사유를 곁들인 글들이기에 품격이 있다. 격정을 다루는 분노의 기술은 또 어떤가. 이것 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칸트는 걱정과 열정을 구분한다. 격정은 순식간에 분출하여 주체가 한 순간 완전히 당황하게 된다. 열정은 지속적이어서 주체의 태도의 구성요소가 될 수 있다.(145 페이지) 저자는 분노를 얕잡거나 무시하는 것 모두 실수라 말한다.(154 페이지) 내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주제는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마음의 평정이다. 파토스를 떨쳐버리지 못한 채 새로운 시대의 지배적 가치평가 및 건너편에서의 당당한 마음의 평정에 대해 강력한 지지 의사를 표하고 마음의 평정의 요소로서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주장한 사람은 니체이다.(202 페이지) 하이데거는 자연스럽게 극동의 성현의 가르침에 눈에 띌 정도로 접근해 좌선 같은 것에서 마음의 평정을 얻는 방법을 찾 기도 했다.(203 페이지) 저자는 마음의 평정은 삶의 기술 철학이 기초 닦기를 촉진하는 새로운 삶의 테크닉에 기여한다고 말한다.(206 페이지) 저자는 뜻 밖에 행복에 대한 질문은 인간들을 안절부절 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267 페이지) 저자는 아름다움에 이끌리지 않는 삶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묻는다.(284 페이지) 저자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현존재는 심미적인 즉 긍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현상으로서만 정당하다는 것이다.(29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긍정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은 참된 삶이다.(295 페이지) 내가 저자에게서 읽은 바는 아름다움에 대한 긍정, 고통을 배제하지 않는 적극적 삶의 자세이다. 열정적 태도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저자의 치밀한 사유를 따라가려면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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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책이다. 비단, 책의 내용이 너무나 훌륭해서라거나 책 표지나 디자인이 이뻐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그 의도가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대해 다루는 수많은 학문 중 철학이라는 분야는 너무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이 중요한만큼 한국 사회에서는 철학이 너무나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으로 비추어져 그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하고 있다. 즉, 철학이라는 학문이 쌓아올린 벽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머물러 있어야 할 철학이 사람들과 유리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정 속에서 이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는 참으로 특기할 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우리가 철학이라는 화두를 다룰 때 가장 처음, 그리고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어려운 철학자의 이름을 쭉 나열해두고 그 이름들부터 구분하는 것이다. 주지의 사실처럼 철학자들의 경우 동양보다는 서양의 철학자들이 널리 알려진 경우가 많고, 안타깝게도 이들의 이름이 대동소이하여 비슷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실정 속에서 우리가 철학자들 이름을 쓸데없이 외우다 진정 그 철학자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어떻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는지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촌극이 벌어지고 만다. 그것이 한국 사회의 철학 교육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시도와는 애초에 나뉘어져 있다. 오히려 철학과 우리 삶의 밀접한 연관성에 관해 지속적으로 말하면서 책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철학이 우리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게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인 것이다. 철학이 어떻게 우리의 삶과 연계되는지를 밝히기 위해 이 책은 철학이 얼마나 삶과 결부되어 있는 것인지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쫓아가다보면 자연스레 삶에 대해 고민하는 결과를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과정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책으로 누가 읽어도 철학과 삶에 대해 진정한 공부가 될 것이라 믿는다. 한번쯤 이 책을 통해 철학이 어떻게 우리 삶으로 치환되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일독을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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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없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깊은 허무에 빠진다. 이 책은 자기만의 삶의 개념을 찾기 위해 철학적 사유가 필요하다고 설명하는데, 그 개념이 무엇인지를 단박에 알려주기보다는 시간, 죽음, 습관 등 일상적인 관념을 사유함으로써 스스로 찾아가도록 안내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의미있는 사유를 권한다는 면에서 상당히 추천할만한 주제이기는 하나,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일단, 개념언어가 너무 복잡하게 서술되어 가독성이 떨어집니다. 독일어 원문 서적의 한계일 수도 있는데요, 이처럼 낮은 가독성은 입문서를 원한 독자에게는 지나치게 높은 진입장벽이 될 것 같습니다. 한편, 어려운 개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으려는 사람이라면 관념적 사유에 목마른 독자겠지요. 그와 같은 독자층에게는 이 책과 같은 입문서가 성에 차지 않을 테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문명에서 점차 개인화 원자화 되고 있는 소외된 자아를 회복시키려고 안간힘 쓰며 출구를 찾는 많은 독자들에게 의미있는 등대는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추천까지는 못하겠네요. 만약 이 책의 서문을 제가 쓴다면 아래와 같이 쓰겠습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고백을 합니다. 긴장이 풀리는 술자리에서 각자 자기 인생의 고난과 역경을 늘어놓고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설명을 보완하고 수정하는 과정이지요. 확신할 수 없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이어지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창조하지 않았으며, 이유를 모른 채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살아도 죽어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허무감에 시달린다면 일상을 벗어나는 새로운 행동을 해야 합니다. 반복되고 멈추어 있는 것은 죽음이죠. 일상적인 것에 의문을 가지고, 그 의문을 풀기 위한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충격을 받고, 또한 충격을 받아들임으로써 삶에 다양한 의미가 분비되고 번식되면서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삶의 핵심은 변화에 대한 수용성이죠. 수용하지 못하면 경험은 번식되지 못하고 여전한 죽음의 상태가 계속될 뿐이니까요. 삶의 고통을 되도록 줄이고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하는, 그리고 이 혼란 속에 자문자답을 이어가는 과정이 바로 철학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 자체를 폄하하면서 되는 대로 열심히 살기나 하라는 위험한 조언을 하는 세 무리들이 있지요. 첫 번째는 회의주의자들. 본질도 없고 실체도 없는 이상한 생각이나 해봤자 머릿 속만 복잡해진다는 말이 대표적인 예 입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의식에 의문을 제기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새로운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철학적 사유를 가로막는 두 번째 무리는 상대주의자들입니다. 너만 그런 생각 하는게 아니야, 다들 그렇게 살아! 상대주의자들의 조언을 따른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들을 상대적인 것으로 환원함으로써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어지지요. 이 상대주의가 지속되면 소극적 허무주의에 빠져들게 됩니다. 철학을 가로막는 세 번째 조언인 소극적 허무주의는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송충이는 솔잎 먹고 산다 괜한 짓 하지 말라는 식이랍니다. 이런 조언들은 삶을 단조롭게 만들면서 무조건 견뎌야 하는 짐으로 만들지요. 비교하자면, 철학하는 삶이 다양한 미생물을 번식시켜 숲과 들판을 만드는 반면, 회의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허무주의는 삶을 무균실로 만들어 옴짝달싹 못하는 병실 안으로 감금시키는 셈이죠. 철학적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의문을 가지고(사유)+새로운 경험을 하며(행동)+경험에서 오는 충격을 받아들이는 것(수용성) 입니다. 사유와 행동은 상호촉발 작용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주의와 허무주의, 회의주의는 사유과 행동 중에 하나를 억누름으로써 철학을 방해합니다. 철학을 방해하는 조언을 정중히 물리치고 행동하고 경험하기 시작했더라도, 그 충격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이 꼭 필요한 이유이지요. 그런데 수용성을 갖추기란 꽤나 어렵습니다. 왜냐, 살아온 시간 동안 누적된 기존의 개념들이 변화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죠. 아름다운 풍경을 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느껴지는 것은 감각입니다. 감각은 일순간 흘러가는 한 장면이예요. 순간적인 감각을 단지 느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 내면에 의문을 던짐으로써 스스로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 수 있고, 이 과정을 통해 일순간의 감정은 새로운 개념으로 탄생합니다. 개념은 삶을 인식하는 도구이며, 이 개념이 다양해질 수록 삶의 다양한 맛과 향으로 풍요로워집니다. 개념이 박멸된 삶은 의미없는 감각만이 초파리처럼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장면과 같죠. 날아다니는 초파리를 아름답게 바라보라고 윽박질러봐야 아무런 효과가 없어요. 애초에 향기를 키우는 옥토를 만들었어야 꽃이 피는 법인데, 가꾸지 않아 버려진 토양에 무엇을 기대하겠는가요. 오히려 버려진 땅임을 뼈아프게 인식하는 편이 변화로 가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개념을 키우지 못한 사람은 부박한 삶의 이야깃거리들과 향기 잃은 정신적 영토를 직면할까 두려워한 나머지 외부의 자극에 정신을 집중하지요. 그럴수록 삶은 더욱 단조로워지고요. 집에 돌아오면 깊은 허무에 빠지고, 그래서 다시 밖으로 나서고, 종국에는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어지는 지경에 이르지요. 개념 없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깊은 허무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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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을 위한, 삶의 기술이란 무엇일까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 ![]() ** 철학이라고 하면 언제나 낯선 학문에 비하지 않았다. 그 세계는 실로 방대하며, 거칠게 말하면 어렵고 딱딱한 개념과 이론들에 섣불리 다가서기 어려운 장벽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내 삶에 던지는 여러 질문들과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아 방황할 때 찾게 되었다. 이는 요즘 '자존감' 이라는 게 주요 화두가 되는 것처럼, 척박한 현실에 곤궁한 삶을 살아갈수록, 지치고 피로함에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의문이 지속될수록 '나'와 나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힘든 나날이 지속되어 회의와 무력감, 공허가 동시에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이에 영혼의 치유사라 불리는 독일의 한 철학자의 삶의 기술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호기심과 기대가 일었다. 저자인 빌헬름 슈미트는 고대 철학에서 비롯한 삶의 기술을 현대에 끌고 들어와 말한다. 고대 철학에서 비롯되었듯이 철학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근대에 들어 탐구와 이론 연구에 몰두하여 멀어진 철학은 실은 삶을 더 잘, 그리고 아름답게 가꿔나가기 위해 접목되었던 것들이었음을 말이다. 이 책은 저자의 이전의 저서『삶의 기술 철학』의 요약본과 같은 책이라 볼 수 있겠다. 일종의 입문서 역할을 해주는 게 아닐까 싶다. 삶의 기술에 대한 그의 저서가 당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니 그것도 놀랍고 신기하기도 했다. 삶의 기술을 새롭게 정초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전제 역시 중요한데, 선택의 여지와 가능성들을 열어주며 소망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며, 단순히 내용을 확인하는 게 아닌 가능성을 밝혀내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일어난 일을 이해하고, 한 개별자가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가지고 있지 않는지 이해하는 데는 철학적 행위가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는 의식적인 삶의 운영을 위해 근거와 논증을 탐구하고, 개념들을 해명하고, 구조와 그것에 근본적으로 연관된 사항들도 발견하고, 조건과 가능성을 분석하는 것 등의 행위를 이른다. 바쁜 삶을 살아가다 보면 사유하는 것이 사치로 느껴질 때가 있다. 진정한 사유를 해보는 시도도 극히 드물며, 그러한 사유라는 것을 잘 알지도 못한 상태로 말이다. 그러기에 더더욱 고요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도를 해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자가 시도에 대해 말했듯이. 근본적인 것에 대한 물음이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혼란에 이른 게 아닐까 싶다. 아름다움에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직도 잘 해소되지 않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름다운'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실존에 개입하고, 실존을 의식적으로 수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개인의 삶은 물론 타자들과의 사회적 공생에 힘쓰게 한다. 호퍼는 한 작품 안에 얼마나 많은 사상과 자극이 들어가 자리를 잡는 지에 말했다. 때문에 그의 그림은 삶의 문제를 제시하기 위한 공간 같은 것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들어가는 글부터 등장하는 호퍼의 그림은 저자가 삶의 기술에 대한 초입을 다지는, 왜 삶의 기술이 필요한가, 어떻게 철학과 접목되어 왔는가, 그 기본 바탕에 무엇이 있는가를 설명하는데 좋은 예시가 되어주는 듯 하다. 덕분에 호퍼의 그림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나에게도 새로 그 매력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 삶은 쾌락과 고통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쾌락은 고통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고통의 기능이랄까, 피력되는 것들이 흥미로웠다. 고통을 겪음으로써 관계 혹은 상실에 대한 염려를 하게 되고, 조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통에 점령된 탓에 외부세계는 무의미로 가라앉아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됨으로써 파괴적인 작용을 하고, 내면세계가 새롭게 생성될 수 있기 때문에 생산적으로 작용된다 볼 수 있다. 고통으로 인해 넘치게 된 상상력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꿈꾸는 걸 살아있는 동안 실현해내려 한다. 이를 위해선 한계 설정이 필수 요소인 것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을 살아가기를, 그것도 실속 있게 살아가기를 종용하게 된다. 이렇듯 삶의 한계는 삶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이 되어주는 것이다. 또한, 죽음에 대해 반복적으로 생각함으로써 공포심을 버리게 되고, 후회 없는 살아가게 되면 홀가분한 죽음을 통해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통해 고유의 삶을 살게 된다. 시간의 가위라는 비유에서, 시간의 가위가 닫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시간을 이용함으로써 최선의 가능성이 파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수많은 가능성들과 과거가 되어버린 낡은 현실들이 쌓이게 되는데, 현재는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시간인 동시에 큰 난관이라고 한다. 가능성에 비해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유용하게 쓰기 위한 분할 및 배분을 잘 해야 한다. 당장 할 수 없는 것들은 나중에 올 기회를 위해 유예하고, 지나가 버린 시간의 고통을 인식하여 앞으로의 시간을 잘 쓰기 위해 노력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말한 시간이 충만한 시간이라면 빈 시간도 존재하는데, 이는 그냥 흘러 보내는 시간을 말한다. 나태할 수 있는 시간, 산책, 사유 혹은 좋아하는 취미를 하는 시간이라든지, 아니면 미래를 위해 투자할만한 것들을 하는 시간이라든지. 분노, 내지 격정과 감정 요소 하나 하나 삶의 기술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분노에 대한 여러 요령들이 있는데, 사전 숙고, 분할, 유예, 분산, 유도, 다른 쪽으로 돌리기, 보상, 승화 등이 있다. 분노를 결코 얕잡아 봐선 안된다. 분노는 선량한 것을 방해하는 가시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실망을 낳지만,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긍정을 낳게 된다. 가장 좋지 않을 경우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정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에는 긍정적 사유 방식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고대에 말했던 행복에 대한 것들은 현재에 적용하기에 맞지 않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방법을 찾아 나서야 한다. 실존의 해석학 작업이 필수적인데, 자기 자신과의 대화, 타자들,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시도해보게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 이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앞서 사유하던 문장들이 끊임없이 전복하며 진행되는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낀 어려움을 떠나 매우 유익한 책이었다. 실존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사람이라면, 나의 삶을 점검하고 사유하고 잘 살아가고픈 사람이라면, 일말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무심히 흘러 보내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사유함으로써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여러 시도들을 통해 경험이 쌓이면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역자의 세심한 각주는 나와 같은 초보자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라 별 언어의 뉘앙스가 다르듯 어떤 개념을 말할 때의 용어를 어떤 것들로 대체하였고,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 배경지식 부가 설명 같은 것들도 덧붙여서 친절한 안내를 더해 주었다. 저자의 글은 잊고 지냈던 요소 요소들을 하나하나 삶의 기술로서 복원시키는 작업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시 같이 아름다운 문장들도 많았다. 삶의 기술의 목적은 결국, 지극히 난관으로 가득찬 이 삶을 바르게 끌고 가기 위한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 삶에 던지는 미로 같은 질문들의 답은, 나를 잘 알아가고 삶의 기술을 터득함으로써 얻어지는 것들에서 찾아가는 것 같다. 본래 생각해왔던 것들과 비슷한 지점도 있었고, 전혀 낯설게 보는 방식에 놀랍고 신기한 부분도 있었다. 일회성이 아닌 반복해서 좋은 습관으로 활용하여, 삶의 기술을 하나씩 배워나갈 수 있는 사유 또한 이어나가야 겠다.
( 이 리뷰는 책세상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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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석학 빌헬름 슈미트는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철학과 역사를 공부했고,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독일 에르푸르트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한편, 왕성한 집필과 강연 활동을 통해 현대 철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에드워드 호퍼, '철학으로의 소풍'(Excursion into Philosophy) (1959), 개인 소장
저자는 호퍼의 그림 '철학으로의 소풍'으로 시작한다. 이는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Las menias)로 이야기의 출발점을 삼았던 방식과 유사하다. 호퍼의 그림에서 여성은 침대 위에서 반라의 상태로 벽을 보고 누워 있고, 남성은 그 옆에 앉아 안으로 비쳐드는 눈부신 햇빛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소통이 단절된, 고독한 실존의 모습이다.
“호퍼는 근대철학이 거부했던 것을 제공한다. 삶의 문제를 제시하기 위한 공간, 정지와 자신과 자신의 시대를 조회하기 위한 공간, 마지막으로 자신에 대한 작업과 삶의 기술을 만들어내기 위한 공간이 그것이다. 현대의 징후는 삶의 기술의 결여이다.” - 38쪽
이제 근본적 질문에 답할 차례다.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이끌 수 있는가? 이것은 윤리적인 근본 질문(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을 삶의 기술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어 나는 어떤 연관 가운데 살고 있는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연관은 어떻게 형성되는가?라는 구조적 질문들을 통해 삶의 기술을 숙고하게 된다. 삶의 기술이 지닌 기본적 특성은 지배적 구조의 지평에서 자신의 고유한 실존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빌헬름 슈미트, 라이프치히 북 페어, 2013.
저자는 ‘삶의 기술’을 통해 궁극적으로 ‘거처’에 도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정한 거처가 없으면 삶이 정돈되지 않고, 주체가 결국 길을 잃고, 특정한 장소만을 오가면서 파멸로 드러난 습관을 통해 자신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삶의 기술은 이것을 전제로 실존의 미학에 대한 작업을 통해 삶을 ‘더욱 아름답게 할’ 수 있다. 삶의 기술은 열거된 관점들을 배경으로 스스로에게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삶이 긍정할 만한 가치를 가지도록 만든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것을 위해 자신과 자신의 삶에, 타인들과 함께 하는 삶에 그리고 그런 삶을 조건짓는 관계들에 대한 작업을 행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 297쪽
나아가 삶의 기술 차원에서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위기들, 가령 쾌락, 고통, 죽음, 분노, 멜랑콜리와 불안 등을 조망한다. 이어 시간 사용, 시도하기, 반어의 기술, 부정적 사고, 마음의 평정 등을 다루는 대응 기술을 소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