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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이란 무엇인가'를 읽기 전에 공에 대해 아는 바를 정리 해보았다. ‘공은 대승불교의 주요 개념어로 사물이나 사태에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상의상관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연에 의해 생기(生起)하는 것이기에 연기(緣起)와 다르지 않다. 눈에 보이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實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과 무아(無我)와 실체 없음, 연기가 함의하는 바는 같다. 유교 형이상학에서 불교의 공에 대항에 만든 개념어가 이(理)이다. 금강경은 공을 설한 경전이지만 공이란 단어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등등... 책을 참조하지 않고 내 기억 속에서 꺼낸 것이기에 어색하고 불완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영민 교수의 ‘보행’이라는 책을 펴보니 일지(一指) 스님의 ‘중관불교와 유식불교’가 인용되어 있다. 공은 무(無)가 아니라 모든 현상이 상호 연계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운동, 변화하는 존재의 성격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일지 스님은 중관불교의 공사상은 결코 허무주의가 아니라 가르치신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통해 우리는 공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龍樹)의 ‘중론(中論)‘에서 공은 이렇게 설해졌다고 한다. “있다 함은 상주(常住)에 집착하는 편견이다. 없다 함은 단멸(斷滅)에 집착하는 편견이다. 그러므로 지자(智者)는 유(有)와 무(無)에 의지해서는 안된다.” 공을 유무중도의 사상이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런 기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공은 불교적 개념이지만 철학적 뉘앙스가 강하다는 점이다. 그린비에서 나온 개념어 총서 중 세 번째 책인 ‘공이란 무엇인갗는 젊은 학자인 김영진 교수의 책이다. 저자에 의하면 연기법이나 공은 이런저런 실체론적 기대를 함으로써 우리를 사고와 습속과 감정에 속박되도록 하는 잘못된 시선을 교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가르침이다. 저자는 공 개념은 모든 존재자는 서로 의존해서 발생한다는 연기법을 기반으로 출현했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공 개념이 “대단히 철학적으로 보이다가도 느닷없이 알상으로 밀고 들어온다”는 말을 하는데 그렇게 일상으로 밀고 들어오는 용어들 중 대표적인 것이 공허하다는 말일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란 공허하다거나 허무하다거나 하는 의미를 내포한 말이 아니라 존재를 위해 자신 외에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실체가 없다는 뜻이고 그런 점에서 모든 존재자는 공하다는 말을 할 수 있다. 모든 존재자는 공하다는 이야기는 희망적인 메시지는 아니지만 절망의 선고도 아니라는 저자의 이야기는 수긍할 만하다. 저자는 공하다고 해야지 공이 있다고 말하면 공을 실체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한 것을 공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 즉 저자의 말대로 어떤 사실이나 감정을 고정된 무엇으로 간주하는 것을 집착이라 한다. 불교의 공사상에 의하면 절대자는 존재할 수 없다. 존재라는 말에 나는 송희식 변호사의 ‘존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책을 떠올린다. 이 책에서 저자는 존재라는 단어를 실체라는 의미로 썼다. 존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는 삶이 공하지 않다고 보는 망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즉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김영진 교수의 설명에는 불교는 불변의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진여(眞如)와 진아(眞我) 등을 설정하고 이와 하나가 되려고 하는 일부 힌두화한 불교인들이 들으면 좋을 말이다.(내가 각묵스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은 것은 지난 2003년 아비담마 강좌에서였다.) 아비담마는 초기 불교의 논서(論書)로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 열반 등을 궁극적인 실재(實在)로 본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오온(색이라는 물질과 수상식행이라는 마음) 역시 비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오온개공(五蘊槪空)이라는 반야심경의 구절이 이를 증거한다. 이점이 부파불교(또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이다. 양측 모두 인간의 자아 없음을 인정하지만 그 구성 요소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른 것이다. 책 초반부에는 나가르주나의 ‘중론(中論)’ 중 유무중도의 공사상에 대한 가르침이 나오는데 이때 중(中)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란 뜻의 비유비무를 의미한다. 의존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두고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러려면 실체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연기하고 있음을 투철하게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존재냐 비존재냐 하는 물음에 빠지지 않는데 이런 태도가 중도라는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목숨 바쳐 부처님께 경배했다고 한다. ‘중론’에는 팔불중도(八不中道) 이야기가 나온다. ”발생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고, 항상(恒常)하지도 않고 단절(斷絶)하지도 않고, 동일(同一)하지도 않고 상이(相異)하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온갖 희론(戱論) 없애며 상서(祥瑞)로운 연기법을 가르쳐 주신 가장 뛰어난 스승이신 부처님께 저는 머리 숙여 경배합니다...” 나가르주나는 4구부정(四句否定)의 변증법을 사용한다. 지금 비가 내리는 경우를 보자. 어떤 비가 내리느냐는 질문에 내리는 비가 내린다고 하고,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고 하고, 내리면서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고 하고, 내리는 것도 아니고 내리지 않는 것도 아닌 비가 내린다고 한다. 내리는 비가 내린다고 하면 중복의 오류로 비가 두 번 내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고 하면 사실에 위배된다. 내리면서 내리지 않는 비가 내린다고 하면 상호 모순되는 두 가지 사실이 존재하는 모순 판단이 된다. 내리는 것도 아니고 내리지 않는 것도 아닌 비가 내린다고 하면 무인론(無因論)이 된다. 이는 씨앗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응용할 수 있다. 대단히 철저한 논파(論破)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존재자에서 존재나 비존재를 보아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의도이다. 저자에 따르면 공은 노자(老子)의 미분화(未分化)한 시원(始源)도 아니고 허무적멸(虛無寂滅)의 어떤 것도 아니다. 태초의 혼돈도 아니고 신(神)도 아니다. 그리고 장(場)이나 에테르 같은 현대물리학의 개념과 견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근원도 아니다. 나가르주나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다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에서 실체론적 기미(氣味)를 읽어냈다. 대단하다. ‘이것’도 온갖 인연에 의해 구성되기에 ‘이것’이라 규정할 만한 것이 없고 ‘이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있다는 판단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연기법을 폐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심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말이다. ‘중론(中論)’은 유위(有僞) 즉 조작된 것의 특징을 생성, 지속, 소멸로 보았다. 그런데 생성에도 생성, 지속, 소멸의 세 특징이 있고 지속에도, 소멸에도 각각 세 특징이 있다. 생성의 생성에도 세 특징이 있고.. 이런 식으로 무한 소급이 일어난다. 연기법에서 실체론적 기미(氣味)를 느낀 나가르주나는 생성, 소멸의 무상(無常)의 원리에서도 실체론적 함의를 느낀다. 나가르주나가 비가 내린다는 문장을 파고 든 것은 이 문장에서 실체론적 함의(含意)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는 실체론에 기반을 두는 체계이다. 책을 계속 읽으면 알겠지만 저자의 글은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을 다룬 것이기에 그만큼 철저하고 치밀하다. 저자의 논의는 간화선(看話禪)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간화선은 세상의 모든 익숙한 것들에 대해 의심하는데 그 의심은 당연히 언어에 대한 것을 포함한다. 선(禪)의 신비주의이냐 아니냐는 논의는 새롭지 않다. 변상섭 선생은 선이 신비주의가 아니라 철학이라 정의했는데 성해영 교수는 선이 깨달음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직관적 통찰과 앎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양 신비주의와 일맥상통한다는 말을 했다.(‘문명 밖으로’ 324 페이지) 반면 김영진 교수는 공은 일상의 언어를 부순다는 점에서 초월적이지만 그것을 넘어선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에 초월적이지 않다고 정의한다. 저자에 의하면 불교에는 신비주의적 요소가 있지만 초월자와의 만남을 갈구하는 종교와 차별되기에 신비주의는 아니다. 성해영 교수와 김진영 교수가 내세우는 논의의 층위는 다르다. 도정일 교수는 문학적 신비주의의 두 형태라는 글에서 신비적 실재에 대한 믿음 때문에 신비주의는 인간의 역사 현실과 모든 형태의 역사적 담론들을 미망(迷妄), 환각(幻覺), 비실재(非實在)로 분류하여 혐오(嫌惡)와 타기(唾棄)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게 된다는 말을 했다.(‘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109 페이지) 도정일 교수는 신비적 사유가 신비주의로 타락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나가르주나는 모든 것이 공하다면 불교 뿐 아니라 현실 세계도 붕괴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세상을 향한 가르침인 세속제(世俗諦)와, 이름이나 형상 등의 개념적 체계를 벗어난 진리인 승의제(勝義諦)를 구분한다. 나가르주나는 두 가지 진리를 구별하지 못하면 심오한 불법의 진리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중론(中論)’은 살가운 경전이 아니다. 공의 가르침을 얻으려면 금강경 같은 경전을 읽으면 도움이 된다. 저자에 의하면 금강경은 공이란 표현 대신 무주(無住) 또는 부주(不住)라는 단어를 썼다. 머물지 않는다는 의미로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저자의 가르침 중 눈에 띄는 것은 성자는 세속을 벗어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세속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문제의 한복판에서 그 문제를 적나라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수행이란 것이 감각의 무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설명에 힘입어 나가르주나의 가르침을 들으니 비로소 공의 논리가 친근하게 다가온다. 저자는 삶이 공하듯 죽음도 공하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열심히 살 것을 다짐하는 것일 테다. ‘공이란 무엇인가'는 얇은 책이지만 생각 거리가 많은 책이다. 많은 사유와 깊은 독서 끝에 나온 결론이다. 김영진 교수의 책을 읽고 ‘중론’을 읽어볼 생각을 했다. 저자에게 감사한다. http://blog.bandinlunis.com/bandi_blog/document/45374208 http://www.texter.co.kr/04_review/review2_board_view.php?no=10361&page=1&id=texter&book_no=7938&parent=&nadomd=&page2=&category=&category2=&cate=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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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는 부파불교가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을 왜곡했고 중생구제라는 불교적 가치를 성공적으로 실현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출현했다. 대승은 큰 수레라는 의미다. 기존 불교를 작은 수레 불교라고 놀렸다. 대승불교인들은 자신은 더 많은 중생을 구제한다고 했다. 이때 반야경으로 대표되는 대승경전도 출현한다. 공사상이나 보살 개념은 대승불교의 기존 불교에 대한 차별화 선언의 일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