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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 리뷰 -엄마되기, 더 이상 아프거나 미치는 일이 되지 않길 바라며.
우리는 여자이다. 꿈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이가 있어 오로지 ‘엄마’가 되어야 하는 여자이다. 학위 논문을 쓰는 동시에 아이를 배고 집안 일, 학교 일에 이리저리 치이고 울면서 결국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잃게 되는 여자이다. 그리고 이런 여자를, 아이를 가진 엄마답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것도 역시나 여자이다. <엄마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에서 저자는 전문인인 동시에 ‘엄마’로써 살아가면서 세상이 만들어 놓은 문화 안에서 아프고 미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나 ‘엄마 됨’을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 주부들의 실제 인터뷰를 늘어놓고 있다. 그리고 도대체 무엇이 여자=엄마라는 공식을 만들어 내었는지, 우리는 도대체 어떠한 문화적 전제 안에 살아가길래 엄마는 아프거나 미쳐야 하는지 말하고 있다. 제 1부에서는 제목 그대로 한국 개신교 여성 두 세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저 전업으로 엄마가 되는 것이 당연시 되었던 저자의 어머니 세대와, 전문인이면서 엄마 됨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저자세대로 나뉜다는 것이다. 저자의 어머니 세대는 최초로 전업주부가 탄생했던 시기였다.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더 좋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공부하던 시대였다면, 반대로 저자의 세대는 여자에게도 좋은 학벌, 좋은 직업, 전문인이 되는 것을 요구하면서도 그 요구는 정확히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기 직전까지라는 모순이 가득한 시기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제 2부에서는 다양한 엄마들의 사례가 실려 있다. 그리고 그 사례마다 엄마를 수식하는 수식어구가 붙어있다. 모성결여형, 자격미달형, 자유부인형, 무한책임형, 천상소망형, 지상명령형. 일하는 엄마는 죄인이며 대치동 유명학원 정보를 알아보지 않는 엄마는 엄마로써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신앙이 있으면서 동시에 성취동기가 높은 엄마들마저 문화적 힘 앞에 굴복하고 결국은 엄마 됨을 우선순위에 놓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저자는 모성이 무조건 없다고 외치는 페미니스트와는 달리 아이를 낳고 난 뒤 느끼는 기쁨, 안고 있는 아이를 보며 감격하는 것은 저자 안에 분명히 무언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제 3부에서는 실제로 이러한 ‘엄마’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 사회적인 현상을 설명한다. 17세기가 지나고 갑자기 ‘모성’이라는 것이 등장하면서 민족국가의 탄생으로 재생산이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이유를 들며 여자는 어느새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에만 힘써야 하는 시대가 오기 시작한다. 또한 산업화와 관료제가 시작되면서 사적영역, 공적영역이 이분화 됨으로 인해 전업주부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적영역에서의 여자의 희생은 점점 더 커지게 되고 사회는 이를 ‘엄마’라는 이름으로 낭만화 시켜버리고 만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적으로 어느새 유교가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자기희생’을 여성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게 된다. 결국은 그렇게 시작된 ‘엄마’가 아직도 21C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이다. 제 4부에서는 이러한 여성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사회제도 자체부터 개혁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한 특정 문화적 전제를 오랫동안 지니고 있는 사회는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이런 전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희생이 되는 여성들이 직접 나서야 하며 공적 영역과 사적영역의 칸막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결국 저자가 말한 대로 제도를 바꾸려면 그 삶을 선택하는 이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엄마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결혼, 그리고 출산, 게다가 딸 둘이 있는데도 막둥이 아들을 낳아야만 했기에 엄연한 전문인이었던 엄마도 어느새 ‘엄마’임을 택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그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막둥이가 등교하기 전 교복에서부터, 양말, 실내화 주머니를 챙겨줄 때까지 한 숨 돌릴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엄마이다. 절대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도 우리 엄마만큼은, 모두가 그래야 한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런 ‘엄마 같은’ 엄마이기를 바라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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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혼해도 엄마만큼 엄마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때로는 주말도 없이 온종일 직장에서 일을 하시고 집에 오셔서는 편히 쉬지도 못하고, 집안에 쌓여있는 빨래며 설거지를 하느라 분주한 엄마를 보며 나는 항상 안타까움 반 미안함 반으로 말하곤 했었다. 아빠가 비교적 근무시간이 자유로운 직장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종종 집안일을 돕지만 그럼에도 엄마가 감당하는 집안일의 규모와는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한편 어린 시절, 초등학교 운동회 날이면 여러 엄마들이 맛있는 김밥이며 간식을 준비해 와서 운동회에 참여하는 친구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엄마는 지금쯤 일하느라 바쁘시겠지?’하며 그 모습을 부러워 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보다 나를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에 나를 보러 오지 못해 더 미안해하고 속상해하셨을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이 핑 돌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 집의 경우만 보아도 엄마를 떠올리면 항상 분투하면서도 힘들고,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지 못한 채 열심히 살아나가는 이미지인데 다른 가정의 엄마들은 어떨까? 하는 궁금함이 생기던 차에, 우연처럼 그리고 운명처럼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상과 앞으로 우리가 꿈꿔야 할 세상을 담은 책이다. 가장 먼저 책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엄마들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자아와 상충하는 현실에 엄마로서의 자격이 없다며 자신을 결론짓는 모성 결여형, 엄마로서 한없이 부족하다며 자신을 자책하는 자격 미달형, 자신은 가정이나 육아에는 소질이 없다는 자유 부인형, 온전히 ‘나’로서 의미를 추구해나가는 공적 영역도, ‘엄마’로서 ‘아내’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사정 영역도 놓을 수 없다는 무한 책임형, 자신에게 주어진 ‘엄마’의 역할은 하나님이 주신 절대적인 것이라 여기는 천상 소명형, 오직 ‘엄마’로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지상 명령형의 엄마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어떻게 이런 엄마들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알기 위해 책에서는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원인을 찾기 시작한다. 석기시대, 육아 때문에 수렵채집활동에 참가하는데 많은 불편을 겪은 여성들이 자연스레 남편에게 바깥일을 의지하고 대신 집안일을 맡게 되면서 정착된 ‘가부장제’는 그 후로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시대의 산물이다. 이후 시대가 흘러 산업혁명을 거친 근 ·현대사회에서 자본주의 가치관이 자리를 잡으며 관료화,분업화를 통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이때 여성들은 공적영역에서 열심히 살아가며 지친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감싸줄 사적영역, 즉 가정을 온전히 담당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여기에 성경에 명시된 대로 여성이 남성의 ‘돕는 배필’임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가치관은 신의 이름으로 가정적인 여성이 ‘소명’임을 강조한다. 이런 사회의 흐름들이 양성평등이 많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여성들을 아프거나 미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일례로, 사회를 가장 잘 반영한다는 ‘드라마’에서도 여성에게 온전히 가정에 충실한 역할을 기대하는 편견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몇 주전 방영된 주말드라마 <보석 비빔밥>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4남매 중 셋째 아들 ‘산호’와 결혼한 아내 ‘강지’, 즉 집안에 새로 들어온 막내 며느리는 결혼 후 한동안 고시생 남편을 위해 세끼 식사도 준비해주고 이런저런 집안일을 한다. 그러나 집에서 살림만 하자니 학생 때 열심히 공부했던 자신이 그리워졌고, 이렇게 살면 점점 머리가 텅 빌것만 같다며 아르바이트라도 해보고 싶다고 남편에게 말을 꺼냈다가 남편 산호에게 “궁산호 와이프, 이 이름으로 사는 건 성에 안차?”하며 싫은 소리를 듣는다. 서로 배려하고 아끼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신혼부부에게도 아직도 이런 현실적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나를 충격에 빠뜨린 장면이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책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기독교적 가치가 가부장제와 결합되어 여성들에게 옛 시대 청교도적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지만, 참된 기독교적 신앙 구현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룩한다면 그 안에서 고통 받을 엄마(여성)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차등적인 존재가 아니라, 함께 지어져 나가는 존재라는 것. 그러한 신앙관에서 공존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구현이라고 표현하면서 말이다. 책에서 사례로 제시되듯 프랑스에서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여성들의 삶이 이미 보장되고 있는 것이기에, 대안적 제도는 우리나라와 다른 사회에도 존재 가능하다. 이러한 제도구현이 필요한 것은 비단 여성들만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이 땅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어머니’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이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또 태어난 이들이 언젠가는 부모가 될 것이기에 여성들의 고통은 비단 ‘남’에게만 국한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대학 초년생으로 어린 나이지만, 이따금씩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 하고싶은 일을 마음껏 해 나가면서도 아이를 잘 길러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 고민이 단지 나 혼자의 생각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면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책에서 꿈꾸는 세상으로 변하기까지가 쉽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장차 가정을 이룰 가능성을 지닌 여성으로서 나는 ‘온전히 나로서 나다운 삶’을 구현하기 위해,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잘 해내는 삶’을 구현하기 위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생각에 합류하고 싶다. 또한 책에 나오는 것처럼, “그 때는 정말 여자 혼자서만 아이를 키웠었나요?”하며 놀라워할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세상으로의 변화됨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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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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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는 아내이자 크게 풍요롭지는 않지만 딱히 부족하지도 않은 집의 전업주부인 동시에 별 탈 없이 잘 크는 딸 하나를 둔 엄마, 환경도 환경이지만 항상 낙천적인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큰 나로서는 이 땅의 다른 엄마들에 대하여 심도 있게 생각해 볼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자신에게 닥치지 않고서는 공감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인간의 전형이랄까. 하지만 머리가 커지고 나서 엄마와 심도 있는 대화를 하는 횟수가 잦아지고 결혼을 하면서 엄마가 해야만 했던 선택들과 이루지 못한 꿈, 자신의 일을 계속하지 못한 후회에 대하여 담담히 이야기하는 엄마를 보면서, 주변에 결혼하는 언니들이 늘어가면서, 그리고 점차로 나에게도 이 사회의 한 여성으로서의 선택의 순간들이 찾아오면서 현대사회를 사는 일명 '차도녀'들이 그 차가운 일면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면으로는 얼마나 많은 갈등과 싸워야 하는지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 와중에 읽은, 이하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이 책을 한 가정 안의 여성으로서의 의무감과 사회의 한 부분이 되고자 하는 사회인으로서의 열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들과 나누고 싶다. 단지 위로를 받고픈 사람에게도, 너무나 억울하여 대체 여성에게 이리도 가혹한 사회는 어디에서 왔나 조목조목 따지고 싶은 사람에게도, 세상 모든 여성들을 위해 한 차원 높은 문제의식을 갖고 싶은 사람에게도 두루 권하고픈 책이다. '한국 개신교 기혼여성의 모성 경험'이라는 부제에 멈칫하지 않아도 된다. '개신교'와 '기혼' 보다는 '한국여성'에 초점이 맞춰진 책이니. 다양한 경험담들과 사례들로 이루어진 1부와 2부는 여러 엄마들에게는 위로를, 미혼이나 비혼 여성들로서는 직면해 보지 못한 문제들에 대하여 생각할 여지를 주며 시작된다. 3부부터는 우리가 때때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그것이 문제라고 인식할 여지도 없었던 문제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돌이켜 보게 만들어준다. 점점 더 호황을 누리는 자기계발 서적 코너의 책들은 성공적인 커리어우먼인 동시에 좋은 엄마이자 아름답고 완벽하여 변치 않는 젊음까지 소유하는 여성이 되라고 우리를 격려한다. 과연 그것이 격려인지 고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현대사회의 여성들은 완벽을 요구하는 사회의 잣대에 자신을 맞추고자 노력한다. 그것이 여성의 일반적인 의무인양 그렇지 못한 자신을 들볶으며 말이다. 이러한 사회의 높디높은 요구와 그에 발맞추고자 하는 여성의 강박적인 의무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한국의 뿌리 깊은 유교사상을 비롯하여 기독교 신자들의 경우에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거시적으로는 사회의 분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의 가치관이라는 문화 전반의 문제점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다양한 관점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현모양처와 열녀를 찬양했던 조선시대, 남편과 아들의 뒤에서 그들을 오롯이 빛내기 위하여 희생해야만 했던 수많은 여성들은 단지 그래야 한다고 사회가 요구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저 계속 그렇게 살았다. 현대적 가치가 등장하는 동시에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며 보다 평등한 사회가 도래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사람의 관념이라는 것이 또 그렇게 쉽게 변하지도 않는다. 여성이 비로소 진출하게 된 공적영역에서는 모두에게 보다 나은 수준의 노동력을 요구하며 경쟁을 시키고 사적영역에서는 예전부터 그래왔듯이 여성에게 모든 역할을 일임한다. 결국 슈퍼우먼이 되는 수밖에 없다. 직장여성으로서, 엄마로서, 한평생 매력적인 여성으로서 살기위해 고군분투하며 나는 왜 그런 여자가 될 수 없나 자학하기 이전에 내가 왜 그들의 모든 요구에 맞추어 가며 불합리하게 살아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하나의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다수의 공감과 희생, 그리고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는 그 모든 틀을 깨는 한 명의 선구자가 없다면 시작될 수 없는 것이다. 보다 나은 삶, 모두를 위한 궁극적인 통합을 위하여 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자세를 갖추는 데에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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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앞으로 내가 살 인생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고민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일단 작년까지는 대입만 바라보고 달리느라 눈앞의 점수 외에는 생각할 새가 없었고, 대학에 진학한 올해에도 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부끄럽지만 해방감과 자유에 도취되어 정신없는 생활로 한 학기를 보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앞으로의 내 인생에 대하여 조금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나는 친구들끼리 나중에 아이를 몇 명 낳을지 수다를 떨 때 자신 있게 난 3명을 낳을 거라고 말해왔다. 3명의 아이들을 정성껏 키우고 자상한 남편과 함께 식구들끼리 행복하게 사는 삶이 예뻐 보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아직 꿈을 확실하게 정하지는 않았지만 당당한 나만의 전문 직업을 가진 여성으로서 남자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내 능력을 발휘하며 멋진 커리어를 쌓아 나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껏 이 두 가지 생각을 끊임없이 해오면서, 정작 두 가지의 소망을 한꺼번에 펼쳐야 하는데 어찌할 생각이냐고 자문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서야 깨달았다. 참 바보같다. 이 책은 어릴 적부터 남부럽지 않게 똑부러지게 열심히 공부해왔던 저자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삶이 통째로 흔들리고 뒤엉키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그리고 그러한 경험이 비단 자신만이 겪는 경험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시작한 연구의 내용과 저자의 주장에 대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이 땅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왜 엄마가 된 이후에 이토록 아프고 미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하여 현대 사회의 특성과 우리나라의 유교적 특성, 마지막으로 기독교 신앙적 특성(이 책의 연구 대상이 기독교 여신도이므로)을 종합하여 진단해낸다. 저자는 연구하며 만난 많은 여성들을 6가지 유형으로 범주화한다. 기독교 신자도 아니고 아직 엄마도 아닌 나에게 낯선 감정들이었지만 그래도 다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들이었고, 이렇게 범주화 할 수 있을 정도로 이런 마음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한국 여성들에게 보편적이라는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모습,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나 엄마 옆집 아줌마의 모습을 보면서 항상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모습의 기저에 깔린 사회적 배경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보다 구조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이 현대 사회의 어떠한 요인에 의하여 생겨나게 되었는지, 또 이런 사적 영역이 왜 무한경쟁의 현대 사회에서 더욱더 필요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알 수 있었고 가부장적인 모습이 언제부터 내려오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교회가 이상적으로 그려놓은 가정의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 여성이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역할을 할 때에 가장 거룩하게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 수 있는 지에 대하여도 알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책의 전체에 걸쳐서 우리의 엄마들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는 책이지만, 저자가 이 현상에 대하여 현대 사회적 측면과 유교적 측면 그리고 기독교적 측면에서 자세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 줌으로 인해서 그보다 더 넓게 인문학적 소양을 넓히는 기분이었다. 현대 사회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경쟁과 속도가 생명인 모습을 하고 있으나 그 공적 영역이 지금처럼 돌아가기 위해서는 사적 영역이 필요하고 누군가는 사적 영역에 남아서 공적 영역의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그래서 신자유주의 시대에 사적 영역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기에 나에게 무척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또한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웠으나 그간 또 잊고 있었던 가부장적 사회 모습이 우리나라에 정착한 게 불과 몇 백 년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똑똑히 인지하게 되었으며, 기독교 신자가 아니어서 신앙적 측면에는 무지했으나 이제 개신교가 가정과 여성을 바라볼 때 어떠한 입장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난 기독교가 먼 옛날부터 내려오면서 어떠한 입장을 견지했는가에 대해 역사적으로 서술된 부분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그리고 현대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여신도들에게 가르치는 이상적인 여성상에 대한 모습이 저자의 말대로 너무나 17세기 청교도적인 시각에 머물러 있음에 놀랐다. 책에 실려있는 실제로 교회에서 나눠주는 책자의 내용을 읽으며 상당히 구세대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점들에 있어서 기독교 신자들이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 가부장적인 인습이 아니지 않은가 하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게 되었다. 곧 내가 맞부딪쳐야 하는 현실적 상황이기에 더욱 더 관심 깊게 읽을 수 있었고 더불어서 저자의 친절하고 이해력 높은 설명과 박학다식한 배경 지식을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고 유익했던 책이다.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린 이 책을 덮으며, 결국 해답은 제도라는 저자의말과 또한 이러한 사회 전반적 변화를 위해서는 힘든 현실과 부딪치고 싸우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지 않겠냐는 저자의 말에 매우 공감하면서도 나의 상황이 걱정이 되었다. 내가 꿈꾸던 행복한 가정과 커리어 우먼이라는 두 가지의 꿈을 그동안 한 번도 같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너무도 생각이 단순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고 그러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역시 막막하게 느껴졌다. 10년여의 세월이 모든 어른들이 아이들을 함께 키운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사회, 그리고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의 모습을 완전히 지운 개인으로서 살지 않아도 당당할 수 있는 사회를 이끌어내기에는 턱없이 짧아 보여서, 그렇다면 나 역시 이렇게 싸우며 살아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해서 내 아이들을 키우는 소중한 경험도 하고 싶고 지금껏 배워온 지식과 앞으로 계속 쌓아갈 지식을 유감없이 사회에서 펼치고도 싶은데 이것이 정말로 저자의 표현 따라 '미치는' 나날들일 것 같아서 책을 다 읽은 지금은 마음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기분이다. 그러나 내가 사회를 바꾸는 데에 미미하지만 힘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고 하루빨리 여자라서 꿈을 포기하기를 강요당하는 분위기가 사라진 그런 사회가 오게 되었으면 좋겠다. 책의 끝자락을 읽을 때에, 에필로그에 나와 있는 저자 어머니께서 쓰신 표현이 가슴에 콕 박혔다. '나 아닌 누군가 다른 이들을 향한, 그이들을 위한 삶을 사느라 지쳐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부디 모든 여자가 나 자신만의 삶을 펼치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그런 사회가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많은 것을 알게 해주고 또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10점 만점에 10점짜리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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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하나님을 참 사랑합니다. 신앙없이 살아오다 스물아홉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의 삶은 날개를 단 것 처럼 신이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혼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내고자 했던 참된 삶의 답을 찾았으니까요 정말 예수님을 내 삶의 구주로 삼고 저는 달라졌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다고 ...보라 옛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었다고... 얼마나 저에겐 황송할 만큼 감사한 말씀인지... 이기적으로 막 살아온 나의 옛것이 모두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다고 선포해 주시니 말입니다.
저는 늘 복음과 찬양이 나오는 극동방송도 사랑합니다. 성경도 사랑합니다. 복음 듣기를 기뻐합니다. 나의 나된 것에 주님의 뜻이 있다니, 어딘지 주위와 조화롭지 못한 내 모습에, 늘 마이너에 속하는 내 모습에 그렇지 않은 척 해도 열등감이 있었는데 이 또한 머리카락 갯수까지 알고 계신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만의 온전한 형상이라니 건강한 '자아 형성'의 첫 단추를 서른이 되어서야 끼워나갔습니다.
저는 꿈이 많습니다. 스무살이 넘으면 사라지려나 서른살이 넘으면 사라지려나 결혼을 하면 사라지려나 애를 나으면 사라지려나 (꿈은 이루어 지지 않은 단계.. 그러니까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은 아직 뭔가를 이루지 못한 미성숙한 단계라는 생각이 있었나봐요)...그런데 저는 아직도 꿈을 꾸고있습니다.
저의 오랜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구하나, 정말 한사람도 지지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것 정말 의지 박약한 궁상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신기하게 지지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저는 안되는 것이라고 믿어버렸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여자가 대학졸업해도 소용없다 상고를 가라고 진지하게 권면해주시는 친척분은 계셨다는 거지요(70년대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95학번이니까요) 정 대학을 가고 싶으면 교대에 가라고, 선생님이 최고다라고는 말씀해 주시더라구요. 초등학교 선생님인 동생을 보면 이를 앙물고 건축과(성적에 맞춰서랍니다... 그땐 그랬지...니까요)를 졸업한 제가 정말 세상 물정 모르고 뛰어들었구나 후회할때도 있는 걸 보면 교대를 권하던 권고는 선견지명이었나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저는 다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이번엔 지금까지와는 달리 계획과 확신과 능력을 가지고 말이죠. 제 꿈에 주님은 날개를 달아 주십니다. 여러 목사님들이 반복하여 들려 주십니다. 주님 안에서 꿈을 가지십시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저는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늘 꿈꾸는 저의 모습은 미성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본질 중 하나이다. 다들 힘들거라고 했지만 몸풀고 한달 반만에 수능도 봤습니다. 자연분만을 기도한 이유중 하나도 몸이 회복이 빠르다고 들어서였습니다. (결국 수술을 하게되어서 1주일간 입원해 있게 되어서 수리영역 문제집을 챙겨들고 갔습니다. 미친짓이죠) 빨리 회복해서 계획대로 공부해야 했거든요. 신생아는 하루종일 잠만잔다는 말에 희망을 실으며 불뚝한 배를 하고서 책을 한짐지고 부지런히 도서관에도 다녔구요.
그런데 사랑스러운 저의 첫아이가 태어나니까요... (이책을 읽고 나서 이제 웃을 수 있네요.. 나만 미친게 아니구나 알게 됐으니까요 ^^) 세상에 온통 거짓말만 있는거 같더라구요. 아기가 20시간 이상 잔다구요? 20시간 이상 먹으면저 자겠지요. 그 조그만 엉덩이 짓무를까봐 먹이고 돌아서면 기저귀를 갈아줘야죠. 아직 베넷 웃음밖에 짓지 못하는, 이렇게 내 몸 안 아끼고 먹이고 안아주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눕히는 나보고 앙앙 울어대기만 하는 아기를 하루종일 대면하고 있으면 아무리 성스럽고 사랑스러운 모성본능을 퍼 올려 보려고 해도 마른 우물처럼 한방울도 솟아 나지 않는거예요. 게다가 남편은 왜 12시 넘도록 근무의 연장인 회식을 하냔말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꿈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소원을 붙잡고 사세요! 라고 했던 그 지지의 메시지가... '나' 말고 '남자들', '꿈꾸어도 되는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였는데 내가 완전 주파수 잘못잡고 격려받고 고무되고 있었구나....
결국 친정엄마를 희생양삼아 나도 살고 봐야겠다고 작정한 완전 나쁜 딸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힘들게 되었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서, 앙앙 우는 아기를 업고 진땀을 흘리며 여기까지 쌍시옷이 차올라 아직 받을 준비도 안되었는데 포대기를 풀러버리고 뒤도 안돌아보시고 방으로 들어가는 엄마를 마주치고 말입니다.
6개월된 우리 아기는... 정말 잘 웃고(이젠 잘웃어요...^^) 적당히 고집도 있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날 보는 우리 아기는....어디로 가야할까요?
완전히 지극히 개인적인 이 이야기가 제 리뷰입니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절 더 탐색하게 해주시고 진정한 하나님을 만나길 더 소원하게 해주신 백소영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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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케이블 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한 여자 연예인의 출산 후 일상을 볼 수 있었다. 아이와 함께 산책을 나서서는 친구가 큰 천을 들어 앞을 가려주니 아무렇지 않은 듯 아이에게 젖을 물리던 그녀. 결혼 전 패션전문프로그램까지 진행했었던 그녀가 화장도 하지 않고 트레이닝복 차림을 한 채 온전히 육아에 힘쓰고 있는 모습은 우리들 엄마의 그 것 그대로였고 ‘그래 역시 엄마는 달라’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여성에게 있어 ‘모성’은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지고있다. 국어사전에서도 ‘여성이 어머니로서 갖는 본성’이라 ‘모성’을 정의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이러한 ‘모성’을 바탕으로 육아를 고스란히 여성의 몫으로 돌린다. 「엄마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이 책의 중간에서 저자는 ‘여성의 육아가 과연 태초부터 시작되었을까? 그리고 그 여성은 태초부터 언제나, 항상, 엄마였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본문 곳곳에서 그에 대한 답을 하며 ‘현대 사회’의 ‘엄마’이기에 겪어야하는 아픔과 갈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성’은 ‘남성에 의해 지배된 역사적으로 구성된 산물’임을 말하며, 거다 러너라는 역사학자의 이론을 통해 시대를 거슬러 신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 러너는 최초의 노동구분은 신석기 남자들이 유난히 신체건강해서 위험한 사냥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이루어진 성별분업이 아니라, 아이를 낳고 젖 먹여 키우는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 때문에 생겨난 것이고 이로부터 가부장제가 창조되었다고 설명한다. 오랜 역사를 통해 생물학적 특성만으로 여성들은 육아의 운명을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저자는 모든 인간이 공통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으로서의 ‘돌봄의 성품’을 특별히 한 생물학적 성에 국한시켜 ‘모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부적절하다고 보며 엄마들만의 나눔과 희생을 가르치는 것에 반대한다. ‘아빠가 아이를 낳았더라면? 아빠가 아이에게 젖을 물렸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그랬더라면 최초의 노동분업 형태가 달라지고, 역사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왜 조물주는 ‘생물학적인 여성’에게 이 모든 것을 책임지게 하셨는가. 열 달 배불러 아이를 낳는 것도 쉽지 않은데 수유까지 책임지게 하셨는가. 수유가 유방암 발병을 낮추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데 그래서인가? 이렇게까지 어이없는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은 그만큼 역사적으로 고착화된 ‘육아’와 ‘모성’의 당연시로 인해 아파하는 이 시대의 ‘엄마’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리라. 현대사회를 살아가며 아픈 엄마를 두었던, 아플 수밖에 없었던 엄마였던 자신의 경험을 시작으로 저자는 ‘엄마’로서의 삶, ‘엄마’의 ‘엄마’로서의 삶을 사는 여성들이 겪은 다양한 모성 경험을 조심스럽게 제시하고, 아이, 자기 자신 혹은 일, 부모 등을 향한 감정과 태도에 따라 모성결여형, 자격미달형, 자유부인형, 무한책임형, 천상소명형, 지상명령형 여섯 유형으로 분류한다. 이는 엄마로서의 자격 부족에 대한 비난은 물론 아니다. 자기 욕심만 채우는 것에 대한 비판도 아니다. 개개인의 인터뷰를 담은 글에서 묻어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염려와 안쓰러움이고 안타까움이다. 저자가 분노하는 것은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낸 사회 문화적 제도들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왜 남자들의 ‘아빠 됨’이 자신의 직업과의 양자택일이 아닌 반면 여자들의 ‘엄마 됨’은 자신의 직업이나 꿈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인가. 이 선택의 결과로서 겪어야만 하는 갈등과 자기분열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산업화’로 인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즉 일하는 곳과 사는 곳을 분리시킨 제도적 형태는 여성들의 삶의 조건에 있어 커다란 변수가 되었다고 한다. 전통사회의 상류층 여성들 옆에는 청소, 빨래, 육아 등 집안일의 대부분을 대신해주는 이들이 있었고, 여성들이 생산 활동에 참여해야했던 하류층의 아이들은 말 그대로 알아서 컸다. 그런데 산업화를 기점으로 현대문명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와 관료적 행정사회제제유지를 위해 봉건사회에서 노예, 종들이 하던 역할들을 가정 내에서 무보수로 해내야 할 인력을 필요로 했다. ‘전업주부’라는 개념은 이렇게 나타난 현대적 창안물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아빠는 출근할 때 뽀뽀뽀, 엄마는 안아줄 때 뽀뽀뽀’ 국민 동요의 이러한 가사처럼 아빠들이 일정한 시간에 출근 하고 엄마들은 집에서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게 된 것 또한 ‘산업화’로 인해 생겨난 결과이다. ‘산업화’로 인한 관료화, 분업화, 전문화 이 제도적 장치들은 더욱 심화되어 시대가 지난 지금의 현대 사회에서의 ‘대체 가능성’의 위협과 끊임없이 경쟁은 무서울 정도이다. 집이 따뜻하고 안정적이고 여유있는 쉼터가 되어야 하는 것은 공적 사회의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다. 이제 전업주부라는 직업은 육아, 가사뿐만 아니라, 감정전문가의 역할도 감당해야 한다. 그런데 이 사회는 또 외벌이로 아이를 교육시키고 생활을 유지하기가 참 어렵기까지 하여 여자들이 사회로 나와 일을 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남자와 다를 것이 없이 동등한 교육을 받고 동등한 가치 속에서 자아성취를 위해, 꿈을 위해 나아가고자 하는 여성들이 증가함으로써 일하는 여성들은 더욱이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여성들을 공적 영역으로 이끄는 힘이 있는 반면, 완전히 반대 방향 다시 여성들에게 전통적인 역할로 다시 돌아가는 힘 또한 작용하는 것이 어이없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 사회이다. 이러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엄마’인 여성들, ‘엄마’가 되려는 여성들은 혼란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민하고 아프고 또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근대적 가정을 꾸릴 적격자로서의 여성’을 양육하는 것을 지향했던 개신교 교육기관의 한계를 지적하며 한국 사회의 유교적 전제에 개신교적 전제・현대의 중층성을 더한다. 이와 함께 현대 사회 여성들을 아프게 미치게 했던 자아분열적인 모성 경험들의 진정한 범인은 여자로 태어남에 어떤 운명을 동시에 가지라고 한 문화적 전제들과 제도적 장치들이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돌봄의 능력’이 여성에게만 요구될 것이 아니라 모든 ‘어른’들은 자라나는 생명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 계획과 진도를 재조정하고 나누고 늦출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재조정과 나눔과 늦춤을 사회와 제도가 인정하고 북돋아야 한다고 믿으며, 제도의 변화를 주장한다.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는 ‘나의 나 되고픔’을 간절히 열망하는 이 시대의 여성들에게 주는 용기이며, 여성들의 선택과 부딪침을 통한 이룸에 대한 희망의 작은 불씨가 된 것이라고 믿고 싶다. 훗날 ‘좋은엄마’가 되길 원하지만 그만큼 하고 싶은 일도 많고 꿈도 많은 ‘나’일 수 있기를 원하는 20대 중반 미혼 여성으로서, 개인적으로도 큰 용기를 얻어간다. 어렵긴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꿈꾸고 내가 원하면 날개에 상처가 날지언정, 부러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쓸지언정 날아갈 수 있는 현대 사회 속에서 나는 꿈 꿀 수 있고 이룰 수 있으리라 믿고, 나를 위해 나의 딸들 그리고 또 그 딸들을 위한 사회를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져본다. 더 나은 사회 속에서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을 온전히 세우는 삶 속에서 함께 행복을 누리길 바라는 간절함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도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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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는 가족을 위해서만 살았고 양육을 위해 인생을 희생하신 저자의 어머니 세대(5-60대)와 전문여성을 위한 교육을 받아왔으나 결혼이라는 현실에서 현모양처이기를 요구받는 저자의 세대 (3-40대)에 이야기 한다. 이 두 세대는 현대 문명을 살아가는 한국 기독교 여신도들이다. 가정 안에서 남편을 보필하고 자식을 잘 기르며 가정 일을 잘 꾸려나가는 삶이 어찌하여 문제가 되냐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꿈 없이 타인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는 것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당연히 받아들이기 보다는 자신들의 삶이니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현대 교육 제도 하에 전문인으로서 살아온 여성들이 결혼과 동시에 전통적 여성상을 요구받으며 겪는 자아 분열의 아픈 이야기들을 시작한다. 2부에서는 한국 기독교인 중 200여명의 20대 후반에서 60대까지의 엄마들을 통해 다양하고 복잡한 모성경험을 알아본다. 6가지로 유형화된 모성경험들은 가장 부정적인 타입 순으로 열거된다. 모성결여형, 자격미달형, 자유부인형, 무한책임형, 천상소명형. 사회에 나가 일을 하고 꿈을 펼치고 싶은 여성들은 아이를 갖는 순간 왠지 모를 아픔에 시달린다. 아이가 한없이 사랑스럽고 지켜주고 싶고 정이가지만 한순간 때리고 싶고, 밉고, 도망가고 싶고, 미안하다. 이는 엄마들의 문제가 아닌, 남편, 시어머니, 친정어머니의 잘못 또한 아닌 현대문화제도의 문제이다. 이어서 3부에서 왜 우리의 모성경험이 뒤엉키게 되었는지 현대 제도에 대해 살펴본다. 과거 조선시대만 해도 전업주부라는 말은 없었다. 그 유명한 신사임당도 전업유모가 있었더란다. 근, 현대 자본주의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사회제도를 지탱하기위해 생겨난 핵가족 중심의 결혼제도 안에 전업주부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 밖에서 일하는 공적영역을 담당하는 남편이 집에 돌아왔을 때 편안함을 주고 따뜻한 음식을 내놓을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 사적영역을 담당하는 이가 바로 전업주부 아내인 것이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돕는 배필이라며 남편을 섬기는 게 당연한 기독교의 가르침과 유교적 뿌리 깊은 성향이 한 몫 더하여 한국 기독교 여성들은 2부에서 제시됐던 것처럼 아프고 미치는 경험을 하게 한다. 4부에서 저자는 앞으로 이런 아픔을 겪을 딸들에게 할 수 있다면 피하지 말고 결혼과 자신의 전문분야의 일을 둘 다 하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저 어쩔 수 없으니 자아분열 쯤 견디고 다 이뤄내라는 욕심에서가 아니라 이 둘을 다 가지고 투쟁하는 동안 결국 살아가는 동안에 이 것들을 통합해 낼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이라고 한다. 투쟁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그 세월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지만 집단 역학의 작용으로 아마 언젠가는 엄마이기 이전에 아내이기 이전에 딸이기 이전에 나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아직 어린 나는 결혼하게 되어도 내 일을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 되기가 이렇게 아프고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책을 통해 피부로 느꼈다. 그리고 우리엄마를 되돌아 보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이고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아파?" "아니? 엄마가 왜아파~" "엄마는 엄마인생이 없는 것 같아. 오로지 자식생각, 남편생각이자나. 지금 하는 일도 우리 잘되라고 하는 거잖아. 엄마 꿈도 아니었잖아." "엄마는 네들이 잘되면 그게 행복이야". 어쩜 우리 엄마는 이런 당연시된 문화 속에서 타인의 꿈이 자신이 꿈이라 착각해 오면서도 지각하지 못하는 가장 안타까운 엄마가 아닌가 싶어 코끝이 찡해졌다. 자식들 다 장성하고나면 우리엄마에게는 뭐가 남을까 걱정스럽다. 차라리 우리 엄마는 이런 문화제도가 낳은 모성의 내막을 알지 못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러면 적어도 슬프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 앞으로 계속 생겨날 엄마들이 이런 같은 상황을 겪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우리엄마를 보고 자란 나 또한 어쩜 당연시 여기며 엄마와 같은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자식 잘되는 일이 내가 잘되는 일이라며 두 손 두 발 벗고 뛰어다녔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 물론 엄마 되기는 한참 멀었지만-내가 먼저라는 생각과 그러한 노력들이 비록 나 한명이 이 제도를 바꾸기란 힘들지만 그래도 아주아주 조금은 영향을 끼칠 것을 기대하며 열심히 싸우는 엄마가 되기로 결심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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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대학교 4학년 학생이다. 그 말인즉슨, 진로 때문에 꽤나 머리 아파하며 고민하고 있는 청년이라는 뜻이다. 사실 대한민국에서는 뭐든지 바늘구멍이다. 내가 원하는 곳에 들어가는 것은 늘 그렇게 어려워야만 하는 건지. 그렇게 들어갔다고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답을 대다수는 할 것이라는 데에 만원(?)을 걸겠다. 고등학생 때는 대학교만 들어가면 만사 오케이, 뭐든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꿈을 펼치고 자아를 실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대학교 4학년’ 나는 이 시점에서 또 다른 기로에 놓여있다. 게다가, 여기에 결정적인 한 단어를 더 붙여야 할 것 같다. 그 단어는 다름 아닌, ‘여성’이라는 단어이다.
하나님 안에서 정말 아름다운 가정, 믿음의 명문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이 일생 최대의 꿈인 나에게,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가 있노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는 나에게 이 책은 그런 나의 성급함에 대해 나무라며 지혜를 나누어 주었다. 책의 저자가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는 갈등 즉, 엄마로서, 아내로서, 또 공적 영역에서의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 겪는 갈등은 ‘그저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자. 그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일거야.’라며 간단명료하게만 생각했던 나의 무심함에 경종을 울렸다. 정말이지 그랬다.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내가 가질 직업에 대한 생각을 모두 가정 중심으로 맞추었었다.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는 직업, 일찍 집에 가서 남편 밥 챙겨줄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으로 막연하게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여자들에 대한 현실이 이렇게 냉정하다는 것, 막연히 어떻게 되지 않겠느냐 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으로 사회에 나와선 잔인한 맹수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라는 것을 왜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자책감과 동시에, 그래도 그나마 지금에서라도 그것을 알아차려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책을 읽는 내내 교차했었다.
내가 엄마가 된다면 책에서 언급하는 6개의 엄마들의 유형 중 지상명령형이 될 것이다. 물론 천상소명형도 어느 정도 포함이 되겠지만 내가 자라 온 환경(아빠의 집안일 솜씨가 엄청나다는 등등의 환경)과 결부 시켜볼 때 나는 천상소명형과는 거리가 좀 있는거 같다. 사실 무한책임형, 자유부인형, 모성결여형 등 다른 유형들의 부인들이 주장하고 말하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고 ‘나도 자칫(?)하면 이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하는 경각심마저 들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것이 나의 가치관에 전적으로 합치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 중 그래도 가장 나의 가치관과 일치하는 것이 바로 지상명령형이라고 스스로 선택했지만 이것이 나에게 부합한다고 여긴 건, 내가 아직 엄마가 되어보지 못한 신앙심을 가진 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말은 곧, 내가 엄마가 된다면 언제 어느새 다른 유형의 엄마가 되어 안달복달하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내 마음은 계속 어두워져만 갔다. ‘이게 정말로 현실이란 말인가.’하고 말이다. 모두가 이렇게 산다는데, 내가 그 바다에 돌멩이 하나를 던진다고 뭐가 달라지겠나 하는 절망감과 동시에 나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라는 체념마저 들었다. 엄마로, 사회인으로 살아가면서 겪는다는 그 자아분열에 대한 책임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지은이에게 ‘그렇게 사회 탓으로만 돌린다고 해결될 문제인가! 어차피 개개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있는 거야’라고 절망의 소리를 치고 싶었다. 그러나 저자가 인용한 ‘엄마는 미친 짓이다’라는 주디스 워너의 글에서 프랑스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후, ‘아, 이런 세상이 존재 할 수 있긴 한거구나.’하며 너무 쉽게 포기해버리려고 했던 나의 태도에 대해 반성하는 동시에 엄마로서 사는 여성의 현실이 지금처럼 전쟁 같아야 하고 고달파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우리나라가 심각한 저출산 국가라는 사실은 모든 국민이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극명한 사회 현상이 보여주는 것은 ‘육아’에 대한 책임을 너도 나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아를 엄마들에게만 전가시키는 동시에 한 사람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도 잘하라는 책임전가가 이러한 문제를 야기한 것이라면 그 해결책은 정말이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답을 몰라서 시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든 해답을 알고서도 시행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책에서도 언급을 하고 있지만, 엄마로서 사는 여성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바라던지, 아니면 그저 아내로, 엄마로만 살라는 무언의 압력이 여성으로 하여금 차라리 ‘엄마’라는 자리를 회피하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 많은 것들을 배우고 꿈꾸던 사람에게 ‘이제껏 네가 생각하고 꿈꾸던 것을 접어버리고 그냥 '엄마'가 되라’는 것에 여성들이 동의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늙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제 와서 내 전공을 밝히자면 나는 유아교육과 학생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집가기 좋은 학과에 들어갔네.' 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4년 동안 나는 학교에서 어떤 엄마가 될 것인가에 대해 배운 것이 아니라, 유아라는 귀중하고도 결정적인 시기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 관해 어떤 전문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배웠다. 유아교육 전공자로서 내년 2월에 졸업하는 나는 유아들에게 엄마가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어떤 교육구조가, 엄마들로 하여금 엄마가 되기 싫도록 하는지, 유치원에 또는 어린이집에 하루 종일 아이를 맡기면서 엄마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관을 떠나고, 또 돌아오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 또한 그런 엄마들을 한 사람의 '여성', 또는 사회구성원으로 보기보단, 그냥 '엄마'라는 사람으로만 바라보았고, 그래서 모든 일하는 엄마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러한 어려움들을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그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돈을 잘 버는 남편을 만나서 아이에게 엄마 역할만 잘 해주고 싶다'라는 생각을 수십, 수백 번 하였었다. 저자가 말하는 그 ‘아프고 미치는 엄마’가 나는 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하는 엄마들이 하는 그 갈등에서 나만은 자유롭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엄마로만 사는 삶, 아내로만 사는 삶이 과연 좋은 엄마, 아내의 삶인지, 그리고 그런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갈등이 없어 보이는 삶이 진짜 갈등 없는 삶이 될지도 의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교육을 하나의 범주로 가지고 있는 유아교육 전공자로서 우리의 여성들이 건강한 엄마가 되도록 하는데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도 이 책을 보며 얻은 또 하나의 소득이다.
엄마가 되기, 쉽게만 생각했었고, '어떻게 되겠지'라며 막연히 생각했었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엄마가 되어 감당할 수 없는 현실과 맞닥뜨리게 될 때, 내 소중한 아기를 집어던지고 싶은 미친 충동에 사로잡힌 내 모습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될까? 스스로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그저 울었다는 지은이의 경험보다 더 심한 자책감과 경멸로 우울증에 빠져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가 되기, 그렇게 아파야하고 미쳐야만 하는 것일까. 건강하고 좋은 부모 밑에 건강한 유아가 자라난다는 말이 있다. 유아기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논하기 이전에 행복한 여성으로 이 땅에 당당히 살아가는 엄마들이 설 자리부터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엄마들이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그래야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날 테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