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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으로 다른 나라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무리라고 생각되지만, 그 열정과 노력에 감탄할 따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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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헐버트 박사 記念事業會長’ 金東珍씨가 執筆한 ‘大韓帝國 滅亡史’를 檢索하면서 이 著書를 認知하였다. 01-1. 出刊辭와 譯者의 序文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웬만한 국내 史學者의 歷史書보다 탁월하다. 읽는 내내 어느 역사책(자료)에서도 느끼지 못한 感動이 있었다. 01-2. 이렇게 豐富한 史料가 왜 正史에 編入되고 反映되지 않았는지 疑訝하다. 意識있는 史學者들이라면 지금이라도 편입해야 한다.
02. 全體的으론 매우 만족하는데...우리 역사에서 무수히 나오는 사건 이름이 전부 漢字語이다. 그런데 거의 國文으로 표기하니 얼른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았음은 무척 아쉽다. 02-1. 譯者가 모르지는 않았을 터...주요 사건이름은 倂記라도 하든지...脚註라도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03. 33쪽...처참함도 이런 처참함이 있을까 싶다...어떻게 屍體에서 骨髓를 빼먹을 것이며, 너무 허기져 허겁지겁 먹다 暴食하다 죽는...무능한 王과 黨爭에 골몰한 위정자들 때문에 백성들만 개고생한 당시의 모습을 보니 그저 탄식을 할 뿐이다.
04. 34쪽...譯者는 ‘조선사람’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훨씬 以前 세대 사람들에겐 ‘한국인’이라고 번역하는 誤謬를 저질렀다. 04-1. 역자의 資質과 자세에 문제가 있다.
05. 40, 44쪽, 역자는 (宣祖)왕이 평안도 의주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망명’이라고 표현했다. 韓國史를 전공했다는 역자의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05-1. 王이 명나라 땅으로 도망한 것도 아니고 自國 땅으로 피난한 것인데 어떻게 남의 나라로 도망한 표현인 ‘망명‘이란 표현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두 번이나...’蒙塵‘이란 표현이 그렇게 생각나지 않아서인가...
06. 53쪽...神出鬼沒하며 왜군을 겁먹게 한 金德齡 장군이 猜忌, 嫉妬, 謀陷, 利己心에 사로잡힌 者에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니 李舜臣 장군이 생각났다. 連戰連勝하는 장군에게 激勵와 賞讚은 고사하고 모함에 王은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으며 잡아들이고 拷問을 가하고 죽이려까지 한 경우가 너무 恰似했기 때문이다. 다만 柳成龍과 같은 友軍의 도움으로 天佑神助로 살아남은 것이 차이일 뿐이다. 06-1. 83,84,91쪽...不世出의 亂世英雄 李舜臣이 戰亂 終熄 後 당신에게 닥칠 (시기와 嫉妬心이 가득한 政敵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확신하고 露粱海戰에서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다는 내용이 있었음에 놀랍기만 했다...앞서...三道水軍統制使 職에서 削奪官職 당하고 죽을 정도로 모진 고문을 받은 고통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07. 85~86쪽, 조선에서 내놓기는 했지만...豐臣秀吉(토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軟禁상태에 있던 명나라 使臣 ’沈惟敬‘이 이 도발자를 毒殺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운 史實이다.
08. 이 제2권에서도 誤謬가 참 많았다. 08-1. 59쪽, 병부시랑 ’형개‘의 한자를 誤記했다. ’邢玠’인데 ‘楊玠’로... 08-2. 65쪽, 摠兵官 ‘마귀’의 이름을 誤記했다. ‘파귀’로... 08-3. 84쪽, 당시 명칭 ‘수군’이라 번역하지 않고 ‘수병’이라 했다. ‘水兵‘이라 함은 제일 말단 계급인데 이 명칭을 쓰면 그 戰艦에 승선한 지휘관은 뭐라고 불러야 하나...上下軍 총칭하는 ’水軍‘이라고 했어야 했다. 08-4. 294쪽 上段, 역자는 ’....대비는 절대절명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라고 번역했다...지금까지의 번역 과정을 보건대, 그냥 단순 誤記라고 볼 수 없다...’絶體絶命절체절명‘이란 漢字成語는 생각이 나지 않고 평소 알던 대로 절대절명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08-5. ‘14세기의 마지막 약 10년 동안 일본군은...’라고 하면서 14세기라고 誤譯했다. 전개 과정을 보면 16세기(1592.04~1598.12)라고 했어야 했다. 08-6. 318쪽, ‘(1875년) 9월에 일본 전함 운요 호가 조선 해안의....제압 됐다. 강력한 해병 부대가 영종진...’라고 번역했다...고종실록에는 ‘운양호‘라고 번역돼 나오고...’해병 부대‘라는 표현은 아예 없다. 역자가 어떤 근거로 이렇게 번역을 했는지 자못 疑訝하기만 하다. 08-7. 433쪽 上段, 역자는 ’금강 채굴권이 독일 기업조합에 주어졌고...‘라고 번역했다. ... 채굴권 해당 국가가 ’독일’인지 與否도 그렇지만 ‘금광 채굴권’의 誤譯(誤記)이 더 문제이다. 그냥 단순한 실수가 아님은 지금까지의 誤譯(誤記)를 보면 알 수 있다. 역자의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08-8. 이것 말고도 誤譯한 명칭이 무수히 많았다.
09. 103쪽(上段), 113쪽(下段)...궁궐 지을 工事費 마련한다며 왕(光海君)부터 賣官賣職을 率先垂範하는 모습에서 亡兆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10. 118쪽, (仁祖) 평민이 四大門 안에 들어가면 말에서 내려 걸어야 한다는 법령을 頒布한 행위...신분차별을 더욱 鞏固히 했다.
11. 滿洲族(後金)의 말발굽이 빈발하건만 제대로 방비하지 않는 城主(韓潤)의 無事泰平, 無事安逸도 叱責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만주족 장수가 이 수령을 체포한 다음 죽이는 과정은 다른 史料에서는 볼 수 없는...너무나 끔찍했다...130쪽,
12. 141쪽, (仁祖代) ’이인조‘란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王朝實錄을 포함 史料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한자 이름과 간단한 부연설명이 있었어야 했다.
13. 143쪽, 일본이 “만주족을 혼내겠다”라고 하는 내용이 나오고, 신하 金藎國이 “우리 나라가 전쟁터가 된다”라며 일본의 제의를 거절하는 내용이 나온다...그런데, 270여년 후, 우리나라를 기어코 倂呑하려고 作定한 일본이 청나라를 상대로 우리나라에서 전쟁(1894년, 淸日戰爭)을 일으켰던 사건이 생각났다....國力은 형편없는데 입으로만, 붓대로만 정치를 하니 丙子胡亂에서도 淸日戰爭에서도 侮辱과 侵奪을 당하는 것이다.
14. 153쪽, 비록 敵將(龍骨大)이지만 이 將帥의 지극히 합리적인 생각을 읽었다...“너희 文臣들이 붓으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이것은 오늘날에도 有效하다.
15. 165쪽, 협상을 하려는 의도이긴 하지만 왕(仁祖)이 전쟁 중인 敵軍에게 술과 고기(황소)를 보낸 내용을 보면...1876년 협상(丙子修好條規) 중인 일본에 술과 음식을 전달한 史實이 생각났다...자국 백성들은 닦달하며 喝取를 하는 위정자들이 상대국의 威勢에는 겁이 나니 低姿勢에서 당시 위정자의 사고방식에서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6. 以前·以後 여러 戰亂에서도 그렇지만 전투에 臨하는 지휘관 과반수가 文臣이었기에 군사지식도 군사경험도 없거나, 일천하니 連戰連敗를 할 수밖에 없다는 確證이 들었다. 16-1. 軍 총책임자 ’金瑬류‘는 胡亂 勃發 當時 領議政이었다. 이런 사람이 武器를 제대로 다뤄본 경험이 없다시피한 문신인데 군사작전을 지휘하니 제대로 싸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김류만 그런 것이 아니고 거의 모든 將帥(將軍)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文臣이었다. 16-2. 게다가 평소 武臣, 武人을 홀대하고 소홀히 하니 전쟁이 발발하니 제대로 대처를 할 수 없음은 當然之事인지도 모른다.
17. 147쪽, 만주족이 國號를 ’淸‘으로 改稱했다는 내용이 나온다...그런데 이후에도 계속 滿洲族이라고 표기한다...번역을 제대로 했는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17-1. 淸으로 개칭하기 전에도 ’後金‘이란 국명을 사용했음에도 譯者는 이 또한 뭉개고 계속 滿洲族이라고 번역했다.
18. 171, 172, 174쪽...以前에도 이미 派爭으로 날을 지새우던 관료들이 이 胡亂처럼 큰 난리가 나니까 전부 남탓, 拙戰, 虛僞報告, 阿附로 변신하며 자신의 安危만 생각하는 장면은 지금도 유효하다.
19. 177쪽, (막강한 군사력임을 알면서도) 청나라 군사와 끝까지 싸워야 한다며 名分論과 체면만 내세우는 金尙憲같은 斥和派 때문에 國土는 蹂躪됐고, 백성들은 온갖 苦楚를 겪어야 했다는 사실을 이들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20. 209쪽, 宣川府使 ’이규‘가 반역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내용을 읽고, 고려 高宗代에 침략한 蒙古軍에 附逆하며 고려에 칼을 겨눈 ’洪福源‘(제1권 301쪽)이 생각났다...대체로, 배신한 者는 그 끝이 불행했다는 史實을...
21. 219쪽, 江華島 德津鎭 寫眞 설명에서...丙寅洋擾와 辛未洋擾에서 朝鮮軍(梁憲洙라고 했는데 일부 틀렸다)이 각각 佛蘭西軍과 美軍(미국 艦隊라고 했는데 틀린 설명)을 ’擊退했다‘고 했는데 史料에도 나왔다시피 丙寅洋擾에서도 그렇지만 辛未洋擾 때는 朝鮮軍이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격퇴했다고 엉터리로 설명한 譯者의 資質이 의심스럽기만 하다. 21-1. 이런 틀린 飜譯은 266쪽에도 있었다....마지막 줄에 譯者는 ’徐命善이 上疏를 올려 洪麟漢의 행적을 낱낱이...‘라고 했다. ’上疏‘라는 표현 속에 ’올린다‘라는 뜻이 있는데 重言復言 언역을 한 것이다. ’상소하여...‘라고 했어야 했다. 21-2. 譯者의 過猶不及 번역은 또 있다...282쪽, ’콜레라‘라고 번역한 것이다...高宗實錄에 콜레라라고 한 번 나오기는 하지만 이때는 훨씬 전인 純祖代이지 않는가...虎列刺라고 한 다음 註釋 또는 괄호하고 ’콜레라‘라고 敷衍 설명을 했어야 했다. 21-3. 譯者는 ’...1861년 2월에 이루어진 “대사관” 반환같은 소식들이...‘라고 번역했다. - 高宗實錄에 대사관이라고 나오기는 하지만 이 표현 또한 高宗代 후반이기도 하거니와 이때는 훨씬 전인 哲宗代이지 않나...領事館이라고 해야하지 않나.
22. 222, 232쪽...激한 黨爭의 弊害가 列擧됐는데...이런 派爭의 폐해로 국가적 消耗와 疲弊해진 民生苦는 오늘날에도 有效하다.
23. 228쪽...孝宗이 同性愛를 금지하고, 近親相姦의 부작용에 관한 救濟策을 발표하는 내용이 나온다. 23-1. 有史 以來로 同性愛는 있었고...사람의 감정이기에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文宗 王妃가 그랬고, 血統을 계승한답시고 고려왕조에서는 近親婚이 공식화됐으니...
24. 230쪽, 인구조사 결과를 보면 意外로 가구당 人口數가 얼마 안 된다.
25. 229~237쪽, 肅宗의 變德과 專橫으로 많은 부작용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음을 알 수 있다.
26. 241쪽, 肅宗이 백성들에게도 王이 죽으면 哀悼期間 3년 동안 喪服으로 흰옷을 착용해야 한다는 勅令을 내려 또 하나의 고통스런 삶의 굴레를 씌웠다. 26-1. 255쪽, 우리나라 사람을 흰옷을 즐겨 입는다 해서 ’白衣民族‘이라고 불리웠는데 왕족의 죽음에 따른 喪服을 착용한 것인데 그 죽음이 너무 잦다보니 아예 평상복이 됐다는 불편한 진실이 있었음을 이 책에서 인지하였다.
27. 肅宗의 禧嬪 張氏에 관한 毒氣어린 모습이 보였는데...무엇보다, 王에 의해 賜死되기 직전 낳은 아들(후일 景宗)을 때리는 과정에서 性不具를 만들었고 맞는 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으로 재위기간이 짧았음을 새롭게 인지하였다.
28. 251~253쪽, 영조가 내린 暗行御史 御命 지침대로 벼슬아치들이 牧民을 했더라면 나라가 부패하지 않고 滅國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28-1. 관료들 擧皆가 私利私慾에 눈이 먼 행동을 서슴치 않았음이 누적됐고 終局에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9. 260~261족,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자의 權謀術數와 잔혹함에 境界가 없었다.
30. 261~263쪽, (思悼)世子가 가련하고 苛酷하게 죽임을 당하는 과정을 보면, 통치자(英祖)의 聰氣가 흐려 判斷力이 흐려지면 어떤 悲劇的 결말이 생기는지를 생생하게 보았다.
31. 279쪽, 不正腐敗의 惡臭가 漫然하고 진동하는 모습에서 貪虐하는 관리와 고통받는 백성들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32. 282쪽, 史上 최악의 虎列刺(콜레라)가 猖獗해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사건에서 느낀 점... 32-1. 당시 사람들의 非衛生이 큰 원인이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당시 사람들은 衛生에 관한 槪念조차 없던 때라...제대로 씻지도 않은 상태에서 日常事가 장기간 반복됐는데...아무 곳에나 大小便 본 다음 손을 씻지 않았고, 大便 본 다음 뒤처리도 나뭇잎으로 한 대다 그나마 깨끗하게 하지 않았으며, 全國的으로 이런 排便행위가 아무렇지 않게 행해졌으며, 평소에도 손을 씻지 않은 상태에서 음식 섭취를 했고, 양치도 거의 하지 않았고, (名節 때처럼 특별한 때 외에는) 목욕도 잘 하지 않았으며....등등 이런 非衛生이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과정에서 전염병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32-2. 이런 비위생은 이 㐎 작성자가 어렸을 때에도 어렵지 않게 보고 겪을 정도였다.
33. 293쪽, ’달레(Dallet)는 현 왕권 초기의 정세를...’라고 나온다...원문에도 이 달레에 관한 아무런 설명이 없는지, 敷衍설명이 없으니 읽기가 불편했다. 33-1. 佛蘭西 宣敎師라고 괄호하고 부연 설명 또는 脚註로 설명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34. 312~313쪽, 閔妃(明聖王后)가 弑害된 장소인 ‘坤寧閣’ 寫眞이 수록됐는데...(文化觀光解說士인 듯) 乙未倭變(事變)과 無關한 사람이 있는 사진을 수록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35. 345쪽, 경기도 驪州에서 民亂이 발생했다는 내용이 나온다...以前에도 그렇지만 民亂이 안 일어나면 오히려 그것이 非正常일 정도로 朝廷과 官僚사회가 不正腐敗로 찌들어있었기 때문이다. 35-1. 엄청난 돈으로 官職을 買收했으니 그 돈을 벌충하려면 자기들보다 약자인 백성들에게 온갖 口實을 붙여 苛斂誅求해야 했기 때문이다. 著者도 記述했다시피...이러니 백성들은 忿怒가 폭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5-2. 全羅道 古阜에서 시작한 東學軍이 시작한 (민란을 넘어선) 전쟁은 당연하다시피했던 것이고....백성들의 불만이 무엇인지 看破하고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外勢 請兵할 생각만 한 閔氏 勢道政治를 원망한다.
36. 350쪽부터 敍述된 내용을 보면 朝鮮(大韓帝國)이 기울어져 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인다. 36-1. 列强의 예상을 깨고 淸軍을 擊破하고, 俄羅斯 軍隊를 격파한 日本軍의 강성해진 軍事力이 제일 큰 이유이긴 하지만...黨爭, 효용성 없는 性理學 고집, 賣官賣職 등....腐敗할대로 腐敗해 自强할 수 없는 朝鮮 자체의 無能함 또한 컸다.
37. 405쪽, 일본 공사 三浦 梧楼(미우라 고로)가 주도한 왕비(死後 明聖王后) 살해사건 관련 廣島(히로시마) 법원 판결문 내용이 造作 또는 僞造됐음을 충분히 傍證됐다. 37-1. 일본정부가 공식 임명하고 파견한 公使가 왕비 살해에 주도자임이 밝혀질 수 있음을 源泉封鎖하고 이들을 無罪 선고하고 放免했으니...
38. 406~407쪽, 王妃가 죽임을 당하는 과정과 왕과 세자(高宗과 純宗)가 겁박당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38-1. 戰慄感...비참한 모습과 약소국을 自招한 王과 왕비에 대한 서글픈 생각만 들었다. 38-2. 다른 사건에서도 배신자의 행동으로 망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이 사건(乙未倭變)에서도 王妃 피살 포함 一連의 風飛雹散나는 王室이 되는데에는 어김없이 배신자(鄭秉夏)의 결정적 역할이 있었음에 憤氣撑天하지 않을 수 없다.
39. 429쪽 하단~430쪽 上段, 王과 守舊세력의 생각...나라의 富國强兵과 自强을 생각하기보다 保身과 守城에 집착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39-1. 440~441쪽, 이런 保身과 守城행위가 억울한 죽음(金鴻陸)을 만들었고, 개혁을 바라는 국민과 獨立協會를 毁謗하여 나라 전체를 퇴보하게 한 것이다. 39-2. 이런 一身의 保身과 守城행위가 지속되는 과정에서 自强능력은 상실하여 얼마 후에 있을 러일전쟁에서 마저 일본의 승리로 끝나니 終局에는 滅國에 이르게 된 것이다.
40. 481쪽 以後,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戰爭이 발생할 것이 확실하니까 大韓帝國은 ‘中立’을 선포했지만 허울뿐이었음은 일본군대가 한반도에서 종횡무진하는 것에서 나타났다. 40-1. 自强능력이 없는 상태에다 게다가 청나라와 러시아에 連勝한제국일본에게 아무런 소용없기 때문이다. 40-2. 1875년 雲揚號 사건에 대처한 것부터....1876년 체결한 朝日修好條規 締結 이후에도 여러 차례 自强할 수 있는 기회를 外面하거나, 無視하거나, 輕視하거나, 默殺하거나 등으로 無事安逸하게 대처함으로써 진작부터 緻密하게 倂呑할 생각을 하고 있는 일본에겐 그냥 束手無策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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