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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여겨 보던, 작가의 눈에 띄는 산문집을 만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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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는 2000년에 출판되었다가 절판된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에서 고른 글들과 2002년부터 쓴 글들을 모아 다시 펴낸 산문집이다. 글쓴이인 최영미님은 90년대에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제목의 시집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유명한 시인이신데, 아마 내또래라면 평소에 시를 읽지 않는 이들도 책 제목과 시인의 이름은 알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 만큼 유명한 분이시다. 실은 나또한 시를 즐겨 읽지 않던 터라 시에 관해서라면 그다지 할 말이 없지만 한국이라는 사회속에서 유명한 시인으로 살아온 저자의 산문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한국에 대해서 또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색다른 경험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꼭 그러한 유명세를 지니지 않은 사람의 글이라 할지라도 산문은 그나름의 독특한 매력이 있는 문학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즐거운 책읽기를 할 수 있었다.
.. 앞쪽의 1부가 2002년부터의 글이고, 2부가 2000년까지의 글들이었기 때문에 책의 마지막까지 다 읽은 후에 다시 앞으로 돌아가 1부를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2부의 끝즈음에 속초의 한 아파트로 이사가 아파트 앞 길건너 중학교 운동장의 축구경기를 지켜보며 자신의 베란다가 로열박스라고 흐뭇해하던 2000년 2월의 시인은 2003년 학교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차렷! 열중 쉬어' 소리에 신경거슬려하며 아파트를 사거나 나라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오히려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 시인에의 친근감을 느꼈다면 너무 제멋대로의 감성일까. 신문과 <아파트백과>를 뒤적이며 잠자리에서도 머릿속으로 내 집을 그리는 시인. 24평형 계단식 아파트를 허락하지 않으시면 이나라를 떠나겠다고 하느님을 협박?하는 시인. 라디오 방송 녹음테이프와 현대문학이며, 평론등에 실렸던 글들을 구절구절 인용하며 시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보이던 시인과의 갭이 느껴져서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인간적인 매력은 이런 부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싶은 마음도 들어서 나자신의 생활과 생각을 돌아보는 계기도 되어 더욱 좋았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흐르고, 나이를 먹는 것은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다. 한정된 시간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나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의 양을 생각해 보아야겠다는 마음도 먹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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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이 시인을 잘 모른다. 시인의 표현을 따르자면 나 역시 이 시인을 '오역'해온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50만부도 넘게 팔렸다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가져온 반향은 여러모로 엄청났지만, 시집의 대중적인 성공이 시인 최영미에게 반드시 행복한 경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제, 잔치는 끝났다」고 선언하며 80년대를 '박제화'한 장본인이라는 세간의 '오역'을 염두에 둘 때, 풍문과 시선에 대한 이 시인의 거의 무의식적인 공포감은 이해하지 못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책은 글을 쓴 시간을 기준으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는 2002년부터 현재까지 여러 지면에 기고한 칼럼과 산문을 모았고, 2부에는 2000년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된『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에서 ‘생활의 냄새가 진한 글들’을 골라 묶었다. 서른 즈음의 젊은 여성시인으로 사람과 일상을 치밀하게 관찰하며 써내려간 글에서부터 최근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며 다시 ‘시퍼런 오기’로 버텨냈던 ‘서른의 강’을 되짚어보는 글에 이르기까지 17년에 걸친 생의 흔적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흔을 코앞에 둔 지금, 가끔씩 난 내가 아직도 서른 살이라고 느낀다. 서른 살처럼 옷을 입고 서른 살처럼 비틀거리고 서른 살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 흔한, 그 잘난 희망이 아니라 차라리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질긴 절망을 벗삼아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어 오로지 정든 한숨과 환멸의 힘으로 건너가야 했던 서른 살의 강. 그 강물의 도도한 물살에 맞서 시퍼런 오기로 버텼던 그때 그 시절이 오늘밤 사무치게 그립다(144-145).
시인의 문학의 시작이자 끝이 일기라고 한다. 시인이 쓴 최초의 시들은 일기장에 발표되었고, 또 시인 인생의 종말을 고하는 그날, 시인이 세상에 남길 마지막 작품은 최후의 그날 아침, 혹은 그 전날 밤에 시인이 썼던 일기일(138) 거라는 것이 시인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그의 일기를 읽어보는 것은 나름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시대와 불화했고 자의식 강했던 한 인간의 고백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1993년 「등단소감」에서부터 2009년 9월에 쓴 미발표 원고 「내가 젊어 보인다고 」에 이르기까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어느 개인의 일상의 기록으로 읽기를 바라며 책의 제목을 달았다. 자본과 기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사랑하며, 때로 유유자적 순간을 즐겼던 생활인의 초상이 누군가의 하루를 즐거게 해주기를…… 당신에게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단어 하나에 목숨을 걸고 홀로 아팠던 손목이 덜 허망하리라(7).
“인생에서 언제 싸우고 언제 타협해야 하나요?” “큰 일에는 원칙을 지키고, 작은 일에는 타협해야지.” “하지만 선생님. 어떤 상황에 빠져 있을 때에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부차적인지 분간이 잘 안 되잖아요. 그럴 땐 어떻게……?”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저절로 알게 되지.” (118) 이 세상엔 한번 시작하면 결코 멈출 수 없는 일이 꽤 있는데, 일기도 그런 일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언젠부턴가 나는 일기라는 걸 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우연히 손을 댄 게 어느덧 십 년, 이십 년을 훌쩍 넘었다.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늘 나와 함께했던 일기는 나의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다. 그가 결코 날 실망시키거나 배반하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안다(134). 세월이 흘러 생이 내게 준 어찌 보면 사치롭기까지 한 최초의 상처가 또다른 절절한 아픔과 고통들에 의해 희미해지고 잊혀질 무렵 사춘기가 절정에 달했던 고교 2학년 때에 나는 다시 일기 쓰는 일에 몰두했었다. 당시 내가 심취했던 루이제 린저의 소설 주인공인 에리나(Erina)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인 뜨거운 고백들…… 베토벤과 전혜린, 그리고 장 크리스토프에 빠져 속물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속물을 가장 경멸하던 그 시절 나의 좌우명은 “젊은이여, 항상 어려운 길을 택하라!”였다. 운명을 휘어잡은 초극의 생에, 베토벤을 숭배하고 베토벤을 닮고자 했던 갈망으로 부풀어올랐던 삐뚤체의 기록들은 그러나, 1979년 4월 7일로 막을 내린다. 어느새 고3이 된 나는 앞으로 내 인생에서 일 년을 빼자고 다짐하여 일기장을 덮었다(137). 내가 다시 본격적으로 일기에 매달린 것은 1986년, 내 나이 스물다섯 되던 해에 한 선배로부터 일기장을 선물 받고부터였다. (중략) 내 시의 최초의 독자였던 그. 전화로 내가 방금 쓴 따끈따끈한 시들을 읽어주면 재미있다고 깔깔 웃던, 혹은 너무 슬프다며 한숨짓던 그는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산파역을 했다(137-138).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를 가보아라. 그가 오래 머물며 관리하는 공간에는 그 사람만의 독특한 생활질서와 습관이 배어 있다. 그의 글이나 말은 우리를 속일지라도 그의 ‘방’은 냄새를 풍기게 마련이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지울 수 없는 생의 흔적이 숨어 있다 우리의 발길을, 눈길을 붙잡는다. 그래서 언젠가 당신의 방에서 나는 그토록 두리번거렸던 것이다. 그토록 열렬히…… 한 여자를 알려면 그 여자의 경대를 보아야 한다. 화장대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여자가 아니더라도, 남자도 거울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다. 시몬 드 보부아르 같은 유명한 페미니스트도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거울을 보았을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2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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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 최영미
내가 쓴 최초의 시들은 일기장에 발표되었고 또 내 인생이 종말을 고하는 그날, 내가 세상에 남길 마지막 작품은 최후의 그날 아침, 혹은 그 전날 밤에 내가 썼던 일기일 테니까. 괴로울 때나 기쁠 때나 늘 나와 함께했던 일기는 나의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다. 그가 결코 날 실망시키거나 배반하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안다.
--- 본문 중에서
솔직히 난 최영미 시인을 잘 모른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이라는 정도이다.
일기장이 최초로 작품을 쓰는 곳이라는 글이 참 공감이 간다. 꿈 많은 문학소녀를 꿈꾸며 적었던 내일기장이 떠오른다. 그런 설렘으로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를 접했다.
이 산문집은 개정판으로 몇 달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2000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쓰여진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처음 만나는 글이니 최영미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그의 생각과 시의 세계를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내 일기장 속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설계였던 것 같다. 자신만의 진솔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기장을 누군가가 본다고 쓰지는 않는다. 가끔은 속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생기면 보여주고 싶어질 때도 있었다. 요즘은 나의 생각과 너무나 다르게 대화가 되지 않고 자꾸 일이 더 커질 때 난 이메일을 이용할 때도 있다.
최영미 시인이 처음 일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일기장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산파 역할을 해준 선배로부터 선물을 받고 부터였다고 한다.
“일기는 내 문학의 시작이자 끝이다.” 문학소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각하고 좋아할 만한 이야기이다. 일기장은 나를 시인으로도 만들어주고 절절한 연애담의 주인공도 만들어주고 내 삶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다.
‘서른살의 희망과 절망’ 편에서 참 많이 힘들었고 절망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나랑 참 많이 비슷한 환경, 일상의 고통, 고뇌의 시간을 보냈던 기억에 잠시 멈짓하며 멍해진다.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이 산문집은 시인의 마음을 읽는 시간도 되었지만 내 기억 저편에 있던 날들이 찾아온다.
내 나이 마흔이 넘어가고 아이를 낳고 생활하다보니 참 많이 편해지고 느긋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다.
최영미시인의 글을 읽으면서 너무 편하게만 지내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든다.
그녀만의 확실한 생각과 사고로 살아가는 모습이 부러운 점도 있고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삶도 엿보면서 나의 과거로 여행을 한 느낌도 있어 행복한 책읽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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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인이 쓴 산문집을 좋아한다. 나에게 그 매력을 처음 알게 해 준 책은 함민복 시인의 <미안한 마음>이었다. 시인의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글을 보고 있노라니 산문시를 읽는 기분도 들었고, 글을 통해 느껴지는 시인의 따듯한 마음이 내 마음에도 온기를 가득 퍼뜨려주었더랬다. 그 여운과 감동이 참 오래도록 남아, 이후 시인이 쓴 산문집을 종종 찾아 읽곤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최영미 시인이다. 최영미 '시인'의 '산문집'이라는 이유로,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내 마음대로 이 책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다. 물론 따뜻하고,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글들이 가득한 책일 것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 혹은 기대 혹은 바람과 다른 글들을 맞닥뜨린 데서 오는 당혹감에 처음에는 책장을 넘기는 손길이 마냥 편안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이건 책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내가 '시인'과 '산문집'이라는 두 단어만 가지고 내 멋대로 책을 짐작하고 판단하는 실수를 범했던 것일 뿐. 이 책은 2000년에 발간 되었다가 절판 된 책을 개정판으로 펴 낸 것인데, 2000년에 발간된 책은 '사회평론'으로 분류되어 있는 걸 봤다. 산문집보다는 사회평론이라는 분류가 더욱 잘 어울리는 책이라는 생각이다.
이 책의 2부는 2000년에 출간되었던 책에 실렸던 부분이고, 1부는 개정판에 새로 실린 부분이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여러 신문 지면 등에 발표했던 것들이다.(글의 출처를 보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의 느낌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갈지도.) 특별히 어떤 주제가 있다기보다는, 이런저런 주제로 쓴 글들이 함께 모여 있는데, 그 점이 이 책의 제목과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의 일기가 그런 것이니까. 어제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오늘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내일은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리의 일기장이니까. 1993년의 최영미 시인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1999년의 최영미 시인은 어떤 것들에 끌리고 있었는지, 2006년의 최영미 시인은(그리고 우리 모두는) 어떤 시간들을 지나왔는지, 이 '일기장'이 우리 앞에 펼쳐보인다. 그리고 우연히 그녀의 일기를 엿보게 된 나는, 일기장의 글들을 통해 한 송이 장미 같은 최영미 시인의 이미지를 그려보게 되었다. 아름다운 장미, 그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하여 온몸 가득 가시를 달고 자신을 보호하는 장미.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전혀 알지도 못 하는 한 시인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름답고 강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마음은 여리고 상처도 많이 받는, 그리고 그런 모습을 감추기 위해 가시를 세우는 한 인간의 모습에, 나는 처음에는 불편하다가, 그 안에서 점점 나와 비슷한 점을 발견하면서 끝내는 공감하고 만, 그리고 그녀를 향한 안쓰러움인 듯 가장하여 사실은 내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 그런 기분을 느꼈다.
내가 처음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달랐지만, 그와는 또다른 매력을 풍기고 있는 책이었다. 그러고보니 올해 최영미 시인의 책을 많이 만난 편이다. 그녀는 이 단어를 끄집어내는 걸 원치 않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서른'이어서일까? 한때 '서른'이라는 단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던 그녀의 글들이 자꾸 나를 끌어당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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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내 문학의 시작이자 끝이다. 내가 쓴 최초의 시들은 일기장에 발표되었고 또 내 인생이 종말을 고하는 그날, 내가 세상에 남길 마지막 작품은 최후의 그날 아침, 혹은 그 전날 밤에 내가 썼던 일기일테니까"(138) 내가 처음 일기를 쓴 것은 언제였을까. 한때 학교 과제로 일기쓰기를 해야했던 때가 있었다. 한참 사춘기의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아이들에게 일기를 쓰라고 하는 것은 대놓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과도 같았던 그때, 학급의 모든 아이들은 숙제검사를 하는 당일 아침 열심히 작문을 하곤 했었다. 물론 나 역시 예외는 아이었지만 그래도 그 전날 문학작품을 베끼는 정도의 성의는 담을 줄 알았었다. 그 후 일기쓰기를 습관처럼 만들기 위해 잠 자려고 불을 끄고 누운 후에도 캄캄한 방 한구석에 숨겨놓은 노트를 꺼내어 날짜 한 줄, 오늘은 일기쓰기를 까먹지 않았다, 라는 어이없는 문장 하나를 남겨놓기도 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단순한 기록문학의 습작이었던 일기장이 어느새 나의 시시콜콜한 일상뿐 아니라 유치찬란한 사랑이야기라거나 우리나라의 사회,정치,문화를 언급하기도 했고 나의 세계관을 집대성하는 장문의 글을 적어놓기도 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 모든게 어쩔 수 없이 유치찬란한 나의 과거일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일까. 최영미의 산문집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라는 제목을 본 순간, 그녀의 글에서 내 마음을 엿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감히 내 글을 그녀와 비교할수는 없지만 내 일기는 나만의 문학작품인데 나 혼자 그리 생각해본다고 어쩌겠는가. 그래서 난 괜한 친밀감을 느끼며 이 책을 집어들어 읽기 시작했다. 최근의 글보다는 이전의 글이 훨씬 많았지만 그닥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또 괜히 좋아졌다. 그리 심각하게 읽을만한 글은 아니지만 또한 가볍게 웃어 넘겨버릴 글도 아니다. 짧고 굵게 간결하게 쓰여있는 글을 읽다보니 한층 더 인간미 넘치는 그녀의 본모습을 보게 되는 것 같아 또 괜히 친밀한 느낌이 들어버린다. 그녀가 익숙한 서울 생활을 포기하고 지방의 소도시로 옮겨간 후 동네지도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헤매인 글을 읽을때는 설핏 웃음이 났다. 은근히 까칠해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지도라는 것이 낯선이들을 위한 것일진데 어째 하나도 도움이 안되는 것 뿐이라며 쓸모없는 지도만들기에 혈세를 낭비하는 행태를 비판하는 것이지만, 내게는 그녀가 모든 걸 혼자의 힘으로 찾아나서고 해결해야만 하는 독립적이고 자존감이 넘쳐나는 생활인으로 보여 또 새롭다. 그리고 활달하고 사교적이지 않아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길을 익히기보다는 혼자 조용히 지도를 보며 목적한 곳을 찾아가는 전형적인 내향적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또 즐겁다. 나는 그녀의 산문집을 읽으며, 단순히 그녀의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그녀의 일상과 그녀의 생각, 삶의 자세를 읽으면서 좀 더 그녀에게 다가선 느낌이다. 예전에 각종 매체에 발표했던 원고들을 모은 산문집의 제목에 왜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라는 제목을 붙였는지 깨닫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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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끝났다> 난 이 시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는 건 제목과 시인의 이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하면 난 이 제목을 떠올린다. 왜 그럴까? 범상치 않는 제목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가... 시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2009년에 발간된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작가의 이름을 보는 순간 난 내가 알고 있는 그 이름과 같은 사람인지부터 확인했었다. 단지 내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계속 창작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기억 속에 없다고, 내 눈에 띄지 않았다고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니 참... 어쨌든 반가웠다. 책 소식이 그리고 작가의 소식이.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서른 이후로 두 번째로 만나는 최영미 시인의 책을 설레임으로 바라보았다. 책 표지가 너무나도 맘에 들었고 제목도 좋았다. 두 이끌림을 거부하지 못하고 책장을 넘기지 시작했다. 그러나 몇장 넘어가지도 않았는데 난 쓰여진 글을 보며 짜증과 거부감이 일기 시작했다. 구속이 싫다는 이유로 핸드폰을 없애 버린 후 가급적 외출을 삼가고 시간이 정해져 있는 약속를 잘 정하지 않는다는 글을 읽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외출을 줄여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사람 만나는 것도 꺼려야 하는 이유가 핸드폰이 없어 불편하기 때문이라면 이건 또 다른 구속이 아닌가 하고. 글을 읽으며 수없는 딴지를 거는 나를 발견했다. 왜 이렇게 불편한걸까? 대부분 칼럼 형식으로 신문에 기고했던 내용들인데 무엇이 내 속을 긁는지 알 수가 없다. 아집으로 둘러쌓인 과격함들이 전해져 왔다고나 할까?
이 책은 과거 2000년에 한 번 출판이 되었었다. 같은 이름으로. 굳이 따진다면 증보판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1, 2부로 나뉘어서 2002년부터 현재까지의 글을 1부로 놓고 이전에 나왔던 글을 다듬어 2부로 넣어놓고 있었다. 이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 제목이 좋고 표지가 좋고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하니까. 그런데 왜 책을 읽으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걸까?
1부를 읽는 내내 가눌길 없던 불편한 마음이 2부를 읽으면서 서서히 누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이 불편한 감정을 뭐라고 똑부러지게 표현할 수 없어 그것이 더 마음에 안들어 투덜거리는 나를 본다.
<우연히 내 읽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기대를 한순간에 -난 무엇을 기대한걸까?- 여지없이 무너뜨려버린 책과 작가에게 배신감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단지 작가가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겼을 뿐인데 난 아마도 제목과 표지에 의해 따뜻함 가득한 글을 기대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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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저자 최영미 작가가 산문집을 내었다.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나는 이 책이 꼭 읽고 싶었고 개인적으로 나는 작가의 산문집이나 수필집을 굉장히 좋아한다. 산문집과 수필집에는 소설과는 달리 작가의 생각이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나 한 주제에 대한 솔직한 답변을 얻을 수 있기에 매력이 있다. 최영미 작가의 산문집 또한 극히 개인적인 작가의 경험과 일상에서 보는 생각 그리고 그녀가 느끼는 모든 감각과 의견을 서슴치 않고 기재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나 또한 최영미 작가의 생각이나 의견에 모두 동의하며 읽지는 못했고 반면 어떤 페이지는 많은 생각을 하면서 또 다른 페이지에서는 그녀의 생각에 큰게 동하면서 읽었다. 작가 개인의 의견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에 작가들은 산문집이나 수필집을 내었을때 독자에게 좀 더 많은 평을 듣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칭찬과 꾸지람이 동시에 받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나 또한 책에 초반에 나오는 한국인의 의식이라던지 우리나라 축구의 문제점를 지적하는 곳에서는 반감을 샀던 것도 사실이고, 또 다른 곳에서는 최영미 작가의 일상적인 삶에서 웃음과 공감을 함께 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직업을 가졌기에 듣는 소리와 그에 따른 대접이 그리 좋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집을 출간한 후로 그녀를 평가하는 소리에서 그녀가 받았을 상처 등은 그녀를 다시 보게 만든 부분이다. 사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집을 통해 나 또한 그녀를 현대사회에서 앞서나가는 여성이라 생각했고, 그녀는 왠지 모르게 당차고 기가 세며 냉정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서 그녀의 글속에 있는 녹아있는 아픔이 느껴져 그녀를 좋아하게 됐다.
서른이 되기 훨씬 전부터 난 서른을 의식했다. 우리 나이로 서른에서 만 나이로 서른 살에 이르기까지 이십대 추반에서 삼십대 초반까지 몇 년간 나는 서른 살로 살았다. 인생이 초라했던 그 시절. 난 질직과 실연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p.148
그녀가 느낀 서른의 느낌은 열정적이었고 두려울게 없었던 이십대를 넘어선 것과는 틀리다. 그녀의 서른에는 아픔이 있었고, 상처가 있었으며 좌절도 있었다. 일부 매체에서 보는 그녀와 독자가 바라보는 그녀는 차이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여러 지면에 실었던 글과 수필을 모아 엮은 이번 산문집은 그녀를 다시 보게 해준 책이며, 최영미 작가만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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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나 생각의 크기가 큰 사람들은 자주 메모한다. 그리고 일기 쓴다.
난 정말, 영광스럽게도 최영미 작가의 진솔한 일기를 볼 수 있어서 참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녀는 일기에서 그녀의 문학이 탄생되었으므로 일기를 믿고, 배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생각대로 책으로도 나오니, 정말 배신하지 않는 일기장인 것 같다. 나는 일기장을 그토록 사랑했나 반문하기도 한다.
그녀가 작가가 되기까지. 그리고 서른에 사랑하는 남자가 떠나고 한국 시인으로서 살아가는 내용들이 거침없이 써있어서 좀 죄송한 말이지만, 폭소를 터뜨리는 부분도 있고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만을 백번 한 것 같다.
그녀는 타협하지 않는 진정한 예술가이며 진정한 글쟁이다. 그녀의 인생이 그러하기에! 그래서 별 다섯개를 줄 수 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