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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근대문학에서 러시아 문학은 그야말로 “하나의 현상”(김진영, 2017: 6)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러시아 문학은 개화기에서 일제 식민 치하를 지나기까지 단순히 많이 유입되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최남선, 이광수, 김억 등 우리 근대문학 거장들의 문학 세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 식민 치하에서 고통 받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전제 군주정의 폭압 속에 이전 세기를 보낸 러시아에 대한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명확한 동기는 밝혀낼 수 없더라도 허무주의적 성향을 띤 러시아 낭만주의나 음울한 정조의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특유의 “농후한 사상성과 심오한 철학성”(57)은 고통스런 현실을 살아가던 조선 독자들을 분명히 사로잡고 있었다. 한국 근대문학의 문학 형성과 발전의 과정에서 러시아 문학은 상당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어떤 식으로든 우리 문학 전통에 크고 작은 영향을 주며, 한국 문학에만 특수한 방식으로 이해되고, 흡수되고, 이따금 뱉어졌을 것이다. 그 모든 영향 관계를 개별 작품·작가론적으로 파악하고 전체적인 시선에서 조망해내는 일은 까마득한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문학이 한국 근대문학에서 일으킨 열풍의 정도를 고려한다면, 우리 문학 전통과 그 방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개별 작품들에 한정된 단순 비교를 뛰어 넘은, 보다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한국 근대문학의 러시아 문학 수용』은 그 대장정의 서막을 여는 시도이다. 2. “한국 근대문학에서 러시아 문학의 수용과 영향에 관해 종합적이고 구체적으로 검토하려는 시도”(ⅴ)로서 시작된 이 책은, 한국 근대문학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러시아 리얼리즘의 대표적인 세 작가 똘스또이, 뚜르게네프, 체호프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본격적 논의에 앞서 이 책은 한 국가, 한 시대 문학 간의 접촉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흡수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문학적 수용의 관점에서 검토되어야 하는 문제로 보고 있다. 따라서 한국 문학과 러시아 문학을 각각 문학적 주체로 상정하려는 태도를 견지하며, 이를 전제로 해서 “궁극적으로 두 문학 간의 대화적 상호 관계를 총체적으로 규명”(ⅷ)하고자 한다. 이 책은 작가별로 ‘번역을 통한 수용 양상’과 ‘비평을 통한 수용 양상’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세 작가가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 근대문학에 수용되었는지 시대별로 그 양상을 상세하게 들여다본 후 큰 경향을 도출해내고자 한다. 당시 번역된 작품과 원문과의 꼼꼼한 비교와, 잡지 및 신문 기고나 단행본의 형식으로 발표된 당대 문인 및 문학 연구자들의 논평과 연구 자료들을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논의는 진행된다. 3. 그런데 수용 양상을 중심으로 진행된 연구에서 “러시아 문학의 수용과 영향에 관해 검토”한다는 연구의 목적을 위해서는, 과연 그 수용 양상에 대한 논의 가운데서 수용과 영향 두 가지 모두를 체계적, 실증적 연구를 통해 종합적인 시각으로까지 이끌어냈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한국 근대문학의 러시아 문학 수용 과정에서 러시아 문학과 한국 근대문학을 상호적 타자로 설정했으면서, 러시아 문학이 주체로서 한국 문학에 이입되던 과정에 대해서는 빼곡히 자료를 나열한 후 그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경향을 정리해놓고, 정작 한국 근대문학이 주체로서 어떤 식으로 ‘타자’ 러시아 문학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어떤 식으로 자기화했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하면 우리 근대문학의 기원이 서구 문학의 일방적인 모방으로 이해되거나 혹은 논의 자체가 구체적 현상이 없는 문단 내에서의 학술적 차원에 머무르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논의의 과정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개별 자료에 대한 꼼꼼한 분석과 함께 작품 간의 비교를 통해 그 자료가 시사하는 바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시선에서의 분석이 동시에 잘 이루어졌는가. 둘째, 이를 바탕으로 한 수용 당시의 경향의 도출이 비약적으로 이뤄진 것은 아닌가. 마지막으로 그 수용 양상에 대한 분석이 한국 근대문학에 끼친 러시아 문학의 영향까지 보여주고 있는가. 한국 근대문학의 똘스또이, 뚜르게네프, 체홉 세 작가 수용에 대한 연구로 이루어진 이 책은, 연구의 대상이 되는 작가에 따라 그 과정에 있어서 조금씩의 편차를 보인다. 4. 이 책에 따르면 똘스또이의 경우, 1906년 《조양보》에 처음으로 소개된 이래로, 계몽이라는 시대적 요구 속에서 한국 근대문학에서 작가라기보다는 사상가이자 성인으로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근대 내내 지속되었다. 그것은 주로 그의 단편과 ‘사상적 위기’ 이후 윤리적, 종교적 색채가 강한 후기 작품들이 선택적으로 번역되던 양상과 맥을 같이 한다. 이 시기 똘스또이 작품은 문학 연구 분야에서는 1910년대 톨스토이에 대한 개괄적이고 모호한 소개에 그쳐있던 수준을 넘어, 1920년대에 들어 학문적 태도의 성장과 함께 톨스토이의 사상적 궤적을 나누어 조명하려는 보다 비평적 시도들이 이뤄지고, 그러한 바탕에서 1930년대 해외문학파와 카프(KAPF)의 비평적 활동을 필두로 “괄목할 만한 수준”의 연구가 행해지고, 거의 성인으로 추앙받다시피 한 일률적인 톨스토이관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번역을 통한 수용’과 ‘비평을 통한 수용’ 두 장 모두에서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개별 자료들에 대한 꼼꼼한 분석이 눈에 띄는 연구다. 한국 근대문학 전반에 대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광수, 홍명희 등 개별 작가가 어떤 식으로 톨스토이를 받아들였는지를 통해 그 작가의 예술관, 세계관에 미친 톨스토이의 영향이 짐작 가능하다. 그런데 1920년대의 비평들이 1910년대에 비해 대단히 발전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1930년대의 비평에 비해서는 내용적 측면에서 매우 미흡하며, 따라서 1930년대 열리는 본격적 비평의 장을 ‘마련’하는 데 그친다는 서술이 개별 작품에 대한 논의에서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바로 시대적 경향으로서 도출된다는 점에서 비약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은 각각의 논문들이 전·후대와 어떤 식으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두드러지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그 논문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요약 및 소개하는 데에 그치고, 이후 해당 시기의 연구들 전반에 대한 일반적인 경향을 도출해내는 데에 원인이 있다. 내용적 측면에서, 요약된 1920년대의 연구들이 1930년대에 비해 눈에 띄게 일차원적이거나, 주된 논지에 있어서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대적 구분에 대한 설명은 보다 보충이 필요하다. 1930년대 톨스토이에 대한 다양한 연구들이 소개되고 있는 49쪽에서 51쪽은 연구들의 주요 주장들만을 나열했다는 점에서 특히 아쉽다. 아마 그만큼 톨스토이가 한국 근대문학의 문인들을 보여주는 자료가 많았으며, 모두 소개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료들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문학사적 맥락에서 그러한 자료들이 어떻게 톨스토이 수용의 장에서 역할을 하고, 이후 이어지는 연구의 촉발제가 되는지, 어떠한 이유로 주목할 만하고 어떠한 이유로 그저 그런 논의에 머무는 것인지에 대한 서술이 보다 친절히 이루어졌다면, 시대 경향의 도출에 있어서의 드는 비약의 느낌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5. 뚜르게네프에 대한 책의 논의는 매우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문학에서 러시아 문학의 수용과 영향을 밝힌다는 연구의 목적을 가장 높은 정도로 달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크게 번역과 비평이라는 두 측면에서 작가의 수용 양상에 대한 논의를 전개시킨 체홉과 톨스토이 수용 연구와 달리, 이 장에서는 한국 근대문학에 수용된 뚜르게네프 문학을 크게 시, 소설, 극이라는 세 장르로 나누고 각 장르별로 번역의 양상을 살펴본 후에 비평과 함께 실제 한국 근대문학의 창작 작품 속에 뚜르게네프가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고 있다. 유독 뚜르게네프의 연구를 장르별로 나눈 것은 뚜르게네프 문학에 있어서 수용층의 문학적 입장이 장르에 따라 달랐다는 사실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뚜르게네프 시의 수용은 주로 순수예술을 지향하던 해외문학파 작가들(김억, 나도향 등)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그의 산문시는 한국 근대시 형식을 위한 다양한 모색이 이루어지던 시기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까지 이어지는 순수문학 지향적 작가들(김억, 김소월 김상용 등)의 시 속에서 지배적인 우울, 허무주의, “스윗-쏘로우(sweet sorrow)”, 감상적인 정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반면 뚜르게네프의 소설은 1920년대 초 순수예술 지향적 작가들에 의해 초기 중편 작품들이 번역되는 듯하다가, 1920년대 중반 프로문학이 성장하면서 주로 카프 계열의 경향적 작가(김기진, 박영희)들에 의해 번역 및 수용된다. 그의 소설이 주로 이념적·사상적인 차원에서 읽혔던 것은 사실이지만, 뚜르게네프의 소설을 순수문학적 관점에서 수용한 이태준과,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삼대> 등에서 뚜르게네프 소설의 장면과 구조를 차용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탐구자신의 소설 속에 풀어내는 등 뚜르게네프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자기화 한 염상섭은, 뚜르게네프 문학이 지닌 순수예술적 측면과 경향적·사회적 측면 모두를 한국 근대문학이 저마다의 문학적 입장 속에서 다양하게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위와 같이 뚜르게네프 연구에서는 러시아 문학이 구체적인 한국 근대문학의 생산에 미친 영향을 대략적으로나마 규명해보려는 책 속에서의 유일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분량이 많지 않음에도 매우 흥미롭다. 특히나 김기진과 염상섭 같이 뚜르게네프를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서 자신의 문학 속에서 자기화시킨 작품들에 대한 분석이 날카롭다. 책의 머리말에서 밝혔듯 이러한 개별 작품·작가에 관한 비교문학적 연구는 추후의 연구에 맡기는 부분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번 연구에서 시도가 되었으며, 러시아 문학의 수용이 한국 근대문학에 끼친 영향을 살피는 데 있어 구체적 창작과의 비교가 없던 톨스토이, 체호프의 연구에 비해 훨씬 직관적으로 이해가 된다는 점에서 더욱이 앞으로의 연구가 기대가 되게끔 한다. 구체적 창작에 한해서의 수용이 아니더라도, 뚜르게네프가 한국 근대 시문학에 끼친 영향의 도출은 매우 논리적이며 납득할 만하다. 뚜르게네프 산문시의 특성, 한국 근대문학에서 뚜르게네프 산문시를 수용·이해한 방식, 그리고 한국 근대시 형식 성립의 발전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과 함께 전통적 시 형식의 해체와 함께 자유시의 어떠한 모델을 필요로 하던 당시 문단의 상황을 함께 서술하는 전개 방식은, 우리 문학사적 맥락 속에서 뚜르게네프의 시가 들어오던 순간과 이후 과정들을 매우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6. 체홉에 대한 논의에서는 ‘번역을 통한 수용 양상’과 1930년대 극단 극예술연구회와 학생극단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극 문학에 대한 분석이 흥미롭다. 1920년대 태동기를 거쳐 1930년대 성립기를 맞은 체홉 번역문학은 단순한 내용 전달의 측면을 넘어서, 함대훈과 김온 등 러시아 문학 전공자들의 등장과 함께 체홉 특유의 문체적 간결성과 “절제의 미학”을 구현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높은 수준에 이른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인데, 1920년대 권보상의 번역에서 보여진 생산적, 창조적 자기화의 노력이 1930년대 함대훈의 번역과 표면적 간결성을 특징으로 하는 ‘체홉 텍스트의 내적 논리’에 대한 이해의 여부에서 다르다는 것이 세부적인 인용과 함께 자세히 서술되면서 체홉 번역의 발전 양상이 잘 설명되었다. 극 문학에서 현민과 박영희, 안영일 등의 사이에서 체홉이 연 대화의 장은 당시 근대문학에 있어서의 체홉의 영향력과 그의 문학을 바라보던 다양한 시각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체홉에 대한 각기 다른 이해들이 근화학우회의 1932년 〈구혼〉 공연이나 극예술연구회의 1934년 〈벚꽃동산〉 공연 등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극 속에 구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은 체홉이 우리 근대 극문학에 불어넣은 활기와, 그로부터 나올 수 있던 다양한 연극론의 전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체홉 소설에 관해 ‘비평을 통한 수용 양상’의 분석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나는, 근대 한국에서 1920년대가 1930년 전성기로 넘어가는 일종의 비평적 과도기라는 주장이, 개별적 작품에 대한 보다 세세한 서술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톨스토이 수용’ 연구에서와 같은 아쉬움을 낳고 있다. 소위 “객관성의 문학”이라 평가되는 체홉의 소설 및 희곡들은 냉담할 정도로 객관적인 표면적 특성 때문에 1920년대와 1930년대 내내 한국 근대 비평 분야에서 많은 연구들을 낳았는데, 쏟아지는 연구의 수만큼 이들을 체홉 연구사에서 제대로 위치시키지 않으면 독자의 입장에서 이 연구들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에 이르기 힘들다. 따라서 1920년대 체홉 연구들이 파편적인 차원에 머물러 “총체적 내적 지향에 대한 인식”에는 다다르지 못하는 반면, 1930년대에 이르러 체홉 문학의 총체적 차원의 규명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객관성의 개념적 실체”가 무사상, 무관심 등의 오명에서 벗어나 다양한 이해들을 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한다는 책의 주장에 공감을 하면서도 1920년대 연구들에 대한 다소 냉정한 평가에 의문을 품게 된다. 특히 1920년대 박영희의 체홉 연구와 연성흠에 의해 번역된 추꼽스끼의 체홉론은 현재 체홉과 관련해서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야기되는 것들이라, 그것이 후대의 연구에 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미흡한지에 대한 설명이 보다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체홉은 톨스토이에 비해 번역된 작품의 수도, 진행된 연구의 수도 특히 많아서 그에 대한 책의 논의가 (소설에 관한 한) 개별 자료들에 대한 소개에만 그친 인상이 더욱 크다. 그의 소설의 수용에 대한 연구에서도 본론에서의 보여준 실증적 연구들을 통해, 체홉의 문학이 “한국의 근대 소설문학과 극문학의 형성과 발전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서론의 논지를 극문학의 부분에서 증명해낸 것과 같이 차근차근 전개해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참고문헌 권영민·박종소·오원교·이지연, 『한국 근대문학의 러시아 문학 수용』,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김지연, 『시베리아의 향수』, 이숲, 2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