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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겨지는 책장이 아까운 작품이다. 읽어야 할 분량이 줄어들수록 아까운 마음이 든다. 그만큼 좋은 작품을 만났다. 지식인의 날카로운 시선은 나의 흐리멍텅한 시선에 자극을 선사한다. 그 자극을 맛보는 짜릿함이란 너무나 즐거운 일이다.
'불량배의 역사를 조사해 보면 그들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은 하나의 제조품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불량배를 교묘하게 다루는 체계보다는 정직한 사람들을 발전시키는 체계를 찾는 편이 낫다. 우선 학교를 개혁해야 한다. 그러면 감옥을 개혁할 필요가 거의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p.93 제2편 부의 광맥 中)
최근에 자주 눈에 띄는 잔인한 범죄들은 우리에게 어떠한 경고를 주고 있는가. 잔인한 범죄가 증가할 수록 사람들은 잔인한 법을 만들기를 원한다. 과연 그 잔인한 법이 잔인한 범죄를 줄이는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내게 그 어느 때보다도 내적으로 행복했던 시절이 고교시절이다. 입시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도 선생님들 덕분에 건강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유난히 책을 많이 읽어라 하시는 그리고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청소년들에게 가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학교 역시 그에 못지 않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빈자가 식량을 얻지 못하는 것은 부자가 자신의 부를 붙들고 놓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부자가 그것을 비열하게 쓰기 때문이다. (...) 사회주의자는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것을 보고 <저 강자의 팔을 부러뜨려라>고 외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 힘센 팔을 더 좋은 목적에 사용하도록 가르쳐라>고. (p.200 제4편 가치에 따라서 中)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는가. 순간의 감정에 따라 다수를 따라가지 않았는가. 그렇다. 비판적인 사고를 가질 필요가 있다. 다수를 따르더라도 나의 주관이 포함된 의견에 따라가야 할 것이다. 학교의 중요성은 편성된 교과목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전공(?)과목 '경제'는 과연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었다. 작가는 말한다. '경제학 최대의 변수는 <애정>이다'라고. 학교의 역할 역시 그 애정과 정직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점수 높은 학생을 배출하는 학교는 작가가 언급하는 경제학의 어긋난 생산물과 같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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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가 없다. 영혼 있는 사람이 없단 뜻인가?
경제학의 기본 전제는 인간은 사익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을 통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러스킨 이후에도 백 년 넘게 이 전제는 받아들여져 왔다. 여전히 경제학은 성업(?) 중이다.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케인즈 등의 경제학을 공부해보았는데 내 지력이 낮은 탓인지 모두가 맞는 말 같았다.
그들이 좋아하는 합리적 차원에서 보면 정말로 맞는 말이다. 누구도 손해를 보고 물건을 사거나 팔려 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목표는 각자가 가진 빵을 키우는데 있다.
그러나 사회 전체가 가진 자원의 양은 한정되있으므로, 누군가 더 많이 가지면 누군가 가질 몫은 적어지게 된다. 경제학의 세계에서 사람들의 관계는 제로섬 게임과 같으며, 상대는 우리에게 타협할 존재나 또는 경쟁자일 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인간이란 과연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차가운 존재들일까? 삶 속에서 인간의 행동은 단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만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도 더 간절히 사랑을 구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좋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내가 우리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사장님이 내게 월급을 많이 주기 때문이 아니다. 소위, 월급만큼의 이익이 주어지기 때문에 야근을 불사하며 일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나의 '노동'에는 월급이란 변수는 사실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엔 사장님의 배려, 그의 나에 대한 믿음, 회사에 대한 애정, 일 자체에 대한 나의 열정 등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회사를 정상화하고 노사 분규 없는 좋은 회사를 만들려면, 노조를 억압하고 강압할 것이 아니라, 또는 월급으로 구슬릴 것이 아니라, 사장이 부하직원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러스킨이 제안하는 회사의 모습은 '가족'의 형태를 닮아있다. '돈'이라는 매개로 만난 사람들이 아니라 '애정'이라는 매개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월급이라는 것도 숙련자이든 초보자이든 똑같이 줘야 한다. 노동이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훌륭한 것을 취급되지 않으면 삶 자체가 공허해진다. 월급을 나에게 이득을 그만큼 주기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제목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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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자본주의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극단에 이른 이 획일적인 평가의 잣대는 우리를 숨 막히고 답답하게 조여든다.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욕망과 그로 인한 시기와 경쟁이 가득한 이 땅에 행복이란 점점 요원해지는 것만 같다. 과연 올해는 이 꽉 막힌 숨통을 열어줄 희망의 바람이 조금이나마 불어올까.
19세기 영국에도 산업혁명 이후 최대의 경제적 번영이 찾아온 듯 했지만, 자연 파괴와 빈곤으로 인해 불평등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 같은 부작용을 해소할 번듯한 사회 정책 하나 없던 산업 혁명의 초창기에, 오로지 부의 확대만을 모색하던 정통 경제학파에 맞선 이가 존 러스킨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이후 7년 후 등장했다는 사실을 본다면 러스킨은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정통 경제학파에 대항한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다.
러스킨은 ‘부유’란 ‘빈곤’의 상대편에 놓이는 것이라 정의한다. ‘부자’가 되는 기술은 재산을 모으는 기술일 뿐 아니라, 이웃이 자기보다 적게 소유하도록 획책하는 기술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자신만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최대한의 불평등을 확립하는 기술”이라고 주장한다. ‘가장 값싼 시장에서 사고, 가장 비싼 시장에서 팔라’는 상업훈과 같이 인간의 지성에 수치스러운 사상은 없다. 집에 불이 난 뒤 숯으로 변한 목재가 잔뜩 쌓여 있다면, 그곳에서는 숯이 쌀지도 모른다.
자유방임주의를 주장하는 정통학파에 맞서는 선구자, 마르크스의 경제학 이론이 유물론적 접근이라면 러스킨은 ‘사회적 애정’을 바탕으로 한 유심적, 인도주의적 경제학.
이처럼 러스킨은 경제는 정의와 정직과 같은 ‘사회적 애정’을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인도주의 경제학을 주장했다. 일한 자에게는 그에 맞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이러한 부가 다시 정당한 분배를 통한다면 빈곤의 가장 큰 해악인 무력감도 해소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포도밭 주인이 저녁에 나와 일한 사람에게도 아침에 나와 일한 사람과 동일한 보수를 줬다는 성경 일화의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비유는 결코 노동량에 무관한 절대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비록 뒤처지는 기술, 능력을 타고 낫다고 해도 그에 무관하게 노동권, 생존권을 보장해 준다는 사회적 애정, 관용, 포용의 의미이다.
러스킨의 주장은 무조건 저가의 생산, 소비를 부르짖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러한 시장 논리는 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 차별과 불평등을 양산해왔는가. 우리는 많은 노동자의 정리해고와 착취를 통한 그 돈을 주머니에 좀 더 남길 수 있어 더 행복 한지를 자문해보자.
러스킨은 생산만큼 중요한 것이 ‘소비’라고 강조한다. 이는 현명한 소비가 곧 올바른 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소비는 단순히 공급과 수요에 따른 법칙만이 아닌 인간 개개인의 주관적 유용성에 달려 있다. 같은 물건이라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사용하려는 의지에 따라 유용성이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유용성은 인간이 그 물건에 느끼는 주관적 가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소비란 물건이 적재적소, 필요에 맞게 소비되는 상태를 말한 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빵이라도 영양실조의 어린이와, 과다 섭취로 비만 상태인 어린이 중 유용성은 다를 것이다. 또한 푸성귀도 그것은 빈곤한 한 끼로 느끼는 사람과 몸을 생각하는 건강한 밥상으로 여기는 사람과의 가치는 다르다. 이처럼 바른 생산과 소비의 해법도 가치의 상대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품으로 다시 회귀된다.
신자유주의를 맹신했던 현 경제학자들은 이와 같은 러스킨의 주장을 다시금 상시해볼 필요가 있다. 그 어떤 신자유주의 경제적 이론도 오늘날 세계를 뒤흔든 미국, 유럽의 금융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다. 인간이라는 미지수를 배제한 수학적 이론, 수치는 그 무엇도 바르게 예측할 수 없다. 자멸을 향해 폭주하던 인간의 검은 욕망도, 서로 행복하길 바라는 상생을 향한 바람도, 모두 우리가 인정하고 고려해야 할 인간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간의 이러한 심오한 본질을 이해하고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성향이 발휘될 수 있는 풍토와 분위기의 마련일 것이다.
다양한 시대를 통해 수많은 인류의 마음을 지배해 온 갖가지 망상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기묘한 - 어쩌면 가장 명예롭지 못한-망상은, 사회적 행동의 규범은 사회적 애정의 작용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결정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소위 경제학이라는 근데 학문일 것이다.
인간적 애정, 정직에 대한 호소는 다소 진부하고 공허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경제학을 비롯한 모든 인간에 대한 학문이 그 주체인 ‘인간의 마음, 영혼’을 배제하고는 이루어진다는 러스킨의 주장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러스킨의 비판처럼 ‘인류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망상’을 지닌 경제학이란, 마치 ‘인간이 뼈가 없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 체조학’일 뿐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