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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국사시간 일제시대의 ‘신여성’ 에 대해 접하긴 했지만 이 책의 주인공 최영숙은 흔하지 않는 신여성 중에서도 특별하고 (제목처럼) 빛나는 사람이었다. 지금으로부터 90여년 전 1920년대 초 .16세에 조선땅을 떠나 중국 난징에서 유학을 마치고 나라의 독립과 여성 및 노동운동을 위해 또다시 꿈을 품고 홀몸으로 서전(지금의 스웨덴) 으로 가서 학비를 벌면서 스톡홀름대학 경제학 학사까지 받은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천재적인 여성을 겨우 오늘에서야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남성중심 가부장 사회가 가졌던 여성에 대한 편견의 문턱이 현 세대에서야 낮아진 배경도 있을 것이다. 나는 소설의 70프로를 차지하는 스웨덴 유학시절 그녀를 보며 ‘현시대에서도 힘든 일일텐데 90년전 일제치하속에서도 이런 여성이 실재 했었구나!’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꿈과 열정으로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삶을 살았던 그녀를 알게 된다면 그 누구라도 그녀를 흠모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소설의 후반부를 읽으면서 한국에서의 생활에서 그녀의 여성운동에 대한 열정, 나라를 위해 작은 역할을 하려는 의지는 슬프게도 미련스런 것이었고, 고집스런 자존심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그녀를 책망하고 싶어졌다. 아이를 임신하고 상태에서 스스로를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한 자신의 역할만 앞세워 무리하다 자신과 아이의 목숨까지 위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인도인)의 아이를 가진 것만으로도 조선에서는 타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그 때문에 그동안 최영숙이 가졌던 꿈이 산산조각 부서질까 타국의 아이 아빠와 부모님을 비롯하여 그 누구에게도 임신사실을 알리지 않은 그녀였다. 그것으로 그녀가 치른 댓가는 스스로에게 가혹한 시간이었다. 가족 중 누구 하나 돈을 벌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동안 유학생활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한 책임에 그녀는 가장이 되어 무슨일이라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조선최초의 서전 유학생이라는 명함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 일본 경찰의 사전 작업으로 그녀는 어떤 일자리도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콩나물 등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여성운동의 기반을 다지려 했지만 그마저도 의지되로 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아무리 위대한 천재의 능력일지라도 기회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말이 떠오른다. 아시아의 최초의 서전 유학생으로서의 졸업장은 조선에서는 한 끼 저녁 밥상보다 못한 종이 한 장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정이 있어도 현실을 무시하고 열정에만 매달리는 것은 얼마나 사치스러운 자존심인가. 5년동안 서전에서 유학을 하고 구라파를 유람하며 조선으로 돌아온 그녀였기에 그동안 조선의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서 잠시나마 편안하게 보낸 시간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 꿈이었던 여성운동, 노동운동을 위한 값을 치르려는 초조한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과 아기가 어려운 환경으로 굶을 지경까지 이르렀다면, 더구나 독감을 앓았지만 뱃속아이를 위해 약을 먹지 않고 벼텨나갈 정도였다면 상황이 다르다. 인도에 있는 부유한 남편에게 전갈한통만 쳤었어도 영양실조나 임신중독증은 그녀와는 무관한 것이었을 게다.(슬프다..) 이 상황에서 내가 감히 꿈속에서라도 그녀를 만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열정이 있고 의지가 굳은 것이 아니라 미련스럽도록 자존심만 셀 뿐이에요!’라고... 그녀는 자신에게 기회를 만드는 것에 있어서는 현명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조선을 떠나서는 그렇게 멋진 유학생활을 했었던 사람이었는데 ...스웨덴에서 경제학 학사학위까지 받았다 한들 일제식민지 현실에서의 적용은 삶의 궁핍함 속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경제학에 문외한인 나지만 그것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소위 ‘레버리지’의 이익을 추구하는 학문 아닌가? 현실이 아무리 그녀의 의지와 괴리가 있었다 하더라도 스스로에게 조금만 더 타협적이었다면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을수 있지 않았을까... 당시의 현실에서 이상적으로 보이는 독립적인 여성상만 쫓아가다 보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조차 타인에게 구걸하는 것이라 자존심 상해했던 것이었을까? 26년 동안 혼자 힘으로 스스로의 삶을 일구어온 그녀이기에 아무리 위급한 때라도 남편의 도움을 받아 건강을 찾고 아기를 출산 후 다시 나라를 위하는 일에 참여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녀가 상상도 하지 못할 사치스런 것이었을까? 그녀는 아기를 출산하며 죽음을 맞는다 . 소설에는 아기를 포기할 상황에서도 ‘아기 만은 살려달라며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모정으로써야 당연한 것이지만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이 영향을 줄 수 없는 조선의 현실에 대해 체념한 것이리라. 이렇게 그녀는 조선의 여성․노동 운동에는 이렇다 할 발자국도 남기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러고 보면 조선여성 최영숙은 조선과는 인연이 없던 사람이었다. 차라리 유럽에서 더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영어, 일어, 중국어, 스웨덴어 등 언어에 능통하다는 것도 그 증거이다. 차라리 황태자가 자신을 유능한 재원으로 인정해주는 스웨덴에서, 아니 사랑하는 남편과 인도에서 계속 거쳐하면서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나갔더라면, 후세가 칭송하는 역사의 거목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무척 아쉬움과 미련이 남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헛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대에도 그런 천재를 만날 수 있겠는가? 왕립 도서관에 그녀의 흔적과 스웨덴 황태자가 그녀에게 보인 호의만 보더라도 그녀가 스웨덴에서 보인 의지와 기지는 서방국가에게는 귀감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또한, 그녀는 비록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후세의 사람들은 많은 메시지를 느낄 것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물질과 기회가 풍부한 이 현대 사회에서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 수 있을까? 나의 안일한 생활을 되돌아 보며 생각한다. '나의 인생의 목적과 의미는 무었일까? 나는 내가 선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 다시금 최영숙을 기리며 그녀의 정신을 내 가슴 한켠에 모셔두고 살고 싶다. 최영숙 씨! 당신의 그 열정이 지금 후세에까지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용기 있게 꿈꾸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갈 것 입니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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