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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책을 읽을 때, 이 책이 전체 몇 페이지인가를 살펴보게 된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책의 페이지를 살펴보면 대략 그 책을 읽는데 몇 시간이 걸릴 것인가가 대충 나온다. 요즘 보통 나오는 책들이 300~400 페이지 정도이고, 조금 두껍다고 하면 5~600 페이지-물론 그 이상의 두께를 가진 책들도 수두룩하다-이다. 워낙 두꺼운 책들을 많이 만나다보니 200페이지 안팎의 책들은 가소롭게 느껴진다 ㅡ. 『싱글맨』과의 만남이 그랬다. 200페이지를 갓 넘기는 얇은 책, 『싱글맨』ㅡ.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에서는 첫 만남에서의 생각을 완전 바꿔버린다 ㅡ. 얇지만 그 내용마저도 얇은 책은 아니라는, 어쩌면 당연할지로 모르는 생각들을 하게끔한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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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은 ‘조지’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58세의 중년의 남성이고, 대학교수이다. 그는 연인을 잃었다. 그런데 그 연인이 또 남자이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연인을 잃은 58세의 중년, 대학교수이자 동성애자인 남자의 이야기이다. 애인을 교통사고로 잃은 조지의 일상 중 하루를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조지는 그의 죽은 연인, 짐의 여자 친구를 찾아가고, 쓸데없이 어린 소년과 경쟁을 하고, 어느 해변의 바에서는 제자를 만나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 남들과 다르다면 다르고, 평범하다면 또 한없이 평범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큰 사건 없이- 잔잔하면서도 세심하게 펼쳐진다 ㅡ.
책의 마지막에 옮긴이는 ‘내가 10년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이렇게까지 감동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진심을 생각한다’라는 말을 했다. 삶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단 한 남자의, 단 하루의 이야기로 표현되어 있어 내가 온전히 이 책을 이해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런 생각들이, 이 책을 읽은 후 -감히- 감동을 받았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있어서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닌지 ㅡ. 나 역시도 10년 후 다시 이 책을 집어 들게 된다면 그런 감동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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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2009년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콜린 퍼스) 수상, 영화 싱글맨의 원작소설 행복을 느껴본지 오래되었지만, 다시는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복을 갈구하는 남자의 슬픈이야기. 이 책의 배경이 너무 흥미롭다. 1960년대이다. 무려 40년전에 쓰여진 소설인 것이다. 하지만 4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그 스토리는 더욱 더 가슴을 애절하게 한다. 책이란 것이 그런 것이 아닐까? 된장, 청국장, 김치처럼 묵히면 묵힐수록 더욱 더 맛있는 감정을 선사해주고 있다. 1960년대의 베를린은 2차 대전 직전이다. 이때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무서움, 두려움을 간간히 느낄 수 있다. 사재기를 하는 풍경들도 보여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난 어떠한 감정을 지속적으로 느껴왔다. 어떤 감정인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덮는 순간 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바로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이었다. 존재하는지 존재하는지도 모르던..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 책의 모든 사람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책은 독일에 가난한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책에서 중요한 “퀴어”라는 의미는 부정적인 의미이다. 요즘에는 게이라고 쓰이고 있지만 동성애자라는 개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멸시받고 무관심 받고 있다. 주인공에 대한 생각은 소설속이나 현실속이나 다를 것이 없다. 시간이 40년이나 지나도 사람들이 퀴어에 대한 생각은 하나같이 똑같다. 사람들은 내 주위에 있지 않다면, 내 사람중에 그런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이 뭘 하든지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다는 방관주의를 펼치고 있다. 사실 나도 그리 반가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난 동성애자에 대한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는 더 애착이 가게 만나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편안한 친구처럼. 여기서 조지의 진정한 친구인 샬럿처럼 말이다. 지성인이라 생각하며 조지를 어설프게 이해할 생각은 없다. 그런 티를 내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아무런 희망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행복을 찾으려는 그가 너무 자랑스럽고 부럽기도 하고 자극이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가 너무 애처롭게 느껴진다. 조지는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한다. 조지를 보는 내내 난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을 난 지금 젊은 나이에 보았다. 하지만 그 상실의 아픔, 애인을 잃은 슬픔을 어떻게 가볍게 넘길수 있겠는가... 치유해도 나아지지 않는 그 무언가를.. 조지는 힘겹게 괴로운 나날을 보내며 싸우고 있다. 여기서는 조지를 보는 제3의 시각보다는 조지 자체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가 보여주는 이야기.... 동성애자를 떠나서 한 남자의 사랑을 떠나보낸 아픔을 함께 느껴보자. 행복을 위해 싸우는 한 사람의 이야기. 단지 그런 소설이다. 당신이 거부감을 느낄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당신의 어리광을 받아줄 만큼 이 책은 그럴 여유가 없다. 책에서도 뿜어져 나오는 슬픔은 표지만 보아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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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이의 하루 - 겪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슬픔
자신의 인생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과 상실감은 어떤 위로로도 채워지지 않는 고통일것이다. 세월이 약이라고도 하지만 홀로 남겨진 이가 보내야하는 시간의 의미는 그전과는 다른 것일것이다.
1960년대를 살아가는 58세의 대학교수 조지는 사랑하는 연인인 짐을 갑작스러운 사고로 떠나보낸 후 육신은 살아있으나 정신은 죽은것과 같은 무기력한 하루를 하루를 살아간다. 준비된 사별과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사별...중 어느 것이 더 남겨진 사람이 덜 고통스러울까를 논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조지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다가온 이별에 자신을 주체하기가 어렵기만 하다. 인생의 마지막을 같이 보내기 위해 마련한 집에서 조지는 매시간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짐을 따라 죽을수도 없기에 그는 말 그대로 시간을 죽이며 살아간다. 우리는 흔히 사랑이야기하면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어 육체가 노화한다고 해도 마음까지 노화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가슴의 두근거림은 여전하지만 그것을 표현하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사랑의 소수자들 동성애자인 조지는 1960년대에 살아간다. 2000년인 지금도 동성애자의 사회적 인식 특히나 동성간의 결혼은 서구 사회에서도 완전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조지는 완전히 홀로 살아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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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특별한 사건이 발생한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그것은 갈무리 되고, 어떠한 결말을 맺는다. 그 후에 관객들은 그 결말에 대하여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면서 퇴장하지만, 서사 안에 남겨진 자는 계속해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사건이 남긴 후유증들은 삶의 미세한 틈으로 속속 들어와 박힐 것이다. 남겨진 자는 그것을 참아 내거나, 그것에 굴복하거나, 혹은 무력해지는 방법으로 하루하루를 스쳐갈 것이다. 그러니 일상은 오로지 남겨진 자의 것이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맨> 은 남겨진 자 ‘조지’의 어떤 하루를 그려내고 있다. 특정한 하루가 아닌 ‘어떤’ 하루라 지칭하는 이유는 이 작품 바깥에 있는 조지의 또 다른 하루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는 연인 ‘짐’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의 부재를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었고, 있고, 계속 있을) 일상 곳곳에서 확인하고 깨달으며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맞붙여왔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흘렀고, 그러다 보니 볼품없이 늙어가고 있다.
조지는 그 누구보다 ‘홀로’다. 심지어 자신의 육체 앞에서도. 그는 본래의 자신, 사람들이 원하고 기대하는 모습(조지는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을 연기하는 자신, 그리고 타인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경계 짓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깨닫게 되는 건, 자신과 누구보다 가까웠던 짐이 곁에 없다는 사실이다. 맥락 없이 자신을 향해 쳐들어오는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슬픔으로 인해 조지는 연인에게 보여주기 싫었던 부분들까지 서슴없이 표출한다. ‘조지 아저씨’,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느낀다. 인간은 때때로 무언가를 잃었을 때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곤 한다.
또한, 짐의 부재가 확인된 그 시점부터 조지에게 과거란 추억이나 기억이 아닌 그저 ‘지나간 일’이다. 아무리 과거를 미화하고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다한들, 앞으로 계속될 노화와 매일 아침 부엌의 스토브 앞에서 잠깐씩 스치던 짐의 팔꿈치를 떠올리고, 슬퍼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커피 내릴 준비를 하는 자신의 어떤 하루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대신 조지는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고 몰입하고 파헤친다. 짐에게서 떨어져 나온 자신에 대해 사유한다. 하지만 내리게 되는 결론은 언제나 간단하다. 트럭에 치인 사람이 자신이었다면, 샬럿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을 사람은 짐이었을 것이라는, 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라는, 그야말로 우연에 관한 심심한 진술뿐.
02.
<싱글맨>은 아침에 홀로 일어나 자신의 삶이 ‘급히 끝날까 두려워’ 하며 죽음을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해, 온갖 사유로 뒤덮인 하루를 보낸 후, 침대에 누워 ‘새로운 짐을 찾아야 한다고’, ‘사랑을 해야’,‘현재를 살아가야 한다’고 미약하게나마 희망을 좇기로 마음먹지만, 결국 두려워하던 ‘급한 끝’을 향해 달려가는 조지의 하루에 관한 이야기다. 나와 당신은 그의 하루에서 도대체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
조지는 자신이 두려워하던 ‘급한 끝’을 기어코 맞이하며 깨달았을 것이다. 남겨진 자는 철저하게 혼자라는 사실을. 우리가 서로를 너무나 많이 사랑해도, 연인보다 먼저, 혹은 늦게 세상을 떠난다하더라도 결국 당신은 완전한 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물론, 조지의 죽음이 누군가에겐 슬픈 결말일 수 있겠으나, 나는 이 끝이 조지의 어떤 하루들이 모여 이뤄낸 성과처럼 느껴진다. 조지는 짐과 긴 시간동안 사랑을 했고, 짐이 떠난 후, 사랑이 남긴 빈자리에 서서 자신의 나름대로 남겨진 자의 본분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사랑과 사랑이 떠나고 남긴 여진을 온몸으로 견뎌낸 바보들만이 오롯이 혼자가 될 수 있다.
[Reference] : 다림, 「리뷰 - 어쩌면 우리 모두 홀로 -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싱글맨>」 http://www.rainbowbookmark.com/xe/?mid=review&document_srl=6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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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맨]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Waking up begins with saying am and now. (잠에서 깰 때, 잠에서 깨자마자 맞는 그 순간, 그때에는 ‘있다’와 ‘지금’이 떠오른다.)
이 책을 번역할 때, 번역자는 ‘am’을 어떤 한국어 표현으로 바꿀 수 있을지 고민했을 것이다. 내가 읽은 번역본에서는 ‘am’을 ‘있다’라고 번역해 놓았다. ‘있다’라는 말은 평범해서 별다른 연상이 일지 않는다. ‘존재한다’라고 했다면 의미는 구체화되었을지 몰라도 어감이 딱딱해졌을 것이다. 이 문장의 ‘am’은 ‘있다’의 일상적인 느낌과 ‘존재한다’의 의미를 포괄하면서도 독자에 따라서 배타적으로도 읽힐 수 있는 복합적인 표현일텐데, 이런 표현을 대체할 수 있는 말을 찾기는 어렵다. ‘있다’는 알맞은 번역어가 아닌 것 같지만, 더 적합한 표현은 떠오르지 않는다.
서두의 ‘있다’와 ‘지금’, ‘나’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떠올린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첫 문단에 ‘있다’와 ‘지금’, 그리고 ‘나’는 코기토의 진행 순서대로 배치되어있다. 의식이 들면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그것이 느껴지는 것은 ‘지금’이라는 것이 인지된다. 그런 후에야 천천히 ‘나’라는 것이 파악되고, 거기에서부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추론되는 것이다.
‘여기’라는 공간이 인식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느낌의 덩어리에서 ‘나’가 되고 기억과 감각의 뒤섞인 다발로 존재하다가 대뇌의 작용으로 의식과 겉모습이 알맞게 정리되어 마침내 사회적으로 적합한 형식을 갖춘 자아인 ‘조지’가 된다. 그렇게 ‘조지’가 된 후에야 조지는 집을 나서고, 녹나무거리를 벗어나며 고속도로를 통해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이 있는 대도시에 도착한다. 데카르트가 불확실한 것들 속에서 찾아낸 ‘존재’라는 단단한 발판을 디디고 세상을 연역해내듯, 이 소설은 가장 확실한 것-있다, 지금, 나-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차 불확실한 것-조지, 집, 녹나무거리, 사회-으로 나아간다.
소설에서는 하루 동안 조지가 사회에서 겪는 갖가지 일들이 묘사되지만 그중 딱히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16년간 동거한 조지의 애인 짐이 교통사고로 죽은 일이라든가, 짐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다든가하는 주인공에게 중요한 변화를 준 사건들은 이미 소설이 시작하기 전에 일어난 것들이다. 그 일들은 오래 전에 종료된 채로 늘어진 여운만을 소설 안의 시간에 드리우고 조지는 속으로 남을 저주하고 징벌하는 상상을 하는 정도를 빼곤 대체로 조용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한편으로는 ‘조지’가 하루 동안 겪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성소수자로서 조지가 당하는 차별과 그로인한 불쾌감에 대해서도 말하며, 오랫동안 동거한 애인을 사별한 상실감을 묘사하지만, 이것들은 소설의 소재일뿐 주제가 아니다. 이 소설의 주제(주제라는 표현이 적절하다면)는 ‘있다’와 그것에 수반되는 ‘지금’이다. 이 소설은 눈을 뜨면서 시작되는 ‘있음’과 관상동맥이 막히며 뇌가 멈추게 되면서 ‘있음’이 끝나고 ‘지금’이 멎을 때 까지의 다양한 있음의 모습에 관한 것이다.
하루 동안의 벌어지는 조지의 이야기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조지는 죽음을 맞지만 벌어지는 사건들이 모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인 것도 아니다. 속도감을 부여하는 기승전결식의 구조가 없는 이 소설의 시간은 느릿하게 흐른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의 형식은 보다 삶에 가깝다. 이야기에 가까운 삶이 아닌, 삶에 가까운 이야기. 어떤 커다란 서사의 단계로서의 시간들이 아니라 그 자체로의 ‘지금’들.
자신의 의식이 활동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데카르트의 고립된 자아는 외롭다. 이 소설의 느릿한 시간에 짙게 배여 있는 정서도 외로움이다. 조지는 짐이 죽어서 외롭고, 박해하는 세상 때문에 외롭고, 이해받지 못해 외롭지만 반드시 그렇기 때문에 외로운 것은 아니다. 조지는 짐이 죽지 않았어도, 세상에 의해 환영받는 존재였어도, 자신을 이해하는 것 같은 사람이 있었어도 여전히 외로웠을 것이다. 조지가 처한 여러 상황들은 외로움의 부분적 원인이기도 하지만 외로움의 양상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는 외로움을 몰아내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이어지는 ‘지금’들의 무의미함을 극복하려 삶에 목적과 이야기를 부여한다. 그런 노력은 얼마간 성공적일 수도 있다. 아찔한 것은 그런 시도들 틈에 벌어지는 공백이다. 이 소설은 그런 시도들이 모두 벗겨진 '지금'과 '있음'을 그린다. 이 소설이 삶을 닮아있다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아찔하다.
추신 : 디자이너 톰 포드의 영화 감독 데뷔작인 같은 이름의 영화가 유명하다. 사실 나는 영화를 먼저 봤다. 영화 [싱글맨]은 확실히 조지에 관한 영화다. 소설 [싱글맨]이 ‘있다’와 ‘지금’에 관한 작품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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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연인을 잃어버린 상실감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조지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 조차 두렵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건 죽음 뿐이라 생각하고 마지막 하루를 정리하는 날, 그는 잊었던 사실을 깨닫는다. 누구나 혼자가 되어야지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는 것과
드디어 역작을 발견했다! 동성애와 관련된 소설 중 완전 마음에들었다.!!( 그래 봤자, 핑거스미스 읽은게 다지만..ㅡ,.ㅡ;;;) 핑거 스미스 읽을 땐 뭔가 스릴러였다.퀴어는 눈꼽만큼 들어있었음. 하지만 싱글맨은 달랐다. 전체적으로 완전히 달랐다. 책 한권이 하룻동안의 이야기라는게 믿을 수 없을만큼 짜임새 있고, 글이 입에 착착 달라 붙을 정도로 너무 재밌었다. 게다가 주인공의 심리묘사는 너무나 섬세해서 조지의 감정이 나에게도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정말 내가 아는 모든 찬사를 다 쏟아주고 싶은 심정이다.
영화도 폭풍 감동!!! 콜린 퍼스의 조지는 완전 대박이었다.(또 반해버렸음....ㅠㅁ ㅠ) 원작의 느낌을 완벽에 가깝게 살려주었다. 줄리앤 무어의 역할은 약간 싱겁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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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으로 살아가는 남자의 어느 한 날. 잠에서 깨어나는 남자. 마치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듯 그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여기’를 겨우 깨닫는다. 그가 느끼는 것은 ’살아서 죽어가는 이 생명체’, 바로 자신의 늙은 육신이다. 육신을 움직인다. 육신과 정신이 한 몸에서 분리되어 있는 듯, 자신의 육신을 타자처럼 바라본다. 거울에 비친 얼굴, 화석처럼 죽어 있는, ’이 얼굴을 가진 너는 누구냐’고 묻지도 않는다. 그저 육신의 이름을 기억할 뿐이다. "육신은 조지로 불린다."(9) 익숙한 듯, 낯 선 듯, 좁은 공간 안을 움직이던 그를 불현듯 덮쳐오는 것이 있다. 그에 대한 기억 그리고 상실의 확인, 그를 잃어버린 통증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매일, 해마다, 이 좁은 장소에서, 작은 스토브 앞에 팔꿈치를 맞대고 서서 요리하고, 좁은 계단에서 간신히 서로 스쳐 지나가고, 작은 욕실 거울 앞에서 함께 면도하고, 계속 떠들고, 웃고, 실수든 고의든, 육감적으로, 공격적으로, 어색하게, 조급하게, 화나서든 사랑해서든 서로 몸을 부딪은 두 사람을 생각하라. 두 사람이 곳곳에 남긴, 깊지만 보이지 않는 길들을 생각하라! 주방으로 가는 문은 너무 좁다. 손에 그릇을 든 두 사람이 서둘러 가면 이 문에서 부딪치기 십상이다. 거의 매일 아침 계단 아래를 내려온 조지가 자기도 모르는 새 갑자기 참혹하게 꺾인 듯, 날카롭게 갈린 듯, 길이 산사태로 사라진 듯 느끼게 되는 곳도 여기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늘 처임인 양 또다시 통증을 느끼게 되는 곳도 여기다. 짐은 죽었다. 죽었다."(10-11) 흐릿한 자신, 오직 그가 죽었다는 사실만이 선명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가장 괴로운 순간은 언제일까? 그가 있던 자리, 그곳에서의 추억, 그가 남기고 간 것들, ’그’만 빼고 모두 제자리에 있는 물건,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 숨이 막힐 듯 차오르는 통증, 조지는 그것이 "참혹하게 꺽인 듯, 날카롭게 갈린 듯, 길이 산사태로 사라진 듯"한 통증이라고 묘사한다. 얼마 전, 매일 함께 자고, 함께 놀던 강아지를 잃었다. 그후로 함께했던 습관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바늘을 하나씩 삼키는 심정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 길에 "맛있는 거"를 외치며 하나씩 주었던 간식, 주인을 잃은 간식 봉지를 들고 이걸 어째야 하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아침이 있었다. 그 아침이 조지의 아침과 겹쳐진다. 그렇게 조지의 하루가 시작된다. 58세의 조지. 대학교 교수이고, 미국에 사는 영국인이다. 얼마 전 사랑하는 사람을 교통사고로 잃은 그는 ’동성연애자’이다. 1962년의 미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동성연애자로 살아가는 남자의 하루는 텅 비어 있다. 이웃 주민을 만나고, 고속도로를 운전해서 학교에 도착하고, 학교 테니스 코트를 지나, 강의실에 들어가고, 동료 교수를 만나고, 식사를 하고, 한때 연적이었던 여인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들르고, 스포츠 센타에서 운동을 하고,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오랜 여자 친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술집에 가고, 그곳에서 제자를 만나고, 잠이 들 때까지, 그는 자신이 ’조지’인 척 연기를 한다. ’모.든. 것.’으로부터,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동떨어진 삶. 어느 순간 잠시 진짜 조지가 되었다가도 곧 끔찍하게 자기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그저 움직이는 그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순간은 짐을 잃어버린 통증을 느낄 때 뿐인 듯 하다. 짐과 함께 갔던 슈퍼, 짐을 처음 만났던 술집, 그렇게 불쑥불쑥 찾아드는 "그 기억들은 조지를 칼로 찌른다."(126) "그러나 조지가 계속 살아가고자 한다면, 조지는 잊어야 한다. 짐은 죽었다."(209) 조지도 짐을 잊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는 살고자 한다. 살려면 그의 과거가 된 짐을 잊어야 한다. 늙어가는 그에게 미래는 없다. 그는 두렵다. 그래서 "조지는 현재만 끌어안는다. 현재에 조지는 새로운 짐을 찾아야 한다. 현재에 조지는 사랑을 해야 한다. 현재에 조지는 살아야 한다......"(210) 그런데 조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조지의 육신에서 분리된 정신인가? 갑자기 등장한 작가인가? 지금까지 조지를 따라다니며 그를 지켜본 바로 ’우리’인가? <싱글맨>을 우리말로 옮긴 이는 이 책의 배경이 되는 1962년 겨울이라는 배경이 꽤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실재하지 않은 위기가 거대한 공포감을 만들어낸 시기. 그 거대한 공포 속에 조지의 하루가 놓여 있다. 지독한 상실감, 늙어가는 몸에 대한 두려움, 소수자로 살아가는 고독 안에 잠긴 독자라면 자신의 삶과 겹쳐지는 조지의 하루에 깊은 공감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지, 이해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조지, 그의 곁에 다가가는 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떻게 시작해야 조지의 마음에 가닿는 대화가 가능할까? "자네들 젊은이들은 캠퍼스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한테 다가와서 나더러 비밀스럽다고 말하지. 세상에나, 비밀스럽다니! 생각이 거기까지밖에 못 미치나? 내가 얼마나 대화를 그리워 하는지 희미하게라도 알아챌 수 없나?"(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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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이란 책 소개말에 그가 없는 오늘도 삶은 계속된다. 연인을 떠나보내고 이름없는 육신이 되어 잠에서 깨어난다는 말에 눈물샘을 자극하는 슬픈 연애소설을 기대했다. 그런데 내 예상을 깨는 내용이다. 물론 조지가 슬프지 않다는건 아니다. 내가 우리나라 드라마적인 신파에 너무 길들여졌나 보다. 쿨한 조지의 모습은 내겐 너무 낮설다. 그의 하루가 내게는 무미건조해 보인다. 사랑을 잃은 사람의 상실감이 다 똑같을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아는 누구는 사랑을 잊지못해 알콜중독으로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고통속으로 보낸이도 있었다. 사랑을 할때는 빛나지만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은 너무도 편차가 큰것같다. 케니를통해 새로운 희망을 꿈꿀수는 없었을까 그가 과감하게 한발을 딛고 나가길 이별을 이겨내길 바랬다. 동성애를 하는 조지의 모습이 이상하지는 않다. 요즘 이성애에대해 옛날같이 이상한 시각이 많이 변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과 영화등으로 많이 접해서 그런지 조지의 사랑이 동성이냐 이성이냐에 초점이 가지않는다. 조지의 상실감에 모든 초점이 집중된다. 조지의 하루는 꼭 흘러가지 않는 세월같다. 하루를 10년같이 보내는 조지 그런 꼭 채집된 곤충같이 그의 하루를 세밀하게 그려내는 모습은 요즘같이 스피디한 세상을 접한 나로서는 너무 힘들게 보였다. 달팽이같은 시간의 흐름은 이야기가 술술 넘어가지 않음에 힘들었다. 생글맨은 영화화 된책이다. 조지의 모습을 콜린퍼스라는 배우가 연기했는데 베니스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는 꼭한번 보고싶다 책속의 조지의 모습을 영화속에서는 얼마나 잘 표현했을지 궁금증이 증폭된다. 지금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밖은 캐롤송과 화려한 불빛에 흥청거린다. 그런지금 홀로남은 조지의 보습이 대비되면 더욱 그의 상실이 가슴깊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비쳐질지에 너무 집착하는것 같다. 냉전시대의 모습이 조지의 삶과 동일시하게 느껴지는건 그의 마지막이 너무 허무하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렇게 느끼는 내생각이 잘못된 걸까 조지가 새로운 삶을 일구길 바랬는데 그렇지 못함에 착잡해 지는것은 어쩔수 없이 화가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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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는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트럭에 치어 죽은 사람이 나라면, 짐이 지금 여기 있겟지.
이렇게 술잔 두 개를 들고 이 문을 지나가겠지. 그렇게 단순한게 세상일이야.
1960년대 58세의 중년 남자는 혼자 살아가고 있다. 그는 영문학대학 교수이다. 그리고 동성애자이다. 얼마전 사랑하는 친구 짐이 교통사고로 자신의 곁을 떠나갔다. 혼자 남겨진 상실감 외로움을 안고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신에게 억지로 사회적 가면을 씌운채 위태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중년 남자의 고독과 서글픔이라 할까. 삶을 이어야 하는 이유가 조금씩 사그라 들어 현재만이 존재하고, 언제 닥쳐올지 모를 죽음의 그림자를 두려워 하면서도 간절히 기다리는 그는 싱글맨이다.
조지는 적절히 야유하는 웃음을 웃는다. 그랜트가 기대한 웃음 그대로다. 그러나 조지는 그런 유머에 가슴이 아프다. 20년대와 30년대의 위기 상황에서, 전쟁은 조지에게 질병과 같은 상처를 남겼다. 가장 끔찍한 것은 멸망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제 훨씬 더 끔찍한 두려움이 생겼다. 살아남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살아남아서 파편만 남은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
"에브리맨 이즈 싱글맨"...이라고 빨간책방에서 듣고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 섞여 자신의 위치를 견고히 하기 위해 관계를 쌓아가고 배신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위태롭게 삶을 이어가는 에브리맨이자,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싱글맨이다.
영화로도 나왔다고 하는데 아직 보지 않아서 비교는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영화보다는 소설이 더 좋을 듯 하다. 조지의 섬세한 감정선의 변화를 지켜보는데 마음이 따스하게 데펴지다가도 서늘하게 식어가다가도..그 쓸쓸함의 깊이를 헤아리다 마음을 쿵하니 울리기도 하는 그 울림을 영화로는 느끼지 못할 거 같다.
지금에서야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조금 유해졌다 하지만, 60년대의 보수적 사회에서 남과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독할거 같다. 그런데, 사랑하는 친구이자 애인인 짐이 급잡스럽게 자신의 곁을 떠난다면.. 일상의 균열은 서서히 다가오는 것이 아닌, 지진이 일어난듯 이곳 저곳 일상 곳곳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짐에 대한 그리움과 죽음에 ㄷ한 두려움이 하루에도 몇번씩 교차하는 순간 조지는 삶의 의미를 조금씩 잃게 되는데 내가 따라가는 그의 감정들이 하루동안의 일들이다.
"매일, 해마다, 이 좁은 장소에서, 작은 스토브 앞에 팔꿈치를 맞대고 서서 요리하고, 좁은 계단에서 간신히 서로 스쳐 지나가고, 작은 욕실 거울 앞에서 함게 면도하고, 계속 떠들고, 웃고, 실수든 고의든, 육감적으로, 공격적으로, 어색하게, 조급하게, 화나서든 사랑해서든 서로 몸을 부딪은 두 사람을 생각 하라. 두 사람이 곳곳에 남긴, 깊지만 보이지 않는 길들을 생각하라! 주방으로 가는 문은 너무 좁다. 손에 그릇을 든 두 사람이 서둘러 가면 이 문에서 부딪치기 십상이다.
거의 매일 아침 계단 아래를 내려온 조지가 자신도 모르는 새 갑자기 참혹하게 꺾인듯, 날카롭게 갈린 듯, 길이 산사태로 사라진 듯 느끼게 되는 곳도 여기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늘 처음인 양 또다시 통증을 느끼게 되는 곳도 여기다. 짐은 죽었다. 죽었다."
그 남자의 하루를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일생을 들여다 보는 듯한 느낌..
"빌어먹을 미래. 미래는 케니를 비롯한 젊은애들이나 가지라고 해. 샬럿은 과거나 가지라고 해. 조지는 현재만 끌어안는다. 현재에 조지는 새로운 짐을 찾아야한다. 현재에 조지는 사랑을 해야 한다. 현재에 조지는 살아야 한다."
관조하듯 타인의 육신을 들여다 보는듯 시작하는 첫 문장들은 과히 이 소설이 주는 최고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건조한 듯한 문체에 담겨있는 조지의 외로움과 삶의 무기력, 그리고 사회와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비판적 생각들 오롯이 담겨 있다.
원작 작가인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조지와 같은 동성애자였다 한다. 그리고 이 소설이 출간한 해와 나이또한 조지와 같은 1964년이었고 나이또한 58세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마도 작가의 일상적 부분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조지를 통해 투과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텐데, 그 시대배경을 생각해 본다면 대단히 용감한 소설이 아니었을까 한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겉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그들도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임을 조지를 통해 다시금 되새겨 볼 수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본다. 그 얼굴 안에 수 많은 얼굴이 보인다. 어린아이의 얼굴, 소년의 얼굴, 젊은이의 얼굴, 그리 젊지만은 않은 얼굴. 그 얼굴들 모두가 슈퍼임포즈로 화석처럼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역시 화석처럼 죽어있다. 살아서 죽어가는 이 생명체에게 전하는 그 메시지. 우리를 봐. 우리는 죽엇어. 겁낼 게 뭐 있어?
얼굴은 그 화석들에게 말한다. 하지만 너희의 죽음은 점진적으로 아주 쉽게 일어났잖아. '나는 급히 끝날까 두려워.'
조지는 도리스의 손을 꽉 쥔 마지막 순간, 깨달았다. 조지에게서 짐을 빼앗으려던 도리스의 마지막 흔적마저 사라졌다고. 이제 남은 것은 이 쪼그라든 마네킹뿐이라고. 그리고 조지의 미움도 사라졌다고. 미움 한 방울이라도 마지막까지 소중하게 남아 있다면, 도리스에게서 짐의 흔적을 찾을 수 잇을 텐데. 짐이 도리스와 멕시코로 간 동안, 조지는 짐도 미워했다. 그것이 조지와 도리스 사이의 끈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끈이 끊어졌다. 짐의 한 조각이 이제 또 조지에게서 영원히 사라진다.
그 긴 시간을 지나서, 이제 도리스는 세상에 짐이 남긴 조각들 중 하나였다. 그 조각이 세상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모든 것은 그렇게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간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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