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은 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고 엊그제 보기 시작한 대만 작가의 소설에서는 도통 알 수 없는 지명과 그곳에 서식하는 귀신의 오리무중 명칭이 난무하니 그 책을 다시 들추고 싶지 않았다. 그대신 구입하고 잠시 독서를 미룬다는 것이 그만 생각보다 많이 미루게 되고 만 책들, 그 책들을 모아 놓은 신간 서적의 무덤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책장의 한 켠을 뒤적였다. 그렇게 엉뚱하게도 페이퍼 편집장 출신인 작가의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난 이 책을 언제 그리고 왜 산 것이냐...)
“누군가의 유령이 되어버린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유령은, 그가 유령으로서의 새로운 삶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돌봐줘야 한다는 것이 우리 세계의 규칙이다...”
하지만 뛰어야 벼룩이라고 했던가. 대만 귀신의 세계를 피하고자 한 내 앞에 당도한 것은 서울 한 복판 종합병원의 잔디밭과 병실을 유유히 걸어다니는 유령의 세계이다. 어느 날 친구의 병문안을 갔다가 집으로 귀가 하는 길, 횡단보도에서 트럭에 치어 뇌사 상태에 빠지게 된 소이는 자신의 처참한 육신으로부터 벗어난 유령의 셰게로 넘어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이 오빠를 만나고 그의 가르침 속에서 조금씩 유령의 세계에 익숙해지기 시작한다.
“... 그때까지도, 난 무이 오빠의 과거와 나의 과거가, 그의 미래와 나의 미래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것이 차라리 좋은 일인지, 혹은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맡겨버린 부모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인지, 무이 오빠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묻지 못했다... 내 앞에는 마지막 순간이 되어야만 열리는 크고 단단하고 거대한 문이 하나 서 있었고, 그 문 뒤에는 삶 아니면 죽음이 있었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계는 점점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페이퍼를 보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뭔가 완결된 구조의 기승전결이라는 무거운 책무로부터 자유로운 잡지의 편집장 출신인 작가의 (불필요하게) 친절한 복선이 난무하는 이러한 소설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침대 맡 베개에 뒷통수를 붙이고 단숨에 읽어 내려 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하다. 빈틈없고 일관되게 상처주는 일 투성이인 일상으로부터 잠시, 유령의 세계에 편입이라도 한 것 같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순간 그 끝을 알 수 있다면, 혹은 우리의 인생이 반복 재생될 수 있다면, 우리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까?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얼마 동안 꿈같이 행복하고 오래오래 불행한 대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덤덤한 날들을 맞고 또 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어느 쪽을 더 원하는 걸까? 아주 잠시 행복하고 오래 불행한 것? 아니면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채 그저 살아가는 것?”
주인공인 소이를 제외하더라도 무이와 수영, 창 아저씨와 민선, 진이 할머니와 준이 할아버지, 구름 아저씨와 데이지, 아율과 L, 미스터 모델과 실제의 미스터 모델과 같은 무수한 유령과 살아 있는 인간의 조합이 주는 불균형은, 마치 페이퍼 속 길지 않은 아스라한 이야기들이 던지는 열린(?) 결말을 닮아 있기도 하다. 두 가지의 길이 있는데, 두 길이 모두 나쁘지 않거나 좋지 않은 그런 상황 앞에서, 우리는 어느 길을 선택하여도 슬프지만 또 어느 길을 선택한다고 해도 마냥 절망적이지는 않다.
“헤어질 때의 안녕과 다시 만날 때의 안녕이 같은 말이라서 다행이다. 안녕과 안녕 사이가 아무리 멀어도, 안심이 된다... 삶과 죽음도 그렇다. 우리는 같은 곳에서 시작되어 잠시 멀어졌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난다...”
잠시 소강 상태인 장마, 크게 열어 놓은 창문으로 한 여름의 유령 같은 찬 바람이 불어 오는 허공을 앞에 두고 어디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안녕을 고하며 반복재생되는 삶의 운명같은 실수들을 골똘히, 또 골똘히 떠올리는 시간들...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나고, 작가는 끝이라는 이름의 안녕이면서 동시에 시작의 이름이기도 한 안녕을 외친다. 생각해보니 잡지 페이퍼는 가끔 얄밉도록 소녀적인데, 소설의 말미 또한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