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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당시 톨스토이는 일본 선불교의 지도자에게 반전평화운동에 대한 연대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선불교의 지도자는“양립할수없는 것들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살생과 전쟁은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고 한다. 불교계대학 졸업생이던 시절, 저자가 베트남전 반대운동에 참여하고 있을때 자신이속한 조동종의 지도급 인사는 저자에게“선승들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훈계를 하였다고 한다. 미국인이면서 선승이 되기위해 일본에서 수련하며 모든계를 다받은 저자는 대학시절의 이 경험에서 불교와 전쟁의 관계에 의문을갖고, 1868년 메이지유신과 1945년 패전사이의 일본불교들의 자취를 찾아간다. 이책은 영어로 출간되었으며 2006년에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로도 출간되어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에 힘입어 일본어로 출간되고 일부이긴 하지만 일본불교계의 전쟁참회 성명을 이끌어내는 도화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책은 세부분으로 나누어 쓰여져 있다. 메이지유신과 불교, 군국주의와 불교, 그리고 전후의 동향에 대하여, 저자가 바라본 일본불교의 과거와 현재가 수많은 선승들의 논문이나 발표문등을 중심으로 엮어져 있다. 일본의 불교는 15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있다고 한다. 6세기 중반 한국에서 전래된 불교는 도쿠가와시대(1600-1868)에 이르러 사실상의 국가종교기능을 하게되었으며, 이는 밖으로 들어나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국민전체는 의무적인 불교도가 되어야 했고. 상당수의 승려들은 공무원이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한다. 이렇게 됨에따라 특정종파에 속하는일은 종교적확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의무의 문제가되었고, 각종단은 중앙사찰이 최정상에서 종단전체를 통제하는 피라미드 구조가 되는것을 피할수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대다수 승려들이 정부의 충직한종이 됨에따라 나태해지고, 무기력과 비창조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1868년 일본천황 메이지는 반봉건적 포부를 발표하면서 신기국을 설치하고 신도에서 불교를 분리시켰다. 일본민족과 천황이 신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외국(중국)에서 들어와 첨가된것과 그영향으로 흐려지고 훼손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사찰을 폐쇄하고 승려들을 환속 시켰다. 제도불교는 신앙을 부흥시킬수있는 방법으로 반기독교운동을 펼치고, 지방영주들의 (불교에 대한)가혹한 탄압에 대규모 농민저항운동이 일어나자, 정부는 1872년 신기국을 교무성으로 변경하여 교도사라는 지위를 신설하였다고 한다. 교도사는 공적인 강연이나, 제사의식을 거행하는 사람으로 신도의사제, 불교승려, 국학자 모두가 될수있으며, 각자 국가가 지원하는 자리에서 봉사하도록 허용되었다고 한다. 이는 사실상의 국가성직으로 산사나 사찰에 기거하는것도 국가의 인증사항이됨을 의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계는 이를 적극활용 하였으나 신도의 지배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메이지유신이후 기독교의 사회봉사 활동에 자극을받은 불교계는 적극적인 봉사활동으로 정부와의 관계모색을 도모하고, 황실의 번영과 불교의힘을 증강시킬 목적으로 1889년 존황예불연합운동을 설립한다. 이는 반기독교적인 일본 민족주의적 불교형태가 조직적으로 탄생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들은 당시 일본의 해외팽창 정책에 따라“불법적인 전쟁에는 반대해야지만, 정의로운 전쟁에는 적극 지지해야 한다”는 논리로 청일전쟁을 지지하고 나선다. 1910년 각 종단소속(진종, 제2진종, 임제선종, 조동선종) 승려 4명이 토지개혁과 불교의 정화를 주장하며, 더 나아가 메이지 정치체제 및 천황제에 대한 거부를 내세운 우치야마 구도사건에 연루되자, 정부는 이를 역모사건으로 간주하여 처형하고 각 종단은 자파소속 승려들의 가담에 비굴한 사죄성명을 발표해야만 하였다. 이어 발생한 러일전쟁 시에는 일본 전통불교 종단의 성직자들과 학문적인 지도자들이 이미 전쟁정책의 확고한 지지자들로 변한 후였다. 일본 군국주의 시대 불교의 포교는, 서구와 구별되는 동방을 불교속에 구현된 사상에서 찾아야 하며, 이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한 대동아공영권의 이데올로기적인 토대 가운데 하나를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한다. 1920년대까지 일본의 제도불교는 일본군부와 식민주의 정책을 확고하게 지지하였다고 한다. 물론 자신이속한 종단지도자들의 태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불자들도 있어, 불교부흥청년연맹등을 창립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소수였고 또 종단과 경찰의 힘앞에 와해될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930년대들어 황국의길 불교가 출현한다. 이는 제도불교 종단들의 이전 입장을 조직화, 집대성한 것으로 종단과 종파에 관계없이 불교와 천황을 동일시 하였다고 한다. 이는 불교의 관점에서보면 통치자의 법에대한 佛法의 전면적이고도 분명한 예속이고, 정치적인 견지에서보면 국가와 그정책에 대한 제도불교의 종속을 의미하였다고 한다. 이들 제도불교의 전쟁관은 의로운 전쟁은 수행하여야하며, 천황이 지시하는 전쟁은 의로운 전쟁으로 규정하여 자신들의 신앙교리와 일본의 전쟁사업 사이에 일말의 모순이 존재할 가능성마져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어서 선을 무사도와 동일시하는 황국선과 무사선이 등장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전쟁을, 정의를 펴기 위하여 불의를 대표하는 나라의 국민들을 처벌하려 하는것으로 규정하고, 불교의 주요 목표중 하나가 천황에 대한 충성임을 강조하며, 선을 전쟁및 천황 양자와 동일시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볼때 황국선과 군인선, 그리고 황국의길 불교 사이에 차이는 없어지게 되었다. 부르는 자가 군인인지, 승려인지, 혹은 학자인지에 따른 차이일뿐이며 그들 사이를 관통하고 있는것은 천황의 의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만이 있을뿐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주장한 선과검의 일치는 어린소년들을 특공대로 선발하여 망각을향한 편도비행을하는 가미가제 비행사가되어, 생명을 초개와같이 가벼운것이 되게하는것 그것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전후의 일본불교 선은 어떠할까? 2차 세계대전중 장교와 사병은 물론 산업전사들까지 훈련시키는 방법으로 활용된 선은 전후 파괴된 산업기반을 재건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패전후 궁핍한 생활은 전투적인 노동조합과 좌익세력의 성장을 가져왔고, 이런 환경에서 선은 상급자에 대한 규율과 복종, 그리고 충성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복원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되었고,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각기업의 신입사원연수및 자위대의 교육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패전은 황국의길 선과 군인선의 몰락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변형과 기업선으로서의 재탄생을 의미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일본불교가 전쟁에 부응한 것을 일본불교만의 문제로 보지는 않는다. 일본에 전래되기전 삼국시대 한국의 불교는 호국불교 이었으며, 일본불교의 뿌리 첸도 평화시뿐만 아니라 전시에도 기꺼이 국가의 필요에 부응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까운 사례로 한국전쟁때 중국불자들은 다시한번 총을 들었으며, 티베트의 불교도들은 중국 공산군에 반대하여 봉기시 무장투쟁을 정당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불교가 전쟁과 관련된 역사적이고 교리적인 전례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반성하고 속죄하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오랜기간에 걸친 佛法의 국가에 대한 예속이, 비록 佛法에 대한 반역은 아닐지라도 근본적인 왜곡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다시한번 그 파괴적인 현상을 드러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장할수가 없다고 말한다. 책을 읽으며 우리나라의 경우가 생각난다. 일제시대, 그리고 독재시대 민중의 반대편에 서서 그들의 부름에 부응한것도 모자라 시도때도 없이 조찬기도회를 개최하던 이 나라의 종교지도자들과 종단은 왜 아직도 반성하고 속죄하지 않는지, 개인의 영달을 위해 그들의 주구가 되었던 사회지도급 인사들의 속죄와 참회는 왜 이루어지지 않는지, 저자의 말대로 그들이 다시한번 그 오욕의 역사로 되돌리려는 것인지가 두려울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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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어무이는 자는 나를 깨워서 교회에 보내시곤 했다. 조금 전에 예수님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교회로 나를 부르셨다고 하시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열심히 나를 교회로 보내셨는지 모르겠다. 정작 당신은 교회를 다니신것도 아니고, 때가 되면 점집도 다니시고 친구분따라 종종 절에도 가시는 분이셨는데.. 하여간 약 10년을 넘게 열심히 교회를 다니다 고등학생이 되던 해 이사를 가고 나서부터는 어떤 이유에선가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뒤.. 문득 사는 것이 너무 힘겨워서 두리번 거리다.. 문득 성당으로 발걸음이 옮겨졌고.. 충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성당을 다니고 있다는 것이.. 거창하게 말해, 나의 종교 과거사이다. 그런 내가.. 불교에 관한 담론을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첫번째는 불교에 대한 나의 미미한 지식.. 뚜렷한 것이 없이 안개속을 헤매는 듯 하다는 사실이었다. 나에게 불교란 교과서나 책에서 접한 것일뿐, 종교라는 의미로는 그다지 다가오지 않는.. 철학 혹은 사상이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불가에서 중시한다는 생명존중 가르침이나 선, 업보, 윤회와 같은 단편적인 것들이다. 다행히, 이 책의 핵심이 되는 선(禪)의 의미는 말로는 콕 집어낼 재간이 없지만.. 단어를 떠올리면 그 의미가 마음속에 떠오른다. 그렇다면, 말로 풀어놓는 선(禪)은 무엇일까? 위키백과를 찾아봤다. 선(禪)이란 중국에서 5세기부터 발전한 대승불교의 한 흐름이다. 이 흐름은 주로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단어 선(禪)은 산스크리트어의 ‘디야나’를 중국에서 ‘선나’로 음역한 것에 유래한다. 디야나는 대체로 ‘침잠’(沈潛)의 의미를 가진다. 선(禪)이란 마음이 고요한 어떤 상태.. 경지를 이르는 말로 느끼면 되겠다. 문제는 이 경지에 이르는 방식이란 것이 자의적인 깨달음에 의한 것이어서 해석에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즉, 불가의 가르침에 따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있다는 점.. 이 책에서 저자는 일본의 불가가 국가의 시녀가 되어, 불가의 기본 가르침을 배반하고 선(禪)을 이용하여.. 전쟁을 옹호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역사를 낱낱히 밝히고 있다. 가미카제.. 단 하나 뿐인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적진을 향해 자폭하던 그들.. 그 무모한 죽음을 이해할 수 없던 나는 이 책을 읽고서야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의 불가는 전장에서의 죽음을 선(禪)으로 둔갑시켜.. 그들에게 죽음을 불사하는 자기 희생을 종용했다. 많은 불교 선사들은 국가가 천황을 신격화 하고 천황에 대한 충성을 선(禪) 최고의 경지로 둔갑시키는데 일조..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기를 나서게 만들었던 것이다. 왜 그들이 여전히 천황을 신처럼 모시고.. 잡음이 나는데도 버젓이 신사참배를 하는지.. 일본불교가 걸어온 역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모두가 전쟁에 예스를 외치고 있을때 미미하게 나마 불교 본연의 가르침을 깨우치려는 선사들도 있었다. 국가의 탄압에 그 뜻을 펼지지는 못했지만.. 그러다 전쟁이 종결되고.. 전쟁에 동조하던 불가는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 여러 종파는 서로 그동안 자신들이 저질렀던 옳지못했던 행보에 성명서를 내고 새로운 불교로 거듭나고 평화를 옹호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도 잠깐... 종전 후 발전을 도모한 기업들의 하수인이 되어, 기업을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하는 일꾼을 만드는데 불교가 일조했다는 사실.. 결국 전장에서의 죽음이 ’과로사’ 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 일본 불가의 그릇된 가르침은 그 형태를 바꾸었을 뿐이었다. 결국, 이 책의 시작.. 저자가 글을 시작하며 쓴 글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대목이다. "도처에서 종교적으로 고무된 광신적 행위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그런데 정치에 결탁한 일본불교.. 그것이 그들만의 창작물이 아니라는 사실.. 저자는 2판을 내면서 새로 한 챕터를 추가했다. 바로 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역사..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에 전해진 불교.. 권력과 결탁하여 불교 본연의 가르침을 왜곡한 증거는 인도, 중국에서도 뚜렷하다. 그렇다면 불교가 권력과 결탁할 소지가 다분한 종교이기 때문일까? 과거.. 역사를 뒤돌아 보면.. 로마 카톨릭에겐 십자군 전쟁이.. 이슬람에겐 성전으로 포장된 전쟁이 있었다. 가까이 우리에게는 반공으로 무장한 보수 기독교가 있었다. 결국.. 종교가 정치 권력과 결탁하는 것은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서 종교가 가질 수 있는 허점을 혹은 오류를 들여다볼 수 있어 유익했다. 좋은 교양서적을 뒤지고 있는 당신에게 권한다. (관전포인트.. 불교에 대해 두리뭉실 알고 있는 독자라면 마지막 챕터에서 서술된 불교의 역사를 간단히 읽고 일본의 기형적인 불교에 관해 접근하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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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선(禪)의 뿌리 인도 불교에 기원을 두었다고 전해지는, 중국고유의 불교인 선종(禪宗)은 구상적(具象的) 직관주의와 생활적 현실주의라는 특징을1) 가지고 있으며 크게 위앙종(潙仰宗), 임제종(臨濟宗), 조동종(曹洞宗), 운문종(雲門宗), 법안종(法眼宗)의 5갈래로 나눠진다. 일본의 선종(禪宗)은 이러한 중국 선종(禪宗)으로부터 도겐[道元]이 좌선을 중시하는 묵조선(默照禪)의 조동종(曹洞宗)을, 에이사이[榮西]가 화두를 중시하는 간화선(看話禪)의 임제종(臨濟宗)을, 은원 융기(隱元 隆琦)가 염불을 중시하는 염불선(念佛禪)의 황벽종(黃檗宗)을 전해 이루어진 것이다. 2. 일본 불교의 형해화(形骸化) 1635년 에도[江戶] 막부는 각 번(藩) 내부까지 막부의 힘이 미치지 않는 현실을 감안, 불교를 이용하여 기독교 금지 정책을 강행하기 위해 사청제(寺請制)와 단가제(檀家制) 등을 담당하는 사사봉행(寺社奉行)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교는 종교로서의 성격을 점차 상실하고 신도(神道)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사청제(寺請制)를 통해 에도[江戶] 막부의 기독교 금지 정책의 도구가 되거나 단가제(檀家制)를 통해 각 사원에 소속된 가정의 장례 등 의례를 담당하고 신도들로부터 경제적 보상을 받는 준국가조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불교는 장식불교(葬式佛敎)로 전락하여 그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그 공적인 존재의의를 막부의 기독교 금지 정책에 수반된 종문인별장(宗門人別帳)이나 사청제(寺請制)의 실시 등에 두게 되었다. 그것은 근세 불교가 여러 방면에서 배불론에 저항할 수 있는 공인된 유력한 근거였다. 또한 각 종파가 단가(檀家) 제도를 고정화시켜 불교 교단을 유지해 나간 기반이기도 했다. 따라서 개국 후 외국 선교사의 공공연한 내항이나 ‘카쿠레 키리시탄’의 출현 등은 불교 측에 있어서 그 공적 의미를 흔드는 것이었다.2) 3. 일본 불교, 군국주의의 도구로서 존재의의를 찾다. 1858년 개국 이후 국내경제에 있어서 모든 물가가 급등해 국민생활은 위급한 상황에 빠졌고, 그것이 막번 체제의 해체를 촉진시킨 큰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일본에게 ~ 하루빨리 자본주의의 확립을 목표로 할 필요를 통렬히 느끼게 하였다. 그리하여 유신정부는 ~ 강력한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에 기반하여 정부의 힘으로 위에서부터의 자본주의 확립, 추진을 목표로 하고~ (그) 기초를 절대적인 천황제의 부활에 두었다. 그 천황제의 초월적/절대적인 권력을 합리화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신도주의(神道主義) 교화를 내세웠던 것이다.3) 이러한 조치는 일본 불교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는 신불습합(神佛習合)4) 현상과 맞물려 불교탄압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4천 개가 넘는 사찰들이 폐쇄되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불교 유물이 파괴되었고, 수천 명의 승려들이 강제로 환속해야 했다. 5) 1872년에 이르러야 비로소 메이지 정부는 불교에 대한 정책을 바꿔 신기성(神祇省)을 폐하고 새롭게 교부성(敎部省)을 설치하면서 제도불교를 정치에 다시 활용하겠다는 입장을 표방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적극 호응하여 배타적이며, 反기독교적인 일본의 민족주의적 불교 대중조직인 존황예불연합운동이 성립되었다. 한편 서구 열강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진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천황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은총’으로 인식되면서, 대다수의 일본 기독교인들은 초(超)종교로서의 신도(神道)와 천황 신성성(天皇 神聖性)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청일전쟁 당시) 일본 기독교인들의 열렬한 애국주의는 국가뿐 아니라 제도 불교와도 새롭고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 데에 촉진제6)가 되었고, 나아가 1912년 三敎 - 신도(神道), 불교, 기독교 - 회동을 통해 사실상 군국주의의 도구가 되는 데 모든 종파가 동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히 변해가는 사회상황에 대응하여 종교 전체에 사회적 역할과 존재 가치에 대해 던져진 의문에 대해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군부 주도의 국가주의적 전개에 대한 종교의 적극적 대응 이라는 반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수 불교신자들에 의해 조직된 불교부흥청년연맹과 같이 불교이해에 근거한 사회개혁을 꿈꾸는 반응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소박한 시도는 제도불교의 지도자와 경찰의 탄압 하에서 사그라져야만 했다. 4. 실패할 수 밖에 없던 일본 불교의 해외 선교 많은 기독교 선교사들은 의도했건 안했건 서구 제국주의 팽창기에 그들의 앞잡이로서 역할을 수행했던 것처럼, 메이지 정부 이후의 일본 불교도 서구 제국주의 팽창기의 기독교와 마찬가지 역할을 했다. 즉, 제도 불교는 명목상으로만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훗카이도의 북부 섬을 식민화하려는 메이지 정부의 노력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 그들은 훗카이도를 불교가 국가에 유익한 공헌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하나의 기회로 보았던 것이다. ~ 청일전쟁 이후 이러한 포교적 노력은 일본의 대륙정책과 매우 긴밀하게 연루되어 일본이 참전하는 전쟁이 끝날 때마다 불교의 포교사업은 더불어 확장되었다. 7) 그러나 이러한 일본 불교의 해외 포교는 불교의 세계적/보편적 인간 주제관이라기 보다는 일본민족의 우월성이나 대륙침략의 정당성 등을 강조하고, 순국을 향한 종교적 정신을 설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 그리하여 그 전도가 대부분 패전 이후 현지에서 어떤 신앙적 족적도 남기지 못하고 괴멸함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8) 5. 전후(戰後) 불철처한 반성과 ‘기업 선(禪)’으로의 변질 D.T.스즈키는 선(禪)의 군국주의화에 대한 책임의 대부분을 선승(禪僧)들과 선(禪) 제도에 귀착시켰다. ~ 오늘날의 선승(禪僧)들은 지식이나 학식이 없어 사태를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그들 자신의 독립적인 견해를 구성하지 못한다. ~ 이러한 “커다란 약점”으로 인하여 야기된 것이 선(禪)이 전쟁에 협력한 것이며, 여기에는 전시에 정부의 선전을 크게 떠벌린 것과 종전 후에는 갑자기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포용한 것이 포함된다. 9) 전후(戰後) 제도 불교의 반성은 일본의 패전이라는 외부요인에 의해 갑자기 이뤄진 탓인지 철저한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통한 자기반성을 하지 못했다. 때문에 기업에서 ‘군인 선(禪)’이 가지고 있었던 상급자에 대한 복종과 충성 그리고 규율준수와 같은 가치들을 복원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선(禪)을 선택하자, 그들은 재빠르게 달려가서 ‘기업 선(禪)’이라는 형태로 선(禪)을 왜곡시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결국 일본 불교는 에도[江戶] 막부와 같은 정치 권력과의 결합을 통해 물질적인 편안함을 누리면서 그 본질을 상실하고 장례불교[장식불교(葬式佛敎)]로 형해화(形骸化)되어 ‘종교로서의 불교’가 사실상 소멸하였고, 일상생활에서의 자아성찰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하는 선종(禪宗)조차도 이러한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교(佛敎)라는 겉껍질만 두른 채 사실상 신도(神道)의 하부조직이 되었다. 그렇기에 개항이후 손쉽게 ‘군인 선(禪)’을 주창하여 군국주의의 도구가 될 수 있었고, 오늘날 ‘기업 선(禪)’이라고 형식으로 기업이라는 경제 권력에 새롭게 예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1) 마쓰야 후미오[增谷文雄], <불교개론>, 이원섭 옮김, (현암사, 1976), pp. 172~ 177 2) 카시와하라 유센(柏原祐泉), <일본불교사 근대>, 원영상/윤기협/조승미 옮김, (동국대출판부, 2008), p. 19 3) 카시와하라 유센(柏原祐泉), 같은 책, p. 29 4) 일본고유의 종교인 신도(神道)와 불교(佛敎)의 유기적 융합을 의미하는 말로, 6세기 중엽 유입된 불교가 일본인들이 신봉하고 있는 토착 신을 압도하지 못하고 토착신의 존재와 위력을 인정하여 이루어진 불완전한 동거를 지칭한다. 5)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전쟁과 선(禪)>, 정혁현 옮김, (인간사랑, 2009), pp. 36~37 6)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같은 책, p. 60 7)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같은 책, p. 54 8) 카시와하라 유센(柏原祐泉), 같은 책, p. 301 9)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같은 책, pp. 258~25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