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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60일 정도 된 유아씨는 눈을 동그랗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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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어디로 갈까 궁리하고, 날짜를 정하고, 책이나 인터넷을 보고 정보를 모으고, 예약하는 그 설레이는 과정이 더 즐겁다. 막상 여행지에 도착하고 나면 나의 시간표대로 되는지, 그곳이 나의 예상대로인지 확인하는 절차만 남은 듯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수도원으로 여행지를 정하고, 한달 간 서유럽 여러 나라의 수도원들을 방문한다. 종신서원을 한 수도사들이 있는 봉쇄 수도원은 일반 방문객들이 접근할 수 조차 없을테니 이런 책이 아니면 그 안의 모습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또 그런 곳에도 몇 분씩 계시는 한국인 수사와 수녀님들... 그러나 수도원이라는 곳이 하루 숙박이나 당일 방문으로 그곳에 대해 책을 쓸 만큼 만만한 곳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 안식년을 맞은 교수님이 한달 간 해인사에서 참선으로 용맹정진한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여러 곳을 두루 다니지 않더라도 몇 곳에 대한 더 깊고 진지한 소개가 되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유럽의 많은 수도원들이 귀족들의 편에 섰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 중에 수도사들이 쫓겨났다가 돌아왔다는 것과 궁정요리사들이 혁명 후 일자리가 없어져 일반 음식점을 차리게된 덕분에 프랑스 요리가 세계 최고가 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왔다.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소설의 바베트가 생각난다. 그녀는 혁명 당시 프랑스 제일의 요리사였는데 자신은 민중계급이나, 그녀의 인생이었던 최고급 요리는 귀족들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이었으니... 프랑스 혁명 때도 쫓겨나지 않았을 만큼 낮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고 하는 스위스의 시토회 소속 마그로지 수녀원과 입구에 "여기 서 있는 그대 화해하십시오"라고 써 있다는 테제공동체에 관심이 간다.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경우가 없는 프로테스탄트인 로제 수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을 숨겨주면서 떼제 공동체를 시작하여 현재는 신교와 구교를 아우르는 초교파적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 http://www.taize.fr/ko_article11495.html “어릴 때부터 나는 공동생활이 ’하느님은 오직 사랑이심’을 보여주는 징표가 될 수 있다는 직관을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기 위해 전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 남자들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이 차츰차츰 내 안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인자한 마음과 단순소박함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그런 공동체말입니다.” 로제 수사 “하느님은 오직 사랑이시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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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둠으로써 제일 큰 것을 얻은 거예요. .. 세상의 작은 것들을 버리고 제일 큰 것을 얻었으니 더 바랄 게 없지요. 처음 불란서에 와서 이 수도원 저 수도원을 다녀보다가 이곳에 오게 됐어요... 제가 소개를 받아 이곳에 도착하지 전날 한 수녀님이 돌아겼는가 봐요. 장례미사를 드리는데 참석했다가 돌아가신 그 분의 얼굴을 뵙게 되었죠. 관 속에 들어가 계신 그 늙은 수녀님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바로 원장수녀님께 면회를 신청했어요. 그러고는 말씀 드렸죠. 제발 여기서 죽게 해주세요.. 그때 원장수녀님이 웃으시며 말씀하셨어요. 그래요 좋아요. 하지만 지금 당장 죽는 건 안 돼요.' 이 부분을 읽으며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지난 달에 소풍을 떠나신 아버지가 생각나 한참을 울었다. 편않게 주무시듯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이 글과 오버랩 되어 책을 덮고 한참을 울었다. 창살로 막힌 곳에서 갇혀 지내면서도 아이처럼 행복한 미소를 짓는 노수녀님들의 얼굴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었던 아르정탱 수녀원 이야기는 여고시절 기억도 떠오르게 했다. 꿈 많은 여고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는 천주교학교였다. 원장수녀님이 연세가 있으신데 정말 꽃처럼 고아서 모두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종교담당을 하는 도서관 수녀님은 얼마나 해박하신지 걸어다니는 '백과사전' 이었고 미술수녀님은 또 얼마나 유머있고 재밌으셨는지 모른다. 내가 알던 종교와 수녀님에 대한 생각은 그 시절에 모두 바뀌고 말았다. 그렇다고 내가 천주교 신자도 아니었고 종교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종교를 부정하지도 않았고 수녀님이라는 거리감 보다는 그들도 '여자이고 인간' 으로 보게 되었다. 그시절에 수녀님들을 통해 갇힌 생활에 대하여 남들보다 좀더 많이 듣게 되고 '믿음' 에 대하여 다른 눈을 가지게 된 듯 하다. 좀더 폭 넓게 모든 것을 아우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수도원 기행' 은 좀더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하여 잔잔한 감동으로 읽게 되었다. 유럽의 수도원은 중세 건물들로 그림과 같기도 하고 무척 아름다웠다. 그렇다고 그속에 갇혀 있다고 하여 결코 그들이 불행한 삶은 사는 것은 아니기에, 그들이 선택한 오롯한 삶을 살고 있기에 더 경건하게 읽을 수 있었다. 수도원이나 성당을 가면 괜히 경건해지고 숙연해진다. 여고시절에도 종교시간에 성당에 가면 죄를 짓지 않았는데 괜히 무겁게 무언가 고해성사를 해야 할것만 같은 불안함이 엄습해 오기도 했다. 그곳이 다른 곳이 아닌 신을 모시고 신앙생활을 하는 곳이라 좀더 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곳을 여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을 비우고 다른 모습의 자신으로 채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안에 채증처럼 쌓여 있던 것들을 18년 만에 놓아 버리듯 하면서 새로운 자신으로 채워 나가는 모습이 잔잔하니 '나도 그런 여행 하고 싶다' 라는 여운을 남겨 주었다. 세상과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곳이라 더 들여다 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자신 안에 발견되지 않은 믿음을 발견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게 한다. 여행은 어쩌면 '다른 사람과의 만남' 이다. 익숙한 것을 떠나서 낯선 것과의 만남이 여행이라지만 익숙한 사람들을 떠나 낯선 사람에게서 새로운 '따듯함' 을 얻을 수 있는, 얻고 오는 것이 여행이 아닌가 한다. 수도원 기행이지만 수도원에 있는 그와 관계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새로운 삶을 통해 나 자신의 현재를 다시 들여다 볼 수 있음이 아니었나 한다. 여행에 많은 도움을 주신분들, 생각지도 못했던 아님 그에게 가졌던 고정관념이 여행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고 새로운 인물을 담을 수 있음도 여행인듯 하다. 한 분 한 분 수도원에서 만난 분들은 비록 갇힌 인생을 선택했지만 자신들의 '최고의 안식처' 를 찾은 듯 행복해 보였다. 욕심을 부리며 현대 문명속에서 산다고 모두가 행복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자신을 비우며 자신을 낮출때 비로소 여유의 미소를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꽃은 곧 시들어 버릴 것이라 언제나 마음속에서 아름답고 사람은 짧게 스쳐갈수록 오래도록 기억이 나는 것인지... 아름다운 풍경과 거기서 만난 사람들 때문에 다시 꼭 찾아가고 싶은 곳, 프리부... 그러고 보니 이제껏 세 번의 유럽 여행이 헛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을 여행하면서 나는 한 번도 '사람들' 을 만난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본 것은 사람 없는 풍경과 역무원들과 장사꾼들뿐,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비로소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진정한 이야기에 귀 기울였기에 그 속에서 '나' 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세의 아름답거나 고풍스러운 수도원과 진솔한 수도자들의 이야기가 있었기에 그리고 자신의 속내를 숨김없이 글 속에 담아 냈기에 그녀와 함께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친 달팽이를 도와주지 말고 그냥 놔두라는 말처럼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 스스로 단단해 지고 있는 노수녀님들이 이야기는 뭉클하면서도 처연해진다.하지만 그 길이 다른 길이 아닌 '믿음' 을 향한 길이기에 아름다워 보인다. 그들을 통해 자신과 타협하듯 하는 작가, 어쩌면 독자에게도 자신을 좀더 비울 기회를 주는 여행서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이 책을 읽으면서 여고시절 친구들과 수녀님들과 함께 했던 그 성당에 가고 싶어졌다. 추억은 빛 바래서 가물가물 하지만 그 곳에 가서 앉아 있으면 지난날의 내 자신과 조우할것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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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동안 내 안으로의 여행만을 즐기고 있는, 나는 이번 11월 들어 뜻하지 않게 2번의 여행을 했다. 한번은 아내와 함께 한 제주 여행. 회사 동료들과 함께 한 세부 여행.
여행, 그것이 공지영 전작을 하면서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이 책으로 첫 리뷰를 쓰게 된 것은 어떤 우연일까. 여행이라는 모티브를 통하여, 어쨌든 만나는 것인가. 우리는.
어려서 나는 세상을 알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해외 여행을 하고, 무역업을 꿈꾸게 된 내밀한 욕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자궁에서 세상으로 떨어져 나와 세상을 여행하고 있는 우리는 어쩌면 모두가 여행자가 아닐까, 싶다. 홀로 하든 함께 하든.
내가 나고 자란 곳이 아닌, 이국으로 첫 여행을 하면서 나는 세상을 비로소 다르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비록 가까운 일본어었다고 해도.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이륙하는 순간 매우 거대하게 느껴졌던 그 도시, 대한민국 땅을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순간, 얼마나 작게 보였던지. 아등바등, 혹은 열심히 꿈을 향해 달려가든 아니든, 거대했던 세상이 티끌처럼 작게 보이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부질없게 느겨지든지 무척 놀랬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어떤 두려움에도 - 그것이 크든 작든- 불구하고 도전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여행은 그렇게 얼마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게다. 또한 미지의 것을 만난다는 설레임이 따르기 마련일 것이다.
여행은 가서 맞닥뜨릴 즐거움에 앞서, 먼저 기대와 설레임, 상상으로도 즐거울 수가 있는 것이 묘미가 아닐까?
어쨌든, 컴 앞에 앉으니 글은 써진다! (~16:02)
늘 지나치게 준비하는 성격인 나는 이번에는 하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떠났다. 앞서 맛보는 즐거움은 생략되었다고나 할까. 별 기대 없이 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흥적인, 맡기는 혹은 수용적인 여행을 한 셈이다. 그런데 그것도 그런데로 재미가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만나는 즐거움이랄까. 그 즐거움이 크려면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하며, 순수한 마음이면 더 좋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는 반추의 즐거움을 더 맛보고 있다.
흔히들 여행에서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고들 한다. 여행이 지나쳐가는 단순한 것일 때, 즐거웠던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잊혀지거나 사라지고나면 결국엔 남는 것이 사진 밖에 없는 것이니까. 사진은, 그 때의 추억을, 기억을 되살려주기도 하니까 '사진' 자체가 주는 어떤 인상만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니까 의미가 있는 것일 게다.
그래서 아내와의 여행에서 준비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기도 했거니와, 사진을 찍는 재미도 있는 것이라 두번째의 여행에서는 애써 오래된 구닥다리 사진기를 챙겼다. 담아온 인상, 풍경을 함께 보면서 맛보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도.
아무 것도 담아오지 못했다고 해도 나는 세부 여행을 느리게 반추하고 있다.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가서 '의미를 부여했던' 여행이라 마음 속에 사진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에, 회상하고 느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한 관광으로 그쳤다면 시간과 함께 기억의 저편으로 달아나 버렸을 것이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 없는 그 어떤 아련함으로 남아 있다.
안으로의 여행, 세상으로의 여행, 그리고 나는 독서 여행을 즐기고 있다. 어떤 면으로 보면 실제 하는 여행은 주마간산 격이 될 수도 있다. 마음 자체가 머물러 있어 보고 느끼고 하지 않는다면 그저 스쳐지나가는 풍경이 되고 만다. 그런 풍경 자체가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 있기란 어려운 법.
직접 체험하는 여행이 아닐지라도, 책을 통해서 하는 여행은 무궁무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이 결국 사람과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한 사람을 만나고 단순한 일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속내까지 깊이 알려면 적어도 많은 시간을 공유해야 하리라. 한 권의 책만큼 오래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행은 아마 없을 것이다.
취미 측면에서 본다면, 여행은 가장 값비싼 것일지도 모른다. 여행, 사진 촬영, 독서 중에서도 그럴 것이다. 이번 2번의 여행은 사실 많은 돈이 들었다. 그런데 그 여행의 가치는 얼마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의미를 찾지 않는다면 더욱 그러리라.
꿈을 위해서, 그리고 사업상 해외 여행을 얼마간 하면서, 결국 그 세상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사람들이 있고, 삶이 있고 그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이 바로 세상이라는 것을 보고는 나는 더 이상 여행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 그곳에 간들, 결국 내가 가는 거구나, 나의 세상관이 그 여행지에서 투영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서, 여행도 결국은 내 안으로 여행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밖으로의 여행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로 내 안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인생이 녹아있는 책으로의 여행을 하게 되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여행이라고 한다면, 나는 늘 여행을 하는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주어진 생 동안의 여행이, 이 세상에서 내가 즐겨야할 여행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여행을 즐겁게 만들고 의미있는 여행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 세상 떠날 때, 천상병 시인이 읊었던 것처럼, 아 아름다운 여행이었다, 고 하려면 인생이라는 세상에서의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인생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 나는 아름다운 여행자이고 싶다.
공지영 전작을 하면서, 나는 그녀의 인생을 여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어떤 생을 살았으며,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지금 어떻게 느끼며 살고 있는지를 관찰하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즐겁기도 하지만 슬플 수도 있다. 왜냐하면,
독자인, 나라는 관찰자를 배제하면, 주인공이 되어서 살아보는 것이니까, 그들의 체험이 곧 나의 체험이 되는 것니까,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기쁠 땐 나도 기쁘고, 그가 슬픈 땐 나도 슬퍼지는. 그녀가 의자놀이의 책을 쓸 때는 등장인물들의 입장이 되어 같은 감정을 아니면 동류의 느낌을 가졌었다고 한다. 그것을 빙의라고 얘기했다. 그래서 엄청 힘들었다는...
독서 여행은, 사실 굉장한 간접 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가 빙의만 잘 된다면, 많은 다른 인생을 살아보는 것이다. 경험만큼 솔직하게 알게 해주는 것은 없다. 그런 경험을 간접적이나만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기회이다. 여행을 하려고, 어떤 인생을 살아보려고 직접 체험을 하려면 많은 시간과 비용이 수반된다.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내가 살아온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느낌이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생각이 비슷하기에 자연스럽게 책 속으로 녹아들 수가 있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제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책 속의 주인공이 되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생각이 다르다면 우리는 쉽게 책 속으로 뛰어들 수가 없다.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비판하게 된다. 그러면 그 책은 나쁜 책이 되는 것이다. 책을 객관적으로 읽으려면 동화되지 않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읽는 것이다. 이 때 비로소 비평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동화되어 읽는다면 우리는 감상을 하게 될 것이다. 대게는 공감하면서 읽을 것인데, 그런데도 우리는 비평가의 입장에서 리뷰를 하게 된다. 나는 늘 비평은 보류한다. 대신 책 속으로 풍덩 뛰어들면서 책을 읽는다. 나중에 어떤 필요에 의해서나, 책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까 있을 때가지 유보해두는 편이다.
그녀의 수도원 여행 동안 나는 거기 없었지만 곁에서 따라다니면 함께 여행을 한다. 즐거운 상상을 한다. 함께 했더라면 어뗐을까 하는... 여행은 사람들의 많은 것을 드러내 준다. 친한 친구도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평소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보이지 않았던 것까지 보게 되므로 티격태격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사람은 오래 겪어봐야 하는 것이지도 모른다.
공지영, 그녀가 수도원을 여행하게 된다. 그 얼마전 그녀는 하느님께로 귀의하게 된다.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을까. '하느님' 혹은 '하나님' 소리만 들어도 펄쩍 뛰던 그녀가 얼마나 큰 장벽에 부딪혔으면 스스로 하느님을 찾게 되었을까. 아마도,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리라. 고통은, 그것에서 어떤 깨달음 혹은 다시 일어설 힘을 얻게될 경우에는, 축복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낙망이며 좌절이며, 재앙이다. 많은 경우, 고통 앞에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누가 고통은 축복이라고 했냐, 며 울부짖을 수도 있다. 그래서 고통에 대해여 이야기 할 때면, 용의주도해야만 한다. 극복하지 못할 사람에게 아무리 그것을 뛰어넘어보라고 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저 함께 함이 좋을 것이다. 아니, 그 시련을 딛지 일어서지 못할 자에게는 그런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이러니 한 게, 그러나 대부분 고통은 자기자신이 주는 것이지, 남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때까지, 그걸 깨달을 때까지는 한 손을 잡아줄 수 밖에.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녀가 그랬을 때 쯤 하느님 품으로 뛰어들었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돌아나왔다. 말하자면, 아직 돌아오지 않은 탕자라고나 할까. 어쩌면 나는 영원히 돌아가지 않을 배반자로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고통 앞에서 좌절했고, 낙망했고, 울어야 했었으니까. 내가 하느님께로 갔었을 때, 주체할 수 없이 흐르던 눈물을 기억하고 있다. 닦아내려고 해도 끊임없이 흐르던 눈물. 그 눈물의 의미를 아니까.
흔히, 고통은 그것을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만 주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극복해야만 한다, 일어서야만 한다, 고 조언한다. 고통에 져서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기에,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러하더라도, 일어서란 밖에 달리 할말이 없음이, 바로 인간의 비애가 아닌가 한다.
이제 나는 종교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종교, 는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은 영성일 뿐이다, 라고. 종교는 분란과 다툼과 분쟁만을 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두 종교가 만나면 거기에는 하나됨이 있을 수가 없다. 단지 위장된 함께함이 있을 뿐이다. 근본적으로, 뿌리부터 다른 두개의 나무는 서로 다른 나무이다. 그저 따로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서로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움직이는 나무인 사람은 서로 만나야 한다. 만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요즈음, 독실한 기독교 - 구분이 뭔 소용이겠는가마는 개신교 신자이다 - 신자와 동료로서 함께 지내고 있다. 그런데 사사건건 부딪힌다. 정치, 경제, 사회, 직업 등 모든 사회문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도저히 하나로 만날 수가 없다. 모든 생각들의 뿌리가 근본부터 다르기 때문에 곁가지나 잎과 같은 생각이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유일한 탈출구는, 종교관이 없는 사람으로 만나는 길이다. 일상적인 삶의 표피에 대한 이야기만 하면 문제가 없다. 그런데 거기 진짜 이야기는 빠진 채다. 깊은 만남이 있을 수가 없다.
사실 한가지 만나는 방법이 더 있긴 하다. 우리가 영성으로 만나는 길이다. 그가 기독교가 가르치는 근본 가치, 그 영성의 상태로, 나는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의 영성 상태에서 서로 만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어려운 점은 사랑은, 말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사랑의 상태로 만나는 것은, 사랑이라는 마음 상태로 그저 함께 함이다. 즉 영혼의 만남인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
이제 종교가 화합하는 유일한 길은, 기독교는 그 가르침에 따르는 영성을 갖고, 불교는 또 그것이 가르치는 깊은 불심을 갖도록 서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또다른 종교도 그것들이 지향하는 영적인 상태로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다. 전도 혹은 설법(불교에서 뭐라고 하는지?)은 자기 것을 남에게 알리는 권유하는 행위이다. 그러고보니 말을 해야하고, 교리를 얘기해만 하고, 종주들의 가르침을 전해야만 한다. 그러니 어찌 상대를 가만히 두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책에는 마더 테레사의 아름다운 실천궁행이 나온다.
문득 현대의 성녀, 캘커타에서 임종한 마더 테레사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운영하던 '임종자의 집'에서는 누구나 각자의 종교에 따라 마지막 예식을 거행할 권리를 주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결론적으로 종교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평화가 오려면.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아루르는 새로움 개념의 더 큰 종교를 만들어서, 그곳에서 하나로 만나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이 어떤 말이든.... 절대자, 우주교, 코스모스, 전체 등등의 특정 종교의 이름이 배제된 그 어떤 이름으로 만나야 하리라. 이런 생각에 동의할 깊은 신앙심을 가진 종교인들이 얼마나 될까? 예수가 죽어야 하고, 부처가 죽어야 하는게 가능하기나 할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권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주위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점을 소개한다. 이른 나쁜 일은 아니다.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자기가 믿고 보니 좋다, 그래서 좋은 것을 알려주기 위해 노력을 한다. 이것이 전도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쉽게 전도당하지 않는다. 고래고래 소리치는 전도의 목소리가 높을 때, 과연 저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또는 얼마나 잘 깨달았을까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필요한 종교적 미덕은, 자기 종교의 가르침이 전하는 영성을 끝까지 가는 것이리라. 종주가 가르친 그 아름다운 깨달음을 몸서리쳐지도록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사랑의 화신이 되고, 자비의 정령이 되어서 존재한다면, 누가 감동하지 않고 감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 진정한 전도가 아닐까?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은, 아마도 전도적 목적 혹은 계기로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좋은 것을 알리려는, 하느님께 귀의한 그 행복한 마음을 알리고 싶은 열정에서 말이다. 마침 유럽의 수도원 여행이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이것은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한 것이지, 책을 대하면서 가진 생각은 아니다. 그냥 함께 따라 가면서 수도원을 여행했던 것이다. 그녀의 시선으로, 그녀의 마음으로 따라가는 순수한 여행이었다. 그래서 순순히 그녀가 가는 대로 따라 다닐 수 있었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다행이다 싶은 것이, 그녀가 성당엘 다닌다는 것이다. 적어도 신부님들은 단군상의 목을 치지는 않으니깐 말이다. 적어도 그녀는 불교를 아니 절이나 스님들을 배척하는 외골수 기독교 신자는 아니니깐 말이다. 진리를 찾아 불교를 공부했고, 산사에서의 고즈녁한 풍경에 마음이 가는 정서적인 불교신자 -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 이니깐 말이다.
사실, 하느님의 세계에 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니 고통스러운 일이다. 엄격한 규율과 절제를 따라야 한다면 자유로운 인간에게는 엄청난 부자유이며, 구속이며, 굴레이다. 그것을 기꺼이 감수한 이들이 모여서 함께 영성을 가꾸는 곳, 수도원을 여행하는 것은 신자가 아니면 단지 관광에 머물고 말 것이다. 웅장한 혹은 그렇지 않은 수도원, 성당을 구경하는 것은 다른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세계를 이해하는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모든 것이 신비이며 아름다움일 수도 있다.
고통스럽다, 는 표현은 수많은 열렬신자들이 진정 하느님의 세계에 들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온 인생을 바쳤는데 그 세계에 들지 못할 때 번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위대한 성자들도 때때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 했을 것이다. 오, 신이시여, 어디에 계시나이까, 하고.
길은 간단한 것에 있을 지도 모른다. 일치.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내가 일치되는 길이다. 저기 멀리 어디 높은 곳에 계시는 그 분들을 상정하면 나는 영원히 분리될 수 밖에 없다. 분리는 의심을 낳고, 좌절을 낳고, 끝내는 파멸을 낳는 것이다. 분리란 너와 내가 다른 것이다. 분리는 차별을 낳고, 차별은 반목과 다툼을 낳고, 끝내 투쟁을 만든다. 하느님이 저기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고, 예수님이 또한 고고한 자리에 엄숙히 자리하고 있을 때, 나는 그곳에 도저히 오를 길이 없을 때, 우리는 좌절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그곳에 갈 수 없으니까, 하느님이 이 땅 가장 낮은 곳에까지 내려오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늘 우리들 곁에 와 계신 것이리라. 그런데도 우리가 늘 저 높은 곳을 바라만 보고 있으니 도대체 어디에서 하느님을 찾을 수 있겠는가. 이 엄청난 괴리 속에 우리가 괴로워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가난한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낮은 곳에 있는 이웃이 바로 우리가 함께 사랑해야 할 하느님의 무수한 자녀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 고 외치신 것은 아닐까 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지 않은데도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네 이웃이 바로 또 다른 너이고 하느님의 분신이므로 바로 사랑할 이는 네 이웃이라고.
그런면에서 본다면, 수도원에서 하느님과의 사랑에만 빠졌던 수사님이나 수녀님들은 어쩌면 이웃을 외면하고만 것이 아닐까? 어쨌든, 그녀는 수도원을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책으로 돌아가 보면, 으리으리한 성당에 그녀의 아름다운 시선이 담겨있다.
책을 말하자면, 중간 중간 박힌 사진들이 책을 예쁘게 만들어 준다. 역시 시각 효과는 크다 싶다. 사진이 어쩌면 실물을 보는 것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 거기엔 찍은 이의 시선이 들어가 있어 의미 또한 찾을 수 있을 게다.
유럽 여행을 한 적이 있다. 한번은 벨기에를 거쳐 스위스로. 한번은 벨기에로만. 모두 비즈니스 때문이었다.
벌써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이 아사무사하다. 하지만 매우 인상적인 경험을 한 일이 있어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너무나 치명적인 경험이라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베리에 전시회에서 스위스 거래처 사람을 만났다. 스위스에서 일부러 날아온 것이다. 나를 만날 겸해서. 척, 보아도 착하고 순진하게 생긴 남자였다. 호텔에 들렸다가 거리로 나섰다. 매우 오래된 웅장한 건물들로 둘러싸인 광장에서 만났다. 때마침 수많은 고등학교 학생들이 모여 졸업 축하 행사를 하고 있어, 그들의 물결 속에도 어울릴 수 있었다. 어디나 그런 행사는 하는 것이 웃기기만 했다.
길가에 내 놓인 자리에 앉아 생맥주를 한잔하며 바라보는 그 풍경은 자못 운치있었다. 맥주 한잔을 두고 꽤 오랜 시간을 머무르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하여간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던 것 같다. 다음, 술집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술을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어떤 강압적인 분위기에 휩싸였다. 몽롱한 상태에서 빌-청구서-에 싸인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도,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카드 청구서에 싸인을 하면서 나는 그 상황에서 아무렇게나 휙휙 싸인을 했다. 아무렇게나...나 자신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상한 싸인을...
의식이 돌아와 보니 스위스 친구는 없고, 나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와 간신히 통화를 했는 모양이었다. 다시 만났든가 어쨌든가 했다. 이미 새벽 깊을 대로 깊어 있었다. 택시를 타고 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고집을 부렸다. 걸어가겠다고. 어딘가에 있는지도 모르는 밤거리를 걸어가는데,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4시경이었을까, 불켜진 건물이 있어 그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그 이른 새벽시간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빵집이었는데, 장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깨어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깨어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아, 여기도 사람들이 사는 곳이구나, 싶었다. 결국 그것이었구나! 세상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호텔로 먼 거리를 걸어오면서, 그 간단한 생각을 곱씹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술집에서 무슨 약을 타서 우리를 사기쳤던 것이다. 어디나 나쁜 일은 벌어지는구나, 싶었다. 스위스에서 그 친구를 만나서, 우리는 크게 웃었다.
정말 웃긴 일은, 내 주머니 속에 든 청구서가 $500이었다면 그는 $1,000짜리였다. 참 남의 고통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있다니, 휴 다행이다 싶었다. 정작 한국으로 돌아와 보니, 날라온 청구서는 $1,000짜리였다. 나는 물론 이상한 싸인을 구실로 지급을 거절했고, 그게 먹혀 돈 한푼 지불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쓰디쓴 경험으로 벨기에 대한 나의 인상은 매우 나쁜 것으로 남아 있다. 언제나 버릴 수 있을까.
그래서 유럽은 내게 아주 낯선 곳은 아니다. 그녀와 함께 돌아보는 수도원들은 어떨까.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다니면, 사람들을 만나 그 속내를 들어본다면 더 좋은, 아름다운 여행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책 속에는 수도원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그녀가 살면서 경험한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다. 우리가 겪어내야 했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그녀의 눈을 통해 되살려진다. 어떤 면에서 인생은 우연한 아주 작은 경험이 계기가 되어 큰 영향을 받는 이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지금과 같은 삶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어쩌면 우연, 더 깊게는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려서 다닌 성당에서의 봉사활동에서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들이... 오늘날의 그녀에게 큰 영향을 주게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하느님에게로 귀의하게 만들었지도 모른다. 시립고아원에 봉사활동 갔을 때 갓 버려진 아이들을 보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아이들은 모두 언청이거나 기형아였다. ...
내가 이번 세부 여행에서 본 것도 아픔이었고 슬픔이었다. 20여년 전에 여행했던 그곳이, 여전히 가난하게만 비쳐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표피적인 인상에 불과한 것이지도 모르지만, 충분하다할 정도의 기간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직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영혼이 담긴 그들의 눈을 또한 보았기에 영 잘못 본 것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 나의 편견이나 오해에 지나지 않길 바라긴 하지만.
스쳐지나가는 거리 거리의 표정은 허물어져가는 집이 여기저기 서 있었고, 또 옹색하리만치 작은 가게들이 즐비했고, 담넘어로 궁색한 살림살이가 드러나 있었으며 , 비온 뒤라 그런지 흙탕물 고인 웅덩이가 곳곳에 있어서 음산하다 싶었다. 그 속에 사람들이 가만히 있거나, 느릿하게 또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곳이 필리핀의 한 구석의 지역의 모습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왜, 저들은 아직도 가난한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 같은 세계 시민인데 말이다. 게다가 그들은 캐톨릭 국가가 아닌가. 전 국민이 하느님을 믿는...
공허한 눈빛이었고, 슬픔에 찬 눈망울이었고, 낙망의 눈이었다. 어쩌면.
그렇다고 우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엔 어두운 구석이 많다. 가난 뿐만 아니라 불의, 억압, 강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밖에서 안으로 눈을 돌려도 역시 세상은 아름답기만 한 곳은 아니다.
우리 세상은 어쩌면 시험대에 올라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누구에게나 부족할 것이 없을 정도로 풍요를 주었으나, 너희가 얼마나 그것을 잘 나누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보려고, 하느님이 우리들을 시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예수가 가난한 자들이 나를 보는 것이라고 한, 그 가난한 자들을 위해 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시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에 붙여졌던 것처럼, 우리 인류도 너희가 얼마나 지혜롭게 함께 행복을 누리는지 보려고 모든 것을 주고도 자유의지를 주었던 것이 아닐까.
수도원 기행에는 가난을 돌보는, 가난을 체험하는 이야기나 나온다. 더욱 맑아지기 위해 한없이 청빈한 삶을 영위하려고 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체험이 가장 깊은 깨달음은 준다. 가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가난을 이해할 리도, 동정을 느낄 리도 없다. 그래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던가, 싶다.
세상에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을 이해하고 도울려면, 가난을 알아야 하는 자가 높은 자리에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들이 해야할 큰 의무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난한 자를 외면 하고, 어떻게 국민들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그녀는 묻고 싶을 것이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래서 당신은 행복하세요, 라고. 사실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오자히르에선가, 그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쑥불쑥 당신은 행복하냐고 물었다. 건성으로 대답을 하면, 더 집요하게 행복을 물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은 불행하다고 답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자신은 행복한지를 묻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을 찾아 떠난다. 멀리....
결국,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은 행복하냐고, 신을 믿는 당신은 행복하신가요?, 하고. 누가, '예스'하고 답할 수가 있을까? 누군들 '노'라 답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하게 이야기 하면, 울음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런데 저 신부님, 물론 저는 행복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행복이야 워낙 주관적인 것이기에,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건 자신이 행복하다면 행복한 것이다. 하지만, 그 근거는? 신부님은 이어서 말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 신부님 아마도 분명히 행복할 것 같다.
이번 세부 여행길에 우연히 읽게 된 책에서 저자는 행복보다는 의미를 찾으라고 했다. 목적, 목표 혹은 가치있게 느끼는 어떤 것들이 바로 의미가 된다. 사실, 의미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부여되는 것이다. 가령, 거리를 청소를 하는 청소부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깨끗한 거리를 만드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건 사명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의미 부여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의미. 그래서 사랑하는 사이는 '나는, 너에게 어떤 의미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한 여행에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면, 더욱 뜻깊은 여행이 되리라. 공지영 작가는 그녀의 수도원 여행에서 어떤 의미를 찾았을까?
나는 뜻밖에 하게 된 두번에 여행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더욱 행복했다고나 할까? 함께 함의 의미. 발견의 의미. 따뜻한 마음을 발산하는 의미 등등. 의미는 부여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야 할까? 늘 물어보고,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종교의 의미는 무엇이어야 할까. 수도원에서 그들은 어떤 의미를 두고 살아갈까. 아마도 그것은 사랑일 게다. 표현되는 언어는 달라고 그 뜻은 결국 그것이 아닐까.
그녀가 수도원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찾은 의미는 무엇일까?
결국 사람들이었다. 사랑해야만 하는 사람들.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사랑하지 않으면 안될 사람들.
결국 여행은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떠나지 않아도 되는. 그러나 돌아올 때는 이만치 커진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더 하느님의 모습에 가까워지는 자신. 그래서 더 사랑할 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녀에게 큰 의미였을 것이리라.
의미 있게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진정 의미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저마다 살아가고 있는 인생 자체가 큰 의미일 것이다. 그들이 하는 일이 다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설명 의미없는 일이라고 생각될 지라도, 우리는 의미를 부여받아 살아가고 있다. 어떤 일에든 사랑을 더하면 그건 분명 의미있는 일일 게다.
스치는 바람에 사랑을 더하면 그것은 그냥 바람이 아닐 게다.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내면 그건 단순한 봄이 아닐 게다. 어떤 이에게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을 느끼게 해주는 구원 같은 것이 될지도 모른다. 사랑을 보태면 그건 큰 의미가 될 것이리라.
세부 여행에서 우연하게 마주친 한 가냘픈 여성의 고백. 자신의 소망을 들어주지 못해 원망스러웠던 아빠에게 깜짝 생일 잔치를 열어줄 것이라는 얘기. 그들이 비록 가난해도, 나는 낙관을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의 눈망울에 공허 혹은 비애로만 비치지 않은, 그 이유였다.
나는 이제서야 여행에서 돌아와 혼자 기도하는 마음이 되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꿈과 소망을 이루고, 내가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도 그들의 꿈과 소망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소서! 가슴 한켠엔 그들에게 많은 의미가 될 책 한권이 들려져 있기를 그것에서 생의 의미를 많이 많이 발견하기를...
소녀여, 슬퍼하지 마세요!
2012. 11. 25. 21:09
여행에서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 방랑자 고서 김선욱
* 헤이, 지영씨... 저 책 꽤 괜찮든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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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수도원.. 읽을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몇 년 전에 샀지만 읽지 않고 책장에 그대로 두고 있었고 공지영작가에 대해 아는 바는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올해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를 읽고 작가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수도원.. 4년 전 인도 올드 고아의 성당들을 다닌 전후로 해서 내 맘속에 들어온 천주교. 그리고 '장미의 이름'에서의 수도원 풍경. 이 두 조합으로 이 책을 꼭 여름 휴가 때 읽어야지 생각했고 차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주님 어디 계세요!'라고 악을 쓰는, 수도원 기행을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작가의 여로는 담담하고 조용한 치유의 과정이었다. 여러 수도원을 다니며 그에 대한 느낌도 이야기하지만,
책을 읽기 전에, 읽는 중에, 그리고 읽고 나서 나도 꼭 수도원 기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에 대해 문외한이기 때문에 수도원 혹은 성당 건축 양식에 대해서는 그저 꿈뻑꿈뻑 보기만 하고 어설프게 느끼기야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수도원의 분위기, 느낌, 그리고 숙명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그리고 또한 치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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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마음도 아파서 혼자 끙끙 앓을 때 읽게 된 책. 공지영의 글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수도원"이라는 단어 때문에 선택했다.
자아를 잃지 않기 위해서, 신성을 찾기 위해서 껍질을 깨고 또 깨서 정화해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 의미 없는 말들이 난무하지 않는 곳.
다행히도 힘든 시기에 읽어서 더욱 달게 느꼈다. 어린시절엔 베스트셀러가 된 공지영의 책들을 읽어도 감흥되는 바가 없었는데, 이제 작가가 많이 좋아진 것 같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우울함을 끌어앉은듯한 기교 부리지 않고, 덤덤하고 그래서 더욱 사실적인 조금은 덜 오염되었을 것 같은...
책 중간 중간에 들어있는 작가의 기억 속의 문구들은 참 좋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 이런것들을 상징과 은유로 보여주는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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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접한지 7~8년이 지났군요 시간날때 마다 한번씩 다시 보는 책인데 정말 좋은 책입니다 제가 천주교 신자여서가 아니라 내용이 정말 좋습니다 인간 내면에 대한 성찰이 진지하게 다뤄지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은때가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던거 같은데 그때 제게 가장 크게 와 닿았던 부분은 작가가 중학교 시절 봉사활동으로 떠난 빈민가 얘기였습니다 수도원 기행이라는 제목과 지금 제가 얘기하는 내용이 뭔가 잘못된거 아닌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이 책은 단순히 수도원을 기행한 탐문서가 아니라는 점! 잊지 마세요 거기에 적힌 작가의 말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히 남네요!! 책의 일부 내용입니다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중 아르정탱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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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기행』은 두 달 전에 구입한 책이다. 공지영 작가는 개인적으로 믿고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 중에 한 명이다. 그의 작품들은 10여 권 이상 가지고 있고, 신작들은 빼놓지 않고 읽었다. 그러면서도 15년 전에 나온 이 책을 읽지 않은 이유는 않은 이유는 ‘수도원기행’이라는 제목이 전하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공지영의 수도원기행 2』가 출간되어서 1~2권을 모두 구입했지만, 읽을 엄두는 나지 않았었다. 그러던 중 1박 2일 동안의 서울 여행을 하면서 이 책을 챙겨가지고 가서 읽게 된 것이다. 그렇게 두려워했던 이 책에서 느낀 것을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첫째, 역시 힘겹게 읽은 책이다. 책이 어려웠다기보다는 수도원에서 사용되는 가톨릭 용어와 규정들이 낯설었다. 어떤 깨달음이나 감동도 느껴졌지만, 가끔씩은 지루하기도 했다. 작가의 소설과 수필 등을 대부분 재미있게 읽었고, 가톨릭신자이기도 한 내가 그럴 정도면 일반인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은 그의 작품 중에 가장 덜 읽힌 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둘째, 새삼스럽게 가톨릭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작품 외적인 이야기이지만 개인적으로 작가가 가톨릭신자라는 것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었다. 그는 결혼을 세 번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세 번의 헤어짐이 남편과의 사별이 아니라 이혼이었던 듯하다. 이혼에 대해 어떤 편견은 없지만, 가톨릭은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엄격한 편이다. 어느 종교보다도 이혼이 쉽지 않다. 가정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임에도 가톨릭신자라는 이유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들을 주변에서 여러 번 보았다.
그런데 작가는 세 번이나 이혼을 하고서도 가톨릭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는 어떤 가톨릭작가보다도 더 신앙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을 펴냈다. 그의 최근작인 『높고 푸른 사다리』는 수도원을 배경으로 한 수사들의 이야기를 담았으며, 『공지영의 수도원기행』 1~2권은 그의 신앙고백과 같은 책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을 나와 같은 범인이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원효는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파계승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는 신라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망라해서 위대한 고승 중에 한 명이다. 공지영 작가가 실천하는 신앙의 길은 우리가 모르는 신앙의 위대한 신비인지도 모르겠다.
셋째, 작가의 문장은 역시 좋았다. 이 글을 다른 저자가 썼다면 정말 지루한 기행문이 되었거나. 신파적인 신앙고백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수도자의 글보다도 더 강력한 영성을 느꼈으며, 작가가 만난 많은 사람들의 삶속에서 결국은 영원을 찾아가는 인생의 갖가지 여정을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한국가톨릭 신자의 3대 자랑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다산 정약용 선생, 이토오 히루비미를 응징한 한말의 교육가이자 의병장인 안중근의사, 가난한 한국 지성계에서 거의 유일했던 국민적인 원로 김수환 추기경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훗날 공지영 작가가 그들과 나란히 한국가톨릭의 인물로 기억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아쉬운 점을 든다면, 책의 문제점이라기보다 개인적인 문제점이다. 이 책에는 작가가 다녀온 여러 수도원과 여행지의 풍광이 담겨 있는데, 사진설명의 글이 너무 작아서 읽기가 힘겨웠다. 이것은 노안(老眼)이라는 개인적인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할까 가톨릭신자라면 관심을 가지고 책장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가톨릭이 개신교과 다른 점 중에 하나는 타종교에 대한 관대함이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들이 거의 없는 것이 가톨릭이다. 공지영 작가는 일반적인 가톨릭 신자보다 더 타종교를 배려하고, 그들을 존중하고 있다. 종교가 다른 이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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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만에 다시 나온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을 새롭게 구입했다. 성당엔 오랫동안 발걸음도 하지 않으면서, 한 번도 가본적 없고 갈 수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그 곳들은 왜 이리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와 책에 담긴 사진들이라도 내 곁에 두고 오래오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르장탕 가는 길. 풍경이 하도 아름다워서 몇 번이고 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고 싶을 정도였다는 작가의 말처럼 책에 실려있는 사진들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속에 나 역시 가만히 바라보며 서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길 끝에 닿은 베네딕트 여자 봉쇄 수도원에서 만난 수녀님들처럼 즐겁고 편안한 밝은 표정을 본다면 현실에서 왜면하고 싶은 일들도 온화하게 받아들이고 이겨낼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제일 가보고 싶은 테제, 꿈하나만 믿고 이룬 공동체 언젠가는 나도 그곳에 가볼 수있을까하는 기대감.... 그곳에서 만난 24살의 젊음이 무척 부러웠다.
얼마전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어릴적 성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며 열성을 다할시절 함께 했던 선배. 늘 수도자의 길을 걷고 싶어했고 교사를 그만둘쯤인가 수도원으로 들어갔던 그 선배. 지금은 기억도 흐릿한데... 소식을 전해준 지인과 통화하다보니 그 선배가 오랫동안 기도하며 열의를 다하고 마카오에서 서품을 받아 신부님이 되었다고 그래서 지금 우리 본당에 들렸고 다시 마카오로 가기전에 2월말에 미사를 집전하니 반가이 만나러 시간을 내라며 연락을 주었다. 그 새 신부님의 오랜 시간이 걸린 서품은 마카오에선 18년만에 처음 나온 서품이란다. 그래서 더 반갑고 많이 축하해 드리고 싶지만...지금도 나는 성당으로 가지않고 있다.
시간이 흘러 나도 작가처럼 어떤 부르심으로 어떤 힘에 이끌려 가게될까? 잔잔하면서도 아름다운 유럽의 수도원 기행은 잠시나마 내게 편안한 위안을 주고 마음의 평화를 전해준 그런 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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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를 두고 내 자신이 힘들어 이렇게 결심하고 떠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나도 최근 무척이나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가 있었다 아이들도 다 남편도 가족도 다 아닌 나 자신만의 시간을 오롯이 가지고 싶었다 지금은 솔직히 약간 포기한 면도 있고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그래 내년이면 조금은 그럴 수 있겠지 하는 마음을 먹었다 자신이 그토록 힘들 때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기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 환한 미소를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일 것이다
그건 공지영이 작가이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사랑하니까 가능한 것 같다 그리고 수도원 기행이라는 것이 그녀의 종교적인 믿음과도 연관이 되어 있고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작가다 이이를 알아서가 아니라 그녀가 쓴 글들이 좋아서... 그리고 학교를 처음 들어가서는 내 대학 선배라는 사실이 좋아서 그 다음에는 같은 여자라서 그리고는 엄마라서 그리고는 같은 종교인으로 한 사람으로서 물론 내가 보는 것은 일면이다 그 사람 전체도 아니고 그 사람의 내부 깊숙한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설가 라는 직업이 작가라는 것이 자신의 것을 그 무언가를 끌어내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나름 공지영작가를 좋아한다
그리고 내가 마음이 힘든 시기여서 이 글들이 더 와 닿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도 그곳에 한 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한다 그리고 언젠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가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