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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철학자로서 송두율은 한반도의 분단 현실의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제주도 출신인 부모를 두고 일본에서 출생했으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광주에서 졸업했고, 서울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독일로 유학을 가서 하버마스의 지도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독일의 대학에서 교수로 자리를 잡으며 그곳에 정착을 하였다. 1973년 북한일 방문한 이래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강의를 한 경력이 있으며, 김일성 사망 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활동하면서 독일에서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하는 등 해외에서의 민주화 운동에 적극 나서기도 하였다.
2003년에는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입국했으나, 검찰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집행유예형을 선고받아 구속 9개월만에 출소한 후 부인과 함께 독일로 출국했다. 지난한 재판 과정을 거쳐 2008년에서야 비로소 독일 국적인 송두율 교수가 외국에 거주하다가 북한을 방문한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니라는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최근 검찰의 자의적인 법 적용을 두고 문제를 삼고 있는 시점에, 한동안 송두율의 입국을 두고 문제를 삼던 당시의 일들이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이른바 공안정국을 조장하기 위해 악용하였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송두율의 입국과 이후에 검찰에 의해 기소되고 진행된 재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95년에 발간된 이 책의 제목은 20세기 말 학계를 풍미했던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의 내용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1990년대 옛 소련이 몰락하고 동유럽의 연쇄적인 변화에 직면하여, 후쿠야마는 자본주의에 의해 소비지상주의가 만연하고 더불어 끝내 역사의 종말이 도래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저자는 후쿠야마의 이러한 전망에 대해 그것이 서구 중심의 시각에 입각한 것임을 비판하면서, 개별 민족의 자기 정체성 확립을 위해 노력하는 제3세계 민족에게 아직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관점이라고 하겠다. 특히 남북한의 분단과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서 진지한 질문과 제안을 던지고 있다.
이 책의 출간으로부터 30년이 가까워지고 잇는 이 시점에 다시 읽은 후, 때로는 그의 예견이 들어맞는 것도 있었지만 어긋난 사례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과 북의 사회와 문화를 모두 알아야 한다는 저자의 관점만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특히 제4부의 ‘북한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는 저자가 알고 있는 북한사회의 현황과 그들의 이데올로기로 자리를 잡은 주체사상에 대한 고찰이 제시되어 있다. 오래 전에 대학교수를 은퇴하였지만, 지금도 틈틈이 국내의 일간지와 잡지 등에 기고한 글들을 통해서 객관적인 위치에서 관찰했던 송두율의 한국사회 인식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차니) 개인 독서 카페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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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0월 12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태어나, 1967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 1968년 독일로 유학해 하이델베르크대학교와 프랑크푸르트암마인대학교에서 철학·사회학·경제사를 전공,1972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대학교에서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지도 아래<헤겔·마르크스 그리고 막스 베버에 있어서 동양세계의 의미>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2년 유신헌법,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인해 180명의 지식인들이 구속·기소되자 독일에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발족해 유신정권과 갈등을 빚은 후 2003년까지 귀국 못함. 특이한 경력은 1991년에는 북한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강의했다. 누구일까? '송두율'이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망령은 '국가보안법'이다. 오늘 논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보안법은 아니다. 1995년 조국에 돌아오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썼던, 세계와 민족을 생각하는 학자가 되라고 말씀하신 부모님께 바친 <역사는 끝났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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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좀 어렵고도 재미없는 글(?)이었지만 제 나름대로 생각할 많은 부분을 남겨 준 글이었습니다. 이 책의 대강의 내용은 냉전 종식 이후에 서구의 수많은 학자들이 이제 자본주의 혹은 자유주의의 승리를 부르짖는 당시 1990년대 초중반기에 저자는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며 자유주의는 승리한것도 아니며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망한 것이 아니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자 들어갑니다.
하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기본적은 생각은 "자신의 시각으로 세계 혹은 우리를 바라보자" 는 것입니다. 저자는 타인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일면 객관적일 수도 있지만 태생적으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저자는 서구의 소련 몰락을 바라보는 자만심에 가득찬 시각을 비판하며, 소련의 멸망은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에서 자유주의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소련의 내재적 모순이 몰락을 초래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저자는 이러한 역사의 종말을 논할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그러한 시각에 대해 비판적인 안목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탈현대(포스트모던이즘)에 관해서도 저자는 오랜 서구의 지적 전통만이 그것을 논할 자격이 있으며 그러한 지적 전통이 없는 우리는 그것을 논하기에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둘,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 저자의 북한에 대한 시각은 애정과 따스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의 북한 연구의 방법론인 내재적-비판적 시각 또한 북한 스스로가 설정한 자신의 목표에 비춰 북한 사회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만약 그러한 방법으로 사회를 바라볼 경우, 모든 사회의 모습을 긍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아시아적 가치" 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는데 여기서 싱가포르의 리콴유나 말레이지아의 마하티르는 서구의 인식을 그대로 동양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이며 우리는 우리의 눈을 통해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이 일면 타당하면서도 과연 그럴까라는 의문을 들게 만듭니다. 세계에 보편적인 가치는 과연 없는 것일까? 엄격한 사회 질서로 알려진 싱가포르에서 오히려 국민들이 그러한 염격한 법에 무관심해져 일상적으로 경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리고 마하티르나 리콴유의 정치적인 권위주의는 어떻게 된 일일까? 이것은 어떤 사회를 연구하거나 바라보는데는 모두 동일 하지는 않지만 동일한 가치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흔히 인권이나 생명의 존중 등 말입니다. 북한의 수용소 문제 인권 탄압과 같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까요?
셋, 우리는 일본이 아니다. 저자는 문화, 경제, 통일, 음악 모든 분야에 폭넓은 시각을 통해 결코 한국은 일본이 아니다 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일본보다 20년 정도 떨어져 있다고 말하며 일본 따라잡기를 말합니다. 그러한 시각에는 이제 우리는 일본의 40-50년 전이 아니라 20년 전으로 다가갔으니 조금만 있으며 일본과 동등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한국은 일본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외경제의존도의 차이 역사적 경험의 차이는 한국의 모델은 일본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자의 주장은 우리는 우리의 방법과 시각, 경제적 모델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통해 우리를 바라볼때 앞으로 미래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비판적으로 읽기 위해 꼼꼼히 살폈지만 저도 모르게 저자의 논리와 시각에 그대로 흡임됨을 느낍니다. 저의 지식과 독서가 모자란탓이겠지요. 또 왜 우리 민족에 대한 따스한 시각을 가진 학자가 우리 나라에 아직도 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못마땅하며 그가 한국에 들어오는 날 이 땅에 민주주의란 진정한 이름의 꽃이 필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인상깊은구절] 한반도에서 남북통일을 흡사 '과정'(process)없이 우리에게 불숙 다가오는 '사건'(accident)처럼 기대하는 태도는 '순간'이 줄 수 있는 낭만적인 정치미학과 결정주의적 충격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에 있어서는 많은 피를 흘리는 '체제통합'을 전제한다. 통일에는 '베트남식'이거나 '독일식' 밖에 없다는 '역사적 모험'에만 의존하려는 안이한 태도로서는 '남이냐 북이냐'라는 양자택일의 논리로부터 '남과 북'이라는 변증법적 이해의 세계속으로 우리의 사고를 전진시키지 못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