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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먼저 보았다.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 더 궁금했고, 가즈오 이시구로의 원작이라고 해서 꼭 보고 싶었다. 영화는 캐시의 시선을 따라간다. 간병사로 일하는 캐시가 어떤 한 남자를 병실 밖으로 바라보며 시작된다. 간병사로 제법 이름이 알려져 환자를 선택할 수도 있는 그는 어렸을때 기숙학교였던 헤일셤의 일들을 떠올린다. 참견하기와 미래의 삶을 상상하기를 좋아했던 루스, 자기 마음 속의 분노를 제어하지 못해 소리를 질렀던 토미, 헤일셤의 풍경들을 바라보는 캐시가 보인다. 마음 속 깊은 곳에 따스함을 간직하고 있다. 많은 아이들이 따돌리는 토미에게도 친절할 뿐더러 루시 선생님의 말씀에도 귀기울이는 소녀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어떤 삶을 위해 태어났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미래도, 부푼 꿈도 없을 거라는 걸 그들은 알지 못한다. 십대 후반의 나이가 되자 장기 기증을 위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 헤일셤을 나와 코티지에서 생활한다. 이곳에서 간병사가 될 수도 있고, 인간들 틈에서 생활하는 법을 적응하는 기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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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간을 위해 장기 기증을 하게 된다. 그들은 인간들에게 장기를 제공하는 복제인간들이다. 한 번의 장기 기증을 하고 바로 죽는 사람들도 있고, 두 번, 세 번에 걸쳐 기증을 하고 살아남기도 한다. 여기에서 들었던 의문이 왜 그들은 도망가지 않느냐 였다. 도망가면 되지 않나. 자신들의 장기를 필요로 하는 인간들을 피해, 아무도 없는 것으로 가면 되지 않나. 영화속에서 그들에게는 칩을 부착해 들고 나가는 것을 체크하고 있었다. 인간의 복제인간으로서 그들의 장기 기증하는 것에 순응하고 있었나. 그게 그들의 삶이라고 생각했던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담담하고도 건조한 시선 때문에 책을 읽는 독자들은 그들의 모습을 좀더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된다. 복제된 인간의 장기 이식은 급변하는 미래의 사회에서 어느 정도 상상해왔던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만을 생각했을 뿐이지 정작 그들을 생각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도 하나의 인간들로 보이는데. 생각을 하고 사랑을 하고, 성교를 나눌 수도 있는데. 그들도 생명이 있는 존재들인데, 그걸 생각하지 못했던 듯 하다. 그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그저 장기 기증을 하는 물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를 피하고 싶은 이의 모습은 헤일셤의 아이들의 그림을 가져갔던 마담의 몸짓에서 드러난다. 호기심에 마담을 바라보는 헤일셤의 아이들을 피해 걸어가는 몸짓, 혹시나 자신의 몸에 닿을까봐 움츠러드는 몸짓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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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교체로 암을 치유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어떻게 그 치료를 포기하고 희망 없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겠니? 후퇴라는 건 있을 수 없었지. 사람들은 너희 존재를 거북하게 여겼지만, 그들의 더 큰 관심은 자기 자녀나 배우자, 부모 또는 친구를 암이나 심장병이나 운동 세포 질환에서 구하는 거였단다. 그래서 너희는 아주 오랫동안 어두운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었지. (491페이지)
오래전에 읽었던 낸시 파머의 『전갈의 아이』가 떠올랐다. 자신만의 생각을 할 줄 아는 여느 인간처럼 키워졌다가 14살이 넘으면 돈이 많거나 자신의 원본에게 자신의 장기를 이식해 주어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의 이야기였다. 『전갈의 아이』에서도 느낀 바지만 『호모데우스』 에서 유발 하라리도 그런 말을 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오래 살거라고.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클론에게서 장기를 이식 받을 수 있고, 어마어마한 금액을 들여 미리 검사를 받아 암을 예방할 수도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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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기증을 위해 복제된 아이는 사람으로 보아야 할까, 동물로 보아야 할까. 만약 우리가 복제 인간을 만든다면 우리 또한 그들을 그저 장기를 기증하는 존재로만 여겨질까.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너희들은 장기 기증을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할 뿐일까.
소설로 읽을 때는 가즈오 이시구로처럼 건조한 시선으로 따라갔다면, 영화는 좀더 극적이었다. 소설에서의 많은 설명들이 배우들의 눈빛과 시선으로 나타났었고, 화면으로 보이는 실상에 못내 가슴아팠다. 캐시와 토미, 그리고 루스. 사랑한다고 해서 기증 유예 신청을 할수도 없이 그들의 운명대로 흘러갈 수 밖에 없었다. 눈부신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가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질문을 건네고 있었다. 간과할 수 없는 우리 미래를 고민해 볼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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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청소년을 모델로 한 성장소설을 많이 만난다. 그들은 우리들이 거쳐 온 세계를 담고 있기에 쉽게 공감이 가고, 잘 읽힌다. 이 책도 처음 읽어나가다 보면 그런 이야기로 느껴진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생활하는 내용이 담겨지고 서로의 관계를 그려내며 선생님들과의 만남이 그려진다. 그들의 삶이 보통의 학교생활과 진배없이 표현되고, 갈등과 아픔, 즐거움과 애틋함이 나타난다. 일상의 성장과정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읽어가다 보면 학교란 것이 이상한 공간에 와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게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면서 글이 어려워져 버린다.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 넘어 이상한 밀도를 가진 이야기로 변모해 나간다. 아이들의 일상을 새롭게 재구성해야 하고, 아이들의 말 한 마디에 놀라움으로 응대해 나가야 한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불가해한 일들이 벌어지고, 선생과 학생의 관계도 다시 재조명을 해나가야 한다. 글 속에는 처음부터 가정이란 것이 등장하지 않는다. 부모가 없고 아이들의 얘기만 있다. 그리고 선생님들의 얘기가 있다. 아이들은 학교생활을 하면서 많은 통제를 받고 있다. 일정한 시간에 그들이 만든 물품을 가지고 장마당 같은 곳에서 물건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제공되지만, 그들 스스로 무엇을 사고파는 행위를 할 수가 없다. 모든 언행과 삶이 학교의 지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학교가 부모고 학교가 그들의 가정이 되는 것이다. 요즘의 경우로 생각한다면 기숙사에서 살고 있다고 여기면 될 듯하다. 집에 갈 수 없는 기숙사 생활, 아니 보호시설에 생활하는 아이들로 여기면 될 듯하다. 아이들은 서로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라는 사실을 모르면서 성장한다. 그리고 차츰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자각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런 자각이 학교생활과 선생님들의 표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선생님들은 그들에게는 감시자요,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 주인공은 학생 중의 한 명이다. 비교적 언행이 분명한, 지각이 있는 학생으로 그려진다. 그는 주변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선생님의 역할을 인지하면서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궁구하면서 찾아간다. 선생님 주변을 서성이면서 선생님의 절대 권력 같은 것을 느끼면서 두려움까지 가진다. 결국 어떤 선생님에 의해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그들에게 맡겨진 운명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그들은 사람들을 위해, 사람들의 장기를 위해 기증자로 키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장기를 기증하는 입장이 되면 기증을 하고 병원에서 회복을 기다리는 삶을 산다. 그럴 때 다른 한 가지 일은 간병사가 되는 일이다. 헤일셤이라는 공간에서 그들은 그렇게 어린 시절을 암묵적인 암담함 속에서 키워지고, 코티지란 곳으로 이동한다. 그곳으로 여행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기증의 때를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병아리들이 사육장에서 길러진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란다. 그러면 더러는 고기를 인간에게 주기 위해서 죽임을 당하고, 더러는 계란을 낳아 인간에게 이롭게 한다. 그러다 결국 그들도 통닭의 길을 걷는다. 이 글 속에 나오는 아이들의 입장이 병아리와 같다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그런 병아리들이 아이들이 되어, 그들의 생각을 풀어내고 있고, 그들이 만나는 상황을 불안함을 섞어 표현해 내고 있다. 암담한 이야기다. 줄기 세포를 이용한 복제 인간들의 양육과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다른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을 목적으로 사육되는 인간, 인륜에 위배되는 소설 속의 사고가 못내 역겹기도 하다. 이들의 구성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 그들의 성생활을 장황하게 얘기한다. 그것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치환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들의 감정은, 지식은, 마음은 인간의 그것과 동일하게 만들어 놓고 그들의 존재 가치는 대리용 사육자로 만들어 놓은 인물 창조가 못내 마음에 안타깝게 다가온다. 그들은 성교도 한다. 하지만 아이를 가질 수는 없다. 또한 감정의 기복 같은 것이 여느 사람들과 다르다. 인성을 가진 로봇이라고 생각하면 이해를 할 수가 있을 듯하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들을 잘 사육하기 위해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성적 생활이다. 물론 그들은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그렇게 즐긴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만들기 위한 사람들의 교묘한 우민 정책으로 보면 될 듯하다. 과거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스포츠를 통해 민중들의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던 것과 동일하게 생각하면 된다. 그들은 서로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조심스러운 행위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병이 옮겨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자의적으로 행하는 듯이 이루어진다. 물론 그렇게 되어야 그들도 마취제의 역할이 되어 그들이 가진 역할을 위해 기꺼이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부하가 장수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듯이 이들은 사람을 위하여 그들의 장기를 기증하면서 그들의 삶이 이루어져 간다. 그러다 장기가 온전히 훼손되면 죽을 수밖에 없다. 그 일을 위해서 사육되는 인간들, 참람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앞으로 전개될 감정을 가진 기계의 인간을 위한 사용을 심각하게 고려한 저자의 생각이 아닐까 생각이 되어 진다. 그들은 서로의 마음을 보듬으면서, 그들의 처지를 인식하면서 병원에서, 혹은 그들의 특정 공간에서 처연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이 인간으로서 본연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 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부정직한 사회에 저항하는 그런 인식은 없다. 주어진 것을 묵묵히 받아드리면서 현실을 참람하게 인식하는 안타까움만 존재한다. 이것이 SF적인 성격이 가미된 이 소설의 한계라 여겨진다. 인간이 지닌 능력과 그 능력으로 교묘히 타인을 악업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행태가 못내 역겹게 그려진다. 청소년의 성장 소설이되 성장소설의 의미를 벗어나 인간 문명의 괴리를 들춰보면서 미래의 인간들에 대한 암울한 상상을 하고 있다. 인간이 더러는 짐승들이 될 수 있음을 표현하면서 악한 인간들의 심성이 드러난다. 어찌 보면 잔인한 인간들의 삶이 타인들을 도구로 사용하는 정도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경각심을 갖게 한다. 통찰의 지혜가 돋보이는 글이지만, 그 상상력에는 아픈 생각이 든다. 이런 일들은 인간들에겐 말하지 않아야 할 금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인간이 짐승이 되어 사는 일 같은 이런 현실은 저자의 가슴에만 있는 내용으로 머물게 하고 싶다. 인간들의 윤리가 그립게 만드는 책이다. 마음 답답하게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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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아니었으면 가즈오 이시구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채 살았을지도 모른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발표될 때마다 최근 10년 사이 내가 만나본 작가의 작품이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책 좋아한다며, 툭 하면 "취미가 독서라예~" 하면서 정작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이 발표될 때마다 왜 이리 낯선 사람들이지, 내가 책 좋아하는 사람이긴 한 걸까? 하는 자괴감과 부끄러움이 동시이 들곤 했다. 이번엔 미루지 말고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을 읽어보자라고 불끈 다짐하며 여행작가 김남희씨가 이시구로 작품 중 가장 좋아한다던 『나를 보내지 마』부터 읽어보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문학을 읽는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만든 상상의 세계 즉, 전혀 생각해본 적 없는 세계를 들어가보기 때문이다. 강렬한 충격과 자극제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으로 책 만한 것이 없다. 『나를 보내지 마』 역시 그런 역할에 충실했다. 최근 읽은 소설 중 가장 강력히 들어온 작품이다. 왜 이제까지 가즈오 이시구로를 모르고 살았는지, 더욱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클론 이야기라는 것은 알고 읽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모르고 읽었다면 가독력이 처음부터 생기진 않았을 수도 있다. 평상시 같지 않은 상황이나 용어 등장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가령 간병사, 기증자, 네 번째 기증, 회복 센터... 등. 처음부터 클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도 상관없는 단어, 상황, 장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몰랐다면 조금은 어리둥절 했을 것 같다. 이게 무슨 말이지?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인가? 등등.
12년차 간병사 캐시.H가 화자이다. 그녀는 헤일셤 학교 출신의 클론이다. 이 책은 총 세 개 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헤일셤 학교를 다녔던 시절, 2부는 학교 졸업 후 코티지 생활을 했던 시절, 3부는 간병사 생활을 했던 시절로 나뉜다. 70년대, 80년대, 90년대가 걸쳐져 있다. 시간상으로만 보았을 때 방대한 이야기다. 어느 한 사건만 다루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복제 인간이란 소재는 미래 사회와 어울린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작가는 그런 선입견을 과감히 파괴하고 과거 사회로 설정했다. 그 자체부터 대단한 작가의 상상력이다. 찬반 논쟁으로 파고드는 인간과 클론 간의 싸움을 다루지도 않는다. 오직 클론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전쟁을 선포하고 인간을 공격해야할 것 같은데 이 소설 속 클론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시스템을 벗어나지 않으며 그들 안에서 어울리고 시기 질투하고 사랑한다. 전면으로 드러내 다루진 않았지만 오히려 인간들끼리 인간복제 문제에 대해 논쟁하고 싸우는 모습이 보인다. 그 과정에서 만든 것이 헤일셤 학교였던 것이다. 복제 인간도 인간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학교. 사육이 아닌 교육을 했던 학교. 그래서 다른 클론 학교들에 비해 헤일셤 출신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이 작품은 그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작가가 대놓고 이래라 저래라 훈시하지 않는다. 인간 복제에 대해 찬반을 나누지 않는다. 복제 인간들의 일상과 운명을 보여줄 뿐이다.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논쟁거리는 이야기 속에 다 녹여놓았다. 명쾌한 질문을 던지는 수준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독자 스스로 의문을 던지고 생각을 하게 만든다. 작가의 문체는 간결하고 깔끔한데 독자를 조용히 조종한다랄까. 작가가 '생각해봐' 라고 내준 숙제를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야기도 탄탄하고 문장은 말할 것도 없고 상상의 경계는 어딘지도 모를만큼 앞서 나가는 작품이다. 올해의 시작에 고른 책으로 탁월하고도 탁월했다. 적극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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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 수상후보로 늘 거론되곤 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라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다른 일본작가가 수상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루키는 『기사단장죽이기』에서 난징대학살 장면까지 삽입하며 노벨상에 관심을 보여도 안되는데 어떻게 이시구로는 수상작가가 되었을까 한번 느껴보자는 심정으로 책을 읽게 되었다. 『나를 보내지마』라는 제목도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처럼 노래에서 따왔다.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 여학생이 배게를 아기처럼 안고 "Baby, baby, never let me go."라고 노래부르는 모습을 지나가다 보게 된 학교 관리자가 눈물흘리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캐시, 그녀의 친구인 루스, 그 둘과 삼각관계인 토미라는 남학생은 학창시절, 사회적응기, 성인시절을 함께 보내며 서서히 자신들이 복제인간이며, 장기기증을 하고 죽게될 운명임을 알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이 교육받은 헤일셤이라는 기숙학교는 예술적, 창조적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지라 학생들은 독서, 시쓰기, 그림그리기같은 활동에 열심을 내고 있다. 토미는 축구같은 신체활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늘 멸시당하며 아웃사이더로 성장하기에 남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관조한다. 실제로 이들에게 더 바람직한 과제는 건강한 신체를 가진 성인이 되는 것일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복제인간에게 어떠한 교육을 하는게 옳을까?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어 냉정한 운명에 직면하게 하는게 나을지, 어린 시절의 행복한 추억이나마 간직하고 죽을 수 있도록 현실을 감추는게 나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학창시절 우수했던 학생들은 과제에 몰입하느라 현실에 순응하는 삶을 살고, 부적응자들이 학교와 사회의 위선을 더 잘 간파했다는 것에 시사할 점이 있다. 교육이란 학생들 개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성사회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사회인을 길러내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냉엄한 진실이다. 복제인간에게만 성장기, 간병인, 기증자로서 삶을 마치는 운명이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생로병사라는 필멸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있음을 깨닫게 만드는 섬세한 공상과학소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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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말을 할 때는 잘 들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그 사람의 본심을 알 수 있을테니까? 잘 듣지 못하면 그렇게 말했을거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가 그렇듯이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이 책은 독서토론 시간에 필독서라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가슴이 아프다고 느낀 분들도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고들 말을 한다. 그런네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왜 했을까에 초점이 맞춰지니 그것에 대한 궁금증만이 들었다. '들었지만 듣지 못했다'라는 말도 무엇을 이야기하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캐시의 과거 회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세상으로 이끌고 간다. 그냥 기숙학교의 이야기처럼 흘러가지만 그들은 우리랑 달랐다. 그들은 헤일셤에서 공부를 했다. 어디서 그들이 왔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근원자에 대해 궁금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자랐다. 헤일셤에서 루스랑도 토미랑도 친했다. 그래도 꿈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아이들은 하곤 했다. 그 말을 들은 루시선생님은 별관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 “나쁜 뜻에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이런 얘기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이런 얘기가 줄곤 들려오고 그런 예기를 계속하는 게 허용되고 있는데 그런 옳지 않다.” “다른 누군가가 너희한테 얘기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말해 주마. 전에 말하는 것처럼 문제는 너희가 들었으되 듣지 못했다는 거야. 너희는 사태가 어떻게 될 건지 듣긴 했지만, 아무도 진짜 분명하게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감히 말하건대 사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데 무척 만족하는 이들도 있지, 하지만 난 그렇지 않아.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당연히 필요한 사항을 알고 있어야 해. 너희 중 아무도 미국에 갈 수 없고, 너희 중 아무도 영화배우가 될 수 없다. 또 일전에 누군가가 슈퍼마켓에서 일하겠다고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너희 중 아무도 그럴 수 없어. 너의 삶은 이미 정해져 있단다. 성인이 되면, 심지어는 중년이 되기 전에 장기 기증을 시작하게 된다. 그거야말로 너희 각자가 태어난 이유지. 너희는 비디오에 나오는 배우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야. 나랑도 다른 존재들이다. 너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미래가 정해져 있지. 그러니까 더 이상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얼마 안 있어 헤일셤을 떠나야 하고, 머지않아 첫 기증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해.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각자 앞에 어떤 삶이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
헤일셤에서 나와 농장에서 생활할 때도 루스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사회의 정확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을 한다. 간병사가 되고 그 다음은 기증자가 되고 그렇게 중년도 되기전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받아들인다. 그들에게는 선택이 없었다. 받아들이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친했던 루스, 토미, 캐시도 그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그들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클론이다. 그렇다고 그들은 감정이나 생각도 한다. 하지만 인생을 자신의 의지대로 바꿀 수는 없었던 것이다. 기증 연기를 위해 마담을 찾아갔을 때 그들은 그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인정했다. 헤이셤이 페쇄되었던 이유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감정이 인격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다고 알리고 싶었던 에일리선생님을 말을 들었지만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으니까.
“가엾은 것들. 너희를 도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이제 너희 운명은 스스로 헤쳐 가야 한단다.” 마담의 말처럼 아무도 도와 줄 수 없었다. 그저 운명을 받아들여지게 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도 그런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일도 있음을 알지만 그래도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일들이 꼭 허구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관습이, 생각이 우리를 그런 틀에 가두어두고 가엾은 사람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어쩌면 많은 말들을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통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들었으되 듣지 못한척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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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복제를 다룬 SF 소설이 인공지능 시대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 나를 보내지 마 독서, 토론, 예술, 사랑. 헤일셤 출신 이들이 받는 교육이자 그들의 삶이다. 간병사, 기증, 근원자, 클론, 죽음. 이 역시 헤일셤 출신 이들의 숙명과도 같은 부분이다. 헤일셤 출신들이란 바로 인간들에게 장기를 기증해 줄 복제 인간 클론들이다. ‘나를 보내지 마’는 한 편의 클론의 성장 소설 같은 작품이다. 클론이라는 단어만 빼면 여타 성장 소설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한 인물이 자라면서 겪는 심리적 갈등, 성에 대한 관심, 자신이 어떤 어른이 될지 궁금해 하는 모습들은 인간과 똑같다. 단지 정해진 숙명에 거부하지 않고 그저 장기를 내어줄 뿐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이다. 헤일셤은 장기 이식용 클론들을 교육하고 예술적 활동까지 익히는 환경에서 키워 낸다. 헤일섬의 아이들은 자라는 동안 막연히 자신들은 아기를 가질 수 없고, 장기 이식 전 간병사가 될 것이라는 것 알아가고 그런 것으로 받아들인다. 어른이 되어서도 장기 이식을 준비하고 1차, 2차 그래도 살아 있다면 3차, 4차의 장기 이식을 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생명을 다한다. 단순한 SF공상 소설의 소재라 생각하고 넘기기엔 지금 과학 발달의 속도를 보면 머지 않은 미래에 인간의 ‘소중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어쩌면 우리 과학은 클론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날이 오면 우리는 그들에게 장기를 내 놓을 것을 요구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이란 어떤 것이냐에 대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나를 보내지 마’의 주인공 캐시는 자신의 근원자가 사회에서 천시되는 부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처럼 크는 것은 아닐지 두려워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차분하게 묵묵히 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같은 클론 친구 루스, 토미 등과 우정, 사랑을 겪어나간다. 토미의 죽음에 처음으로 일탈도 해보지만 다시 묵묵히 돌아가야 할 곳으로 향해 출발할 뿐이다. 같은 클론이라고 해도 루스, 토미, 캐시는 각각 생각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다른 이들이다. 만든 것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고, 그 목적이 인간을 위한 도구라 하더라도 인간의 복제품인 만큼 클론들은 인간과 똑같다.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영역들을 그들도 할 수 있다. 예술적인 활동을 하고 심지어 사랑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들에게도 인권을 부여하는 것이 맞는지, 그렇다면 그들이 존재할 이유가 있는지 반대로 그런 시대에 인간은 무슨 가치인지 끊임없는 질문들이 생겨난다.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이름만 보고 당연히 일본작가라 여겼다. 이름과 사진만 빼면 전혀 아니라고 인터뷰했을 정도로 다섯 살에 영국으로 이주해서 자라 동양적인 영향을 많이 받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의 작품 ‘나를 보내지 마’를 읽는 내내 일본 작가 특유의 섬세함과 차분함이 느껴졌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사건들을 덤덤하게 서술해 나가는 그래서 독자가 더 많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가까운 시대에 인공지능이 일상화 될 것으로 전망되는 시점에서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인공의 무엇인가가 인간을 대신하고, 인간과 비슷한 영역까지 왔는데 그들은 인간이 아니고 우리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고 함께 살아가야하는 지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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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이 책을 읽고나선 그냥 한동안 멍해졌다고 해야하나..? 복제인간.. 그들도 역시 생명이 있는 인격체이지만, 존엄성은 없었다. 단순한 도너로서의 인생.. 자신이 원해서 태어나지도 않았거니와. 언제 생을 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잘나지 않은 나지만, '생명'의 무게에 대해 다시금 생각 해 보게 되는 것 같다. 책 제목이 너무나 슬프다.. '나를 보내지 마.' 한동안 이 제목만 보아도 눈물이 흐를 것 같다. 진짜.. 이런일들이 현실에선 없길 바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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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인간인 캐쉬와 루시와 토미 이야기다. 클론 이란 소재를 다루고 있으니 장르가 SF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SF 소설 같지도, 소설 일수도 없다. 인간 내면의 묘사와 작가의 문체게 너무 물 흐르듯이 아름답게 , 때론 섬세하고 세련되게 기술되어 이야기 한다.
그 섬세함은 두달이 지난 지금도 어느 한장면의 모습이 내눈 앞에 펼쳐진거 같다.
헤일셤이라는 곳에서 자란 복제인가, 그들의 근원자라 불리는 누군가의 클론 그들은 인간의 장기이식을 위해 만들어진 대체자일뿐이다.. 그들은 인간은 아니지만 그 누구 보다도 인가적이다. 기증자나 대체자로서의 삶을 받아 들여야 하는 그들의 인생 .. 기증을 하다가 죽는다는건 그들의 숙명이다....
마지막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였다. 인간복제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는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가는데 대한 통찰이라고 평한바 있다. 인간의 삶의 방식에 주목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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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추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이 문제를 주제로 삼거나, 화두에 올린다. ‘기억하고 추억한다’는 것은 내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정체성의 문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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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주어진 삶이라면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소설을 읽는 내내 이 물음에 시달렸다. 나는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순응할까, 저항할까. 이 소설과 같은 상황에서라면 순응해도 저항해도 결과적으로는 별로 달라질 건 없는 생일 것도 같은데, 결과가 같다고 하더라도 이제까지 나는 저항에 더 높은 가치를 둬 왔던 모양이다. 특히 책을 읽으면서 같은 소재로 유명한 영화 아일랜드의 장면을 많이 떠올렸다. 어쩔 수 없기도 하다. 인물들의 태도가 대비되니까. 클론으로서의 인물들이 자신의 주어진 생을 묵묵히 수용하는 태도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아 읽는 마디마디가 여간 성가지시 않았다. 다 읽고 난 뒤의 이 먹먹함도 그래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 내가 가치 있다, 없다로 나누어 생각했던 삶의 태도가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깨달음이 왔으니까.
근원자. 나를 있게 한 누구? 내 부모? 혹은 그 이전의 원천?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게 되어 있는 것일까? 그런 것에 답이 있기는 할까? 작가는 어떻게 이런 상상을 했을까? 상상을 할 수 있었으니 이런 작가가 되었겠지. 감탄할 따름이다. 단순한 재미만 주는 복제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지금 여기에서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를 묻고 답을 궁구하게 하는 이야기를 들려 준다. 클론보다 나은 인간이 되는 것,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쉽지 않겠다.
작가의 문체, 앞서 읽은 책도 그러했지만 참 끈질기다. 느긋하고 친절하며 지루할 정도로 섬세한 서술이다. 나는 이 느리고 느린 흐름이 참 좋다. 마치 시간을 보이지 않는 눈금으로 쪼개 놓고 순간순간을 서술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그 시간 안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살고 있다고 해도 나로서는 다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인식을 밝혀 주고 있다. 오로지 책을 읽어야만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이다.
인물들의 성격 묘사는 또 어떠한가. 각각의 인물을 차별해서 몰입하도록 해 준다. 캐시는 캐시대로, 토미는 토미대로, 루스는 루스대로.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모두에게 관심을 갖도록 해 주는 묘사, 그래서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이 더 처절하게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정작 그 인물들은 자신의 생에 냉정하게 보이기만 했는데.
책을 다 읽고 딸에게 소감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대강의 줄거리를 말하는데, 딸이 영화 이야기를 한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이미 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도 이야기했단다. 내가 기억을 못해서 그렇지. 영화도 아주 괜찮았노라고. 그랬구나 싶다.
클론을 관리하고 키우는 학교에서 미술이나 시를 가르치는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대목이 있다. 미술이나 시가 인간의 영혼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설정을 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그게 아련하게도 깊이 있게 와 닿는다. 우리가 미술이나 시를 가까이 해야 할 마땅한 이유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