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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유무를 떠나 비단 유물론적 무신론자라고 할지라도 인간은 가끔은 내세에 대한 두루뭉실한 생각을 하게 된다. 종교인들의 경우 좀더 구체적인 자기네들의 종교적 가르침에 의한 내세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각종 종교가 선사하는 내세와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체득한 알량한 지식의 편주를 마치 쓰레기 분리수거하듯이 나름 깔끔하게 정리된 내세를 꿈꾸고 있다. 이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현세를 살아가는 또 하나의 의미로서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시 만에 하나라도 그러한 내세가 있다면 그러한 나의 내세는 어느 특정의 종교에서 말하는 심판을 받고선 나의 의지가 아닌 신이라 지칭되는 제3자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나의 의지로 펼쳐지는 아주 달콤한 내세이길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비록 그러한 내세의 유무는 제쳐두고서라도 이러한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지는 것이다.
<달콤한 내세>는 뉴욕주 북부의 어느 작은 산간마을에서 발생한 끔직한 사고를 소재로 벌어지는 산간마을 사람들의 애환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여느날과 다름없는 아침 등교시간에 벌어진 사고를 각각 다른 네명의 화자를 통해서 각 화자들의 객과적이고 주관적인 입장을 보여주면서 사고와 무관한 각 개인사를 담아내고 있다. 사고버스의 운전기사였던 돌로레스 드리스콜, 매일 아침 쌍둥이 아이들을 스쿨버스에 태우고 스쿨버스를 뒤따라서 자신의 직장인 정비소로 향하는 빌리 안센, 그리고 그날의 끔직한 사고로 인해 구사일생하는 니콜 버넬을 통해서 과연 그날 그곳에서 어떤일 벌여졌는지 그리고 사고이후 갑자기 몰아닥친 후폭풍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을 보여준다. 여기에 좀 유별나다고 할 수 있는 전형적인 뉴요커 변호사인 미첼 스티븐스를 등장시켜 마을 전체를 좀 더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작품 전체의 플롯이나 내러티브는 스쿨버스의 전복과 그로인한 어린학생들의 죽음 이후 보이지 않게 흐르는 마을의 분위기를 각 화자들에 의해서 탄탄하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막상 이 작품의 마지막장을 덮게되면 다소 어리둥절해진다. 독자들로 하여금 책 제목에서 암시하는 <달콤한 내세>에 대한 그 어떤 결말없이 서둘러 작가는 끝을 맺어버리는것 같은 인상마저 던져주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이 달콤한 내세인가 대한 그 어떤 암시를 남기지 않은 것 처럼...
이 작품은 1989년 미국 텍사스주에서 음료수 트럭과 스쿨버스의 정면충돌로 어린학생들이 20명넘게 사망한 사고를 모티브로 차용하고 있다. 이 사건이 화재에 올랐던 것은 어린 학생들의 허무한 죽음이나 사고의 규모 때문이 아니라 사고로 인한 희생자들의 과실소송으로 화재에 올랐다. 자그만치 손해보상금이 1억 5000만달러에 달하고 소송계류건수만 350건에 달하는등 그야말로 소송의 틈바구니속에서 온세월을 허비했지만 정작 세인들을 더 깜짝놀라게 한것은 사고발생의 책임자인 트럭운전사에 대한 형사소송은 단 한건도 없었다는 점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다.
<달콤한 내세>역시 사고 이후 유가족들의 소송과정을 보여준다. 소송이 서서히 진행되면서 마을 전체는 술렁이게 된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개인들의 은밀하면서도 추잡한 일들과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혹은 소송이 진행되지 않았다면 인식하지 못했을 사악한 생각들이 전면으로 대두하게 된다. 희생자의 유가족이나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에게 그전 마을이 가지고 있었던 공동체라는 느낌이 급격하게 퇴색되고 자신에 좀더 유리한 소송을 진행하기 위해 기억의 왜곡까지도 강요받게 된다. 그러한 왜곡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유일한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니콜 버넬의 진술을 통해서 이러한 소송의 벗없음을 마감해 버린다. 결국 모든 책임은 운전기사였던 돌로레스 드리스콜의 과속으로 결정나게 되면서 과실 소송은 중단되고 마을 일시에 죽은자들의 도시처럼 고요만이 남게 된다.
▣ 작가는 실제사고와 작품을 통해서 비록 사고로 인한 보상금으로 금전적인 도움이 될지라도 어느날 갑자기 작은 마을에서 사라져 버린 어린 영혼에 대한 책임의식이나 그들의 내세에 대한 그 어떤 책임도 없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단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죽은이들의 역활이 소소한 보상금으로는 대신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달콤한 내세를 꿈꾸왔던 이들에게 그 어떤 사람들도 그들의 내세를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나 싶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인간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사악한 감정이나 욕망을 보여줌과 동시에 또 다른 희망을 보여줌으로서 현세를 살아가는 이유는 또 다른 세계인 달콤한 내세가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달콤한 내세는 현세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만들어가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꿈인 것이다. 이러한 꿈은 그 어떤 물질적인 댓가로 바꿀 수 없는 것이고 그러한 꿈을 함께할 수 있는 이가 없다는 무의미한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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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나는 사건 사고들은 겨우 ‘한 줄’의 요약이거나, ‘극화’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전자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지만, 후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면서 과장된 사실들을 자극적으로 귀를 간지럽게 합니다. 달콤한 내세의 경우,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서 쓴 소설이지만, ‘요약’도 ‘극화’도 아닙니다. 오히려 소설임에도 사건을 개인적인 시선에서 내려다보고만 있습니다. 사건에 얽힌 4명의 인물은 사건 이후 바뀐 삶을 이야기하고, 주변을 관찰합니다. 이 소설에 특이한 점은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남은 자들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겁니다. 대게 사건들이 ‘죽은 자’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이 사건은 ‘남은 자’들의 변한 인생과 그 뒤의 이야기가 더 강합니다. 그렇다고, 남겨진 자들의 ‘슬픔’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도 않습니다. 미국 사회에 빈번한 ‘소송’이 개입되어서, 심지어 4명의 인물 중 한 명은 ‘변호사’로 소설 속 사건에 의해서 무언가를 잃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슬픔으로 가득 차지도 않았고, 화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멀쩡한 정신을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다른 길을 선택하고, 어떤 이는 이전에 삐뚤어진 것을 바로 잡기 위해 이후의 삶을 선택하며, 어떤 이는 타인에게 구원을 얻고자 합니다. 앞으로의 발전이 있는 이야기거나, 다른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여서 흥미를 일으키는 소설은 아닙니다. 이미 발생한 사건 때문에 변해가는 모습들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어찌 보면 이야기 자체에 매료될 요소는 그리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미 사건은 일어났고, 그 뒤에 변화된 것은 사건에 비해 크지 않아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하는 것은 ‘그런 사소하면서도 다른 이야기’입니다. 사건 사고의 뒤편을 보여주는 경우는 드뭅니다. 모두가 사고에만 집중하고는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슬픔’을 넘어 그들의 ‘남은 삶’을 이야기합니다. 비록, 이 소설이 제목은 ‘달콤한 내세’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들은 삶의 다른 측면으로 넘어갔습니다. 그것은 사건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고, 사건 이후에 자신의 철저히 본 이전의 삶에 대한 관찰과 평가 덕분이었습니다. 소설의 시작은 ‘사고’였지만, 의외로 소설은 그 이전을 담고 있습니다. 철저히 사건 이후의 일이 아니라, 사건 이전과 이후에 사건으로 인한 단절이 아닌 사건으로 인해 그 삶이 중간에 비틀려서 반대편을 보여주는 모양새입니다. ‘재밌다’, ‘재미없다’로 말하기보다는 ‘달콤한 내세’라는 제목이 어떻게 붙여지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다고 느낀다면 괜찮은 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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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북부에서 일어난 잔인한 사건을 소재로 벌어지는 슬픔과 고통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실질적으로 1989년 일어난 트럭과 학교버스의 교통사고로 학생들이 사망한 일을 모티브로 따왔다.
러셀 뱅크스는 책을 통해서 사고로 인한 보상금이 당장 남겨진 유가족들에게 금전적으로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어느날 갑자기 부모의 품에서, 가정에서 사라져 버린 수많은 학생들에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을 물을수 없다는것, 또 그들의 내세에 전혀 무감각으로 대응하는 슬픈 현실을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만약 어떤이에게 끔찍한 사고가 벌어진다면, 과연 그를 사랑하는 살아남은 사람들과 사고를 당한 그 중에 누가 더 삶에 애착을 가지게 되는것인지 어찌보면 누구나 다 살고 있는것이 사람의 인생, 고로 삶인즉, 사람들은 이유에 더욱 집착하게 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사고가 벌어지기전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모습과 사고가 벌어진 후 그들이 대처하는 모습은 전혀 다르고 또한 그에 초점이 맞춰진 책의 내용은 참 안타까우면서도 슬프기 짝이 없다. 그들의 평화로운 모습과 좋았던 모습은 모두 뒤로한채 우연히 벌어진 사고때문에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이는것은 인간의 본성일까, 아니면 극단에 다다른 인간의 분노의 표현일까.
그 마지막 표현이 소송이라는 점이 너무 안타까웠다.
나도, 지금 현재 대한민국 어디에 살고있는 사람 한명 한명, 과연 치열하게 삶을 살고 있는것일까 라는 의문과, 너무 현실에만 집착하여 꿈을 잃어버리고 이상을 잃어버린것은 아닌가에 대한 조금은 씁쓸한 의문이 동시에 들며 적어도 이런 생각을 하는것이 아직 내게 기대를 버리기엔 이르단 생각도 들어 헛웃음이 났다.
많이 어려운 책이었다.
어찌보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것이 인간의 마음, 인간의 내면이라 하지 않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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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 아직 여기 있지 않은, 그래서 앞으로 도래할, 또는 가게될 세계. 이 소설의 원제 The Sweet Hereafter에 쓰여진 hereafter라는 단어를 뜯어 보자면 '여기' 이후에 있을, 일종의 '피안'을 뜻한다. 현실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어 고통과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두려움을 부과하는 것이기에, 내세에 대한 환상은 언제나 평온함과 영면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뉴욕 주 북부의 한 시골마을 셈덴트가 가진 이미지가 그런 것이다. 그리 많치 않은 인구가 여기저기 드문드문 흩어져 살아가는, 도시의 각박함이나 바쁜 일상과는 다른, 그 곳에 가면 조용하고 평온한 삶을 맛볼 수 있을 듯한. 이런 목가적 풍경을 지닌 마을에 눈 내리던 어느 날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다. 사고에 대한 사실적 개요는 매우 간단하다. 잔혹할 정도로. 마을의 스쿨 버스 운전사가 윌모트 평원이라는 곳의 직선도로에서 사고를 냈고, 여러 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나, 정작 운전 기사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소설은 이 잔혹한 사건에 대한 세 사람의 기억, 그리고 한 사람의 개입을 통해 진행된다. 문제는 사고를 낸 당사자인 버스 기사 돌로레스 드리스콜, 그리고 그 사고차를 따라서 운전하고 있던 학부모 빌리 안셀, 사고로 반신불수가 된 '아름다운 소녀' 니콜 버넬의 기억(아니 그들의 삶)은 그리 단순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기억-상념. 언제나 기억은 좋은 기억 보다는 나쁜 기억이 우선되는 법이다. 게다가 기억은 마치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날개를 펼치는 착각의 편린들로 점철된다. 마치 눈내리는 날 도로를 차창으로 도로를 내다보는 듯 어떤 희뿌연 전망. 마을의 스쿨 버스 회사에서 일하며, 아이들의 통학을 돕는 돌로레스 드리스콜이 여느 아침과 다름 없이 셈덴트의 각지를 돌면서 자신의 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있던 그 날 아침도 뿌옇게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상념으로 인해 복잡하고 어딘가 불투명한 의식 속에서, 매일매일 마치 버릇과도 같이 해 오던 자신의 일을 반복하고 있다. 운전을 하면서도 그녀의 의식은 마을의 몰락해 가는 모습들에 대한 상념과 회한, 관계가 소원해져가는 아들에 대한 당황스러운 기억, 아이들 하나하나의 모습과 그들의 부모들에 대한 짧은 생각들, 운전 중에 만나게 되는 난폭한 운전자들(도시에서 온 고급 승용차 운전자, 그리고 과속을 일삼는 덤프트럭 등)에 대한 불평, 스케쥴을 맞추기 위해 천천히 그러나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상황, 그리고 길 위를 지나는 갈색 개. 그녀의 기억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개에 대한 것이다. 아이들의 통학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전체 구간에서 유일하게 속도를 낼 수 있는(속도규정의 범위 내에서) 윌모트 평원의 직선 길에서 그녀는 길을 건너는 개를 만나고, 이 개를 피하려고 하는 순간 차가 전복된 것이다.1 빌리 안셀은 상처한 이후, 적어도 아니들이 사고로 죽기 전까지, 쌍둥이 아이들을 키우던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훌륭한 사람이다. 베트남 참전 전우들을 위해 일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하고,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고 있는 학부모이며, 무엇보다 사고가 터졌을 때 먼저 달려가 아이들을 구한 사람이다 - 물론 이것은 그가 사고 버스를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아내, 그것도 친구의 아내와의 외도, 습관성 음주(다른 이름으로 알콜 중독),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 참전의 트라우마. 어쨌든 그는 사고를 가장 정확히 목격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 사고의 순간에 자신의 의식 속에서 외도 상대인 리사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이 사고에 대한 사법적 개입의 과정에서 증언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사건에 대한 법적인 개입이 시작된다. 미첼 스티븐스 역시 도시로부터 온 변호사들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듯 그는 다른 변호사들과는 다르다. 그를 추동하는 것은 소송에서 이겨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들이 아니라 분노인 것이다. 그에게는 조이(Zoe)라는 딸이 있다. 그의 딸 조이는 마약 중독자인데, 여느 중독자들과 비슷하게 갖은 거짓말로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아내 바로 마약을 구입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의 이름 Zoe는 그리스어의 생명을 뜻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그는 바로 Zoe, 즉 그의 딸이자 삶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이런 그에게 있어 삶을 살아갈 유일한 이유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일, 즉 자신의 직업에 따라 tort suit(손해 배상 소송)를 진행하는 것이다. 배상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다. 그의 모토 그대로 '사고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외부적 개입에는 한계가 있다. 우선, 이 사건의 잔인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어떤 실체적 차원을 넘어서는 잔여가 존재한다. 법은, 특히 현실에 있어 사건에 대한 결과를 조정하는 실증법은, 그 과정에 있어서나 또는 결과에 있어 매우 실체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과정은 증거와 증언에 기초하며, 그 결과는 경제적 배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를 추동하는 분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모종의 복수 그리고 그 복수에 따르는 보상심리, 즉 '징벌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일 것인데, 과연 이것을 정의로 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외부성과 구도 내에 있는 모든 사건 당사자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측면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입에도 일정한 한계가 수반될 수 밖에 없다.2 어쨌든 스티븐스의 외부적 개입이 성립하기 위한 결정적인 증인 니콜 버넬의 기억과 거짓말을 통해 소설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돌로레스가 과속을 했다는 그녀의 법정에서의 거짓 진술은 스티븐스의 소송 진행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녀가 이런 거짓말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니콜은 말하자면 마을에서 꽤 인기있는 여자 아이다. 학교에서 공부도 곧 잘 하고 예쁜 아이인데다, 성격도 밝은 편이어서 안셀의 쌍둥이 등 여러 아이들의 베이비시터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비밀이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니콜이 커가면서 그녀에게서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근친상간의 비밀. 그녀의 거짓말은 바로 이런 상황과 관련된다. 그 거짓말은, [행위와 그 변천The Act and Its Vicissitudes]이라는 글에서 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이 제시하는 해석을 따를 때, 무엇보다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나가려는 그녀의 몸짓이었다. 지젝은, 언제나와 같은 그의 장황하고 정신 사나운 말하기 방식을 따라, 이 글에서 니콜의 선택에 대해 이런 것이야말로 영속적인 유한성의 지속 혹은 악무한에 단절을 가하는 이중적 몸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이 몸짓에서 지젝이 말하는 것과 같은 주체의 몸짓을 찾을 수 있을까? 지젝의 설명을 따르자면, 소송은 분명 그녀의 가족 - 가족의 머리는 언제나 가장이며,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는 예외있는 전체라는 향유의 구조 내에서 모든 것을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예외가 된다 - 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게 되는데,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정의를 실현 할 수 없는 법률의 집행으로부터 (그리고 따라서 지역의 사회적 구조로부터), 니콜은 스스로를 분리해낸다. 그 결과, 이 두 유한성의 연결에서 스스로를 단절한, 지젝의 해석에 따르자면, 니콜만이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행위적 주체의 형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주체는 과연 어떤 주체일까? 그녀는 어쩌면 정말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벗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역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녀가 소송을 막기 위해(혹은 그저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전복적 몸짓으로) 선택한 거짓말은 그녀를 일종의 영웅으로 만들어 낸다. 소송과 그에 이은 미디어라는 이름의 게걸스러운 대머리 독수리들로부터 지역 사회를 보호한 영웅.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타나는 자동차 경기장의 장면에서 그녀가 받았던 박수와 환호의 의미는 이런 것이었다. 게다가 보기에 따라서 그녀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위치의 역전을 보이는 듯 하기도 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 근친상간이라는 금기의 문제에서 금기를 범한 아버지는 (자신과 니콜 사이에만 머물러야 할 추악한 비밀로 인해) 오히려 향유 관계의 (폐기가 아닌) 역전을 통해 니콜에게 구속되는 듯 한 뉘앙스가 보인다. 이것은 라깡의 주체의 네 담론 중 주인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의 이전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3 말하자면 주인과 노예만이 바뀔 뿐, 여전히 지배의 구조는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니콜은 진정한 변화와 구원의 주체라기 보다는 그저 모호한 또는 몽매주의적 주체(obscurantist subject)일 뿐이다.4 돌로레스는 이 모든 과정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한 안도감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녀는 오히려 극도의 불안의 상황에 처한다.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던 동네 사람들은 그녀와 그녀가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결정해 주는 듯이 여기는 일종의 대타자로서의 남편 애벗5이 거기에 없는 사람인 듯 취급한다. 마치 그녀의 삶을 상징하는 듯한 '덜컹이'는 어렵게 어렵게 서로를 부수는 자동차 경기장 안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승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차 '덜컹이'가 여러 차들에게 망가지는 꼴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철저한 고독을, 처절한 유한성을, 누구도 그녀와 함께 할 수도 없고, 심지어 함께 그 자리에 있던 애벗 마저도 그녀를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그녀는 일종의 안도감을 표현한다. 모호한 혹은 몽매주의적 행동의 주체 니콜의 거짓말로 인해 자신이 철저히 파괴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한 편의 구원 서사를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구원이란 어떻게 오는 것인가? 아들의 철저한 고독, 자신의 단독자로서의 상황에 대한 처절한 깨달음과 단말마적 비명, 그리고 그 단독자의 죽음과 이후의 부활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이러한 구원 서사를 신약 성서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 친구들에게서 마저도 비난을 받으며 신을 호출하는(또는 신의 구원을 부르짖는) 구약 성서의 욥에게서 보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 내에서 이러한 구도 속에 놓이는 단독자의 이름이 바로 돌로레스(Dolores)[슬픔]6라는 것이다. 그러한 철저한 홀로 있음의 경험과 자기 파괴(그녀가 몰던 GMC 자동차 '덜컹이'의 파괴로 재현되는)의 순간에 그녀는 일종의 자기 구원, 안도감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은 어떤 것일까? 이제 모든 고통이 지나갔으니, 그 고통의 깊이에서 그것이 지나간 이후에 찾아오는 일상적 평온함을 통해 일종의 상승으로 작용하는 그런 형식의 안도감. 이런 의미의 안도감의 이름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카타르시스 혹은 승화. 그는 [시학]에 제시된 비극론에서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의 가치에 대해 말한다. 어쨌든 이런 수동적 형태의 구원도 우리는 구원이라 할 수 있을 터이고, 나름의 안도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의미에서의 구원이 아닌 다른 형식의 구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녀가 얻게 되는 깨달음은 그녀에게 더 이상 의지할 상징 체계 혹은 대타자의 지배 구조의 폐기를, 남편 애벗도 결국은 자신과 동등한 지위로 끌어내리는 작용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평등한 주체, 지배의 구조로부터 벗어나는 주체의 가능성을 찾게 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 보고, 이후의 삶에서 진정한 주체로서 거듭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적 장소로서 제시될 뿐이다. 이러한 삶의 카타르시스적 극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시 평온한 자신의 기억-상념 속으로,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자신으로 돌아가게 되는 길일 뿐이다. 이러한 길은 진정한 구원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름 돌로레스(Dolores)가 함의하는 비탄 혹은 그에서 기인하는 카타르시스의 영속적인 순환의 영역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그러한 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 '달콤한 내세'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그러한 영원회귀적 기억-상념의 달콤함은 단순한 허구적 현실의 영역에만 귀속되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거의 좋았던 기억이, 과거의 기억의 정치가 팽배하고, 사회적 안정과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일상의 평온함 속에 정의에 대한 요구를 묻어버리는 현실에서 말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결코 진정한 행위의 주체를 찾을 수 없다. 오직 관습과 윤리에 순응하며, 자신의 생존과 안위만을 추구하는 동물적 자동성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오늘날 어디에서 이런 영원회귀 혹은 악무한을 절단하는 주체를, 진정한 구원을 찾아낼 수 있을까? 주 1. 문제는 이 개의 존재 마저도 어떤 막연한 상상 혹은 기억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고가 나던 지점에 정말로 그 개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한다. 2. 데리다(Derrida)는 법/정의의 관계에서 오는 역설을 말한다. 데리다의 논리를 따를 때, 정의는 법의 집행을 담보하는 어떤 것이다. 그에 반해 법은 어떤 해체가능한(deconstructible) 문자의 체계이지만, 반면 정의는 법과는 달리 해체불가능한 잔여물(indeconstructible remains)이지만, 법을 통하지 않고는 구현될 수 없는 역설이 성립된다. 스티븐스의 분노와 징벌적 정의의 유혹은 법정에서 구현되는 경제적 거래관계를 담보하겠지만, 진정한 정의는 이를 초과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가진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사건에 책임을 질 법적 주체의 문제에 있어서도 너무나 모호하기만 하다. 법적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증거 보다는 증인의 증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특성도 또한 그 한계를 더욱 좁히고 있다. 3. 라깡의 네 주체에 관한 담론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주인 담론. 이것은 지배의 구조가 분명한 일반적 향유를 말한다. 말하자면 주인 A가 노예 B를 지배한다. 두 번째로 히스테리 담론. 이것은 주인 A와 노예B의 향유 관계의 역전을 말한다. 세번째로 대학 담론. 이것은 대학에서와 같이 주인도 노예도 없는 상황을 가정한다. 주인 기표의 자리는 비어있으나 여전히 지식이 대타자의 구조로서 작동한다. 네번째로 분석가 담론. 분석자와 피분석자는 처음에는 일종의 지배구조에 편입된다. 피분석자는 분석자에게 마치 고해를 하듯 자신의 모든 것을 고찰의 대상으로 제시해야 하며, 이런 절차에서 언제나 그렇듯 분석자에게서 일종의 대타자를 찾는다. 그러나 이 담론의 끝은 분석자가 바로 그 대타자의 지위에서 내려와 분석자와 동일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피분석자가 의지할 대상은 없으며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 의지할 대상임을 깨닫는데서 종결된다. 니콜이 이러한 주체적 담론의 구도에 들어간다면 주인 담론의 노예로부터 히스테리 담론의 노예(또는 주인)으로의 전이라는 측면에서만 해석이 가능하다. 4. 무엇보다 니콜이 사건에 대한 외부적 개입을 차단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듯이 보인다. 앞의 주석에서 이야기 한 그대로 스티븐스의 분노에 찬 징벌적 정의 그리고 법을 통한 법적 정의는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지며, 결코 정의 그 자체를 끌어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티븐스의 개입의 노력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지역 사회 내의 통학 버스 운행 방식이나, 버스 통행로 개선 등과 같은 제도적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해 테드 제닝스(Ted Jennings)는 그의 책 데리다를 읽다/바울을 생각하다[Reading Derrida/Thinking Paul] 2장에서 데리다의 사유가 단순히 법/정의의 대립항에서만 머무르지 않으며, 정의/법/법률(또는 법체계, laws)의 삼항적 사유를 제시했음을 말한다. 이런 도식에서 법 자체는 정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법률 혹은 실체적 법을 초과하는, 법 위의 법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스티븐스가 행한 개입의 노력은 정의 그 자체를 포착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에 미치려는 법 바깥의 법, 또는 법 위의 법, 또는 법에 맞서는 법의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니콜이 자신의 복잡한 상황(아버지의 근친상간의 기억-상념, 자신이 반신불수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절망, 죽은 아이들에 대한 기억 등 그녀의 상황의 모든 원소를 포함하는)으로 인해 선택했던 거짓말은 바로 이런 가능성을 닫아 버린다. 5. 이 소설에서 우리는 두 명의 등장 인물에게서 (라깡적 의미에서의) 어떤 지배 구조 혹은 대타자적 향유의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 니콜-아버지 그리고 돌로레스-애벗(그녀의 불구자 남편). 니콜-아버지의 지배 관계는 쉽게 눈에 띄는 형식이다. 아버지는 전체 중 하나의 예외로서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 향유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그대로, 이 사건을 계기로 뒤집어진 주인-노예의 구조에 들어가게 된다. 돌로레스-애벗의 관계는 어찌 보면 전체적인 줄거리에서 약간은 부차적일 수도 있으며 잘 눈에 띄지 않는 형식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비록 그녀의 남편 애벗이 불구의 몸이긴 하지만, 돌로레스의 삶에 있어 애벗은 가장 현명하고, 그녀의 삶에 의미를 주고, 그를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결정도 할 수 없으리만치 그녀에게 있어 남편은 중요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녀가 처한 철저한 단독자적 상황에 처했을 때, 그녀의 남편을 포함한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모종의 지배 구조에서 벗어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소설의 결론부의 해석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6. 슬픔 또는 비통함을 의미하는 이름. 예수의 수난을 기리는 보다 직접적인 종교적 의미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근원적인 어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탄을 금지 못하는 성모의 슬픔과 연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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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상처를 지니고 산다. 다만 그 경중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풀어 가는 방식 또한 다르다. 어떤 이는 쉽게 극복하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생각하지만, 어떤 이는 상처에 갇혀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 주변의 영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타자의 시선을 외면하고 살 수 없는 존재이다.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보다 더 주체적인 인간이 될 수 있지만, 이를 모두 떨치고 온전히 자유로워지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번에 읽은 러셀 뱅크스의 <달콤한 내세>(민음사, 2009년)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상처, 그 내면의 세계를 보여준다. 진실과 거짓의 관계 속에서 표류하는 ‘진실’의 세계를 고민하게끔 만든다.
<달콤한 내세>는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1989년 텍사스 주 울턴에서 스쿨버스가 음료수 트럭과 충돌한 후 자갈 채취장으로 추락하여 스물한 명이 죽고 여섯 명이 부상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고, 이후 엄청난 과실소송이 제기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잃은 슬픔을 잊기도 전에 그들은 혼란에 빠졌다. 일확천금에 대한 기대로 마을은 탐욕에 빠졌고, 그 대가로 변호사들 또한 상당한 돈을 챙길 수 있었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은 쓰였다. 스쿨버스 추락 사고로 아이들이 절반쯤 사라진 뉴욕 주 북부 샘텐트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사건과 관련된 네 명의 화자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스쿨버스 기사로 사고를 낸 돌로레스 드리스콜, 죽은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당시 스쿨버스를 따라갔던 빌리 안셀, 사고의 원인을 규명하고 과실 소송을 제기하기 위해 뉴욕 시에서 온 변호사 미첼 스티븐스, 사고 생존자이자 목격자로 사고 후 하반신이 마비된 니콜 버넬이 그들이다. 네 명의 화자는 사고 전의 평화로운 겨울 아침으로부터 시작하여 각자의 관점에서 사고를 조명하고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화자가 바뀜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자연스러우며 한 가지 사건을 놓고 자신의 관점을 부각시키기에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네 명의 화자는 모두 상처를 지닌 이들이다. 돌로레스 드리스콜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돌보며 스쿨버스 운전기사로 힘겹게 살아왔다. 베트남 파병 용사로 제대 후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던 빌리 안셀은 아내를 잃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친구의 아내인 리사와 불률관계를 맺고 있었다. 미첼 스티븐스는 아주 성공한 변호사로 보이지만, 아내와 딸과 살다 이혼했다. 니콜 버넬은 아버지의 성추행을 견뎌내야 했다.
사고는 이들을 또 다른 세계로 이끈다. 이들의 상처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마을 아이들의 절반이 죽어 더 조용한 마을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과실소송으로 인해 탐욕스럽고 변질되어 갔다. 그들은 사고로 인해 외로웠지만, 그 외로움과 슬픔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 그 부적절한 상황을 정리한 이는 다름 아닌 니콜 버넬이다. 거짓 증언을 통해 미첼 스티븐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함으로써 돌로레스 드리스콜의 과실이 인정되었다. 이는 모든 과실소송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소송을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거짓과 진실의 혼동 속에서 삶의 진실은 표류한다. 과연 삶의 진실은 거짓과 진실의 세계 그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제 내가 말한 그런 순간들을 경험하고 나서도 또 살 수 있을까? 사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예기치 않은 순간을 기다리면서 그저 살아남아 있는 것뿐이다. ‥‥‥ 아, 내 행운의 섬들아! ‥‥‥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장 그르니에 <섬>, 106쪽)
‘그저 살아남아 있는 것뿐이다’라고 말하는 장 그르니에의 지적처럼 마을 사람들은 진실과 거짓의 혼동 속에서 표류한다. 우리가 진실이라 여기는 것들을 진실이라 부를 수 있을까. 상처와 외로움을 간직한 채 사람들 사이의 섬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모두는 이제 완전히 다른 마을 사람들이 된 것 같았다. 우리는 달콤한 내세에서 외딴 마을을 구성하고 사는 것 같았다. … (중략) … 우리는 모두 제각기 혼자였다. 우리가 아무리 외로움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 외로움은 그것이 지닌 단순한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 설사 죽지 않았다고 해도, 아주 중요한 측면에서, 더는 당황스럽지도 두렵지도 않으며 따라서 저항할 수도 없는 아주 중요한 측면에서 우리는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299쪽)
by 꽃다지, 201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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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힘들다고 가끔 느낄때면, 죽는 다는 과정에 대한 공포는 있지만, 그 너머에는 무한한 자유로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보고는 한다.
미국 북부 샘덴트 라는 마을에서 스쿨버스가 전복되면서 아이들 열여섯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 한다. 이 사건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 - 스쿨버스 운전자, 운전자를 따라가던 한 학부형, 소송을 유도하는 변호사, 사고에서 살아남은 소녀의 관점을 통해서, 본인의 처지에서 사건을 대하는 별개의 감정들을 보여준다. 실제로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는데, 십수명의 아이들이 죽은 사건을 두고 - 결국은 수많은 소송을 일으키게 된다는 점에서 사고의 수습이란 결국은 돈인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장애가 있는 남편을 둔, 모범적으로 보이지만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잘나가는 변호사이지만 겉잡을수 없는 딸을 둔, 아름답지만 아버지로 부터 성적인 요구를 받는 등장인물들.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무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안고 있는 등장인물들은 이사건을 통해 일말의 해결책을 찾게 되는 부분도 있다.
아이들의 웃음이 없어지고 , 소송만이 남은 현실. 그렇지만 니콜의 진술을 통해 마을이 소송을 취소하고 평온을 되찾은 점은 작가의 희망사항의 반영인듯 하다.
한 사건, 여러사람의 시선이라는 책의 구성 덕분에 속도감있게 읽을 수 있었고, 순간의 실수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 점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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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미국의 시골마을. 이곳에는 어린아이들을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는 스쿨버스가 운행중이다. 처음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큰 승합차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다 다른 아이들을 같이 태우며 시작한 일이 점점 커져 시에서도 승인을 해주고, 큰 버스를 마련해준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을 데려다주며 그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학교다니던 모습까지 다 지켜볼 수 있었던 버스 운전사 돌로레스. 그렇게 어느 하루도 평온하게 다른날들과 다를것없이 시작한 아침에 그녀 앞에 뭔가 나타나고 그녀는 급히 운전대를 돌리지만 그녀와 아이들을 실은 버스는 차가운 겨울날 물웅덩이에 박힌다. 사건 당사자들의 네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책은 각 개인의 감정이 너무나 처절하게 그려저 그들 개인적인 일만으로도 벅찼는데 따라가기가 조금 힘들었다. 알면 미워할 수 없다는 말이 정말 맞는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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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내세] 달콤한 내세를 꿈꾸며..
달콤한 내세..
조용하고 한적했던 한 마을에..
느닷없이 들이닥치게 된 교통사고로 인해..
사랑했던 아이들과 가족들을 잃어버린 슬픔으로 말미암아..
고요한 평화는 순식간에 깨져버리고..
사람들간의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데..
불신만 남은 가운데..
상처입은 피해자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잘 나타내 준 것 같다.
소송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해관계..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고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서로의 마음을 핡퀴고나면 결국에 돌아오는 것은 또다른 상처일뿐임을..
달콤한 내세..
어쩌면 그들은 달콤한 내세를 꿈꿔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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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어느 "비극적 교통사고" 후에, 사고자체가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슬픔보다 사고 후에 유가족들이나 특정 커뮤니티에 얼마나, 어떻게 영향을 끼칠수 있는가? 정도... 사고후에 남겨진 이들이 서로 겪게 되는 내면의 갈등을 잔잔하면서도 때로는 숨막히게(직접적인 심리적 표현보다는 차분하지만 너무 담담한 서사구조가 오히려 숨막히게 만드네요) 그려낸다.
'달콤한 내세'는 삶의 무거움이 얼마나 인간을 힘들게 만드는지를 다루는 게 아니라 갑자기 생겨난 삶의 무거움이 인간에게 얼마나 낯선 것인지에 대해 말한다. 아이들이라고는 해 봤자 22명 밖에 없는 어느 북쪽 눈 덮인 마을에 일어난 비극은 마을 사람들에게 갑자기 많은 슬픔과 낯선 세상을 열어놓는다. 얼마 되지 않는 아이들은 사고로 다 사라져버리고 어른들만이 세상에 남겨진다. 미래를 향해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사라져 버린 미래(그들의 자식들)에 대해 슬퍼하지만, 그 슬픔의 크기를 가늠할 수가 없다. 힘들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친구의 자식들이 죽어간 슬픔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적당한 것일까? 미래가 없는 현재는 처음엔 너무나 고통스럽고 참기 어려운 현실이지만 차차 시간의 망각속에서 미래 또한 내일이면 다가오는 현재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그 순간 모든것이 달콤한 내세(sweet hereafter)가 되어 버리지는 않는가? 처음 접했을때 달콤한 내세가 무슨 뜻일지 무척 궁금했는데...책을 덮으면서 웬지 모를 씁쓸함과 마음속 깊은곳에 느껴지는 무거움을 떨칠 수 없었다. 인간과 인간...그리고, 나에 대해서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좋은 책으로 간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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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외로울 때 누가 나에게 손을 내민 것처럼 나또한 손을 내밀어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다 그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의 가슴이 데워진다는 것을 새삼 느껴보고 싶다
-이정하
한 발짝, 짐이 되지 않으려 물러서고 또 한발작 , 아픔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물러서고 또 한발짝, 내 안에 가둬두지 않기 위해 물러서다 -Mors sol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