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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 신분제의 한계에 좌절한 천재 시인
"[18-57] 신분제의 한계에 좌절한 천재 시인" 내용보기
송목관(松穆館) 이언진(李彦瑱 1740~1766)은 역관(譯官) 출신 문인이다. 1763년 통신사의 일원으로 왜에 가서 다른 사대부 문인들을 제치고,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 ‘역관 4가(家)1)’ 중 하나로 꼽을 만큼 글재주에 있어서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인정을 받았다.  이처럼 그는 재주는 인정받았지만, ‘중인’이라는
"[18-57] 신분제의 한계에 좌절한 천재 시인" 내용보기

송목관(松穆館) 이언진(李彦瑱 1740~1766)은 역관(譯官) 출신 문인이다. 1763년 통신사의 일원으로 왜에 가서 다른 사대부 문인들을 제치고,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역관 4()1)중 하나로 꼽을 만큼 글재주에 있어서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인정을 받았다.

 

이처럼 그는 재주는 인정받았지만, ‘중인이라는 신분제의 질곡(桎梏)을 벗어날 수 없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 답답한 심정을 그는 아래의 시를 통해 토로했다.

협객 규염객(虯髥客)2)[跡太俠虯髥客]

오만한 양비공(羊鼻公)3)[容太慢羊鼻翁]

() 태종 같은 밝은 임금 만났으니[遇名主如髭聖]

기이한 이름과 공을 남겼지[成奇名立奇功]” [p. 155]

 

아무도 이런 점 때문에 그는 조선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보다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노선을 추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선택한 노선이 태주학파(泰州學派) 혹은 양명좌파(陽明左派)라는 점에서 알 수 있. 하심은(何心隱, 1517~1579)를 혹은 부산(夫山) 양여원(梁汝元)과 탁오(卓吾) 이지(李贄, 1527~1602)로 대표되는 이들의 사상은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길이기도 했다.

 

호동에 가득한 사람들 그 모두 성현(聖賢)[滿衚衕皆聖賢]

배고파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도[但驅使饑寒苦]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을 지니고 있음을[有良知與良能]

맹자가 말했고 나 또한 말하네[孟氏取吾亦取]” [p. 29]

 

위의 시는 주체로서 양지(良知)가 우리에게 본래부터 내재해 있는 것이라 보는 양명학(陽明學)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원래 제목이 호동거실(衚衕居室)>이 시집을 사대부 중심의 5(五言)이나 7(七言)의 한시(漢詩)가 아닌 비주류인 6(六言)의 한시로 구성함으로써 저자가 전통의 부정 혹은 반()체제의 입장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골목길 나의 집의 번역자인 박희병 교수는나는 골목길 부처다에서 18세기까지의 조선 사상사에서 이탁오를 긍정적으로 읽은 사람은 딱 세 사람밖에 없다. 허균(許筠, 1569~1618), 이용휴(李用休, 1708~1782), 이언진이 그다.” [p. 200]라고 썼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공개적으로 이지(=이탁오)에 대한 찬양을 한 이는 이언진이 유일하다고 한다.

()가 노래도 같고 게() 같기도 한 건[詩如歌又如偈]

옛사람 중 소요부(邵堯夫)4) 한 사람이고[古一人邵堯夫]

()이 노자(老子)도 아니요 장자(莊子)도 아닌 건[文非老亦非莊]

지금 사람 중 이탁오(李卓吾) 한 사람이지[今一人李卓吾]” [p. 105]

 

비록 그가 양명좌파의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을 수용했다고는 하나 막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양명좌파가 이단(異端)으로 몰릴 만큼 독특한 주장을 했지만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 오래 존속하지 못하고 소멸했던 것처럼.

 

결국 그는 죽기 직전,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항거의 뜻으로 자신의 원고를 모두 불태우려고 했다. 다행히 그의 아내가 그 원고의 일부를 구한 덕분에호동거실(衚衕居室)>이라는 시집 하나가 온전히 남아 전해지게 되었다.

 

그가 스물 일곱에 요절(夭折)하고 그의 글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서 사실 그의 생각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무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남아있는 것들로 어렴풋이나마 그가 꿈꾸었던 세상을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중국공산당 초기 지도자들처럼 농경사회에서 활동하면서도 농촌과 농민에 대해 잘 몰랐던 도시 지식인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또한 그의 사상적 원천이었던 양명좌파처럼 사회 전체를 변혁시킬 만한 현실성이나 구체적인 방법도 잘 보이지 않는다.

아래의 시처럼 그저 옛 협객의 자취만 보일 뿐.

이따거의 쌍도끼를[李大哥5)兩板斧]

빌려 와 확 부숴 버렸으면[假弄來大破綻]

손에 칼을 잡고[手裡別執朴刀]

강호의 쾌남들과 결교했으면[結識江湖好漢]” [p. 114]

 


 

1) 하원(夏園) 정수동(鄭壽銅, 1808~1858),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89), 유하(柳下) 홍세태(洪世泰, 1653~1725), 송목관 이언진

2) 당나라때 전기(傳奇)소설이자 무협소설의 원조로 꼽히는규염객전의 주인공

3) 당 태종때 직간(直諫)으로 유명한 위징(魏徵, 580~643)

4) 북송오자(北宋五子)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소옹(邵雍, 1011~1077). 요부(堯夫)는 그의 자().

5)수호지(水滸誌)>에서 쌍도끼를 휘두르는 흑선풍(黑旋風) 이규(李逵)를 의미한다.

w******f 2018.10.27. 신고 공감 10 댓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