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대 작가를 폄하하고 싶진 않다. 내가 좌절한 건, 김사과 작가가 그린 20대 초반 방황하고, 좌절하는 삶을 공감하기 어렵다는 것보다 그것을 이해는 하면서도 선뜻 동의하기 힘들만큼 내가 늙었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분신인듯 보이는 작중 주인공은 기존 사회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작가다. 하릴 없이 거릴 쏘다니다 '풀'을 만났다. 그 역시 등이 굽은 채 거리를 헤매는 화가 지망생이다.
두 부적응자(사회 주류 관점에서)가 어느날 갑자기 동거를 시작했다. 영혼의 반쪽을 만나 하루하루 궁핍함 속에서도 나름의 행복과 질서를 만들어가는 그들. 그냥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위안이 되는 그런 존재. 하지만 궁핍과 가난은 그들을 놓아주지 않는다. 책 전반에 걸쳐 그들이 벌이는 기이한 행동들이 측은하면서도 끝이 보이는 위태위태한 객기처럼 느껴졌다.
결국 '풀'의 자살로 끝나는 이 소설. '풀'은 다양한 의미를 함의한다. 시인 김수영은 민초를 이야기했고, 방황하는 20대는 쾌락의 도구로서 마리화나를 떠올린다. 화초를 키우지만 이내 죽이고 마는 '풀'에게 단지 초록색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풀'이란 이름을 붙인 나. 어쩌면 70년대 민초의 상징인 '풀'이 김사과에 이르러 좌절하는 20대의 '풀'로 거듭난 건 아닐까?
우리는 끝내 안정된 삶을 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원한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헤어진다면 그건 풀이 취직을 한다는 뜻이었다. 그가 취직을 한다면 그건 그가 우리의 생활을 책임지겠다는 뜻이고, 그건 풀이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책임을 뜻하지 않는다. 그건 가장 살아 있다는 걸 뜻했다.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망각한다는 뜻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금 이 순간만을 바라보겠다는 약속이다. 그게 바로 사랑이다. 한편 책임이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쇠사슬에 현재를 묶어놓겠다는 뜻이고, 그래서 그건 사랑의 반대였다. 사랑은 쇠사슬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하는 시간 자체이지. 그것에 대한 대비나 계획이 아니다. 그러니까 돈 따위가 우리의 사랑을 파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 아름답게. -P158
작가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사랑의 정의.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 말하는 사랑의 의미. 그것은 20대 그 짧은 시간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만, 이내 그 한계를 깨닫게 된다. 유한하지 않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이 소설에서도 그 찰나를 간직하기 위해 극단적인 자살(풀의 자살은 딱히 뭐라 표현하기 힘들지만)을 선택하고 만다.
한재호 작가의 <부코스키가 간다>, 황현진 작가의 <죽을만큼 아프진 않아>, 장강명 작가의 <표백> 등 일련의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주인공들의 성장소설에는 일정한 궤가 있다. 시대와 사회와 타협하지 않는 젊음이 결국엔 좌초되고마는 극단적인 결말을 택하고 있다. 그들에게 촛불을 들게 하지만, 결국 죽음 혹은 체념으로 내몰고 마는 결말이 참 피곤하다.
그러면서도 자꾸 20대 성장소설을 읽게 되는 이유는 뭘까? 내가 살았던, 내 20대 삶을 집약할 수 있는 대학동기 녀석의 옥탑방이 자꾸 밟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어떤 희망도 잉태할 수 없는, 하릴없이 술로 그 시대를 건너야만 했던 무력감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찬란한 청춘의 삶을 희구하기에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과 같은 불확정, 불확실, 불연속의 삶 속에서 20대의 희망을 찾기란, 그런 20대를 그리는 소설을 만나기란 요원할 것 같다.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시간은 흐르고 기억은 모두 희미해진다. 하지만 그건 틀렸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반복될 뿐이다. 희미해지는 것은 이름뿐이다. 나는 여전히 풀을 사랑한다. 나는 그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잠시 길을 잃은 것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안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걸. 날씨가 좋고 쥐처럼 검은 어둠이 있는, 매일 같이 춤을 출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P294
김사과 작가의 <풀이 눕는다>에서도 결국 극단적인 '풀'의 자살과 그에게 닿고자 하는 주인공의 일성으로 마무리된다. 끝내 유폐되고, 좌절하고 마는 20대의 삶. 그 결말이 씁쓸하다. 하지만 작중 화자가 말한 '시간은 반복될 뿐이다'는 결국 흐르는 시간 속 한 찰나일 뿐이다.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 시간을 건너왔고, 그것에 의해 변해왔다. 어쩌면 '잠시 길을 잃은 것뿐'이라고 말한 것이 진실에 가깝다. 이제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내가 이렇게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더없이 서글프다.
나의 20대는 너무나 멀리 있고, 희미해졌으며, 심지어 영안실에 누운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었으므로. |
|
문득, 나는 왜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떠올린다. 책 속에 고개를 본격적으로 처박아대기 시작한 것에는 분명 사연이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 내가 표현하듯이 비록 희망이나 행복 같은 것을 찾아 볼 수는 없으나, “나는 그 안에서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만큼은 세상의 흉물스러움이 직접 닿지 않았으며, 더구나 그곳에서는 같은 시선과 고민을 발견 할 수 있고, 어떤 해코지나 위협도 내게 미칠 수 없음을 알기에 평온을 누릴 수 있었다. 책에 코를 박고 가능한 직접의 그 추레함과 비루함들과 멀리하려 했던 나와 같은 인물을 우연히 소설 속에서 보게 되는 것은 기쁨이라기보다는 착잡함이 맞는 표현이 될 것이다. 주인공‘나’는 “근면하고 쾌활한 워킹 클래스”(일해야만 먹고사는 사람들)들이 성공이란 쾌락을 향해 어떠한 의구심도 없이 살아가는 것에 동화되지 못한다. 문학잡지에 소설한편을 발표한지 3년이 지났지만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는 그녀의 좌절은 이렇듯 끊임없이 물질에 경도된 사회의 공허하고 형식적이며 빈약한 정신세계를 어쩌지 못함에 있다. 게다가 한계라는 단어의 의미를 상실한 듯 세상은 온통 욕망이란 관념 덩어리로만 치닫고 있으며, 이를 이탈하는 존재는 정신병자가 되던, 고립되던, 생존의 가능성이 희박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한 없이 걷고 또 걷지만 그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좀체 세상에서 삶의 이유를 발견 해 낼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의 앞에 나타난 청년,‘풀(草)’은 고결한 삶의 방식을 담고 있을 것만 같은 영혼으로 다가온다. 단지 먹고살기 위한 약간의 일과 그냥 그려야 하기에 그림을 그리는 그의 세상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독학의 무명 화가인 풀이 그리는 그림은 제아무리 재능 있는 작품이라도 위선과 가식으로 들어찬 자기들만의 리그로 구성된 세상에선 아무것도 아닐 밖에 없다. 세상은 저네들의 견고한 성에 작은 흠집이라도 될까하여 아름다움으로만 무장된 진실이 비집고 들어오거나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는 결코 존재토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 사회의 가치인 성공의 쾌락을 향한 기차에 동참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아름다운 것들을 계속 볼 수 있다면”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지만 세상은 그렇게만 살 수는 없게 조직되어있다. 이러한 곳에서‘나와 풀’은 사랑을 통하여 서로의 존재에 대한 목적을 확인하지만, “사랑 속에서 행복하게 굶어 죽지 못하고 자꾸 배가 고파서 짜증이 나는” 모순과 부조리함이 삶의 속성이고 진리임을 회피할 수 없음만을 알게 될 뿐. “끝없이 이어지는 지금 이순간만을 바라보겠다는 약속”이 사랑이라서, 풀을 묶어두려 하지만, 삶은 나를 배반할 수밖에 없다. 삶은 돈을 요구하고, 풀은 그 돈을 벌기위해 나가야한다. 이 소설은 이렇듯 한 편의 부조리극을 보는 듯하다. “안전한, 그러나 적당히 겁에 질린 평균적인 현대인”,그 가엾은 영혼들에게 보내는 진혼곡일지도. 회화공모전 입선으로 찾아간 갤러리에서 외려 전시된 그림보다는 차려진 파티음식이 맛있는 그 터무니없는 허위의 공간과 군상들, 바로 그러한 삶의 본질이 역겨워서 갤러리를 난장판으로 휘젓고, 초대된 한 문학시상식장에서‘나’의 도발은 어쩜“생생하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세상과의 타협이란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끝내 더 이상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없게 되면, 도저히 타협할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면 선택 할 수 있는 길은 단절 말고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질서의 흐름에 대항하는 자유의지가 치뤄야 하는 댓가란 참혹한 삶의 위협이라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처럼 너무도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이 소설은 감각적인 스토리와 문장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곤혹스러움을 남긴다. 구역질나지만 매혹적인 이 세계의 아이러니, 바로 그것이 이유가 될까?... |
|
“자기의 핏속에서만 용감하게 달리던 흑기사”들의 무용담 - 김사과의 『풀이 눕는다』
20대 중반의 젊은 작가 김사과의 두 번째 장편 『풀이 눕는다』(문학동네, 2009)는 사랑에 관한 지극히 주관적인 아포리즘으로 충만하다. 최근 우리의 젊은 작가들에게서 연애 소설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들이 그리는 세계는 지나치게 현실을 닮았다. 그렇다. 그들의 많은 소설들은 현실에 대한 '반영'이 아닌 '재현'인 경우가 많았다. 고시원의 비좁은 방에서 토막잠을 자고, 새벽부터 학원과 학교로 뛰어다니는 초라한 청춘들의 모습에서 출구와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단한 현실 속에서 사랑은 '계산'과 '사치'의 영역으로 전락한다. 사랑은 불확실성을 통해 증식하는 반면, 생활의 위기는 안정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와 맞물린 보수적인 회의 속에서 많은 작가들이 사랑보다는 생활의 부박함을 재현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대안은 꿈과 같은 '환상'의 반복적인 등장이었다.
등단작 「영이」부터 첫 번째 장편 『미나』까지, 타락한 현실에 비틀어진 방식으로 대응하는 김사과의 인물들도 이 공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장편 『풀이 눕는다』를 통해서 김사과는 '사랑' 이라는 패를 들고 나왔다. 반가운 변화이다.
김사과가 그리는 사랑은 우연에 목숨을 거는 맹목성으로 시작된다. 대학 재학 중에 등단했지만 곧 묻혀버린 "실패한 소설가"인 '나'는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풀'이라는 남자와 마주친다. "약간 굽은 채 천천히 흔들리는 그의 등"(25쪽)을 보고 나는 "아주 이상한 슬픔"을 느낀다. 그 슬픔은 알 수 없는 근거가 되어서 "그의 온 생애를,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여, 완벽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26쪽)는 확신으로 자리 잡는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개의 시를 떠올리게 된다.
"한 여인의 첫인상이 한 사내의 생을 낙인찍었다 서로 비껴가는 지하철 창문 그 이후로 한 여인은 한 사내의 전세계가 되었다 우리가 순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한 사내의 전세계는 순식간에 생겼다" - 김중식,「아직도 신파적인 일들이」에서
마치 위에 인용한 시에서 남녀를 바꾸어 놓은 것 같은 설정이다. 신파적인 설정은 흔히 디테일한 관계 형성을 그리지 못하는 미숙함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 다르다. 신파로 시작된 '나'와 '풀'의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이나 생활과 타협하지 않는 극단으로 점철된다. '나'는 '풀'과 함께라면 놓았던 소설과 시도 다시 쓸 수 있다. 오로지 당신만 있으면 된다! 공고를 나와서 만화를 그리다가 제도권에 속하지 못한 채로 대책 없이 그림만 그리는 '풀'과 그런 '풀'만을 바라보면서 집을 뛰쳐나와 동거에 들어가는 '나'는 끊임없이 서로를 갈구한다. 무책임하다는 주변의 충고나 생활의 어려움 따위는 안중에 없다. 이 젊고 당돌한(?) 작가는 '나'의 입을 빌려 이렇게 선언한다.
"사랑은 책임을 뜻하지 않는다. 그건 가장 살아 있다는 걸 뜻했다.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망각한다는 뜻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금 이 순간만을 바라보겠다는 약속이다. 그게 바로 사 랑이다." (158쪽)
사랑은 대개 순간에 대한 몰입과 헌신의 맹세로 시작된다. ‘나’와 ‘풀’은 돈도 벌지 않고 단지 둘이 함께 있는 시간만을 중시한다. 가끔씩 당일치기로 일을 하러 나간 사이에 떨어져 있는 시간조차 ‘나’는 ‘풀’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집착과 연애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들의 사랑도 ‘나’의 알코올 중독과 ‘풀’을 독점하고자 하는 집착 때문에 오래가지 못한다. 술에 취한 ‘나’가 ‘풀’의 그림을 망쳐놓으면서 이들의 관계는 흔들린다. ‘풀’의 그림을 알아주는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 ‘김권’의 개입으로 ‘나’와 ‘풀’은 더욱 거리가 멀어진다. ‘풀’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진심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던 ‘나’는, 자신의 마음을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으로 드러낸다. 사랑이 시작되는 것은 ‘순간’이지만 대상과의 관계 유지에 필요한 것은 온전한 표현방식이라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다시 재회한 그들은 촛불과 피켓을 든 시위대에 휘말리면서 다시금 열정을 되살린다. 그날 밤 둘은 한 건물의 옥상에서 음악과 춤에 취한다. 그러나 ‘풀’과 몇 번의 이별을 겪고 숱한 상처를 교환한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삶이, 사랑이, 그리고 기쁨이 되돌아”(282쪽)왔지만, 그 감정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매번 같은 실망 속에서 깨어나리라는” 사실을. 그래도 ‘나’는 ‘풀’과 함께 춤을 멈추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실망도 이 두근거림을 멈추게 하지는 못할 것”이므로. 그렇게, 순간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행복했던 두 연인은 그날 밤 ‘풀’의 죽음으로 영원히 이별한다.
사람들은 습관처럼 고독함을 토로하고, 언제나 사랑을 갈구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안과 결핍감에 반사적으로 생성되는 포즈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리는 사랑이 없어도 굶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삶은 이어진다. 사랑하는 자들의 대부분이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늙어갈 것”(270쪽)이다. 신파 같은 우연으로 ‘나’와 ‘풀’의 시작을 열었던 작가는 이 끔찍한 사실에 대하여 나직하게 항변한다.
나는 끝내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우리는 두 마리의 거북이나 염소처럼 시시하게 늙어갈 것이다. 삶은 끝났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남은 것은 그 삶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뻔뻔함과 얄팍한 위안뿐이었다. 우리는 이제 서로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손을 잡아줄 사람은 서로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건 끔찍한 깨달음이었다. (270쪽)
여기서, 시간에 비례한 친밀감과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과정을 생략하고 과감하게 우연으로 두 남녀를 엮었던 김사과의 의도가 드러난다. ‘나’와 ‘풀’의 우연과 대책 없는 열정을 통해 김사과는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당신이, 사랑을 할 때 곧잘 요구하는 ‘시간’과 ‘익숙함’이라는 잣대는 자신이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상처만을 감당하려는 위선은 아니었는가. 청춘은 눈 먼 열정을 통해 스스로를 고문할 수밖에 없는 시기일진대, 지금-여기의 당신들은, 그 사실을 애써 부정하고 생활을 위한 얄팍한 계산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가.
이 젊은 작가의 ‘사랑의 찬가’는, ‘생활의 고통’을 그리고 있는 소설들이 짚어내지 못했던 어떤 지점을 한순간에 관통한다. 이 사실 앞에서 소설의 구조적인 결함과 미숙한 대화의 나열이라는 약점들은 오히려 두 남녀의 바보 같은 사랑을 위한 배경으로 작용한다. 아직 청춘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이 젊은 작가가 더욱 무모한 열정과 맹목적인 몰두에 잠식당하기를 나는 기원하는 바이다. 강렬하고 짧은 ‘나’와 ‘풀’의 사랑 이야기에 대한 답례로 시 한 편을 적고 싶다.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심보선, 「청춘」전문.
* 제목의 인용구" " 는 진은영의 시 <청춘 4>에서 발췌했음. |
|
그렇다. 삶은 잔인하다. 삶은 사람에게서 모든 좋은 것들을 뺴앗아간다. 아름다운 추억도 희망도 푸르던 청춘도 아무런 댓가없이 타오르던 사랑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빼앗는 댓가로 우리들에게 하루의 안식과 하루의 음식을 안겨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늙은이의 모습으로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는 텅빈 눈을 선물할 것이다. 그가 성공을 했건 실패를 했건, 돈을 벌었건 빈한한 삶을 살았건.
삶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선택할 사람은 전적으로 우리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세상은 불공평하다. 한결같이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쪽으로 유도하기 떄문이다. 더 좋은 대학을 위해, 더 나은 직장을 위해, 더 진급을 하기 위해, 더 오래 직장에서 버티기 위해,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더 하기 위해... 삶은 우리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유예하고 포기하게 만든다.
진정한 자유. 완전한 자유. 완벽한 자유. 그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삶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거의 모든 것을. 안락한 잠자리, 굶주리지 않을 자유, 최소한의 문화를 누릴 권리... 자유의 댓가는 너무도 크기에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마침내 우리에게 남아있는 단 하나의 소중한 권리. 생명마저도 자유의 댓가로 희생해야 하기도 한다.
이 책이 바로 그 자유의 댓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풀처럼 싱싱하고 시그러웠던 청춘이 사회의 제약을 벗어나 자유를 추구한 결과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책은 발칙하다.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한 금기를 깨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기를 깨는 그 모든 것들은 아름답지 않던가. 우리가 안전한 범위에서 아주 가끔 즐기는 일탈이 아름다운 것처럼, 삶을 포기하는 댓가로 얻는 희열은 무척이나 멋지다. 사람에 따라서는 죽음과 맞바꿀 만큼이나...
물론 미학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미적이 감성과 실제의 삶이 분리가 된다면 그 삶은 스스로로부터 소외된 삶이 아닐까. 자신의 삶이 충분히 아름다우면 우리는 미학을 추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1960년대를 풍미하던 히피들의 삶이 혹 그런 삶에 가까웠을까. 그들 역시 사회가 제시하는 삶을 떠나서 그들만의 자유를 추구했었다. 그러나 그 정도는 달랐다. 완벽한 자유를 추구한 사람들에게는 모진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적당히 참여하다 적절하게 빠져나온 사람들은 지금 세상의 피라미드의 끝부분에서 세상을 내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완벽한 자유는 큰 희생을 요구한다.
이 책은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 자신이 적응하도록 자신에 대한 쇄뇌를 더 이상 중단한 반역자들의 삶을 다룬다. 그 반역의 참을수 없는 아름다움과 그 반역이 치루어야 하는 엄청난 댓가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책을 덥고 한숨을 쉬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 끔찍한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 반역의 순간만은 정말 아름다웠었다고...
|
|
폭풍 같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 풀이 눕는다.
이 책, 이 느낌은 뭘까,라고 생각했는데, '폭풍 같은 사랑'이란 말이 떠올랐다. 폭풍 같은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모르겠지만, 꼭 이들의 사랑 같을 거라는 생각.
걷지 않으면 못 견디는 나날들, 왜 그런지 알 수도 없고 그냥 마구 걸어야 했던 그 날들에 마침표를 찍게 해 준 건 '풀'과의 만남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 멀어져 가는 그의 등에 사로잡혀 무작정 따라간다. 그리고 바로 그 만남에서 처음 만난 남자에게 고백한다, "당신을 사랑해요." 사실 이 장면에서 나는 한 번 멈칫했다. 말도 안되는 그렇고 그런 연애 소설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계속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고민. 하지만, 애초에 김사과라는 내가 모르는 작가와의 첫 만남을 가지고 싶어 이 책을 읽게 된 것이기에, 어떤 소설이 될지 상관 않고 '김사과 알아보기'로 끝까지 읽기로 했다.
사랑에 대해 뭐라 말할 자격(?)은 없지만, 그래도 첫 만남부터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 당돌한 여 주인공 때문에 적이 당황스럽고 무언가 허탈한 기분으로 책을 읽어나가려니 내 마음은 자꾸 삐딱하기만 했다. 상식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면, 분명히 한참 어긋나 있을 것 같은 그들의 행동들에 눈쌀을 찌푸리다가, 어느 순간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풀의 그림이 전시된 미술 전시회에서, '나'에게 온 초대장을 받아들고 참석한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그들의 행동은 정말이지 '상식 이하'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를, 정말 '골 때리는' 모습이었다. (특히 전시회에서는 정말 '나'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벌이는 행위 예술이 아닐까, 순간 의심을 하게 될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살면서 딱 한 번만이라도 이렇게 미쳐봤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들더니, 급기야는 '죽기전에 꼭 해야 할 일' 목록에 그들의 '전시회 퍼포먼스'를 추가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책을 덮을 때까지 나는 계속 이들이 부러웠다. 돌이켜보면 정말 밋밋해서 하품만 날 뿐인 내 삶이 어찌나 시시하게 느껴지던지. 어쩌면, 첫 만남부터 당돌하게 사랑한다 말할 수 있고,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 안에 눕는, 그래, 그 사랑이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책 뒤표지에 적힌 문구가 가슴에 크게 와 박힌다.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 아름답게. 그게 내 꿈이었다." 그래, 나도 그런 꿈을 가져보고 싶다. 사랑해서, 사랑으로 죽어도 좋다는, 그런 생각, 나는 평생 가지지 못할 그런 꿈을, 그들은 가졌으니까. 꿈을 이뤘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들이 부러웠던가 보다. 책을 덮은 지 한참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들의 사랑이 부럽다. |
|
이 소설도 일종의 성장 소설로 봐야 하나면서 소설을 읽었다.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사회에 반항적인 태도를 가진 이야기는 맞지만, 소위 루저들을 이야기하는, 또는 88만원 세대들의 사회적인 문제점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다르게 멀리 갔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쨌던 진진하게 다룬 내용은 아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성장소설로 생각한 이유는, 청춘이란 기존 체제에 부딪쳐 방황을 하게 되는 것이고, 일종의 통과의례를 거쳐 한 단계 성숙된 모습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청춘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읽은 현재 상태에서는 돌아 오지 않고 이상향으로 가버린 느낌이다. 나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어린애라고 생각한 것은, 그들이 홀로서기인 경제적인 독립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설 내에서 경제적인 궁핍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많이 나오고, 그들은 돈이 없어도 잘 사는 이상향을 꿈꾸지만, 결국에는 가족의 도움에 의존하고 마는 것이다. 여주인공은 세상에 잘 적응하는 현실주의자인 그녀의 동생에게 의존을 하고 있고, 남자 주인공의 경우에도 작은 아버지의 지원이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성숙한 자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 아름답게. 그게 내 꿈이었다.” 이 책의 광고문안이고,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청춘이 사랑도 격렬하게 해 봐야 하고, 또 아름답게 해 봐야 한다. 그리고 젊은 청춘이 돈돈돈 돈만 아는 것만큼 불쌍해 보이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하지만 이것이 통과의례이란 것이다. 당연히 그 시절에 겪어야 하는 것이고, 잘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발 잘 견뎌내라는 것이다. 죽지 말고 살아 돌아와라. (사족이지만 호안 미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너무 반가웠다. 지하철에서 본 그의 전시회 포스터에 강한 매혹을 느낀 적이 있었다. 작품집 하나 갖고 싶다. 튀어!!!)
|
![]() 제목을 본 사람이라면 대다수가 김수영 시인의 '풀'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김사과. 2005년 단편 '영이'로 제8회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등단했으며, 펴낸 책으로는 장편소설 '미나'가 있다. 무척이나 짤막한 소개글이다. 처음 만나는 작가라 먼저 소개글을 찾아봤는데.. 이정도의 글 밖에 없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 젊은 작가라는 것. 작가도, 책에 대해서도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었다. 그럼에도 가장 먼저 이 작품을 집어들면서 위에 담아둔 시를 떠올렸기에, 우리의 굴곡진 현대사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역시 선입견이었다. 책을 뒤집어본 순간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 아름답게. 그게 내 꿈이었다. 권희철 문학평론가와 남궁선 영화감독의 짤막한 평이 담겨있던 뒷표지를 읽는 순간, 내가 뭘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도대체 제목은 무슨 의미였을까?
한 예술가의 정신적인 성장기를 그리고 있는 작가 김사과의 두번째 장편소설 '풀은 눕는다'.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한 실패한 소설가인 '나'는 어느 날 앞서 걸어가는 '그'의 등을 우연히 발견하고 쫓아간다. 굽은 채 천천히 흔들리는 '그'의 등은 '나'에게 이상한 슬픔을 불러일으키고, '나'는 그를 '풀'이라고 부르게 된다. 두 사람은 함께여서 빛나는 순간들을 경험하지만 '나'의 알코올 중독과 '풀'을 독점하고자 하는 집착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파탄나고 마는데..
너 아이엠에프 때 기억나? 사람들은 그게 이 나라를 완전히 바꿔놨다고 하잖아. 근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그전에도 세상은 똑같이 개같았어. 부자는 부자고 거지는 거지였어. 사람들은 다 똑같이 말했어. 공부해라. 일등 해라. 대학 가라. 취직해라. 돈 벌어라. 부자 돼라. 부자 돼라. 그게 전부야.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그런 세상이 오는 걸 바라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어.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되길 바라지만 잘 생각해봐. 거지가 없으면 부자도 없어. 부자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돈이 아니야. 부자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거지야.
제목에서부터 느꼈던 어색한 느낌은 책장을 덮는 순간 '다르다'는 느낌으로 바뀌었다. 그건 '풀'과 함께 일반적이라 불리는 삶을 내던지고 '순수한 삶', '오로지 사랑'만을 바라보는 주인공 '나'의 의 모습은 일반적인 소설들에서 '사랑'만을 향했던 여러 인물들의 모습과는 꽤나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수영 시인의 '풀'의 능동적이고 참여적인 모습과는 동떨어진 이상만을 쫓는 무기력한, 그리고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 아름답게. 라고 느껴질 법한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과도 확연하게 다른 주인공의 모습은 300페이지 남짓한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을 따라다녔다. 같지 않다고, 다르다고..
다른건 분명했다. 위에 적혀있는 것처럼 무언가의 본질에 대한 가치보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만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이 사회에서 그녀가 환영받는건 쉽지않은 일일테니까. 그래서 뒷표지에 적혀있던 남궁선 영화감독의 평이 너무 잘 어울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본질적인 것들이 환영받지 않는 시대에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이 아이가 인간들 사이의 괴물일지, 아니면 괴물들 사이의 인간일지 생각해볼 일이다.
물론 공감할 수는 없었다.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라는 말은 사랑을 하는 그와 그녀가 배를 곯을 만큼 함께'만' 있으라는 게 아니라 다른 모든 걸 충족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배를 곯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니까ㅡㅡ 그럼에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그녀가 말한 '사랑'이 우리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본질적인 무언가를 포괄하고 있는 무언가를 담아둔 단어가 바로 주인공이 말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
|
사랑안에서 아름답게 굶어 죽는 것, 그것이 내 꿈이었다.
여자를 보았다. 나와 같은 사고와 병적인 환멸에 사로잡힌 여자를 이 소설에서 보았다. 1984년 생, 나와 동갑내기 소설가가 그려낸 허구의 여자이거나 혹 소설가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를 여자였다. 동갑내기의 작품을 읽는 건 꽤나 열등감을 자극하는 일이었지만, 김영하와 조영일의 논쟁에서 불거져 나왔던 이 소설가의 이름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다. 읽지 못한 책들이 방치된 채 방바닥에 널브러져있기는 했지만 이 책만은, 되도록이면 빨리 구입하여 읽고 싶었다. 별다른 기대도 없었거니와 막연히 김사과의 약력을 노려보다, 페이지를 넘기며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정확히 팔랑팔랑팔랑 세 번째 장을 넘기면서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웃었다. 그 곳에 내가 있었다. 어느 소설속에서도 만나 볼 수 없었던 내가, 거기, 있었다. 아니, 그 여자처럼 살고 싶어했던 어느 한 시절의 내가 거기 있었다. 음악과 책 그리고 술과 사랑만있으면 온 세상이 내 것 같았던 그런 시절의 내 모습, 그 낭만적이기만했던 삶이 이 소설에 존재한다. 실로, 감격적이었다.
실패한 소설가인 여자처럼, 걷는 것에 가진 모든 시간을 허비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난 정확히 열여덟 살이었고 보이지않는 꿈을 쫓아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여자처럼 책도 읽었으며 책을 읽지않는 사람들을 멍청이 취급을 하기도 했다. 친구 많고 윗사람에게 싹싹한, 나 보다 예쁘고 다부진 언니에게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나와 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담배를 배웠으며 더불어 술도 배웠다. 여자가 그림 그리는 풀을 만났을 때, 나도 누군가를 만났었다. 여자가 그림 그리는 풀의 집으로 짐을 옮겼을 때, 나 또한 그 누군가의 집에서 하루종일 뒹굴고 책을 읽고 티비를 보고 컴퓨터를 하고 음악을 들었다. 여자와 풀 처럼 매일매일 섹스를 하기도 했으며 매일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매일 그 누군가와 함께였다. 실패한 소설가, 여자에게 있어 그림 그리는 풀이 그런것처럼 그 누군가는 나의 삶이었고 목표였으며 희망이었고 전부였다. 그림 그리는 풀이 그랬던것처럼 나 또한 돈이 떨어지면 종종 아르바이트를 했으며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담배를 사고 술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그 누군가의 집에서 시켜먹었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먹고 싶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여자와 풀 그리고 나와 누군가는 지나칠정도의 평화로움과 현실과는 동떨어진 생활에 익숙해졌으며 망가져갔고 사랑은 여전했으며 위험수위에 도달해있었다. 여자와 같이, '지금 이 순간'을 잡아두는 방법은 오로지 죽음,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여자는, 돈에 엉켜버린 세상을, 현실을 부정했으며 경멸했고 침을 뱉었다. 허기에 대한 굶주림의 이유가 돈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 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먹을 것, 그림 그리는 풀의 집 보다 더 좋은 곳이 여자의 것이 아니고 여자가 있을 곳이 아니어도 여자는 행복했다. 사랑안에서 아름답게 굶어 죽는 일, 그것이 여자의 꿈이었다. 노을빛이 젖어드는 옥상에서도, 길거리의 싸구려 음식들도, 현실을 망각할 수 있는 탈출구가 오로지 술을 마시는 것으로 국한되어질때도 그림 그리는 풀의 옆이라면 여자는 행복했다. 그림 그리는 풀의 그림을 술에 취해 여자가 망가트렸을 때, 그로인해 절망에 가까운 그림 그리는 풀과의 끝이 예견되었을때도 여자는 그림 그리는 풀이 자신의 것이라서, 그리고 그 그림 그리는 풀이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여자는 삶의 의미를 사랑안에 옭아맸다. 그리고 공백, 그리고 침묵, 그리고 무의미한 삶. 여자가 그림 그리는 풀의 집을 떠나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 회색빛의 거리를 다시 걷고 돈과 돈으로 결탁하여 지어진 세상의 건물들 사이로 자신의 삶을 다시금 끼워넣는다. 아무런 의미도, 그림 그리는 풀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새겨지지않는 삶을 견디며 살아 낼 뿐이었다. 사랑안에서 아름답게 죽고 싶었던 여자의 꿈이 사그라들고 현실과의 타협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고, 오로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 마음 하나만 있다면야 불가능이란 없을거라고 믿었던 때가. 그리고 평생 돈을 벌지 않고 일을 하지 않아도 여유있는 행복에 충만할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적어도 돈의 의미와 돈의 가치를 알지 못했을 때, 누군가를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었을 때, 그 누군가가 나의 돈이었고 음식이었으며 생명이었고 삶의 이유가 되었을때였다. 사랑, 그게 전부였고 사랑,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여자가 그림 그리는 풀의 집을 떠나오면서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을 때, 나 또한 그 누군가의 곁을 떠났을때였다. 마음 둘 곳이 마땅히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눈 앞의 현실을 두고 마냥 등을 돌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그 누군가를 만나면 더 풍족하게 사랑하고 싶었다. 더 좋은 담배를 태우고 더 좋은 음식을 먹고 지하 단칸방이 아닌 더 좋은 곳에서 그 누군가와 살고 싶어 나 또한 현실과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와 다시 재회했을 때는 더 이상 사랑 하나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절망감, 그것이었다. 그림 그리는 풀과의 재회에 손을 잡고 노을빛 젖어드는 옥상에서 춤을 추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음에 여자의 낭만적인 삶을 경멸할만큼 절망했었다. 그 절망에 다만, 그림 그리는 풀을 따라 추락하고만 싶었다.
참으로, 애달픈 소설이다. 사랑 하나만으로도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여자와 그림 그리는 풀이 그려내던 지나치게 작위적이었던 퍼포먼스들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음에도 통쾌했으며 유쾌했다. 지나 온 시간과 시절을 되묻는 소설이기는 했지만 웃으며 읽을 수 있어서 즐거웠던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 소설에 별 다섯개를 줄 수 없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아직 김사과만의 색깔이 없기 때문이다. 문체와 더불어 소설의 분위기가 전부 전경린을 닮아 있다. 전경린 이미테이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쾌하지않을 정도이긴 했지만 안타까웠다. 부디, 그녀가 경멸했던 현재의 세속적인 삶을 쫓는 사회를 바꾸는 작가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
|
소설 속의 ‘그녀’는 아파하고 있다. 세상은 그녀에게 참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따를 수 없었고, 그래서 아팠다. 마치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녀가 대학에 들어와서 한 일이라고는 소설을 쓴 것뿐.
그녀는 걷는다. 걷는다는 것은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며 또한 유일하게 열중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걸으면서 ‘풀’을 만난다. 풀은 화가이며, 멋진 남자였고, 또한 예술가였다. ‘그녀’처럼 예술을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와 풀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또한 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도, 격렬한 사랑 이야기도, 세상에 대한 강렬한 외침도 여기에서 시작됐다. 나는 그것에 왜 이리 빠져들었던 걸까. 나는 계속 읽었고 감탄했고 인정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진심으로 감탄!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처럼 아슬아슬하지만, |
|
김사과(28)는 사건이다. 소설가는 사건을 짓는 사람이지만, 그는 스스로 사건이 된 소설가다. 문단에선 그를 이렇게 부르곤 한다. “1980년대생 작가군에서 가장 개성적이고 문제적인 작가.” 김사과의 경우라면, 이 문제적이란 말을 두 갈래로 풀 수 있겠다. ①한국문학의 관습에 ‘문제를 일으키는(problem)’ 작가 ②우리 사회에 불편한 문제(question)를 던지는 작가.
부끄럽게도 김사과라는 작가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이런 작가도 있어나?'하는 생소함과 부끄러움 속에서 '내가 그렇게 책을 안 읽고 살았나? 그렇게 문학에 거리를 두고 살았나?' 하는 반성 아닌 반성을 하였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김사과라는 작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읽게 된 책. '풀이 눕는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젊은 그들의 한 단면-지극히 일부분인, 빙산의 일각이라는 생각이 들지만-을 바라보면서 공감하기는 쉽지 않았다. 소설은 대학생의 신분으로 문단에 등장하지만 휴학을 다섯 번이나 하면서 현실에 발을 디디지 못하는 화자 '나'와 공고 출신이며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홀로 옥탑방에 사는 '풀'이라는 인물 사이의 만남과 사랑, 갈등(여기서 갈등은 인물 사이의 갈등보다는 두 인물과 현실(사회) 사이의 갈등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물 사이의 갈등이 왜소화되는 건 결코 아니다), 질투와 좌절, 이별과 재회를 다루고 있다. 소설 속 인물은 철저히 사회의 흐름과는 거리가 먼, loser이자 outsider다. 그리고 그들은 그 흐름에 끼어들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일정한 거리감에 만족해 하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사랑을 나누며 즉물적이고도 단순한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이런 루저들의 만남과 사랑이라... 결코 온전하게 끝날 리가 없다는 생각에 책장을 넘기는 내내 불안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행보는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이가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위태하고 과격하기만 하다. 이는 기득권 문화에 대한 조롱으로까지 보여진다(특히 공모전 입상 파티의 부분이 그렇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사랑,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빛이 나는 사랑은 언젠가 퇴색하고 빛을 잃어가기 마련이다. 욕망이 전제되지 않는 사랑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소설의 형식적 특성에 있어서는 말할 게 별로 없다. 모르기도 하고 못마땅하기도 하다. 2쪽에 걸쳐 텅빈 책을 바라보노라면 '이게 도대체 뭔가?'하는 일차원적 고민만 맴돌뿐...특별히 강조된 굵은 글씨는 또 뭐고 작품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노래들은 또 뭔가... 오직 알 수 없음... 이 뿐이다.
'풀'이 눕는다. 김수영의 시에서 풀은 바람보다도 먼저 눕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하지만 작품 속 '풀'은 그저 누울 뿐이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나와 풀의 눕는 행위 그 자체는 사랑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억압에 눌려 버린 이 시대 청춘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자리에 누운 '풀'은 일어날 수 있을까? 그 시기는 언제일까? 사랑만 하기에도 바쁜 청춘에게 누가 억압의 굴레를 채웠으며 누가 눕게 만들었을까? 답은 뻔하나 또한 뻔하지 않다. 우리네 인생이 뻔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나날들의 연속이기에...
어쨌거나 작품을 읽은 지금, '김사과'라는 작가를 '문제적 작가'라 지칭한 언론의 그 평가를 온당히 받아들이는 게 지금의 내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