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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권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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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미래학에 관심이 많았다. 제3물결, 권력이동, 미래충격 등 앨빈 토플러, 강대국의 흥망의 폴 케네디, 문명의 충돌의 새무얼 헌팅턴 등은 내가 가장 즐겨한 책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기소르망, 에드워드 사이드도 있었다. 소위 상실의 시대에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사상의 고전이 되었다. 이념이 상실되고 낭만도 없고 취직의 문제만 남아 있는 젊은이의 생각에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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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미래학에 관심이 많았다. 제3물결, 권력이동, 미래충격 등 앨빈 토플러, 강대국의 흥망의 폴 케네디, 문명의 충돌의 새무얼 헌팅턴 등은 내가 가장 즐겨한 책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기소르망, 에드워드 사이드도 있었다. 소위 상실의 시대에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사상의 고전이 되었다. 이념이 상실되고 낭만도 없고 취직의 문제만 남아 있는 젊은이의 생각에는 이데올로기는 철지난 가치 개념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미래 역사의 이데올로기를 상상해 본다.

 

'이데올로기'라는 술어는 18세기 말에 처음으로 프랑스 철학자 데스듀트 드 트라시에 의해서 처음 쓰였지만, 20세기에는 역사 투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 시대의 역사에는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사람들이 많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진태의 약혼녀 영신은 단지 한 줌의 보리쌀을 얻기 위해서 인민군의 말을 듣고 부역에 나갔지만, 이것이 화근이 되어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녀는 자본주의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오로지 생존하고 굶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이데올로기였다. 그런데 시대의 패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권력를 유지하거나 획득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이데올로기를 사용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는 세력을 이데올로기를 사용하여 가차없이 제거하였다. 이 땅에서 이데올로기는 일종의 마녀재판으로 이용되었다. 그 속에서 영신과 같은 존재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 못했는지도 모르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미국에서의 마녀재판은 1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말까지 휘황찬란했다. 이 시기는 미국이 소비에트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던 철의 장막의 시대였다. 반공주의가 광풍이 되었다. 매카시즘은 지나친 반공주의, 정적의 성격이나 애국심에 대해 비난을 선동하거나 무분별하고 근거없는 고발을 비판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이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먹혀들었다. 이처럼 규격화된 내용이 획일적으로 전달되고 관료제 사회와 결부되어 폭도로서 무능력자의 무리로 규정되는 사회를 대중사회라고 일컫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런 사회분석은 통설로 인식되었다.

 

이 책은 1950년 대의 미국과 소련의 사회가 주로 분석과 비판의 대상이다. 당시 미국의 주류였던 대중사회론에 비판을 가하고 새로운 대중성을 설파한다. 그러면서 유토피아로써 사회주의의 모순을 파헤치면서 소비에트와 유럽에서 이데올로기 시대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다. 예언은 모든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교조적인 이데올로기에 한정하는 것이라고 역자는 말한다. 이 예언은 단순히 주술적인 예언이 아니라 하나의 학문으로써 알고리즘 차원으로 미래를 접근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논리적인 근거와 연역적인 방법에 따른 서술이 필수적이다.

 

이 책은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들면서,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넓은 영토에 개인의 노력에 의한 사회적 상승의 많은 기회가와 생활수준의 향상, 임금 노동자의 계급의식의 결여나 선거권의 무상증여, 파도처럼 밀려오는 이민으로 아메리카니즘,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양당제를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저자는 사회주의 운동이 현실 인식이 부족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즉 사회적 성격의 상호작용, 다른 여러 제도에의 접근도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본질적 측면을 이유라고 한다. 사회주의는 윤리와 정치와의 근본적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이데올로기로써 모순 덩어리로 점철되어 있다. 이는 사유재산제, 자연권을 부정하여 철학적, 실제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는 이념이다. 이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의 신앙에 가까운 것이었다. 신앙을 합리적 사고로 대하는 경우에는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이 관념은 현실적인 정치사상로서도 파탄났다. 사회주의를 채택한 국가의 정치자들은 이를 대다수의 희생을 강요하면서도 권력 유지 수단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모순적이고 황망한 사태 때문에 자유주의 내의 건전한 사고방식인 민주주의도 고사직전에 이르고 말았다. 사회주의로 말미암아 저본주의 내의 집단적 사고는 민주주의의 싹이 자라는 것을 방해했다. 자본주의도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시간의 역사가 밝혀주었다. 

 

그는 이데올로기는 고갈되었다고 한다. 프로이트나 야스퍼스 등의 철학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하고 합리주의적인 신념은 쇠퇴하고 금욕적이고 신학적인 인간관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유토피아의 청사진을 믿을 사람도 없고, 국가가 경제에 대해 어떤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복지 국가의 용인, 권력의 분화, 혼합 경제체제와 정치적 국가 다원론은 이데올로기의 종언의 증거라고 한다. 이런 그의 주장은 1960년에는 어느 정도 따당해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1970년 대에는 정부실패론이 주장되면서 신자유주의가 대두되었다는 것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이종번식을 한다는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나 보다. 나와 같은 공기를 숨쉬고 있는 그가 지금도 이런 생각에 변함이 없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그는 이 책의 개정판을 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짐작만할 수 있다.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책은 1960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30년 후에 소비에트의 몰락은 그의 예언을 적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다시 20년이 지나고 자본주의의 맹주인 미국에서 그토록 천시를 받던 흑인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더 확산시키기 위해서 의료보험제도를 개혁하려고 할 때에 미국의 소위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지금 중국은 미국을 위협하는 공산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종언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아직은 성급한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 벨의 예언이 옳았는지 더 두고 볼 일인 것 같다. 단지 신종 플루처럼 시간과 때를 기다리며 잠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서구사회에서도 그러는데, 감정적인 것을 앞세우는 이 나라에서는 찬란한 악취를 풍기고 있다.  

 

한 나라의 이데올로기는 그 사회의 가치를 구체화하여서 구성원들이 도덕적인 것 내지 바람직한 것에 대하여 잠재적이나 현실적으로 내리는 가치판단을 구체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이데올로기의 블랙홀이다. 이데올로기 본래의 개념은 소멸되었다. 본래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진보, 보수 등 그 수많은 이데올로기는 단지 동지와 적을 구분하기 위한 색깔 묻히기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나의 보신에 도움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가 존재할 뿐이다. 아직도 광신적인 이데올로기가 주연이다. 이를 비판하는 것은 아웃 사이더로 낙인찍히고 주홍글씨를 다는 지름길이다. 아웃 사이더가 되는 것이 두려우면 침묵하는 수밖에 없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기득권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되었고 사용되고 있다. 국민들은 지금도 1950년 대 미국의 대중사회 단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풍토에서는 행동하는 양심인이 되는 것은 매우 용기있는 자이어야 한다. 용기있는 자만이 인간다운 세상을 위한 이데올로기로의 진화, 발전은 지속시킬 수 있다.   

 

이 책의 옥의 티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 번역자가 독일어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일 것이다. 가령 'Weber'는 독일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를 '베버'라고 읽어야지 '웨버'로 읽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k*******4 2010.10.13.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