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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 모리슨의 소설 '파라다이스'에는 '루비'라는 흑인들이 모여서 만든 공동체가 나온다. 이들은 백인에게서 받았던 차별에 대항하기 위해서 하나로 뭉친다. 하지만 이럴 수가, 백인과의 명백한 선을 그은 '루비' 안에서는 백인과 비슷한 형태의 차별이 일어난다. 자신들의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노력은 공동체 외부를 적대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이는 모든 혼혈과 잡종에 대한 배척으로 나타났다. 그들이 그렇게나 싫어했던 백인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7~80년대 독재정권과 싸웠던 운동권의 내부에서는 그들이 그렇게나 배척했던 보수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위계질서와 남성성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들이 정치권에 들어가서 자연스럽게 보수화되었던 것은 어쩌면 필연이 아니었을까. 내부성에 근거한 공동체는 결국은 새로운 자격과 자격에 해당되지 않는 존재들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 이진경은 외부, 사유의 정치학에서 '외부'라는 개념을 토대로 철학사를 다시 써내려간다. 그는 '외부'의 개념을 탄탄히 하기 위해서 온갖 애를 쓰는데, 사실 덕분에 글이 어려워지는 감이 없지 않다. 지식이 미천하야 그의 생각을 온전히 따라가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런 외부의 사유가 어떤 영향을 불러올지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 알 것 같기도 하다.
철학에 있어서 그 주장이 논리적으로 타당해야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철학도 결국 사람들을 위해서 하는 학문이므로 그 철학의 체계가 어떤 정치학을 불러오느냐 역시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을 위시로 한 진리를 초월자로 만들어놓고 그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소수의 사람에게만 부여하는 철학은(사실 자격이 부여된 소수의 사람이 말하는게 진리라고 받아들여지는 것이겠지만) 위계의 정치학, 차별의 정치학과도 곧바로 이어지는 듯 싶다. 그것이 그렇게나 이성을 중시했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공동체가 기독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강력한 위계, 제의적 성격을 띄었던 이유가 아닐까.
그에 반해, 초월적 존재에 대비되는 내재성을 이야기하며 외부를 통한 관계로서 세상을 사유하는 것은 평등의 정치학을 가동시키게 된다. 사물의 절대성을 떠나서 '기관 없는 신체'를 사유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절대적 평면의 공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공간에서 수많은 외부들이 연결되며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실재이고, 양태이다. 이는 절대적인 것으로 사유되던 동일자들의 우연적 기반을 드러내려고 했던 푸코의 생각과도 연결되며, 자격 없는 자들의 정치를 주장했던 랑시에르와도 연결된다.
그렇다. 사실 '외부'는 혁명적인 사유다. 외부의 사유는 현존하는 질서를 뒤흔들어 놓는다. 뿐만인가. 그것은 내부화를 경계하며 끝없는 변화를 요구한다. 이것이 맑스의 '영구혁명'이며 니체의 '영원회귀'가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