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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앙겔루스 노부스(진중권: 아웃사이더, 2003) 탈근대의 관점에서 근대적 에피스테메에 따라 정돈된 미학의 역사
"모든 독해는 그 무언가를 자신의 맹점 속에 감추어야 책의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진중권
곰곰히 생각해보면 '북리뷰'에 있어서 독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앙겔루스 노부스>(아웃사이더, 2003)의 저자 진중권씨는 이러한 생각을 오래전에 깨친듯 싶지만 필자는 최근에 깨달은 사실입니다. 모든것을 기독교와 관련해서 보진 않지만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새로운 관점을 낳고 그 관점으로 인해 기존의 독해가 새롭게 바뀌는 것은 '성경'을 읽는 가운데서도 적용되는듯 싶습니다. 예를 들자면 기도와 묵상을 통해 성경을 읽다보면 기존에 읽었던 본문도 다른 해석과 다른 가르침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경우처럼 말이죠. <앙겔루스 노부스>를 읽은건 오래전입니다. 하지만 글로 남기는건 오늘이 처음인듯 싶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내용을 다시 보면서 그때 글을 썼다면 오늘처럼 글을 쓰지 않았을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현재 이글을 쓰는 시점에서 볼때 미학에 있어서도 글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했기 때문일테죠. ![]()
< 판사들 앞의 프리네: 장 레옹 제롬, 1861>
<앙겔루스 노부스>의 키워드는 '존재미학'입니다. 진중권에게 있어 '존재의 미학'은 시민사회의 가치를 존중하고 시민적 삶을 예술작품처럼 가꾸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미학과 윤리학, 사회학이 결합된 것을 의미합니다.(26) 그에게 있어 '존재 미학'은 '욕망'과 '노예의 도덕' 그리고 인간이 창조자가 되어 자기 앞의 생을 예술작품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는 '진정한 포스트 모던'의 시대를 열어가는 중요한 개념으로 설명되어집니다.(28) 진중권은 이 시대에 부활시켜야 할 감감과 상상력을 '포스트 모던'에서 찾습니다. 그는 포스트 모던의 감성과 상상력은 무엇보다도 시대의 고통을 예민하게 느끼는 진보적 감수성, 그리고 그 고통 극복의 실천적 방안을 찾아내는 창조적 상상력이라고 말하면서 모스트 모던의 정신이란 우리의 삶 자체를 예술론적으로 조직하도록 이끌어 주는 영감의 원천으로서 미메시스(모방) 예술작품과의 조재론적 닮기를 주장합니다.(p.149) ![]()
<지금도 그는 이 책에서 말했던 주장을 온전히 삶에서 실행하고 있을까?>
한번 읽었던 책이라도 다시 읽게 되면 그리고 다시 그 주제에대해서 글을 쓰게되면 전혀 다른 관점을 통한 새로운 글이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또한 그러한 노력의 반영이자 다른 미학관련 책들과의 차별성의 근간이 됩니다. 반면 '존재의 미학'과도 같은 이상적이고 궁극적인 진리개념의 현실적 적용에 대해서는 다양한 합의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독해와 기준을 가지고 사회적 합의를 구축해 나가고 진중권씨 또한 시대정신의 가치와 발전을 이끌면서 동시에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가운데 한명입니다. 어쩌면 그가 꿈꾸는 포스트 모던의 시대는 영원이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말하듯이 그것은 사회적 결핍 요소들을 채워나가는 중요한 요소들이므로 결코 포기되어서도 포기해서도 안되는 요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근대화를 이룩해나가는 중요한 정신적 활력소들을 찾아가는 과정은 미학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함께 이뤄져 나가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진정한 유토피아'를 공유하고 나눌 수 길을 찾아나가는 여정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정의 가운데서 우리모두가 다양한 독해를 존중하고 그 가운데서 각자의 차별화된 독해의 가치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비록 서로의 독해가 충돌을 일으킬지라도 그것 또한 새로운 포스트 모던의 한 형태로 수용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러한 포용을 사회에 적용할 수 있다면 좋을거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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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진중권씨의 글들을 몇가지 읽은 적이 있었지만 그의 책은 처음으로 읽은 것 같다. 아마도 진중권씨를 좋아하는 사람도 그의 미학과 관련된 책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으로 하는데 역시나 나는 조금은 튀는 사람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진중권씨의 글을 많이 접하지도 못했고 그저 tv에서 말하는 모습이나 토론회에서 혈기왕성하게 말하는 모습만을 접했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미학책은 보다 정적인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이책은 미술작품들을 통해서 진중권씨의 표현대로 "근대적 인식구조"와 그에 대한 비판, 그리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권력에 대해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은 어떠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말한다. 미학에 관한 책이기 때문에 많은 그림들이 있어서 읽는데 어려움이 없으며, 생각보다 까다로운 개념들을 쉽게 설명하기 때문에 다른 책들을 접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
| "미학오디세이3" 이후 "현대미학강의"를 읽으려고 손을 댔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책 읽고 싶은데 생각하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집어든 다른 책이다. 월간 "우리교육"에 10회에 걸쳐 연재했던 것을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저자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지만, 그리고 "우리교육"이라는 잡지가 어떤 성격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잡지에 실리기엔 그리 쉽지도 가볍지도 않은 내용인듯 하다. 게다가 진중권의 글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적응하는데에도 힘이 좀 들 것 같아보인다. 아무튼 같은 사람이 쓴 책이니만큼 "미학오디세이3"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고 읽다만 "현대미학강의"와도 다루는 내용이 비슷해보인다. 중간중간 그림을 곁들여가며 10개의 장에 걸쳐서 탈근대의 시각을 가지고 고대, 중세, 근대를 차례차례 밟아온다. 가장 많이 눈에 띄는 단어들이 '숭고', '존재론적닮기', '미메시스'인 것 같다. "미학오디세이3"을 읽을 때에는 솔직히 '숭고'라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나서 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예술에 대한 시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미 갈려 있었다. 플라톤은 예술을 두고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 세계의 모방이라고 하며 경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을 버리고 철학자가 되었던 플라톤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킬 수도 있는 예술의 신적 요소를 경계하는 모습에서 예술에 대한 '애증'적인 감정마저 엿보게 된다. 플라톤 뿐만 아니라 고대의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 대해 '영감론'의 입장을 취했다. 예술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신적 요소를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볼 수 있듯 예술에 대한 '테크네'를 인정하는 '모방론'의 입장이었다. 예술이란 분석 가능한 것이고 현실을 모방하되 보편적인 것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르네상스 시대에 극도로 '테크네'를 따르라고 압박하는 비평가들의 모습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근대에 와서는 합리적 사고에 입각한 '분류'에 의해 인간과 자연도 철저하게 나누어진다. "위대함은 설득시키지 않는다. 도취시킨다."며 롱기누스에 의해 전개된 '숭고론'은 예술에서 고대인들이 어떤 신적 영감을 추구했던 것을 되새긴다. 르네상스 시대에 그것이 왜곡되어 '고대모방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근대의 합리적 이성은 모든 것을 파악하고 분류했다. 덕분에 인간은 신에게서 벗어나 주체가 되고자 했고 자연과도 예술과도 분리되었다. 근대에 생겨난 학문답게 미학에서 칸트, 헤겔 등은 예술을 바라볼 때 역시 근대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근대에는 합리적 사고와 이성을 중시했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다. 자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연은 인간화되어야하는 대상이었다. 인간중심주의에 입각하여 가장 위대한 것은 인간밖에 없었다. 저자는 이러한 근대적 시각에 문제 제기를 한다. 자연재해를 그린 그림을 보며 쾌감을 느끼는 것은 '내가 그 일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인가, '내가 자연보다 위대하다'거나 '자연에는 인간이 알 수 없는 보편적 원리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다는 것'에 대한 자만심인가. 자연은 단순히 무서워할 대상도 아니고 알아가야할 대상도 아니다. 인간을 위해 희생되어야하는 대상은 더더욱 아니다. 자연은 숭고할만한 것이다. 자연과 인간은 '존재론적닮기'를 해야한다. 이 책의 제목 "앙겔루스노부스"는 파울클레의 그림 이름이다. 신천사(新天使)로 번역이 되어 있다. 파울클레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유치원생 그림 같은 그의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합리적 이성과 인간중심주의로 똘똘 뭉친 근대미학으로만 읽혀왔던 예술을 탈근대적 시각으로 새롭게 읽으려고 한다. 예술과 인간이 서로 '존재론적닮기'를 했으면 한다. 그리고 파울클레의 그 그림 속에 있는 천사를 닮고 싶어 한다. 이긴 자들에 의해 쓰여진 역사 속에서 잊혀지며 두번 죽임을 당해야했던 그들을 모으고 싶어하는 천사, 하지만 파라다이스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천사는 날개를 접지 않고 저항하며 그들을, 과거를 끝까지 바라보고자 한다. 저항해도 미래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지만 과거에서 번쩍번쩍 생성하고 소멸하는 희망을 보며 저항한다. 그런 천사의 모습을 닮고 싶어 한다. 그런 마음, 그런 희망을 보며 얼마전에 읽었던 "R통신"에서 저자가 젊은벗에게서 희망을 보던 것이 생각났다. 사실 나는 그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단순히 '앙겔루스노부스'가 '역사의 천사'라면 원시인들이 그린 천사의 그림이 저랬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울클레의 그림도 꼭 유치원생이 그린 것 같았고 뭔가 고대 벽화 같은 이미지가 풍겼기 때문이다. 천사하면 떠올리게 마련인 머리에 불빛이 있고 서양인의 얼굴을 하고 새하얀 옷에 깃털 같은 날개를 달고 있는 극히 중세적인 천사의 모습이 아니라 이 그림 속 천사는 우리나라 조상들이 그린 도깨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사의 천사'라는 말은 역사 속에 살아있는 왜곡되지 않은 천사의 모습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었을까하고. 이 책의 공식대로 하면 고대인과 '존재론적닮기'를 하는 것이다. 뭔가 친근하고 가까운 느낌의 천사.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역사의 천사'라는 것은 벤야민이 붙인 별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사 가운데에 있는 천사 말이다. 위에 쓴 것이 그의 해석이고 저자는 그 해석에서 이 그림을 접했다고 했다. 어쨌든 미술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지만, 파울클레의 그림도 처음 접해보았지만 내 나름대로 그림을 보며 느낀 것은 그런 것이었고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던 파울클레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벤야민처럼 보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단지 내 나름대로 가지는 시각이 마치 천사라고 하면 틀에 박힌 그 모습만 떠올리는 것처럼 누군가에 의해 왜곡되고 가려진 시각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다. |
| 미학 에세이... 에세이는 부담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읽을 거리였다. 하지만 이 책은 부담 없이 가볍게 읽을 수 없었다. 미학의 역사를 탈근대적인 관점에서 다시 읽어내는 작업을 에세이라는 형식을 빌어 한 것이기에 미학과 철학에 얇은 지식을 가진 나로서는 사전을 옆에 두고 하나하나 정독을 해야만 했다. 미메시스, 숭고의 미, 존재미학, 메갈로프쉬키아(위대한 영혼), 앙겔루스 노부스... 책을 덮었을 때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그는 이 단어를 통해 예술을 인식의 대상으로 치부해 버린 기존의 미학들에게 벗어나 예술과 인간은 닮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클레의 그림인 '앙겔루스 노부스'를 그 예로 제시한다. 불어오는 바람에 저항해 날개를 펴고, 과거를 바라보며 미래에 등을 돌리고 있는 천사... 그다지 감동스러울 것 없는 이 그림이 그에게는 눈물이 핑 돌게 만들었다. 왜 그는 결론의 예로 '앙겔루스 노부스'를 제시했을까? 아마도 그림 속의 천사의 모습이 그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격동의 80년대 속에서 그의 희망과 절망의 나락을 경험했던 그는 이 그림을 보는 순간 자신의 삶의 궤적을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느꼈을 것이다. 그의 눈물과 왜 '앙겔루스 노부스'였는지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존재론적 닮음의 의미도...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사회는 각자의 다른 경험들 속에서 획일화된 하나의 시선을 강요한다. 예술을 하나의 잣대로 밖에 바라볼 수 없는 시선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다. 나의 시선은 너무도 삶과 동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이 진정한 삶이 뭔지, 예술이 뭔지를 느끼게 해주었다면 너무 감상적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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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한 시대를 공유한다는 건 행운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말했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에서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예술가들이 매일 밤을 불꽃처럼 수놓았다고. 그 화려한 불꽃놀이를 즐겼던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좀 엉뚱하지만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도 그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도 많고 탈도 많은 나라지만, 그래도 이 나라는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다.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흠뻑 빠지는 건 그런 대한민국만이 갖고 있는 역동성, 변화.. 그런 것들일 것이다.
진중권은 그런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천재다. 세상의 모든 기표와 기의들에 대하여 아무런 거리낌없이 도전할 수 있는 그를 천재라는 말 이외에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나는 그가 갖고 있는 정치적인 의견이나 몇몇 발언에 대해서는 완전히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의 글쓰기를 보면 녹아내릴 수 밖에 없다.
앙겔루스 노부스. 타락한 천사를 빗대서 시작하는 진중권의 이 미학론은, 그의 천재다운 글쓰기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글이다. 화려한 문체와 재치, 그리고 익살로 표현한 그의 미학론은 오로지 그 밖에 완성할 수 없겠다라는 생각까지 든다.
그는 결국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었던 걸까?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하지만 훗날, 누군가 강호의 잊혀진 고수의 무덤을 찾는 심정으로, 글을 써왔던 것일까? 부디 그의 삶이 앞으로도 유쾌하길 빈다. [인상깊은구절] 위대함은 설득시키지 않는다. 도취시킨다. - 위(僞) 롱기누스안>되는> |
| 그의 글쓰기 습관이 그대로 베어있는 미학에세이집이다. 미학의 오디세이, 춤추는 죽음 등에 이어 주로 회화에 집중해서 미학적 관점에서 주저리 주저리 써내려 간 책. 결국 책 전체에 녹아있는 것은 벤야민, 헤겔, 그리고 비트겐슈타인.. 아, 물론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비트겐슈타인이 깊은 색채는 느낄 수 있다. 회화에 관한 지적 상상이 접근과 더불어 요목조목 뜯어보는 그만의 냉철한 시각은 잡지 연재물이라는 약간 돈주고 사기 아까운 글이라는 생각을 날려버리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진중권이라고 해도 다 좋겠는가. 그의 글쓰기의 특징. 끝부분이 흐지부지 하다. 역시. 잘나가다가 미학에서 급속도로 철학의 관점에서 서성거리다 다시 결론만 맺고 있다. 7장 넘어가면서는 그런 그를 다시 만나게 되서 피식 웃게 되었다. 진중권 그의 색깔을 아는 독자라면 강추할만한 책. |
| 근대의 철학을 공부하던 중 이책을 접하게 되었다. 근대가 이루어놓은 주객분리와 주관적이성의 확립은 지금의 현대를 만들어냈다. 자연파괴, 윤리의식의 도태, 개인화와 파편화... 우리는 거대한 자연 속에서 숭고를 느낀다. 또 모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선구자들에게서도 위대한 무언가를 느낀다. 우리가 그들에게 범접할 수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위대해 보이기 때문일까. 아마도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그 무언가가 대상과 내적공명을 일으켜 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에서의 예술은 그런 것이었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표현하고 또 그것은 자신과 같은 것이기에 그것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자연을 화폭의 틀 안에 가두고 이미지의 틀 안에 가두어버린다. 심지어 우리 이웃과 자기 자신까지 파인더를 통해 잡아낸다. 그 안에 무엇이 있기에 이미 내 안에 있는 것들을 소유하려 하는가. 이 책과 함께 김상봉 교슈의 "나르시스의 꿈"을 함께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