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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피츠제랄드(F. Scott Fitzgerald)와 젤다 세이어(Zelda Sayre)부부의 광기는 1920~30년대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솟구치는 물질의 풍요와 쾌락을 대표하는 심볼로 잘 알려져 있다.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물질과 욕망에 압도되어 황폐해진 영혼들의 스러져가는 삶을 그려낸 작가이자 곧 그들의 인생 모습 또한 그러했으니 그 고통은 더욱 참혹했으리라.
『위대한 갯츠비』로 대표되는 스콧 피츠제랄드의 낭만주의적 이상과 현실사이의 간극에 좌절하는 당대의 허영과 위선으로 포장된 인물들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표상들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이러한 속물적 욕망에 시달리는 인간과 같은 시대의 조류 보다는 젤다라는 한 여인의 소멸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보기를 제안한다. “글쓰기는 남자들의 일”이라는 의식이 지배하는 여전히 남성중심의 사회, 여성이란 남성의 명예와 부를 위해 악세사리처럼 따라붙는 부수적 존재로 인식되는 사회에서‘스콧’이라는 권력자인 남성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이자 착취의 대상자로서‘젤다’라는 여성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다분히 페미니스트적 요소가 강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은 파멸해가는 당대의 인간들에게 단지 피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정도로 그려지는 스콧 피츠제랄드식(式) 남성적 관점을 전면적으로 전복하고,“죽이 잘 맞는 추문 덩어리 동성 커플로 꾸며” 보이고, 대작가이자 남편의 성공과 욕망에 육체와 영혼이 모두 고갈되도록 착취당한 여자의 안타까운 항변의 회고록이다. 유독 이 작품은 애착이 가게 되는데, 등장인물들이 유명세를 치룬 실재했던 사람들이 그대로 차용되어 작가의 픽션주장에도 불구하고 스타의 사생활을 엿보는 관음증적 욕구를 자극하고, 스콧의 작가적 역량에 의구심을 키워내 궁극적으로 스콧의 소설은 다름 아닌 젤다의 소설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독특한 마력을 지니고 있음에서이다. 특히, 젤다의 정신병원에서의 의사와의 대화나 회고의 장면은 스콧 피츠제랄드의 자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Tender is the night : 밤은 부드러워』와 대비되어 더욱 화자인 젤다의 주장에 미혹(迷惑)되게 한다. 세 딸을 둔 엄마 미니가 “세 군데 달아맨 조종 끈을 잡아당기며 인형극을 공연”하듯이 자신의 좌절한 희망을 보상하려 한 행위의 희생자로서, 또한 남편에게는 영원한 익살광대이자, 사랑스러운 광대, 웃음에 덮여진 광대, 분칠로 망가진 광대로서 남용되어야 했던 여자로서,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겨온 여자를 여왕으로 안아준 프랑스인 조종사 조즈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관능의 미련으로 평생을 그리움에 떨어야 했던 여자의 소용돌이 같은 삶의 기억들이 하나의 강이 되어 흐른다. 결혼이 두 이성의 사랑의 결합이 아니라, “광고 계약서에 서명”을 한 것처럼 자신을 감추고 세상의 광대로서, 스콧의 장난감으로 살아야 했던, 그래서 남김없이 남용당한 육체로 열망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끝내는‘뇌 백질 절제술’까지 받는 정신병자가 되어야 했던 음울한 한 여인의 삶이 시종 묵직하게 가슴을 억누른다. 미스 앨라배마이기도 했던 출중한 미모와 남부의 근엄한 명문가의 여식으로서 도덕적 엄숙주의를 일탈하고 삶의 탕진이라는 순수로의 회귀를 온 몸으로 실현하려했던 여인의 매혹적이지만 쓸쓸한 여운을 던지는 그러나 삶의 조연이었던 여자에게 주연의 자리를 들려준 신선한 작품이다. “내 몸은 한줄기 강, 앨라배마라는 이름의 강이다. 내 몸 한가운데 삼각주가 펼쳐진다. 내 두 다리는 모빌만으로 뻗어나가 플레저(기쁨)라는 이름의 반도를 이룬다...” - 작품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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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유일한 건강법이란 바로 경계를 넘어가보는 일이야. 과도함, 극단을 추구하는 거지. 용기 있게 자신의 전부를 내던져 스스로를 소진시켜야 해. 어차피 문명이라는 이름의 이 대전, 낡은 세계의 이 도살자가 우리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죽일 테니까.” 고교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킬러〉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연기파 배우 우디 해럴슨과 깜찍하고 아름다운 소녀 줄리엣 루이스가 출연한 영화였죠. 극중에서 미키(우디)와 말로리(줄리엣)는 미쳐버린 세상에서 그야말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깨닫게 되죠.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고 666도로를 따라 허니문을 떠납니다. 살인이 끝없이 이어지는 죽음의 허니문이죠. 미디어는 그들의 살인행각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도합니다. 10대들은 이들 부부의 행각에 열광하고 그들을 추종하게 되죠. 그들은 가는 곳마다 살인을 반복하고, 10대들의 열광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과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앨라배마송》을 읽으며 문득 어린 시절 보았던 그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MTV 세대를 의식한 현란하고도 화려한 영상,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폭력의 향연 속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당시 제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최고의 영화다!” 나름 방황하던 10대에게 이 영화가 어떤 영감을 주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입시에 찌든 제게 대리만족을 주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저 역시 미쳐버린 세상에서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려 했던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두 주인공의 눈빛과 말투를 잊지 못합니다. 냉소와 허무, 그리고 삶의 극단을 향해 치닫는 무모함. 그들은 너무나 뜨겁게 사랑을 했고, 또 세상에 저항했습니다. 뭐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정당화될 순 없겠지만 말이죠. 잃어버린 세대, 미국 문학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스콧 피츠제럴드. 그리고 그와 함께 광기에 가까운 삶을 연출해낸 젤다 세이어. 이 미국 문학사상 가장 유명했던 커플에 대해 우린 어떤 평가를 할 수 있을까요. 미래에 대한 아무런 기대나 희망 없이 단지 지금을 위해 100% 자신을 소진시켰던 커플. 짧은, 그러나 너무나 화려했던 시기를 지나 길고도 처참한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던 커플. 이들은 1920년대 미국의 상징이자, 혼란스러운 세계의 거울이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고서야 그 작품이 왜 그토록 찬사를 받았는지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던 무지한 저로서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천재성 역시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물론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지 못한 탓도 있겠지요. 하지만 《앨라배마송》을 읽으며 그가 천재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여기엔 조건이 붙습니다. 젤다와 함께 있는 한 말이죠. 젤다는 그 자체로 이미 스콧에 버금가는 열정과 재능, 광기가 있었다고 생각해봅니다. 물론 책은 허구입니다. 젤다에 대한 100% 사실이 아니란 말이죠. 하지만 어쩌면 그녀의 일생은 소설보다 더욱 극적이고 간절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사랑을 원했지만 한 달의 시간으로 만족해야 했고, 예술을 사랑했지만 결국 좌절해야 했던 불꽃같은 여인 젤다. 샐러맨더라는 단어가 절묘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녀는 불꽃 그 자체였으니까요. 읽은 이로 하여금 진을 빼놓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에너지를 앗아간다고 하기엔 무언가 표현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한동안 멍하니 쳐다보게 만드는 작품들. 저에겐 이 책이 그랬다고 생각합니다. 뜨겁고, 격정적이고, 아쉽고, 허무하고. 그리고 무언가 다시 그리워지는 감정…. 항상 한 권의 책으로 또 다른 책들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이 책으로 다시금 피츠제럴드의 책들을 찾아 기웃거릴 것 같습니다. 온전히 책 한 권 읽어 내는 것도 버거운 놈이 욕심만 많아지고 허영만 늘어갑니다. 꽤 멋진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소설 한 편을 써내려가기 위해 저자는 얼마나 많은 공력을 들여야 했을까요. 격정적이지만 전혀 난잡하지 않은, 뜨겁지만 외설적이지 않은, 잘 써내려간 두 영혼의 이야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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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소설이 픽션인지 전기인지 읽는내내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실제 위대한개츠비의 작가 피츠제럴드와 젤다 세이어의 삶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은데 피츠제럴드가 딸아이에게 남긴 편지와 몇몇 작은조각들의 진실이 있긴 하지만 '픽션'임을 강조한 이 책을 저세상에 가있는 두 주인공이 이책을 본다면 혹시 놀라지는 않을까?
자신들도 몰랐던 모습들이 너무 실랄하게 표현되어 자신들이 걸어왔던 열정의 시간들을 왁자하게 추억했을것만 같았다. 미국의 남부와 북부의 색깔차이만큼이나 같은듯 다른 두 사람의 만남부터가 말그대로 드라마이다. 실제등장하는 영화배우들의 모습이 겹쳐서일까. 바람과함께 사라지다의 클라크케이블과 비비안리의 모습이 주인공들과 겹쳐지는것은 왜일까.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테니까...하고 뇌이던 스카렛 오하라의 독백이 젤다 세이어의 말과 겹치고 레트비틀러의 고뇌가 피츠제럴드와 묘하게 비슷하다.
완벽한 작품이라고 평가받는 '위대한 개츠비'역시 피츠제럴드와 젤다 세이어의 현실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작품에서 항상 같거나 다른 젤다의 모습이 있었고 실제로 젤다는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자신의 못다한 열정을 불꽃속에 잠재워야 했다. 좀 순하게 살아도 좋으련만 무엇이 그들은 미치게 하고 술먹게 했는지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같은 극을 가진 사람들처럼 서로를 밀쳐내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했던 두사람의 사랑은 능력을 꽃피웠던 피츠제럴드의 뒤에서 그림자로 남아야 했던 젤다의 이상과 자신의 작품속에 늘 시퍼렇게 살릴 수 밖에 없었으면서도 자신보다 앞서는걸 두려워했던 피츠제럴드의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충돌했던것은 아니었을지..작가가 얘기한 로댕과 연인 까미유클로델과의 애증관계와도 흡사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의 재능이 남자보다 우월했을때...특히 연인이거나 부부일때는 둘다 불행해지는 경우가 너무 많다. 술과 약으로 찌든 인생에서도 보석과도 같은 작품들이 탄생될 수 있었던것은 그들의 불행에서 싹텄는지도 모를일이다. 행복하게 잘살았다...했었으면 치열하고 위대한 작품이 나왔을지 의문이 생긴다.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천재였고 위대한 작가였고 패배자이기도 했지만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느껴진다. 용기 잃지 않기, 늘 몸을 청결히 하기, 승마 연습하기... 남들의 말에 신경쓰지 않기, 지나간 일에 얽매이지 않기, 다가올 일을 미리 걱정하기 않기.. 특히 하지 말아야할 일들이 바짝 내마음을 당기는건 왜일까...어쩌면 피츠제럴드도 이부분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딸아이만큼은 자신을 옭죄는 족쇄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글을 남겼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위대한 작가라 하더라도 결국 자신을 넘어선다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아직은 고루하고 보수적인 시대에서 앨라배마의 토네이도처럼 폭풍처럼 살다간 두사람의 삶이 내마음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이 지금 다시 이시대에 온다면 또 얼마나 앞선 삶을 살고 파란을 일으켰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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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픽션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인물들의 모습이 겹쳐져 보일 수밖에 없는 설정을 지니고 있다. 실제 인물들인 당대 최고의 소설가로 불리는 F. 스콧 피츠제럴드와 그의 영원한 뮤즈 아내 젤다 세이어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의 삶을 소설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의 모습은 겹쳐 보이고 또 동시에 소설 속 먼 그 곳의 삶을 사는 종이인형처럼 보인다.
피츠제럴드는 소설가의 야망을 지닌 멋진 청년이었고 그의 뮤즈 젤다 세이어는 남부 명문가문 출신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와 그녀는 20년대를 주름잡던 멋진 커플이었고 최초의 셀러브리티였다. 최고의 인기와 스캔들로 시대를 풍미했고 그들의 멋지고 화려한 시대는 최고점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이 누리던 모든 화려한 모습 뒤에는 빛과 그림자처럼 우울함과 냉대, 질투심, 경쟁심으로 인한 어둠이 있었고 그들은 최고점에서 점차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피츠제럴드는 알코올 중독자로 젤다는 정신병으로 함께 파국의 길을 걷게 된다. 한 때 시대를 풍미했던 그들의 몰락은 성공의 정점 뒤에 찾아 왔기에 더 큰 시련을 다가왔고 그들의 관계 또한 흔들리게 된다.
젤다는 열정을 가슴에 품은 멋진 여성이었음에도 지금까지도 그녀의 진가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피츠제럴드의 영감을 주는 뮤즈로서만 인정받고 있고 있으며 그를 궁지에 몰고 간 여성으로 남게 되었다. 후대에 와서 피츠제럴드의 작품들은 복권되어 널리 사랑받고 있는 점에 비하면 그녀의 삶은 아직까지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부분에 작가는 촛점을 맞추고 젤다 세이어를 세상에 다시 소개하고 있다. 그들 사이에 있었던 '진실'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둘은 함께 했기에 그 누구보다도 더 빛났고 화려했던 별들이었다. 또한 그 둘은 함께였기에 지독한 파멸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피츠제럴드의 소설을 읽다보면 금발 머리의 남부 명문가의 딸이 누구를 모델로 했는지 젤다 세이어를 알고 있다면 단박에 알 수 있으리만큼 여러 작품 속에 젤다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과연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우리의 삶을 소설 속에, 감추고 싶은 치부를 이야기 속에 등장시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일을 말이다. 아마도 젤다였기에 버티었고 젤다였기에 그를 최고의 자리에 올라 갈수 있게 만들었고 그녀였기에 파멸의 길을 함께 간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앨라배마 송'은 작가가 강조했다시피 픽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숨겨진 삶을 들여다 본 것 같아 기분이 묘해진다. 결코 인정받지 못했던 그래서 자신만의 세계로 숨을 수밖에 없었던 젤다 세이어 모습에서, 거의 모든 작품 속 뮤즈로 아내 젤다를 등장시킴로서 그녀에 대한 마음을 표현했지만 어딘가 어설프고 냉혹한 면을 지닌 모습을 본 것 같아 씁쓸했다. 천재 작가 뒤에서 뮤즈로만 남아야 했고 말년에는 그를 궁지에 몬 여자로 낙인 찍혔던 여자 젤다 세이어의 시각에서 바라본 그들의 삶을 다룬 소설 '앨라배마 송'은 지독히도 아름답고 지독히도 슬픈 사랑이야기이다. 세월에 가려진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당대를 뒤흔들었던 그들의 삶에 조금은 늦은 그래서 슬픈 찬사를 보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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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황금시대, 1920년대. 그 시절을 풍미하던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F. 스콧 피츠제럴드. 그는 미국 문학의 위대한 작가 중 한명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 그의 소설 속 여주인공들의 모델이 되기도 했던, 뮤즈 젤다 세이어가 있다. 그녀의 재능 또한 뛰어났다. 그녀 또한 화려했고 열정적이었고 폭발적이었다. 그녀는… 이 소설은 그와 그녀에 대한 이야기다. 낯익다. 그러면서 낯설다. 그녀의 입장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사랑과 환멸을, 그 시대를, 그들의 아우라를 그려냈기 때문이다. 소설이 신선했다. 알지 못했던 저 먼 세계의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소설은 재밌다. 그들의 이야기는 아주 화려하고도 강렬한 마법처럼 재밌다. 또한 소설은 매혹적이다. 그들의 마법은, 불타는 궁전을 연상케 하는 그것은 매혹적이다. 좋은 소설을 만났다. 이 화려함 속에서 걷어낸 여운이 그것을 확신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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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누구를 이용한 것일까. 아니다. 그런 것은 상관없다. 내가 강한 충격을 남긴것은 그 두사람이 삶을 살다간 그 강한 힘때문이니까. '힘' 그렇다. 그것은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두사람이 그 시대를 주름잡았다거나, 그 두사람은 짧지만 황금같았던 시기의 아이콘이었다고 하거나,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때로(많이) 비루하고, 떄로 서로를 증오하고, 떄로 서로를 이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었다. 비록 일반적인 사람들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식과는 많이 다른 방식이었지만 말이다.
앨라바마 토박이. 해마다 토네이도가 몰아치는 그곳에서 성장한 젤라는 앨라바마의 토네이도처럼 소용돌이치는 삶속으로 머뭇거리지 않고 걸어들어갔다. 그 젊은 나이게 그녀는 뉴욕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녀가 할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다. 남들은 그녀를 비웃고, 남들은 그녀를 경탄했겠지만, 그녀는 그런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토네이도가 어디 사라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존재였던가. 남부의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올라온 그녀는 그녀속에 내재된 싱싱한 야성의 힘으로 뉴욕을 휩쓸었고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재즈의 시대.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세상에 이름을 날리던 그 시기를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나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렇게 존경해 마지 않는 그의 남편은 이 책에 의하면 무척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빈한한 가문 출신이나 명예욕에 가득차 있고, 영특한 재능과 결합하여 그는 한동안 그의 시대를 누렸다. 그러나 모든 영광에는 내리막이 있는 법이다. 비극이라면 그들의 영광에 비하여 그들의 삶이 너무 길었다는 것이다. 모든 천재들은 일찍 죽어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같은 범인들에게 오래오래 추아을 받아야 한다.
찬사도 영광도.... 더 이상의 아무런 빛나는 추억도 남지 않은 긴 여행을 그들을 서로를 햟퀴고 서로를 상처내고,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그렇게 살았다. 그것도 사랑이 아닐까. 이혼을 하고 사인을 하고 간단히 헤어져서 영원히 다른 남으로 살아가면 될 것인데. 서로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고서도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눈부신 젊음이 그들에게 머물러 있을때 운명이 그들을 서로에게로 끌여들인 그 힘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다. 그들은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불타올랐고 그렇게 스러져 힘없이 넘어져갔다.
이 책은 두사람에 대한 전기가 아니다. 두사람의 삶의 연대기에 충실하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이 허구이고 추측이다. 그러나 이 책은 아름다운 이야기이자, 멋진 소설이다. 허구와 추측이 결합된 팩션이라고 할까... 아마도 이 책은 내가 읽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슬픈 팩션이 될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두부부를 기억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살다간 그 뜨겁고도 쓸쓸한 삶을 기억한다. 아마도 그들의 삶 또한 그러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뜨거운 청춘과 긴 노년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들처럼, 그들을 기리는 그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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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앨라배마 송>은 전형적인 프랑스식 페미니스트 소설입니다. 실존했던 여성을 복권시키고픈 열망이 너무 강한 나머지 상대 남성을 지나치게 왜곡시켜놓은 점이나, 여성의 분열된 의식을 다루기 위해 시공간과 언어를 분열시켰다는 점 등등, 모든 면에서 매우 전형적인 프랑스식 페미니스트 소설이죠. 작가와 제목을 모두 가려놓고 본문의 일부만 보여도 '아, 프랑스 작가가 쓴 페미니스트 소설이구나'하고 답이 딱 나올 정도입니다. 사실 외형만 놓고 보면 60년대의 유명한 프랑스 페미니스트 소설들과 차이점이 없습니다. 특히 '나의 몸은 앨라배마다' 운운하는 대목은 노골적으로 '여성의 몸을 이용한 글쓰기' 이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런 이론들과 낯설게 하기를 통한 보여주기가 아니면 여전히 파급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인가, 싶어 페미니스트 문학의 지난한 미래를 잠시 생각해보기도 했어요.
어쨌거나 <앨라배마 송>은 재미있는 소설이에요. 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커플 중 한 쌍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남편에 비해 지나치게 조명을 못 받는 아내인 젤다 세이어의 삶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죠. 아마 피츠제럴드의 실제 삶에 대해 단편적인 지식만 지닌 분들에게는 재미가 각별할 듯 싶습니다. 대중적으로 형성된 이미지를 완전히 전복시켜놓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처럼 그의 팬인 분들은 좀 안타까울 수도 있겠습니다. 사후 70년인데도 여전히 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파급은 요원한 일이구나, 싶어서 말이지요. 실제 그의 삶에 대해 좀 자세히 아는 분들이라면 무덤에서 피츠제럴드가 벌떡 일어나 엉엉 울겠다는 상상을 할지도. 이래서 이미지란 무섭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미국 독자들은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가 몹시 궁금하네요. 따지고 보면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라는, 20세기 미국 문단의 쌍두 마차를 동시에 diss한 셈이니까요. 어쩌면 그래서 작가도 차마 헤밍웨이는 실명으로 거론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실제 젤다 세이어의 삶을 보면, <앨라배마 송>에 그려진 그녀의 이미지는 좀 모호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실제의 젤다 세이어는 소설 속의 젤다보다 훨씬 더 거칠고, 대담하고, 극단적이었으며, 동시에 보수적이었거든요. 자유연애를 즐겼지만 깊은 관계로까지는 가지 않은 게 분명해 보이고, 언제나 자신을 한 명의 예술가로 대접받고자 소망했으면서도 동시에 '남자와의 관계'를 떠나서는 여성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남부 여성이었죠. <앨라배마 송>은 픽션답게 피츠제럴드 부부의 모습을 상당히 왜곡시켜놓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젤다를 다룬 전기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지금까지 접해 온 전기문이나 에세이집을 통해 접한 젤다 세이어라는 인물은 파악하기 힘든, 추측 불가능한, 이해하기도 힘들고 공감하기도 힘든 인물이었거든요. 피츠제럴드나 헤밍웨이가 그랬듯, 그녀 역시 일반의 범주를 상당히 벗어난 인물인 것 같다는 생각은 막연히 했더랬습니다. <앨라배마 송>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젤다에게 공감했겠지만, 외려 실제 젤다의 모습을 알고 있는 제게는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실제 젤다를 '매끄럽게' 다듬어놓은 것이 불만이에요. 젤다 세이어는 '매끄럽게' 다듬어질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피츠제럴드와 그토록 지지고 볶고 싸우며, 일찌감치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했던 거고요.
실제의 젤다 세이어는, 남성들의 세계에서 신세대 여성으로 태어난 탓에 부당한 대접을 받은 게 맞긴 맞습니다. 특히 그녀의 이미지가 오늘날처럼 '남편 말아먹은 아내'로 굳어진 데에는 헤밍웨이의 공(?)이 지대하죠. 그는 초창기부터 줄곧 각종 편지로 젤다가 피츠제럴드를 망치는 주범이라 주장했고,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는 둘 다 위대한 작가가 되었어요.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젤다가 자신을 변호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겁니다. 다만, 그렇다고 홀로 자립하기에는 선천적으로 남자 없이는 사는 게 불가능한 여자였다는 게 치명적입니다. 육체적으로가 아니라, 정신적인 뜻에서요. 남자 없이 여자가 독립해서 산다는 것을 젤다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선천적으로 그녀는 남들의 주목, 특히 남성들의 관심이 없으면 못 견뎌하는 여자였다는 것. 어쩌면 이 점이야말로 젤다 세이어의 진짜 비극이 아니었을까 -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런저런 불평에도 불구하고, <앨라배마 송>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달이 뜬 저녁 하늘 아래를 걸어가면서도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읽을 정도로 말이에요. 비록 재미의 대부분은 젤다 세이어라는 인물을 이토록 공감 가능한 인물로 매끄럽게 다듬어내었다는 것에 대한 감탄이 차지했지만 말입니다. 다만, 페미니스트 소설이 대개 그렇듯, 여성 주인공에 비해 상대 남성을 지나치게 악의적으로 왜곡시킨 것은 안타깝습니다. 특히 피츠제럴드를 동성애자로 묘사한 부분은... 무덤에서 피츠제럴드가 뛰쳐나올 일이에요, 정말로. 그는 평생 동성애자들에게 험담받고 오해받는 것을 괴로워했으니까요.
이 부부의 실제 삶에 대해 좀 자세히 아는 분들이라면 사실과 허구를 비교하는 재미가 꽤나 쏠쏠할 듯 싶습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그리고 이 부부가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을 제외시켜놓고 소설 자체만으로 읽는다면, 굉장히 재미있을 겁니다. 픽션으로서는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 분명하거든요. 다만, 출판사의 의도인지 자꾸만 실존 인물과 결부시켜 마치 '모든 것이 진실에 근거한 소설'인 것마냥 광고 카피를 쓴 것이 영 거슬려요. 그래서 제가 굳이 픽션임에도 실제 인물들과 비교하는 식으로 리뷰를 쓴 것이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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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책 속의 내용보다 깔끔한 표지 디자인에 눈길을 끌어 선택한 책이예요. 그래서 책을 펼치자마자 피츠제럴드와 젤다 세이어의 사진을 보고 일대기인가?하고 오해를 했습니다. 저자는 저처럼 오해하는 이를 위해 계속 픽션이라고 주장하지만, 정말 책을 읽다보면 이게 픽션일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등장인물들의 묘사를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약간 안타까운것은 제가 피츠 제럴드와 그다지 친하지 않다는거예요.^^ 항상 '위대한 개츠비'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솔직히 전 영화도 재미없었기 때문에 이상하게 손이 잘 안가더라구요.) 읽지 않았고, 그러면 그의 다른 단편들도 읽어봐야지 했지만.. 제가 기억하는 그의 단편들이 없다는거였습니다. 만약 그에게 관심이 있어 그의 일상을 알았더라면, 이 책을 읽는데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처럼 전혀 그에 대해서 모르더라도 이 책은 재미난 책이었습니다. 그래도 책을 다 읽고는 피츠 제럴드의 삶을 찾아보았는데, 소설속에 등장한 루이스 오코너가 헤밍웨이라는 것을 알고 좀 충격을 받았어요.^^;; 지금도 피츠 제럴드는 유명한 작가이지만, 당시에 피츠 제럴드 부부는 세간의 관심을 받던 커플이었습니다. 사진만 봐도 둘이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느낄수 있었는데, 둘다 너무나 개성이 강해서 융화하지 못하고 충돌하면서 안타까운 삶을 보내게 됩니다. 이 책은 아무래도 젤다 세이어가 주인공이다보니 그녀 중심에서 이야기를 풀어서 피츠 제럴드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알콜중독자에 동성애자 그리고 아내의 재능을 갈취하는 남성으로 그려지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온전한 정신상태를 유지 할수 없는 그녀의 말만 전적으로 믿을수는 없었어요. 오히려 그점이 더 그녀를 안타깝게 만든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 당시 여성의 지위와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남성을 지배하려고 하는 여자를 곱게 볼리 없으니깐요. 서로 비슷해서 충돌할수 밖에 없었던 피츠 제럴드와 젤다 세이어를 보면서 그녀의 고향 앨라배마의 토네이도를 연상케 했습니다. 강렬하게 주위의 모든것들을 휩쓸고 폐허를 만들어버리는 토네이도처럼 살다간 부부. 사실 이 소설이 픽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과 허구를 절묘하게 섞어서 또 다른 진짜를 만들어낸 작가의 솜씨가 놀라웠습니다. 앞으로 기대하고 싶은 작가네요. 실제 피츠제럴드와 젤다 세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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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젤다가 과거 피츠제럴드와의 결혼생활과 그 이후의 이야기를 얘기하면서 동시에 정신병원에서 정신과의사와 상담치료를 받으면서 풀어놓는 그녀의 고백이 액자형식으로 치밀하게 구성되어있다. 예로들면 요즘에하는 TV프로그램중에 <우리결혼했어요.>를 보면 프로그램이 시간상으로 흘러가는것 처럼 보이다가 중간에 그들의 내면을 인터뷰를 하는 장면과 유사하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둘 다 사실은 가상이지만 이런 기법을 보여줌으로서 시청자와 독자들에게 '혹시 이 모든게 사실이 아닐까?'라는 착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픽션 작품보다 이 작품은 집중도가 뛰어나다.
<스콧은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 만큼 내 노트를 펼쳐볼 수 없다는 건 그로서는 미칠 노릇이다. 앞으로 그는 나의 노트에서 단 하나의 발상, 단 한 줄의 문장도 훔치지 못할 것이다.><말하자면 이건 게임이다. 이 서글픈 게임에서 이겨야 내 삶과 존재이유를 구원할 수 있다.> 이것이 픽션이던지 아니면 사실이던지간에 정신병원에서 외치는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난 그녀의 얘기가 믿고싶어진다. 이 책의 저자가 의구심을 품는 것 처럼 그녀는 사실 미쳤던게 아닐꺼란 생각이 든다. 그녀의 주장대로 피츠제럴드가 그녀의 소설의 일부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수도 있고 미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명성때문에 그녀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렸을거란 생각도 든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아직도 헷갈리지만 이 소설속에서만큼은 그녀는 놀랍도록 논리적으로 자신의 얘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작가라는 지위는 남자만의 특권이었고 여자에게는 순종이 미덕이 되었던 시대에 그녀는 너무도 일찍 자신을 드러냈기 때문에 불행했던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작품은 <위대한 게츠비>를 쓴 피츠제럴드의 사생활을 보고싶은 대중의 심리를 자극한 작품에서 더 나아가 그의 주변인으로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삶의 애환을 그려낸 멋진 픽션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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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픽션임을 밝혔으나 픽션으로 읽히지 않는 얘기들이 있다. 오래전에 읽은 로댕의 연인 까미유 끌로델의 이야기가 그랬고, 지금 만난 피츠제럴드의 아내 젤다 세이어의 이야기가 그렇다.
환하게 빛나는 조명들에 눈이 어리다가 그 빛들이 스러져 갈 때쯤 발견되는 조명판들. 환한 불빛들이 더 화려하고 눈부셔 보였던 건 뒤에 버티고 서 있는 조명판 역할이 컸음을 늦게야 감지하듯, 그녀들의 이야기는 더 환한 빛은 내기위한 불빛들의 묵묵한 배경된 조명판처럼 내게 다가왔다. 불빛의 뜨거운 열기를 가슴으로 받아내다 그 열기로 인해 종내는 자신이 허물어지는 아픈 삶. 젤다 세이어를 만나기 이전엔 몰랐던 피츠제럴드의 뒷모습을 감지해 낸 것도 아픔이라면 아픔이다.
젤다 세이어. 스콧으로 인해 가려진 삶이었다거나 그의 명성으로 인해 상대적인 그늘에 묻혀 있었다는 고루한 얘기는 말기로하자. 단지, 불빛에 어려 보지 못했던 ( 어쩌면..관심이 없어 존재의 유무조차 생각해 본 적이없었던 )젤다 세이어를 만나게 된 행운만을 얘기해 보기로 하자.
대법관의 딸이자 상원의원의 손녀, 미스 앨라배마,그리고 대작가 피츠제럴드의 아내. 책의 첫 머리에 소개되는 그녀의 모습은 이 모든 배경을 다 지워도 스스로 타오르는 불꽃처럼 강인함과 정열을 품고 있는 모습이다. 팜므파탈의 관능과 뜨거운 정열을 가슴에 품은 채 세상을 향해 던지는 다소 오만한 눈빛. 그 시대 젊은이들이 꿈꾸던 화려한 파티와 주목받는 무대 위에서 각광받는 주인공으로의 손색없음을 한 눈에 본다. 스콧과 젤다가 서로 사랑했음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국 남부의 근엄하고 무거운 가문의 구속에서 달아나기 위해 젤다는 스콧을 선택했고, 가난한 스콧에게 젤다는 상류층 신분에 (이용가치가 높은--;;)후광이 탐나는 놓치기 아까운 여자였음에 분명하다. 정략적인 면이 있었지만 노래와 춤, 계속되는 파티와 알콜속에서도 그녀는 빛이났고 어디서나 무대의 주인공이었다. 삶을 소진시키며 현실의 궤도를 일탈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동안 스콧과의 관계는 예정된 것처럼 파국의 길로 치닫고 젤다는 절망하면서도 갈망하는 모습으로 스콧을 바라본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끝내 버릴 수 없는 이름으로 가슴에 간직한 젤다의 태양이자 신이었던 구포.(구포는 젤다가 부른 스콧의 애칭이다.) 가슴의 불꽃이 꺼지기도 전에 정신병동의 불꽃속에서 어이없는 생을 마감한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삶을 살다간 그녀. 분명, 픽션이라 했는데.. 픽션인데.. 무슨 까닭으로 행복했던 순간들만 픽션처럼 읽히고 글쓰기를 꾸던 소망과 스콧을 능가하는 재능, 그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끈 가슴속의 불꽃들은 만져질것 같은 다큐로 읽히는 건지..
불꽃속에서 살다가 불꽃속으로 진 알라배마의 영원한 노래 젤다 세이어. 그녀를 위해 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이 또 이렇게 안타깝다. 책만 자꾸 쓰다듬는다. 픽션이라고 했는데...픽션이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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