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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밝아지는 흔치않은 순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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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전원주택 마을에 자신만의 식민지를 만들고 은둔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에게는 빠져있는 삶의 기쁨과 연민, 그리고 욕망을 되찾아가는. 또한 「창세기」의 <그리고 아담은 자기 여자를 알았다>는 구절처럼 그와 삶의 무대를 함께해온 아내와 딸과 노모와 장모, 그리고 스쳐간 여인들을 이해하려는, 그녀들과 자신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일어나고 있는지를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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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전원주택 마을에 자신만의 식민지를 만들고 은둔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에게는 빠져있는 삶의 기쁨과 연민, 그리고 욕망을 되찾아가는. 또한 「창세기」의 <그리고 아담은 자기 여자를 알았다>는 구절처럼 그와 삶의 무대를 함께해온 아내와 딸과 노모와 장모, 그리고 스쳐간 여인들을 이해하려는, 그녀들과 자신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일어나고 있는지를 발견하려는 절박한 자기 관찰기이다.

 

이스라엘 비밀 정보요원‘요엘’은 아내‘이브리아’의 알 수 없는 죽음과 함께 은퇴한다. 우연한 감전사인지, 혹은 연인과의 동반 자살인지 불분명한 이 죽음은 아내를 더욱 이해할 수 없게 하지만, 간질 발작의 질환을 지닌 딸, ‘네타’를 보호하려는 책임감과 단짝이 된 어머니와 장모를 위해 텔아비브 근교의 ‘라마트 로탄’이란 전원마을에 은거한다.

 

요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서두를 필요 없고, “내일도 또 날이야.”라는 방기 속에서 기억 속 삶의 흔적들을 추적하며 자기의 여자들을 이해 할 수 있게 되리라는 현재와 과거의 경계가 사라진 시간을 살아간다. 자기 욕망이 배제된 이웃집 여자와의 잠자리, 정원 가꾸기에 공을 들이고, 열여섯 살 딸아이의 삶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며, 창고에 드나드는 고양이에게 음식을 건네는 단조로운 일상에 과거 기억의 조각들 - 첩보활동을 벌였던 세계의 도시들과 마주한 사람들, 순간의 상황의 기록들, 그리고 그를 향해 뱉어진 문장들... - 이 더해지며 모호하고 알 수 없었던 비밀의 실체를 이해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네 삶이란 것이 본디 재단하듯 그리 명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리라. 선명하게 다가가 이해하려는 비밀들이 명료한 정의로 나아가기에는 흐릿하기만 하다. 아내의 죽음도, 딸의 질병의 원인도, 방콕에서 순간 사라진 여인의 모습도, 휠체어에 앉았던 남자의 움직임도, 이웃집 여자와의 관계도, 모든 것이 분명치 않다. 이런 남자에게 그가 맡았던 사건의 해결을 위하여 비밀정보원으로서의 임무가 종용되지만 딸의 보호를 위하여 거절한 것이 그를 대신한 동료요원의 죽음이 되어 돌아온다.

 

여기에 이르러서 이 소설의 뚜렷한 내적 갈등을 포착하게 되는데, 국가를 위한 임무 수행으로 자기 인생의 유일한 연인이었던 아내를 이해하지도, 보호하지도 못했다는 죄책감의 깊이, 그 고통의 무게를 헤아리게 된다. 반면에 국가의 부름을 받지만 자기 여자인 딸의 보호와 더는 바꿀 수 없다는 사적안위로 인해 동료가 희생되었다는 대칭적 상황으로 인한 또 다른 죄책감이란 구렁텅이에 빠지고 만다. 이 소설에 감정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것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탈출하는 가라 할 수 있다. 소위 ‘마이클 샌델’과 같은 다분히 도덕철학적인, 개인이냐 국가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해당 국면에 정당하게 맞서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죽은 동료의 늙은 아버지를 찾아 비록 혹독한 비난을 받을지언정 스스로는 지울 수 없는 죄의식을 털어내는 것이고, 궁극에는‘살아있음’, 그 살아있음의 불패를 인정하는 것이다. 삶의 이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작가에 대한 경외로 머리가 숙여지는 대목이다.

 

이 전환적 사건으로부터 느린 행보를 거듭하던 소설은 조금 속도감을 찾는다. 딸아이의 보호가 오히려 그녀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각성, 이웃집 여자와의 관계에서 자기 욕망을 발견해 나가고, 자신 속에서 동정과 슬픔, 연민의 힘을 조화롭게 뽑아내는 법을 깨달아간다. 그리고 그토록 풀어보려 했던 비밀들, 즉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풀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마침내 그는 “ 몇 분 후에 절망적인 친지들은 재앙에 대항하여 슬기롭고 영리하게 자신들을 대신하여 싸워주고 또 쉽게 패배할 것 같지 않은 동맹군이 여기 있다는 신비한 감정으로 벅차올랐다.” 고 조용히 독백을 외친다. 어둠이 순간적으로 밝아지는 흔치 않고 예상치 않은 순간을 맞이하는 요엘이란 중년 남자의 환한 얼굴이 떠오르고, 내게도 “은밀하게 가물거리는 빛이 다가오기를 희망”해 본다.

 

삶의 기쁨을 알지 못하고 지낸 것이 꽤 오랜 시간인 듯하다. 그러니 욕망도, 연민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 할 터. 병원 봉사활동에서 투명한 기쁨을 온 몸으로 발산하는 요엘을 통해서 삶의 비밀을 모두 알아 버린 것만 같은 넉넉해진 마음을 갖게 된다. 기억과 현실의 일상이 뒤얽긴 독특한 서술구조로 인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가 실루엣 뒤의 무언가를 기대케 하여 읽기를 주저치 못하게 하는 기교는 가히 약이 오를 정도로 대단하다. 그러나 결코 뚜렷한 형상은 그려 내지 않는다. 'W.G. 제발트'의 『이민자들』의 문체를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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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안다는 것 :: 아모스 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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עוז עמוס :: לדעת אישה  나는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가 극도로 싫었다.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는 상관없이 일단 유대인 특유의 선민 의식이 언짢았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자행하는 만행과 그것을 '하느님의 심판' 이라며 운운대는 뻔뻔스러움에 분노마저 치밀었다. 재작년 겨울, 미국의 원조를 받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민간인 거주 지역에 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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עוז עמוס :: לדעת אישה

 
나는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가 극도로 싫었다.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는 상관없이 일단 유대인 특유의 선민 의식이 언짢았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자행하는 만행과 그것을 '하느님의 심판' 이라며 운운대는 뻔뻔스러움에 분노마저 치밀었다. 재작년 겨울, 미국의 원조를 받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민간인 거주 지역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을 때엔 도저히 참고 앉아 있을 수 만은 없어, 종각에서 개최한 이스라엘 규탄 대회에 참여해 이스라엘 대사관이 있는 청계천 거리까지 행진을 하고 구호를 외쳤지만, 모기 소리보다 작은 우리의 외침은 (무기도 팔고 자기네 마음대로 조종하는 일석이조를 얻어 아쉬울 게 없는) 미국의 교활함과 자기네들만이 옳다는 이스라엘의 교만, 그리고 다른 나라의 정치 사정에 무관심한 시민들의 냉대로 안그래도 추운 날씨에 소규모의 우리들을 더 쓸쓸하게 만들기만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이스라엘 대사관 앞 1인 시위는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나마 그런 이스라엘에 대한 적개심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려준 건 바로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였다. 그의 이력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옹호와 반전 단체의 소속이라는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작품에서 읽혀지는 그의 사상이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라는 1%의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그가 여전히 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 국적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비운의 작가' 라는 안타까움마저 들 만큼, 이스라엘은 이런 자국민 작가라도 있다는 것에 진정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고보면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중엔 자국에서 배척받는 이가 꽤 있다. 작년의 수상자 헤르타 뮐러가 그렇고, 아예 입국을 거부당한 오르한 파묵의 경우도 있다. 아모스 오즈가 좀더 직설적인 소설을 써서 조국에 냉정한 비판을 한다면, 그 역시 추방과 함께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게 될까?)

그러나 호전적이기보다 조용하고 세심한 그의 필체는 국적을 떠나 인류 보편적인 문제에 대해 쓰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다. 이 작품 [여자를 안다는 것] 역시 비단 이스라엘에서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상과 인물, 그리고 그 사이의 갈등을 그려내고 있어서다. 제목은 [여자를 안다는 것] 이지만 정작 책의 내용으로 보자면 [가장으로서의 남자의 존재] 라는 부제가 붙어도 그럴 듯한 내용이다. 3인칭 시점이기는 해도 주인공인 중년 남성 요엘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 되는데, 제목에서 상상될 만큼 많은 여자가 그의 주변을 오가는 것도 아니고, 요엘이 인식하는 여자란 자기 아내와 딸, 어머니와 장모, 그리고 이웃집 여자 정도가 전부다. 어쩌면 그렇게 가까이에 있는 여자조차 '알기 어렵다' 가 내포된 제목인 셈이다.

중요 직책은 아니지만 국가 정보 요원으로 암호 해독일을 했던 요엘은 일 때문에 집에 있는 날보다 바깥에 있는 날이 더 많았고, 아내가 의문의 죽음을 맞고서야 모든 일에서 손을 떼며 뒤늦게 딸이나 어머니들에게라도 잘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 일에 매여 있었던 그는 강박적으로 모든 대상과 사물에 암호가 있는 마냥 그것을 풀어내고 이해 하려는데 전전긍긍하고, 그것이 오히려 어머니나 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아내를 사랑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아내는 유서 한장 없이 죽어버렸고, 어머니께 효도한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서운하다는 반응만이 돌아오며, 무엇보다 최선을 다해 돌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딸은 아버지에게 이해 받기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나마 연민 정도만을 돌려준다. 이러한 상황에 요엘은 자신이 더 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 혼란에 빠진다.

자포자기 하듯 그는 비단 '여자' 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리며 자신만의 고독 속으로 침전한다. 사람들과 '관계' 를 맺어도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적당히 그들이 좋아할만한 행동으로 비위를 맞추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거부했던 정부의 일을 다른 이가 대신하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죄책감에 죽은 동료의 부친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은근히 그가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기를 바랐지만 된통 호통만 맞고 쫓겨나고 만다. 요엘은 자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데 왜 세상은 자기 마음 같지 않은지에 대해 슬픔을 느끼지만 그의 주변인들은 그런 요엘을 안쓰러워 하며 그가 깨닫기를 바란다. 요엘이야말로 '자기 스스로를 모른다' 는 것을. 그리고 그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공감하는 능력' 이라는 것을.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죽자살자 일에만 매달려 왔던 가장이, 어느날 집에 돌아와보니 가족의 냉대나 무심함 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어 허탈한 말년을 보낸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한 소재다. 어쩌면 전세계적으로 이런 아버지들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책 제목을 차라리 '아버지를 안다는 것' 혹은 '남자를 안다는 것' 으로 써도 좋았을텐데, 오즈는 왜 굳이 '여자를 안다는 것' 이라는 제목으로 에둘러 말했을까. 이 부분은 여자인 나보다 남자들이 더 '알 것 같다' 고 할 것 같지만, 내 추측으론 '여자를 안다는 것' 이라는 말을 택한 건 그쪽이 훨씬 '남자(아버지)' 의 고독과 슬픈 초상을 부각시켜 주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발생하는 이 책의 딜레마는 '이스라엘의 부재' 다. 여기엔 아모스 오즈라는 한 개인의 심상이 있을 뿐, '이스라엘인으로의 아모스 오즈' 나 '아모스 오즈를 통해 보는 이스라엘의 현재' 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 무대를 어디로 옮긴다 한들 상황이 그다지 어색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개인적으로 <이스라엘을 알려면 아모스 오즈를 읽어라> 라는 말에는 바로 동의할 수가 없다. 차라리 <이스라엘을 알려면 노암 촘스키를 읽어라> 라는 주장에 더 납득이 간다. 아직 그의 전작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번역된) 그의 가장 정치적인 소설이 <지하실의 표범> 이라는 것으로 봐서 그는 매우 온건한 작가인 편인 것 같고, 그래서 다소 아쉬운 마음이 든다. 오즈야말로 현대의 이스라엘을 통렬히 써낼 수 있는 작가가 아닌가? 나는 용감히 '고발하는' 아모스 오즈, 혹은 포스트 아모스 오즈를 읽고 싶다. 

 

YES마니아 : 로얄 q****e 2010.07.18.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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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사색의 미묘한 화음
"일상과 사색의 미묘한 화음" 내용보기
여자를 안다는 것/아모스오즈/최창모/열린책들/2009 이 책은 저에게 두 에술가를 생각나게 했는데요 이 책에도 자주 언급된 댈러웨이 부인 이라는 소설을 쓴 버지니아 울프와 좀 엉뚱하다 싶기도 하겠지만 조지아 오키프 입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생각나는 것은 댈러웨이 부인이 자주 언급되는 것 뿐 아니라 이 책의 기법에 특별히 의식의 흐름이라던 가 그런 건 없다 하더라도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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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안다는 것/아모스오즈/최창모/열린책들/2009

이 책은 저에게 두 에술가를 생각나게 했는데요

이 책에도 자주 언급된 댈러웨이 부인 이라는 소설을 쓴 버지니아 울프와

좀 엉뚱하다 싶기도 하겠지만 조지아 오키프 입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생각나는 것은 댈러웨이 부인이 자주 언급되는 것 뿐 아니라 이 책의 기법에 특별히 의식의 흐름이라던 가 그런 건 없다 하더라도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로 자꾸 돌아가 생각하는  주인공의 길잃은 마음 때문이겠지요. 

조지아 오키프가 생각난 것은 자잘한 일상의 행동들, 우리가 잘 모르지만 주변에 널린 생물들(특히 식물들)과 사물들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가의 뛰어난 묘사력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이 제대로 느껴질 만큼 풍부한 어휘력을 자랑하고 있는 그의 묘사는 작은 정물들을 아주 크게 확대해서 그렸던 조지아 오키프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의 묘사는 바로 드라마로 찍어도 될 만큼 정확하고 그럼에도 장황하지 않아서 한자한자 꼼꼼히 읽고 있는 저 자신에게 놀랄 정도 였습니다.

제목이 왜 여자를 안다는 것일까.

사실 절대 여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거든요. 그저 자신 주변에 있는 여자들. 어머니, 장모님, 딸과 죽은 아내. 그리고 관계를 맺은 이웃집 여자. 그리고 살면서 만난 여자들의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요.

이야기는 격정적이지도, 놀랍지도 않지만 비범하지 않은 직업을 은퇴한 이에게 남겨진 일상의 까다로움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영어권 소설을 제외하고 열심히 한번 읽어보자 하면서 고른 책 중의 하나 였는데 묘한 매력이 가득한 책입니다. 그래서 유명하다는 '나의 미카엘'도 읽어볼 생각이에요.

또 다른 좋은 선택이었기를 기대하면서..^^

r*******n 2013.03.2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