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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의 원인은 만주족이나 다른 기인들에게 팔기 외에 중국이라는 또 다른 고향이 생겼기 때문.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청조언어정책의 주요 관심사는 만주족의 한어실력에서 만주족의 만주어 실력으로 바뀌었다. 특히,농담할 때에도 한어를 사용했다. 북경 황자들의 저택에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는 한어뿐이었다. 여진이 정권을 잡은 배경 이자성과 명군의 한 판 승부에서 기회를 잡은 만주족 참고도서 - 황하에서 천산까지 대쥬신을 찾아서 중국 없는 세계 거란 제국사 연구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여진에서 만주족으로 이름이 바뀐 이유, 팔기는 만주족의 제도적 기반이자 청조통치의 핵심이었다. 그땐 책 한 권 읽는다는 느낌으로 읽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으니 빠뜨리고 읽은게 너무 많았다. 작심하고 차근차근 읽는다. 학창시절배운다 북방의 많은 민족이 중국에 녹아들었지만 우리는 꿋꿋이 민족을 유지했다고 그리고 소중화사상만 줄기차게 가르친다 예로 중국의 마괘자가 마고자가 되었다는데 이 마괘자는 여진,몽골의 북방민족의 옷이었지 중국인의 옷이 아니다. 이이제이 했다고 좋아하지만 우리가 중국에게 이이제이 당하고 있는 줄은 모른다. 동이족하면 동쪽오랑캐인 한국을 지칭하는 말이며 이족하명 오랑캐 북방민족을 가르키는 말인줄 안다 좀 앞뒤가 안 맞는다. 원외근공 먼오랑캐와는 화친하고 가까운 오랑캐는 쳐부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때 '일본해'표기를 그래서 쓴 것인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니 안타깝다 그리고 본론인 팔기제로 넘어가보자 팔기제는 제국을 수립하는 도구로써 유연성을 갖고 있었다. 만조족은 중화에 녹이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많은 제도를 만든다. 노력도 기울였지만 그 자손들에게 만주가 아닌 중화라는 또 하나의 고향이 생겼기에 그들은 태평천국의 난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된다. 요와 마찬가지로 덕치로써 제국을 다스렸기에 인구가 증가하고 국부가 융성할 수 있었다. 무엇을 얻으려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버려야하는데 모든걸 손에 쥐려고만 했으니 만주족은 주저 앉은게 아닌가 싶다. 권력남용이 민족이 다르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민족간 마찰은 만주족의 민족주권이 대가이자 증거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민족이 원인이었던 것이 사실이라고해도 한인중에 몇이나 만주족을 비난할 용기가 있었겠는가?
첫 번째 읽는다.
남경과 항주의 만주족 공동체가 도륙되었던 태평천국운동 만주족의 기원은 엉쿨런, 정쿨런, 퍼쿨런이라는 세 선녀의 전설에서 시작한다. 아이신자오뤄 뿌꾸루융순은 경주 김씨 김함보의 5대손으로 바로 이분이 그들의 시조 퍼쿨런이시다. 12세기 금은 팔기제와 매우 유사한 군사,사회조직인 맹안모국을 만들었다. 1635년 11월 만주라는 새로운 이름이 종래의 여진을 대치했다 여진의 정쳇헝에서 공통적으로 부를 수 있는 명칭인 새로운 호칭인 만주가 탄생한 것이다. 1700년대 중반부터 만주족의 재혼풍습이 사라지고 한인과 만주족의 관습이 일치되어 똑같이 과부의 정절이라는 규범을 모두에게 적용시키기 시작했다. 팔기는 만주족의 제도적 기반이자 청조통치의 핵심이다. 마지막 황제 푸이는 할 줄 아는 만주어가 일리 즉 일어서라는 말 뿐이었다.
시버와 솔론은 18세기 신강 원정에서 탁월한 전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나고 신강을 병합키 위해 수천명이 영구주둔 임무를 띠고 가족과 함께 파견 현재도 4만명가량의 시버족은 자신들이 만주족이거나 자신들의 말이 만주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현재 지구상에서 만주어를 말하는 마지막 사람들이다.
작가는 만주족의 정체성을 아주 세밀하게 파헤쳤지만 그는 고구려와 발해 한국의 자료는 모조리 무시하고 오로지 중국과 일본 서양의 자료만을 살핀 오류를 범해 옥의 티로 남는 저서로 남았다. 또 만주족이 자기들의 뿌리를 잃어버리고 중국민족에 흡수된 것은 중국을 지배한 여진족의 후손들에게 또다른 고향이 생겼기 때문이다. 새로운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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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구의 주류인 한족에 비하여 350분의 1로 소수 민족 이었던 만주족이 300년 동안 거대 제국 청을 유지할수 있었던 이유를 한번 알아 보겠습니다
청 보다 먼저 중국을 지배 하였던 몽골족의 원제국은 내부 분열로 100년을 버티고 중국인의 명나라에 자리를 내 주었는데 만주족의 청제국은 초기 강희,옹정,건륭 3대 황제의 전성기 를 100년을 유지하고 이후에 서태후의 세계 정세를 인식하는 능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제국을 서양 식민주의자 들에게 분할이 되는 수모를 당하고 한족인 손문의 개혁 운동으로 제국의 막을 내렸지만 원 나라와는 틀리게 청 나라 시기에는 다수의 한족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살았다는 인식이 있는데 그 이유는 인구의 폭팔적인 증가를 들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책은 그러한 청제국의 전반적인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만주족의 구성원을 이루고 민족적 모습을 유지하게 만들어준 팔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청제국의 팔기는 만족 팔기 , 몽골 팔기 , 한족 팔기로 나누어 지는데 이러한 구분은 만주족을 한족에게 동화 시키어서 민족의 뿌리를 없애지 않기 위한 하나의 방식으로도 사용이 되었고 군사적 운용을 위한 군사제도로 이용 되었습니다
만족 팔기의 구성은 만주에 살던 건주,해서,야인 여진을 주 구성원으로성립 되고 한족 팔기는 원래 변방에 살던 한인과 전투로 인한 포로들과 항복한 한인을 주 구성원으로 성립이 되어서 하나의 사회적 특권 계층으로 황실의 보호와 관심을 받으면서 팔기만 모여사는 분리적 정책을 사용 하였는데 그 이유는 유약한 한족 문화를 받아 들여서 간겅한 팔기의 문화를 침식 시키지 않기 위한 고유 지책으로 작용을 하였습니다.
팔기의 주둔지는 수도인 북경을 중심으로 변경 지방의 국경선을 위주로한 곳과 수로를 중심으로한 경재와 교통의 요지에 군사 주둔지를 두어서 한족의 반란을 막고 청 제국의 강건함을 백성들에게 심어주기 위하여 이러한 방식을 사용 하였는데 팔기 의 지방 주둔지는 한인과의 유대를 줄이기 위해서 만성 이라는 이름의 주둔지를 만들고 그곳에서 생활을 하게 하였다.
팔기의 지방군은 주방으로 불렸는데 그곳의 수장인 장군은 황제와 주첩을 이용한 대화가 가능 하여서 그 지방의 많은 정보를 황제 에게 보고 하는 역할을 하였고 그 지방의 민간 관리와 협력을 하여서 많은 일도 하면서 만주족의 기상을 한인들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하였다
기인은 나라에서 월급을 주고 대를 이어서 기인으로 살면서 나라의 군사를 담당 하였는데 18세기로 들어 서면서 많은 숫자로 늘어난 기인으로 인한 나라의 재정 압박이 강하게 작용 하였다 전쟁이 없어지고 나라에서 생활을 보장 하자 많은 기인들은 나태 해지면서 제국의 군사력도 떨어지는 영향을 주기 시작 하였다.
제국의 경제력에 비해서 많은 돈이 기인들을 보살피는 용도로 나가자 황실에서는 대책을 강구 하여서 한인 팔기를 없애는 조치를 취하고 만족,몽골 팔기의 지원을 강화 하여서 만주족이라는 민족을 보존 하기위한 많은 노력을 하였다
기인들은 많은 곳에서 한화를 하였지만 청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만주족이라는 민족을 구성 하는데 기인들은 많은 공로가 있다
이책은 건륭제 까지의 팔기 문화를 다루고 있는데 이러한 팔기를 유지 하고 지키기 위하여 황제가 노력한 많은 행동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황제들의 노력이 청을 300년동안 안정적으로 유지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만주족 이라는 민족성을 구하는 벙편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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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후의 제국이자, 북방 민족인 만주족이 한족을 정복하고 세운 최후의 정복 국가였던 청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