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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이 곳에 글을 남기지 않으려 하였다. 허나 '움직임의 이유는 언제나 분노'라는 진리를 다시한번 깨달으며 한번 더 이곳을 찾게 되었다.
경향신문의 북칼럼을 통해 알게 된 이 책은, 그래 경향신문이었다. 당신네들이 자금적으로 힘들다는 건 알고 있지만 약간의 성실. 그러니까 실제로 책을 읽은 후에 추천만 했어도 내가 이리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향신문의 북칼럼을 통해 알게 된 이 책은,
오랜만에 아주 지독한, 뉴라이트가 New Right가 아니라 New Light라 우기는 뉴라이트보다 더 지독한, 악취를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번역문을 선사해주었다. 몇년 전 폰노이만에 대한 잡설을 똥번역했던 그때의 그 글보다 더 지독한, 정~말 지독한 악문이었다.
경북대 철학과 교수라는 사람들이, 그대들의 이름은 이상환, 김지현이다, 그러니까 대학생을 가르킨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토록 비루한 언어능력을 펼칠 수 있는가.
우리나라에 영어 잘하는 사람 많다 하지만 한국어 잘하는 사람은 몇이나 있는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 그대로를 100% 옳게 설명해 낼 수 있는 사람 몇이나 있는가?
이 책의 번역자이자 교수들에게 내 한마디 충고하겠다. 이제부터 영어 좀 한다거나 번역을 해보겠다거나 꿈도 꾸지 마라. 우선 한국어 공부부터 해라. 철학 말고~ 한국어 공부부터 해라.
그 첫번째는 좋은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그리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고 많이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그런 교수들 많다. 내 이해한다) 그냥 번역하지 말고 영어 책 원서 그대로 읽어라. 알겠느냐? 너희들이 얼마나 훼손을 시켰는지 본래의 책이 얼마나 좋은지 나쁜지조차 감잡을 수가 없다.
쓸데없이 하드커버책 만들어서 정가 18,000원으로 올려받지 말고 우선 한국어 공부부터 하란 말이다. 돈이 아까워서 어떻게든 한 문장이라도 구해보려 꾸역꾸역 읽다가 내 국어 실력만 더럽혀졌다.
이것은 그야말로 화나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상환, 김지현 당신들 나에게 죄를 졌다. 내 돈을 뺏고 내 시간을 뺏고 내 기쁨을 뺏고 내 능력을 떨어뜨리고 본 저자를 모욕했다.
이제 당신들이 어떤 악문들을 토해냈는지 예를 보이겠다. 찾기는 매우 간단하다. 서문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페이지도 빼놓지 않고 스스로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오늘날 정치적, 사회적 쟁점들은 서로 다른 집단을 포함하는 이질적 정체성들의 충돌이 초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정체성 관념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우리의 사고와 행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고립주의적 접근은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을 오해하기 딱 좋은 방식일 수 있다...
우리시대의 화합에 대한 바람은 인간 정체성의 다윈적 성격을 더욱 명료하게 이해하는 데 상당 부분 달려 있다. 넘나들 수 없는 단 하나의 확고한 분리 선으로 첨예하게 갈라지는 것에 저항해 서로를 가로지르면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다원성임을 인식해야 한다."
본문도 보자. 시작하자 마자 시작한다. "한가지 얘기를 하자면, 정체성이 폭력과 테러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풍부함과 따뜻함의 원천일 수도 있으므로 정체성을 단순히 일반적인 악처럼 다루는 것은 이치에 별로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호전적인 정체성이 일으키는 폭력은 그 정체성과 '경쟁하는' 다른 정체성들이 만들어내는 힘으로 저지할 수 있다는 이해를 끌어들여야 한다. 그런 경쟁적인 정체성들에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인간성이라는 폭넓은 공통성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사람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다른 수 많은 정체성들도 포함된다. 이는 사람들을 분류하는 다른 방식으로 이어질 것이며, 그런 방식은 하나의 특정한 범주화를 특별히 공세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제지할 수 있다."
이해가 가는가? 맥락이 없기 때문에 이해가 어려운 것 같다고? 아니다. 이 책은 맨 앞의 짧은 추천문들을 제외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저런 식이기 때문에 맥락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 내 머리가 나빠서 그렇다고? 글을 깨우치고 난 후 단 한번도 책과 떨어져 살아본 적 없는 활자 중독 인간인 내가 과연 머리가 나쁘다면 얼마나 나쁘기에 조금도 이해를 하지 못했을까. 그것에 대한 답은 못하겠다. 하지만
자연, 인문, 사회, 문학에 대한 수많은 번역책을 읽어왔던 나 조차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다른 그 누구가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에도 대답하지는 못하겠다.
결국 주관적일지라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저 문장들을 검토해보자면 그것은, 컴퓨터 번역기 수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결론이다. 이 책의 번역자들은,
번역을 한게 아니라 컴퓨터를 돌렸거나 졸면서 번역을 했거나 또는 정말 지능이 부족해 반역을 한 것이다.
"야만적으로 조작된 정체성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이것이 이 책의 표어이자 모든 것일 뿐 아니라 유일하게 사람말로 번역된 문장이다.
재번역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진정으로 이 책이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심정으로 글을 남긴다. 그리고 이상환, 김지현 당신 2명 기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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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서의 주제는 많은 사람들이 심정적으론 거부할 지라도 이성적으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평이한 것이다. 동일한 문구가 여러번 반복되는 것은 큰 불만이다. 제대로 요약했더라면 절반 정도의 분량에 압축적이면서 효율적으로 주제를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폭력을 조장하는 무슬림에 대응하는 개념인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도 저자는 잘못된 범주화로 지적한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종교의 영역을 최소화하였는데 동의를 구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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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사람을 무명이나 종교에 따라 분할하는 것은 인간을 정확히 한 집단의 일원으로만 간주하는, 인간 정체성에 대한 고립주의적 접근을 낳는다.
다원적인 정체성
독보적인 정체성(대개는 호전적이다)을 갖게 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의식이 길러지면 폭력은 더욱 조장된다.
세계의 무수한 갈등과 만행은 선택이 불가능한 독보적인 정체성이라는 환영을 통해 유지된다.
환원주의는 하위 정치에 주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정체성에 기반한 사고에서 이성적 추론과 선택의 역할을 인식해야 하는 필요성은 엄중하고 극히 중요하다.
상상된 단일성(imagined singularity)
분류적 우선 순위가 발휘하는 분열의 힘은 사람들을 엄격히 분리된 단 하나의 상자 세트 속으로 밀어 넣는다.
단일한 분류 방식이 독보적으로 적절하다는 가정을 미리하는 것이다.
우리들 내의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갑자기 사람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종교와 문명의 연합체로 간주된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주의를 끌기 위해 경쟁할 수 있는 상이한 귀속 체계들에 대해 이성적으로 사고할 능력을 갖추기 전에 단 하나의 소속 관계 영역 속으로 강하게 떠밀리고 있다.
광의의 정치적 언어로 "진정한 무슬림"이란 무엇을 정의하려고 드는 것이 정말 필요한지, 아니면 그런 정의가 유용하지 심지어 가능하기나 한지 질문해 봐야 한다.
무슬림들도 전 세계의 다른 모든 사람처럼 다양한 일과 취미가 있으며 우선 순위와 가치의 측면에서 그 정부를 이슬람이라는 단일의 정체성 내로 한정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정체성 발견론자들이 추정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미 자리 잡은 장소나 소속 관계 속에 갇혀 있지 않다.
혹독한 발견이 이루어질 때조차 중요한 선택은 이루어져야 한다. 삶은 단순히 운명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문명론적 접근은 단일 범주의 추정에 의존하는 것이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 외에도, 동일시된 각 문명 내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결함을 안고 있기도 하며, 개별 문명들 간의 광범위한 상호 관계를 간과하는 단점도 있다.
문명의 충돌에 대한 헌팅턴의 설명은 인도가 인도네시아 및 이웃 나라 파키스탄을 제오히고 전 세계에서 무슬림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라는 사실을 경시했다.
민주주의가 서구의 것이라는 소유적 믿음
종교적 정체성과 대립되는 정치적, 사회적 정체성들을 경시할 때 항장 패자가 되어왔던 쪽은 바라 시민 사회 그 자체다.
아시아적 가치? 이슬람의 이상?
단순한 문화적 일반화가 우리의 사유 방식을 고착시키는 데 대단한 효과를 발휘한다.
문화적 요인이 발전 과정과는 무관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문화적 요인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영향과 분리되어 작동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들과 접촉하고 그들 나라의 경험을 습득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큰 변화를 가져오는 상호 작용적 과정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아직까지 이성적 추론과 선택의 기회가 많이 없었던 아이들을 하나의 특정한 범주화 기준에 의해 엄격하게 분류하는 것은,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이것이 네 정체성이고 네가 갖게 될 정체성은 이게 정부"라고 말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나는 세계화가 전반적으로 새롭지도, 반드시 서구적이지도 않고 저주 역시 아니다.
다문화주의(multiculuralism)와 다원적 단일문화주의(plural monoculturalism)
서구 과학이나 문화의 뿌리가 가령 중국의 기술 혁신들, 인도와 아랍의 수학, 또는 서아시아의 그리스 로마 유산 보존(예컨대 잊힌 그리스 고전의 아랍어 번역본들은 수 세기 뒤에 라틴어로 다시 번역되었다)에 의지하고 있다면, 과거의 왕성한 상호 작용에 대해 현재 다민족 영국의 학교 교과 과정에 담긴 내용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이 반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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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어떤 인물은 널리알려진 그 명성보다 과대평가 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책 읽는 밤'이라는 독서토론 프로그램에서 접하게 된 아마르티아 센의 책. 그의 이름은 이미 <권력의 병리학>에서 접했다. 이 책 서문에서 만난 센과 <정체성과 폭력>에서의 그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이제껏 내가 당연시 생각하고 있던 나의 정체성. 그 안이함에 일침을 가한 그의 주장. 내가 선택하는 (이성적 추론으로) 여러가지의 정체성. 나는 다차원적 상호교류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다중적 정체성을 가진 인간이다.
종교, 문화적으로 인간을 분리하는 고립주의적이고 일차원적인 범주의 구획. 이는 너무나 유치하고 단순한 갓난아이의 장난과도 같다. 전과 같았다면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다.
센의 주장. 그 근저에는 무신론적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인간은 개인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가 주장해야 한다는 것. 환경과 현상을 이차적인것으로 보고, 인간의 이성을 신격화 시킨다. 인간의 이성은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이성적 추론과 선택은 100% 옳은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 모순된다. 종교 이상의 정체성, 직업, 정치적 입장, 언어 등의 정체성이 있다. 하지만 종교 외의 정체성, 그 외의 것은 단일화 시키지 않을 수 잇단 말인가? 종교와 문화적 정체성 외에 국가적, 인종적 정체성은 단일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인가. 어쨌든 인간이 선택하면 격국 그것도 가장 중요한 정체성으로 단일화 된다.
그도 그가 부정하는 서구적 지식인일 뿐이다. 빈곤에 대한 정책과 세계적 노력에 대해 약간은 부족한 듯 하다. 제대로 그들의 사정을 알고는 있는지 의문이다. 같은 기회를 주기 위해 (빈곤한 노동자 등 약자에게) 세계화를 옹호하는 그의 말이 맞는 듯 보이지만 그것도 하나의 선동적 이론일 수 있다. 바로 그가 부정적으로 주장하는.
몽롱한 상태에서 읽은 책이라 드문 드문 정신이 나가 제대로 읽지 못한 부분도 있다. 결과적으로 매우 추상적이었고 약간을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어느 정도 사고의 전환에는 감동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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