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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동남아시아 교류사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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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의 교류 역사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에 어떠한 교류가 이루어져왔는지를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어요.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역사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알고 있었던 지식들도 새로운 시각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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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의 교류 역사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동남아시아 간에 어떠한 교류가 이루어져왔는지를 흥미진진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어요.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역사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알고 있었던 지식들도 새로운 시각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어서 좋았습니다.

r******w 2010.01.1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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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동남아시아의 교류사(조흥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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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동남아시아의 교류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것은 일본 사료인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6-7세기 백제와 동남아시아의 접촉, 그리고 당의 승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과 신라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당의 승려 혜림의 일체경음의에서 엿볼 수 있는 7-8세기 한국의 불교 승려들의 동남아시아 여행 등에 나타난다. 35   백제는 4세기 후반 중국 동진과 교류할 때 그리고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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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동남아시아의 교류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것은 일본 사료인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는 6-7세기 백제와 동남아시아의 접촉, 그리고 당의 승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과 신라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당의 승려 혜림의 일체경음의에서 엿볼 수 있는 7-8세기 한국의 불교 승려들의 동남아시아 여행 등에 나타난다. 35

 

백제는 4세기 후반 중국 동진과 교류할 때 그리고 5세기 후반 중국 북위와 접촉할 때 횡단로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인다(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사계절, 2001, 663-674). 37

 

가을 9월에 백제의 성명왕은 전부 내솔 진모귀문과 호덕 기주기루 그리고 물부 시덕 마기모 등을 보내어 부남 산 물품과 노예 2명을 바쳤다.

 

부남은 현 캄보디아 남부와 베트남 남부의 코친차이나 지역에 걸쳐 있었던 나라였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던 부남은 옥에오 항구를 중심으로 남중국해의 중계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 양서에 따르면 부남은 비옥한 메콩강 델타의 농업 자원 외에도 금 은 구리 주석 침향 상아 등을 생산했다. 부남의 옥에오 유적에서 2세기에서 5세기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 산 반지 그리고 비쉬누, 시바 등 인도 신들이 새겨진 주석 호부 등이 발견되었다. 152년경에 제작된 로마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금박 휘장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주화가 출토되었고 후산 시대 중국의 청동거울 파편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옥에오가 한 때 인도와 중국 뿐 아니라 유럽과 중국의 교역에서 중요한 중계항이었음을 말해준다. 46

 

백제가 부남의 물품과 노예 2명을 일본에 선물한 543년은 부남이 크게 약화되어 쇠퇴 일로에 놓여 있던 6세기 중엽의 시점과 일치된다는 점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47

 

백제 승려 겸익이 526년에 인도에 간 것도 백제와 중국의 교역 관계 그리고 중국과 동남아시아 및 인도 사이에 해상 루트를 통한 교역 관계가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56

 

5세기 초 동진의 승려 법현은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올 때 믈라카 해협 혹은 순다 해협을 통해 말레이 반도 남단이나 보르네오 섬의 서부 연안에 도착한 후 거기서 동남아시아의 항구에 들리지 않고 남중국해를 지나 곧장 광둥성의 광저우로 왔다. 57

 

임읍은 현 베트남 중부 및 남부 일대에 있었던 참파 왕국을 가리키며, 진랍은 부남을 멸망시킨 크메르족의 나라로 오늘날 라오스 남부와 캄보디아 일대에 있었다.

 

곤륜의 사실이 일본까지 온 것은 일본에 대한 모종의 상업적 목적때문이었다. 백제가 일본의 무역 시장에 곤륜이란 새로운 나라가 끼어드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그 사신을 바다로 밀쳐버렸다. 64

 

당의 의정이 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아리야발마 법사, 혜업 법사, 현태 법사, 혜륜 선사와 익명의 두 사람 등 모두 7명의 신라 스님들이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인도에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65

 

8세기에도 한국인으로서 중국에 공부하러 간 불교 승려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인도로 구법 순례를 떠난 이들이 종종 있었으며, 그러한 인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혜초가 있다. 신라에서 704년경에 출생한 혜초는 719년에 중국에 가서 불교 중에서도 특히 밀교를 공부했다. 그는 723년에 당시 중국 남부의 최대 항구였던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의 바닷길을 통해 인도양 벵골만의 서북부 연안에 위치해 있었던 동천축국에 도착한 후 인도의 여러 지방과 오늘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등을 여행했다. 그는 727년에 중국의 신장성을 통해 수도인 장안에 돌아온 후 780년에 입적할 때까지 중국에 머물면서 밀교 경전들을 번역하고 연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67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프랑스의 폴 펠리오라는 한 동양학자가 중국 간쑤성의 둔황의 한 석굴에서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발견된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쓴 원래의 여행기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 사실은 8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당나라에서 활동한 혜림이 편찬한 일체경음의를 통해 드러났다. 혜림의 일체경음의를 통해 알 수 있게 된 또 다른 중요한 것은 혜초가 중국에서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를 거쳐 인도로 갔다는 사실이다. 67-69

 

의정은 689년에 광저우에서 중국 승려 네명을 데리고 다시 스리위자야에서 가서 694년에 그 곳에 체류하면서 이들로 하여금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게 하고 자신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역잡경론, 남해기귀내법전 등을 집필했다. 고병익은 혜초가 의정의 저술들을 읽었을 것이며 그 책들에 나와 있는 의정의 행적을 따라 스리위자야에 들러 그곳에서 몇 달 혹은 1-2년 체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한다. 71

 

 

삼국 및 신라 시대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교류에서 그 흔적이 가장 분명한 것은 7-8세기 인도로 갔거나 가려던 불교 승려들의 동남아시아 여행일 것이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중국을 거쳐 바로 동남아시아 및 인도로 간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장기간 체류하다가 중국 승려들이 당시 인도로 갈 때 취한 뱃길을 따라 동남아시아 혹은 인도로 갔다. 72

 

베트남 사람들의 한국 이주는 훨씬 전부터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인 13세기 초 베트남의 왕족이 한국에 와서 화산 이씨를 창건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화산 이씨의 시조인 이용상이 베트남이란 것이 밝혀지면서 한국과 베트남의 언론과 학계는 이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최근에는 정선 이씨도 고려 시대인 12세기 초에 한반도로 이주해온 이양혼이라는 베트남 왕자에 의해 세워진 집안이라는 학설이 등장했다. 또 막씨도 14세기 초에 고려를 방문한 베트남인이 그 선조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되었다. 76

 

섬라곡 혹은 중국어로 셴뤄후는 태국의 옛 명칭인 시암을 가리킨다. 셴뤄후는 셴뤄와 더불어 중국의 명사와 명실록에서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을 지칭하는 국호로 사용되었다.

 

섬라곡은 당시 고려 정부에서 낯선 이름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정부는 공민왕 때인 1373년에 중국에서 돌아온 사신의 보고를 통해 섬라곡이 점성 즉 참파, 안남 즉 베트남, 조왕 즉 자와, 발니 즉 브루나이, 삼불제 즉 스리위자야, 진랍 즉 캄보디아 등과 함께 중국에 빈번히 조공 사신을 파견하는 중국 번방의 나라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114

 

아유타야 왕국의 역사에 따르면, 건국 초기부터 중국과 긴밀한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 중국 사료들에 의하면, 아유타야 정부는 이미 14세기 말이 되면 중국과 적극적인 조공 무역을 하고 있었다. 태국 정부는 왕국의 해외 무역 특히 중국 무역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중국인들을 왕실 무역의 대리인, 선장, 항해사, 선원 등으로 기용했다. 왕실 무역을 위해 기용된 중국상인들은 동시에 사적인 무역에 종사하기도 했는데, 특히 이 점은 나이공의 정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측면이다. 나이 공을 태국 왕실 무역선의 한 선장이자 사무역 상인이다. 14세기 후반부 태국과 류큐 왕국의 무역 관계 가능성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은 일본에 도착하기 전 류큐 왕국에 들러 무역했을 수도 있다. 123-124

 

나이 공 일행은 처음부터 한국을 목표로 태국을 출발한 것이 아니었으며, 고려까지 오게 된 것은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의 무역 활동의 부산물이었다.

 

섬라곡 왕국은 그 신하인 나이 장사도 등 20명을 보내와 소목 1천 근과 속향 1천 근 그리고 토인 2명을 바쳤다. 왕은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궁궐 문을 지키도록 명령을 내렸다. 128

 

야유타야 왕국의 정부와 특히 태국의 화상들은 이러한 조선 정부의 비적극적인 자세와 조선 시장에 대한 접근에서의 위험성 때문에 한국과의 교역에 대한 관심을 잃고 더 이상 한국으로 사신을 파견하거나 방문하지 않았다. 139

 

한국과 자와 섬의 교류는 무엇보다도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의 무역에 대한 자와 섬의 고대 왕국의 관심과 특히 자와 섬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화상들의 상업적 이해관계라는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43

 

공진의 관찰에 따르면 마자파힛 왕국의 사람들은 중국산 도자기와 비단을 좋아했으며, “끊임없이 토산물을 수집하여 중국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마자파힛의 국왕들은 국가의 수익사업으로 해외 무역을 중시했으며, 많은 상인들이 왕실 무역을 위해 활동했다. 145

 

한국과 자와 섬의 교류가 15세기 초 이후 계속 발전하지 못한 데 있어서의 왜구의 위협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146

 

한국의 해외 무역 활동은 고려 시대초기부터 정부의 적극적인 해외 무역 정책에 힘입어 특히 한국과 중국의 서해 항로를 통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던 것이 고려 말기에 이르러 고려 정부가 한반도 서남해 지역의 해상 세력을 이들이 원의 지배에 저항한 삼별초 세력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탄압하는 과정에서 섬에 주민이 살지 못하도록 한 이른바 공도 조치를 시작한 이후, 한국인들의 해상 무역 활동이 쇠퇴하게 되었다. 이윽고 조선 왕조에 들어서서 조선 정부는 고려의 공도 정책을 계승했을뿐만 아니라, 명의 해금정책도 답습하여 민간인들의 해상 활동을 불법화했다. 164

 

조선 왕조초기까지 한반도의 연안에도 출몰하던 왜구의 위협은 조선 정부가 해외 무역 활동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만든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64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인적 교류는 조선의 사신과 베트남의 사신이 중국에서 만나 시문을 교환하면서 교제한 것, 조선인이 일본에 갔다가 거기서 일본 상선을 타고 베트남을 방문한 것, 조선인들이 표류하여 베트남에 갔다가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온 것, 베트남 사람들이 표류하여 조선에 왔다가 조선인 관리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206

 

첫째는 조선의 선비 출신인 조완벽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거기서 17세기 초에 베트남을 왕래하면서 베트남의 사회와 문화를 체험한 이야기이다. 둘째는 역시 17세기 초에 일어난 것으로 베트남 사람들이 표류해 조선의 제주도에 왔다가 제주도 관리들에게 학살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셋째는 17세기 말에 제주도 주민 수십 명이 표류하여 베트남에 갔다가 베트남 사람들의 호의로 고향에 무사히 돌아온 이야기이다. 넷째는 15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조선의 사신과 베트남의 사신 사이에 일어난 교류이다. 207

(하우봉, 조선 시대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교류, 하우봉 외, 해양사관으로 본 한국사의 재조명,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2004)

 

조완벽은 일본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에 위치한 사쓰마번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중국 푸젠성의 장저우와 광둥성의 광저우를 지나 베트남의 흥응우옌 현에 도달했다. 조완벽전은 흥응우옌 현에서 당시 안남국의 수도인 동낀까지 80리라고 말한다. 동낀은 오늘날의 하노이를 말한다. 211

 

연회에 참석한 베트남의 고관들은 그가 조선에서 온 사람인 것을 듣고는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조선이 일본에 침략을 당한 사실을 알고 있던 그들은 조완벽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온 신세라는 것을 알고는 그를 측은히 여겼다. 그들은 그에게 조선의 이지봉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 책 한 권을 보여주었다. 수일 후 조완벽은 베트남 유생의 집에 초청받아 갔는데, 거기서 베트남 선비들은 조선을 예의 있는 나라라고 말하면서 조선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214

 

조완벽은 베트남에서는 어른이 되면 치아를 검게 만든다고 말한다. 217

 

칠치라고 되어 있는 이 습속은 글자 그대로 치아에 옻칠하거나 치아를 검게 칠하는 것이 아니다. 치아 물들이기라고 불리는 것에서도 나타나듯이 치아를 검게 물들이는 것이다. 217

 

검게 물들여진 치아는 과거 베트남 여성의 미의 기본적인 조건 중의 하나였다. 222

 

조완벽전에 따르면 베트남 사람들은 또 글 읽기를 숭상하여 마을에 종종 서당이 있으며 아이들은 글 배우는 교본인 몽구와 양절반씨론 등을 외우고 시문을 익혔다. 중국과의 접촉을 통해 일찍부터 한자가 도입되었고 이와 더불어 유교적 가치관이 널리 퍼진 베트남에서 집안의 아들들은 적어도 조선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한문으로 족보를 읽을 수 있어야 했다. 베트남인들은 유교적 소양을 쌓는 것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사회에 진출함으로써 가문의 이름을 빛내는 것을 중시했다. 222

 

조완벽은 이어서 베트남의 농업과 식물 그리고 동물을 간략히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베트남은 기후가 매우 따뜻하기 때문에 음력 2월과 3월에도 수박(西瓜)과 파파야 등의 과일이 났다. 또 베트남의 사람들은 수시로 논을 갈아 음력 3월에도 볍씨를 뿌리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벼가 숙성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수확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북부 베트남에서 벼농사가 이모작 내지 삼모작으로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벼농사는 13세기 말 앙코르 왕국을 방문한 중국인 주달관이 보고하는 캄보디아의 사례에서도 확인된는 것처럼 오래 전부터 대부분의 지역에서 다모작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223

(주달관, 진랍풍토기교주, 북경, 중화서국, 1981, 136)

 

맨발로 생활하는 것과 반랑 씹기 그리고 치아 물들이기 등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베트남의 토착적 문화는 중국보다는 동남아시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중화 내지는 유교 문화의 베트남은 이러한 동남아시아적인 토착 문화의 바탕 위에 건설된 것이다. 225

 

조선 시대의 선비인 정동유가 쓴 주영편에 따르면, 1687년 아전을 포함한 제주도 주민 24명이 탄 배가 추자도 부근에서 강풍을 만나 표류하여 35일만에 안남국에 도달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오늘날 중부 베트남의 회안 즉 호이안으로 그들 중 세 명은 도착하자마자 얻은 찬 물을 마신 후 즉시 실신하여 나중에 죽고 말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물을 끓여 마셨다. 호이안은 당시 응우옌 가문이 지배하던 중부 및 남부 베트남에서 가장 큰 항구였다. 234

 

그들의 눈에는 우선 베트남의 토지가 비옥하고 논이 많았다. 또 그곳 사람들은 어른이라도 바지를 입지 않고 한 척 정도의 비단으로 앞과 뒤를 겨우 가린다고 한다. 요포형 하의가 발달해 왔는데 요포는 길이가 무릎 정도에 이르는 허리에 두르는 천을 일컫는다. 235

 

주영편의 베트남 표류기는 또 베트남에서는 남자는 천하고 여자는 귀하다고 말한다. 중국 진서에 의하면 고대 참파 왕국의 사회에서도 귀녀천남이 행해졌다고 한다. 여성을 남성보다 귀하게 여겼다는 것은 여성의 가치가 남성의 것보다 더욱 높게 평가되었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것은 동남아시아의 전통 문화의 특징 중 하나인 가정과 사회에서의 여성의 능동적이고 활발한 역할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235

 

베트남이 비록 중국으로부터 유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여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을 역할을 중시하는 동남아시아적인 전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베트남에서는 한 무리의 남자들은 3전의 가치밖에 없다. 우리에 가두어 개미의 밥이 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여인은 300전의 가치가 있다. 그녀가 앉는 곳엔 꽃방석을 깔아야 한다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유인선, “월남 전통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아세안연구25(2), 1982, 168)

t****b 2014.06.08.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