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좋아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으로서 아직까지 ‘적과 흑’을 읽어보지 못했다는 게 부끄러웠다. 소설이라면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책을 좋아하는 내가 유독 힘들어하는 분류가 있다면 바로 고전소설이다. 특히 프랑스나 독일, 러시아 고전 소설들 제인 오스틴의 책들이나 마담보바리, 고리오 영감을 재밌게 읽긴 했지만 이 또한 책 읽기를 완성한 이후에야 깨달은 것뿐 책을 읽는 중에는 고통스러웠다. 그 이후부터 고전 소설의 상세한 장면 설명을 읽어내는 게 버거웠고, 그래서 이후에는 역사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책들을 읽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였을까? 책좋사에 적과 흑이라는 책이 오르자마자 평소 책에 대한 단순한 욕심을 넘어서서 이번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평생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이 책을 나는 이제야 읽는다. 인생을 말하다 어떤 이는 이 책을 스탕달의 가벼운 연애 심리 소설로 볼지도 모른다. 나 또한 적과 흑이라는 책을 읽기 이전에 ‘스탕달의 연애론’이라는 책으로 스탕달을 먼저 접했으니, 그 마음을 모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적과 흑의 줄거리는 흔하디흔한 남녀의 애정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단순한 연애소설을 넘어서서 부조화를 이루는 이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1,800년대의 프랑스를 표현하는 모든 소설에서 그러하듯이 이 소설 또한 출세를 향한 허황한 야망을 담고 있다. 시골 가난한 집에서 막내로 태어난 쥘리앵은 어린 시절부터 성공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을 언제나 꿈처럼 되지 않고, 결국 그는 현실적으로 성공하기 위한 길을 찾게 된다. 그것은 곧 여자. 성공에 눈이 멀어 사랑을 이용한 쥘리앵의 모습에서 이 책이 단순히 남녀 간의 연애 심리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쥘리앵의 비정상적인 출세 욕구나,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고 죽음을 앞두고서야 깨닫게 되는 모습을 보며 한심하게 여기거나 불쌍히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차이만 있을 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주인공 쥘리앵을 보고 있자면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의 라스티냑이 떠오른다. 똑똑하고 성실한 청년인 라스티냑은 쥘리앵처럼 성공하기 위해 허황된 야망에 눈이 멀어 거짓으로 사랑하고 결국 본인이 살아가고자 했던 인생의 신념과는 다른 방향을 걷게 된다. 이처럼 두 소설은 아주 흡사하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주인공들의 모습까지. 과정은 조금 다르지만 결론적으로 그저 꿈을 향한 젊은이들을 이 세상은 현실이라는 쇠창살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회의 부조리와 위선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과 달리 중반부터는 연애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재밌고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주인공 쥘리앵은 결국 본인이 그토록 원하는 ‘적’이 되기 위해 ‘흑’이 되어버렸지만, 이러한 결말이 곧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
|
'적과 흑' 이라는 책의 제목만 보면 얼핏 이념을 떠올리게 된다. 이념싸움이 주를 이루는 이야기는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왠걸 은근하게 깔리는 사랑의 심리묘사가 맛깔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일까? 이미 지나쳐온 과거는 단순히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환생하는 듯 하다. 시대적인 풍습들을 보면서 하나도 변하지 않은채 답습하는 현세대를 보게 되니 하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인간본성 그 자체가 문제일 것이다.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죽은 뒤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어지는가- 우리가 현실을 살아내면서 끌어안아야 할 숙제는 많은 듯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가 각자의 몫이라는 거다. 자신의 관점보다는 타인의 잣대에 더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 서글프기는 하지만 어찌되었든 판단과 선택은 자신의 몫인 것이다. 때로는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내 삶의 일부분조차도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닌 온전한 내 몫!
책속의 배경은 왕정복고 시대다. 귀족사회 즉 계급사회의 모습은 이렇게 저렇게 이유를 내세워 편가르기를 일삼는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의 뜻보다는 주변상황에 의해 끌리다시피 한계단을 밟고 올라선 주인공 쥘리앵. 쥘리앵은 비천한 신분이었지만 이미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특출난 외모와 심성으로 자만심을 하나의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그는 깨닫게 된다. 남과 다르다는 것이 미움을 낳는다는 것을. 비천한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시절부터 책읽기와 사색을 좋아했던 까닭에 아버지와 형들에게서 미움을 받았지만 그것때문에 그가 또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모순을 낳기도 한다. 자신의 출신계급을 뛰어넘으며 한계단씩 밟고 올라서는 그에게 그 자만심은 일종의 힘이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한번 맛본 것에 대한 호기심과 유혹을 견뎌내기 힘들다. 우리의 주인공 쥘리앵 역시 차츰 마음속에 욕망을 품게 되고, 드디어 파리에 입성하지만 상류사회의 권태나 속물스러움을 알게되기까지 많은 아픔을 겪게 된다. 사랑이라고 느꼈던 마틸드에 대한 감정조차도 하나의 도구처럼 쓰여지게 되는 상류사회의 메마름을 이해하기에 쥘리앵은 너무 여렸다. 일개 무명 장교였던 나폴레옹은 대륙을 정복한 뒤 누구나 장교가 될 수 있고 부자가 될 수 있으며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꿈을 젊은이들에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바로 그런 까닭에 쥘리앵은 나폴레옹을 하나의 멘토로 삼았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망한 귀족들이 다시 집권했던 시기였으니 시대적으로는 불안한 때였다. 교육을 잘 받은 하류계층의 젊은이에 대한 귀족들의 불안감을 쥘리앵은 알지 못했다. 후에 처형을 당하기 전 법정에서 그가 말했던 '계급사회의 영예'라는 말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씁쓸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출세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을 따르다보니 그렇게 되어진 쥘리앵의 삶. 자신의 의지보다는 타인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져가던 그의 삶속에서 진정한 것은 아무것도 찾을수가 없었다. 부유한 사람들의 오만이 하층계급의 용기를 꺾어버렸다는, 분개한 부르주아들만이 보인다고 법정에서 말하던 그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미루어 살펴보아도 서글픈 일임에 분명하다.
이 책을 왜 그렇게 읽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쉽게 다가서지 못했던 책을 이제서야 만난다. 읽는 내내 책의 흐름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다지 난해하게 다가오는 부분도 없는 듯 하다. 그런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책장을 덮을때까지 이상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또하나의 책이 있었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였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그 이야기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소녀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본 어른들의 세계. 그 소녀가 바라보면 느꼈던 어른들의 세계는 그다지 아름답게 다가오지 않았었다. 무언가 비틀어지고 속됨을 나타내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어른들만의 세계. 흑인을 변호하게 된 백인 아버지의 일정을 바라보면서, 또 그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한편으로 용기를 주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 소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시대적인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었던 <앵무새 죽이기>처럼 이 책속에서도 쥘리앵이라는 한 소년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속에서 마주치는 사회의 어둡고 습한 단면이 많이 보여지고 있음이다. 그런데 그 사회의 단면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눈길에 안스러움과 애처로움이 함께 했고 또한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처럼 부끄럽기까지 했다. 흑과 백, 적과 흑. 그 구분을 누가 지었는가.
"나의 이 이상적인 생활을 가만히 내버려둬요. 많든 적든 내게 불쾌감을 주는 당신들의 그 시시한 험담과 현실생활의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은 나를 하늘에서 끌어내릴 거요.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 죽어요. 그러니 나도 내 나름대로 죽음을 생각하고 싶을 뿐이오. '남들'이 내게 무슨 상관이오? 그 '남들'과의 관계는 머지않아 갑자기 끊어져버릴 거요. 제발 더이상 그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지 마요." (-399쪽) 감옥에 갇혀있던 쥘리앵의 이 말속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우리 삶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것만 같아 서늘해지기도 한다. 도대체 내 삶의 방식이 '남들'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도대체 그 '남들'의 삶을 왜 내 삶속에 끌여들여야만 하는 것인지. 감옥에 갇힌 다음에야 진실로 평온한 삶을 얻게 되었던 쥘리앵에게 죽음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 평온함속에서 찾아냈던 진실한 자신의 사랑앞에서 절규하던 쥘리앵의 모습이 영화의 한장면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레날부인에게 마틸드의 존재를 "표면상으로만 사실일 뿐입니다" 라고 말하던 쥘리앵의 고백. 어쩌면 우리는 모두 '표면상으로만 보여지는 사실'에 얽매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마음까지도 '도구화'되어져가는 이 세상을 살아내기에는 너무 벅차다. 쥘리앵조차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행동했던 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타인들이 심어놓은 가치를 좇아가는 것, 타인의 욕망을 나도 욕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음이다. 이 책을 통하여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다시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과연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한번 뒤돌아 볼 일이다. /아이비생각 |
|
라 몰 후작의 비서로 파리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쥘리앵.. 그곳에서 그는 파리의 지체 높은 권력자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생존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점점 후작의 신임을 얻게되고 주위의 고위 인사들과도 친밀해지지만 쥘리앵의 맘은 뭔가 아직 채워지지 않은 허함이 있다. 그들과는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출신의 차이 그렇기에 아무리 그들이 호의적이라하더라도 자신은 그저 후작의 비서, 노예일뿐이라는 생각이다. 권력과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가식이 만연한 귀족 사회에서 후작의 딸인 마틸드는 뻔한 권태를 느끼게 되고 그러한 그녀의 눈에 쥘리앵은 마치 오아시스와도 같은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레날 부인과 마틸드의 쥘리앵에 대한 사랑은 차이가 보인다. 레날 부인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면 마틸드의 사랑은 자신의 대담함과 남들과는 차별화된 일종의 용감한 모험을 과시하는 듯한 감정으로 보여진다. 이 또한 파리 귀족들의 허영으로 보이는 듯 하기도 하다. 쥘리앵과 마틸드의 사랑의 밀당. 그 과정에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 다른 고위직 부인의 환심을 얻기도 하는 쥘리앵.. 결국 마틸드와 결혼에 이르기 직전까지 가지만 레날 부인의 투서로 인해 모든 것이 산산히 부서지고 결국 레날 부인을 권총으로 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자리에서 연행이 된 쥘리앵. 다행이 레날 부인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를 구명하는 데 애를 쓰지만 정작 그는 자신은 살인을 의도한 살인자라고 말하며 항소도 하지 않고 판결을 받아들인다.
어찌보면 비극적인 연애스토리처럼 보일 수 있으나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뒤에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그 시기의 역사적, 정치적인 배경은 쥘리앵이라는 청년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쥘리앵이 느끼는 많은 내적 갈등과 정서 또한 그 당시를 살아가던 청년을 극적으로 대변하고 있는 듯 하다. 쥘리앵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당시 귀족사회의 모습과 그 사이에서 만연했던 사회의 구조등을 볼 수 있다. 결국 판결을 판기 전 마지막으로 배심원들에게 외쳤던 그의 말이 가장 현실적인 말이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당시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했던 두 건의 치정서건을 모티브로 쓰여졌다고 한다. 스탕달은 그 사건을 바라보며 그것을 단순한 치정으로만 보지 않고 그 이면의 정렬를 보게 되었고 쥘리앵이라는 인물들 탄생시킬 수 있었다. 쥘리앵에게서는 가난,정렬,출세지향, 야비함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그릇된 상류사회를 혐오할 줄도 알았고 경멸할 줄도 아는 자였고, 산속 동굴에서 자유롭게 공상할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수함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쥘리앵은 죽음에 이를 수 밖에 없었다는 당위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스탕달은 내 소설이 100년 후에 그 진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던 것일까.. 무엇인가를 욕망한다는 것.. 그것을 쫒는 인생의 허무함을 또 다른 시대에서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었다. 적과 흑이라는 제목의 의미. 그 이면의 다른 것들의 가치..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대변하기 위해 전개되었던 일련의 로맨스.. 읽기가 수월하지는 않은 고전이었지만 가볍게 흘려보지 않고 그 묵짐함을 생각하게 해 주는 고전읽기여서 유익했던 시간이었다..
![]()
|
|
작가가 책의 제목을 결정할 때 가장 고심하는 부분을 무엇일까? 만약 내가 어떤 이야기를 쓰려고 하거나 끝마친 후 제목을 지으려고 하는 작가라면 당연하게도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의미 있는 제목을 지으려 할 것이다. 그만큼 이야기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제목이 갖는 중요성은 크다. 제목을 보았을 때 어떤 의미일까라고 고민하다가 책을 다 읽은 후 무릎을 치며 납득할 수 있는 제목이라면 분명 좋은 제목일 것이다. 스탕달의 『적과 흑』은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훌륭한 제목을 가진 훌륭한 작품이다. 적과 흑이라는 색을 가진 제목을 보고 의문을 품었다가 책을 읽어 나가면서 그 색이 의미하는 표면적인 이유와 의미를 알게 된다면 간단해 보이는 저 제목이 얼마나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1830년대,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왕정이 복고된 프랑스 베리에르의 목재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쥘리앵은 뛰어난 지성과 능력, 야망을 가졌다. 상류층을 증오하면서도 동경하던 쥘리앵은 특히 나폴레옹을 숭배했지만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기 전이라면 낮은 신분으로도 군인이 되어 출세할 수 있었지만 그가 몰락해 버린 지금은 낮은 신분으로도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정치를 좌우할 수 있는 성직자가 되는 길 뿐이었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신학과 라틴어를 공부한 덕분에 그 실력을 인정받은 쥘리앵은 베리에르의 시장인 레날 씨의 가정교사가 된다. 그 곳에서 레날 부인을 만나게 되고 자신을 위해 그녀를 유혹했지만 결국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 사실이 밝혀져 집을 떠나게 되고 결국 성직자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한다. 그 후 라몰 후작의 비서가 된 쥘리앵은 딸인 마틸다를 유혹해 결혼까지 결정하게 되지만 레날 부인의 편지로 과거의 추문이 밝혀져 쥘리앵의 출세의 길을 산산조각이 난다. 이에 분노한 쥘리앵은 레날 부인을 권총으로 쏘지만 미수에 그쳐 처형된다. 레날부인 역시 그 소식에 충격을 받아 병사하고 그의 장례식을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흔하디 흔한 비극적인 연애스토리 같지만 이 작품을 그렇게 가볍게만 볼 수 없는 이유는 제목에서 드러난 것처럼 사회의 구조에 휩쓸려 무너지는 젊은이를 그린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시절의 붉은 군복을 의미하는 적(赤)과 성직자 시절의 검은 사제복을 의미 하는 흑(黑)은 각각 자유주의와 복고주의를 나타낸다. 쥘리앵은 자신의 꿈인 상류층이 되기 위해서는 적의 시대에 살아야 했지만 흑의 시대를 살아온 그는 필연적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소설은 백 년 후의 독자들이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 스탕달의 말처럼 『적과 흑』의 이야기 구조가 아직도 사용되는 것을 보면 보편적 사회 질서에 무너져 내리는 젊은이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
|
명품의 의미는 높은 가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속에도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데 있다. 그런 면에서 스탕달의 이 작품 《적과 흑》 역시 클래식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작품의 내용이야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바처럼, 미천한 신분에 가난한 젊은이가 출세를 위해서 사랑을 배신하고 또 다른 높은 신분의 여인과 결혼을 하려다 파멸에 이르는 지극히 통속적인 내용이다. 가난한 젊은 남자의 출세를 위한 사랑과 배신이라는 진부한 주제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주제로 지속되고 있지만 이러한 내용만으로는 이것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야 할 아무런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스탕달 자신은 이 작품을 쓰면서 “내 소설은 백 년 후의 독자들이나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지만 그것은 지나친 자신감의 표현이거나 많은 천재 작가들이 그랬듯 자의식의 과잉이라 치부하지만은 말자. 스탕달이 그러한 말을 한데에는 분명 다른 의도가 있었을 터 그것이 우리가 이 작품을 읽으며 찾아야 할 의미가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제목이 주는 두 색깔에서 힌트를 찾는 것이 제일 쉬운 순서이다. 적과 흑이라는 두 가지 색깔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주인공 쥘리앵이 열망했던 적이라는 군복 색깔과 흑이라는 사제복 색깔을 의미하지만 그보다는 당시 사회의 두 주축 세력인 붉은 군복의 자유주의자와 검은 사제복의 복고주의자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1830년대 나폴레옹 이후 왕정복고기였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나폴레옹의 몰락 후 왕정복고 시대에 다시 집권한 귀족들이 자신들이 되찾은 권력을 잃어버릴까 불안에 떠는 시대적인 상황을 비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쥘리앵이 재판 과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게 되는 과정을 보면 그 의도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충분히 사형을 면할 수 있었음에도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비판하여 사형을 자초했던 모습과 겹치면서 그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주인공 쥘리앵도 많은 귀족부인들의 응원 속에 변호인들까지 사형을 면할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마지막 변론을 통해 귀족들과 하층민들간의 계급 문제를 언급하며 배심원들의 마음을 흔들어 스스로 사형을 자처하였던 것이다. 쥘리앵의 죽음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을 모두 지울 수는 없다. 과연 스탕달은 주인공 쥘리앵을 죽여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살리고자 하였을까 그 외에 이 책에서는 당시 시대적인 상황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치정에 얽힌 애정 소설이라는 표면적인 형식을 뛰어넘어 성장소설이며 사회소설이요 심리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한 복합적인 요소가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러한 행간 속에 암시적으로 배치해 놓은 시대 비판 정신이야말로 진정 스탕달이 자신의 작품이 백년 후에나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던 진정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 부분을 읽느라 부산 갈 때 가지고 갔다가 책을 잊어버리고 다시 구입해서 겨우 감상을 적을 수 있었다. 이래저래 사연 많은 책이었다. |
|
사람들에게 많이 읽혀지고 또 추천되어지는 고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물론 각각의 주제와 재미요소에 따라, 그리고 읽는 사람이 처한 환경과 사고방식에 따라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고 각자가 느끼는 감정이 다르기도 하겠지만 공통적으로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이유는 크게 한 가지로 압축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 또는 ‘통찰’을 주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시대, 그리고 내가 경험할 수 없는 환경과 신분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현실에서 경험하는 다양한 재미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심지어 현실의 관계보다 소설 속 주인공과 더욱 친밀함을 느끼기도 하고 가상의 인물이 처한 환경에 대한 동정 그리고 심지어 실존하지 않는 인물을 향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스토리텔링이라면 어느 이야기나 이런 요소를 포함하고 있겠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고전에서는 인간에 대한 통찰이 뛰어나다. 적과 흑에서도 마찬가지다. 참 신앙이 없지만 사회적 신분의 상승을 꾀하며 신학교에 입학하고 사회의 지도층의 비서로 일하며 점차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우리의 주인공 쥘리앵. 추천을 통해 파리의 대귀족 드 라 몰 후작의 비서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스탕달은 쥘리앵을 통해 인간의 욕망(사랑과 신분상승에 대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후작의 딸 마틸드와의 세밀하고도 내면 중심적인 사랑의 기술을 보여주기도 하면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지, 또한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적과 흑에서뿐만 아니라 당시의 고전 소설을 보면 고위 신분층에 속한 아가씨들이 자신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신분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어떤면에서 그 시대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가만히 살펴보면 오늘날 TV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막장’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본질은 무엇이고 타고난 성향은 무엇인가? 안타깝지만 공통적으로 발견하게 되는 고전 소설 속 인간의 모습은 타락하고 부패했으며 자기 중심적이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명도 윤리도 정의도 외면한다. 적과 흑 속에 나타난 우리의 주인공 쥘리앵 소렐. 그를 후작의 비서로 추천하며 사제가 후작에게 말하는 대사가 인상깊다. “그 청년은 비천한 출신이지만 높은 기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그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는 바보처럼 되어 버릴 것입니다.” 흔히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자존심은 무엇이고, 인정받는 다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고 가치있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의 또다른 표현이 아닌가. 그러나 쥘리앵 뿐만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또한 스스로의 존재를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방향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틀어지게 되어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정직한 하루를 살고 있는가? 고민해 볼 일이다. |
|
공기가 포근하고 반짝반짝 햇빛 냄새가 난다. 올해 들어 가장 포근하다는 오늘, 그리고 어제. 산책하고 줄넘기도 뛰어보고 여기 저기에서 마음껏 바깥공기를 쐬고 들어온 다음에도, 거실에 앉아 책을 읽는 내 마음은 점점 무거워진다. [적과 흑], 이 책의 흑백표지처럼 기분은 가라앉았고 1권에서 엉성하게 모여있던 꽃잎 배경이 2권에서 산산히 흩어져버린 것에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봄이 오려는 기운에 몸은 점차 꿈틀거리지만 어디에도 발 붙일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마음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며 의무와 사랑에 빠져 고뇌하던 쥘리앵의 우울이, 오늘의 햇빛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흑과 반대되는 색이라면 으레 떠올리기 쉬운 백. 어째서 '백과 흑'이거나 '흑과 백'이 아닌 '적과 흑'인 것인가, 로 오랫동안 궁금했던 작품, 스탕달의 [적과 흑]이다. 프랑스에서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왕정이 복고되는 시대를 배경으로 계급은 낮지만 야망을 가졌던 청년 쥘리앵의 사랑과 삶을 그렸다. 총명하고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쥘리앵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업에는 관심이 없고 책과 출세에 관심이 많은 청년이다. 어느 날 그가 사는 마을 베리에르의 시장 레날이 그에게 가정교사 자리를 제안하는데, 그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쥘리앵은 자신이 몰랐던 세계, 그러나 그가 꿈꾸던 세계로 첫 발을 들여놓게 된다.
언제 또 나폴레옹같은 사람들이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늘 두려워하는 상류사회. 낮은 계급으로 비롯된 열등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자존심과 고집으로 출세의 길을 모색하던 쥘리앵은, 뛰어난 라틴어 실력과 암기력, 준수한 그의 용모에 빠진 레날 부인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결국 그녀와의 관계가 폭로될 위기에 처하고 브장송을 거쳐 대도시 파리에 진출하게 된 쥘리앵. 그 곳에서 만난 마틸드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만 그녀와의 사랑 또한 비극적인 결말로 치달아간다.
쥘리앵을 무시하면서도 같은 마을의 라이벌에게 그를 빼앗길까 두려워 내보내지 못하는 레날, 줄곧 그에 대한 감정을 부인하다가 하녀 엘리자가 쥘리앵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순식간에 마음을 열어버린 레날 부인, 늘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에 분노하면서도 그들과 같은 자리에 올라서고자 했던 쥘리앵의 야망은, 다른 듯 보이나 같은 모습들이다. 자신만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규정지어지는 존재의 정의. 쥘리앵은 그런 생활들을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던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감옥 속에서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끼는 쥘리앵.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느낀 뒤에야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즐기는 그를 우리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1800년대 프랑스의 사회와 문화, 한 인간의 삶과 사랑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 지 표현한 이 작품에서 '적'과 '흑'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해설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잘 언급이 되지 않아 내내 궁금했던 이 색들은 통설적으로 군복의 붉은색과 승복의 검은색이라는 주장이 있다고 한다. 주인공 쥘리앵이 열망했던 두 개의 직업, 군인과 사제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고, 좀 더 넓은 의미로는 나폴레옹으로 대변되는 붉은 군복의 자유주의자와 성직자들로 대변되는 검은 승복의 복고주의자를 뜻한다고도 한다.
사랑에 빠져 조바심을 내거나 잘못된 선택으로 괴로워하는 인간의 심리, 한 시대의 양상을 그려내는 부분은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지만, 번역 면에서는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든다. 쉽지 않은 작품일 것이라는 나의 선입견이 작용했기 때문인지도 모르나, 역시 쉽지 않은 작품이었고, 때문에 잘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의미가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게 다가오는 문장들. 감동을 느낄 법한 부분이 아닌데도 감동을 느꼈다고 표현되는 부분처럼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문장들에 내용을 이해하기가 조금 더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정서가 다른 건지, 단어와 문장의 표기가 본래 그런 것인지. 한 번 더 찬찬히 곱씹으며 읽을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
|
적과 흑..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나는 작품이다. 중학교때 고전을 즐겨서 많이 읽어보긴 했는데 솔직히, 이번 적과흑이나 여자의 일생 등 그 나이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들이 많은것 같다.
적과 흑. 어떻게 보면 예전에 재밌게 읽었던 고전 [벨아미]와 흡사하다. 잘생긴 미남이 주인공이고 그렇다할만한 배경도 없이 귀족의 힘(특히 귀부인)을 빌려 출세를 하고자 하는 내용 등등. 그러나 벨아미가 호색한이며 다소 머리가 빈듯하고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라면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은 매우 영특하고 자존심도 강하다. 귀족에 대한 동경보다는 허례허식생활같은것에 대한 경멸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벨아미가 매우 현실적으로 표현이 되었다면 적과 흑은 뭐랄까..그 느낌이 확연히 다가오질 않는다. 더우기 줄리앙이 주인공인 1인칭 시점에서 풀어나가는것이 아니라 제 3자가 각 주인공의 관점에서 서술해나가는 식이라 개인적으로 줄리앙 소렐이 느끼는 번민이나 고통 갈등 같은 미묘한 심리변화를 잘 느끼지를 못하겠다.
가정교사 줄리앙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도 다른 곳에 뺏길까봐 전전긍긍하며 원하는 대로 맞춰주는 레날시장을 보면서 요즘이나 예전이나 남의 눈을 필요이상으로 의식하는 고위계층의 모습을 엿볼수 있다. 지금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데 예전엔 이 책이 어떻게 이해를 헀을까..그냥 수박겉핥기식으로 읽었던 건 아닐까.. 고전을 올만에 접하고 보니 그 유명하다는 고전 뿐만 아니라 내가 미처 몰랐던 고전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이 많이많이 생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