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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 정신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고 ![]() "아직 백 살까지는 시간이 있지. 소설도 주제보다는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면 쓸 생각이야."(11쪽) 칠순을 넘긴 소설가에게 글쓰기란 무엇일까. 거의 모든 일에는 형식과 내용이라는 게 있다. 어떤 이는 둘 중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둘의 조화를 강조하기도 한다. 긴 세월 동안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갖고 소설을 써온 노작가 오에 겐자부로 또한 만년에 이르러 이 같은 고민을 한 것 같다. 두 해 전부터 『개인적인 체험』, 『만엔 원년의 풋볼』을 차례로 읽고 이번에 세번째로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만난 터라 저자는 새로운 '형식'에 목마르지 않았을까 하는 설익은 추측을 해본다. 앞서 두 작품의 세계관 - 작가에게 절망 속에서 희망의 빛이 되어준 아들이자 음악가인 히카리, 고향을 배경으로 한 농민 봉기의 역사 - 을 공유하면서도, '영화 시나리오'에 착안하여 독자에게 한 편의 영화 같은 소설 혹은 소설 속 영화 촬영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설 또는 영화 어떤 식으로 읽혀도 좋을 이야기 속 등장인물인 소설가 겐자부로, 영화 배우 사쿠라, 영화 제작자(감독) 고모리는 학창 시절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받은 관계이다. 중년에 이르러 업계에서 유명해진 고모리가 아역 배우로 두각을 보인 사쿠라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제작을 위해 대학 동기이며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이름난 겐자부로에게 시나리오 집필을 의뢰하면서 세 사람의 우연 같은 운명이 본격적으로 얽히고설키는 필연으로 나아간다. 미하엘 콜하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 16세기 독일의 민란(을 소재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가 쓴 소설과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가 실제로 존재한다)이 영화의 모티브였으나, 시나리오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들(에드거 앨런 포의 시 「애너벨 리」는 소설의 제목과, 김지하 시인이 갑오 농민 전쟁을 기반으로 쓰려 했으나 무산된 사연은 시나리오와 관련이 있다)을 나누는 과정에서 삼인사각(三人四脚)을 하듯 내용과 형식의 균형을 잡아가며 새로운 이야기로 거듭날 '뻔'한다. 그렇다. 삼십 년 후 노년에 접어든 그들이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그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을 테다. 소설에서 '30년'은 단락이 바뀌거나 페이지가 넘어가면서 순식간에 흘러버리는 시간이 아니다. 셋이 만났던 중년의 그 시점으로부터 30년 전과 30년 후에는 각자가 밀고 나가야하는 삶, 누군가에게 일어난다기보단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자리했던 것이다. 독자에게 개인의 정체성 확립과 자아실현의 과정에서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에 자행된 범죄, 장애인에 대한 편견 등 타인과 사회으로부터 촉발되는 고통에 꺾일지언정 뿌리 뽑히지 않고자 애쓰는 인간의 모습을 재확인시켜준다. 살다보면 억울하거나 잘못된 일을 겪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소연하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소설 속 세 사람은 '넋두리'에 주목하고, 넋두리할 무대를 영화에서 다시 연극으로 옮기는 설정이 퍽 흥미롭다. ![]() 30년 전, '미하엘 콜하스 영화'를 찍으려고 했다가, 연극 공연 이야기에 감동받았을 때, 실은 자신(사쿠라)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불안했다고. 그러나 지금은 자신에게 그만큼의 비탄과 분노의 경험이 있다고. 지금이야말로 그걸 하고 싶다고. 그리고 시나리오는 겐자부로에게 부탁한다고. 아사 씨는 오빠가 소설가가 된 것도, 그걸 고통스럽게 계속해 온 것도 얼마간 그 '넋두리 정신'을 어머니에게 물려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어.(199쪽, 고모리의 말) 혹자는 넋두리를 그저 신세한탄의 도구로 치부할지 모른다. 사쿠라와 고모리는 "그래서 뭐가 나쁠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124쪽)", 그래서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146쪽)"라고 응답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넋두리가 대화하기, 글쓰기, 연기하기, 춤추기 등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고단한 삶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인간이 되는 데 기여하고 있음을. 그토록 글쓰고, 연기하고, 재현하고 싶었던 까닭이 '넋두리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음. 결코 세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권은 아닐 테다. 오늘도 어디선가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을 꿈꾸는 사람, 연극 무대와 같은 일상을 오르내리는 사람. 이처럼 날마다 자기 삶 속에서 주연과 타인의 삶 속에서 조연을 번갈아 살아내는 우리들에게 가끔은 넋두리해도 괜찮다고 위로하는 책,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일독해보시길 바란다. 2025. 3. 3. 오에 겐자부로 타계 2주기를 기리며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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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애정하는 김탁환 작가가 "소설을 쓰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꼭 읽어야 할 작품"이라 해서 한껏 기대를 안고 본 작품. 역시나 후회는 없다. 물론 작가의 이름 자체가 워낙 무게값을 지니기에 기본적인 무게감을 깔고 가는 면도 있겠으나, 네임벨류에 비해 졸작인 작품들도 결코 적지 않음을 감안하면 이 작품은 분명 수작 중의 수작이다. 역시 개인적인 견해지만 내가 생각할 때 좋은 소설의 요건 중 하나는 그 작품을 읽고 노래를 만들어보고 싶다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어보고 싶다거나 하는 식으로 작품과 관련된 다른 장르에 도전하고 싶다는 느낌을 들게 만드는 것인데, 이 작품이 바로 그렇다. 물론 작품 속 주인공인 내게 왕년의 친구이자 영화 제작자인 고모리가 찾아와 내게 영화 시나리오를 부탁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기에 그런 느낌이 더 강하게 드는 면도 있겠으나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독자들이 분명 또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더불어 이 책의 역자가 박유하 교수인 것도 흥미로웠는데 작품 속 여성인 사쿠라가 어린 시절 미국인에게 몹쓸 짓을 당한 걸 감안하면, 비록 위안부 문제는 아니었을지라도 저자든 역자든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작품은 그의 삶과도 직,간접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또 연관이 되는 부분들이 많음을 새삼 느꼈다. 여러모로 흥미롭고 인상적인 대목과 부분들이 많은 이 작품 많은 이들께 일독을 권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