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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뭐 있어? 너 답게 살다 가란 말이야, 바보야 !
남의 장례식葬禮式을 가는 것은 책 열 권 읽는 것보다 낫다. 단 한 가지, ‘오래동안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 새삼 솟구치기 때문이다. 고인故人의 영전에서 ‘잘 사는 삶’을 추구한다니 이기적이고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이보다 더 생생하게 얻을 기회를 아직 만나지 못했다. ‘잘 사는 삶’이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렸다가 가는 삶을 말하는 거냐고 묻는다면, 아직 장례식장을 가보지 못한 자가 던진 질문일 것이다. 무엇인가 얻고자 두 주먹 불끈 쥐고 태어난 것이 인간의 탄생이라면, 운 좋다면 두 손 곱게 펴서 염하고 삼베 수의壽衣 하나 걸치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죽음임을 알게 되는 것이 장례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잘 사는 삶’의 욕망을 느끼는 또 다른 방법은 바로 ‘죽다가 살아나는 것’이다. 병에 걸려 생사를 넘나들다 완쾌되거나, 사고를 당해 저승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라면 ‘잘 살고 싶다’고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어떤 이유이든 ‘죽다가 살아난’ 경우는 더욱 절실해진다. 제 과실로 위험에 이르렀으면서 마치 ‘새로 태어난 듯’ 감사하고 또 감사해진다. 문제는 이렇게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얼마나 가는가 하는 것이다. 1년? 6 개월? 한 달? 잘 나가는 일본의 코메디언이 어느 날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자신이 ‘상처투성이에 얼굴도 찌그러진 인형 옷’처럼 느껴질 만큼 크게 다친 그는 사고 후 삶에 대해, 그리고 다가올 죽음에 대해 고민하며 병상일기를 썼다. 그 코메디언은 우리에게는 영화 <하나비>와 <기쿠지로의 여름>의 감독으로 잘 알려진 ‘기타노 다케시’다. 그의 책이 심심찮게 나왔는데, 이젠 거슬러 1995년에 쓴 책까지 나왔다. 의미심장한 제목, <죽기 위해 사는 법>을 읽었다.
기타노 다케시는 일본에서는 독설가로 유명하다. 차이는 크지만 이해를 돕자면 우리나라의 김구라의 큰형 정도라 해야 할까? 마치 야쿠자나 된 듯 고압적으로 상대를 나무라고, 심지어 주먹질까지 해서 보기에 심란할 지경인데,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인지 내재된 가학적 폭력성의 발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국의 시청자(일본인)들은 눈물을 빼고 웃는다. 독특한 캐릭터는 책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까칠하다 못해 전투적이고 혁명적인(책에서는 레디컬radical하다고 표현했다) 문장들은 좀처럼 글로 만나지 못한 것들이라 통쾌하기까지 했다(대상이 일본이 아니던가?). 하지만 남는 건 없다.
책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건질 만한 부분은 전반부인 ‘1부 죽기 위해 사는 법’이다. 큰 사고나 병으로 말 그대로 ‘죽다가 살아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병원의 입원생활이란 것이 먹고, 싸고, 자는 것이 아니던가? (원래는 흰색이지만) 누렇게 탈색된 플라스틱 그릇에 고기반찬이 들어 있으면 ‘횡재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단순한 병원생활에 굳이 고무적인 것이 있다면 ‘생각할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잘 나가던 연예인이 병원에 누워 ‘단순한 생활’을 하면서 삶을 돌아보고, 죽음을 내다보면서 내일을 다짐하는 생각들에 공감이 많이 갔다.
"그 전까지 나는 삶이라는 것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고,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는 소리까지 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는 자살욕구와는 다르다. 딱히 제 발로 기꺼이 죽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나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에서 언제 해방되든 상관없다는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구사일생이라 할 만한 상태에서 살아 돌아오고 보니 '간단히 자기 짐을 내려놓고 죽을 수는 없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냐'라고 누군가가 말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앞으로도 계속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하나. 그래서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기쁘지도 않아도 가치는 있다. 살아 있다는 가치 말이다. 그렇게 다행이라거나 행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쨌든 살아 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도록 앞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거기서 실패하면 다시 살아난 의미가 없어진다. 끊임없이 그런 생각만 맴돌았다." 본문 17 쪽
덤덤하게 말하는 재생再生의 변辯에는 죽을 때 까지 ‘잘 살겠다’는 다짐이 뭍어 있다. 어차피 죽어지면 아무것도 없는 무無가 되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살고 있기에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은 살지 않겠다는 생각은 안면이 함몰되고,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통해 얻은 대오大悟였다.
다케시는 사고 전 자신은 한마디로 ‘망나니’였다고 말했다. 성의 없이 방송을 하고 많은 돈을 받아서는 ‘언니’들의 품을 찾아다니며 밤을 새워 술을 마셨고, 그런 자신을 비난하는 팬이나 언론에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독설을 퍼붓는 바보 같은 망나니였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면서 강한 척 했지만, 걸레 같은 몸뚱이가 되어 남의 손을 빌어 밥을 얻어먹고, 용변을 해결하는 ‘단순한 동물’이 되어버린 자신을 바라봤을 때 ‘나 역시 사람 위에 사람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국내에서 소개된 기타노 다케시의 모습은 교통사고 이후의 모습이다. 가끔 안면이 씰룩거리고 약간은 밸런스를 잃은 부자연스러운 모습은 사고 이후의 후유증이다. 지인들과 의사는 그에게 안면신경 수술을 권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온전히 의사가 하자고 한 대로 ‘마음대로 다 알아서 해주십시오“라고 의지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없어지는 듯 해 싫었다고 했는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사건을 평생 기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이 교통사고를 재산으로 삼고 살아갈 의지가 있었다. 안면신경이 낫지 않아도 딱히 관계없다. 어느 정도라면. 수술하면 흉터도 남지 않는다. 예전처럼 고칠 수 있다고 한다. 그럼 정신도 옛날대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은가. 그건 싫다고 말했다. 기껏 이런 사고를 당해서 생각도 바뀌었고 인생에 대해 여러 가지로 고민하게 되었는데,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가면 정신도 원래대로 돌아갈지 모른다. 그건 싫었다. 일그러진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생각이 다시 바뀔 수도 있으니까, 이대로 흔적으로 남기고 싶다. 그런 의지가 있었기에 신경수술은 고사하기로 했다.” 본문 29 쪽
이 대목은 내게 ‘발상의 전환’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이었다. 인생을 살면 반드시 찾아오는 ‘아픔과 슬픔, 사고와 괴로움’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굳이 기억하지 않으려 애쓰며 산다. 그런 경험이 있기 전의 모습이 ‘원래의 모습’인 듯 안 그런 척하고 살려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내 생에 찾아온 것들이라면 그 역시 ‘내가 감싸 안고 살아가야 할 몫’인거다. 그렇게 살아갈 때 비로소 온전히 나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애써 감추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안고 살기. 그게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삶에 있던 일이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어쩌면 가장 단순하고 명쾌한 삶의 방식일 수 있다. 그런 일이 있다 손치더라도 그게 나인 것을 누가 어쩔거냔 말이다. 멋들어진 이 한 마디가 이 책에서 건진 ‘나를 흔든 한마디’였다.
나머지 부분은 ‘살아남은 자가 바라본 우스운 세상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원래 독설가인 그인지라 표현은 무식하고 살벌하다. 말도 콩도 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고, 모순덩어리였다. 하지만 그의 말을 따라 읽다 보면 통쾌한 무엇을 발견한다. 내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늘 속으로 하던 말들, 정말 허물없는 지인들과 술자리를 한다면 술의 힘으로 거침없이 배설하고 싶은 ‘독설들’이었다. ‘네 나라도 별 수 없구나’ 싶어 위로가 되고, ‘네 말이 내 말이다’ 싶어 공감을 했다. 하지만 읽고 난 후엔 뱉어낸 담배연기마냥 흩어져버렸다. 원제목도 ‘다케시의 죽기 위해 사는 법’이다. 하지만 설명이 부족하다. '다케시의 나답게 죽기 위해 나답게 사는 법'이 더 어울린 제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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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3이었을 때는 요즘처럼 인터넷 사용이 그리 활발하지 못할 때였다. 지금이야 개봉영화 정보는 검색 몇 개로 얻을 수 있었지만 예전에는 신문광고를 보고 개봉관과 시간을 확인한 뒤에 영화를 보러가곤 했다. 어느 날, 신문을 휙휙 넘기다 발견한 영화 광고가 내 눈을 확 사로잡았는데 바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키즈리턴>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날 사로잡았는지 모르겠다. 넓은 포스터 공간 중 하필 귀퉁이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이었을까? 아님 쉽게 접하지 못한 일본영화라는 이유였을까? (내가 학생이었을 땐 아직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직전이라 음반과 영화, 애니메이션까지 용산에 가서 구해볼 때였다) 어쨌거나 친구들을 꼬드겨 대학로까지 달려가 본 <키즈리턴>은 대만족이었다. 수험생활에 지쳐있기도 했고 끝없이 정체된 기분이 들 때였다. 나름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다 한순간에 밑바닥으로 추락해버린 두 주인공이 그렇게 탈출하려했던 학교로 돌아와 예전처럼 자전거를 타면서 다시 일어서려는 그 모습이 자꾸 내 수험생활과 겹쳐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3은 인생고난의 서두에 불과했지만- "우리 이제 끝난 걸까?"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키즈리턴>의 주인공 마사루와 신지의 대화는 그 이후로도 내가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날 위로해준 명대사였다. <키즈리턴>을 좋아했다 해도 감독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것이 없었다. 영화를 보며 막연하게 아,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좌절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감독이 아닌 배우로서 기타노 다케시를 발견한 건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과 <자토이치>를 통해서였다. 무뚝뚝한 인상의 아저씨라는 것이 솔직한 첫인상이었지만 어느 샌가 일본배우하면 떠오르는 일 순위가 되어있었다. (인기 코미디언에서 영화배우로 그 뒤 영화감독으로 전향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성찰하다. 개인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건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타인의 방에 주인 없이 앉아 있는 낯선 느낌이랄까. 설령 그것이 쓰인 글일지라도 말이다. 기타노 다케시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썼다는 이<죽기 위해 사는 법>이라는 책은 1994년 그가 오토바이 사고를 겪은 후에 쓴 자전적 에세이다. 병상에 누워 힘든 재활치료를 받으며 그때그때 느꼈던 감정들과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쓴 글들을 모아놓았다. 하지만 가족의 사랑을 새삼 느꼈다든지 소설처럼 극적인 감동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의 무뚝뚝한 얼굴처럼 하나같이 독한 글들을 뱉어놓았다. 아마 병상에서의 여러 가지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치료의 어려움과 홀로 견뎌야하는 고독함, 재기에 대한 불안, 초조함 등이 아니었을까. 독자로선 오히려 다듬어지지 않고 토해낸 그 감정들이 당시 저자의 급박한 상황을 이해하기에 더 좋지 않았나 생각된다. 혼자 누워 있다 보면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하물며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하는 병상에서는 오죽할까. 책에는 저자가 과거의 자신과 앞으로의 자신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들어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더 건강해지면 그는 다시 오토바이를 타겠다고 한다. 보통 큰 사고를 겪고 나면 그 원일을 피해야 정상인데 배포가 큰 건지 아님 겁이 없는 건지 걱정할 찰나 이런 글이 눈에 띄었다. 사고를 일으키고 잠시 멈추었다가 한동안 속도를 늦출 수는 있어도, 평소대로 돌아가면 다시 원래의 빠르기로 달린다. 그것이 삶이고, 다른 방향을 향해 다른 속도로 달리게 되면 그것은 이미 그의 인생이 아니라 또 다른 누군가의 인생이다. p.70 나도 과연 인생의 큰 굴곡 앞에서 저자처럼 생각 할 수 있을까? 완전히 끝내려면 사고를 당한 장소에서 오토바이에 올라 넘어지지 않고 조심히 커브를 도는 것이라니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내를 두고 따로 애인을 뒀다는 일화나 일부일처제 망국론 같은 글들은 상당히 나와 맞지 않았다. 뭐, 사람이 백이면 성격도 생각도 백일 테니까 이해는 못해도 받아들일 순 있었지만. 또 일본의 현주소에 대해 쓴 글과 연예계에 대한 비판은 그의 독설과 함께 재밌게 읽혔다. 독특한 사상도 한몫했고. 사실 이 책은 인간 기타노 다케시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참 불친절한 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포커스> 밀회사진이나 <프라이데이> 습격사건도 나에겐 생소했기 때문이다. 일본 연예계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인지 그 일이 어떤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는지 잘 모르겠다. 간단한 개요라도 있었음 했지만 뭐, 인터넷 검색이 이럴 때 필요하지 언제 필요하겠는가. 책을 읽다보니 갑자기 기타노 다케시가 나오는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그가 만들거나 출연한 영화는 그 강렬함 때문인지 한번 보면 다시 찾지 않는 영화가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그토록 피해 다니던 <피와 뼈>에 도전해볼까 생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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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노 다케시는 나에게 영화감독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에 대한 정보를 얻다 보면 코미디언으로 더 대단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차이는 한때 영화를 좋아해서 유명한 작품과 감독들을 찾아본 때문이다. 이때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대단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세계적인 영화제 상을 엄청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의 영화를 보면서 많이 졸았다. 재미없었다. 나와 취향이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얼굴 표정을 보면 영화배우가 맞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사고 직후 병원에 있으면서 생각한 것을 정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고 전에 쓴 독설을 실었다. 이 나누어진 부분들을 읽으면서 앞부분의 느낌이 뒤로 가면서 혼란스러워졌다. 시간 순으로 보면 독설이 앞이고, 병원의 단상들이 뒤일 텐데 뒤바뀐 순서가 이 혼란을 부채질한다. 이 때문에 그에 대한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독설에 담긴 내용들이 민감한 사항들이 많고, 그의 정확한 정치성을 모르다 보니 글자 그대로 해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 인기 연예인이 생각나는 대로 갈겨 쓴 글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지만 작가와 이 책을 낸 한국 출판사를 생각하면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다. 사고를 당한 후 생각들을 정리한 글부터 사실 나의 신경을 살짝 긁어 놓았다. 너무 적나라한 것이야 받아들이는데 무리가 없지만 나의 생각과 충돌하는 부분이 늘어나면서 조금 불편했다. 솔직함을 넘어서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생각들은 욕이 살짝 튀어나오는 부분도 생긴다. 특히 자신의 오스트리아의 하루를 형무소의 시간과 비교하는 대목에선 그가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알 수 있다. 그가 만약 한국 군대에서 근무를 했다면 이런 생각을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불편한 감정도 많지만 솔직함과 날카로운 인식은 그를 또 다르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5천 명이 죽었다고 말하면서 개인을 말살하고 묶어 생각한 것을 그는 5천 건으로 풀어낸 것이다. 사회문제 이전에 개인문제임을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지금 아이티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사람들이 죽고 파묻힌 현장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지만 밥을 먹으면서 보고 금방 잊어버리는 지금의 모습을 생각하면 참 날카로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중력을 사색할 때는 왠지 모르게 건담 시리즈가 생각났고,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을 퍼즐 푼 것으로 보는 장면에선 깊이가 느껴졌다. 붉은 색으로 나누어진 독설들은 우리의 현실과 연결시키면 더욱 불편해진다. 일본 헌법이나 침략전쟁을 반성하고 사죄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의 글은 일본인에게 통쾌함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마 이 모든 것이 싸움에 진 탓으로 돌리는 유치한 행동으로 보인다. 정치인에 대한 공격과 일본사람들에 비판과 질타는 거침없다. 자유의 개념을 정확하게 말한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다 평등으로 넘어가면 강자의 논리가 넘실거린다. 남성우월주의가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교육이나 외교문제로 넘어가면 대안 없는 비판과 무책임한 말로 가득하다. 삶과 죽음의 은밀한 연대기란 부제가 붙어 있지만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역시 독설들이다. 이 독설 이전과 이후의 변화가 궁금한데 어떨지 모르겠다. 그의 생사관은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단지 단상을 통해 드러난 사색과 관찰에서 가끔 뛰어난 점이 보일 뿐이다. 그가 자신이 하고자 한 말을 모두 하여 통쾌하고 유쾌할지 모르지만 그 글을 읽고 생각을 걸러내는 입장에선 굉장히 불편하다. 일반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을 읽고 싶다면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기타노 다케시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에겐 그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많은 글들이 담겨 있다. 그의 정치성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책은 구성 때문에 더욱 불편하고 가끔은 짜증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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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기타노 다케시의 다른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그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본 적도 없고, 심지어 그의 얼굴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다 이 책을 읽게 되었다고 묻느냐면 도서관 서가가 부린 마법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책 후기를 읽다보니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쓴 책이라 다른 책에 비해 '덜 과격하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게 덜 과격한 책이라면 다른 책과 영화는 도대체 어떨지 상상이 안 간다.
평준화 되고, 상식적이 되어 재미없어지는 요즘 사회에 기타노 다케시는 '그렇게 살지마'라고 온 몸으로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과 다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기와 위험부담이 필요하다. 수술동의서에 사인하라는 의사의 말에 안 한다고 말할 수 있는 배짱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사인하지 않겠다고 버팅기는 모습에는 위태로움과 함께, 사회의 시스템에 흡수되어 시시한 인간으로 살지 않겠다는 그의 오기가 엿보인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이성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또한, 심심해 졌다. 예전에 평균수명이 4~50살이었던 시대와 지금의 삶의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부양해야 할 내 노후가 30년은 더 늘어났는데, 젊은 시절을 어찌 불태울 수 있겠는가. 성실하게 사회 시스템 안에 어떻게든 정착해서 지금이나, 아니면 나중에 나이 들었을 때라도 밀려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의 겉과 속이 다를 수밖에 없는 사정을 알고 있고, 실제로도 서로 좋은 말만 하며 마음 속으론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상냥함과 가식을 그는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기타노 다케시는 좋은 사람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많고, 닮고 싶은 이상향으로 삼기에도 문제가 많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좀 더 재밌고 솔직하게 돌아간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모두 착한 사람만 있는 천국보다, 재미있는 지옥을 바라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아래는 책에서 발췌한 부분인데, 읽다보니 참 기타노 스럽다 싶어서 올려 본다.
좀 더 나쁜 놈이 되고 싶다. 모두 기분 나빠하는 아저씨가 되고 싶다. 섹스만 해도 그쪽이 기분이 좋다. "좋아해"라고 하는 것보다 "싫어, 싫어!"하면서 우는 것을 웃으며 달래가면서 한다. 여자는 진심으로 싫어한다 해도, 싫다고 하면서도 점점 얌전해지는 것 말이다. 몸이 떨릴 정도로 기분 나쁘지만 점점 고분고분해지는 여자의 천성을 보고 싶다. 이건 사람 좋은 아저씨라면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말이 여성인 나에게도 그럴 수 있겠다-싶게끔 다가오는 이유는, 이런 남자가 로맨스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착하고 순종적인 초식남이 아니라 여자를 휘두를 수 있는 강한 남자. 사라져 가고 있는 강함과 무식함과 근성이 조금은 그리운 세대에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고 싶은 그 분이 아니라, 멀찍이서 떨어져서 민주주의 사회인데 당연히 저런 사람도 있어야지, 싶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이런 글도 쓸 수 있다.
말기암 선고를 받은 암환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한 가닥 잡초만 보아도 감동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사형수이므로 누구나 그런 눈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 기분을 느끼며 만년을 보내는 사람이 '인생의 달인'이다.
사고 이후, 언제 죽어도 관계 없다는 생각의 오만함을 깨닫고 다시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는 그가 치유되는 동안 썼던 글을 그대로 모아낸 에세이 집이다. 시간 순으로 묶어 별다른 편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복되는 말도 많고, 갈팡질팡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에세이 집은 자기가 쓰고 싶은 말을 쓰는 책이니까 그의 실제 가치는 다른 책과 영화를 통해서 봐야겠지만 그의 과격한 속내는 꽤 흥미로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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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는 <기타노 다케시>가 <비토 다케시>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던 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중태에 놓여있을 때의 체험과 생각들. 2부는 일본사회나 정치에 대한 독설. 이렇게 2부 구성으로 되어 있다. 처음 그가 깨어났을 때 ‘다시 살아난 거라고 생각했다’는 그 말이 인상에 남아서, 과연 어떤 의미일까 생각했다. 생사를 해매는 동안, 무언가 삶에 대한 종교적인 의미 같은 것을 깨닫은 것일까 등등.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은 타인보다 내실있게 살아 왔고, 언제 죽어도 상관없을 것 같다고 줄곧 생각해 왔었는데, 너 같은 건 아직 멀었다고 들은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무서웠다고. 그리고, 그냥 놔두었으면 틀림없이 죽었을텐데 주위 사람들의 힘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고도. 입원해 있는 동안, 그 살아있는 의미라든가 가치라든가 그런 것에 대해 열심히 사색한 내용이 쓰여져 있다. 이 1부를 읽고 있으면 틀림없이 살아있는 의미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해 보게 된다. 일단 그의 결론은, 사는 가치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뻔뻔스러운게 아닐까 라는 것. 사람들이, 삶의 가치를 모두 이해하면서 사는 것은 어딘가 이상하다.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을 알기 위해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결론이 있든 없든 가치가 있다 라고. 이런 것들. 여기에서 다시 서두로 돌아가서, 사고로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몸을 「지퍼달린 인형옷」에 비교하고 있는 대목. 어쩐지, 굉장한 표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등 뒤의 지퍼가 내려져 있어서 언제라도 빠져나올 수 있는 상태. 섬뜩하다. 2부는 정치나 사회에 대한 독설이지만, 이 책은 ‘비토 다케시’ 시절이니까 출판된지 꽤 오래된 책이라 지금 와서 읽으면 조금 시대착오적인 낡은 발상들도 엿보인다. ‘그딴것들은 다 삼청교육대에 처넣어야돼!’ 이런 술자리 아저씨들의 독설이 그려지는 것 같다. 그래도 이런 과격한 표현까지 너그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일본이라서가 아니라, 일본에서의 개그맨의 위상이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일것이다. 그리고 ‘기타노 다케시’가 국민적으로 얼마나 사랑받는 인물인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타노 다케시라는 인물은 역시 일반인들과는 조금 다른지도 모르겠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성공한 사람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느껴진다. 조금은 서민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말하기 어려운 것들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시원시원해서 좋지만, 동의 하게 되는 부분도 많은 대신에 ‘아니,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하고 묻고 싶게 만드는 부분도 상당히 많아서... 이 사람이 정치인이 되면 솔직히 조금 위험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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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들어 티비 뉴스나 기사에서 '죽음'이란 흔하디 흔한 일상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특히 재해나 사고는 물론, 자살율까지 급증하면서 100% 남의 일만은 아니게 되어달까? 그래서인지 나조차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물론 내가 죽고 싶다거나 자살충동을 느낀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날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죽음이라는 것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또한 좀더 깊이 생각해본다면 죽기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말도 충격적이긴 하지만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도대체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살아있는 동안,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받아들이고 마음가짐을 가져야할까. 이런 생각을 하고있던 차에 책 제목마져도 <죽기 위해 사는 법>이라는 책을 알게 되었고, 드디어 읽게 되었다. 책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영화감독이었던 저자 기타노 다케시는 급작스러운 불의의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면서 말 그대로 생과 사를 넘다드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살 수 있다는 희망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웠던 병원에서의 하루하루였지만 기적적으로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과 장애에 가까운 몸에 의해 좌절도 하지만 여러가지 재활 치료와 강인한 정신력으로 서서히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간다. 그러는동안 그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직접 한자한자 써내려가 오늘날의 <죽기 위해 사는 법>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있었던 자신의 일을 직접 써내려간 글이어서 그런지 그의 고통과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 했다.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되지않은 부분도 더러 있었지만 말 그래도 죽음까지 경험해봤던 그이기 때문에 경건한 마음이 들기에 충분했다. 또한 책을 읽는 동안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아 좋았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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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아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면서 "또 한살을 그냥 먹었네...점점 살아갈 날들이 줄고 있으니..해 놓은것도 없는데..내 꿈도 아직 이루지 못했는데 뭐하고 시간만 흘려보냈는지..세월가는게 두렵다"는 말을 했다. 그때 지인이 자신은 어릴때부터 빨리 할머니가 되는게 소원이었단다. 이유는 삶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란다.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그녀가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묻고 싶었지만 그냥 접었다.
마침 제목부터가 독특하고 섬찟한 [죽기위해 사는 법] 이 책을 본 순간 지인이 떠오르며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어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일본에서 유명한 연예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분이다. 솔직히 난 저자를 잘 알지 못한다. 처음 만난 작가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널리 알려진 일본의 인기 코미디언이며 배우이고 작가이며, 영화감독까지 예술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만능엔터네이너로 유명하신 분이다.
누구나가 한번쯤 꼭 거쳐가는 과정인 죽음...그 죽음이 나에게 언젠가는 찾아오리라 생각하지만 죽음을 매일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 미래의 꿈을 그리며 살기에도 바쁜 세상에 왜! 죽기 위해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가? 일본에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독설로 유명하신 분이었다는데 책의 제목까지도 무척 날카롭고 독설적이란 느낌이 든다.
항상 죽음을 대비하며 살아갔던 저자가 갑작스런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죽음의 고비를 마시고 다시 소생한 저자는 병상에서 사색에 잠기면서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뇌한 일들을 병상일기로 기록해 놓았다. 안면마비로 얼굴이 변형되면서 처음에는 자신의 삶이 남의 옷을 입은것처럼 불편했던 그..나라도 저자와 같은 상황이라면 살아있다는 의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얼굴로 남은 인생을 살아갈지..걱정부터 앞서는게 사람의 마음이니까..그러나 저자는 그런 고민들을 훌훌 털고 일어난다. 안면마비의 얼굴로 기자 인터뷰를 하고 그동안의 이미지를 버리고 안면마비의 얼굴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아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고, 지인의 말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을 맞기위해 사람들은 오늘도 그날을 기다리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이 누구에게나 예정된 것이라면 지혜롭게 오늘을 살아가는 길이 죽음을 맞이했을때 후회없이 세상을 등질 수 있기 때문임을 저자는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제2의 인생 출발점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앞으로의 인생을 꿈꾸며 지금도 열심히 독설을 뿜으며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기위해 오늘도 하루를 분주하게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저자처럼 죽기위해 오늘 하루를 열광적으로 살아간다는 생각도 멋지다고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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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처음으로 공식 상영된 일본영화 <하나비>의 감독, 기타노 다케시.... 그는 영화감독으로 내게 기억되는 인물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기타노 다케시'하면 영화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은데~~ 일본인에게 있어 그는, 오리콘이 뽑은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인' 1위, '차기 총리에 어울리는 인물'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자국내에서는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란다.
엘리베이터 보이에서 코미디언으로~ 다시 코미디언에서 배우로~ 그리고 영화배우에서 영화감독으로~ 그렇게 바뀔 때마다, 자신이 선택한 그 자리에서 우뚝서는 그는~,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의 쓴 저서들을 종종 서점에서 표지를 훑으며 지나간 적이 있지만 이렇게 읽어보기는 이 책이 처음이다. 이 책은, 기타노 다케시가 1994년 8월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후에~ 생사의 갈림길에서, 투병 중에,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 재활치료를 받는 중~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담아 놓은 책으로, 독설가다운 면모를 가감없이 보여줄 뿐 아니라 코미디언답게 유머러스함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본문을 읽으며 어느 글은 공감키 어려워 고개를 절래절래 젓기도 하고, 어느 글은 고개를 끄덕이며 읽기도 했는데, 우리와는 다른 일본인의 사고와 행동들, 그 안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삶과 죽음의 방식을 가지고 있는 기타노 다케시를 그려볼 수 있는 책이지 싶다.
모든 것은 개인의 문제다. 그러므로 5천 명이 죽었다는 걸 '5천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 대형재해로 죽으면 바로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 그건 틀렸다. 죽은 사람에게는 그저 아주 큰 개인적인 문제이다. 본문 글 중에 마음에 남는 글은, 이 글이 아닌가 싶다. 죽음은 개인의 문제임을 모르는바 아니지만, 그가 지적한 '하나의 사건'으로 묶어 말하는 것은, 개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인 '죽음'에 대한 모독임을 새삼스레 느끼게 해주었다고나 할까? 그만큼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죽음'을 생각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커다란 문제에 손놓고 있는 것과 같단 생각을 해본다.
죽음은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엄청난 힘을 지닌다. 일생의 업적이나 행위는 손톱만큼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나는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했으니까 오래 살게 해 달라거나 하는 논리와는 아무 관계 없이 갑자기 닥치는 것이다. 이것에 인간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불의의 교통사고로인해 죽음을 넘나드는 고비를 겪었던 그는, 자신의 사는 법은 일밖에 없다고 적고 있다. 어떤 논리와 아무런 관계없이 갑자기 닥치는 죽음...... 죽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이 책은 '죽기 위해 사는 법'을 곰곰히 생각케 만들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