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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 bodhi sattva). "스스로 깨달음을 여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머물러 일체중생을 먼저 이상세계[彼岸]에 도달하게 하는 뱃사공과 같은 자"(두산대백과사전) 탈속(脫俗)과 은둔(隱遁), 윤회(輪回)와 해탈(解脫)로 인식되고 있는 불교는 우리 민족과 1,500여년을 함께한 민족종교로서 우리의 삶과 역사에 큰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일반인에게는 기복신앙(祈福信仰)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을 뿐 그 종교적 철학의 깊이와 난해함으로 이해가 많이 부족하고 부족한 이해만큼 오해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깨달음”은 현실세계에서 벗어난 “탈속”과 윤회를 종식시키는 “해탈”, 즉 일종의 종교적 행위로써 오해받고 있으며 이러한 오해가 불교는 세속과는 동떨어진, 현실 참여에 부정적인 “은둔의 종교”로 인식되고 있다.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불교 철학서인 “깨달음과 역사”는 어렵기만 한 “깨달음”에 대하여, 그리고 이 책의 초판이 나온 1980년대 민주화 열풍과 사회관심의 요구가 거세게 일던 시대상황에서 불교의 현실참여에 대한 필요성을 우리에게 사찰 불상이나 탱화 속 그림으로 친숙한 “보살”의 의미 - “깨달음과 역사” -를 그 철학적 근거로 제시하여 우리의 무지와 오해를 말끔히 걷어내고자 했다. 스님은 보살(보디사트바)란 “깨달음(보디)”과 “역사(사트바)"의 합성어로 대승불교의 실천적 주제로서 연기적 존재(空)의 이해("깨달음")를 바탕으로 삶의 자세를 정립하고 실천(”역사“)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먼저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찰나적 각성에 의해 얻게 된다는, ”혁명적“이기가지 한 철학적 사유방법인 ”깨달음“에 대하여 스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번뇌와 욕망을 끊어 제거하는, 즉 윤회를 종식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번뇌와 욕망의 연기성(관계와 변화성)을 깨달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으로 설명하고 이러한 깨달음은 자신만의 해탈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세를 정립하고 실천해나가는 일이어야 하며, 삶에 있어서 이러한 깨달음과 역사(실천)는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깨달음에 머무르지 않고 역사의 길(실천과 참여)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보살행, 즉 대승불교의 핵심이라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실천에 있어서 1980년대 이후 불교에서 제기되었던 ”민중불교“에 대해서 스님은 불교의 사회적 실천 운동으로서의 ”민중불교운동“를 주목하면서도 ”깨달음“에 소홀히 하고 ”실천“에 집작하는 민중불교의 문제점과 한계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그런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깨달음과 역사를 함께 묶어낸 대승불교 ”보디사트바“의 역사정신과 실천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깨달음과 역사”라는 주제는 불교에서 유명한 여러 단어들, 즉 “돈오(頓悟)”,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주로 없을 무(無)“로 이해되어지는 ”공(空)“에 대해서도 명확한 해석의 도구로서 설명되어진다. 특히 1970년대 성철 큰스님에게서 촉발된 한국불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논쟁이었던 ”돈오돈수“,”돈오점수“ 논쟁에 대하여 혁명적 깨달음(”돈오“)과 역사적 영역과의 상관성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관점에서 둘 다 그르다고 주장한 점은 참신하기까지 하며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스님의 해석이 실제 불교계에서 인정받고 있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세속의 잣대로 스님의 철학을 견줘보려는 속좁은 세속인의 관심에 불과하다). 책 말미에는 앞에서의 어려운 불교이론 해설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단상과 법우인 현담, 법연 스님에 대한 스님의 애정어린 따뜻한 시선을 술회한 몇 편의 수필이 실려 있어 흐뭇하게 책 읽기를 마무리하게 해준다. 불교에서 가장 어려운 개념인 “깨달음”에 대하여, 그리고 불교의 사회 참여의 논리적 근거로서의 “역사성”에 대한 주제의식이 돋보인 이 책은 스님의 일관되고 쉬운 해석과 설명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불교에 대해 관심과 기초지식이 있었다고 생각했던 나로서도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지 않는 부분은 몇 번을 반복해서 읽고 어려운 단어는 인터넷 검색을 해가면서 읽었지만 과연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자신할 수 없을 정도로 다소 어려운 책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그저 불교 용어로서만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여러 용어들에 대하여 제대로 개념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인에게 “혁명적 깨달음”과 “역사의 실천”을 행한다는 것은 요원하기만 한 일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경 그자체를 거부하는 소승적 “아라한”의 삶과는 달리 “알맞은 도수의 안경이나 색안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사회와 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승적 “보살”의 삶은 물질적 욕망에 매몰되어 이기적일 수 밖에 없는 현대인의 모순을 해결하는 새로운 가치 지향점으로 제시될 수 있을만 하다. 고리타분하고 현학적인 종교에서 벗어나 새로운 철학적 대안으로서 각광받기 시작한 “불교”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이책은 충분한 길라잡이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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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보면 오락가락하는 문장의 어려움으로 이해력을 돕기 어렵다. 반복되는 동일한 내용의 해설은 오히려 혼돈을 부른다. 쉽게 써도 좋을 내용인데 불교를 이해하려고 펼쳤다가 긴 시간을 허비하며 이해가 됐다가 안 됐다가를 넘나든다. 그러면서 해탈의 경지로 이끌려는 숨은 뜻이 있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해탈이란 난해한 문제이기도 하고 이해하기가 까다로운 면이 있다. 번뇌와 욕망에로의 자유, 즉 그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얻는 자유를 의미한다. 삶이란 결국 번뇌와 욕망으로 생성 변화한다. 희유한 깨달음이란 하나의 원에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듯이 삶의 연속과정은 시작도 끝도 없다. 존재를 변화와 관계성으로 파악한다. 윤회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은 그러한 의식이 태생한 당시의 인도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살펴봐야한다. 삶의 빈곤과 어려움으로 현재의 삶이나마 원만하게 마감되기를 바라고 재생을 원하지 않았다. 결국 윤회의 삶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는 해탈사상을 낳았다. 우리 삶 속에 내재한 나라는 실재의식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윤회의 실상 그대로를 온전하게 불가사의한 해탈의 세계를 수용할 수 있다. 불교에서 끊어야 한다는 번뇌도 바로 나라는 실재의식을 말한다. 대순불교는 이러한 것에 대한 실천사항으로 6가지 방편(바라밀)을 가지고 구체적 노력과 수행을 한다. 존재의 속성을 통찰하는 지혜, 베푸는 일, 도덕적 규범의 실천, 노력, 집중하는 맑은 정신, 참는 일로 규정한다. 그러나 선(禪)이나 순간적인 깨달음으로 성취된다는 반론도 작용한다. 無心是道(무심시도), 시비분별을 떠난 은자. 그릇에 무엇이든 담을 수 있게 텅 비워두어라. 생각을 하나하나 버려가면서 무상무념의 경지를 지키려는 공부법(黙照禪 묵조선)을 제시한다. 열려있고 머무름이 없는 태도, 즉 현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해 나가지만 동시에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육조의 혜능스님은 남(生 )이 없는 존재의 모습은 윤회의 주체가 없으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변화의 연속임을 이해하는 것. 마치 벼의 씨앗이 비와 햇볕과 물로 인해 싹으로, 꽃으로, 열매로 되면서도 일정한 인과의 동질성을 갖는 듯이 이해할 수 있다. 인식과 존재는 하나이고. 서로 결부되고 삼투되어 있다는 것을 체득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유마경에는 어떤 일에 사로잡히거나 국집되어 있으면 소리, 및, 향, 맛, 감촉, 개념 같은 대상이 옭아매는 것이니 이를 극복해야한다고 한다. 장인이 연장이 좋든 나쁘든 잘 알고 사용하듯 욕망이나 자격지심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의 정체를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지상의 꽃을 꺾을 때는 하늘의 별이 아파한다는 시구를 인용한다. 불교의 신앙과 실천은 정도수행으로 대표된다. 허공 같은 걸림이 없고 자유로운 자비(慈悲 애정과 연민), 번뇌를 없애고 선한 일을 행해 중생을 제도하는 희원(希願)의 집적이다. 수행의 핵심은 변화와 관계성으로 드러나는 존재의 가설적이자 잠정적 양태를 깨닫는데 초점이 있다. 무아( 無我), 공(空), 각(覺) 등이 동일한 표현이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이면 더 좋다. 화엄경에서 졸탁(踤啄)의 비유를 상기시킨다. 어설픈 설교나 언어유희, 삼라만상 그 어디에도 실체나 실재(實在)가 있는 것이 아니고 상호 연기적(실체가 없다는 뜻)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2010.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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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과 역사」를 읽고 우리 인간에게 있어 종교의 힘은 무엇일까? 를 생각해본다. 어쨌든 종교의 힘은 우리들에게 많은 기원과 함께 생활하는 데 있어서 강력한 힘을 갖게 해주는 데 기여하게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 것 같다. 내 자신은 아직 특별히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는 종교의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종교를 갖는 것도 유용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단체 활동에 있어서의 활동력과 함께 발표력, 친화력,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기원에 대한 기대 력 등에서 말이다. 일반적인 종교로는 역시 우리 가장 전통적인 흐름 속에서의 불교와 서양에서의 늦게 들어왔지만 일반화된 기독교와 천주교 등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불교 배척 정책으로 인하여 고려 시대에서의 국교였던 불교가 쇠퇴하게 되고, 수도 및 도시에 가득했던 사찰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도 시내에는 불과 몇 개의 사찰들이 있게 되고, 대개 유명 사찰 등은 산세가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좋은 자연환경과 함께 자리 잡은 사찰에 찾아가서 부처님의 불법에 의지하는 생활과 함께 불교의 가장 중요한 이념인 자비로움을 널리 중생들에게 베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불교가 우리들에게는 더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 자신도 열심히 노력한다면 해탈할 수 있다는 그 불교정신이 다른 종교에 비해서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들은 절대자들에 대한 무조건 순응해야 하고, 절대로 같이 갈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막연하게만 알고 있는 여러 불교에 관한 사상적인 배경은 물론이고, 여러 불교 용어에 대한 설명과 여러 불교 이론에 대한 공부를 자세하게 할 수 있어 너무 좋은 독서 시간이었다. 그 동안 많은 사찰을 가보았고,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마을 뒷산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사찰에 계속 드나들면서 우리 자식들 잘 되기를 기원하였던 그런 불교적인 내용들에 대한 무지함들에 대해서 다소간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을 고백하면서 저자 및 출판사에 대해 감사를 표해본다. 우리나라가 산업화와 함께 고도의 경제 성장 정책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 경제적인 수준의 향상이 이루어져 풍요로움과 함께 편리한 세상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 반면 많은 사고와 함께 인간성의 상실과 함께 비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어 아쉬운 점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때 종교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신도수가 많고, 가장 전통적인 불교의 역할이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이 이런 불교에 대한 더 많은 애정과 함께 불교 교리들을 실생활에서 실천해 나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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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불서처럼 이 책도 참으로 어렵게 읽을 수 밖에 없는 역시 불교는 참으로 가까이 하기 어려우면서도 우리 삶에 참으로 많은 부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응스님은 참으로 독특한 스님 중 한 분 일거란 생각을 잠시 하며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깨달음과 역사를 따로이 보지 않고 하나로 보고 있는 스님의 생각에 나 또한 동감한다. 흔히 부처님을 신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부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살아서 겪은 일들과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시고 손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나 사제들의 모습에서 일어날 수 있고 생겨나는 것들을 설하신 분이다. 그래서 우린 부처님을 깨달은 분 즉 붓다라는 말이 생겨 부처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가? "모든 감라만상은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개념적이든 그 어떠한 것이든 연기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그러한 상태를 이애하는 것을 '깨달음' 이라고 한다" 라는 교과서적 의미 어쨌든 스님의 말씀으론 실재를 전제하지 않고 세계를 이해하는 태도, 수용하는 태도 그를 일러 깨달음이라고 정의합니다..라고 본문에 적혀 있더군요. 그럼 역사와는 어떤 관계일까? 여기서 잠깐! 깨달음의 삶을 일러 보살의 삶이라는 말을 한답니다. 여기서 보살이란 '보리살타'의 준말이며, 우리나라에서는 통상 절에 다니느 ㄴ여자신도들을 보살로 부르곤 하는데 본래의 뜻이 좀 변형된 것으로 '보살의 훌륭한 삶을 살라'는 권유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답니다. 보살의 본래 의미는 보디사트바에서 '보디'란 서두에 말한 부드의 명사형으로 '깨달음'을 뜻하는데 그 깨달음이란 바로 존재를 연기적으로 이해하는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디에 사트바가 덧붙여져 있는 것이 보살의 삶입니다. 사트바는 중생이라는 말로서 모든 삶과 역사를 의미합니다. 스님은 개인적으로 사트바를 역사하고 치환하여 사용하기도 한답니다. 그렇게 되어 보살이란 '깨달음'과 '역사'의 합성어가 되는 것이랍니다.
무튼 본문의 내용을 인용하여 정리하면 깨달음과 역사를 하나로 보는 것이지요.
다시 본문에 있는 글을 옮겨오자면
몸은 바로 진리의 나무이고 마음은 곧 맑은 거울의 바탕 언제나 갈고 닦아서 먼지 하나도 묻히지 마세. -깨달음을 점진적으로 파악한 신수스님의 시
진리가 깃들일 나무는 본디 없고 맑은 거울 또한 무슨 바탕이 아니다. 본래 한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묻으랴. -신수스님의 시에 반박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혜능스님의 혁명적 깨달음의 시
가 내게는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생...이라는 말이 글을 보면서 떠올랐고 깨달음은 순간의 빛이라고 믿어온 나에겐 참으로 신선하게 다가왔던 글들이었다.
깨달음은 깨달음 자체로 온전하다라는 말을 찾았다. 그것은 깨달음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다는 표현은 아닐까? 내가 깨달음을 경험한 것은 오로지 살아오면서 느꼈던 순간순간의 나를 반성하거나 한생각 달리했을 때였다.. 그 때마다 '아....!'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지만 말로 표현하기엔 항상 부족했다. 아마 그 자체로 온전하다라는 말은 이럴 때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우리가 실천해야할 가장 바람직한 삶은 깨달음과 역사가 동일한 영역이면서 다른 차원의 체계인 특성을 이해하여 이들을 변증법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삶에서 통일적으로 조화시키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이럴 떄 우리는 일면적인 선자나 단순한 역사를 넘어서 '보디사트바' 즉 '보살'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216p
부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따르며 사는 것이 불자로써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이런 깊이있는 글을 만났을 때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만 이렇게 조금씩 한발자국씩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때 나도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보살이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하고 또 반성을 하게된다.
조금은 어렵고 읽기에 버거운 종교 서적은 읽는 동안은 참으로 힘겹고 어렵지만 읽고 나면 뿌듯한 마음과 꼭 하나는 얻어갈 수 있게 해주는 묘한 매리트를 지닌 듯 하다.
아..그리고 또하나 읽으면서 느꼈지만 내가 불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참 많이 했습니다. 내가 찾아오던 인생의 숙제..그러니까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이유는 불교에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나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해답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