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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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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인간들이 벌이는 최후의 만찬-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이 책에서 지은이는 진정성(眞正性, authenticity)을 “본래 좋은 사람과 올바른 삶을 규정하는 가치의 체계이자 도덕적 이상으로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을 가장 큰 삶의 미덕으로 삼는 태도를 가리킨다.”(19쪽)라고 이야기한다. 진정한 자아는 진정하지 않은 사회모순과 대립각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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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인간들이 벌이는 최후의 만찬

- 김홍중, 『마음의 사회학』

 

 

 

이 책에서 지은이는 진정성(眞正性, authenticity)본래 좋은 사람과 올바른 삶을 규정하는 가치의 체계이자 도덕적 이상으로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을 가장 큰 삶의 미덕으로 삼는 태도를 가리킨다.”(19)라고 이야기한다. 진정한 자아는 진정하지 않은 사회모순과 대립각을 세운다. 촛불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이들은 사회모순을 척결하기 위해 광장에 모인다. 올바른 삶을 실천하기 위해 모인 이 사람들로 해서 타락한 사회는 좀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한다. 진정성은 그러니까 지금 이곳을 이전보다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행동하는 과정 속에서 창출된다. 지은이는 이러한 진정성을 근대적 주체의 형성 과정과 연결 짓는다. 근대적 주체는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사회와 맞서는 주체들을 가리킨다.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사회적 역할을 과감하게 비판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주체들이 곧 근대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진정성은 하나의 제도이다. 진정성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 문제로 확장된다. 개인과 개인이 모여 진정성이라는 제도를 만든다. 지은이는 진정성의 레짐은 다음 세 가지로 구성된다고 이야기한다. “1) 그것이 형성시키는 특수한 주체’ 2) 그 주체가 자기 자신과 성찰적인 관계를 정립하고 실천하는 윤리적 기관(器官)이라 할 수 있는 내면’ 3) 내면적 고뇌와 모색의 결과 참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가 투신하게 되는 공적 지평이라는 세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31) 진정성은 우선 지금과는 다른 특수한 주체를 상정한다. 현실적인 자아를 넘어서는 이상적인 자아와 같은 것 말이다. 둘째로 진정성은 성찰과 실천을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자기 삶을 성찰하지 않으면 진정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막혀버린다. 성찰은 언제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실천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지은이는 공적 지평을 내세운다. 진정성은 개인의 한풀이를 위해 벌이는 일이 아니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공적 지평의 의미가 정확히 드러날 것이다.

 

체제이자 장치로 이해된 마음은 자신의 역사를 갖는다. 우리의 마음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운명과 집단적 꿈의 영고성쇠의 한 함수이기 때문이다. 진정성의 소멸은 이 수많은 장치와 현장과 상황들의 폐제(廢除) 그리고 한 시대의 영광과 상처의 조락을 의미한다. 이제 진정성을 추구하는 삶은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다. 진정성은 오직 기억과 무용담 속에 공허하게 빛나거나 아니면 표현주의적 라이스프타일로서 상업적으로 생산되어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 진정성의 소멸은 이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진정성의 상업적 보편화와 결합되어 있다. 이제 모두가 진정한 삶에 대한 욕망을 소비할 때, 정치적 자원이자 도덕적 규범으로 기능한 과거의 진정성은 더 이상 현실적인 힘을 갖지 못한다. 누군가는 진정성의 소멸을 아쉬워하거나 개탄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성의 물적 토대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시대에 진정성으로 규범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스노비즘의 징후일 수 있다. (45)

 

지은이는 진정성을 마음과 연결한다. 진정성과 마찬가지로 마음 또한 하나의 제도=장치로 이해된다. 우리의 마음은 시대의 운명과 집단적 꿈을 드러내는 함수라는 말로 지은이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하는 마음을 이야기한다. 마음이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마음이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은이 말마따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성은 기억과 무용담 속에서 공허하게 빛나기만 한다.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들이 진정성 있는 주인공들을 내세우지만, 이 세상에 그런 주인공들은 없다. 일례로 드라마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재벌 2세나 3세를 생각해 보라. 그들은 돈을 중시하는 재벌과 거리를 둔 채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순수한 마음으로 연인과의 사랑을 이루는 이들 이야기에 진정성의 소멸을 위장하는 미디어의 전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지은이가 주장하는바, 지금 이 시대에 진정성은 상업적으로 생산되어 상품으로 소비된다.

 

문제는 미디어로 소비되는 이런 진정성이 더 이상 도덕적 규범으로 현실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인기 있는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영웅을 보면서 관객들은 타락한 권력을 영웅과 함께 무찌르는 상상을 한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을 하고 나온 관객들은 그러나 이내 생활인으로 돌아간다. 생활인은 타락한 권력과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권력과 맞서는 순간 사회적으로 추방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성과 마음의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선택 문제로 한정할 수 없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지은이는 마음의 레짐을 이야기한다. 레짐은 제도나 장치를 가리킨다. 개인과 개인이 모여 이루는 게 제도이고 장치이다. 곧 개인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을 개인과 개인이 힘을 합치면 이룰 수 있다. 개인과 개인이 모이면 언제나 윤리 문제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레짐은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최초의 인간이 성찰적 수치심으로 스스로를 동물과 구분하면서 등장했다면, 수치심과 성찰적 내면이 소멸된 채 등장하는 존재들은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letzte Menschen)’들이다. 니체는 특유의 과장과 묵시론적 어조를 활용하여 이렇게 조소한다. “너희들에게 말하거니와,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너희들에게 말하거니와, 너희들은 아직 그러한 혼돈을 지니고 있다. 슬픈 일이다! 머지않아 사람이 더 이상 별을 탄생시킬 수 없게 될 때가 올 것이니. 슬픈 일이다! 머지않아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그리하여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자의 시대가 올 것이니. 보라! 나 너희들에게 최후의 인간(정동호의 번역으로는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보여주겠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창조는? 동경은? 별은?’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묻고는 눈을 깜박인다. 대지는 작아졌으며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저 최후의 인간이 날뛰고 있다. 이 종족은 벼룩과도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 최후의 인간이 누구보다도 오래 산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최후의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빡인다.” 역사철학적 의미에서 말하자면 최초의 비()인간에 다름 아닌 이 최후의 인간은, 동물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그들은 수치를 생산하는 기관인 내면 대신, 타인들의 평가에 대한 강한 관심 즉 자의식만을 갖고 있다. (67~68)

 

니체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을 이용하여, 지은이는 현대인을 자의식이 넘치는 존재들로 표현한다. 자의식은 타인들의 평가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가리킨다.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은 타인들이다. 타인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자신의 가치는 달라진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왜 의과대학에 가려고 혈안이 되었겠는가? 예능감이 풍부한 아이는 무조건 연예인이 되려고 한다. 의사와 연예인에 어른들과 아이들은 왜 이리 집착하는 것일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의사와 연예인만큼 힘든 일이 어디에 있을까?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의사나 연예인이 되려는 아이들을 당연하게 여긴다. 돈을 많이 버는 게 인생에서 성공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그 너머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은이의 말대로 그들은 수치를 생산하는 기관인 내면이 없다. 어떻게 내면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삶의 기준을 밖에 세워놓았으니 말이다.

 

니체는 최초의 인간을 대신한 최후의 인간이 벼룩처럼 날뛰는 세상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본다. 최초의 인간은 성찰적 수치심으로 동물과 스스로를 구분했다. 동물이 던질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존재가 최초의 인간들이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창조는? 동경은? 별은? 등과 같은 질문을 던지던 최초의 인간들은 이제 오로지 돈을 좇는 최후의 인간들로 변해버렸다. 최후의 인간들은 돈을 세상의 중심에 세운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해치는 것쯤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돈이 있으면 존경을 받고, 돈이 없으면 무시를 받는다. 지은이는 이들을 무치(無恥)의 인간, 곧 부끄러움이 없는 인간으로 표현한다. 부끄러움이 없는 인간이 자신을 성찰할 리가 없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돈이 없는 사람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엄격한 계층 논리로 뒤덮인 사회에 과연 희망은 있는 것일까? (다음 글에 계속)

 

 

o*****s 2019.01.22. 신고 공감 6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어려움과 무지함의 접점
"어려움과 무지함의 접점" 내용보기
읽기에 흥미로웠던 반면, 읽기에 너무 어려웠다. 또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귀여움으로 똘똘 뭉친 생각 없는 지금의 포스트 진정성 세대들에 대해서 잡아뜯는 식의 표현은 한편으로는 너무 거북했다. 386세대만큼 사회적 자각과 책임성이 없는 경박한 존재만으로 표현되기엔 사회적 배경의 상이함을 왜 인정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도 다수의 너무나도 현학적인 논문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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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에 흥미로웠던 반면, 읽기에 너무 어려웠다. 또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귀여움으로 똘똘 뭉친 생각 없는 지금의 포스트 진정성 세대들에 대해서 잡아뜯는 식의 표현은 한편으로는 너무 거북했다. 386세대만큼 사회적 자각과 책임성이 없는 경박한 존재만으로 표현되기엔 사회적 배경의 상이함을 왜 인정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도 다수의 너무나도 현학적인 논문들로 인해 사회학도임에도 나의 무지함을 일깨워 줄 정도로 너무나도 현학적이고 너무나도 지적인 논문들을 끝까지 소화해내려 노력하느라 애먹었다. 마침내는 끝끝내 이 책을 다 찢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고나 할까. (그저 아직도 무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학부생의 의미없는 발악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만.) 

 

그럼에도 진정성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던 계기였으며, 스노비즘에 대해서 또 오타쿠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어렵고 어렵게 읽었지만 또 그만큼 생각을 하게 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그저 한 번 읽는 것으로는 전혀 만족할 수 없을 만큼 가치있었다고 평하고 싶다.  

 

인문학적 상식이 탄탄히 깔려 있는 독자들만이 완벽히 소화해낼 수 있는 논문집이다. 나의 부족한 어휘력부터가 이 책을 읽는데에 걸림돌이 되었다. 자격 없는 독자라고나 할까. 그래서 아쉬웠고 실망하게 된 계기를 준 책이다. 누구에게? 나에게!

p******i 2010.10.10.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