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적인(실증주의적인 인간들이 보기에)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조그만 소통에 관한 이야기. 파리 시내의 고급 아파트 단지에 사는 두 인물의 시각이 교차되면서 이 얘기는 시작된다. 조숙하고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인 13살의 천재소녀 팔로마. 그녀가 사는 아파트는 요리비평가, 고위공무원, 의사, 우아한(그렇다고 착각하는) 귀부인들이 사는 곳이다. 그 곳에 사는 어른들의 추악하고 이중적이며 자위적인 모습을 보고 환멸을 느끼는 이 조숙한 숙녀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어른들의 세계에 물들지 않은 상태로, 아파트 단지에 불을 지르고 자살하리라고 굳게 마음 먹는다. 그 아파트의 수위아줌마인 쉰네살의 르네. 그녀는 못생기고, 오동통하고, 발에는 굳은살이 흉하게 박혀 있으며, 사회적으로 '수위 아줌마'라는 통념에 못 박힌 시선을 받는 여자이다.
그러나, 그녀는 세 평 정도의 수위실에서 철학과 문학서적을 탐독하고 오주(60년대 일본의 영화감독)의 영화를 탐닉하고, 일상의 균열을 응시하는 정신적인 귀부인이다(라고 믿고 산다) 그녀의 귀족주의는 물론 혼자만의 것인데, 그것은 '수위 아줌마'이며 '매력적인 외모를 지니지 못한 쉰네살의 아줌마'라는 사회적인 선입견 때문이다. 그녀를 무시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르네는 사별한 남편과의 사무치는 기억들을 소중히 회상하며 그리움의 의미를 되새기는 따뜻한 감성의소유자이며 아파트 안의 어떤 지식인도 도달하지 못한 인문학적 경지에 다다른 여자이기도 하다. 단지 사회적인 편견이 그녀의 지식과 우아함을 알아주지 못할 뿐. 자살을 꿈꾸는 13살 소녀와 인문학 교수보다 풍부한 지식의 소유자인 수위아줌마는 조용히 소통을 시작한다. 이 소통은 상대의 사회적인 지위와 학벌, 경제적인 능력에 기반한 '계산적인 관계' 가 아니다. 그것은 주변의 계산적이며 소모적인 관계설정과 편견에 구애받지 않는 '인문학적인 관계'이며 의무와 책임, 예의범절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지 않는 '즉흥적이지만 끈끈한 관계' 이다.
이 책은 수십개의 소제목으로 나뉘어져 있다. 즉 일관되고 지속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팔로마와 르네의 눈에 비친 아파트 단지 사람들의 행태와 그들 나름의 사색이 기행과 메모의 형식으로 나열된다.이 파편적인 끄적임 속에서, 각자의 사회에서 소외된 그들의 이해는 시작된다. 고슴도치는 자신다칠까 봐 자신의 털을 세운다.그렇지만 털을 세워도 추위와 외로움, 누군가 자신을 응시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는 줄어들지 않는다. 단지 적을 막을 뿐이다.
주변의 편견과 가식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털을 빳빳하게 세우며 예민했던 13세와 54세의 두 숙녀는 곧 같은 위치의 서로를 알아보고 차츰 가까이 다가간다. 상대를 다치게 할지도 모르는 털을 얌전히 가라앉히면서. 고슴도치의 속살을 만져본 적이 있는가. 가시 같은 털 안에는 애완견의 살보다 부드러운 살이 존재한다. 외부와의 부딪힘이 없으므로 어느 동물보다도 연약하고 부드러운.
이 소설은 프랑스 파리의 아파트 단지 내에서 벌어지는 작은 소극에 불과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 전개되는 사유와 메모들은 매우 철학적이며 은유적이다. 파리 시내의 그르넬 가 7번지의 세계를 지금-여기의 세계로 확장해도 무관하리라. 지금-여기에서도 당신은 고슴도치처럼 타인에게 가시를 세우고 있지 않느냐고, 이 소설은 묻는다.당신은 외모로, 학벌로, 타인에게서 흘러들은 소리로, 그 사람의 지위나 경제력으로, 스쳐가는 말과 이미지로, 타인의 다치기 쉬운 부드러운 속살을 보듬어주지 못하고 당신의 가시로 상처를 주고 있지 않는가. 그 가시는 의도적일수도, 선험적일수도, 무의식의 산물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그 가시를 얌전히 내려놓을 수 있다, 라고 르네와 팔로마의 작은 이중주는 속삭인다.우리가 예술을 접하는 것. 덧없이 사라질테지만 우리를 구원케 하는 것은 삶의 이면이 품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순간이 아닌가. 우리가 접하는 소설은, 시는, 연극과 영화는, 철학서적의 문장들은, 그리고 음악들은 가시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를 각성하도록 찌르는. 스스로 아프게 찔릴수록 나의 주위를 둘러싼 가시들은 무뎌질 것이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