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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요한복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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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주제로 한 글에서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는 것이 타당한지 모르겠다. 민중신학 이야기이다. 오래 전 나 홀로 긴 시간 씨름했던 주제가 민중신학이다. 나는 민중신학을 공부하며 내가 유물론으로 치닫는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으로 그것은 공부가 부족했기에 내린 서툴고 급한 결론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당시에 비해 지금의 공부가 더 나은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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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주제로 한 글에서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는 것이 타당한지 모르겠다. 민중신학 이야기이다. 오래 전 나 홀로 긴 시간 씨름했던 주제가 민중신학이다. 나는 민중신학을 공부하며 내가 유물론으로 치닫는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으로 그것은 공부가 부족했기에 내린 서툴고 급한 결론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당시에 비해 지금의 공부가 더 나은 것도 아니다. 나는 한동안 민중신학으부터 떠나 있었다. 그럼 지금 민중신학에 다시 관심을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4복음서 중 가장 영적이고 신비스런 복음서인 요한복음을 민중신학으로 다시 읽어낸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이 일깨우는 의미 때문이다.



성공회의 평신도 사제이자 물리학자인 러셀 스태나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는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요한복음 11장(25, 26절)의 말씀을 영원한 삶은 아직 오지 않은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의 삶 가운데 있다는 말로 설명한다.(‘과학 신 앞에 서다‘ 188 페이지) 이 부분을 읽으면 민중신학과 요한복음의 만남은 충분한 의미와 설득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위 구절에 나오는 ‘나‘를 예수가 아닌 우리 각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한 함석헌 선생의 경우도 맥락이 같다 하겠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에서 ‘나’라는 것이 데카르트만이 아닌 우리들 각자를 지칭하는 것처럼.



요한복음은 예수의 죽음, 매장, 부활, 부활 이후의 모습 등을 주로 다른 책이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여러 면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공관복음이 첫 번째로 언급한 사건이 예수의 탄생(마가복음의 경우 세례)인 반면 요한복음이 첫 번째로 언급한 사건은 세상의 창조이고, 공관복음이 예수를 신의 아들로 본 시점이 탄생 또는 세례인 데 데 비해 요한복음은 세상 창조시이며, 공관복음이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 데 비해 요한복음은 예수의 신성을 강조했고, 공관복음이 예수의 세례를 언급한 데 비해 요한복음은 언급하지 않았고, 공관복음이 예수를 현인(賢人)으로 설정한 데 비해 요한복음은 예수를 철학자 또는 신비주의자로 설정했으며 공관복음이 예수가 부활 후 처음 나타난 곳으로 엠마오를 언급한 데 비해 요한복음은 예루살렘을 언급한 것 등이 그것이다.



저자 김진호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연구실장은 요한복음은 누구든 하느님의 영과 직접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이유로 요한복음이 교권주의자들 즉 배타주의적 권력자들에게 위험시된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하느님의 영에 의해 직접적인 교감을 나누는 존재란 세상을 본다고 자부하는 이들의 앎을 조롱하고 편견을 넘어 자기 경험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존재이다. 저자는 그 존재를 예수 즉 모두의 몸 안으로 들어온 영으로 정의한다. 그렇기에 ’요한복음‘이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의 책이 되는 것이다.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은 저자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안병무 민중신학자가 개최한 ‘요한복음 세미나’에 참석한 기억을 되살려 보탤 것은 보태고 뺄 것은 뺀 결과물이다. 저자는 “안병무를 보충하여 되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는 안병무 박사의 ‘갈릴래아의 예수’, ‘예수 민중 민족’ 등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불교의 연각(緣覺: 홀로 도움을 받지 않고 깨달은 이)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그런 까닭에 감회가 새롭다. 물론 나는 연각의 근원인 빳쩨까 붓다(pacceka-buddha)라는 원어에 나를 맞추려고 하지 않고 그 자세와 지향점을 비유하는 것일 뿐이다.



저자는 요한복음에 담긴 신랄한 교회 비판 정신을 예로 들며 ‘요한복음’이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지적한다. 제목의 급진적 자유주의자란 이름은 역사적 기원을 갖는다. 태동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독교 안에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유대교가 관계된다. 로마 제국의 패권주의에 의해 잿더미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뒤로 한 채 새롭게 태동하기 시작한 유대교가 발명해낸 즉 만들어낸 내부의 적이 바로 예수파였다. 바로 그렇게 숱한 굴욕에 아랑곳 하지 않고 유대교를 모방하는 기독교 내의 반동적 흐름에 반기를 든 이들이 기독교 내부의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세기의 예수 추종자들이 유대교의 몇몇 회당에서 배제되자 유대교의 회당 등을 모델 삼아 자신들만의 결사체를 도모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에클레시아(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자신들만의 연대성을 확보하기 위해 예수 신앙의 상징적 담지자인 ‘열두 제자’에 대한 담론을 공유하게 되었는데 이런 교회의 제도화 경향에 문제를 제기한 공동체가 요한계 공동체였다. 저자는 안병무 박사가 말씀(로고스)이 육(싸륵스)이 되었다는 요한복음의 구절을 가장 핵심적인 전언으로 받아들였다고 설명한다.



이는 가장 거룩한 것이 가장 천한 것이 되었다는 뜻으로 여기에는 더럽고 천하고 추한 것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성스러운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저자는 신이 인간이 된 것은 유한성의 제약 아래로 들어왔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바로 그 예수를 통해 영원한 것과 진리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진리는 육화된 신 즉 유한성 속에 있는 진리이기에 유한한 세계에서 절대적인 것을 주장하고 있는 세계의 허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요한복음의 결론은 무엇일까? 누구든 성령과 직접적으로 교감할 수 있다는 설정을 공동체의 성원들끼리 그렇게 교감할 수 있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뚜렷한 발걸음을 떼어 놓지는 못했지만 아감벤, 바디우, 지젝 등에 의해 최근 정치철학에서 이슈로 떠오른 바울에 대해 관심을 더 가다듬을 필요를 느낀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혁파할 대안으로 회자되는 바울과 민중신학을 비교하는 것과 별도로 ‘세계 신학자들, 안병무를 말하다’를 부제로 가진 ‘21세기 민중신학‘, 김진호 저자의 ’리부팅 바울‘을 읽을 필요도 느낀다. 공부할 것이 너무 많은 현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m******1 2015.05.03.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