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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저 | 휴머니스트 | 174쪽 | 296g | 128*188mm | 2003년 05월 26일 | 정가 : 8,000원 [십자군 이야기 1]을 읽고 책에 소개 된 이 책을 발견했다. 진중권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으나 그의 책은 한 권도 안 읽어보았기에 궁금증이 동하기도 했다. 제목의 무게감에 비해 책은 가볍게 읽혔다. [언더그라운드]라는 영화에서 베오그라드에서 송출되던 독일군 방송의 시그널 뮤직인 <릴리 마를렌>을 떠올리다가 그 노래가 '제2차 세계대전의 주제곡'이라 불리며 모든 병사의 사랑을 받았던 노래를 것을 알아냈다는 이야기에 덧붙여 그 노래가 적군과 아군의 경계를 넘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의 마음을 달랬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저자의 군경험은 병사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전쟁을 겪지 않아도 전쟁을 준비하는 병사들의 죽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병원 근무이야기는 죽음이 코앞이라서도 그렇지만, 죽음이 일생이 되는 삶이라면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를 살짝 엿보여주는 것 같아 섬짓했다. 어짜피 전쟁이 벌어지면 누군가는 처참하게 죽는다. 그리고 그 와중에 누군가는 축배를 든다. 이런 이야기 임에도 이때까지 이 얇은 책은 그나마 편안(?)하게 읽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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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뉴스들을 보면 지구 어딘가에는 매일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그저 무료한 일상. 누워서 TV를 보다가 내전, 전쟁 이런 뉴스들이 나온다. 아무런 감각이 없다. 그냥 전쟁이 일어나고 있구나 정도. 진중권의 '레퀴엠'은 쉽고 빠르게 읽힌다. 과거의 한 경험을 축으로 풀어내는 전쟁이야기가 제맛이다. 전쟁이야기라고 하니 긍정으로 비춰지는 듯 하지만, 이책은 전쟁비극을 말하고 있다. 정치지도자들의 욕망으로 일어난 전쟁이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다. 광기의 역사는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이책을 읽으면 일상에서 전쟁을 인식하게 되므로 고통스러울뿐이다.
단, 첫대목에 등장하는 '릴리마를렌' 연합군과 나치군 모두 유행한 노래를 듣다보면 굳이 '평화'라는 말을 붙이지 않더라도 희망의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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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책을 모으고 있다. 5월에 반짝 할인하기에 고민할 여지 없이 구입해두었다. 이런 시사 칼럼을 모은 책은 시대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 시기가 지나면 와닿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2003년에 나온 이 책을 천안함 사태에 빗대 읽으니 재미있게 읽힌다. 전쟁은 끊이지 않기에 지금 읽어도 손색이 없는 이 상황이 씁쓸하기도 하다.
서문을 보면 저자가 글 배치에 공을 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음악에서 많이 나오는 키리에, 디에스 이레, 상투스, 아뉴스 데이, 레퀴엠 같은 용어들이 반가웠다. 죽은 자를 위한 미사라는 부제처럼 한 장의 시작마다 종교음악의 가사들을 배치했다. 전쟁의 미학을 표방하고 있어 한 장마다 주제와 걸맞는 그림을 배치하고 있다. 다비드, '사빈의 여인들'처럼 이번에 유럽에서 본 그림이 있어 반가웠고 대부분 진중권의 다른 책에서 소개되곤 했던 유명한 그림들이다. 헬레니즘 때는 전쟁이 나쁜 것이 아니라 신성한 것이었다고 한다. 싸움이 그림의 주제로 등장하곤 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한 장 한 장이 가볍지 않고 공들여 쓴 듯 하다. 글이 술술 읽어져 진중권은 정말 글을 잘 쓰는 사람임을 새삼 느낀다. 21세기에는 종교, 문명들이 충돌한다고 했고 2000년대 초 이슬람 전쟁이 한창일 때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이 부각되었다. 그러한 충돌의 배경, 전쟁의 상황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숭고, 충격과 공포 등 전쟁이라는 주제를 미학과 연결시키는 탁월함에 감탄했다. 오히려 평화를 깨고 있는 것은 '미국'이라는 저돌적인 문장들이 통쾌하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전쟁의 시대를 살 우리가 전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돌아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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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책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술술넘어가는 책장에 놀랐다. 독특한 구성에 읽기 편하고 논리정연하며 속이 시원하게 문제점을 비꼬는 문체였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숭고함..그 '충격과 공포'는 예술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동시에 전쟁에서도 나타난다. 현대전의 양상은 끝을 알 수 없는 기술의 힘, 인간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리는 숭고함이다. 이 책에서 진중권은 현대인들의 게임이나 예술처럼 되어버린 전쟁의 현실을 바로보기를 경고한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전쟁은 활극처럼 통쾌할진 몰라도 미디어가 숨긴 그 전쟁의 현실에서는 구역질이 나올것 같은 비참함만 남았을 뿐이다. 또한 이 책은 전쟁을 미학으로 숭배하며 찬양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해관계를 위해 전쟁을 만들어내며 온갖 명분을 갖다붙이는 미국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팍스아메리카나...미국아래에서의 세계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평화를 향해 달려가는 세계시민들을 위협하는 것은 미국뿐이다. 이해관계를 위해 전쟁을 만들어내는 근대인들의 표본인 미국,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미디어, 미국이 정한 질서아래에 편입하여 명분없이 군대를 파병한 한국. 그리고 그 전쟁의 정당성을 위해 감히 해방자라 자처하는 그들의 모습. 이 모든 것이 거짓이고 위선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심지어 그들 자신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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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레바논에는 이스라엘의 폭격이 있었다. 새로이 짓던 무슬림 사원은 무너졌고, 7층짜리 아파트는 붕괴되었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무력단체를 처단하기 위한 공격에 이미 민간인 희생자는 400명을 넘어셨고 실종자는 200명을 넘어셨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변호하기에 바쁘고, UN은 그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덕분에 정의란 무엇인지. 그것이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한 조금은 우습지 않은 생각도 했다. 이런 생각을 아주 많이 하게 되는 그런 날들이다.
레퀴엠은 진혼곡으로 죽은자를 위한 미사를 위해 사용되는 곡이다. 전쟁에 죽은 자를 위한 레퀴엠이란 의미에서 진중권은 전쟁에 대해 전쟁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필 이 책은 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던 시점에 쓰여진 책이어서 그 전쟁에도 이야기가 많이 할애되었는데, 놀라운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의 슈퍼파워와 사람들이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과, 지금 미국의 힘과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현실이란 이토록 잔인하고 무서운 것인지, 그 수많은 반전시위들과 그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하나 변한 것은 없다.
이 책에서 나를 고개 숙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현실에서도 나오는 그의 사고이고 그의 신념이다. 이라크 전쟁에 우리가 파병을 결정할 때 우리는 국익을 위한 다는 명분으로 우리 군인을 이라크로 보냈다. 우리는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이 옳지 않다는 것을 모두 알고 었었지만 ''국익''이라는 이름 앞에서 머뭇거렸던 것이다. 우리는 ''전쟁''이라는 이름 앞에서도 이라크 어느 땅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앞에서도 우리의 국익을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레바논 어느 곳에서 죽어가는 아이에게도 우리는 국익을 이야기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전쟁의 정당성에 대해서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이익이라는 이름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돌린다. 무심하게도. 하지만 나도 그랬다. 군인을 파병하는 것이 말도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당신은 그때 나처럼 그러지 않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우리에게 전쟁은 언젠가부터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닌 철처히 이익을 위한 것이 되어 버렸다는 그의 말을 뼈 아프게 받아들였다.
세계 1차 대전을 겪은 후 서구 사회는 극심한 공황을 겪었다. 실제로 사상자만으로 따지면 2차 대전이 더 많았으나 서구 사회에 미친 충격은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수많은 무기가 개발되고, 무엇보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 전쟁이 그때까지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참호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총을 쏘아야만 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었던 인간에 대한 회의가 서구 사회를 휩쓸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전쟁을 겪었다고 해서 그런 공황을 겪지 않는다. 특히나 저자의 말처럼 현대의 하이테크 전쟁이 인간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컴퓨터 게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모니터로 미사일이 명중 한 것을 확인하는 시대에 그 목표 지점의 사상자는 TV에서 보여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것만을 믿고 미디어가 보여 주는 것만을 보는 지금 우리에게 전쟁은 그 어떤 반성도 고뇌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순전히 지금도 머리위로 폭탄이 떨어지는 그들만의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 지구 반대편에 어딘가에는 레퀴엠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나로써는 그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정의란 존재하는 것인지. 힘의 논리만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인지. 모르겠다. 진정. 신은 인간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인상깊은구절] 그 어떤 무기도 그 어떤 군대도 미군이 지키는 그 성의 견고한 벽을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소총 대신 촛불을 들고, 수류탄 대신 장미꽃을 꽃고, 폭탄 대신 의약품을 보내는 시민들의 평화시위 앞에서는 그 견고한 요새의 성벽도 언젠가 힘없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예리코 성을 무너져내리게 한 것은 노랫소리였다. 미군이 지키는 제국의 야성을 무너뜨리는 것 역시 요란한 포성이나 찟어지는 총성이 아니라 고요한 반전평화의 노랫소리이다. 사악한 자들이 날뛰는 시대에 야훼든 알라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아마 이런 식으로 역사(役事)할 것이다 |
| 2003년을 뒤돌아보면 가장먼저 생각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전쟁'이란 단어다.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가졌다는 이유로 전쟁을 벌였고 결국 승리했다. 그리고 우리는 편안한 안방에서 간식을 앞에 놓고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CNN이 보여주는 마치 게임 속 같은 화면을 통해 '구경'하였고 별다른 생각 없이 미국의 승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우리의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전투'만 있었을 뿐 전쟁에 대한 깊은 성찰이 빠져있었다. 그것은 비단 이번 이라크 전쟁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현상자체에 대한 성찰의 배제였다. 상황이 이러한 때 그 동안 미학, 철학, 정치문제 등 여러 가지에 대해 우리에게 문제를 던졌던 진중권이 쓴 '레퀴엠'이라는 책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던 전쟁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 책의 제목인 '레퀴엠'은 죽은 자를 추모하는 연주곡의 제목이라고 한다. 책의 제목만을 본 사람은 이 책이 어려운 철학적 담론만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다 보면 그런 생각은 어느새 사라지게 된다. 책의 구성은 연주곡인 '레퀴엠'이 연주되는 순서를 따라가는데, 각각의 장마다 세계대전에 있었던 전쟁에 대한 일화의 소개라든지, 필자가 겪었던 군대생활의 추억을 통해 전쟁에 대한 고찰을 해간다. 마치 군대에 대한 필자의 에세이를 보는 듯 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겹지 않고 경쾌하게 읽을 수 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 가는 필자와 함께 전쟁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전쟁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레퀴엠'은 미학자 출신인 저자답게 전쟁에 대한 미학적 접근을 시도하기도 한다. 전쟁에 대한 미학적 접근은 전쟁자체를 아름답게 보는 파시스트적 접근과, 전쟁이라는 현상을 미학의 관점으로 분석하려는 태도로 나뉜다. 저자의 태도는 후자에 해당하는데 전쟁미학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듣다보면 결국은 파괴적인 전쟁이라는 현상에 대한 깊은 반성을 발견하게 된다. 전쟁에 대한 갖가지 이야기를 풀어놓은 '레퀴엠'을 모두 읽고 나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바가 확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그것은 결국 이번 이라크를 '침략'한 미국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인 동시에 지금까지 인류가 저질러온 비참한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이다. 또한 아직도 정당한 전쟁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고, 심지어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시위에 나가서도 정당한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전쟁에 대해서는 과감히 비판하지 못하는 우리의 야만성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외친다. "선뜻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그만큼, 야만은 아직 우리의 것이다." |
| 물론 이라크 전은 명분 없는 전쟁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손쉬운 비판의 언어에는 맹점이 있다. “반전시위에 나갔던 우리는 이번 전쟁에 반대한 것일까? 아니면 모든 전쟁에 반대한 것일까? 모르겠다. 우리는 왜 이 전쟁에 반대했을까? 그것이 ‘전쟁’이기 때문에? 아니면 그 전쟁이 ‘부당’하기 때문에? 모르겠다. 아직도 우리는 ‘정의로운 전쟁’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 역시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아직 평화주의자가 아닌지도 모른다. 선뜻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만큼, 야만은 아직 우리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진중권은 단호하게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쪽일 것이다. 그리고 ‘반전’이라는, 어쩌면 글로 표현하자면 한없이 진부해질 법도 한 테마에 대해, 에코 식의 정치하고 논리적이며 기발한, 그리고 여전히 지사적이고 지식인다운 철학적 접근을 택하기보다는, 포스트모던 시대다운 미학적 접근을 택한다. 물론 에코도 진중권도, 결국 겨냥하는 것은 윤리학의 맥락일 것이다. 물론 에코의 ‘전쟁의 불가능성’을 얘기하는 엄정한 접근이 방법론적으로 옳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진중권에게 탄복하고 만다. 적어도 내게 더 큰 설득력을 갖는 것은 진중권 쪽인 것이다. 나는 이 책보다 더 감동적인 그의 글을 읽은 기억이 없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병사들의 얘기를 하는 초반. 나 역시 한때 사병이었기 때문인가. 전쟁의 허울과 위선에 대한 논파쯤이야 이제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차세계대전 당시 연합군과 동맹군 양쪽에서 모두 인기를 얻었다는 〈릴리 마를렌〉에 관한 글에서 진중권은 “매일 밤 9시 55분 〈릴리 마를렌〉이 흐르는 짧은 시간 동안 총을 쏘던 병사들은 잠깐 탈영을 할 수 있었다. 그몸이 참호 속에 누워 있는 동안, 병사들의 영혼은 꿈결같이 스치는 선율의 키스에 문뜩 깨어나, 무기를 버리고, 군복을 벗고, 지옥 같은 참호에서 걸어나와, 적과 아를 가르는 전선을 가로질러 저마다 자신의 릴리 마를렌을 찾아 저녁 안개에 휘감긴 가로등 밑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군복을 벗어버리면 영혼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라는 애조어린 상상을 한다. 그리하여 “‘진정한 인간은 탈영병이다’” 진중권은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 병사들의 죽음을 목도한 체험들을 술회하며, 오늘날의 이라크전과 겹쳐 놓는다. “뉴스 속의 미군 병사들은 미사일이 적군의 참호에 명중하자 환호성을 지른다. ‘브라보!’ 무엇을 축하하는 것일까? 인간의 몸이 갈갈이 찢겨지는 게 그렇게도 좋을까? 정밀하게 유도된 그 완벽한 폭발 속에서 그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한 인간이 사방에 흩어진 살점으로, 산산히 흩뿌려진 핏자국으로 해체되는 모습을 떠올렸을까? CNN이 보여주는 화면 속 이라크군의 전차는 하나같이 불을 뿜으며 타오르고 있다. 거기에도 사람이 타고 있었을 터. 용광로처럼 끓는 쇳덩어리 속에서 사람이 까맣게 타죽어 간다는 사실이 왜 그들을 그토록 기쁘게 할까?” “‘현실’ 앞에서 ‘당위’는 늘 무력한 법이다.” 그래도 진중권은 비관적이지만은 않는데, “적어도 서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칸트(Immanuel Kant)가 말한 ‘영구 평화’가 점차 실현돼가고 있다. 그 모든 혼란 속에서도 제3세계 국가들은 선진국과 격차를 줄이며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진척해나가고 있다. 세계인들은 발달한 교통과 통신에 힘입어 점점 더 국가간 혹은 문명간 상호소통의 가능성을 넓혀가고 있다. 이렇게 세계 차원의 영구 평화를 위한 물질과 정신의 토대는 서서히 무르익어가고 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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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죽음 이후에 되살아나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죽기를 원하는 사람 역시 없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이나 생명을 걸고 대의를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도 애초부터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은 그가 누구든 위로를 받아야 한다. 이 단순한 경험칙이 인류에게 종교와 제의라는 특수한 형식을 낳게 했다. 진중권의 [레퀴엠]은 전통적인 레퀴엠 가사를 이용하여 작성된 인간의 죽음에 관한 글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의 죽음에 관한 글이라기보다 ‘전쟁’에 관한 글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는 왜 다양한 죽음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죽음을 다루었을까? 나는 전쟁에서의 죽음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첫째, 죽음의 규모가 대규모이다. 이런 특징은 쓰나미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대규모 참사와 사고로 인한 죽음에도 해당된다. 둘째, 재해나 사고로 인한 죽음이 ‘순간’에 일어난다면, 전쟁으로 인한 죽음은 특정한 ‘기간’을 두고 일어난다. 이는 전쟁을 겪는 사회에서는 최소한 그 기간만큼은 죽음이 일상화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재해나 사고로 죽은 자들이 거의 모두 ‘피해자’인 반면, 전쟁에는 ‘가해자’가 존재한다. 이는 전쟁이 정치적, 사회적 현상으로서, 어떤 ‘의도’가 반영된 현상임을 의미한다. 정리하자면, 전쟁으로 인한 죽음은 <정치적, 사회적 의도를 가지고 일상화되어 버린 대규모 죽음>이라고 하겠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첫 번째 대상자는 역시 전선의 병사들이다. 원해서였든 강제로였든 최일선에 나온 병사들은 적군이 아니라 사신(死神)과 싸워야 한다. 그래서 병사들은 전투가 끝나고 녹초가 된 몸을 참호에 누이면서 꿈에서만이라도 고향을 그리고, 가족들을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을 그린다. <릴리 마를렌(Lili Marleen>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의 노래로 불렸던 이유는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전쟁으로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해야 했던 가슴 아픈 경험과 재회의 소망을 담은 노래 <릴리 마를렌>은 원래 독일에서 만들어진 노래였으나, 그 경쾌한 음율과 가슴저린 노랫말로 모든 병사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 노래가 나오던 9시 55분은 서로 암묵적 휴전상태였다고 했다나... <릴리 마를렌>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 독일군 참호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자 반대편 영국군 참호에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Please louder!" 그러니까 독일군이든 소련군이든 영국군이든 미군이든 그 어떤 병사라 할지라도, 그들이 ‘군복’이라는 송아지 가죽을 뒤집어쓰기 전에는, 그리고 그 가죽 위에 ‘국가’라는 뜨거운 불도장이 찍히기 전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들이댈 이유가 전혀 없는 똑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무기를 버리고, 군복을 벗고, 지옥같은 전선을 떠나 저마다 사랑하는 릴리 마를렌을 찾아간다. 비록 그 밤이 지나면 다시 사신(死神)의 끄나풀이 될 지라도. 전쟁은 또한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의 희생을 불러온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라도 전쟁은 ‘필요악’이 아니라 ‘절대악’이다. 2003년에 이라크를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바그다드를 폭격한 미군과 영국군 사령관들은 민간인 희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다. “어느 것도 완전한 해결책은 없다.” 아니... 해결책은 있었다. 핵무기가 있네, 대량살상무기가 있네 하는 증명되지 않은 명분을 갖다 맞춰놓은 전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 있어서 당시 우리나라 정부가 미국의 파병요구에 응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그리고 이 결정은 개인적으로 참여정부에 실망하게 된 두 가지 사건 중에 하나이다. 당시 참여정부는 기존 정부들과 달리 대미관계에 있어서 자주성을 강조하였건만,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미국의 파병요구에 “국익을 위해서”라는 말로 응하였다. ‘이라크 민중의 해방’, ‘대량 살상무기 제거’와 같은 미국이 내건 명분이 허황된 것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결국 그들의 목적은 중동의 석유자원을 확보하고 친미 정권을 세워서 그 지역의 반미 국가들(특히 이란)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 뻔한데, 거기에 생뚱맞게 우리나라의 국익이 왜 들어가는지... 혹시라도 전후 복구에서 떨어질 경제적 떡고물을 기대하며 ‘국익’ 운운했나? 민간인 사망자와 부상자의 참혹한 광경, 가족을 잃은 어린아이의 공포와 망연자실, 삶의 의미가 송두리째 뽑혀진 그 곳을 보면서 돈 벌 궁리나 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지지했던 정부, 그래도 내가 표를 던져서 뽑은 정부는 우리가 가해자로 참여했던 베트남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단 말인가? 불타는 로마를 바라보며 안전한 황궁에 거했던 네로 황제는 그걸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시를 짓고 노래를 불렀겠지만, 로마 시민들은 생명과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우리는 네로 황제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로마 시민의 편을 들어야 하는가? 파병 찬성 시위를 벌이며 ‘한미 혈맹’, ‘국익’ 운운하면서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일이 남의 일인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생지옥에 가족을 둔 이라크인들은 초라하게 앉아 슬픔과 걱정으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누구의 편에 서야 했는가? 대량 살상에 가해자가 있으며, 가해자가 승리자가 되는 순간 그가 행한 가해는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한다는 것도 전쟁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어느 프랑스 정치학자의 말을 인용해 보자면, “오늘날 전세계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유일한 위협은 오직 미국 자체다” 맞는 말이다. 우리 입장에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두려운 이유는 그 원칙이 언제 어느 때고 한반도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베트남과 이라크를 비롯한 세계 각처에 엄청난 폭탄을 떨어뜨렸던 미군 폭격기가 한반도 상공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미국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정치적 실체가 한반도 북쪽에 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정말정말 웃기는 일이 일어난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부시 대통령이나 미국인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Pax Americana를 부르짖을 수 있다고 인정하자. 하지만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걸핏하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어대며 ‘한미동맹 강화’,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를 외치는 한미동맹교 교주와 신자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란 말인가. 미국이 벌이는 전쟁에 온갖 도덕덕 정당성을 부여하고 파병이나 금전적 지원 등 실질적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목놓아 주장하는 사람들이여! 그 정성의 아주 조금이라도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여 죄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없겠는가. 진중권의 [레퀴엠]은 170여 페이지 정도 되는 얇은 책이면서, 짤막한 8개의 이야기로 다시 구분해 놓아 어려움없이 읽힌다. 하지만 서문에 써놓은 그의 말은 보통 무거운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야만은 아직 우리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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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라는 이름도 그리 흔치 않으니 내가 저자를 처음 접한 것은 아마도 그의 번역물을 통해서일 것이다. 아마 90년대 초반일 것인데 당시에는 미학에 대한 세미나가 꽤 붐을 일으키고 있을 때이다. 맑스레닌주의철학에 대한 학습이 절정을 지나 슬슬 쇠락의 기운을 띠고,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슬슬 유행을 할 기미가 보이는 그 틈바구니에서 루카치 미학을 비롯해 북쪽의 문예이론, 모택동의 문예이론까지를 뒤죽박죽 들추던 시기라고 기억된다.
당시 새길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러시아의 미학자 모이세이 까간이 쓴 『미학강의』라는 두 권짜리 책의 번역자가 바로 진중권이었다. 생각이 난 김에 『미학강의』라는 책을 꺼내보니 가관이 아니다. 붉은 색 색연필과 파란 색 사인펜으로 밑줄을 긋고 지금의 책보다 한 포인트 반 정도는 작은 활자들 사이에 빽빽하게 무언가를 적어 놓았다. 미를 대하는 방식으로서의 인식론과 가치론, 형식과 내용의 결합과 우열, 인간과 자연 그리고 사회 속에 포진한 미와 추, 각종 예술의 형태 분석을 통한 예술의 이해와 같은, 지금은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황망하기 그지없는 추상어와 개념어로 가득한 책을 이렇게 열심히 보았다니. 물론 시간의 낭비라거나 지적인 허영의 소산으로 당시의 노력을 평가절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담아낸 진보적인 이론의 편린과 사상의 다각화를 위한 철학적 편력이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인자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그 이후 진중권을 다시 만난 것은 『미학 오디세이』(적극 추천, 두 권으로 되어 있으며 원시시대의 예술부터 현대의 예술까지를 넓지만 뚜렷하게 훑어준다. 게다가 예술을 대하는 미를 대하는 플라톤의 관점과 아리스토텔레서의 관점을 대화의 형식으로 풀고 있어 이해를 돕는다)라는 이백프로쯤 독자를 만족시키는 책에서였다. 이후 그는 까간을 번역할 때와 같은 무모하다싶은 열정을 가슴 속에 품은 채 관점이 뚜렷한 예술의 이해를 돕는 대중적 개론서,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사회의 심층부를 미학자의 날카로움으로 해부하는 사회비평서를 꾸준하게 발표하고 있는 듯하다. 이번에 읽은 『레퀴엠』은 저자가 전쟁에 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레퀴엠이라는 음악의 형식, 특히 벤자민 브리튼의 <전쟁레퀴엠>의 목차를 그대로 빌려와(1장에서 8장 중 2장에서 7장까지의 목차에 이용) 전쟁이라는 내용을 담는 형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책의 전반부는 세계대전 중에 독일군과 연합군 양측에 공히 히트되었던 <릴리 마를렌>이라는 노래를 주제로 전쟁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잠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전쟁에 대한 기억들 몇 개를 언급한다. 그리고 중반 이후는 거개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계의 반란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기술을 생산이 아니라 파괴에 사용하는 도착증, 이것이 파시스트 문명이다. 그리고 자기가 만들어낸 것을 스스로 파괴하며 미의 쾌감을 느끼는 변태성, 이것이 파시스트들의 감성이다.” 물론 이때 주요한 비판의 대상은 미국을 비롯한 전쟁 동조적 선진 세력이지만 정작 그가 공을 들이는 것은 전쟁이라는 필요불급의 실체에 대한 이해이다. “가공할 파괴력을 무기로 한 가학의 숭고함과 초인간적 희생을 무기로 한 피학의 숭고함. 한쪽은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해 숭고한 효과를 연출하고, 다른 쪽은 봉건적이고 종교적인 심성을 동원해 또 다른 숭고한 효과를 연출한다. 한쪽에는 감정이 메마른 차가운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괴물이 서 있고, 다른 한쪽에는 뜨거운 파토스로 가득 찬 종교적 비합리성이라는 괴물이 서 있다. 이 두 괴물이 서로 맞붙어 인간의 척도를 넘어서는 숭고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라크 전선에서는 이렇게 두 개의 숭고함이 부딪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현대 사회의 전쟁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책을 정리하고 있다. “문명화 과정을 통해 근대인은 내면의 폭력성과 공격성을 다스리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쟁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럴까? 낭만시대에는 전쟁의 원인도 다분히 운문성을 가졌다. 하지만 사회가 산문화한 시대에는 전쟁 역시 산문적 원인을 갖는다. 호전적이고 다혈질적인 중세의 전사형 인간이 냉정하고 합리적인 근대인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가졌던 그 모든 열정과 정념은 억제되고 그 중 단 하나만 남게 된다. 흔히 ‘이해관계(interest)'라 부르는 물질에 대한 소유욕. 자본주의적 근대인을 추동하는 유일한 원동력은 바로 이 이해관계다. 때문에 오늘날 사람들이 여전히 전쟁을 바란다면, 그 유일한 근거는 바로 이해관계일 것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전쟁에 대한 원고의 청탁으로 시작된 글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충분한 사고와 글에 대한 충분한 점검의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라는 점을 미루어 보았을 때(물론 사건 사고에 대한 시평 형식의 글이야 시간이 생명이기는 하지만) 적절히 안정되어 있다. 드문드문 흥분한 마음이 이성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의 악한 전쟁에 대한 시급한 비판서로서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읽어들 보기를 권한다. |
| 아는 사람이 있다. 친한 건 아니고 서로 오가면 인사하고 잠깐 서서 이야기는 할 정도의 사이이다. 언제 시작된건지도 모르겠을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 그리고 파병이 국내를 들썩일 때 그 사람은 말했다. 국익을 위해 파병은 해야 한다고. 미국의 침략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국익을 위해선 파병이 바람직하다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도. 전쟁반대 파병반대였으나 그 사람과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야만은 아직 우리의 것이다' 대화로 분쟁은 해결되는가. 대화법에 따른 것이리라, 대화하는 이의 예의와 상식과 존중하는 자세... 흔히 수사법이라고도 말해지는 그것. 허나 그것이 정말 분쟁을 해결해주는가. 고집 센 보수주의(도 못되는) 언론이나 돈욕심에 눈이 먼 재벌이 언제 대화에 귀기울이었는가. 그들을 향해 대화를 시도하는 이에게 우린 이렇게 말한다.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고. "야만은 아직 우리의 것이다" 얼마전 김선일씨가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 살해되었다. 2차 파병이 결정된 시점에 온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이었다. 각종 언론에서 다시금 이라크 소식을 다루기 시작했다. 단물 다 빠진 이 전쟁은 세간의 관심이 멀어지자 미군 참수사건으로 다시 시선을 모으고 그걸론 부족했는지 이젠 군인 아닌 민간인도 살해한다. 앞다투어 쏟아지는 이라크 소식에 그러나 테러를 명분으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미국의 잔혹함에 원죄를 묻는 꼭지는 적다. 한 여대생이 카메라 앞에서 말한다. 제가요, 원랜 파병에 반대했거든요, 근데요, 김선일씨 사건이 나니까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너무 화가 나고, 꼭 복수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파병 꼭 해야 되구요, 전투병으로 보내서 꼭 복수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 여대생은 전투병이 전투 중에 죽는 건 생각지 않는가 보다. 대한민국 국군 만세, 생체병기, 죽지 않는 사이보그 대한민국 국군, 미사일 공격에도 절대 쓰러지지 않는 그들. 그들이 이라크에서 복수하고 무사귀환하리라 그녀는 믿는 것인다. "야만은 아직 우리의 것이다" 침략 전쟁을 하고 있는 미국과 부시 정권만이 야만은 아니다. 아는 사람의 파병 찬성에 반대하는 내 입자을 꺼내지도 않는 나에게도 야만은 있다. 계란으로 치부하며 다른 사람의 노력을, 그 의지를 폄하시키는 무리에도 야만은 있다. 야만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자세-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다! 가슴을 두드리는 자세 없이는 전진은 없다. 사랑을 말하는 입으로 파병찬성을 말해선 안되는 것이다. 파병에 찬성하는 이들이 꼭 읽어야할 책, 진중권의 <레 퀴="" 엠="" -="" 죽은="" 자를="" 위한="" 미사="">.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