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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프라하를 여행하게 되면 눈길을 끄는 것이 있는데 다름아닌 오페라 인형극이다. 구도시를 배회하다보면 길거리 악사와 연기자들의 인형극 놀이가 눈에 들어오고 모짜르트 <마술피리>, <돈 지오반니>가 공연되는 광고 포스터들이 여기 저기 붙어 있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프라하에서 모짜르트가 뭔 일이 있었나 궁금해지는 것이 과거 묘연의 사건이 있지 않았으면 프라하라는 도시에서 이토록 모짜르트를 갈구하며 오페라 인형극이 관광 상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을 리 없음을 본능적으로 간파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태생인 모짜르트가 가까운 프라하에 인연이 닿았을 것은 당연하다. 모짜르트 생존당시 오스트리아와 근처 유럽에서는 그에 버금가는 음악가들이 활개를 치며 당대 최고의 호기를 누리며 활동했다. 살리에르도 모짜르트는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위엄있는 궁정음악가였다. 범지구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 <아마데우스>속 살리에르라는 캐릭터는 완벽한 설정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유명했고 내게도 그의 작곡 음반이 있다. 그 음반을 들어보면 모짜르트의 음악과 다르지 않다. 듣기 좋지만 그에게는 없고 모짜르트에게만 있는 뭔가가 분명 간파되는 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모짜르트는 위대하고 살리에르는 평범한 것이다. 분위기있는 발라드가 인기를 누리던 시절 듣도 보도 못한 락의 강렬함과 영원무구한 불멸의 멜로디가 등장한 것이고 그 중심에 모짜르트가 있었던 것 뿐이다. 그 모든 걸 모짜르트는 해냈고 천재적 기질과 즐김의 미학이 피나는 노력속에서 빛이 났음을 말한 듯 뭣하겠는가.
천재였기에 뭐든 해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를 범하는 일이다. 모짜르트는 타고난 천재성에 죽도록 노력하고 인내하며 일을 즐기는 천성적 성실함이 분명히 있었고 그래서 요절하는 그 순간까지 짧은 생애동안 범인이 일생동안 만들어 낼 수 없는 불멸의 음악들을 작곡했다.
나는 그런 그가 한없이 좋다. 음악이 좋고 오페라가 좋고 그 멜로디가 좋고 그 사상이 좋고 시대를 뛰어넘는 천재성이 좋고 21세기 이후 앞으로도 계속 연주될 그의 음악들이 좋다. 모짜르트는 영원 불멸하다. 그의 음악들을 들으면 이 모든 말들이 거짓이 아님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몸으로 느끼는 일은 결코 잊혀질 수 없으며 어디에서든 그 느낌은 살아난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대성공을 거두어 전무후무한 열광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프라하에서 그 성황된 모습을 보러 오라는 초대장이 프라하 극장 지배인 본디니, 두섹부처로부터 비인에 있는 모짜르트에게로 전달되었다. 피아니스트로서 또 음악교사로서 알려져 있었던 프란티섹 두섹(1713~1799)의 부인인 요세파(1754~1824)는 당시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는 소프라노 가수로 1777년 잘쯔부르크에서 처음으로 모짜르트를 알게 되어 그 후에도 계속 교재를 가져 왔었다. 모짜르트는 처음으로 이 사교적인 여성에게 우정 이상의 것을 느끼고 있었고, 요세파도 <후궁으로부터의 유괴>를 프라하에서 상연시키는 등 여로 모로 모짜르트를 돕고 있었다.
1787년 1월 11일 <피가로의 결혼>이외에는 그의 오페라가 따뜻하게 받아들여지질 않았기에 모짜르트는 이 초대를 기뻐한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그는 프라하에 입성하게 되었고 그 달 17일에는 <피가로의 결혼>이 상연되고 있는 극장에 나타나 청중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고 20일에는 손수 지휘를 하여 프라하의 청중을 더욱 열광시켰다. 요즘 영화 시사회가 열리는 무대에 잠시 캐스팅 배우들이 등장해 관객을 열광시키는 등 영화의 집중도와 광고효과를 드높이는 일이 허다한 것처럼 당시에도 그랬던 것 같다.
이 사이에 모짜르트는 [D장조]의 교향곡 (1786년작으로 오늘날 [프라하]라고 불리고 있다)을 지휘하고 피아노 즉흥 연주를 하는 등 프라하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게다가 <피가로의 결혼>을 상연하고 있던 극장주 본디니로부터 아마 모짜르트도 은근히 기대하고 있던 대로, 100두카트의 사례를 조건으로 새로운 오페라 작곡의 의뢰를 받아 의기양양하게 2월 말경 비인으로 돌아왔다.
이 새로운 오페라의 대본은 대성공을 거둔 <피가로의 결혼>과 마찬가지로 비인 제실 극장에서 일하던 유대계 이탈리아인 로렌쪼 다 폰테에게 의뢰되어 4월 상순에는 대본이 모짜르트의 손에 넘겨졌다. 작곡은 그 해 여름까지 태반이 끝나고 9월 상순에는 미완성의 초고를 들고 모짜르트는 두번째로 프라하를 여행했다.
에두아르 뫼리케(1804~1875)가 2년을 걸려서 쓴 그의 최후 작품인 아름다운 단편 소설 <프라하 여행길의 모짜르트 Mozart auf der Reise nach Prag>는 이 여행을 소재로 한 것이다. 프라하에 도착한 모짜르트는 본디니의 융숭한 대접을 받고 두섹 부처로부터 교외의 훌륭한 별장 빌라 베르트람카를 제공받아 참으로 좋은 환경속에서 이 신작을 완성하였다. 오페라 <돈 지오반니>의 서곡은 초연 전전날 하룻밤 사이에 작곡되었다고 한다. 모짜르트 곁에서 부인 콘스탄쩨로 하여금 지켜보게 하여 펀치를 만들게도 하고 옛이야기를 하도록 하는 등 흥겹게 웃으면서 작곡을 했는데, 졸려서 붓이 잘 나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한 시간 후 부인이 깨워 줄것을 약속하고 모짜르트는 잠들었는데 너무도 곤히 자는 탓에 그를 깨운 것은 두 시간 후인 아침 5시였다. 아침 7시 사보 담당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서곡을 어김없이 받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작센 왕자의 신혼 축하로 10월 14일 초연예정이던 <돈 지오반니>는 가수의 형편과 연습 부족으로 공연되지 못하고 대신 <피가로의 결혼>을 상연하였다.
이듬해 5월 7일 비인에서 초연되었을 때는 약간의 수정이 가해졌고 1787년 10월 29일 프라하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돈 지오반니>는 프라하를 단숨에 들끓게 했고 대성공을 거둔 <피가로의 결혼> 못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모짜르트는 가수들의 역량에도 상당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의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을 지 의심이 갔지만 결론은 모든 일은 잘 진행되었고 지금까지 프라하에서 상연된 오페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오페라라고 평가받게 되었다.
비인에서의 초연은 별로 환영받지 못했지만 바이마르에서의 초연(1792년)을 들은 괴테는 실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은 둘도 없는 뛰어난 작품이며 모짜르트가 죽은 뒤에는 이런 오페라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괴테는 정말 뛰어난 감각의 소유자이다. 그의 글은 절대 틀림이 없다고 본다.
매번 음반을 듣고 무대공연을 보고 글을 정리하지만 내 글의 내용들이 얼마나 전달이 될지 의문이 든다. 아는 자는 알고 모르는 자는 모르는 내용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책이 그러하듯 읽지 않고는 그 느낌 전달이 제대로 될 리 없고 음악 또한 마찬가지로 듣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고 느낌전달은 물론 작곡자의 작곡 동기조차 이해하기 힘들다. 잘 정돈된 글을 이해하기보다는 듣고 또 듣고 자기의 느낌을 자기의 것으로 가지는 것, 그것처럼 소중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고 본다. 그 느낌이 혹 좋은 쪽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취향과 맞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널려진 그 모든 음악들의 기준이 바로 이 한 사람, 모짜르트에게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게 된다면 그만큼의 성과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모짜르트가 바흐보다 먼저 태어났더라면 그가 음악의 아버지가 되었을 거라는 딸아이의 말이 사뭇 결정적인 한마디로 작용하는 것을 보면 음악은 그만큼 순수하게 들어야 한다는 말이 맞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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