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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2021-03-22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140여년만의 도스또예프스키와의 조우는 실로 첫 시작부터 흥분과 설렘으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매일 '짧지만 깊게 읽기'라는 삽으로 까라마조프의 탄광을 파들어가자는 책략으로 읽는 탓인지, 오늘 읽은 페이지의 한마디 한마디가 주는 무게가 남달랐습니다.
서문을 포함해서 애매모호함, 어리석음, 순박하고 단순함, 연극 같은 단어와 문장들이 제 눈을 노크했고, 저는 그 중에서 연극이라는 단어에 주목을 했습니다.
한평생 사람들 앞에서 다양한 배역을 맡고, 연극을 꾸며나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닐까하는 생각과 더불어 날것같은 삶에 대한 동경을 갈망하는 지푸라기같은 희망의 빛을 가슴 한 켠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2일차] 2021-03-23
알료사를 처음 만나는 날이네요.
타인에 대한 심판자로, 남을 향한 비난과 책망으로 일평생을 채운 저와 정반대의 사람을 만나게 되니 질투심과 함께 묘하게 끌리는 매력을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결코 앞에 나서려고 하지 않는 성격으로 누구도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지 않고, 어떤 모욕도 가슴에 새기지 않으며, 언제나 신뢰감 넘치는 눈빛과 표정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알료사는 저를 첫눈에 반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주인공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매력적인 알료사가 걸어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길이 무엇인지 너무 궁금하네요.
[3일차] 2021-03-24
오늘 읽었던 부분에서는 제게 손을 내미는 문장을 만날 수가 없어서 고민이 깊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사람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세가지가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 해야할 일, 그리고 희망하는 것이라는 어떤 책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알료사의 꿈과 나의 희망하는 것이 겹치기도 하고, 매니저님께서 공지하신 이번 주 생각에서 당신이 믿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묻는 질문과도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이 문장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알료사는 운명의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 또 그의 꿈은 어떤 변화를 가질까 하는 궁금증을 떠올리면서 까라마조프 탄광속에서 곡괭이질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4일차] 2021-03-25
오늘은 삶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들과 그 해결 방법에 주목을 했습니다.
그 원인을 바깥에서 찾으려는 탓에 해결의 성과도 없이 그 문제를 맴돌거나 제자리 걸음만 하게 된다는 것이죠.
모든 원인은 나로부터라는 생각으로 시작해서 올바른 나를 완성해가는 그 과정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 과정을 수치스럽게 생각해서는 안되겠죠. 인간은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는 말처럼 끊임없이 변하고 흘러가는게 인생이 듯이.
가장 중요한 밑바탕은 진실함 또는 정직인데, 그 진실함은 나를 신뢰하는 것이고, 그 믿음은 연약한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내면의 마음가짐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5일차] 2021-03-26
'내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겠습니까?'라는 문장이 오늘 제가 까라마조프 탄광에서 캐낸 석탄입니다.
이 석탄으로 제 마음의 난로에 많은 생각들을 ??불피우며 또한 고민했습니다.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행복에 넘치는 인간은 없다라는 명제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행복과 불행의 경계에 머무르며 그 사이를 왕복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 않을까하는 저만의 결론에 이르러 보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나오는 이야기처럼 최선의 행복은 사랑이라고 이야기해야겠죠.
공상적인 사랑을 실천적인 사랑으로 전환함으로써 영혼 불멸의 확신과 행복을 마주칠 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선은 마음이 아닌 실천이라는 진리를 제 마음에 담았습니다.
[6일차] 2021-03-27
봄비가 내리는 토요일, 아들과 도서관에 와서 차분하게 오늘의 프로젝트를 실행했습니다.
오늘 부분은 드미뜨리의 등장이 아주 흥미로웠고, 자본주의로 급변하는 러시아 사회와 교회의 시대적 상황을 체감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특히, 드미뜨리의 성격을 이야기하는 부분을 선택한 이유는 이 문장에서 바로 나라는 인간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생각의 ??회전목마를 타고서 즉흥적인 이성의 사고를 하는 모습이나, 감정의 동요와 더불어 쉽게 발끈하는 제 성격과 이렇게도 닮았을까 하는 공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흐르는 강물처럼 언젠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인생의 강물을 흘러가고 있을 저를 응원하며, 내일의 까라마조프가의 이야기를 또한 기대합니다.
[7일차] 2021-03-28
타락의 화신처럼 보이는 표도르 빠블로비치의 말에서 저는 오늘 공감의 문장을 찾았는데요, 진실이라는 단어와 영원한 장벽이라는 말에서 제 마음이 고개를 끄덕이는 듯 했습니다.
우리가 내뱉는 말들에 담겨있는 허위와 위선을 생각했고, 그것으로 만들어진 고상한 가면을 쓰고 사는 우리의 삶을 고민했습니다.
이를 통해 어릿광대에 지나지 않더라도 진실을 닮은 말 한마디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처한 상황속에서 만들어지는 장벽들을 또한 생각했는데요. 두려움으로 영원한 장벽을 만드느냐, 아니면 일어서서 종이벽을 찢느냐는 오직 나의 의지와 용기에 달렸음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까라마조프 탄광에서 캐낸 나의 석탄으로 ??불을 지필 수 있음에 매니저님, 그리고 함께하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8일차] 2021-03-29
저에게 오늘의 포인트는 드미뜨리였습니다.
드리뜨리의 고백에서 많은 부분들을 공감했는데요.
세상은 수수께끼와 같다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내가 악취와 치욕에 빠져있는지 아니면 광명과 기쁨에 빠져있는지를 모르고 사는, 그 사이를 왕복하는 인간에게 놓인 어쩌면 엄청난 불행들과 진창속에서 세상은 수수께끼가 될 수 밖에 없다라는 것과 헤어나올 길은 죽음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 신이 던져준 유일한 수수께끼가 아름다움이라는 말 역시 제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습니다.
온갖 모순이 공존하고 엄청난 비밀이 담긴 것이 아름다움이며, 마돈나의 이상과 소돔의 이상을 공유한 인간의 마음을 악마와 신의 싸움터라고 비유한 부분에서 곡괭이질을 멈추어야 했습니다. 더이상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서요.
140년이라는 시간을 사이에 두고 현재의 나에게 이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도스또예프스키를 느끼면서 고전의 힘이 이런 것이구나를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9일차] 2021-03-30
알료사가 오늘은 문득 제 손을 잡아주네요.
하나의 똑같은 사다리가 이 세상이고, 나와 타인은 서로 다른 각자의 계단에 있을 뿐이라며 결국 인간은 모두 같은 부류라고 말을 합니다.
내가 처한 위치, 내가 가진 것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길이 올바른 인생을 살아가는 법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드미뜨리와 까쩨리나, 그리고 이반과의 얽히고 얽힌 실타래가 풀어지는 과정이 참 흥미로운 오늘 입니다.
더 읽고 싶은데 100일의 프로젝트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10일차] 2021-03-31
오늘은 스메르쟈꼬프의 등장이 중심인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의 성장 과정에 관한 이야기와 더불어 어떤 사건 보다는 그리고리, 스메르쟈꼬프, 그리고 표도르 빠블로비치간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 세 챕터를 읽게 되었는데 한 마디로 난해했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에 대한 언질이기는 하겠지만, 종교적 색채가 강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네요.
인간이 신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다 허위와 가식으로 덮여있으며, 신앙이라는 것이 결국은 인간의 목숨 보존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스메르쟈꼬프의 대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11일차] 2021-04-01
포도르와 드미뜨리, 부자간의 다툼과 뒤이어 알료사와 까쩨리나, 그리고 그루셴까의 만남까지를 읽어 보았습니다.
그들의 대화가 유독히 가식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착각인가요?
모순, 절망, 불행으로 이어지는 수수께끼같은 삶의 모습도, 선의, 진실, 열정적인 모습들도 보이지만 다들 가면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 인물들에게 보여지는 이중적인 모습들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두가지 상반된 의식의 문제가 알료사와 이반의 대화에서 나오는데요. 가치 판단의 권리에 대한 문제를 두고 서로 상반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반의 이기주의와 알료사의 이타주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2일차] 2021-04-02
알료사가 수도원을 복귀하며 제 1부의 막이 내렸습니다.
약간 부족하지만 제 2부는 내일의 시작을 위해 남겼습니다.
1부의 끝에 다다르면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등장인물들의 시시각각 돌변하는 감정들과 행동들이었습니다.
특히 드미뜨리의 진심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수도, 이해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로 인해 전개될 앞으로의 이야기들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1부를 읽는 동안 느낀 것은 등장인물들이 쫓는 모든 것들이 허망한 경솔과 공허한 속세의 쾌락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과, 결국 이런 삶의 굴곡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2부에서 인생에 대한 궁금증들이 더 풀어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13일차] 2021-04-03
제 2부의 시작과 함께 조지마 장로의 설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마다 자신들의 가슴에서 멀어지지 말라"는 이야기가 유독히 제 눈길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의 죄를 자각하되 두려워말며, 어떤 일에도 자만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증오하지 말라는 삶에 대한 지침도 제시합니다.
오늘의 내용을 돌이켜 보면서 제가 요즘 명상을 매일하는 것도 나의 가슴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한 하나의 노력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차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는 순간 순간들의 합으로 내 가슴에서 계속해서 머무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14일차] 2021-04-04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어 오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면목들을 낱낱이 드러내는 도스또예프스키에게서 많은 부분을 공감하면서 백년전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이런 부정적인 부분들이 두드러지다 보니 제가 느끼는 삶에 대한 회의적 생각들과 겹쳐서 거기에 짓눌린 저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건져낸 문장도 역시 추악한 세계와 그 세계에 있는 추악한 달콤함을 몰래 빨먹거나 아니면 드러내 놓고 먹는 다르면서 같은 사람들일 뿐이라는 인간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표도르의 말인데 저로서는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우울함에 무게를 더해 호올라꼬바 부인과 그의 딸 리즈의 신경질적인 모습이 왜 그렇게 낯설게 느껴질까요?
전개되는 이야기를 더 읽고 싶지만 내일 더 깊은 곳의 보물을 캐기 위해 ??책을 덮습니다.
[15일차] 2021-04-05
이반의 냉소적인 부분들이 왠지 맘에 들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그가 나에게 공감을 이끌어 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크고 작은 사건들의 연속이고 보면 그 사건들에 복수의 사람이 관계되는 것은 필수입니다.
그 사람들끼리의 관계에서 감정이 충돌하고, 많은 굴욕과 자기 비하가 뒤따르게 되는 것을 우리는 불행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죠.
이반이 그 모든 불행의 원인이 얄팍한 자존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저 역시 그 부분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자존심을 버릴 때 행복은 바로 내 옆에서 팔짱을 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삶의 보물 하나를 캐낸 ??식목일 입니다.
[16일차] 2021-04-06
오늘 제4권까지 마무리지었습니다.
알료사와 스네기료프 가족과의 만남과 더불어 일류사란 아홉살 어린아이의 이야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세상의 추악한 진실을 배운 일류사가 측은하기도 하고, 아버지를 위해, 진리를 위해, 진실을 위해서 부당함에 맞서는 아이의 고결한 영혼과 그 용기에 대해 고민해 보았습니다.
마지막에서 스네기료프가 까쩨리나가 부탁한 알료사의 200루블을 자신과 일류사의 명예를 위해 거절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17일차] 2021-04-07
알료사와 리즈의 대화 속에서 오늘 저는 행복의 정의를 찾았습니다.
마음 속에 겹겹히 둘러싸인 말들을 꺼내서 쌓여있던 먼지를 털어보니 그제서야 그 아름다움과 고귀한 가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순종과 양보, 모든 일에서, 한평생.
행복의 미덕은 순종과 양보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가슴에 담고, 매일 순간 순간마다 몸으로 표현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8일차] 2021-04-08
요즘 저에게 삶은 자신의 신념을 잃은 것 같이 보입니다.
그를 향한 저의 신의도 흔들리고, 믿음조차도 사라져서 만사가 귀찮고 하찮게 여겨지다보니 죽는다는 것이 아닌 죽음이 가지는 상반된 의미들을 생각해보는 순간들이 많아졌습니다.
어쩌면 제 인생에 대한 집착과 고집들이 만들어 낸 환멸과 삶에 대한 혐오감들이겠죠.
하지만 이반은 저에게 너가 너의 인생의 술잔에 입을 댄 이상 그걸 모두 마시기 전에는 입을 떼지 마라고 이야기 합니다.
삶에 대한 갈망으로 모든 절망을 이기라고도 충고합니다.
지금 내 앞에 놓인 봄과 파란 하늘을 사랑하고, 내 앞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 잊고 있는 진정한 위업임을 깨닫게 해주네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책을 접하고 읽게 된 모든 조건들이, 그리고 사람들이.??
[19일차] 2021-04-09
알료사에게 고백하는 이반의 이야기가 어제에 이어 계속 되는데, 읽는 내내 이해가 되지 않고 힘들었습니다. 그냥 글자만 읽는다는 느낌이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의 완수를 위해 젖먹던 힘까지 짜냈습니다.
고백의 주제는 인간의 동물적 잔혹성과 그로 인해 겪는 고통들에 대한 이야기들로 시작되는데요. 그 고통들로부터 얻어진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는 말로 이반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어집니다.
타인의 고통에 인색한 나를 인정하며, 또한 타인의 고통과 눈물로 세워진 행복을 받아들이고 동의한 나를 고백하면서 오늘의 프로젝트를 마무리합니다.
[20일차] 2021-04-10
오늘 읽은 내용은 이반이 지은 서사시 <대심문관>입니다.
유난히도 바쁜 토요일인데 내용이 길 뿐더러 난해해서 내일만큼은 진도를 나가지 않고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네요.
이반의 카톨릭에 대한 프리메이슨적 강한 비판이 담겨져 있고, 저 역시 읽어보면서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부분들이 없지는 않았지만서도 여러 곳에서 안개처럼 모호한 느낌과 이해가 같이 섞여있는 제겐 조금 벅찬 내용들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느낌은 있는데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런 기분이랄까요?
그래도 인간 존재의 비밀은 제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가 너는 무엇을 위해 인생을 살아가느냐라고 물을 때 나의 답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고민했습니다.
쭈욱 생각해오던 것이기는 하지만, 저의 답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위해 산다는 것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이 내 삶의 목표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매일 0시가 되면 제 통장에 입금되는 86,400원을 가치있게 사용하는 것이 제 삶의 목표를 돕는 길이기도 하구요.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진실함으로 내면의 평화를 만들고, 그 내면의 평화를 통해 나를 존중하며 살고 싶습니다.
[21일차] 2021-04-11
어제의 <대심문관> 장을 다시 읽었지만 여전히 의문과 의혹 투성이입니다. 명료하게 다가서는 이해도 없고, 그 시대의 종교에 둘러싼 빈껍데기같은 진실을 가장한 허구들만 눈에 가득 들어옵니다.
악마에게 현혹되서 카톨릭이 걸어왔던 길이 얼마나 인류를 불행하게 만들었는지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네요.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운명이 불안과 혼란과 불행이라는 구절을 보면서 제가 느낀 건데요.
불안과 혼란과 불행이라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남겨진 운명이라는 것에 동의를 하지만, 그것만이 우리 운명의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해서 불안 대신에 확신을, 혼란 대신에 평화를, 불행 대신에 행복을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이고 과제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모두들 행복한 일요일 마무리하세요.??
[22일차] 2021-04-12
이반이 모스크바로 떠나고, 표도르가 그루셴까를 기다리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상권이 끝났습니다.
어느새 까라마조프 탄광을 1/3이나 파내려 왔네요, 날짜로는 22일째.
내일의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며, 모두들 화이팅!
마지막으로 오늘 4주차의 생각을 올려 주시고, '이 세상의 진실'과 '꿈'과 '사람'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신 매니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3일차] 2021-04-13
23일차에 중권을 시작하는 것이니 100일 안에 ??책을 끝마치는 것은 여유롭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권의 시작은 알료사의 수도원 복귀, 조시마 장로와의 재회, 그리고 그의 생애 마지막 강론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조시마 장로가 알료사를 표현한 내용이 오늘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긍정적 사고라면 삶이 무척이나 행복하고, 순간 순간이 축복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 이야기의 전개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알료사의 미래만큼은 어떤 확신이 들었습니다, 긍정의 확신이.
그로 인해 불행이 행복으로의 전환되는 거대한 반전이 있을 것 같다는 확신 말입니다.
그런 상상을 하면서 23일차의 프로젝트를 마칩니다.
[24일차] 2021-04-14
조시마 장로의 생애전에 담긴 내용 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고립의 시대 속에 살고 있다는 것에 절로 공감이 가는군요.
자기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만사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세상은 14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를게 없지 않나요?
자기 얼굴을 부각시키는 온갖 행동이, 그 잘난 인정 욕구가 불러오는 것은 충만한 삶의 완성 대신에 완전한 자살 행위라는 말에도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찾는 낙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조시마 장로를 찾아온 신비한 방문객은 저에게 낙원은 세상 어딘가가 아닌, 바로 당신의 마음 속에 깊이 숨겨져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불러낸다면, 평생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어떻게 부르는 걸까요?
제가 꺼낸 해답은 실천입니다. 낙원을 위한 사소하고 작은 친절들을 생각 속에서 이 순간으로 꺼내는 것이라는 저의 답을 꺼내어 봅니다.
[25일차] 2021-04-15
오늘 까라마조프 탄광에서 캐낸 보물은 '잔인한 기쁨들'입니다.
이런 기쁨들이 내 삶의 전부였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어리석은 짓, 해서는 안 될 짓, 너무 빨리 움직인 혓바닥, 몽매한 자만심, 무의미한 싸움들...
이런 기억들이 몰고 오는 슬픔은 한과 자책일 뿐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하지만 이런 진실을 알았으나 내겐 나머지 여생이 있다는 사실에 잠시나마 안도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했습니다.
그 궁리의 궁극은 <자유로워진 인간> 아닐까요?
조시마 장로는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길은 오직 불필요한 욕구를 끊어 버리고, 이기심과 자만심을 억제하며,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늘 보는 세상이지만, 그 속에서 자비의 공덕으로 새로운 삶의 기쁨을 찾아가며 아름답게 늙는 <자유로워진 나>를 상상해 봅니다.??
[26일차] 2021-04-16
오늘이 26일차죠?
아마도 남은 날을 포함하더라도 100일 중 가장 많은 사진을 올린 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의 한과 자책이 부족한 듯이 조시마 장로의 설교를 들으며 저의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는 것을 느낍니다.
그 치부란 나의 집착으로 인해 아이의 마음속에 뿌려진 추악한 씨앗들, 나의 나태와 무력으로 만들어진 사탄의 자만심, 심판자의 자격도 없이 섰던 수많은 판단 착오들, 타인에게서 불러들인 분노와 슬픔들임을 고백하며, 내가 얼마나 오만한 영혼에 온 몸을 내던지고 있는지, 악의에 찬 자만심을 먹고 사는지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이런 썩어빠진 삶, 반성없는 생활, 자기연민과 자기증오를 좌충우돌하는 비겁한 마음과 작별하고자 하는 나의 맹세는 비통하지만, 작심삼일일지라도 그 맹세에서 나는 나 자신을 응시하는 또다른 나와 또다른 희망을 발견합니다.
조시마 장로의 지옥에 대한 정의도 남다른데요.
그는 지옥이란 결코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라고 말하며, 지상에 존재하는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할 때 나는 세월의 소중함을 느끼고, 내가 얼마나 행복에 겨운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내게 던져진 시간과, 이 책과, 문장들에게 무한한 애정과 감사를 드리면서 불합리한 세상 속에서도 내면의 평화를 찾아가는 온전한 늙음으로 내가 다가가기를 기도합니다.??
[27일차] 2021-04-17
어제 나의 편견과 편애, 소망과 분노, 슬픔과 기쁨들에 대해 고해성사를 한 까닭은 내 인생에 당당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고, 헐겁고 어수선한 나의 삶에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연과 더불어 단순한 기적만을 바라보며 살았던 인생인 까닭에 과거 속 순간들을 곱씹으며 나오는 나의 표정들은 가지각색입니다. 창피함, 쑥스러움, 후회 같은 감정들과 섞여 나오는 웃음은 웃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중요한 것은 까라마조프탄광에서 하나의 보물을 캐기위해 땀 흘리는 지금 이 순간이며, 과거의 모든 기억들은 단지 내가 서있는 곳을 밝혀주는 등불임을 믿습니다.
흘러가는 인생의 강 그 어디쯤에 내가 이르러 있는지, 또 어느 곳에서 그 흐름이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내 육신과 정신이 고여있지 않고 조화롭게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그 흐름 속에서 정의라고 할수도 있고, 또는 가치, 의미, 목표라는 다른 말로도 불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제 마음에 자리잡고 있음을 또한 감사드립니다.??
[28일차] 2021-04-18
파 한 뿌리라는 장을 시작하며 그 제목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그 궁금함을 우화를 통해서 풀어주는 도스또예프스키의 화술에 매료되고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 했습니다.
'나는 지옥에 있을까, 아니면 천국에 있을까, 죽어서?'라는 물음으로 시작된 오늘의 사색은 간단했지만 남다른 감회를 선사하네요.
파 한 뿌리의 힘이 그러할진대, 그 합의 힘이라면 결단코 지옥불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거라는 확신과 더불어, 파 한 뿌리는 우리들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고 사소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파 한 뿌리가 인생의 미숙함이라는 바구니와 이기주의라는 덮개 속에서 썩지 않도록 매일 매일 깨끗한 공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도 우리의 몫임을 유념해야 겠지요.
오늘은 일찍 까라마조프 탄광에서 나와보니 차가운 맛은 있어도 날씨에서 봄의 향긋함이 묻어나오는 것을 두눈으로 보게 되네요.
모두들 봄날의 따뜻함을 만끽하는 시간들을 마주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29일차] 2021-04-19
'갈릴래아 가나'라는 장을 읽었습니다.
알료사가 그의 영혼을 찾아온 조시마 장로로 인해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데요. 이 극적인 장면을 상상하면서 읽다 보니 제 마음 속에 들어차는 흥분과 감동 때문에 꼭 알료사 속에 꼭 제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매일 매 순간들을 판단하고 평가하느라 지치고 지쳐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 그 옳고 그름으로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내죠.
그 가치의 기준은 오직 나에게 유익하냐의 문제인데, 과연 유익할까요?
그로 인해 우리는 수많은 감정들의 파도를 만나고, 큰 풍랑을 겪고 난파되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풍랑을 잠재우는 것은 무엇일까요?
도스또예프스끼는 그 답으로 '용서하는 마음'을 제시합니다, 누군가도 당신을 용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면서.
진실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나를 용서하고, 타인을 용서할 때만 잔잔한 평화의 바다를 구경할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요즘 어떤 언쟁 후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었거든요.
도저히 용서하는 마음이 일지 않았는데, 그 사람도 나와 똑같이 나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용서하고, 용서받고 싶은 마음으로 사는 세상이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말에 제 영혼에서 환희의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오늘 용서라는 파 한 뿌리를 적선하는 기적을 체험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30일차] 2021-04-20
제 7권 '미쨔'를 시작해서 1장 '꾸지마 삼소노프'를 읽었습니다.
드미뜨리 표도로비치의 끔찍한 재앙이 일어나기 직전의 이틀 동안의 그의 행적을 밝히는 내용으로 이야기는 시작되고 삼소노프 노인을 만나 돈을 구걸하고, 랴가비라는 상인을 소개받는 내용과 더불어 도스또예프스끼의 개입하에 등장인물의 심정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제3자적 관점의 서술에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스스로 더 깊은 재앙의 더러운 시궁창으로 빠져가는 드미뜨리가 너무 안타깝기만 하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론적 인생관이 마치 진리인양 생각되는 것은 얄팍하고 가여운 저의 본성일까요?
삶의 힘겨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은 무게만 다를 뿐 미쨔나 우리나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매일 그 변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도 마찬가지구요.
다만 그 변화를 위한 행동이 미쨔의 즉흥적이고 자포자기식이기 보다는 진실함과 내면의 평화를 바탕으로 하는 알료사의 마음챙김을 닮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보며 저는 오늘 까라마조프 탄광을 나서는 길입니다.??
[31일차] 2021-04-21
드미뜨리 표도로비치가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만가는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 없습니다.
그가 사랑이라고 명명하는 그루셴까와의 도피를 목적으로 까쩨리나에게 빌린 3천 루블을 갚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들이 전개되고 드디어 끔직한 재앙이 시작되기 직전의 상황까지 이르게 되는군요.
급박하게 전개되는 드미뜨리의 행적들이 주를 이루고 이야기의 진행 외에는 특별한 울림이 있는 글은 없지만, 드미뜨리의 발걸음을 쫓아가다보니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눈 코 뜰새없이 바쁜 상황이 ??책을 읽는 순간에도 있을 수 있음을 체험했지요.
그 와중에 눈을 끄는 문장이 있었는데 '다른 유성에서 온 사람', 다시 말해 외계인을 언급한 부분이었습니다. 140년전에도 외계인에 대한 인간의 시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의 백미는 3장 '금광'의 마지막에 있는 '절굿공이'가 아닐까요?
그 단어만큼 드미뜨리의 엽기적 사건을 예감하게하는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사건으로 바로 달려가야 하는게 당연하지요.
과연 어떤 파멸이고, 어떤 재앙일지, 또 제가 상상하는 그 이상일지 궁금하지만, 다음을 위해서 남겨두는 여유를 저는 선택했습니다.
아쉬워 하면서도 내일을 기다리는 여유라는 짐을 어깨에 매고 오늘도 까라마조프탄광을 나섭니다.??
[32일차] 2021-04-22
미쨔의 감정들이 폭풍우를 만난 듯 요동을 치는 순간 순간들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들이 난파선의 잔해처럼 떠올랐습니다.
특히 누군가의 목젓이며, 코며, 눈이며, 파렴치한 미소까지 가증스러웠던 적들을 들춰보니 마치 미쨔가 바로 나 자신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를 닮은 나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네요.
충동으로 물든 빨간 눈과, 집착이라는 날카로운 갈퀴와 얄팍한 인내심의 방패를 든 모습이 서로 쌍둥이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잠깐 현실 세계로 돌아와 충동적 분노와 증오심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거기에 있었던 내 가족들과 동료들과 친구들을 생각할 때 제 얼굴은 수치심과 자책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그들이 과연 이 분노와 증오에 걸맞는 잘못을 내게 저질렀는지 나에게 되물었고, 돌아오는 대답은 더럽고 비열한 나였습니다.
까라마조프가 제 허물들을 하나씩 벗겨 가다보니 이대로는 뼈만 남은 사람이 될 것 같은 상상도 해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하지만 제겐 알료사라는 희망이 있기에 까라마조프 탄광에서의 곡괭이질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33일차] 2021-04-23
도스또예프스끼는 미쨔의 폭행이 살인으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갑자기 생긴 3,000루블의 행방을 침묵한 채로 그를 그루셴까가 있는 모끄로예로 데리고 갑니다, 권총을 가진채로.
권총이 어떤 사건으로 미쨔를 유혹하고, 또한 그 사건의 매개체가 될 것이 분명하지만 그 속을 알 수 없으니 궁금함을 넘어 갖가지 상상을 하게 만드네요.
더불어 모끄로예를 가기 전에 미쨔는 뾰뜨르 일리치에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남기는데, <길을 열어주고> <자신을 벌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길이 누구에게 열리고, 드미뜨리가 무슨 벌을 받게 될지 물음표을 가득 안고서 미쨔와 함께 그루셴까가 옛 정인을 만나고 있는 여인숙에 도착하는 것으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흥미진진한 주말이 될 것 같지 않나요?
[34일차] 2021-04-24
제 9권 <예심>을 들어가기 전, 8장 '미몽' 앞에서 곡괭이질을 멈추었습니다. 하루에 10장 정도를 기준으로 거의 한개의 장 내지는 두개의 장을 읽어 오면서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체감하였습니다.
깊게 읽을 수 있고, 어느 때는 한 번 더 읽는 재미가 있는 반면에 사건의 전개를 나누어서 조각조각 읽는 순간들로 인해 성급하고 다혈질인 저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미쨔의 이야기가 계속되다보니 표도르, 이반, 알료사를 보고 싶은 생각이 마음 한 켠으로 스며드는 때도 있었습니다.
7장에서는 드미뜨리가 인생의 마지막 날, 마지막 순간, 마지막 밤을 즐기는 벌레 한 마리인 나를 기념한다는 말을 할 때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했지만 사건은 여전히 미궁 속에서 맴돌기만 합니다.
그 중에서 거짓말에 관한 내용을 가지고 깊으면 깊을 수 있는 생각들을 마음 속에 꺼내어 놓았는데요.
50년이라는 세월을 지나쳐 오면서 겪었던 거짓말의 순간들을 기억하고, 거짓말의 맛과 향을 느껴보고, 그 원인들을 따져보기도 했지만 거짓말의 본질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습니다.
한가지 느낀게 있다면 거짓말 속에는 무게는 다르지만 항상 비열함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 무게를 따지기 보다는 비열함에 물드는 그 자체를 멀리해야함을 숙고했습니다.
나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흡족시키기 위해 거짓말이라는 뚜껑이 열렸을 때, 거기서 비롯된 악취로 인해 분명 또다른 누군가는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진실이 있음을 깨달으며 오늘도 저는 까라마조프 탄광을 나섭니다.??
[35일차] 2021-04-25
돌변해버린 봄을 바깥에 두고 까라마조프 탄광 갱도의 끝, 막장의 벽을 찍어서 삶의 가치와 경계적 선상의 인간이라는 보물을 캐내어 갱도 바깥으로 보내고, 찍어낸 만큼만의 갱도를 전진하는 막장꾼을 발견하는 일요일 오후입니다.
이 막장에서 생명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고자 악착같은 마음부림을 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나의 곡괭이질이나, 나의 몸으로 삶에 부딪치고 삶을 주물르는 순간들이나 무엇이 다른지 고민도 해보았습니다.
곡괭이질을 통해 나의 근육에 각인된 노동의 질감과, 사는 동안 내 마음에 새겨진 삶의 모든 흔들림과 감각, 고난과 기쁨은 인간과 삶이 직접성의 관계로 맺어져 있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고, 죽음이라는 명제 아래서만 삶은 살만한 가치를 드러낸다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요즘 두르고 다녔던 우울감의 망토를 벗어 던져버렸습니다.
생활이라는 노동의 순간과 인생이라는 고민의 순간들의 합이 모여서 아름답고 가치있는 삶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니 더없이 활기차진 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드디어 제8권 <미쨔>를 끝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끔찍한 재앙의 진면목이 드러났는데 아버지 표도르의 살인사건이었습니다. 범인은 누굴까요?
[36일차] 2021-04-26
매니저님이 6주차의 생각을 올리시면서 8장씩 읽으셨으면 오늘 2권째를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셔서 살펴보니 제가 천천히 그리고 깊게 읽기로 하고서는 그와 달리 너무 급하게 달려온게 아닌지하는 생각과 함께 당분간은 속도를 늦추면서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혹여 짧은 분량 속에 당장 삶에 대한 깨달음이 없을지라도, 지혜의 곡괭이로 더 깊이 파내려 가는 여유를 배우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읽은 장은 '뻬르호친의 출세'라는 장인데, 제목과 일치하는 문장들을 사진으로 찍어보았습니다.
출세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여기에 언급된 뻬르호찐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실천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매니저님이 올려주신 이번 주의 생각들에 대해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한 번도 쳐다본 적 없는 마음 한 구석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결코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던.
질문에 대한 솔직하고 진솔한 답을 적어 내려가면서 정말 이런게 날것 같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자기 고백이자 고해성사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끝냈을 때 100일간의 제 독후감과 함께 이 고백노트가 가장 값진 보물이 될 것 임을 확신합니다.
이번 주 생각의 주제는 천국, 자유, 미래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내 삶의 천국이 있었던 순간들을 뒤적여서 구석에 묻혀있던 천진난만했던 유초등생 때를 기억 한 켠에서 꺼내어 보았습니다.
제게는 선생님이셨던 아버지를 따라서 섬에서 보냈던 제 어린 시절이 있었는데, 그 시절을 오랜만에 꺼내어 보니 파란 물감으로 칠해진 제 동심이 보였고, 천국의 순간이 그 때였음을 인생 처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감동적인 순간이었고, 그 때를 기억하는 시간 동안 참 많이 ??행복했습니다.
또한 자유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과, 꿈꾸는 미래를 꿈꾸는 시간이 얼마나 제 자신을 성숙시켰는지 고백하면서 막장에서의 곡괭이질을 멈춥니다.
[37일차] 2021-04-27
드디어 이 소설의 핵심이자 중심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표도르가 살해되고 말았네요, 누군가에게.
모든 정황과 물증은 드미뜨리에게 범인의 올가미를 덮어 씌우지만, 이 소설을 읽어왔던 저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범인이 미쨔가 아닐 것 같은 의문이 드는건 저 뿐인가요?
도스또예프스끼의 고의적 기피로 인해 표도르의 살인이 중간에서 생략되고, 그 살인의 장본인을 미쨔로 몰고가는 정황만이 드러나 있는 지금이 제겐 더더욱 범인은 따로 있을 것 같은 확신을 하게 만드는군요. 혹시 스메르쟈꼬프의 간질 발작이 연기는 아닐까요?
더 깊게, 그리고 여유를 가지고 읽자는 약속을 했으므로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해야겠지만, 성질 급한 아쉬움과 궁벽한 상상력 때문에 마음만 안절부절못하고 있습니다.
그 감정을 쳐다보고 있자니 그게 다음장을 넘길 수 있는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설렘과 닮았는데, 요즘 제가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이 이런 작지만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을 느낄 때 거든요.
최근에 누군가에게 ??책 선물과 함께 클래식 음반을 ??선물 받은 적이 있는데, 책도 책이지만 클래식 음반이 너무 아름다운 거에요. Glenn Gould가 바흐곡을 피아노로 연주한 모음인데, 들으면 들을수록 다가오는 감동이 배가 되는 경험을 했어요.
음악을 매번 들을 때마다 바흐와 글렌 굴드를 만나러 가는 설렘의 감정처럼, 마음속에 내일 도스또예프스끼를 만나러 가는 ??두근거림을 간직하며 오늘도 까라마조프 탄광을 나섭니다.
[38일차] 2021-04-28
좀 더 차분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읽자고 해도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오게 만드는 습관이 참 무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low & deep pickax'를 제 손에서 놓치지 말아야겠죠?
어떻게 보면 독서를 포함한 많은 자기 계발들의 중심이 '자기 성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 밑바탕으로 나라는 나무의 ??잎을 울창하게 만드는 것이 그 계발의 종착역 일테지요.
오늘도 나를 성찰할 수 있는 단어를 찾고자 눈을 부릅떴는데요. 비열함과 고결함이라는 상반된 뜻의 단어 두개를 눈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단어에 생각이라는 다양한 양념들로 맛을 내서 내 마음이 좋아할 요리를 완성해 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요리를 맛보면서 비열함으로 점철된 제 모습들을 돌아보고, 제 마음 속에 남아있는 고결함의 희미한 빛을 찾아보았습니다. 다행히 있네요.
더불어 도스또예프스끼의 말대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비열함과 고결함의 공존을 목격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임을 깨달았습니다.
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에서 읽은 '3mm'라는 글이 생각이 납니다.
작가 고틀링은 자신의 삶이 행복한 이유를 자기에게 맡겨진 삼밀리리터 밖에 안되는 세상의 일부를 잘 보살핀 탓이라고 ??말합니다.
그 작은 세상의 일부라면 우리도 잘 보살필 수 있지 않을까요?
한평생 97%의 비열함이 우리 마음에 상처를 내더라도 그리 크지 않는 고결함으로 그 상처를 치유하고 돌보는 지혜를 가진 고결함의 수난자이자 탐구자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의 보따리를 막장 바깥으로 보내면서 성찰의 곡괭이를 내려놓습니다.
[39일차] 2021-04-29
4장 '두 번째 수난'이라는 미로 속에서 어떤 단어가 나에게 뛰어나올지 떨리는 마음으로 서있었습니다.
<참고, 진정하며, 입을 다물어라>는 문장이 두번이나 반복되면서 제 마음의 문을 노크했고, 저는 거기에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참 지혜는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보편적이지만, 결단코 가장 지키고 실천하기 어려운 명제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인내'와 '?내면의 평화'와 '침묵'의 고귀한 가치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이 세 가지를 우리의 마음과 몸에 잘 적용한다면 세상이 가하는 어떤 박해들 속에서도 희망의 지푸리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미쨔의 수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세 번째 수난' 앞에서 멈춰섰습니다. 느릿하게 펼쳐지는 사건 전개의 여유로움이 때론 성급함과 초조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다시 한 번 깊이있는 독서를 다짐하면서 오늘은 일찍 까라마조프탄광에서 발길을 돌립니다.
[40일차] 2021-04-30
드미뜨리의 자백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있는 내용이 반복될 뿐 그 이외의 진실을 찾을 수가 없이 이야기는 흘러갑니다.
꼬이고 엮인 실 뭉텅이가 있는 탓에 얽힌 실타래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얽힌 부분들이??문이 어떻게 열릴 수 있었는지, 스메르쟈꼬프의 짓인지, 미쨔는 수치스러운 돈을 어떻게 구했는지 등이겠죠.
이런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오지만 여전히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은채로 제4장 '세 번째 수난'이 끝을 맺고 마네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될 돈의 출처가 저는 제일 궁금합니다만 어제 자기성찰 속에서 배운 인내의 미덕을 생각하면서 내일을 기다리겠습니다.
어느새 40일차입니다. 갈수록 깊이 읽기라는 과제에서 멀어져서 흐릿해진 마음을 체감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걱정입니다. 아마도 저뿐만 아니라 다른분들도 겪고 계시는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가하신 모든 분들이 힘을 바짝 내셔서 이 고비를 넘어서 종착지까지 함께 동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41일차] 2021-05-01
제 6장 '검사가 미쨔를 사로잡다'를 읽으면서 '수치심'이라는 단어에 귀를 기울여 보았습니다.
'수치심'은 6장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단어이며, 심문 중에서 겪게 되는 미쨔의 주된 마음의 파도입니다.
이 단어를 매개로 오늘은 사람의 마음, 곧 감정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았습니다.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누군가 나를 바라보는 상황에서 발생하지만, 사실 그 상황에서 놓인건 나의 주관적 판단이 대부분이고, 타인의 관심은 미약하기 그지 없다는 사실이죠.
오로지 나 혼자가 계산하고, 평가하고, 결론지어서 마음 밖으로 꺼내는 감정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대니얼 고틀링은 사람의 마음을 '고장난 콩팥'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콩팥은 혈액 중에서 영양분을 많이 걸러내고 극히 일부분만 노폐물로 배출하는 반면, 우리 ?마음은 매일 회상, 예측, 반응등의 수십억의 메세지를 받아들이는데, 불행하게도 영양가있는 생각과 노폐물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90% 이상이 마음 밖으로 배출해야 할 영양가 없는 것들이라고 한다면 수치심 역시 그 노폐물 중 하나가 아닐까요?
수치심의 발로도 따지고 보면 스스로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세상의 중심이 아닌, 3mm라는 세상의 일부로 바꾼다면 모든 쓸데없는 감정들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저만의 자기성찰을 하면서 막장 밖으로 나섭니다.
봄바람이 매서운 입김을 부는 바람에 한껏 옷자락을 여미는 토요일이네요. 모두들 감기 ??조심하세요.
참, 내일 7장에서 드디어 ??돈의 출처가 밝혀지나요?
[42일차] 2021-05-02
오늘은 '고결함'을 빼고 '비열함'에 다시 한 번 주목해 보았습니다.
미쨔는 돈의 출처를 밝히면서 자기 자신을 비열한 악당으로 묘사하는데요. 비열한 인간으로 사는 것도 불가능하고, 비열한 인간으로 죽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읽으면서 비열함이 인간이 가진 뗄 수 없고 본질적인 감정인지 의문을 가져 보았습니다.
비열함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사는 악마인지도 모르고, 평생 도망칠 수도, 떼어낼 수도 없는 그림자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열함에서 멀어지는 방법은 무엇일지 고민했는데, 저는 비열함이 한 줌의 소금이라고 가정해 보았습니다.
비열함이라는 소금으로 인해 짠 맛을 느끼게 되는 작은 그릇의 나와 비열함의 소금이 있더라도 그 맛을 느끼지 못하는 큰 그릇의 나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큰 그릇의 나로 비열함의 존재를 희미하게 만드는게 해결책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마음의 혼란을 퇴비 삼아서 삶의 해답을 찾아가는게 올바른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덧붙였습니다, 제 마음 속에.
사람마다 각자의 보물이 있겠죠. 저에게 보물은 마음입니다, 진실한 마음, 평화로운 마음, 내면의 나를 존중하는 마음.
그 보물의 단점은 매번 보물이 아니라는게 문제인데요. 하지만 보물을 보물답게 만드는 비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소란스레 흐르고, 또 어떨 때는 잔잔하고, 때로는 밝은 빛 같기도 하는 늘 변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것이 오랫동안 아니면 평생 보물로 보관하는 방법 아닐까요???
붙잡을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변하는 마음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가진 비열함의 소금을 희석시킬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석탄을 캐서 어깨 위 성찰의 바구니에 담아 봅니다.??
[43일차] 2021-05-03
오늘은 유독 제가 처한 어떤 아픔으로 인해 우울감의 망토를 다시 뒤집어 쓴 탓인지 마음이 씁쓸해져서 책 한장도 넘기기 힘든 상황이지만, 억지로 읽고 쓰는 행위를 반복했습니다.
어수선한 마음 풍경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도 않고, 고장난 콩팥이 쓸데없는 생각들로 가득차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의문들이 제 문을 노크합니다.
'어떤 감동이 내게 다가와야 결단을 내리고 새로운 빛, 새로운 인생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까?'
'마음에 담겨만 있을 뿐 꺼내지 못해서 먼지만 쌓인채로 희미한 또다른 나는 언제 꺼내어 질까?'
소란스러운 마음으로 오늘 미쨔의 불안한 꿈속을 쫓아가다보니 저역시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는 것 같았지만 아래의 문장에서 지푸라기 하나를 잡았습니다, 희망의.
미쨔의 지푸라기는 그루셴까이듯이, 저는 제가 활활 ??타오를 수 있고, 빛을 향해 돌진할 수 있게 만드는 나의 가족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라도 글 한자 한자를 쓰면서 제 마음을 차분히 바라보는 어떤 위로 앞에 서있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네요.
미쨔의 꿈 대신 저는 희망은 삶의 어느 곳에서도 존재함을 믿으며, 자고 있는 미쨔에게 베개라는 파 한뿌리를 적선한 누군가처럼, 가장 작은 실천이 가장 위대한 의도보다 낫다라는 말처럼, 지금부터라도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작은 기회들로 나를 먼저 행복하게 만들고, 그 행복의 전염병을 타인에게 전파하는 행복한 바이러스 전파자가 되는 꿈을 꾸어봅니다.??
[44일차] 2021-05-04
오늘 드디어 제3부까지의 대장정을 마무리지었습니다. 길고 길었던 여정의 2/3를 거의 다다른 지금 이 순간 가만히 저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얼굴에서 예전과는 다른 표정을 발견합니다.
항상 짓는 표정은 아니지만 그 표정은 저의 집으로 매일 찾아오는 다양한 손님들(감정들)을 반갑게 맞이하려는 포용과 수용의 손길이고 인정의 마음가짐입니다.
어제의 먹구름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그 마음의 풍경이 아름다워보여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습니다.
매일매일 찾아오는 수많은 감정들에 미소지을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미쨔가 저에게 던져왔던 일련의 화두들 때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미쨔가 살인죄를 뒤집어쓰는데도 자꾸 미쨔에게 빠져드는 것 아닐까요?
미쨔와 저는 같은 그림자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맹세로만 점철된 매일매일이 같고,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인간임이 같고, 성실한 척해 보이려는 노력만이 일종의 고통의 표정으로 얼굴에 나타나 있음이 같음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고통으로 나를 정화시키려는 미쨔의 몸부림이 우리가 겪어야 할 인생의 숙제임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삶의 고결함과 정욕의 두 얼굴을가진 미쨔와의 만남으로 제 삶을 고백하게 하고, 반성의 시간을 ??선물한 도스또예프스끼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45일차] 2021-05-05
제4권 <소년들>의 시작과 더불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네요.
꼴랴 끄라소뜨낀이라는 아이가 등장하는데 이 아이가 사건의 어떤 부분을 간섭하게 될지 자못 궁금하지만 오늘의 분량과 내용으로는 추측조차 불가능합니다, 제게는.
더 읽고 싶은 욕심이라는 감정의 손님이 찾아왔지만 반갑게 맞아들이고 잘 돌려보냈습니다, 무탈하게.
오늘은 조금 부족한 '생각하기'를 소년들이라는 제4권의 제목이 주는 의미를 곱씹어보며 채워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페르시아 시인 루미의 '여행자의 집'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저는 요즘 아침 명상 시간에 이 시 낭송을 듣는데요. 내게 건네진 하루를 견실하게 만드는 효과를 체험하곤 합니다.
[46일차] 2021-05-06
미쨔로부터 벗어난 이야기에 예고없이 소년과 어린아이들이 등장하지만 사건과의 연관성을 추측하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퇴역 대위 스네기료프의 아들 일류사와 연관된 꼴랴가 사건의 어떤 ??열쇠를 건넬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상상이 제게는 불가능하기에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일찍 막장의 곡괭이질을 멈추어야겠습니다.
100일의 대장정 중 꼴랴가 건네는 우정어린 휴식이라는 ??선물 하나를 받았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들어 제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책 속의 한줄'을 남깁니다.
제 앞에 놓인 가족이라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는 해야 할 일과, 이 100일의 프로젝트를 끝마치는 희망하는 것이 있어서 저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보며 까라마조프 탄광을 나섭니다.??
[47일차] 2021-05-07
제 4권을 3일째 읽고 있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꼴랴와 소년들의 등장이 알료사를 만나기 위한 일이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알료사를 만날 것 같은 부푼 기대감을 가지고 걷는 중에 책읽기를 좋아하는 끄라소뜨낀의 대화 속의 '편견'이라는 단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꼴랴가 주장하는 바는 인간이 자기만의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세상은 우스꽝스러울지 모르지만, 또다른 판단과 비판력을 가진 누군가가 바라보는 인간들의 사회가 그보다 훨씬 우스꽝스럽다는 것이죠. 꼴랴의 어른들을 향한 비판의 칼날이 정말 예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19세기 러시아의 시대적 모순이 인간들의 어리석은 편견들 때문이라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비판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 편견들이 수많은 차별과 분쟁을 만들고, 충동적인 행동으로 서로를 서로에게 고립시키는 자기만의 울타리를 만들고, 결국 스스로를 감옥 속에 가두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현실 속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아마도 만인이 평등한 진정한 사회주의를 꿈꾸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꼴랴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농부 한 명이 있습니다. 꼴랴는 그를 현명한 농부라고 말하는데, 그의 행동에서 저에게 부족한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편견이라는 이기주의적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명함과 다름을 인정하는 여유로운 마음의 풍경을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충동과 모순이 난무하는 이 시대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자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금요일이네요.
[48일차] 2021-05-08
매니저님이 아시면 큰 일 나겠지만, 오늘 저는 저만의 일탈을 해보려 합니다. 너무 성급하게 ???♂?걷다보니 토끼가 된 기분이 들어서 낮잠을 한 번 자보려구요.
저는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두권의 책을 병행해서 읽고 있습니다. 까라마조프는 100일의 목표로 읽고, 1 내지 2주에 한권씩 다른 책을 함께 읽고 있는데요.
그렇게 읽는 지금 책이 <무진기행>입니다.
김승옥 작가의 단편 소설집으로 몇년 전에 읽었던 책입니다. 읽은 뒤에 제 Book List에 재독을 해야할 책으로 분류를 해놓고 내버려 둔지가 꽤 되었는데, 최근에 누군가에게 다른 출판사의 책으로 우연찮게 선물 받아 재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저는 <무진기행>의 이 문장에 흠뻑 빠졌습니다. 제가 요즘 고민한는 '생각'이라는 화두에 부합되는 글처럼 느껴져서 모처럼만의 보물을 건진 듯 했고 끝내는 <까라마조프> 대신에 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가끔씩 저는 순간 순간마다 제 머리속의 생각들을 바라보면서 생각의 회전목마에 자신을 맡긴채로 탈진해버린 저를 발견하곤 합니다.
그 생각들의 시발점이 대화라고 했을 때 귓속에서 머리 속으로 그리고 머리속에서 심장으로 옮겨가는 생각들을 상상하며 회오리 바람처럼 빠르게 도는 우리 머리 속 기계를 그려보았습니다.
걷기 보다는 뛰기에 익숙한 채로 쓸데없는 생각들에 붙들리고 우리의 나쁜 습관들에 파묻혀서 그것이 고통일지라도 붙잡으려 몸부림치는 우리의 머리 속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그 대신에 한 걸음 한 걸음에 마음을 집중하고 싶다는 소망을 떠올렸습니다.
인생의 기적은 심장에 담는 적지만 좋은 생각의 에너지로부터 나오며, 그 힘을 체험하기 위해 제 마음에 좀 더 여유로운 공간을 만들것을 다짐해보는 토요일입니다.
[49일차] 2021-05-09
알료사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수도사의 법의가 아닌 코트와 ??모자를 쓴 모습이 조금 낯설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반가움의 크기 만큼이나 좋은 이야기들이 알료사의 입에서 나오는데, 특히 저를 꼬집어서 하는 말 같아서 창피함과 진실한 고백 후의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들에 관한 말인데요, 뜨끔했습니다, 제 자신이.
그런 사람들이 가진 소심함, 소심함으로 물든 광대짓, 광대짓 속에 감춰진 진실들, 그 진실을 이야기 못함으로 인한 비극적 비겁함을 지적하는데 정말 공감하고 공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좋게 말해서 감성적인 면이 풍부하다고들 하지만 그런 면이 만들어 보이지 않게 숨겨 놓은 단점이자 아픔을 평생토록 혼자서 힘들게 간직해 왔는데 오늘 이 자리에 그 윤곽이나마 드러나고 보니 일말의 후련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특히 소심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쓴 가면들과, 진실 뒤에 감추어 왔던 저의 진짜 진실들의 부피와 그 짓누르는 무게를 버텨온 어쩌면 비극적이기한 제 삶의 민낯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진실들을 고백할 용기가 여전히 부족함을 또한 고백합니다. 언젠가는 이 모든 것들을 고백할 수 있는 기회가 과연 제 남은 인생 동안에 있을까요?
후련한 마음 곁에 자리를 튼 아쉬운 마음의 공존이 봄과 여름이 같이 느껴지는 오늘의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을 들게끔 하는 일요일 오후입니다.
[50일차] 2021-05-10
도스또예프스끼가 이 책을 완성하고서 3개월만에 숨을 거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소설의 모티브와 몰랐던 이야기들을 오늘에서야 알게되었습니다.
시베리아 감옥에서 만난 친부 살해의 누명을 쓴 남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서 마침내 30년간의 시간이 지난 후 소설로 완성한 도스또예프스끼는 애초에 2부작으로 계획했었다가 후속작을 쓰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1부에서 20년이 지난 시점을 시대적 배경으로 2부를 완성하려했지만 그 선언은 결국 지켜지지 못했던것을 또한 알게되었습니다.
그 배경을 지도삼아 도스또예프스끼가 보여주고자 하는 인간의 내면은 오늘 어떤 모습으로 제게 모습을 드러낼 지 궁금해 하던 찰나에서 '송아지의 유약함'이라는 단어가 제 눈에 띄었습니다.
그 단어 속에서 사람이라면 누군나 가지고 있는 정신적, 신체적 한계인 여리고 약함을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한계를 극복하게 만드는 신념과 용기 그리고 실천을 오늘 알료사를 통해서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신념으로만 남느냐, 아니면 그신념이 실존적 형체를 갖추느냐에 따라서 바다 모래알처럼 많은 약한 자와 위대하고 강한 자로 구분되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면에서 알료사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자신하는 이 소설의 주인공임이 분명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충동적 인간이라는 본연의 모습을 지닌 미쨔에게 저는 어떤 끌림을 느끼지만요.
알료사가 일류샤를 위한 베품의 현장이 드러나는데, 한편으로는 꼴랴에게서 관계라는 인생 필수 재료 속에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떠들어대는 유약한 인간의 본질을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중함과 더불어 침묵이라는 보물을 가진 알료사를 동시에 바라보게 되네요.
짧은 글이지만 오늘도 제 바구니가 가득 차는 그 부피와 무게를 느끼면서 힘에 겹지만 그래도 한걸음 한걸음을 딛는 제 스스로의 의지에 대한 감사와 함께 고개를 돌려 지난 50일의 여정을 돌아봅니다.
[51일차] 2021-05-11
제가 독서를 시작한지가 사오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 기간 동안 해온 여러 고민속에서 많은 생활의 변화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중 신의 존재에 관한 많은 갈등과 고민도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감정적이고 소심한 성격에 하찮은 지식이 쌓이면서 <성인>이 되고 싶어하는 인정 욕구가 생겼고, 그 허영심이, 그 자만심으로 인해 이전 <대심문관>의 추기경처럼 악마가 제 자존심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저는 제 마음 속 진실의 정체를 모르겠습니다.
신이라는 가정이 존재한다는 꼴랴의 말에서 인류를 사랑하기 때문에 신을 믿는지도 모르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생각을 읽어보며 정말 깊은 번민을 내면의 나에게 보내기도 하는 오늘입니다.
그와 더불어 저는 꼴라와 알료사의 삶의 태도에 관한 문제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과시와 드러냄의 욕망에 허덕이는 꼴랴와 문제의 해답을 자기가 아닌 타인에게 구하려는 알료사로부터 어떤 삶의 태도가 올바른지를 배웠습니다.
'삶은 태도의 문제'라는 큰 깨달음이자 또한 평생의 숙제를 또 제 어깨에 올리며 그 깊이와 색깔을 가늠해보는 오늘입니다.??
[52일차] 2021-05-12
모든 감정이 다 삶의 희노애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겠지만, 마음 가운데 자존심이 차지하는 크기나 무게가 상당하고 내성까지 있어서 인생을 쥐락펴락하는 그 영향력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아내 그리고 자녀들부터 내가 만나고 접하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평생에 걸친 자존심 싸움 때문에 너덜너덜해진 상처투성이의 회색빛 제 마음을 바라보니 안쓰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 자존심이 자신을 망치고 있음을 알면서도 마약 같은 강한 중독성 때문에 헤어나지 못함을, 비열하고 냉혹하기까지한 그 진면목을 알면서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둔함을 짧은 이 글 속에 뼈저리게 느끼는 중입니다.
또한 자존심이 과시욕이나 허영심 같은 얼마나 많은 부정적 감정들을 유발하는지 오늘 글을 통해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매일 찾아오는 다양한 감정들이 자존심이라는 촉매제를 만나 암과 같은 돌연변이로 탈바꿈하는 순간들인거죠.
필연코 찾아오는 감정이라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방법에서 문제의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요?
아름다운 손님들, 나의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찾아온 미래에서 온 안내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환영하고 환대하는냐, 아니면 손님을 가장한 ??악마가 자존심에 침투하게 만드느냐는 오직 '내 삶의 태도'에 달려있음을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가슴에 새길 수 있어서 ??행복한 52일차네요.
[53일차] 2021-05-13
살다보면 가끔씩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에 휩싸인 채 외로움을 잔뜩 머금은 안개에 젖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 같은 서운함과 서글픔이 가슴을 짓누르고, 왠지 모르게 온 세상이 나를 비웃고 있는 듯한 생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때 말이죠.
그런데 그건 순전한 저 혼자만의 생각이고 착각에 지나지않는 경우가 대다수 일때가 많죠. 그들은 그런 관심을 제게 줄 여유조차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상상과 공상속에 빠진 우스꽝스러운 저를 주목하게 되는 순간에, 또 다른 누군가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언뜻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는 순간입니다.
그걸 본 우리의 알료사가 제게 이런 충고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럴지라도 당신만은 그러지마라고, 다름 사람과 같아져서는 안된다고.
맞는 말 아닌가요? 아니면 저만 그러는 걸까요?
오늘 작고 사소하지만 이런 ??깨달음이 제 마음에 녹아드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서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독서라는 습관이 좋은 이유는 그 대상으로 하여금 깨달음의 연속 선상에 설 수 있게한다는 점인 것 같아요.
간사하고 알팍한 인간의 마음은 자꾸 변하기 때문에, 그 변하는 마음을 '처음 마음' 곁으로 되돌려 놓아주는게 독서라는 친구의 좋은 점 아닐까요?
내 자신이 어리석고 부끄러운 존재임을 인정하는 용기를 더불어 함양시켜주고, 스스로 반성하게 하는 겸손을 두 손에 쥐어주는 참 좋은 친구라는 생각을 떠올리게하는 53일차의 까라마조프 탄광 생활이 힘들기도 하면서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한 순간입니다.
이런 사소하지만 특별한 것들에 대한 감사로 충만한 채로 남은 47일을 보내고 싶지만 쉽지는 않겠죠?
지금 이순간만 생각하고 또 행동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의 끈을 제 허리에 단단히 묶어보는, 더불어 이번 주말에 드디어 마지막 권으로 발길을 돌릴 생각에 조금의 설렘도 가져보는 목요일입니다.
[54일차] 2021-05-14
오늘 드디어 까라마조프의 두번째 강을 건넜습니다.
꼴랴라는 새 인물과 알료사의 등장과 함께 그들의 대화 속에서 도스또예프스끼가 알려주는 모순들 속에 박혀있는 삶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쇠를 손에 쥔 느낌입니다.
그 느낌이자 공감의 대미는 우리의 인생이 한 평생 불행하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찬미하라는 알료사의 말입니다.
공감과 반박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아주 의미있는 문장인 것 같지 않나요?
이문장에 저는 강한 부정이 최고의 긍정이듯 평생의 불행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찾아 분투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대비시켜 보았습니다.
오늘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불행은 도스또예프스끼의 평생 동안의 수난자적 삶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삶 속에서 그가 불굴의 의지와 함께 걸어온 발자취, 즉 기록들을 찬미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와 54일을 함께 지내면서 이 책 속에 러시아의 시대적 암울했던 자화상과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의 기록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음을 차츰차츰 알게 되었네요.
도스또예프스끼 인생의 수난들이 이렇게 글로 재해석되어 14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저에게 전달된 느낌은 한마디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의 잔치를 제게 열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 진수성찬에 이미 저의 배는 터지기 일보 직전이랄까요?
그런 결실 뿐만 아니라 책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읽게 되면서 단어 하나하나에서 큰 의미들을 찾아가는 과정과 경험 역시 평생의 잊지못할 설렘과 기쁨을 선사하고 있는 중임을 고백합니다.
?비가 예보되어있는 주말이지만 참가하고 계시는 모든 분들께 이 프로젝트가 위로와 휴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55일차] 2021-05-15
드디어 미쨔의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친부 살인사건이 전 러시아에 파장을 일으키는 사건이 되고, 모든 신문과 잡지에 오르내리게 되자 이반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오면서 그가 이야기의 중심으로 부상합니다, 11권의 제목처럼.
과연 진짜 악마는 누가 될지 궁금합니다. 미쨔는 아닐 것이고, 이반일까요, 스메르쟈꼬프일까요?
오늘은 그루셴까의 말에서 비오는 토요일의 보람을 찾았습니다.
크게 다가오고 느껴지는 말보다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상황을 그 말에 대비시켜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누군가 불행을 당했을 때 우리는 즉시 가면을 쓰죠, 그리고 연극을 시작합니다, 결단코 상대방을 동정하고 연민하고 있는 듯이.
하지만 10분 뒤 우리의 마음은 그 슬픔은 별개의 것이라는 듯 또 다른 상황과 타인과의 관계에 집중합니다, 어떤 슬픔도 마음 한 구석에 남겨두는 법 없이.
제가 너무 과장했을까요?
최근 밀란 쿤데라의 [커튼]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쿤데라는 연극에 가려진 커튼을 찢고 진실한 인간의 마음을 드러내라고 말합니다.
냉정하고, 변하기 쉬우며, 충동적인 인간의 본질을 스스럼 없이 드러내면서 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냐면서 말이죠.
오늘 문장이 그 때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만드네요.
결론은 가면 좀 그만 쓰고 그냥 그대로의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있는 돈키호테가 되라는 것이죠.
상대의 불행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는 않지만 ??그래도 가슴 한 켠에 슬픔을 남길 줄 아는 사람, 자기 일처럼 생각되지는 않아도 남의 일은 아니라고 어쩡정하게라도 생각하는 사람, 그런 마음의 진실을 가감없이 드러내며 솔직하게 다가가는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을 어깨 위 바구니에 올려 놓아 봅니다.
[56일차] 2021-05-16
예민한 감수성 때문에 생기는 단점은 극단적일 수도 있는 소심함인데 매일매일 겪는 굴곡 많은 감정의 변화에 피곤죽이 된다는 것이고, 장점이라고 한다면 흔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장에서도 저는 걸음을 멈춘다는 것이겠죠.
오늘 저의 발길이 닿은 문장은 쏜살같이 흘러가는 인생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어떤 의도와 행위를 무시하고 삶은 모든 것을 지나가고, 또한 바뀌면서 결국 노인이 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된다는 익히 존재해온 평범하고도 슬픈 진실에 관한 고백이 뿌옇게 흐린 축축함을 머금은 눈빛 속으로 스며듬을 느낍니다.
[생명연습] 김승옥 작가는 삶의 형성 과정 속에는 번득이는 철편이 있고 눈뜰 수 없는 현기증이 있고 끈덕진 살의가 있고 그리고 마음을 쥐어짜는 회오와 사랑도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지나간 인생의 수많은 변화들이 이런 것들 아니었나요?
그런 변화들을 체험하면서 원래의 둥글었던 내가 무수한 면을 가진 다면체적 인간이 된다는 생각을 떠올려 봅니다.
그런 헤어날 길 없는 생활 속에 휩쓸려 가다가 빠져 나오는 어떤 순간이 있고, 그 때의 나는 시들어 있는 노인의 모습이고, 그 주름살 가득한 눈을 떠서 보면 죽음이라는 ??황혼이 보이는 그림을 상상해 봅니다.
그 그림 속에서 저는 경계하면서 사랑하는 체, 시기하며 친한 체, 기뻐하면서 슬퍼해주는 체, 불끈하면서 너그러운 체하는 저의 또다른 모나리자를 발견합니다.
그 그림 속에서 저는 인생은 꿈속의 꿈이고, 결국 무(無)임을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꿈들에서 깨어나 현실이라는 빛에 눈을 떠야겠죠?
그래서 '있지 않는' 것에 대한 고통에서 벗어나 '있는' 것의 중요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지금을 더듬어 느껴지는 오늘의 촉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달아야겠죠?
[57일차] 2021-05-17
3일째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축축한 습기를 머금고 바쁜 월요일을 지내다 보니 마음까지도 눅눅해지지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프로젝트를 이어가야하는 불굴의 의지로 책을 읽고, 사진을 찍고, 새로운 생각들이 들어와 흐트러진 마음방을 정리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현재 고민하고 있는 생각의 어떤 부분들이 책의 문장과 겹치는 때를 만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했을 때의 뿌듯한 기분이 나머지 하루의 시간 동안을 행복에 젖어들게끔 만드는 체험을 하게 되는데, 어제도 그런 문장과 함께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참 행복한 오후를 보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 행복의 연장 선상에서 오늘 제 눈에 들어온 문장은 침묵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숙고하게 만드는 또다른 ??선물을 건넸습니다.
우리 순간 순간들을 되돌아 보면 가장 어려웠고 하지 못해 후회스러운 일들 중 하나는 아마도 침묵과 경청이 아닌가 싶습니다, 진실한 눈빛과 더불어.
대분분의 경우 쏜살같이 대화의 맨 앞에 서고 싶은 인정욕구로부터 비롯된 조급함이 결국 우리의 말과 목소리로 나타나고, 우리는 침묵의 고귀함을 잊어버리곤 하죠.
타인에게 인정받는 가장 큰 방법이 바로 침묵과 경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고함의 늪으로 빠지곤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자주 발견합니다.
오늘 저는 타인과의 대화속에서 침묵의 담요를 덮고 그 사람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경정의 ??를 쫑긋 세울 때 그 사람의 애정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보편적인 진실을 찾아 꺼내서 먼지를 털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이 위대한 생각이자 의도를 행동으로 옮기는 숙제만이 제 앞에 놓여있음을 깨닫습니다.
[58일차] 2021-05-18
지금까지 까라마조프를 58일째 읽어오면서 가장 잔인했고, 또한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던 날입니다. 도대체 리즈에겐, 그리고 이반과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요?
그 궁금증과 더불어 3장 '작은 악마'에서 인간의 내면의 실체가 날 것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리즈가 알료사에게 고백하는 스스로의 내면 속에서 ??악마와 ??천사가 공존하는 우리 삶의 짓궂음을 발견했고 평생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았고 살며 살 저의 운명을 보았습니다.
인생이란 도대체가 왜 그럴까요?
공상 속에서 즐거워하다가 현실로 돌아온 삶은 따분하기 그지 없고, ??불장난의 욕망에서 멈칫거리고, 악행에 혀를 차면서도 다른 얼굴로는 매력을 느끼고, 거짓말을 하기로 약속이라도 해둔 것처럼 거짓말을 늘어놓고, 질투의 늪으로 스스로를 파멸시켜가는 우스꽝스럽고 꿈같은 인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리즈의 꿈 이야기처럼 우리의 주변에는 우리를 붙잡기 위해 악마가 문 옆이며 방구석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지 않으신가요?
그 줄다리기에 숨막히는 희열을 느끼시진 않나요?
리즈의 고백이 빗자루가 되어 오늘 저는 무릎을 꿇고 경건한 마음으로 더렵혀진 제 마음의 방구석들을 쓸고 있습니다.
더불어 100일 동안의 청소로 제 마음 속 허물 100개가 사라지기를 기도해봅니다.??
하지만, 마지막 리즈의 자해는 너무 끔찍하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어떤 비밀이 숨겨있고 또 밝혀질까요?
내일은 도스또예프스끼가 어떤 인간의 내면을 낱낱히 파헤칠지 기대해 봅니다.??
[59일차] 2021-05-19
오늘은 어쩌면 저의 고해성사가 될수도 있겠네요.
나의 주인공 미쨔와 지낸 59일 동안 어쩌면 저는 제자신을 바라보고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드미뜨리에게 끌려들어갔음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구요.
'찬미가와 비밀'이라는 장에서는 제목처럼 미쨔의 찬미가가 주를 이루는데 많은 부분에서 깊은 공감과 연민을 느꼈습니다.
미쨔의 인생이 곧 나의 인생인 이유는 미쨔처럼 저도 주벽과 무절제의 충동적 삶이자 타락의 지름길로 곧장 걸어들어갔었기 때문이죠.
저 역시 젊음이라는 과도기를 지나 끝 모를 오랜 기간 동안 그 늪에서 빠져 나오질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술에 만취하고 싸움질과 난동이 어디서든 있었던, 무절제의 주벽에 육체적 욕망을 제 몸에 덧씌웠던, 삶의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고 알 수 없는 사상들로 가득차 살았던 고통스러운 날들이 무수했음을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그래도 그 고통 속에서 나의 존재, 연약하지만 착한 영혼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먼 훗날의 태양의 존재를 믿으면서 버텨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 가라앉히고 극복해가는 과정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성격임을 마지막으로 밝힙니다.
그렇게 '새로운 인간'이 된거죠, 미쨔는 살인자의 누명으로, 저는 독서를 통해.
하지만 그런 새롭게 만든 인간이 내게서 떠나버릴 것 같은 불안과 초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명상도 한답니다.
혼자서는 불가능할 '새로운 인간'으로 부활하는 미쨔를 도운건 한 사람의 진실한 믿음이 있었죠, 알료사라는.
저 역시 저의 부활을 도와주고 있는 사랑하는 아내의 믿음과 아들들의 도움에 참 많은 고마움을 느낍니다.
출구 없는 영혼의 비애와 절망의 깊은 심연과 의혹과 불신이 있었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이 아귀라는 미쨔의 말처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라는 학교, 고통의 반에서의 생활을 우리를 성숙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만드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거기에 독서가 정말 큰 도움을 준다는 저의 경험을 덧붙여 봅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정말 가슴 깊이 와닿는 수요일이네요.
[60일차] 2021-05-20
지금까지 까라마조프를 읽어오면서 우리는 수많은 인간들의 위선을 목격해 왔습니다.
이반도 그런 의견에 동의하면서 모든 것이 위선이고, 또 그 위선 속에 또다른 위선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위선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1880년대의 위선이 그러할진대 지금 시대의 위선은 그보다 백갑절은 커졌고 짙어진 그 무게를 우리는 감당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소설속에서 수컷들의 세계고, 충동의 세계이며, 그런 충동에 이끌린 인간들의 악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하나의 가축시장을 우리는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상의 빵을 향한 인간들의 탐욕을 지적하면서 그 빵을 분배할 능력도 갖추지 못한 수많은 인간들은 나약하고 악덕하고 하찮은 반역자들일 뿐이라고 대심문관이 말했던 기억이 오늘 위선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떠올랐습니다.
더불어 끔찍한 고통과 거대한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인간들의 불행한 역사를 돌아보며 그 역사들이 가진 가늠할 수 없는 악의 깊이를 실감했고, 가해자도 인간이고 그 피해자 역시 고스란히 인간들이었다는 ??생각을 함께 떠올렸습니다.
그런 위선들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 소설 속에서 얽힌 실타래가 풀리듯 드디어 살인의 구체적 증례들이 그 모습을 차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반일까요? 스메르쟈꼬프일까요?
살인의 실체가 한꺼풀 더 벗겨지는 내일을 상상하고 또 기약하면서 오늘의 인증을 마무리합니다.
[61일차] 2021-05-21
스메르쟈꼬프의 등장과 함께 드미뜨리의 무죄를 알고 살인의 유력한 용의자로 스메르쟈꼬프를 의심했던 저처럼 알료사도 동일한 마음을 품고 있음을 오늘 알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제 마음을 사로잡은 문장은 가족간의 사랑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문장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내가 얼마나 함부로 대했는지에 대해서 정말 많은 부분을 고민하였습니다.
나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고 그것을 맹신하면서 나의 집착으로 인해 사랑을 동정심으로 변하게 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그것마저도 경멸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진 않았는지 스스로를 반성하였습니다.
타인에게서는 위선의 껍데기 위에 천사인 양 위선의 탈을 쓰고서 수많은 선행을 베풀면서 살았지만, 천사의 탈을 벗어든 집이라는 보금자리에서는 지독한 이기주의와 집착의 ??칼날을 가족들에게 들이대지는 않았었는지 반성하고 또 반성했습니다.
돌이켜 요즘 아내와의 일상적 대화의 순간들을 살펴보면서 참 많은 잘못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집착으로 물든 눈빛, 툭툭 내뱉었던 말 속의 짜증들, 내 기준 이하의 생각에 대한 경멸과 무시, 존증과 배려의 결핍이 드러난 제 행동들이 나와 아내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들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혐오감을 다시 동정심으로, 그 동점심을 다시금 고귀한 사랑으로 변하게 하는 노력이 저에게 절실함을 가슴에 담아서 만들어진 강에 돌다리를 하나씩 깔아 건너편의 아내에게 돌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오늘입니다.
거기에 당연히 포함해야할 것은 자녀들이겠죠.
아이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이 앞에서 팔을 잡아끌면서 내 욕심에 만취된 과거와 현재의 모습들을 반성하고, 아이가 강을 건너며 중심을 잃지 않도록 뒤에서 받쳐주는 사랑의 실천에 대한 미래의 다짐을 가슴에 담았습니다.
이런 위대한 다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의도를 내 가슴에서 꺼내 손에 쥘 수 있어야겠죠.
그와 더불어 그런 마음이 평생 유지될 수 있는 동력을 독서를 통해 보충할 수 있는 노력을 하겠다는 다짐을 까라마조프 노트에 인증하고 등록합니다.
[62일차] 2021-05-22
이반이 가진 저 비굴한 마음과 저급한 의혹들이 결국 유산의 문제, 돈의 문제가 원인이었음을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그렇지만 가장 더러운 것이 ??돈이라는 것에 공감을 하였습니다.
140년이 지나서 모든 것이 변했지만 그때에도 지금에도 변하지 않는 건 오직 돈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가지는 기대, 억측, 어떤 계산 등으로 시람이 돈을 부리는 것 같지만, 인생의 방향이 돈에 부려지고 마는, 결국 속절없이 돈의 노예가 되고 마는 삶의 진면목을 들여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돈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기대나 억측이나 계산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뭘까라는 생각이 요즘 제가 붙잡고 있는 고민입니다.
행동으로 벌어진 결과물이 존재했을 때 거기에 돈이 아닌 진실함이 담겨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일이 벌어질 때 1초가 걸린다고 가정하면, 나는 그 시간을 5분 정도로 늘려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 순간을 객관화한다는 애기죠, 생각과 반응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그 공간 속에서 머무르는 행복을 느껴보고 싶다는 오직 간절한 바램이 있습니다,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는.
그 성공을 위해서는 수용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긍정하는.
어떤 갈등이 벌어졌을 때 대체로 우리는 오해를 풀기위해 그 갈등을 쫓아가는 버릇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쫓아가서 나의 의도를 알리려는 노력이 그 갈등을 더 부풀린 경험이 있지 않나요?
그 욕심을 극복하는 과정이 바로 수용의 마음이고 배려의 마음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마음을 사모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를 소개합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모든 만남은 생각보다 짧다/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부릴 이유는 하나도 없다//
지금부터 백일만 산다고 생각하면/ 삶이 조금은/
지혜로워지지 않을까?
살아있는 동안은/ 많이 웃고/ 행복해지라는 말도/
늘 잊지 않으면서
지금부터 딱 백일만 산다고 생각하며 살려구요, 그 100일에 진실함을 가득 묻혀서 제대로 그 냄새를 풍기면서.
우리가 100일의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먹었던 마음도 어쩌면 이 마음과 닮지 않았을까요???
[63일차] 2021-05-23
이반과 스메르쟈꼬프간의 면담으로 숨겨진 사건의 비밀들이 한꺼풀씩 벗겨지는 과정이 자못 흥미롭습니다.
어제 이반의 다분히 계산적인 측면을 보았었는데 그 성격을 확정짓는 단어가 '수학적 의미'가 아닌가 생각했고, 더불어 그 단어의 의미를 제 성찰의 바구니에 담아보았습니다.
이반이 스메르쟈꼬프를 향해 조소를 떠올리고, 때론 심한 모멸감을 느끼고, 까쩨리나와의 관계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은 모습이 모두 다 계산적으로 비쳐지면서 이반의 삶 자체가 의심할 여지 없는 수학적 의미의 삶으로 여겨지는데 우리의 삶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아마도 평생 피할 수 없는 동지이자 적 아닐까요?
하루, 86,400초을 얼마나 많은 수학적 계산으로 내 자신의 이익을 따지면서 그 순간들을 채웠는지 돌아보았습니다.
수많은 수학적 공식과 계산의 흔적들이 우리의 삶 곳곳에 널부러져 있는 모습들이 보이지 않으시나요?
어떤 미래적인 이익의 기대에 묻히지 않고, 연민으로 계산의 도마를 깨끗히 닦아내고 대신에 정이 듬뿍 담긴 요리를 만들어 내 주변 사람들을 대접해야겠다는 마음 속 다짐을 바구니에 담아보았습니다.
짧지만 굵게 다가오는 의미의 무게가 상당하네요.
그와 함께 1075페이지에서 이반과 까쩨리나의 관계를 '서로에게 매혹된 원수'라고 표현하는 단어가 나오는데 참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부부라는 관계를 정말 잘 묘사한 말 같아서요.
정말 공감하지 않으신가요?
일단 매혹된 끌림이 먼저니 원수는 저 멀리 밀어 놓겠다는 다짐과 제 마음에 담긴 아내의 사랑을 되새기면서 오늘의 프로젝트를 마무리 합니다.
[64일차] 2021-05-24
이반과 스메르쟈꼬프의 세 번째 만남에서 많은 것이 드러나는 만큼 도스또예프스끼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인간의 내면들의 또 다른 실체들을 접하면서 가슴 깊이 울리는 종소리와 그 소리의 흔적들이 남긴 짙은 여운을 느낍니다.
드미뜨리를 비롯해서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스스로를 현명하다 여기며, 그 현명함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이 펼쳐놓은 가식들의 향연을 우리는 60여일 동안 목격해 왔습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그 가식에 앞선 인간들을 향해 '내면의 코미디'를 연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저에게는 순도 100%의 공감이 제 안에 자리를 잡는 순간입니다.
'내면의 코미디'라는 문장을 제 마음에 비추어보면서 제가 얼마나 많은 코미디같은 망상을 머리 속에 떠올리는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망상의 배들을 생각의 강에 띄우는 '제 3의 인물'에 대해서 많은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과연 제 3의 인물은 나 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말하는 또다른 나, 즉 내면의 나 일까요? 이마저도 아니면 그냥 신경덩어리 그 자체일 뿐일까요?
지금 이 순간도 나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내면의 코미디를 바라보면서 그 출처이자 도발자의 정체를 생각하게 만드는 오늘의 문장입니다.
내면의 코미디 없이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의, 날 것 같은 나의 민낯으로 살고 싶은 저의 욕망이기도 한 희망이 있습니다.
50여년간의 희극배우 생활도 이제는 지겨울 때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거짓없는 진실한 마음으로 내면의 평화를 이루고 싶은 저의 바램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비웃음을 알아채지만 그럼에도 저의 삶의 목표를 바꾸고는 싶지 않습니다.
변할 수는 없더라도 조금이라도 닮아가자는 저의 다짐과 노력을 열심히 응원하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추리소설이 아닌 이상 살인자의 정체는 우리가 예상했던대로 스메르쟈꼬프로 드러났지만, 스메르쟈꼬프가 주장한대로 진정한 범인은 이반이 맞는지 그의 행보가 자못 궁금합니다.
[65일차] 2021-05-25
살인자의 고백과 함께 사라진 3,000루블이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반은 스메르쟈꼬프의 도움을 받아 살인 현장의 재현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와 함께 스메르쟈꼬프는 이반에게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암시를 자신에게 건넸다며 법적인 살인 교사의 혐의를 씌우고야 맙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배후로 제 3의 인물을 지목하는 스메르쟈꼬프의 영악함도 발견했습니다.
스메르쟈꼬프에게 강력한 의심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인간의 내면의 진실을 벌거벗기는 살인자의 궤변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네요.
그와 더불어 그의 다른 말에서 오늘은 깊은 사색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똑 같은 영혼'.
도스또예프스끼는 인간은 모두가 현명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산다고 지적합니다.
거기에 인간마다 가지고 있는 영혼(제 3의 인물일수도 있는)을 논하는데요. 그 무게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비꼬기까지 합니다.
그 무게를 구성하는 성분인 돈과 명예, 자만심, 여자, 평화로운 만족, 우월감 등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할 말을 잊었습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말을 빌리면 '나는 너와 달라'라는 인생의 목표를 향해 사는 우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정말 제가 좋아하는 말이에요, 어디든 잘 어울리는 탓에.
오늘 이 말을 들으면서 안도감을 느끼는 건 저만이 아니겠죠?
우리는 모두 똑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서 내가 존재하는 이 순간이 긍정의 기운으로 차오름을 느끼는 ??행복한 하루입니다.
[66일차] 2021-05-26
오늘 도스또예프스끼가 벗겨줄 허물은 무엇인지, 그 속의 보듬어줄 상처는 어떤 모습일지 문득 상상했습니다, 책을 펴기까지.
어제 언급되었던 제 3의 인물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데,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를 추락한 천사라고 하기도 하고, 식객, 때론 ??악마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와 함께 하는 삶은 모호한 방정식에 불과하다고도 합니다.
그 인물을 관찰하면서 저는 우리가 가진 또다른 삶을 생각했습니다.
공상이 만드는 희끄무레한 삶, 모호한 안개와 같은.
전에 한 번 언급한 적 있었던 [무진기행]에서 무진의 안개가 제 눈 앞에 그려지고, 그 주인공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 했습니다.
그 삶에 내포된 불안과 초조, 공포, 수많은 망상들을 보면서 작가는 그 것을 꿈이라고도 하고, 풀리지 않는 완벽한 수수께끼라고 말합니다. 그 부분에서 머리 속이 더 복잡해지는 것은 저만의 고민인가요?
두가지 삶, 모호한 방정식과도 삶과 수학적 계산으로 충만한 명료한 삶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정답은 아마도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삶이 정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경계에 서서 양쪽으로 한 발씩을 딛고 있는 저를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삶을 살아가는 이반과 저에게 측은지심도 들었구요.
그 마음으로 토닥토닥 제 등을 두드리는 누군가의 두드림을 느끼기는 하면서도 무언가 채울 수 없는 아쉬움이 제 마음을 비집고 올라오는, 그런 오묘한 감정의 바다를 바라보는 수요일 오후입니다.
[67일차] 2021-05-27
이반의 악몽이 계속 되면서 추락한 천사의 철학적 담론이 이어지는 장을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이번 장은 인간의 사고에 대한 깊은 성찰이 내재되어 있어서 2권에서의 <대심문관>을 읽는 듯 했습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읽으면서 가장 어렵고, 난해했으며, 깊은 사색이 요구되었던 장을 꼽으라면 <대심문관>일텐데요.
<악마, 이반 표도로비치의 악몽>도 역시 다 읽지 않았음에도 인간 내면의 깊은 탐구와 더불어 삶이자 인생의 적나라한 실체가 완곡하게 드러나는데, 난해한 언어들의 배열에 머릿속이 하얘지기도 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천천히 깊게 막장을 파다가 이 문장에서 그냥 곡괭이질을 멈추었습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 대한 회의가 담론의 중심에 서 있는데 아마도 현실주의자가 된 도스또예프스끼의 사상의 변모가 이와 같은 대립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저만의 짧은 상상을 해봅니다.
도스또예프스끼, 아니 추락한 천사, 아니 이반의 상상과 감정의 화신, 아니 인간 본연의 약점일수도 있는 제 3의 인물이 꼬집어 말하는 세상은 진실과 진심은 언제나 어리석게 보여질 뿐이고, 또 진실은 다 헛소리로 치부된다고 주장합니다.
140년 앞을 내다 본 도스또예프스끼의 통찰에 전적인??동의의 ??표를 던졌습니다.
지금 세상의 모습이 그렇잖아요, 물질 만능주의로 가득찬.
인간의 마음 보다는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삶의 명예를 대신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음을 한 번 더 직시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희망이 존재하 듯, 온갖 부정 속에서도 긍정이 아름답 듯, 이런 불평들 속에서 찾아낸 삶의 지혜는 바로 그 지혜의 실체였습니다.
오늘 저는 지혜의 본 모습, '착하고 명랑한 마음'이라는 금덩이를 캐낸 것 같습니다. 내가 이미 가졌던 보물을 되찾은 느낌이랄까요?
내가 진정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가도록 지켜주는 문학의 힘을 실감하는 목요일 오후입니다.
[68일차] 2021-05-28
심오한 말들의 향연 때문에 진도를 나갈 수가 없네요.
오늘 한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었습니다. 남은 건 긴 침묵과 고요, 그리고 볼펜과 A4 한 장, 생각의 정리를 위한.
인간의 운명은 <부정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는 말에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가지각색의 비평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이 뒤섞인 코미디가 인생의 진실한 모습이라고 도스또예프스끼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순리대로만 돌아가는 인생이란 존재할 수 없지요.
사건이 일어나고, 온갖 불합리한 일들이 만들어지고, 인간은 그런 코미디같은 현실 속에서 생긴 고통을 받아들이는 운명이 자신의 것임을 깨달아야겠습니다.
그 흔하디 흔한 순간들에 필요한 것은 지혜이며, 그 지혜에 대한 갈망만이 성숙하고 새로워진 인간으로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그 속에서 공감의 격렬한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고통이 없으면 인생에 어떤 만족을 느끼겠나?라고 물을 때 행복만으로 살기에는 너무 따분한 세상이죠라는 일상적 답변 대신 저는 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과연 50여년의 내 삶에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친 적은 있었는지?"
돌아보건데 거기에 있는 건 오직 게으름과 나태 뿐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추락한 천사가 부정 방정식의 엑스(X)이고, 시작과 끝을 잃어버린 인생의 환영이라고 자기를 표현합니다. 그러면서 뚱뚱보 장사꾼의 마누라로 변신을 소망으로 말할 때 제 머리 속의 제 3의 인물도 같은 모습일거라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오늘 제 성찰의 산책길은 안개가 자욱하고, 바닥은 개펄 같아서 한 걸음 딛기도 어러울 지경입니다.
걸어가는 동안 내가 행복의 자격은 가지고 있는지도 의심스럽고, 그것은 결핍의 존재가 가져야 할 숙명인 듯 했습니다.
이건 내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부정의 세월들이 기억났고, 그 강물에 떠밀려서 아무리 흘러가도 가까워지는 나는 없을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결국 해답은 없겠지요?
해답은 없더라도 짙은 안개가 조금이라도 엷어졌으면 좋겠네요.
[69일차] 2021-05-29
이반과 또다른 이반의 대화가 현실주의자와 유신론자의 대립으로 그 무대를 옮기고 있습니다
신이 본질적으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이 태곳적부터 유일하게 존재하는 인간 자아의 지속적인 발전에 불과하는지 모르겠다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내면 속 깊은 이야기들이 내안에 잠든 모든 감정들을 깨우는 듯 합니다, 이제 그만 일어라고.
하지만 몇일째 계속되는 ??안개는 걷힐 기미가 없이 진흙탕 속에서 간신히 한 걸음을 내딛을 뿐입니다.
이런게 혼란이고 고통이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하네요.
더불어 인간이 지금까지 받고 있는 고통들의 이유를 과학 때문이라고 말할 때, ??지구를 아프게 만든 결과로 우리가 겪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떠올렸습니다.
인간들의 오만과 독선의 집합체인 과학이 가진 위대함과 악마의 두 얼굴에 긍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간 자아의 지속적인 발전이 만든 문명 사회이지만, 그 사회가 가진 두 얼굴을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거죠.
인간이란 도대체 뭘까요?
그들이 사상과 감정의 화신이라는 말, 실감하지 않으신가요?
그 화신이 만들어낸 완벽하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가 우리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출구 없는 미로를 걷는 우리들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고통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듯이, 온갖 부정 속에서 단련되는 긍정의 힘이 우리의 희망이고 목표인 것을 또한 깨닫습니다.
오늘 천국에 관한 전설에 내세를 부정하다가 지옥에서 재판을 받고 1천조 킬로미터의 형벌을 받게 되는 한명의 사상가이자 철학자가 등장하는데 도스또예프스끼 그 자신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가진 망설임, 불안, 신앙과 불신 사이의 갈등을 보았고, 양심의 가책을 또한 보았습니다.
140년을 넘어가 그를 위로하고, 또 위로받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토요일입니다.
[70일차] 2021-05-30
<악마, 이반 표도로비치의 악몽>을 다시 한 번 읽으면서 이번 장을 마무리했습니다. 까라마조프를 읽어온 70일 동안 가장 오래 머무른 자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 소설가 D. H. 로렌스가 "작가란 원고지에 자신의 피를 쏟아 놓는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에 공감하면서 저도 도스또예프스끼가 이 책에 쏟은 자신의 핏자국과 그의 고단한 삶의 흔적을 보는 듯 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실존주의적 삶의 새로운 세계관이 등장하는데, 도스또예프스끼는 오직 현세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으라고 충고합니다.
그 충고는 우리가 무덤 너머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신을 줄 수 없는 우주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하찮은 존재임을 새삼스레 느끼게 만드는 순간을 선사합니다.
한 순간에 불과한 인간의 삶이 곧 승산없는 투쟁이고, 패배할 수 밖에 없는 투쟁이자 싸움이 곧 인간의 실존임을 자각하게 합니다.
그 싸움과 패배를 극복해서 과거의 노예적 인간의 낡은 도덕적 한계를 뛰어넘어 <인신>이 되자고 외치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웅변에 도취되는 일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행동들이 죄악에 물들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양심의 가책>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보편적인 형벌로 인정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강한 유대감으로 살만한 세상을 만든는 이상향의 대한민국, 어떤가요?
지금 어딘가에 그런 사람들이 가끔씩 보이기도 합니다, 극복이란 ??다이아몬드의 보물을 가진.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현실 세계에서 선한 싸움을 벌이는 모든 개인들에 대한 자연스런 존경심을 가져야 겠다는 다짐을 휴일의 끝자락에 물들여 봅니다.
물론 제 스스로도 그런 다이아몬드를 가지기 위해 노력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죠?
[71일차] 2021-05-31
며칠 동안 이반의 내면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다 보니 무척 힘들고 피곤한 탓인지 오늘 입술이 부르텄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매니저님께서 올려주신 11주차 이번 주의 생각이 제게 큰 힘을 주었습니다.
그 글을 읽고 고백노트에 기록한 생각들이 저에게 따뜻한 위로와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 힘듬이 있음으로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위로를 보내고, 한편으로는 그래도 수 많은 몽상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그 안에서 꿈을 꾸었다며 스스로에게 칭찬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쉬운 건 새로운 인간으로의 부활에 목마른 건 사실이나 평생 현재 진행형이 될 것 같은 불안감이 느껴지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분명히 다르지만, 그 경계선에 서서 양쪽으로 발을 딛고 있는 제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인간에게는 두가지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이기적 사랑과 이타적 사랑말이죠.
이반이 가진 이기적 사랑이 만들어 내는 건 근심이고, 내 기분에 대한 불안이며, 또한 의지에 대한 집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와 함께 내가 가진 사랑의 정체도 궁금했습니다. 당연히 이기적 사랑이겠지만.
이기적 사랑의 본질인 근심과 불안, 그리고 집착이 바뀌거나 사라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타적 사랑만이 그 본질을 바꿀 수가 있는데 그게 알료사의 사랑 아닐까요?. "Love changes everything."이라는 말처럼.
프로젝트에 오늘 성찰의 기록들을 적어가면서 오전의 나와 지금 오후의 나 역시 또 다르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반의 말한 "양심이란 내가 만들어가는 마음의 관습"이라는 생각이 만든 '또 다르고, 더 나은 나'겠죠.
그 양심이 항상 나를 압도하는, 이타적 사랑의 색채를 늘 띄기를 기도해 봅니다.??
[72일차] 2021-06-01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았습니다.
과연 드미뜨리는 어떤 운명의 길을 걷게 될까요?
그 길에 서있는 미쨔를 보면서 인간의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미쨔의 충동적이고 비열한 삶일지라도 그의 삶도 역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투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물음표에 덧붙였습니다.
정체성에 사실 답이 있을까요?
지금의 우리가 찾고 만들어가는 인간의 정체성은 1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더 완벽한 수수께기가 되었고, 여전히 환상이며 손에 쥔 물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재력과 미모, 권력이나 젊음으로 누군가를 정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 물질적이고 피상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가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요? 참으로 불가능한 미션 아닐까요?
우리가 다른 환경에 놓일 때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서 '정체성 찾기'란 나에게서 도망쳤다가 돌아오고, 또다시 도망가는 뫼비우스의 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체성이 결국 나를 찾는 일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그토록 불가능하다면, 그 일을 그만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의 회전목마에서 내려서 자신의 판단을 멈추는 것은 어떨까요?
나의 크기와 모양을 줄이고, 나만의 공식을 폐기하고, 이분법이 아닌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인생을 관리대상이 아닌 선물로 받아들이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말이 기억나네요.
삶이 혼자일 수 없듯이 그 삶에 필수불가결한 구성요소인 사람에 집중하고, 넘어짐도 반드시 예견된 작은 진실임을 기억하며, 넘어져도 일어나는 회복력과 탄성을 길러야 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나를 찾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기 보다는 원래부터 있었던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지혜와, 그로부터 얻은 경청과 공감의 기술로 진실함의 눈과 귀를 달아 나와 타인이 소통하고, 함께 순간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성찰의 ??바구니에 담아보았습니다.
[73일차] 2021-06-02
재판의 무시무시한 숙명적 결말이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미쨔의 변호사라는 새로운 인물과 증인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특히 페쮸꼬비치라는 변호사의 변론이 재판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궁금하네요.
너무나 명백하고 결정적인 미쨔의 유죄를 어떤 증거로 뒤집을지, 그가 숨겨둔 변론의 무기가 무엇일지도 궁금하구요.
그 무기가 드러나기 전, 변호사는 증인들을 불러 먼저 도덕적 명성을 손상시킨 다음, 증인들의 증언에 의심을 유발하게 만드는데, 그 사람들은 그리고리 바실리예비치, 라끼찐, 스네기료프, 뜨리폰 보리시치, 두 폴란드인들입니다.
이들 모두가 페쮸꼬비치의 그물에 걸려드는 과정과 내용들이 자세하게 드러나는 가운데, 제가 주목한 부분은 증인들의 도덕적 명성에 대한 흠집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가진 돈, 술, 출세, 도박, 거짓이라는 공통점에 눈길이 가더군요.
인간들이 만들어 온 문명의 부산물에 불과했던 것들이 이제는 문명의 전부로 바뀌어버린 과거와 또 지금의 현실을 우리는 동시에 목격하고 있으니까요.
이 물질적이고 피상적인 세상이 만든 혼탁한 바다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과 찾아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궁금했고, 정답이 없는 삶의 바다에서 어떤 올바른 과정의 배를 찾아서 타야할까도 고민했습니다.
'만약 ( )한다면'이라는 가정의 그물을 조심하고, '있는 그대로'의 바다를 지금 이 순간 자유롭게 헤엄치는 '나'라는 ??물고기를 또한 상상하며 오늘의 프로젝트를 마무리합니다.
[74일차] 2021-06-03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74일 동안 한 번도 눈여겨 보지 않았던 늙은 의사 게르쩬쉬뚜베의 솔직한 이야기와 회상 속에서 오늘 제가 꺼낸 보물은 '방탕'과 '호두 1푼뜨'입니다.
러시아 속담과 함께 늙은 의사는 우리는 본래부터 훌룡한 운명을 타고 났는데 그 운명을 스스로 버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운명의 정체는 바로 지혜이며, 심지어 두배의 지혜가 찾아오는 행운과 같은 운명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기하고 버렸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나마 가지고 있는 지혜조차도 방탕에 허비하고 만다는 말과 함께, 미쨔 혹은 우리가 가진 지혜의 정체 중 하나가 감사와 감수성이라고 말합니다.
저에게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늙은 의사는 미쨔에게 건넸던 호두 1푼뜨를 회상하는데, 이전 28일차에 읽었던 '파 한 뿌리'가 기억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파 한 뿌리의 힘이 어쩌면 미쨔를 지옥불에서 건져내는 기적을 만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작은 것들을 소중하게 돌보는 생각과 태도를 가슴에서 내 손으로 쥘 수 있다면 파 한 뿌리의 기적이 나에게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쨔는 여전히 저인데, 제가 가졌던 지혜, 즉 감사의 마음과 예민한 감수성을 비교해 보았고, 그 보물을 허비하고 끝내는 잃어버린 저의 방탕했던 시절의 아픔을 상기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건 그 지혜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고, 지금 그 희망을 찾아가고 있는 노력이겠죠?
그 노력의 일부분으로 '호두 1푼뜨'를 나눠주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는 제 스스로를 다독이며 오늘 까라마조프 탄광을 나섭니다.
[75일차] 2021-06-04
이제 3권도 절반을 넘긴 75일차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남은 날을 따져보니 6월에 저희 프로젝트가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길고도 짧다는 말의 진의를 깨달으면서, 제가 걸어온 75일간의 발자국을 가만히 돌아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벗어 놓은 다양한 허물들과 함께 거기에 묻어있는 후회, 반성, 희망과 다짐의 자국들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까라마조프를 주목하고, 사색하고, 찬양하고, 그리하여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순간들을 회상하면서, 책 속에 존재했던 온갖 진실, 용기, 여러 종류의 열정을 또 기억했습니다.
그리하여 내 생각의 호수에 일었던 크고 작은 파문들도 생각이 났습니다.
이 프로젝트이자 책에서 제가 만난 가장 큰 행운은 바로 미쨔를 만나게 된 점이죠. 미쨔의 감정 한 조각,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마다 깊이 공감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칠 때면 난폭해지는 성격이지만, 고결한 마음과 자존심을 가지고 있고, 베품과 희생에 목말라하는 성품을 가진 미쨔를 보면서 그야말로 우리가 가진 보편적 정서의 그림자가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비록 그가 보여준 변덕스러움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 변덕스러움조차도 우리가 가진 본질 중 하나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 글은 어쩌면 미쨔를 향한 저의 사랑 고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행운이 미쨔에게 끝까지 미소 지을 수 있을까요?
[76일차] 2021-06-05
<뜻밖의 사태>라는 제목처럼 미쨔의 재판이 암초를 만나고야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미쨔는 살인의 누명을 뒤집어 쓰고야 말 것 같은 예감도 들었습니다.
이반의 증언으로 인해 풀려질 것 같은 사건이 뜻밖의 사태를 만나 미쨔의 파멸로 치닫게 되는데, 그 사태이야말로 까쩨리나의 또다른 증언입니다.
미쨔와 이반, 그리고 까쩨리나의 갈등을 바라보면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불가능한 일인지를 생각했습니다.
2초 동안의 기쁨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 어리석음을 탓하는 이반이 곧 우리이고, 가족을 위해 몸을 던진 까쨔도 우리이고, 미쨔를 위해 명예를 희생한 또다른 까쨔도 우리이며, 어느 존재에 대한 사랑을 절감하고 깨달은 제3의 까쨔도 우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거쳐온 인생의 다양한 모습들과 내가 가진 자존심을 까쨔라는 거울에 비추어보면서 스스로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는 순간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누구이며,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하지 않음으로 인한 미쨔와 까쩨리나의 어긋난 사랑, 마음 한 구석의 외로움을 줄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악마를 만난 이반, 그 영혼들의 한 부분은 고아였고,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그들의 춤을 보면서 연민의 정이 솓구쳤습니다.
인생이란 또 사랑이란, 처음에는 나에게,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 아닐까요?
'미쨔, 까쨔나 이반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내보였다면 이 사랑의 결말은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한편으로는 이것 또한 지나간다는 말처럼, 우리가 마주치는 다양한 감정들과 상황들을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나의 내면을 키우고 싶은 소망을 가져 봅니다.
우리 모두가 고아라는 사실, 그리고 고아끼리의 연대감으로 서로의 한숨을 듣고, 슬픔을 느끼면서, 두려움 없는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토요일입니다.
[77일차] 2021-06-06
끼릴로비치의 논고를 읽으면서 책에 써있는 대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온 정성을 다해 부르는 <백조의 노래>는 까라마조프 탄광에서 보낸 100일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을 날들 중 하나가 될 것임을 예감했습니다.
그가 마음 속에 감춰진 의문들과 내면의 진실을 드러냈을 때, 그 진지함에 감동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첫 페이지에 거론된 '만성이 된 인간들'에서 더 이상의 진도를 포기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야 하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끼릴로비치는 인간들의 만성화된 사고를 탓하면서 무관심, 미온적이며 냉소적인 태도, 이성과 상상의 쇠퇴 등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런 사고들이 누적되고 축적되어 우리의 도덕성의 기초를 흔들고 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끔찍한 사건들을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으며, 방종과 타락이 빚어내는 공포를 체험하고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이렇게 일반화 되가는 악과의 싸움에 힘겨워하는 러시아 민중들의 모습과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이 닯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논고 중 "어쨌든 그자처럼 살인까지는 하지 않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속으로 그자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고, 또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마음은 그 파렴치한 놈과 똑같다는 말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며 그가 지목한 많은 사람들 속에 제가 서있음을 이 자리에서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체면과 편견에 기대어 살며, 게으름과 나태함에 만성적으로 물들은 제 스스로를 괴로워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행과 싸워야 함을 깨달으며 프로젝트의 77번째 걸음을 힘겹게나마 내딛습니다.
[78일차] 2021-06-07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평생 궁금해하는 문제이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죠.
끼릴로비치의 논고가 계속 되는 가운데, 그는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관해 지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본성에서 지우고 덮어 버리는 영혼의 부재에 관한 문제 제기 앞에서 제가 떠올린 것은 'Memento Mori'였습니다.
'나란 무엇일까?'로부터 가지게 되는 존재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인간은 필연적으로 소멸의 두려움과 불안을 평생 안고 살아갑니다.
삶은 그 자체로 죽음의 연속이며, 처음부터 삶 안에 죽음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죠.
누구든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사실이고, 사실이 그렇다면 인간의 유한성을 부인하지 말고, 살아가는 동안 내내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을 의식하는게 낫지 않겠냐는 것이 'Memento Mori'의 핵심이죠.
그 불편하고 슬픈 느낌이 나를 살아있게 하고, 사랑과 연민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Memento Mori'인거죠.
영혼과 무덤 일체를 지우고 모래로 덮어버리는 것 보다는 지금 이순간 존재하는 나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사는게 내가 온전히 살아있는 느낌을 더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끼릴로비치의 경고가 잊고 지낸 제 바램 두 가지를 기억나게 합니다.
그 바램의 하나는 나 자신이 아무 것도 원치않게 되는 것, 절대적 만족의 경지에요, 절대 불가능할.
소망일 뿐이니 바램을 가져보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또다른 하나는 너무 이르다고 말씀하시겠지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웃는 것입니다.
이 또한 너무 거창할지 모르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고 보면 아름다운 죽음을 바라는 것도 그리 나쁜 소망은 아니랍니다.
열린 마음과 가슴으로 진실되고 정직하게 하루하루를 받아들인다면 못이룰 것도 없지 않을까요?
끼릴로비치 덕분에 등한시했던 죽음을 기억할 수 있어서 좋았던 시간 이었습니다.
그 유한한 죽음 앞에 서있는 저는, 저를 향한 연민 한 보따리를 등에 지고 프로젝트의 78번째의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79일차] 2021-06-08
제게 중2 아들이 있습니다, 질풍노도의 말등에 올라있는.
그 아들과 도서관을 다니면서 거의 주말을 같이 보내는 편입니다.
같이 있는 시간들이 많다보니 감정끼리 부딪히는 건 다반사이고, 어느 때는 매일 감정에 치여 사는 것이 힘든 순간이 많습니다. 감정에 감정이 쌓이는 거죠.
'어떤 아버지가 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고민을 손에 쥐어 보는데 매번 그 모습이 기대를 못미칠 때가 더 많습니다. 반성이 차고 흘러넘치곤 하죠.
그 반성의 중심에 서있는 제게 오늘 도스또예프스끼는 <한 가정의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현대 지식계급이 공유하는 본질적 요소로 접근해서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하는데요.
지적 재능을 가졌음에도 사기꾼에 아첨쟁이였고, 욕심이라는 육체적 쾌락 외에는 정신적인 면은 사라진 표도르 빠블로비치의 모습을 지금 우리의 아버지들에게 비교해본들 특별한 문제는 없는 듯 하였습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아버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내가 죽은 뒤에는 될 대로 돼라>, 혹은 <온 세상이 불타도 나 하나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그가 이것을 현대의 수많은 아버지의 전형이라고 말할 때, 반박할 이유를 들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79일차의 오늘도 허물 또 하나를 손에 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다행인 것은 지금은 포도르 빠블로비치와 똑같은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을 깨닫는 성찰을 제가 가지고 있고, 더 나은 아버지가 되기 위한 용기와 열정도 제게 있다는 것이 그 이유죠.
그래서인지 오늘 새로운 아버지의 다짐을 가슴에 담은 제가 아름다워 보이기도 합니다.
[80일차] 2021-06-09
끼릴로비치가 가지 못할 곳이 어디있을까요?
이야기가 까라마조프가의 삼형제의 성격의 묘사까지 넘어가는데, 그 비유가 정말 날카롭습니다, 비수처럼.
제가 예상했던대로 둘째 아들 이반을 아버지 표도르와 가장 닯은 아들로 지목하면서, 그를 <유럽주의>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알료사는 <민중의 근본>이라는 명칭을 부여합니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저의 주인공이기도 한 이반을 <현재의 러시아인>을 대표한다고 말하며, 러시아인 즉 인간의 인물됨을 하나씩 설명합니다.
인간들은 모두 극단적인 사람들이며, '선과 악의 혼합체'라고 말하면서 때론 우리가 훌룡하고 선한 사람일 때가 종종 있는데, 그 조건이 바로 모든 것이 내 기분에 맞아 흡족할 때만 국한된다는 말에서, 이상의 실현을 갈망하지만 그 조건에 저의 노력이 들어가는 것은 반대했던 제 자신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경박하고 방종하면서도 진정한 고결함과 고상한 사상에도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대목에서는 동점심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인생 이야기는 우리가 마주치는 인생의 두 극단에 관한 내용이데, 가장 선명하고 깊은 색감을 느꼈습니다.
고결함과 비열함의 두가지 색을 지닌 인간을 <까라마조프식 인간>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때문에 인간의 심리는 극단적 모순을 가지게 된다고 말할 때, 고결한 눈과 비열한 각각의 눈으로 서로 다른 두 심연을 바라보는 저를 상상할 수가 있었습니다.
천상의 심연과 타락의 심연을 동시에 가진 우리는 그래서 끊임없고, 또 부자연스러운 혼란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두 심연을 동시에 들여다 보는 것, 이것이 없다면 우리들은 한없이 불행하고, 또 불만스러우면서, 반대로 충만한 삶을 느낄 수 없을거라는 말에서 제가 내린 결론은 '공존'이었습니다, 기쁨과 슬픔, 불행과 행복, 고통과 쾌락, 모든 것의.
우리의 내면에 있는 온갖 것들, 별의별 잡다한 것들과의 공존 속에서 평생을 머물러야하는 인간의 숙명에 격한 공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공존의 진리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서 까라마조프 탄광을 나섭니다.
[81일차] 2021-06-10
끼릴로비치의 논고가 계속되는 가운데, 저는 미쨔가 가진 '질투'와 '열정'에 주목했습니다.
그 단어를 가지고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본성을 낱낱이 해부해보고 싶었습니다.
특히 질투라는 부정의 옷을 입고, 욕정과 욕망으로 방향을 튼 미쨔의 어긋난 열정을 살펴보면서, 희망이라는 사랑에 고민하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약혼녀를 배신하고 자신의 명예를 더럽힌 미쨔가 한없이 불쌍하기만 했습니다.
또 수많은 타락의 수프를 만들고, 거기에 배신이라는 앙념을 뿌려, 그 맛을 더럽힌 질투심 많은 요리사인 저를 상상해 보기도 했습니다.
질투라는 감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질투를 통해 얻은 것들이 실은 행복을 파괴한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질투 안에 숨어있는 인정욕구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말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나누길 좋아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죠.
서로의 근심과 불안을 공유한 경험, 서로를 동정하고 맞장구를 친 경험이 좋은 예라고 봅니다.
어쩌면 이것이 공감이라는 가면을 쓴 인정욕구가 아닐까요?
공감의 탈을 쓴 인정욕구가 질투를 유발하고, 질투는 어긋난 열정을 만들고, 그 열정의 결과물을 공유하고자 또다른 공감의 먹잇감을 찾는 그 순환의 역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악순환을 탈출하지 못한 미쨔에게 남은 건 단지 희망과 충동 뿐이라는 검사의 이야기에서 미쨔를 향한, 곧 저를 향한 연민을 느끼면서 81일차의 프로젝트를 마무리합니다.
[82일차] 2021-06-11
독서의 장점 하나를 이야기하자면 책속의 배경지식이 사고의 세계를 확장시키기도 하고, 또한 공감능력을 향상시킨다는 점입니다.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과 문제에 나의 감정을 이입하고, 그가 하는 행동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얻는 공감능력의 향상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최고의 혜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각박한 현실에 둘러싸인 우리의 불안한 심리를 해방시킴으로써 마음에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여유라는 공간을 선사하기도 하죠.
그렇게 오늘 제가 살아보는 또다른 인생은 스메르쟈꼬프입니다.
간질병을 앓는 사람이 되어 그가 겪었던 자책감과 양심의 가책을 느껴도 보고, 지나친 생각으로 번민하다가 결국 자신이 만든 범죄의 구덩이에 함몰되고 마는 스메르쟈꼬프 속으로 들어가도 보았습니다.
또한 이런 부류의 인간 위에 제 인생을 덧칠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82일차의 시간여행도 나름의 성과를 냈다는 사실과 함께 이것도 어쩌면 나의 또다른 성장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진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은 도스또예프스끼가 던진 삶의 교훈을 통해 다양한 부류의 인간들이 있음을 공감하고, 그들이 가진 감정과 생각들이 우리가 공유하는 보편적 인간의 본질은 아닌지 고민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내일 끝나는 검사 논고의 결론을 기대하며 가벼운 맘으로 까라마조프 탄광에서 발걸음을 돌립니다.
그런데, 제 뒤의 후광이 보이시나요?
아시는 분들만의 농담, 아시죠? ??
[83일차] 2021-06-12
다시 미쨔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검사의 마지막 논고는 드미뜨리의 '갈망'과 '희망'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무서운 갈망과, 그 갈망을 향한 막연한 희망으로 인해 자살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미쨔의 심리상태를 묘사하며, 그 열렬한 갈망의 노예가 된 미쨔를 교수대로 끌려가는 죄인으로 빗대어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들에서 우리가 가진 평생의 짐일수도 있는 갈망과 희망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들 역시 자살과 싸우며, 이 것 하나로 버티고 사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속에서 미쨔와 내가 가진 감정의 동질성을 느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갈망의 순간 속에서 공포뿐만 아니라, 양심의 가책까지 잊어버린 채 삶을 포기한 적은 없었는지도 기억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노예가 되는 이유를 여자와 막연한 희망이라고 끼릴로비치가 말할 때, 탁한 정신상태와 난장판의 순간들에 파묻힌 만취된 저의 젊음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자기 보존의 동물적 갈망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기억의 파편과 상처들과 그것들을 위로하며 버텼던 막연한 희망의 순간들이 내 젊음의 전부였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이런 '타락한 심연'이 만든 변덕과 굴곡진 삶을 통해 맞이한 장년기는 노쇠한 이성과 상상의 쇠퇴를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천상의 심연'으로 눈을 돌려보니 거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훌룡한 삶은 기간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오직 내가 가질 수 있는 지금이라는 시간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만이 나의 전 생애임을 깨달으며, 그 성찰의 수건으로 갈망과 막연한 희망으로 물든 제 마음의 거울을 깨끗히 닦아내는 83일차 토요일입니다.
[84일차] 2021-06-13
드디어 변호사의 변론이 시작되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으로 돌진하는 그의 태도와 변론은 검사의 논고와는 또다른 매력의 심리학적 분석을 통해 진실의 핵심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검사의 논고가 피고를 불리하게 만들고, 배심원을 매료시켜버린 지금, 뜻밖의 심리학적 변론으로 기소 이유 자체를 증거 불충분이고, 동시에 허구로 몰아가버립니다.
우리가 진실에 접근해가는 그의 분석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의 정황과 너무도 일치한 탓이겠죠.
또한 검사의 심리 분석을 일종의 예술적 유희, 예술 창조의 욕구이자 소설 창작의 욕망으로 표현하는 그의 반론이 과연 어떤 날을 지닌 ??도끼가 될지 궁금합니다.
마지막으로 사건 현장을 재구성하는 중에 미쨔를 독수리와 두더쥐로 비유하는 심리 분석을 보면서, 잔인하고 민첩하게 이기적 욕심을 챙기는 독수리가 되어 보기도 하고, 눈먼 겁쟁이가 되어 두더쥐처럼 땅 속에 숨어보기도 했습니다.
미쨔를 잔인하고 계산적인 가해자이자 범인으로 몰고가는 검사와, 앙심의 가책 때문에 고민하고 연민했던 또다른 피해자로 끌고가는 변호사간의 줄다리기가 짧지만 재미가 있네요.
내일 변호사의 멋진 변론과 또다른 반전이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85일차] 2021-06-14
페쮸꼬비치가 살핀 도끼 날의 반대쪽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의 모습과 흡사하지만, 그가 표현하는 인간 심리의 분석은 어떤 모양인지 천천히 살펴보았습니다.
심적 증거 하나로만 미쨔를 가해자이며 살인자로 몰고가는 검사의 논고에 절대적으로 반박하는 그는 사건 자체를 물적 증거의 불충분으로 끌어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온 증거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까쩨리나의 증언 번복도 증오와 복수심으로 인한 것이며, 공평하고 이성적이지 못하다면서 그녀의 증언을 복수심에 사로잡힌 과장된 증언이라고 주장합니다.
3천 루블 역시 스메르쟈꼬프 이외에는 본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물적 증거 불충분의 이유를 들어 그 존재 자체의 의심으로 배심원을 유혹합니다.
그렇게 강탈죄를 부인함과 동시에 살인죄까지 부정하는 치밀한 변론으로 배심원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면서 이야기의 한 장이 마무리가 되었지만, 변론은 다음 장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마무리된 오늘의 변론 속에서 도스또예프스끼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양날의 도끼, 양면성, 두개의 심연, 이런 것들 아닐까요?
강렬한 방탕의 욕망에 허덕이다가도, 사랑하는 누군가를 생각함으로 그 욕망을 멈추었던 허물을 찾아서 85번째의 자리에 놓아 두는 것으로 오늘의 프로젝트를 마무리합니다.
[86일차] 2021-06-15
이제 15일을 남겨두고 있는 프로젝트가 조금 힘겨운 건 사실입니다.
86일간의 글쓰기에 사실 많이 지쳐있는게 제 솔직한 심정이구요.
해볼 것은 다 해 본 느낌이랄까요?
소설 속 등장인물에 감정 이입이라든지, 공감도 한계에 다다른 듯합니다.
거기에 매일 써내려가는 제 글 스타일에 제가 싫증이 날 정도입니다. 책 하나로 너무 길고 너무 많은 내용을 쓰려다보니 제가 가진 건 바닥이 드러나고, 일종의 짜깁기같은 글만 쓰는 것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독서와 사색이 먼저가 되야하는데, 보여주기식 글쓰기가 전부가 되어버린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까요?
지금에라도 현실을 깨달을 수 있음에 ??감사하는 ??불을 지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드네요.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 남은 15일을 버텨볼 생각입니다, 먼저는 힘을 빼야겠지만.
오늘 힘을 빼고 제가 주목한 인물은 스메르쟈꼬프입니다.
솔직함의 가면 아래 숨겨둔 시기심이 그를 살인자로 만든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신의 출생에 대한 증오심과 수치심이 시기심과 함께 그를 독살스럽게 만들고, 결국 복수의 칼을 들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수긍해 보았습니다.
그 감정들의 결과물이 자기 이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 자존심만 강한 사람이라는 것인데, 지금 저를 포함한 우리 주변의 수많은 스메르쟈꼬프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또 도스또예프스끼는 인간을 상상하는 대로, 상상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가정하는 소설가라고 말할 때,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는 독선적인 우리의 모습도 그려보았습니다.
문명을 정의할 때, 스메르쟈꼬프가 갈망한 훌룡한 옷과 깨끗한 셔츠, 그리고 반짝거리는 구두가 문명이 아니라, 바로 미쨔가 가지고 있는 사랑과 연민의 감정이 우리의 진짜 문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NaRam님이 써놓으신 글처럼, 우리가 가진 양면성 혹은 '두개의 심연'을 인정하고 그 중간에서 진실을 찾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는 결론으로 86일차의 까라마조프 탄광의 불을 밝혀 봅니다.
[87일차] 2021-06-16
단지 선입견만으로 단순한 살인을 친부 살해의 사건으로 몰고가는 검사의 논고를 비판하며서 페쮸꼬비치가 손에 든 팻말은 '참된 인간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단순한 살인이 또다른 친부 살해는 아닌가?'라고.
세기의 재판에 러시아의 이목이 집중된 상황에서 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스메르쟈꼬프에게 연민의 감정이 드는 사람은 저 뿐일까요?
스메르쟈꼬프 출생의 비밀이 명확히 드러날지는 모르겠지만 연민의 일부를 떼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합니다.
아무튼 제가 마주친 변호사의 마지막 변론 역시 검사의 논고만큼 제게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참된 아버지와 전혀 다른 아버지의 존재를 깨닫고, 아버지라는 명칭 속에 든 위대한 이상을 곱씹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다시 언급된 '1푼뜨의 호두'에서 의사 게르쩬쉬뚜베와 '파 한뿌리'를 기억할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하기도 했습니다.
이기주의적이고, 거친데다가 난폭하기까지 한 우리의 수많은 미쨔들을 상상하면서 그들 나름대로의 인정 욕구를 향한 몸부림과 그 속에서 진정으로 굶주린 사랑을 그려보았습니다.
그들을 위한 참된 아버지는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선입견, 가늠등의 추측이나 지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생활의 실질적인 영역, 즉 이성과 경험이라는 분석의 용광로를 통과해서 얻은 신념을 오직 실천함으로써 얻어지는 영역에 존재한다고 도스또예프스끼는 말합니다.
바로 그 실천으로만이 참된 아버지이자 참된 인간 사랑의 행위로 연결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밖으로만 내모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진리와 사상의 배움터가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해보고, 자신의 한계에 갇힌 영혼들 속 선량한 씨앗에 자비와 사랑으로 물을 주어 그 영혼이 폭을 넓히고, 차차 성숙해져 자비로움, 선량함, 공명정대함이라는 ??나무로 커갈 수 있도록 돕겠다는 맹세도 할 수 있어서 행복한 87일차입니다.
[88일차] 2021-06-17
길고도 길었던 이야기가 에필로그를 남겨두고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결국은 유죄로 판결이 내려지고 말았습니다, 미쨔가 나이고, 내 삶 역시 유죄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미쨔의 마지막 진술과 같이 우리가 야수라는 사실에 체념하고 굴복해야겠지만, 우리 앞에 놓인 선이라는 한줄기 가느다란 희망을 놓치진 말아야겠죠?
호두 1푼뜨의 아름답고 신성한 추억이 미쨔의 마음 속에 남아 선이라는 희망을 간직하게 하게 만들었고, 언젠가는 그의 영혼을 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역시 같은 바탕으로 선인과 악인을 평생토록 오가겠죠, '두개의 심연'을 가지고.
나쁜 일을 피하지 못하고 인간의 눈으로 타인에게 심술궂은 조소를 보내는 냉소적이고 잔인한 우리의 허물을 겉에 걸쳐 입고는 있지만, 아름답고 신성한 추억이 만들어 놓은 사랑과 연민의 속옷을 우리가 입고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에필로그에서 그 아쉬움들이 달래지고, 이반과 알료사를 비롯한 다른 등장인물에 대한 우리의 궁금증들이 풀어지기를 기대하면서 88일차의 발걸음을 돌립니다.
[89일차] 2021-06-18
어제 제법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그 축축함이 이어져 금요일의 기분을 한층 더 눅눅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 눅눅한 마음으로 챙긴 오늘의 단어는 '자기 희생'입니다.
먼저 인간이 빵으로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단순한 것이 곧 진리임을 알지만, 그렇게는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에게 숙명이고 불행이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라는 것이 주어졌고, 그 자유가 욕망이라는 물질적 가치관과 결합해서 만들어진 비극들을 우리는 세계의 역사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개개인의 양심이 물질주의와 만나 끝없는 욕망이 생성되고, 그 욕망으로 만들어진 부, 권력, 성공의 추구는 되려 궁극적 자유가 아닌 끝없는 고독과 고립을 만들고, 그 여파가 만든 비극들의 예를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그 비극의 피해자가 미쨔이고, 이반이며, 불쌍한 스메르쟈꼬프 아닐까요?
아버지 표도르로부터 받은 무관심과 냉대, 학대 속에 키워진 희생자들이 너무 불쌍했었고, 저 역시 또다른 표도르는 아닌지 고민했습니다.
이 악의 끈을 끊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인데, 오직 그 실천적 사랑으로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긍정의 고리를 만들어가는 알료사를 보면서 미쨔가 독차지한 제 마음의 일부에 알료사를 채웠습니다.
그 실천적 사랑의 모습이 까쩨리나가 말한 거룩한 희생이고, 완전한 의미의 자기 희생이 아닐까요?
수많은 욕망과 비합리적 망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 속에 언제나 존재했던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랑과 희생의 길을 걷는 자유로운 인간 알료사가 너무 부러울 뿐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한가지는 미쨔를 버티게 했던 어린 시절, 호두 1푼뜨의 아름답고 신성한 추억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추억을 밑거름으로 우리는 지금 이 시대의 고독의 경계를 넘어 사랑과 연민의 영역으로 우리를 옮기고, 그 영역에 자기 희생이라는 머무름의 자리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89일차 까라마조프탄광의 노동을 마무리합니다.
[90일차] 2021-06-19
"우리 모두가 까라마조프와 똑같다"는 NaRam님의 글을 곱씹으면서 오늘의 프로젝트를 시작해 봅니다.
제 눈길이 갔던 곳이 오늘은 두 군데입니다.
'인간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마음 산책의 길을 걸어가면서 고민한 저의 의견은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는 인간이기에 거기에는 수많은 답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내면 속에 항상 문제점들을 수두룩하게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인간'으로의 부활이 한평생 언제나 필요하다는 ??생각의 통로를 통과해서, 도달함으로써의 가치보다는 그 과정에 머무르는 동안의 수확이 훨씬 더 크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폭력성과 고결함, 죄의식과 정직성을 가지고, 선과 악 사이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드미뜨리를 볼 때, 그에게서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듯합니다.
그런 미쨔를 보면서 인간은 '고뇌하는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혐의를 부인하면서도 자기 양심의 소리에 따라 오심을 받아들이는 것과 개심해서 용서를 구하는 드미뜨리를 보면서 그의 고뇌에 연민의 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 잠꼬대 같은 미쨔와 까쨔의 대화를 보면서 제가 본 인간의 모습은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서로에게 외치는 거짓같은 사랑의 고백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고백의 그 순간만은 진실이었다고 말할 때, 거짓과 진실 속에서 평생토록 흔들려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깨달았습니다.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거짓과 진실의 격전장이 우리 내면의 또다른 모습이라는 생각과 함께, 돈과 애욕을 놓고 맞서 싸우는 까라마조프가의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면서 90일차 제 성찰의 노트를 내려 놓습니다.
p.s. 좋은 글 올려주신 NaRam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91일차] 2021-06-20
너무 갑작스럽고 허무하게 맞이한 까라마조프와의 이별이 제 가슴에 공허함을 가득 채웠습니다.
복잡한 감정들이 이리저리 엉켜서,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 저를 위로하는 사람은 알료사와 꼴랴였습니다.
알료사는 저에게 '훌룡한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일깨워주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넸고, 꼴랴는 어차피 우리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 존재라는 말로 저를 위로했습니다.
특히 꼴랴의 말은 메리 올리버님의 [여름날]이라는 시를 떠올리게 하네요. 요즘 제 명상의 화두거든요.
그 시에서 시인은 결국 사라져 버릴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며 "당신이 이 소중한 삶을 걸고 하려는 일은 무엇인가요?"라고 묻습니다.
깊고 고요한 사색의 시간을 만들어 주는 질문이라서 자주 들으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료사는 저에게 이토록 소중한 삶을 걸고 '훌룡한 인간'이 되라고 충고하면서 그 길을 제시합니다.
타인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었을 때, 나를 방문하는 선한 감정의 손님과, 함께 찾아오는 행복이라는 감정의 손님을 맞이함으로 우리는 비로소 훌룡한 인간으로서의 성장과 새로운 인간으로의 부활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인간의 본질은 선과 악의 양면성이고 불완전의 보편성이고, 그 불완전함이 어떤 경험으로, 또 어떤 사상과 생각을 가지게 만드느냐가 그 불완전함을 메꿔 성장으로의 방향 전환을 가능하게 만드는데, 그 성장의 ??키가 바로 아름답고 선한 추억이라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마지막 강론이 무척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부비프 매니저님께서 올려 주셨던 주차별 생각하기에서 당신이 가진 아름답고 선한 추억이 무엇인지 물으셨던 것이 기억나네요.
제 마음 속 깊은 구석에서 처박혀 있던 추억들을 꺼내 보면서 정말 ??행복해 했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하나가 미래의 생활에 숭고하고도 강렬한 그리고 유익하고도 아주 건전한 기억이 된다는 말을 수긍하면서, 까라마조프가 만들어준 100일간의 아름다운 추억이 내 마음에 한평생 남아 언젠가 내 영혼을 구하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오늘의 성찰 노트에 적어봅니다.
[92일차] 2021-06-21
아래 사진은 어제 해 저물 즈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하늘인데요.
하늘에 가득 떠있는 조각구름들을 보면서 이 구름 하나하나가 제가 91일간 살펴보았던 인간 내면의 모습들 같다는 상상을 했었습니다.
하나로는 별게 아닐수도 있을 구름들이 모여 이토록 아름다운 장관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가 맞이하는 인간의 다양한 내면들이 모여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하늘을 보면서 제 가슴에 담았습니다.
어제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 완독했고, 오늘은 역자의 도움을 받아 느끼지 못했던 이 소설의 여러 면모를 관찰할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프로젝트의 마지막 날까지 아껴서 읽어야 겠다는 마음으로 92일차 프로젝트를 마무리합니다.
[93일차] 2021-06-22
인간의 근원적 문제에 접근하려했던 도스또예프스끼의 인간 영혼에 대한 깊은 탐구와 휴머니즘의 추구에 대한 행동들을 역자의 해설을 통해 자세히 관찰할 수 있어서 앎 이외에 또다른 깨달음까지 얻을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입니다.
긴 이야기 속에서 독립적인 구성을 가지면서도 서로의 연결 고리로 작용하는 <대심문관>편이나 <파 한 뿌리>, <소년들>에 대한 내용을 읽으면서 그 때의 저의 발자취를 기억하는 행복도 찾았습니다.
거기에 범죄자였고, 유별난 도박자이자 간질병 환자였던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바탕으로 한 프로이트의 분석과 인류학자 말리노프스끼의 해석을 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Karamazov란 단어의 뜻이 어둠과 악으로 범벅이 된 사람들이라는 사실도 새로웠구요.
특히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등장인물에 관한 설명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등장인물들이 다양한 성격이 결여되고, 선과 악, 폭력과 증오와 고결함, 탐욕과 청빈 사이에서 선택적 기질만을 지닌 비현실적 인물로 나타나는 점으로 그들이 가진 기괴한 일면적 기질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제가 등장인물들을 낯설어야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어서 제일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설을 통해 책을 읽으면서 갸우뚱거렸던 의문점들이 하나둘 해소가 되니 제 앞에 ??가 놓인 느낌입니다.
오늘의 앎이 제가 90일간 까라마조프 탄광에서 파낸 보물에 잘 스며들어서 그 가치를 더 키워주기를 소망하면서 93일차의 성찰노트를 내려 놓습니다.
[94일차] 2021-06-23
등장인물의 내적 본질을 설명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지난 100일간 내 마음에 남긴 그들의 발자국을 찾아서 확인하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드미뜨리는 충동적 인간이며, 육체적 욕망의 화신이고, 그의 내면은 마돈나의 정신과 소돔의 정신이 충돌하는 전쟁터이고, 그의 심장에서는 신과 악마가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표현에서 가는 걸음을 한동안 멈추어야 했습니다.
표도르의 사악한 에고이즘이 지배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난 스메르쟈꼬프를 그만의 논리, 비굴한 화법, 교활하고 저속하며 어떤 악행도 정당화시킬 수 있는 변론술을 갖춘 도덕적 괴물로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나름의 그를 향한 강한 연민을 다시 한 번 느끼기도 했습니다.
이반에게도 참 남다른 해석을 내놓는데요.
그는 실제 살인자 스메르쟈꼬프에게 살의를 불어넣은 교사범이라는 의미에서 그 죄가 더욱 무겁다는 판정과 더불어, 그를 무신론자, 회의론자, 자유사상가, 차가운 이성을 가진 냉혹한 인간이며, 에고이즘과 개인주의가 혼합된 합리주의 사상의 절정체로 평가하는 부분에서는 내가 왜 이반에게서 또다른 표도르를 상상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성격을 다시 숙고하면서 역자님의 말대로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등장 인물들이 살아있는 인간의 유형이라기보다는 사상과 신념의 결정체임을 재확인할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냉혹한 출세주의의 화신 라끼찐과 니힐리즘의 소년 꼴랴 끄라소뜨낀과의 재회도 재미있었구요.
이기주의, 몰인정, 탐욕, 증오라는 온갖 악이 지배하는 까라마조프 제국을 만들고, 이를 다양하게 비판하며 그 제국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 도스또예프스끼에게 제가 가진 모든 찬사를 보내며 94일차 성찰노트를 내려놓습니다.
[95일차] 2021-06-24
오늘 제가 읽은 것은 <대심문관>편에 관한 평론인데, 정말 깊고, 깊은 만큼 난해해서 감히 제가 어떤 해석을 올리는 것 조차도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평론에서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자유'라는 것인데, 그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말로 저만의 느낌을 가져보았습니다.
자유를 선택하고 소유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건너편에 있는 고뇌, 슬픔, 고통이 있는 비극의 길을 경험할 책임이 뒤따른다는 저만의 해석으로 간단하게 95일차의 노트를 내려놓습니다.
[96일차] 2021-06-25
두 개의 우주적 원리-자유와 강제,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과 불신, 인간에 대한 신적인 사랑과 무신론적 동정,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가 참 어렵습니다.
대심문관은 강한 의지와 논리로 논증하면서 설득하는 반면, 그리스도는 묵묵부답으로, 부드러운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습니다.
제3의 선택이 없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자유냐 아니면 행복과 평온이냐, 고뇌와 함께 하는 자유냐 아니면 자유 없는 행복이냐?
베르쟈에프는 단언컨데 대다수의 인간은 두번째 자유 없는 행복의 길을 걷는다고 말합니다.
그 길 위에 놓인 것들을 봅니다, 허위로 가득찬 동정 내지는 사랑, 지상의 것에 대한 열망에 지배당해 짓는 개미집, 물 한방울로 허물어질지 모르는, 그 개미집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무서운 바벨탑이라는 사실도 모른체.
현기증나는 관념에 머리가 찌근거릴 뿐입니다, 읽어도 읽어도 모호함만 부풀려지는 느낌이네요.
내일 한 번 더 읽어야겠어요.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97일차] 2021-06-26
인간 정신의 자유란 무앗일까요?
고뇌와 함께 하는 자유는 어떤 고뇌를 가슴에 품어야 할까요?
그렇다면 그 자유를 포기하고 복종할 때에만 누리게 되는 자유는 또한 무엇인가요?
이 세 가지 질문을 가지고, <대심문관>편의 평론을 다시 읽어보는 토요일, 그리고 97일차 입니다.
해답을 찾기는 어렵겠지만, 머리 속에 들어찬 삶에 대한 혐오감과 나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98일차] 2021-06-27
이번 주 내내 가슴을 짓눌렀던 <대심문관>편에 관한 평론을 뒤로하고 줄거리편을 읽었습니다.
뒤에 남아 있는 건 <도스또예프스끼 연보> 뿐이네요.
후련한 마음과 아쉬운 마음이 공존하는 순간입니다.
이제 남은 건 남은 인생에 대한 우리 각자의 '운명의 길'이겠죠?
??행복한 일요일 만드세요.??
[99일차] 2021-06-28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도스또예프스끼 연보를 읽었습니다.
역사에서 연대별 사건이 중요하듯이, 소설에서 작가의 연보를 통해 중요한 사실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시대적 상황과 작가의 행보들로 어떻게 작품이 나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정보들을 알 수 있어서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연보를 보면서 그의 삶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며, 얼마나 고통스러웠고, 또한 절박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간질병을 지니고, 평생을 도박과 싸우고, 수많은 죽음들과 조우하며 살았던 도스또예프스끼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습니다.
그런 아픔들이 있었기에, 그 흔적들인 [죄와 벌]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 나올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며 99일차의 노트를 정리합니다.
[100일차] 2021-06-29
시베리아 대장정을 마침내 끝낸 느낌이랄까요?
미쨔, 이반, 그리고 알료사와의 우정을 끊지 마시고 평생토록 이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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