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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좋다. 이유는 등장 인물들에 몰입하여 현실인지 상상인지 구별 안 갈 정도로 스토리에 빠지는 그 기분이 좋아서이다. 그런데 유독 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동안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해서 초반부는 정말 읽기가 어려웠다. 특히 조르바가 여자를 대하거나 생각하는 방식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고, 이런책을 고전이라고 하다니 하며 화도났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칭찬하고 좋다는 <그리스인 조르바>인데 난 왜 이렇지? 아직 독서력이 부족한가보다 하며 나를 의심하고, 뭐라도 감동받을 만한 구절을 찾기 바빴다. 그러다 일.고.십. 멤버들의 격려에 힘입어 마지막 장까지 읽어 냈다. 그래... 읽었는데.. 리뷰는...?
고전에 대한 리뷰는 뭔가 긴 세월을 지나면서 많은 이들이 발견해 낸 이 책의 의미를 찾아내서 써야할 것 같은 부담감이 많았다. 뭔가 내가 감히 다른 답을 해? 그러다 보니 리뷰를 쓸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리스인 조르바를 위하여>라는 이 책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가 있는 책까지 사서 읽었다. 그래도 잘 써지지가 않았다.
그러다 휘연님이 제시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아 고전은 이렇게 읽을 수 있는 거구나. 그리고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고 생각을 할 수 있으니 고전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전은 쉽지않다. 하지만, 그 쉽지 않아라는 전제 때문에 스스로 너무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이 책이 일.고.십.의 첫 정식 고전 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고전을 접하는 나의 자세, 마음가짐에 대해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고전의 무게에 지지말자!" "어렵더라도 그 고비를 넘기면 달콤한 열매가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믿자"
<그리스인 조르바>는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품이다. 조르바의 여기, 지금을 즐기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며 현재 나 자신은 어떻게 삶을 살고 있는지 되짚어보게 되고, 조르바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p.8 산다는 게 감옥살이지.(생략) 암, 그것도 종신형이고 말고, 빌어먹을
p.10 언제까지 대가리에 잉크를 뒤집어쓴 채 종이나 씹으면서 있겠다는 것인가? 나와 함께 가세. 저 멀리 카프카스에, 위험에 처한 수많은 동포가 있잖아. 함께 가서 구해주자고. 하긴 구해 주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네는 이렇게 설교하지 않았는가,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라고. 그럼 구해야지. 자네는 설교질에만 소질이 있지 있는 건가. 왜 나랑 같이 가지 않는 건가?
(생략)
다시보세, 이 책벌레야!
초반부부터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종신형 같은 삶. 어떤이는 그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어떤이는 설교로 끝이 난다. 이 책의 화자는 책벌레같이 종이를 씹어 먹고 설교만 하는 삶을 산다면, 그의 친구 스타브리다키, 조르바는 실천하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스타브리다키는 이상과 인류를 위한 실천을 해 나간다면, 조르바는 현재, 지금, 여기에 함께하고 있는 이들과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느낌이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라고, 각자의 삶 속에서 어려움과 기쁨을 안고 살아가지만 결국 마지막이 정해져 있는 것은 똑같다. 스타브리다키의 죽음이 나에겐 반전이었다.
p.207 나는 지금 카르스에 있네. 나는 인근의 그리스인들을 규합하러 왔네. 도착하는 날, 쿠르드족이 마을의 그리스인 교사와 사제를 잡아가서 말의 편자를 박았다네. 마을 유지들은 얼이 빠져 내가 묵고 있는 집으로 피신해 왔네. 우리는 계속 더 가까워지는 쿠르드족의 총소리를 듣고 있어. 이들 그리스인들은 나만 바라고복 있어.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라는 듯이. (생략) 겁이나. 하지만 부끄러워. (생략) 쿠르드족이 마을로 들어온다면 내 발에 편자가 메일 먼저 박힐 것은 자명한 이치. 스승이여, 제자가 이렇게 최후를 맞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네.
라며, 화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그리스 인들을 지키다 쿠르드족에 의해 자신이 최후를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행히 그는 쿠르드족에게서 탈출했고 마침내 행복이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했다.
p.419
바로 지금, <행복이란 의무를 행하는 것. 의무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행복은 그만큼 더 큰 법>이란 옛말을 고스란히 겪고 있는 참이거든. (생략) 내가 녹초가 되어 버렸다는 건 인정하네. 그러나 그게 대순가? 친구여! 우리는 싸워 이겼네. 나는 행복하다네.
하지만 얼마 후 폐렴으로 사망하게 된다.
내가 반전이라 생각했던 이유는, 스타브리다키는 왠지 싸우다가 전사할 것 같았는데 사망의 원인이 폐렴이여서였다. 그가 그렸던 자신의 최후와는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 쿠르드족과 싸우다 죽음을 맞이하는 편이 극적이었을 것 같은데 행복을 맛보고 폐렴으로 사망하는 모습. 마치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고, 삶이 계획한대로 살아지지 않듯 죽는 순간의 모습도 자신의 뜻대로만은 안 된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르바 역시 나라를 위해 싸워보기도 하는 등 굴곡있는 삶을 살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먼 미래나 이상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찾으며 살아간다. 그 역시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하지만, 종교에 자신의 사후를 맡기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친구에게 편지를 써 줄 것을 부탁하고, 창문가로 뛰어가 먼 산을 보며 웃고 울다 죽음을 맞이한다.
유한한 삶. 내뜻대로 모든 것이 되지만은 않아서 살아간다는 것이 때론 감옥처럼 힘들 수 있지만, 감옥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 것, 천국에서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은 내 마음 먹기에 따른 것이 아닐까. 나의 선택에 따른 것이 아닐까 한다.
어제 딸 아이와 디즈니애니메이션 소피아공주를 보다 삶의 진리를 깨달아버렸다. 생일을 위해 준비된 드레스가 엉망이 되고 풍선도 다타고 케이크도 망가져 엉망이 되어버린 생일. 생일 소원으로 행복한 생일파티를 다시 하고 싶다고 빈다. 요정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애를 쓰는 소피아. 마법의 주문은 말 그대로 '행복한 생일'을 맞이했을 때 풀리기 때문에 드레스를 망치고, 케이크를 망치는 일이 반복되는 생일 파티가 불행하게 느껴졌던 소피아는 34번째 생일을 반복하게 된다. 드디어 아무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철저히 노력해서 완벽한 생일 파티를 만든 후 지친채로 잠이든다. 그런데 또 생일날 아침이다. 그제서야 깨닫는다. 아무일도 안일어나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든 마음먹기에 따라 행복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드레스가 얼룩지자 거기에 무늬를 만들고, 생일 모자가 찌그러져도 가족들과 친구들과 파티를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 드디어 마법 주문이 풀리고 다음 날을 맞이한다.
살아가며 겪을 많은 일들. 조르바와 소피아공주처럼 현재에 만족하고 기뻐하며 살아보자고 결심하게 된다. 앞으로 고전을 읽을 때 고전의 무게에 눌리지말고 고전의 힘을 즐기자는 결심도 함께 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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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리뷰입니다. 조르바를 보면서 나도 저런친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늘 외롭고 괜히 이유없이 심각해지고 쓸데없이 진지해지기 쉬운 존재인데 화끈하고 위트있고 인생을 즐길 줄 알고 너무 심각해지지는 않으면서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쓸데없이 진지해질때마다 조르바가 옆에서 그러지 말라고 얘기해주는 기분이었어요. 많은 분들께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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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은 카잔차키스의 고향인 에게해 남단의 크레타 섬이다. 1883년 터키의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조국의 자유를 갈망하는 성장기를 겪은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자유’의 본질과 신앙(기독교)의 실체 앞에서 신을 기만하지 않은 정직함과 보통의 인간이 언급하기 꺼려하는 신앙의 음지에 빛을 정조준하며 읽는 독자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카잔차키스가 책속의 화자인 듯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그가 탄광업을 하면서 만났다는 실존 인물인 소설 속 주인공 ‘조르바’를 통해 인간 내면의 극단적 양면성을 과감하게 표출한다. 카잔차키스는 소설 속에서 ‘조르바’가 되기도 하고, 다시 화자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며 신에 대한 역설과 인간이 죽음에 도달하기 까지 무수히 묻는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그까짓거 개나 물어가라지.”라며 당당하게 마침표를 찍는다.
“......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디 그 이야기 좀 들읍시다. 요 몇 년 동안 당신은 청춘을 불사르며 마법의 주문이 잔뜩 쓰인 책을 읽었을 겁니다. 모르긴 하지만 종이도 한 50톤 씹어 삼켰을 테지요. 그래 얻어 낸 게 무엇이오?” (중략)
조르바는 ‘두목’이라고 부르는 소위 지식인인 화자에게 인간의 삶에서 가장 원초적면서 또 단순하지만 누구도 정답을 외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조르바, 우리는 구더기랍니다. 엄청나게 큰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에 붙은 아주 작은 구더기지요. 이 조그만 잎이 바로 지굽니다. 다른 잎은 밤이면 가슴 설레며 바라보는 별입니다. 우리는 이 조그만 잎 위에서 우리 길을 조심스럽게 시험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겁이 없는 어떤 사람은 잎 가장자리까지 이릅니다. 거기에서 고개를 빼고 카오스를 내려다 봅니다.(중략) 조르바, 그 순간에 위험이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이 아찔해지거나 정신을 잃고 또 어떤 사람은 겁을 집어먹습니다. 이들은 자기의 용기를 북돋워 줄 해답을 찾으려다가 <하느님!> 하고 소리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잎사귀 가장자리에서 다시 심연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용감하게 <나는 저게 좋아.>하고 말하지요.” (중략) “두목,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는 매일 죽음을 생각해요. 죽음을 응시하지만 무섭지 않아요. 그러나 좋아한다고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중략)”
소설속 화자가 ‘조르바’와 크레타의 해변가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을 마주하며 나눈 이러한 대화를 통해 나는 카잔차키스가 신과 인간의 죽음과 삶 사이의 구차함에 얼마나 저항하려 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카잔차키스가 1908년 파리에서 베르그송과 니체를 접하면서 투쟁적인 인간의 모습을 소설 속 조르바의 자유에 대한 의지로 그려나간다.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이 날 어쩔 수 있다는 것이오? 죽이기밖에 더 하겠소? 그래요, 죽여요. 상관 않을 테니까. 나는 분풀이도 실컷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했고 춤출 시간도 있었으니……. 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어요!”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다음 딛을 디딤돌을 안전하게 만들어가며 살아온 화자와 가슴을 한껏 내밀고 거침없이 삶을 헤쳐 나가며 내달리는 주인공 ‘조르바’는 소설 속 극적 인물의 대비를 이루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표면상 다른 모습이지만 끊임없이 구도의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한(“사람 사는 거 별거 없어. 다 거기서 거기야.”라는 말이 떠오르는)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인간은 얼마나 자유를 갈망하는가. 하지만 우리가 자유라고 생각하는 그 편협한 사고와 삶 속에서 조르바는 그것이 아니라고 날카롭게 치부를 찌른다. 그리고 정곡을 찔린 우리 보통 사람들과 책 속의 화자(어쩌면 카잔차키스 본인)는 이렇게 오기를 부리며 대사를 던진다.
“언젠가는 자를 거요.”
정말 자를 수 있을까. 하고 독자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도록 조르바가 덧붙인다.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중략)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 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중략)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 맛이 뭐 나겠어요?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다시 정곡을 찌르는 통증을 느낀 독자는 얼마나 비겁한지 모를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결국 완전하게 신을 향해 고개들 수 없고, 삶에 자유롭고 당당하게 맞설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 해결되지 않은 채 숙제로 남아있다. 오랫동안 숙원했던 탄광업이 완전히 무산되어버린 날, 세상에 거칠 것이 없는 자유인 조르바는 바닷가에서 춤을 추었고, 카잔차키스는 그 조르바를 그린 ‘그리스인 조르바’를 책으로 썼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라고 하는 위대한 자유인을 겨우 책 한권으로 변화시켰을 뿐이라고 말했다.
“두목, 음식을 먹고 그 음식으로 무엇을 하는지 대답해 보시오. 두목의 안에서 그 음식이 무엇으로 변하는지 설명해 보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일러 드리리다.”
타인의 삶과 끝없이 비교하고 더 높이 오르려는 욕망의 바벨탑은 결국 인간이 먹은 음식의 변화를 묻는 조르바의 질문에 무너져 내리게 된다.
카잔차키스가 얼마나 용기 있는 자유를 갈망했는지, 그리고 조르바라는 인물을 통해 오랜 세월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냉철하고도 비열하지 않은 혜안을 시험하며 기다렸는지, 그가 ‘그리스인 조르바’를 65세라는 나이에 출간 결정하게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74세, 임종 후 크레타 섬에 안치된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이런 비명이 새겨져 있다.
“Den elpizo tipota. Den favύmai tipota. Eimai elftheros.”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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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문학의 구도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는 카잔차키스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 준 작품으로, 호쾌하고 농탕한 자유인 조르바가 펼치는 영혼의 투쟁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 내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조르바는 실존 인물로서,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힌두교도들은 '구루(사부)'라고 부르고 수도승들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한 사람 선택해야 했다면 나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을 것이다……. 주린 영혼을 채우기 위해 오랜 세월 책으로부터 빨아들인 영양분의 질량과, 겨우 몇 달 사이에 조르바로부터 느낀 자유의 질량을 돌이켜 볼 때마다 책으로 보낸 세월이 억울해서 나는 격분과 마음의 쓰라림을 견디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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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난 뒤에도 오늘, 바로 지금 현재를 살라는 이 60대 노인의 가르침은 이토록 생생하다! 조르바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로 내내 기억될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우연히 읽은 한 조사 결과 때문이었다. 교보문고 소설 전문 팟캐스트 ‘낭만서점’에서 2008년부터 2017년에 이르기까지 주요 10개 세계문학전집 브랜드의 연령대별 판매 선호도를 분석한 결과였다. 흥미롭게도 10∼20대는 『데미안』을, 30대는 『위대한 개츠비』를, 50대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가장 많이 사 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데미안』이야 워낙 청춘의 애독서로 손꼽히는 고전인 데다 『위대한 개츠비』 역시 꿈과 이상, 뒤틀린 열정의 초상을 담은 고전으로 30대의 호응을 얻을 만한 작품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리스인 조르바』라니… 이 작품이 유독 50대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
그도 그럴 것이 20대 후반쯤에 이 책을 4분의 1 가량 정도 읽고 나서 덮어버린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색한에 여성을 비하하는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일삼는 조르바라는 노인과 먹물 먹은 젊은 부르주아가 철학을 운운하는 모양새가 적잖이 불쾌감을 주었다고 하면 과한 표현일까. 그런 작품이 여전히 위대한 고전으로 불리며 회자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그것도 한창 무르익어 원숙해진 50대라는 시기에 이 작품의 어떤 부분에 영감을 받는 것인지 사뭇 궁금했다. 그렇게 나는 20대 후반에 마주했던 조르바는 잠시 잊기로 하고, 조금씩 자신의 다른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한 조르바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지금, 현재를 중요시하는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작중 화자인 ‘나’는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던 도중, 그곳에서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난다. 움푹 들어간 뺨, 튼튼한 턱, 튀어나온 광대뼈, 잿빛 고수머리에 헌털뱅이 같은 이 60대 노인은 대뜸 ‘나’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왜 당신을 데려가야 하냐고 묻는 ‘나’에게 조르바는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 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하고 도리어 공갈 비슷한 태도와 격렬한 말투로 쏘아붙인다. 뜻밖에도 ‘나’는 근심 걱정이 없는 곳에서 산투르를 연주하기 위해 가족을 떠나고, 도자기를 만드는 데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왼손 집게손가락을 도끼로 잘라버렸다는 이 노인의 기이한 행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심지어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오.” 하고 스스럼없이 ‘이성’을 물레방앗간 집 마누라 궁둥짝 취급하는 조르바의 거침없는 표현이 마음에 든다.
마침 ‘나’는 사랑하는 친구가 그리스의 민족주의 혁명에 동참하여 떠난 뒤 홀로 남아 스스로를 ‘삼류글쟁이라는 한 마리 구더기’ ‘책에 파묻혀 지내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자’라 비난하며 원고를 내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에 뛰어들기로 결심하던 차였다. 그런 의미에서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인 조르바야말로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다녔던, 그러나 만날 수 없었던 자일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어쩌면 자신과 가장 반대되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본능적으로 이끌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과거에 광부로 일했다던 조르바를 자신의 탄광사업을 지휘하는 일을 맡기기로 하고 크레타섬으로 함께 들어간다.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지금 크레타의 외로운 해변에서 이 편지를 쓰네. 여기서 몇 달 머물면서 나는 운명과 맞붙어 놀이를 해보기로 했네. 내가 자본가 노릇을 하는 놀이일세. 이 장난이 성공하면, 나는 이것이 장난이 아니라 일대 결단을 내려 내 삶의 양식을 변혁한 것이라고 말하겠지. 떠나면서 나더러 책벌레라고 했던 말 기억할 걸세. 그 말이 적잖게 마음에 걸렸던 나는 종이에다 끼적거리는 버릇을 한동안 ? 아니면 영원히? - 집어치우고 행동하는 삶 속에 뛰어들기로 결심을 했다네. 나는 갈탄이 매장된 산 하나를 빌렸네. 나는 여기에서 인부를 고용하고 직접 곡괭이, 삽, 아세틸렌 램프, 소쿠리, 손수레를 쓰고 다루네. 내 손으로 갱도를 열고 들어가기도 하지. 자네 말을 무색하게 하려고 이러는 것이야. 갱도를 타고 땅속에다 길을 내는 것으로 책벌레는 두더지가 된 셈이지. 자네는 나의 이 변신을 인정해 주었으면 하네. / 132p
두 사람은 한때 크레타에 모여든 네 강대국(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의 제독을 상대했다던 카바레 여가수 오르탕스 부인의 여인숙에서 머무르기로 한다. 그곳에서 ‘나’는 낮에는 탄광을 돌보고, 밤에는 육체라는 이름의 짐승을 실컷 먹이고 포도주로 목을 축이며 조르바가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온갖 관념과 형이상학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던 자신과 달리 육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자신이 춤을 추고 싶을 때는 자유롭게 춤에 몸을 맡기고, 여인을 향한 자신의 욕망에 항상 충실하며 신성을 모독하는 일마저도 거리낌이 없는 조르바의 행동에서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깨달아간다.
조르바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그놈이 유일하게 내가 아는 놈이고, 유일하게 내 수중에 있는 놈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그는 자기 자신이 경험한 것을 믿고,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데 주저함이 없다.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이 노인의 언어에는 그 어떠한 이미지도, 체면도, 양식도 없다. 때문에 저 조르바 앞에서 스스로 ‘미적지근하고 모순과 주저로 점철된 몽롱한 반생’이었다던 ‘나’의 고백은 곧 나 자신의 것이자 우리 모두의 부끄러운 고백이 되고 만다.
「마음이 내키면, 알죠? 마음이 내키면 말이오. 일이야 당신이 바라는 만큼 해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마음이 내키면 칠 거요. 또 노래도 할 거요. 제임베키코, 하사피코, 펜토잘리도 추고. 그러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에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강요하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이런 문제에서만큼은,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 「자유라는 거지!」 / 24p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진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비의 날개가 도로 접히더니 쪼그라들고 말았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오는 과정은 참을성 있게 이루어져야 했고, 날개를 펴는 과정은 햇빛을 받으며 서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온통 구겨진 채 집을 나서게 강요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고 말았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 177p
동네 청년이 과부에게 마음을 표현했다가 거절한 일을 계기로 자살하면서 마을 일대가 소란했던 날, 과부를 죽이려 달려드는 사람들을 막아 세운 건 조르바였다. 그는 온마을이 여자 하나를 죽이려고 몰려다니는 비인간적인 태도에 분노하며 그들을 꾸짖는다. 하지만 이들은 과부를 기어코 죽이고, 오르탕스 부인이 죽을 때에도 내내 그 앞에서 죽기만을 기다리다 그녀의 물건들을 죄다 제 것처럼 쓸어간다. 이때 그들을 바라보며 “이놈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같이 불의, 불의, 불의입니다!” 하고 외치는 조르바의 음성은 여느 때보다 처절하고 날카롭게 ‘나’의 가슴을 파고든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던 조르바였기에, 인간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 자체로 사랑하려 했던 이였기에 이 사건은 현실과 이상의 간극만 더욱 뚜렷이 확인한 채 조르바와 ‘나’ 모두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상처로 남는다.
열정과 광기로 싸우는 자가 행복하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 자네 식으로 말하면, 나는 행복을 내 키에 맞게 재단했는지 어쩐지 잘 모르겠네. 용케 그렇게 했다면, 그렇다면 나는 위대한 사람일 것일세.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에 맞추어 키를 늘이고 싶네. 그리스의 가장 먼 변경까지 말일세. 그러나 말이 쉽지……. 자네는 크레타 해안에 드러누워 바다 소리와 산투르 소리를 듣고 있으리. 자네에겐 시간이 있는데, 내게는 그것이 없네. 행동이 나를 삼키고 말았네만, 나는 이게 좋아. 친구여, 행동하기 싫어하는 내 스승이여. 행동, 행동…… 구원의 길은 그것뿐이네.」 / 206p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모든 문제가 일을 어정쩡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을 박을 때도 한 번에 제대로 때려 박는 식으로 해나가면 우리는 결국 승리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들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 / 331p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람,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우리는 조그만 항구를 만들었지만 실어 내보낼 물건이 없었다. 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마치 어렵고 어두운 필연의 미로 속에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행복하게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 같았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함께 놀았다. / 416p
이윽고 두 사람이 헤어질 무렵, 당신이 읽는 그 빌어먹을 책에는 뭐라고 써있냐고, 그 위대하다고 하는 책들이 대체 인간을 어떻게 구원해줄 수 있는 거냐고 부르짖었던 조르바의 말이야말로 어쩌면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평생 질문처럼 품고 산 말은 아니었을까.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이상과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다면 자신의 문학은 어디로 나아가야하는 것인지 작가는 끊임없이 고뇌한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스스로 자유로워졌다고 믿는 ‘나’에게 조르바가 한 말 역시 매우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보다 좀 길 거예요.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매달려 있으니까, 이리저리 다니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그런 줄은 자르지 않으면…….”
사회적인 인간으로서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나와 타인 혹은 사회적인 구속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자유롭다고 착각하거나 끊임없이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옭아매는 것들을 잘라내려는 부단한 시도와 행동하는 자세 속에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자유를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또한 문학이 그러한 길을 제시해야 하는 건 아닐까. 이것이 『그리스인 조르바』가 품고 있는 함의이자 당대인들을 비롯해 오늘날까지도 큰 울림을 주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곧잘 친구들에게 이 위대한 인간의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의 이성보다 더 깊고 더 자신만만한 그의 긍지에 찬 태도를 존경했다. 우리들이라면 고통스럽게 몇 년을 걸려 도달할 정신의 경지에 그는 단숨에 가닿았다. 그래서 우리는 말했다. <조르바는 위대한 인간이다!> 때로 그는 그 경지를 훌쩍 넘어 더 멀리 나가 버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우리는 말했다. <조르바는 미쳤다!> / 436p
해설에 따르면 조르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자기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을 만큼 실존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호쾌하고 농탕한 사나이 조르바는 떠도는 인간 카잔차키스가 한동안 쉬어 가고 싶어 하던 구원의 오아시스이자 자유의 상징이었다. 완벽하게 실제 성격 반영한 것인지 여기에 문학적 상상력을 얼마간 가미한 것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확실히 조르바는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라는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 덕분에 사회적 제약이나 이미지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갈구하는 그에게 왜 유독 50대가 특히 공감하는 것인지 적잖이 이해가 된다. 한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읽는 것도 이 책을 깊이 있게 읽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개인의 자유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과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유와 독립을 꿈꾸었던 그리스인들 전체의 소망이 이 작품에 반영된 것은 아닐까 짐작해보면 인물 하나하나의 삶이 보다 풍부하게 읽힐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464p
책을 다 읽고 난 뒤에야 알았지만, 이윤기 작가 님의 번역으로 보석 같은 문장들을 만날 수 있었던 점은 독자들에게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 될 듯하다. 20대 후반에 읽었다 그대로 쭉 덮어두었다면 이 작품의 진면목을 발견하지 못했으리라. 혹여 이 책을 책장에 묵혀두고만 있을 또 다른 분들에게 언젠가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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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는 카잔차키스에게 영향을 준 인물중 하나로 실존 인물이다 실제 어떠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카잔차키스의 손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조르바는 인생을 통찰하여 몸소 철학을 실천하는 이다 만족하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신과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저주'를 두려워 하지 않으니 신괴 다를바 없겠다 책에서 나오는 수많은 인물이 인간사를 대변한다. 탄생, 아픔, 성장, 비극, 사랑, 죽음, 비통함...깨달음의 환희가 대서사시로 담겨 있고, 삶의 통찰로 귀결된다 카잔차키스가 톨스토이와 견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구더기는 인간의 근본이니, 소박한 물질을 영위하되 풍부한 영혼을 섬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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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주인공의 사색적인 이야기는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별로 알지도 못하는 100년전 그리스 지식인에 대해 무슨 공감을 하랴? 하지만 한가지 공감하는 부분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다. 또한 그런것 따윈 개나 물어가라고 할 조르바에 대한 부러움이다. 자유로운 인생을 선택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나 역시 악마를 하나 키워야 할까? 세상에 걱정해야 할것이 너무 많다. 자유롭게 살기엔 내 영혼에 자유는 없는 것 같다. 노예 생활뿐... 조르바를 조금 더 이해하려면 영화를 봐야할듯 싶다. 늘 그렇듯 부러워하다가 끝나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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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나오는 조르바란 인물은, 매 순간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며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어찌 보면 어린아이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기분이 내킬 때 산투르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사람. 일할 때는 한없이 그 일에 빠져드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너무 행복을 현실속이 아닌 먼 미래 또는 불가능한 부분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비록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인간이기에 모두 다 같은 생각을 하는거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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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는 자유다. 인간은 그토록 원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 일을 하고, 즐기고, 쉬고, 가족들이랑 시간을 공유하고는 하지만, 언제나 마음 한켠에 구속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지겹지만, 필수불가결한 경제생활을 위한 일상과 꿈 또는 이상이라는 상반된 가치 속에서 언젠가는 가질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그마한 희망을 갖고 살아간다. 조르바는 그런 자유의 대리인이다. 조르바를 통해 일탈을 간접경험하고, 사이다 같은 말과 행동으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
| 친구가 꼭 읽어보라고 한 책이라 망설임 없이 구매하였습니다. 문체나 단어 선택 등이 굉장합니다. 번역에 공을 많이 들이신 느낌... 뭔가 틀에서 벗어나 좀 더 제 자신이 끌리는데로 살아야겟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번에 그치지 않고 두고두고 여러번 읽어봐야 할 책 입니다. 그리스.작가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이 책을 계기로 좀 더 관심있게 지켜보게 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