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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도시>는 작가 자신이 겪은 비참했던 어린 시절을 옴니버스 형식을 빌어 쓴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전쟁, 실향, 굶주림, 헤어짐, 그리고 무엇보다 내 어머니의 죽음 같은 것 때문에 자신의 체험을 소설화하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의 작품 <우울한 귀향> 속에 그려진 시간의 축(軸), 즉 과거는 '나'의 출생에서 고향을 뜰 때까지이고 현재의 시간대는 대학 시절이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대학생이 되기까지의 비어 있는 시간대가 바로 '장난감 도시'인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작품에서 도시적 삶의 내면을 파헤쳐 보려는 데에 끈질긴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있다. 처음으로 도시에서 돈벌이를 하러 나간 아버지가 풀빵을 거의 다 남겨 가지고 돌아와서 밤늦게 벌이는 만찬(?)과 아버지의 말 등에서는 아버지의 낙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도시의 냉엄한 질서에 적응하기 어려운 이들의 인간적인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웃음을 주면서도 뒤가 홀가분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웃음으로 재미를 주면서 주제를 풀어 놓는다는 식이다. 결국 <장난감 도시>는 삶에 대한 아무런 확신도 주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오늘날의 삶에서 되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비극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는 데에 이 작품의 미학이 있다. 또한 정확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작품의 미학을 배가시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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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지성사의 ‘소설 명작선 25’에 속하는 책이다. 초판이 1982년 5월에 나왔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28년전이다. 소설이면 한 번 읽고 치우는 책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간직하고 픈 책들이 있는데 아마 이 책이 후자에 속하지 않을까.
![]() 사진 출처: 한겨레 하니누리(부산 사하구 감천2동 태극도 마을) (http://nuri.hani.co.kr/hanisite/dev/board/listbody.html?h_gcode=board&h_code=102&page=8&po_no=4985) 촘촘히 들어앉은 판잣집들, 깡통조각과 루핑이 덮인 나지막한 지붕들, 이마를 비비대며 길 쪽으로 늘어서 있는 추녀들, 좁고 어둡고 질척한 그 많은 골목들, 타고 남은 코크스 덩어리와 검은 탄가루가 낭자하게. 흩어져 있는 길바닥들, 얼굴도 손도 발도 죄다 까맣게 탄 아이들(23쪽) 어린시절 내가 자랐던 지역이다. 산등성이를 아래로부터 점점 갉아먹어 산 정상 언저리 부근까지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시절. 골목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구불구불해서 낮인데도 낮인 것 같지 않은 골목들. 1960년대와 70년대 부산 변두리의 모습이었다. 한 집 건너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타지 사람들이지만 가족처럼 친했던 이웃들이 있었다. 특히,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부산 부암동 지역은 북한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6.25내전때 피난을 온 지역이어서 어릴때부터 북한말과 친숙하게 지냈다. 어릴때는 북한말이 곧 표준어가 되었다. 동네에는 공동변소가 있어 아침이면 줄을 서야 했다. 하루라도 주위에 싸움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한 동네였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풀빵 장수, 구두닦이, 껌팔이로 매일 저녁 시내로 출근했다. 새벽에 신문배달은 당연한 일이었을 만큼 치열하고 가난했던 판자촌 생활이었다. 막내라서 그런지 고생은 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지만 가난했다는 그 기억만큼은 지울수가 없었다. 당연히 노동환경은 열악했고, 가난한 판잣촌집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신발공장에 취직해야 했다. 특히 우리 동네는 미군 부대인 ‘하얄리아 부대’가 가까워 어릴때는 그들이 판잣집에서 한국 처녀와 같이 사는 것도 자주 목격됐었다. 그런 세월이 이제 2010년이 되어 ‘하얄리야 부대’도 이전했다. 감천2동의 태극도 마을은 2010년 10월 ‘문화예술촌’으로 탈바꿈한다고 한다. 50년전 가난했던 피난민 마을이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산토리니로 불리더니 문화체육관광부의 ‘2010 콘텐츠융합형 관광협력사업’에 선정되었단다. 전국의 사진 애호가들이 찾는 명소(?)가 되어버렸다. 피난민들의 애환이 담긴 지역은 이제 젊은이들은 떠나가고 각종 예술단체의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 할려 하고 있다. 자라면서 북한말은 이제 명절이나 되어서야 가족이 모일 때나 아주 가끔 사용한다. 피난왔던 동네 어르신들은 이제 고인이 되었거나 재개발이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어릴 때는 판잣집이 무척이나 탈출하고 싶어졌지만, 지금은 이제 그 시절이 가끔 그리워진다. 사람사는 냄새와 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 역시 미래의 관점에서 어린시절을 되돌아 보고 있다. 시골에서 도시의 판잣촌으로 이사를 온 후 생계를 위해 풀빵 장사를 한다. 아버지는 장물을 운반하다 적발되어 교도소에 들어가고, 누나는 이웃집 두부공장 민며느리로 들어간다. 어머니는 몸져 누워 교회를 찾아갔지만 끝내 가족은 하나가 되지 못한채 죽고 만다. “하나님 말씀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다만 구원의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지금은 너희 곧 유다의 때요 어둠의 시대일 뿐…마태복음 26장 20~21절, 누가복음 22장 52~53절” (242쪽) 이 장난감 같은 도시의, 저 우스꽝스런 상자 속에서(143쪽) 벗어난 지금 되려 그 시절의 인정은 잊어버린채 자본주의 경쟁체제하에서 길들여진 가축처럼 직장에 목이 메여 편안한 우리속에서 먹이가 떨어질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가난에선 해방되었지만 정신은 여전히 구속된 상태다. 이 책의 배경인 50년대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이르지 않았고, 어둠의 권세였다. 2010년인 지금도 악마는 물질로 인간을 덧칠했을뿐 여전히 어둠의 권세요, 어둠의 시대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성경에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기록됐다” - 우리말성경 누가복음 4장 4절 경제 지상주의. 경제만 살리겠다고 외치는 구호앞에 빵을 더 달라고 화답하는 모습이 우울하다. 예수께서 지금 우리에겐 무어라고 말할까? 예수마저도 물신의 늪속에 던져버린 일부 한국교회가 성찰하길 바란다. 똑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누구는 경제인 ‘빵’만 보고 있고, 누구는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고 있는 모순된 세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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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자랐던 한옥집 마당에는 지붕보다 높게 자란 석류 나무가 있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손주들을 위해 손수 심으셨다는데, 얼핏 보면 한 그루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세 그루의 나무가 자연스레 휘감긴 것으로 모양도 참 멋있었다. 그런데 한옥집을 헐고 집을 새로 짓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계획대로라면 공사 기간동안만 잠시 다른 곳에 옮겨 심었다가 되가져와야 했으나 옮겨진 곳에서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해 죽었다는 것이다. 20여년 간이나 한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해마다 풍성한 열매로 보답했던 나무의 마지막이 너무나 쓸쓸했던 것 같아 한동안 온 가족이 허탈해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이나 나무를 구분할 것도 없이 생명이 있는 존재는 나고 자란 환경이라는 것이 있다. 특히 '내 몸 뉘일 곳' 이라는 개념의 집이나 동네 특히 실향민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반에 반만 이해해도 새로운 곳에 정착해서 뿌리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살면서 형편이 좋아져서 더 나은 환경으로 옮겨간다면 그러한 고민조차 행복의 일부가 될 수 있겠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의 터전을 떠나 낯선 환경에 놓인 사람들은 '환경의 변화' 라는 그 자체가 고통일 수 밖에 없다.
<장난감 도시> 이 책은 한국 전쟁 직후 고향을 떠나 도시 빈민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가족의 아픔을 담고 있다. 주인공이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나'는 초등 4학년으로 고향에서는 면장감이라는 칭찬을 들을 만큼 나름 만족한 삶을 살았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상황때문으로 도시의 판자촌으로 이사를 오면서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된다. 아버지의 부재, 병약한 어머니, 민며느리가 된 누이 그리고 온기없는 방과 구걸을 해야할 정도의 굶주림까지...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 중 대부분이 넉넉치 않은 살림이었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이 가족에게 닥친 끝도없는 불행을 생각하면 참고 살다보면 좋은 시절이 올 것이라는 위로가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자문하게 된다.
소년에게 도시는 생명이 없는 '장난감'처럼 삭막하고 매마른 곳일 뿐이었다. 그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좌절하고 방황하고 아파하는 모습이 너무나 측은했다. 자신이 당했던 것들, 가슴속에 억눌린 것을 폭력으로 해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괴로웠고 민며느리로 들어간 누이에게 철없이 반항하는 모습도 안스럽기만 했다. 특히 개한테 물리고 받은 돈으로 꾸역꾸역 허기진 배를 채우던 모습, 배가 터질 정도로 먹고도 여전히 허기를 느낀다는 말은 당시 주인공이 가졌던 상실감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신기한 것은 주인공 '나'가 떠올리는 기억의 조각들이 온통 가슴 아픈 이야기 뿐인가, 하는 순간 어느새 감동적인 성장소설이 되어 있음을 동시에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단편적이지만 한곳에 모으면 훌륭한 작품이 되는 퀼트 이불처럼 말이다. 더구나 1-3부가 4년여에 걸쳐 완성된 중편의 모음이라는 사실은 따로 설명하지 않으면 알지 못할 정도로 매끄럽게 이어져 있다. 솔직히 2, 3부 없는 '장난감 도시'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을 뿐더러 재출간 시점에 맞춰 아버지나 누이의 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가져 보았다.
끝으로... 해방전에 태어나신 아버지가 예전 이야기를 꺼내실때마다 솔직히 그렇게 감동받거나 경청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전에는 그때의 형편에 맞춰 살았고 지금 사람들은 지금 형편에 맞춰 사는 것인데 자꾸만 못먹던 시절 이야기를 꺼내시니 괜시리 반항심이 생겼던 탓일게다. 헌데 이상하게도 내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주인공에게는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감정 이입이 된다. 아버지의 인생은 아버지의 것으로 남아야 하고, 소설 속의 주인공이 겪은 상처는 살면서 내게 닥칠 수 있는 역경을 대입하기 때문일까? 나는 왜 가까이 있는 가족의 '리얼 스토리' 보다 소설에 더 집착하는가. 아, 어떤 이유든 난 못된 딸이다.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