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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젊은이와 구역질나는 속물의 대비는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익히 보아온 것이다. 낙제생에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홀든 콜필드에 비하면, 우등생이고 나름의 자기애가 있으며 충분히 진지한 프래니이지만, 역시나 세상의 허위에 고통스러워 한다. “난 에고, 에고, 그 에고가 질색이야. 나의 에고이건 다른 사람의 에고이건 말이야. 어떤 지위를 얻거나 대단한 일을 해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겠다고 덤비는 사람은 구역질이 나. 정말 메스껍단 말야. 누가 뭐라 해도 마찬가지야.” “최악인 것은, 제멋대로인 사람이나 조금 미쳐 버린 사람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결국 다른 사람들처럼 현실에 순응하고 말 것이라는 점이야.” 그리하여 프래니는 세상과 담을 쌓는다.
사실 나는 오빠인 주이의 대승불교가 여동생인 프래니의 소승불교를 깨우치는 식의 설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주이는 프래니에게 시종 일관 일장 설교를 늘어 놓는데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지는 않는다. 동양 사상에 심취한 서구 작가의 별 수 없는 얄팍함이 엿보인달까. “그걸 모르겠니? 아직도 그 비밀을 모르겠어? 아직도 모르겠다면 내 말을 잘 들어 봐. 그 뚱보 아줌마가 누군가 하면... 프래니, 그 뚱보 아줌마는 바로 예수 그 자신이야. 예수라구, 프래니”라고 주이는 비루하고 남루한 일상에서 신적인 것을 발견할 것을 종용한다. 김정란이 “우리는 나날이라는 일상의 교회의 성인들인 것이다”라고 역설한 그것. 충분히 납득하고 공감할 만한 대목. 그러나 왠지 말 뿐인 깨달음으로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샐린저의 사회 인식 수준의 얄팍함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그의 신적인 것에 대한 발견이 과연 타자를 끌어 안는 것인가. 과연 see more? 주이는 프래니에게 “너는 예수의 기도를 이용해서 인형이나 성인으로 가득 차 있고, 터퍼 교수 같은 사람은 없는 세계를 원하고 있는 거야.”라고 힐난한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주이에게로, 그리고 샐린저에게로 되돌려 주고 싶다. 그런 비난은 다분히 자기 분열적으로 보인다. 아마도 주이도 프래니도 샐린저의 각각의 분신일 것이다. 기실 남매라는 설정부터가 아무래도 자기 폐쇄적인 회로를 형성하는 데 일조한다. 주이가 과연 프래니에서 크게 나아간 것일까. 그런 척 할 뿐 아닌가. 홀든 콜필드 이후로 수십 년이 흐른 후 씌어졌고, 그들의 나이도 더 이상 사춘기로 설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과연 그 치기 어린 수준에서 벗어난 것인지.
곽동훈은 존 레논을 저격한 채프먼의 가석방 소식을 맞아, 채프먼이 탐독해 마지 않았던 샐린저의 얘기를 꺼낸다. 그리고 샐린저의 베일을 파헤친 책들에 대한, 아무래도 지나치게 엄격한 혹평들에 대해 “샐린저 최면에 걸린 평론가들”이라고 비난한다. 곽동훈은 여기서 《슬레이트》 지의 칼럼니스트인 주디스 슬레비츠(Judith Shulevitz)의 견해를 언급한다. “우선 샐린저의 책이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사춘기 시절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의 감수성이 막 여물어가는 시점에서 샐린저는 더할 나위 없이 이해심 깊은 친구로 각인되는 것이다. 오랜 친구를 욕하는 사람을 참을 수 없기 마련이다.” 샐린저의 소설에는 “민감하고 조숙한 영혼이 등장”해서 “속물적인 세상을 한탄하면서 살아간다”. “샐린저의 소설이 지닌 이런 구성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인정받지 못한 천재성을 꿈꾸게 한다. 다시 말해 샐린저는 우리에게 당신은 특별한 존재이며, 당신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세상이 속물로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 과연 그렇구나.’ 우리는 주인공의 고난에 깊이 공감하면서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샐린저는 정말 위대한 친구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친구의 뒤를 캐서 비난하는 사람이 못마땅한 것은 당연하다.”
물론 나 역시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으며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을 갖고 있는 수많은 독자들 중 하나이다. 어쩌면 이제는, 세상이 구역질나서 미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은 이따금 찾아올 뿐이고 그나마 손쉽게 수습되는, 충분히 속화될 대로 속화된 어른이 되어서 더 이상은 샐린저의 책이 사랑스러울 수 없게 된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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