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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너는 손가락을 쫙 펴 보다 리지의 손이 닿았던 느낌이 벌써 사리지고 없다는 걸 깨닫곤 깜짝 놀랐다. 이토록 빨리 그 느낌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210쪽에서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참 잘 담아내고 있는 구절이다. 이토록 빨리 그 느낌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 터너는 점점 더 뒤로 밀려나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콥 할머니는 이런 소란을 몹시 싫어한다는 사실을, 할머니가 아끼던 가구들이 엉뚱한 자리로 밀려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할머니의 작은 깔개들이 현관에 둘둘 말려져 내팽겨졌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왜 못 보는 걸까? 죽음이란 그런 것일까? 내가 마음을 썼던 것들을 빌어먹을 단 한 가지도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지는 바로 그런 순간.
............................237~238쪽
그 순간 터너는 알았다. 터너는 알았다. 아버지의 눈과 고래의 눈에 담긴 의미를. 세상은 돌고 빠르게 회전하며. 조수는 흘러 들어왔다가 흘러 나 가니, 이 세상에는 모든 진화된 형태들 가운데 서로를 똑바로 바라 보는 두 영혼만큼 더 아름답고 더 경이로운 것은 없다. 그리고 그 두 영혼이 헤어지는 것만큼 비참하고 슬픔을 주는 일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함께함에 크나큰 기쁨이 있으며. 서로를 잃음에 크 나큰 비탄이 있음을 깨달았다. 터너는 말라가를 잃었다. 그래서 터너는 울었다. 고래에게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고래의 눈을 응시하며 흐느껴 울었다.
..................332쪽에서
가슴을 울리는 그런 책이다. 시간과 공간이 다르지만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어떻게 이렇게 비슷할수 있을까? 요즘 들어 기독교에 대해서 많이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데 그런 부분들을 정말 잘 건드려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시원하게 말이다. 바로 이거야!!! 하고 말이다.
요즘 딸아이가 말한다. "엄마~요즘은 왜 철야 안가? "( 항상 금요일날 저녁에 예배를 드리러 갔었다.) 딸아이는 교회에서 성극반을 하기에 연습하고 철야를 드리고 온다. 우리 모든 식구들은? 주일날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구역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사람들과 만나 있으면서 답답함을 느끼는데 허드 할머니와 같은 답답함이라고나 할까?
정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듯한 그런 가슴아픈 쓰라림 말이다. 교회를 가서 마음에 평화를 얻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속의 핍스버그 마을처럼 이기적인 군상들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를 가서 열심히 기도를 한다. 그리고 다른 활동들은 아~~주일날 도서관에서 봉사를 한다. 몇년째 하고 있다. 아이들이 주일날 성극이나 성가반에서 봉사를 하다보니 하루죙일 연습하는 시간을 기다려서 아이들을 데리고 오다보니 9시 예배를 드리고 도서관에 진종일 진을 치고 있는 남편에게 도서관에서 일하시는 집사님이 봉사하는 것이 어떻냐구 해서 흔쾌히 봉사를 한지가 몇년이 되어간다.
책 속에 나오는 터너와 리지의 이야기. 넘 가슴이 아프다. 자신들의 관광업을 위해서 흑인인 리지와 모든 섬에 몇 안되는 흑인들을 몰아세워서 내어 쫓는 이야기. 내가 그 곳에 살지 않았기에 책을 읽으면서 정말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는데 책을 다 읽고 뒷부분에 있는 작가의 이야기를 보니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모두가 다 사실은 아니지만 그 섬에서 내어쫓긴 이야기. 그리고 내어 쫓겨서 정신병원으로 쫓겨가게 된 사람들의 사망이야기는 정말 이라고 한다. 터너와 리지의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렇게 그 병원에서 죽어간 소녀에게 이름을 부여한 것이라고 한다. 리지~~
삶에 대한 리지의 지혜로운 모습들이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외로운 소년인 터너가 리지를 만나면서 변화되는 과정이라든지 그런 터너의 변화를 보면서 서서히 변화되어 가는 부모님의 모습. 목사님 아들이니 이렇게 저렇게 품행을 단정히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속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답답함으로 다가왔으면 미지의 세계로 떠나고 싶어하는 것인지등의 이야기들이 너무 가슴아프면서도 담담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그려져있다. 옮긴이 천미나씨가 이 책에 대한 느낌을 아주 잘 담아낸 글을 맨뒤 옮긴이 글 제목으로 썼다. 마음 깊은 곳에 불을 지펴주는 작품이라고 말이다. 정말 내 마음속에도 커다란 울림을 준 그런 휼륭한 작품이다.
아들아이가 읽다가 중간에 다른 책을 보게 되어서 내가 먼저 읽었는데 아들아이가 자기도 읽을거라고 하니 아들아이가 오면 어서 손에 쥐어주어야겠다. 딸아이에게도 말이다. 내가 입이 짧아 말하지 못하는 인생의 진실들을 이 책을 통해 알려주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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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더기 앤’,‘ 아빠와 함께 수호천사가 되다’, ‘아빠, 나를 죽이지 마세요’가 그동안 책콩 청소년의 책으로 읽은 것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한 권의 의미 있는 소설 하나를 더 꽂게 된다. 성장소설이라는 장르를 특히 좋아하는 나로서는 흑인과 백인 그리고 커다란 고래가 표지그림으로 나와 있는 ‘고래의 눈’을 모험과 우정을 다룬 이야기일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에는 사실 이상의 삶들의 모습이 다양하다. 열세살 쯤이면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게 되는 나이이다. 보스턴에서 배를 타고 이주해 온 이곳이 소년 터너가 바라는 로망을 채워줄 수 있을까? 터너의 아버지는 목사이다. 그가 이 곳 목사로 오게 된 것은 이 지역의 경제를 살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몇 몇 지역 주민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바라는 제 1의 덕목은 ‘사랑’이다. 그러나 터너 마을의 주민들은 종교마저도 그들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 그런 마을에서 터너가 마음을 내릴 곳은 없고 하는 일마다 점점 꼬여만 간다. 성장하고 있는 중인 소년은 없고 목사의 아들만이 있을 뿐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터너가 만난 또 다른 세상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인간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흑인들이 사는 섬마을의 소녀 리지는 터너가 그토록 바라던 미지의 세계로 이어주는 따뜻한 통로가 된다. 사는 환경이 다르고 집의 규모가 다르고 먹는 음식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지만 둘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터너는 아버지나 마을 어른들로부터 배우지 못한 것들을 그들이 무시하는 흑인 섬마을에서 배운다. 그런 터너의 변화는 조금씩 아버지 목사의 변화로 이어진다. 관광특구로서의 경제적 도약을 추구하는데 흑인들이 거주하는 판잣집들은 거추장스러운 철거대상일 뿐이다. 몇 백년이 넘도록 한 섬에 거주해 온 이들은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되자 터너의 아버지는 그런 변화에 저항하며 아들의 편에 선다. 더 이상 이용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목사는 어처구니 없는 추락사고로 죽음에 이르고 리지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간다. 터너의 성장과 늘 함께 해왔던 마을 주민인 허드 할머니가 터너에게 남긴 저택에 리지를 데려오려고 찾은 수용소에서 터너가 접한 소식은 입소한지 며칠만에 리지가 맞이한 죽음이었다. 서정적인 문체이지만 만연체 문체가 빠른 것에만 익숙해 있는 친구들에게는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닌 진짜 이야기이기에 책을 덮고도 오래도록 생각을 남기는 소설이 된다. 10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개발과 지역의 이익에만 눈멀어 진짜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날을 충고해 주기도 한다. 또한 벼랑에서 추락할 때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눈빛과 터너가 리지와 배를 타고 가다 표류하다 만난 고래의 눈이 겹쳐지며 남기는 메시지는 하나가 된다.
세상은 돌고 빠르게 회전하며, 조수는 흘러 들어왔다가 흘러 나가니, 이 세상에는 모든 진화된 형태들 가운데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는 두 영혼만큼 더 아름답고 경이로운 것은 없다. 그리고 두 영혼이 헤어지는 것만큼 비참하고 슬픔을 주는 일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함께함에 크나큰 기쁨이 있으며, 서로를 잃음에 크나큰 비탄이 있음을 깨달았다.p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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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Lizzie Bright and the Buckminster Boy'이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야기의 주내용은 리지 브라이트와 터너 벅민스터의 우정 이야기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다른 얼굴색을 하고 있지만 서로에겐 통하는 것이 있다. 성장기에 있는 이 두 아이의 이야기는 유쾌하기도 하고 때로는 감동적이고 마음 아프기도 했고, 천진난만함과 순수함에 빠져드는 기쁨도 맛보았다.
- '항상 목사의 아들이 될 필요는 없단다.' 터너는 자신이 언제든,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생각을 하자, 터너는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고래에 닿을 뻔했던 그때처럼.(p.206)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새로운 곳에 오게 된 터너는 '목사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어 늘 모범적인 말과 행동을 감수해야 한다. 늘 그렇듯이 조금이라도 예의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게되면 어김없이 '목사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터너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늘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꿈꾸면서도 현실에 순응하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지만 맘처럼 잘 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리지와 함께 보았던 고래의 반짝이던 눈을 기억해 내고는 마음을 다잡는다.
터너 가족이 정착할 새로운 교회가 있는 메인 주 핍스버그는 고요하고 평온한 곳이 아니다. 핍스버그 마을에서 뉴메도우즈 해안을 따라 나오면 가까이에 말라가 섬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 섬에는 125년 동안이나 정착하며 살아온 가난한 섬 주민들이 힘겹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고 조용하게 살아가고 있다. 백인들이 사는 핍스버그 마을과는 달리 말라가 섬 주민들은 다른 인종간의 결혼과 근친상간 등의 괴기한 소문이 돌고 있어 마을 이미지를 해친다는 생각에 몰아낼 방법을 모색하는 중이다. 게다가 관광개발을 목적으로 외부의 권력자들이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마을 주민들까지 동요되어 말라가 섬 주민들을 쫓아낼 목적으로 벅민스터 목사를 부임토록 한 것이다.
터너는 이 곳 핍스버그에 적응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아이들과 주먹다짐도 해야했고, 목사의 아들이기에 무조건 참아야할 때도 있었다. 터너에게 탁트인 바다와 바닷바람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내딛는 걸음과도 같았고, 자신만의 장소에서 리지를 만났다. 또래인 리지는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말라가 섬 아이며 흑인소녀라는 점에서 터너와 모든 상황이 다른 미지의 세계였다.
리지를 만나는 것 또한 어른들은 달가워하지 않았고, 리지를 '검둥이'라며 천대하던 콥 할머니도 리지를 좋은 아이로 인정하게 되는 장면에서는 내 마음이 동하여 눈물이 났다. 죽음을 가까이 둔 콥 할머니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듯이 리지에게도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던 것이 아닐까. 콥 할머니가 터너에게 집을 유산으로 남긴 이유도 리지를 비롯한 말라가 섬 주민들을 위한 배려였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터너는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리지와 안타까운 이별을 해야했다. 불의에 굴하지 않은 터너 때문에 외부인들은 끝내 모든 사업을 중단하고 순식간에 마을을 떠나버렸고, 그들에게 이용당한 마을 주민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해야만 했다.
- 그 순간 터너는 알았다. 터너는 알았다./아버지의 눈과 고래의 눈에 담긴 의미를./세상은 돌고 빠르게 회전하며, 조수는 흘러 들어왔다가 흘러 나가니, 이 세상에는 모든 진화된 형태들 가운데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는 두 영혼만큼 더 아름답고 더 경이로운 것은 없다. 그리고 그 두 영혼이 헤어지는 것만큼 비참하고 슬픔을 주는 일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함께함에 크나큰 기쁨이 있으며, 서로를 잃음에 크나큰 비탄이 있음을 깨달았다.(p.332)
실제 지명과 실제 사건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사실감을 더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옮긴이의 말처럼 인간의 생명보다 돈과 물질을 숭상하고 이기심이 넘쳐나는 세상, 행복을 느낄 여유도 없는 세상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생겼다. 아이들의 눈으로 본 세상이 조금 더 밝고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조금씩 행복을 나누며 살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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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 백여년 전 미국의 한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백인들은 새로운 개척지에 정착해 부를 축적한 후 또 다른 부의 수단으로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아메리카로 끌고 왔다. 그러나 링컨의 흑인 해방 전쟁으로 흑인 노예들을 물건처럼 소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백인들은 분노한다. 그 분노를 그들은 폭력이라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존재하는 그들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는 무시라는 소극적 방법으로 드러내기도 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1911년..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던 가난한 말라가 섬의 주민들은 메인주 주지사의 한 마디 "우리는 우리의 현관문 가까이에 저런 것들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판잣집들을 태워버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주민 모두에게 이주를 명령한다. 머물곳도.. 갈 곳도 없던 주민들은 배에 몸을 싣고 떠돌아다니기도 하고, 이주하지 못한 이들은 심신박약자를 위한 요양원으로 보내졌고, 그들은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 중 한 아이..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한 한 여자 아이를 작가는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되살려 내었다.. 리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목사의 아들로만 살아야 하는 열세살 소년 터너 .. 목사 아들이 아닌 터너로 살 수 있는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 소년이 만난 미지의 세계는 말라가.. 아니 리지가 터너에겐 미지의 세계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리지는 터너가 숨 쉴 수 있게.. 웃을 수 있게..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용기를 낼 수 있게.. 그리고 영혼을 통한 공감을 느낄 수 있게 .. 손을 잡아 준다. 부드럽고 따뜻한 손.. 이 손을 계속 잡을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은 죽음을 눈 앞에 둔 콥할머니.. 깜둥이 여자아이가 자신의 집에 들어왔다며 놀라던 깐깐하고 고집스러운 할머니가 터너에게 리지를 도울 기회를 준다.. 갈 곳 없는 리지를 위해 터너는 콥할머니가 자신에게 상속한 집을 내놓으려 하지만 마을 사람 누구도 검은 리지를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리지 또한 그들이 자신을 마을에 들어와 살도록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터너를 곤경에 빠트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이기적인 백인들이 이끄는 대로 요양원으로 향하고.. 그리고.. 삶을 멈추어 버린다.. 이것이 리지가 터너와 자신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 아니었을까.. 터너는 이런 과정 속에서 엄격하기만 하던 아버지를 잃는다.. 하지만 아버지를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다. 아버지에게 목사로서의 입신과 출세보다는 진정한 하느님의 목자로 인간을 도와야 함을 일깨우고 아버지 안의 사명감을 깨워.. 마을 사람들에게 맞서게 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순간에 자신의 아들과 진정으로 영혼을 울리는 공명을 할 수 있었으니.. 터너는 아버지를 잃은 것이 아니다.. 세상은 돌고 빠르게 회전하며, 조수는 흘러 들어왔다가 흘러 나가니, 이 세상에는 모든 진화된 형태들 가운데 서로을 똑바로 바라보는 두 영혼만큼 더 아름답고 더 경이로운 것은 없다. 그리고 그 두 영혼이 헤어지는 것만큼 비참하고 슬픔을 주는 일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함께함에 크나큰 기쁨이 있으며 서로를 잃음에 크나큰 비탄이 있음을 깨달았다.. 고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터너.. 서로를 똑바로 바라 본.. 리지와 터너.. 그리고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아버지와 터너.. 변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서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영혼들이 있다면.. 그 자체로.. 세상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피부색, 종교, 사상, 가치관.. 이 모든 것들이 달라도.. 인간은 서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그렇게 똑바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이 세상이 좀더 살만한 가치가 있는 아름답고 경이로운 곳이 될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
![]() 책을 읽는 내내 가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책을 덮을 즈음에는 눈물이 내 얼굴을 온통 덮음을 느꼈다. <고래의 눈>은 1912년 미국 핍스버그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핍스버그 근처의 말라가 섬에 살던 사람들은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지만, 핍스버그 주민들에게 큰 해를 끼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금으로 그들을 부양하는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 핍스버그의 주민들은 말라가 주민들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그들을 추방하고 섬에 호텔을 세워 관광지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강제로 주민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정신병원에 보낸후, 묘지를 파헤쳤다. 그러나, 그들의 바라던 대로 호텔은 세워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말라가 섬은 비워지기만 하였다.
이 끔찍한 실화를 바탕으로 게리 D 슈미트는 소설을 썼다. 핍스버그에 새로 부임한 백인 목사의 아들과 말라가 섬의 흑인 소녀 리지와의 우정을 그리는 작품으로 슬픈 실화를 아름답게 그려내었다. 게리 E슈미트는 이 작품으로 2005년 뉴베리 영예상과 마이클 프린츠 상을 수상하였고, (고래의 눈의 영어 원제는 소년과 소녀를 다루고 있는 Lizzie Bright and The Buckminster Boy이다. ) 2008년 수요일의 전쟁으로 다시 한번 뉴베리 영예상을 수상하였다.
뉴베리 상을 수상한 작품을 처음 접한 나였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앞으로 뉴베리 상을 탄 다른 작품들도 찾아서 읽고, 또 게리 D슈미트의 작품도 찾아 읽고싶은 욕심이 생겼다. 고래의 눈은 청소년 책으로 나왔다고는 하나, 어른인 나에게도 크나큰 감동을 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보스톤에서 이사 온 목사의 아들 터너는 어디를 가나 마을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관심을 받는다. 항상 모범이 되어야 하는 존재이기에 풀을 먹인 숨막히게 빳빳하고 하얀 셔츠를 입고 다니며 13살의 나이를 억눌린채 수도원 같은 생활을 해야하였다. 뭘 하든 마을 사람들은 호시탐탐 터너를 주시하며, 목사인 아버지께 일러바쳤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새로운 세계의 돌파구로 만난건, (흑인과는 )생전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흑인 소녀인 리지였다.
가진게 없으나,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밝고 명랑하게 자란 리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터너에게 기쁨이 되고 생기가 된다. 터너는 리지를 통해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어간다. 말라가 섬에서 흑인들을 내쫓으려는 마을 사람들, 특히 지주격인 스톤크롭의 횡포는 정말 이루말할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오른팔 격인 허드집사와 보안관 등 마을 사람들은 소년 터너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리지는..우리의 소녀 리지는 ..
돌아가시고 없는 리지의 부모님이 마치 일등상을 받은 것처럼 소중히 안고 사랑했던 리지였고, 말라가 섬의 목사였던 리지의 할아버지가 하느님의 영광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칭찬할 정도로 사랑받고, 존귀한 존재였다. 하지만, 스톤크롭 일당 눈에는 그저 장난삼아 총 한발 난사해도 재미있을 하찮은 검둥이 한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며칠동안 천천히 책을 읽으며, 내 곁에서 잠들었거나 혹은 방글방글 웃어주는 나의 아기를 바라보았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내 아기가 있듯이, 리지 역시 너무나 사랑스러운 존재였을텐데..생각하면 슬픔이 더욱 북받쳐 올라왔다. 가난한 사람들,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우습게 알았던 물욕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에 의해, 생명을 천시한 , 성자는 화형에 처해져야 한다고 폭언한 허드 일당에 의해 터너의 소중한 사람들이 터너의 곁을 떠나갔던 것이다.
터너는 말이 안 통하는 많은 사람들 곁에서 고래의 눈을 순간순간 떠올린다. 그가 봤던 고래의 눈, 리지와 함께 있었던 그 순간을 다시금 회상한다. 그리고 리지가 없는 날에, 어느 평화로운 날에 고래의 눈을 본다. 고래가 말하고자 했던 것, 고래의 눈빛을 떠올린다.
세상은 돌고 빠르게 회전하며, 조수는 흘러 들어왔다가 흘러 나가니, 이 세상에는 모든 진화된 형태들 가운데 서로를 똑바로 바라보는 두 영혼만큼 더 아름답고 더 경이로운 것은 없다.
그리고, 그 두 영혼이 헤어지는 것만큼 비참하고 슬픔을 주는 일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함께 함에 크나큰 기쁨이 있으며, 서로를 잃음에 크나큰 비탄이 있음을 깨달았다.
터너는 말라가를 잃었다.
332P
해피엔딩이라면 해피엔딩일 수 있는 결말이었지만, 가슴의 반 이상이 깎여나간 듯한 고통이 남는 슬픈 결말이었다. 하지만, 터너가 '종의 기원'을 읽고 가슴의 불을 지폈듯이, 이 책 '고래의 눈'은 내 가슴에 불씨가 되는 소중한 책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기록된 이름도 없이 잊혀진 존재가 될 뻔한 어린 소녀에게 '리지 브라이트'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우리의 곁으로 다가 올 수 있게 생명을 불어넣어준 게리 D 슈미트 작가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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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눈」을 읽고 청소년기에 겪는 사랑과 우정은 정말 살아가는 데 있어서 멋진 추억의 단면이기도 하다.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재미가 있으면서도 굉장히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람들은 ‘첫사랑’이라는 한때를 대부분 겪게 된다. 주로 일방적인 사랑일 때가 많기도 하지만, 어쨌든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이다. 이런 마음들이 살아 있을 때에 이후에 더 좋은 마음으로 생활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전개되는 순수한 소년 소녀들의 사랑 모습은 정말 눈에 삼삼할 정도로 마음 속 깊이 잠겨오는 아주 큰 메시지를 담고 있어 감동적이었다.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비교적 엄격하게 자란 백인 소년 터너와 가진 게 없지만 쾌활하고 풍요로운 정신을 가진 흑인 소녀 리지의 우정 속에 사랑을 느껴 가는 성장기의 모습이 순수한 자연의 모습과 함께 전개가 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것을 계기로 황금 물질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어른들의 행동을 통한 강력한 메시지도 전달하고 있다. 약 100여 년 전 미국 현대사에 엄연히 존재하는 불행했던 사건을 바탕으로 하여서 이런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작가의 위대한 모습을 알 수가 있었다. 역시의 작가의 힘이란 이렇게 위대한 것이다. 작품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낯선 핍스버그로 갓 이사 온 터너는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외로움과 답답한 마음에 늘 미지의 세계로 떠나고 싶어 하게 된다. 이런 터너에게 거주하는 인근 말라가 섬에 사는 당당하고도 유쾌하게 생활하는 흑인 소녀 리지가 바로 미지의 세계로 받아들인다. 그 이후 터너의 모습은 목사의 아들로 남의 눈을 항상 의식하면서 살아야 했던 상황에서 이제는 리지를 통해 인생을 배우고, 마음을 열며, 마침내 자신을 가두고 있던 제약을 벗어 던지게 된다. 그래서 터너는 비로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소년으로 성장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두 사람 사이의 순수한 우정과 사랑의 모습은 요즘 많은 것을 요구하고 따지는 서글픈 우리의 현실을 부끄럽게 경고하고 있기도 한다. 비교적 약한 원주민이고 흑인인 말라가 섬사람들을 완전히 짓밟고, 자기들 백인들의 우월한 기득권의 욕심을 챙기려는 핍스버그 마을 사람들의 사이에서 터너의 아버지인 벅민스터 목사의 갈등과 죽음으로 결국은 정의 편에 서는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어 흐뭇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보다는 돈과 물질을 최고로, 나 혼자만 이기고 성장하고 발전하고 앞서가는 것에만 온통 정신에 팔린 모습에서, 남의 행복과 배려를 통한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인간적인 모습의 교훈과 밝은 희망을 나름대로 심어주고 있어 매우 기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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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너는 목사의 아들로만 살아가야하는 아이이다 목사의 아들로써 벗어나는 행동과 말을 해서는 절대 안 되는 아이다 목사인 아빠는 늘 터너에게 숨이 막힐 정도로 규율을 많이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터너와 아들은 같은 나이다 그래서인지 터너의 아빠, 목사를 보면서 아들에게 비친 내 모습은 어떨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내가 봐도 답답하고 지루하다 그런 터너에게 숨구멍을 만들어 주는 아이가 나타난다 그 아이가 바로 흑인소녀 리지이다 리지를 만나기전에 터너는 자신에게 주어진 지루한 삶을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속으로 불만불평을 늘어놓아도 아빠 앞에서, 그 누구 앞에서도 자신 있게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리지를 만나고 리지의 할아버지를 만나고, 리지가 살고 있는 말라섬을 알고부터 조금씩 변해간다 터너와 리지의 만남은 운명처럼 맺어졌고 둘만의 아름다운 우정으로 발전해 간다 하지만 터너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백인과 흑인은 친구가 될 수 없고 그들과 함께 삶을 공유할 수도 없으며 차별 된 시대였다 이것이 불행의 시작이였는지도 모른다 마을의 관광지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지역유지들은 말라섬에 사는 흑인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리지가 강제로 요양원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터너가 데리러 갔을 때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였다 리지는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얼마나 억울했을까? 이 부분을 읽으면서 화가 너무 많이 났다 자신들의 작은 이익 때문에 자신들보다 힘없고 약자들에게 함부로 하는 그들을 보면서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에 정말 많이 부끄러웠다. 터너가 리지와 아빠와의 이별을 경험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생각이 달라졌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터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오랜된 사고와 버려야 할 고정관념들을 많이 벗어 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 된다. 이세상 어디에도 더 이상의 리지가 없기를 희망하며 기도해본다. ‘터너는 말라가를 잃었다. 그래서 터너는 울었다. 고래에게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고래의 눈을 응시하며 흐느껴 울었다. 허드 할머니 때문에 울었고, 콥 할머니 때문에 울었고, 아버지와 리지 브라이트 때문에 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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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두께가 만만치 않아 보이지만 한번 손에 들면 결코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면서도 너무나 감동적이다. 나는 밤을 새워 책을 보는 타입은 아닌데 이 책은 정말 밤을 새며 새벽녘까지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읽고 나면 화도 무지도 나고 가슴도 너무나 아프지만 희망의 이유를 찾게 될 것이다.
터너는 목사의 아버지가 메인 주 핍스버그로 부임하게 되면서 보스턴에서 이사를 온다. 이때만 해도 마을이 목사의 말씀을 따르고 그의 권위 하에서 마을 일을 의논하는 때다. 그리고 목사의 아들에게는 그 아들다운 행동을 강요할 때이다. 터너는 이곳으로 온 뒤부터는 자신에게 쏠리는 눈길과 마을 아이들의 텃세 때문에 몹시 힘들어 탈출하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터너는 이사 온 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입방아 찧을 만한 일들만 하게 된다. 그것 때문에 아버지에게 야단도 맞고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도 곱지 않아 더욱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런 그에게 그나마 위안은 바다가 가까이에 있다는 것. 터너는 바닷가에 갔다가 그 바닷가 맞은편의 말라가 섬에 살고 있는 리지라는 흑인 여자 애를 만난다. 그 당시에 백인이 흑인을 사귄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터너는 리지를 통해 숨막히는 일상에서 탈출하게 되고 리지를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핍스버그 마을의 유력자이자 탐욕스런 스톤크롭은 마을의 개발을 위해서는 흑인들이 100년도 넘게 일궈온 그 말라가 섬에서 흑인들을 모두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목사인 터너의 아버지를 이 일을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 터너는 리지를 볼 때 흑인이고 가난하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는 마을 사림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리지와 어울리지 말라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속 리지와 어울리면서 말라가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항변한다. 이런 그에 대해 스톤크롭은 목사의 아들은 마을의 뜻에 협조하지 않고 흑인 여자 애와 어울리고 있고, 목사인 그 아버지가 아들이 그렇게 하도록 방관하고 있다고 비난을 하기 시작한다. 더욱이 콥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할머니 집을 터너에서 상속하자 터너와 마을의 유력자들 간의 갈등은 고조되고 터너의 아버지가 숨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후 마을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다. 이렇게 이 이야기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는 야비한 인간들과 힘이 없어서 그냥 당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 가운데서 정의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외로운 사람의 힘겨운 투쟁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런 싸움 구도는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이런 싸움에 때문에 세상에 전쟁은 끊이지 않고 있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터너 덕분에 그를 괴롭혔던 허드 윌리스도 변했고 처음엔 터너에게 트집만 잡았던 콥 할머니도 그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았는가? 터너의 어머니는 진작부터 터너의 편이었고 터너의 아버지 또한 이 마을에서 목사 직책을 잃게 될 것을 알았지만 정의를 위한 터너의 싸움을 지지한다, 마지막 눈빛으로. 터너가 머리를 다친 리지를 말라가 섬으로 데려다 주려고 처음 노를 저었던 배가 바다를 표류할 때 만난 고래의 눈빛과 같은 눈빛으로. 고래의 눈,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궁금하다. 고래는 항상 우리에게 희망의 상징이자 힘을 주는 신비스런 존재인 것 같다. 우리와는 아주 먼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육중한 몸을 바다에 담고서 신비스런 물줄기를 뽑아 올리는 모습 때문인지... 하여튼 터너도 고래의 눈에서 바로 그런 희망의 빛을 봤던 것 같다. 실제로 터너는 이 싸움에서 얻은 게 없다. 오히려 많은 것을 잃었다. 아버지를 잃었고 친구 리지도 잃었다. 목사가 될 뻔한 자신의 미래도 잃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변했다. 그들에게 정의를 알렸다. 이게 바로 싸워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작품은 1912년 메인 주에서 실제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백인 목사 아들과 흑인 소녀 간의 금지된 우정을 다루고 있지만 아울러 정의가 무엇인지도 알려준다. 특히 터너의 아버지의 자신의 생각을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터너에게 다윈의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권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목사가 <종의 기원>을 읽다니...당시로서는 금서였을 텐데....그처럼 사람이 진화하면 할수록 정신도 진화한다는 뜻일 게다. 우리도 21세기에 걸맞는 정신을 가졌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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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소설'을 접할때마다 어른이 된 나에게 지난 유년시절을 되돌아보며 뉘우침과 생각의 시간을 갖게된다. 이 책 <고래의 눈> 또한 추운겨울 가슴이 따뜻해지는 난로와 같은 소설이다.
1920년대 시카고에서 살던 목사 아들 열세살 터너 벅민스터. 핍스버그에 이사오면서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고픈 때가 여러번 있게 된다. 이곳으로 이사오면서 자신에게 가까이 하지 않는 아이들을 만났을 때와 잘할거라 생각했던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던 야구시합과 동네 남자아이들과 바위턱에서 바다로 뛰지 못하고 겁에 질렸을 때이다. 터너에게 늘 따라붙는 '목사 아들'의 호칭으로 늘 주민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고 목사의 아들로 언행을 조심해야 하는 갑갑한 생활을 한다. 사소한 잘못 하나에도 아버지 벅 민스터 목사에게 일러 바치는 교인들 때문에 터너는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고 핍스버그를 떠나고픈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러다가 가게된 말라가 섬에서 자유와 리지 그리핀이라는 흑인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된다. 리지와 함께 바다에서 자유를 누릴 때만큼 터너는 온세상을 가진 것처럼 행복을 느낀다. 멀리 나갔던 바다에서 "고래의 눈"을 보며 더이상 미지의 세계를 갈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핍스버그의 발전을 위해 말라가 섬에 살고 있는 흑인 주민들을 내쫓고 근사한 휴양지를 만들어 낼 음모가 계획되어지며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간다. 처음에는 정이들지 않던 콥할머니와 그 이웃이던 위드할머니. 갑자기 위드 할머니가 정신병원으로 가게 되고, 리지와 함께 오르간 연주를 하고 노래 부르며 마음의 벽을 무너뜨린 콥할머니, 리지의 할아버지 그리핀 목사. 터너의 말라가 섬을 지키기 위한 마음을 이해하셨던 아버지 벅민스터 목사. 이들의 죽음은 헛되게도 말라가 섬엔 아무도 남게 되지 않으며 리지 또한 정신병원으로 가 숨을 거둔다.
열세살의 목사아들 터너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없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인종차별적으로 흑인들을 몰아내는 어른들이 가져온 핍스버그의 절망적 결론. 터너로 인해 그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사랑으로 감싸주는 인간애. 터너가 보았던 고래의 눈을 통해 새로운 삶에 눈을 뜨고, 그 눈으로 세상을 함께 살도록 보았던 작은 소년에게서 뭉클한 감동과 슬픔이 내 온몸의 세포들이 하나하나 눈을 뜨게 하는 것 같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비극적 결말이긴 하나 작은 희망의 불씨가 커다란 화해와 사랑의 활화산으로 커질거라 상상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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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눈이라는 제목을 처음 듣고는 어떤 책일까 싶었다. 고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이야기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래의 눈이라고 하면 일단 착한 고래의 눈빛부터 떠올려진다. 큰 덩치에, 큰 눈, 그리고 그 큰 눈에 담겨있는 정직함. 과연 내가 읽는 이 책에서는 어떤 내용이 나올까? 표지에는 흑인 소녀와 백인 소년이 물 속에서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결코 사람에게는 적용되어서는 안 될 흑백논리가 우리 사는 세상에 아직도 뿌리를 뽑을 생각을 전연 안하는 것. 그림을 보며 그런 슬픈 생각이 먼저 들었다. 주인공 남자아이 터너는 목사의 아들이다. 핍스버그라는 마을의 제일회중교회로 가게 되는 목사아버지를 따라 함께 가게 되는데, 첫 시작부터 마을에서 비웃음을 당하게 된다. 거기다 목사의 아들이라는, 절대 떨쳐낼 수 없는 그림자같은 불편함을 가졌기에 더욱 외롭고 힘들다. 항상 빳빳한 셔츠를 입어야 하는데 빳빳한 셔츠에, 목사아들이라는 빳빳한 눈길이 터너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그는 3일만에 핍스버그라는 마을을 떠나고 싶어, 옆에 있는 말라가 섬을 자신의 도피처처럼 가보게 되는데 그 곳에서 흑인 소녀 리지를 만난다. 모든 것이 트인 생각을 하며, 자연과 친구가 되고 욕심이 없는 아이 리지. 리지는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할아버지와 살고 있는데 그 할아버지 역시 교회의 목사이다. 하지만 핍스버그의 터너 아버지의 교회와는 달리 가난한 교회다. 가난한 흑인들이 다니는 교회인 것이다. 리지가 터너에게 공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는 것을 계기로 둘은 조개를 캐다가 함께 수프도 끓여먹는 등 친하게 된다. 그러나 흑인과 백인이 친하게 지내는 것은 핍스버그 마을에서 터부시된다. 리지와 함께 지내는 것을 목사인 아버지도 처음에는 반대 하신다. 그래서 처음엔 아버지가 미웠다. 하지만 점점 아버지도 변한다. 제일회중교회에서, 도대체 사랑을 실천하라는 단체인 교회에서 말라가 섬 사람들을 정신병원으로 쫓아내라는 것에 더 이상 동의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 사람들은 말라가 섬 사람들을 정신병자 취급하며 인간 말종 쓰레기, 음식만 축내는 기생충처럼 취급을 한다. 결국 결말은 슬프게 끝나버린다. 책 제목이 고래의 눈인 이유는 리지와 함께 바다에 있을 때 고래의 눈을 보았고 그 후에 한번 더 보게 되는데 그때는 고래를 만져보게 된다. 그런데 그때 터너가 느끼는 것이 많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고 참 마음이 좋지 않았다. 많이 슬펐다. 감동을 받으며 끝나길 바랐는데. 이 책은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인물만 허구로 만들어져 쓰인 책이라고 했다. 이 책은 마치 한국의 난쏘공과도 비슷했다. 가진 것 없고 살아가기 힘든 이들은 가진 자에 의해서, 권력이 있는 자에 의해서 그나마도 가진 것을 빼앗기고 쫓겨난다. 모두가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면 배를 곯을 사람이 없다고 하는 커다란 지구이면서도 지구촌인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신의 몫보다 많이 가지기 위해서 싸우고 뺏고 전쟁을 하는 속상한 우리의 별. 나도 가지지 못했다. 뉴스를 보면 그래서 화가 날 때가 많다. 나와 같이 가지지 못한, 수많은 이들은 그저 소수의 가진 자들에 의해 당하고만 살게 되기 때문에. 지금 문제시 되고 있는 세종시 문제도 어쩌면 고래의 눈과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싶다. 우리 나라 높으신 분들도 참 문제고. 인종으로 구별짓는 분들도 참 문제다. 말라가의 정상적인 사람들을 정신병자 만드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였을 뿐인데 우리 사회도 같다고 생각한다. 멀쩡한 사람 바보 만드는 쉬운 세상 - 어떻게 보면 뻔한 스토리라고도 할 수 있지만 난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책은 우리 사회를 너무도 잘 표현해내는 그런 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