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찰나刹那 찰나刹那 줄어드는 목숨. 그럼에도 인간은 눈앞의 단맛에 모든 것을 잊는다. 그것이 인생人生.
1. 들어가며
어떤 소설을 읽든,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면 언제나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봐, 어땠어?
머리로 생각하는 건 나중에 하면 된다. 하나의 세상에 뛰어들어 웃고 화내고 날뛰고 슬퍼하던 모든 경험이 가슴 속에서 뒤섞이며 내놓은 답이야말로 순수한 감상이다.
싸우는 사람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214번과 키나, 오쿠거와 함께한 여행을 뒤돌아보며 내가 내놓은 답은,
와
한마디였다.
2. 거리감 제로의 세계
싸우는 사람은 노예 검투장의 처절한 혈투로 그 막을 연다. 죄수 번호 214번은 오랫동안 싸우고 또 싸웠다. 그가 아는 건 간수가 밀면 나가서 싸워야 한다는 것 뿐. 그날의 상대는 오크 전사였다. 어이구, 오크 주제에 전사라니. 오크는 췩췩거리며 싸돌아다니다 주인공이 칼질 한번 하면 죽어나가는 잡몹 아닌가. 마법 한방이면 수십 마리가 있어도 단숨에 바비큐가 되는 신세일 뿐.
그런데 뭔가 다른 것 같다. 화려한 삽화에 그려진 오크 전사는 아무리 봐도 오크가 아니라 오거 쯤 되는 괴물.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옆구리를 찌른다. 반격당해 갈비뼈가 부러진다. 방패로 후려친다. 방패 째로 어깨가 으스러진다. 턱을 후려갈기고 배를 얻어맞는다. 바닥에 나뒹굴고 모래를 뿌리고 상처를 후벼파고 비명과 같은 기합과 함께 눈알을 찌르고 목줄을 노린다. 피냄새, 어지러운 시야, 가빠지는 호흡, 부러진 갈비뼈는 내장을 찌르고 마약에 찌든 몸은 고통을 살의로 바꾼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목표도 없고 이유도 모른채 그저 살아야 한다는 일념만을 되새기며 좁디 좁은 전장에서 살의와 살의가 뒤엉켜 생과 사를 가른다.
스무 페이지. 엄청난 환성 속에서 피로 물든 전장에 버티고 선 214번에게서 떨어져나와 나로 돌아오기까지 딱 스무 페이지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 오분도 안되는 시간 동안 나는 214번과 함께 어떤 맹수보다 흉폭한 오크 전사와 생사결을 벌인 것이다. 검투장으로 향하는 칙칙한 복도와 손바닥만한 하늘, 살기로 빛나던 푸르스름한 눈알과 거친 숨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싸우는 사람을 읽기 전부터 이수영님 특유의 야성을 품은 피와 살의 향연을 기대했지만, 이건 그런 차원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액션씬을 읽을 때면 마치 현장과 1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작가의 분신이 서서 생방송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작가의 말주변에 따라 '내용'의 질은 천차만별이지만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가끔씩 바로 옆에서 보는 듯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작품을 보면 감탄사를 터뜨리곤 했는데, 싸우는 사람은 아예 한술 더 떠서 내 머리 위에 214번의 거죽을 씌우고 싸우러 나가라고 등을 떠미는 듯 하다.
3. 정교하고 치밀한 짜임새
언뜻 보기에 싸우는 사람의 스토리는 무척 단순해보인다. 214번과 오쿠거가 키나와 함께 신전에서 생활하며 그릇된 죽음과 싸우는 한편 과거의 이야기를 더듬어 올라가는 것 뿐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숨겨져있던 구조가 점점 드러나기 시작하며, 다 읽은 지금은 이 두권짜리 소설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지독하리만치 정교하고 섬세한 안배를 느끼며 그저 놀랄 뿐이다.
죄수번호 214번의 '이름찾기'는 싸우는 사람의 큰 축을 이룬다. 마약에 의해 손상된 뇌는 어렴풋한 기억의 편린밖에 건져올리지 못하고, 그것을 단서 삼아 키나와 214번은 과거를 더듬어 간다. 그 여정에서 214번의 과거에 속한 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이 그려진다.
어떤 이는 가증스럽고, 어떤 이는 사랑스럽고, 어떤 이는 답답하다.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214번이 자신의 이름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그는 변해가고, 그를 바라보는 나도 변해갔다. 하늘에 닿을 듯한 의지에 감탄했다. 더럽고 비열한 인생을 혐오하고, 진창 속의 진주처럼 어렴풋한 배려에 경이를 느꼈다. 무조건적인 선의와 무의미한 악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베일이 벗겨질 때마다 내 눈에 비친 세상의 모습이 바뀌어갔고, 그 어질어질할 정도의 치열함에 휩쓸려 넋을 잃었다.
이것이 삶이구나. 그렇게 느꼈다.
214번은 변모를 거듭한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가 이름을 되찾았기 때문은 아니다. 키나와 만났을 당시의 그는 구멍투성이였고, 그것을 조금씩 메꾼 것은 과거가 아니다. 그를 위해 애쓴 키나의 마음이, 오쿠거와 함께 한 치열한 나날이, 돌덩어리가 되어버린 것 같은 원망스러운 머리통을 굴리고 또 굴리며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 그의 의지가 메꾼 것이다. 그렇기에 '키나가 들춰본 아이거의 감춰진 기억은 그가 되찾은 삶 전부를 부정했다'는 작품 소개문의 글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되찾은 삶은 과거의 그것이 아니기에.
4. 현실같은 환상, 환상같은 현실
완성도 높은 이야기의 바탕에는 탄탄한 설정이 뒷받침되어 있는 법. 흔히 뛰어난 설정/세계관이 지니는 특성은 방대함, 세밀함, 독특함 같은 것이지만 싸우는 사람에서 이수영님의 그려내는 세계는 '깊이 스며들어 있다'는 말이 제일 잘 어울린다. 1권의 부록인 설정집에는 대륙의 역사에서 다섯 신의 특성까지, 세계관을 이루는 큰 틀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해두었다. 설정집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재밌다보니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졸라서 들은 후 팬픽을 써보고 싶을 정도다.(물론 실제 쓸 능력은 안되니 머리 속에서 상상만 하며 즐길 뿐)
하지만 작품 내에서 이러한 설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좀처럼 없다.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거리의 그늘에서, 아무렇지 않게 흘리는 한마디 속에서 느껴질 뿐이다. 다섯 신을 섬기는 종교에 대한 묘사가 특히 인상적인데, 그 중에서도 키나가 섬기는 데스가움의 교리는 압권이다. 마치 죽음의 신을 섬기는 교단이 실제로 있고, 작가가 그들의 삶을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데스가움의 사제 키나의 삶에는 신을 향한 깊고 깊은 믿음이 드러난다.
설정이 설정에서 그치지 않고 인물의 내면에 깊이 스며들어 있기에 느껴지는 탁월한 리얼리티. 자유로운 상상이라는 미명 하에 온갖 공상을 다 끄집어내서 우겨넣고는 대충 이어붙이는 일이 많은 판타지 소설이기에, 환상을 엮어내어 현실로 구현해내는 대가의 솜씨에는 더욱 더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최고라 불리는 작가는 다 그렇지 않던가.
5. 싸우는 사람들
214번은 많은 것들과 싸운다. 그는 오크 전사와 싸우고, 어린 귀족소년과도 싸우며, 간수나 경비병과 싸운다. 굶주림과 싸우고 금단증세와 싸우며, 자신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과 싸운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와 싸우고 보이지 않는 미래와 싸운다. 그의 삶은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누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키나는 그릇된 죽음과 싸우고, 오쿠거는 생존을 위해 싸운다. 떠나간 이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이도 있고, 단지 하루를 더 살아 숨쉬기 위해 싸우는 자도 있다. 돈을 위해 싸우고 명예를 위해 싸우고 여자를 위해 싸우고 자신을 위해 싸운다. 이 작품은 치열한 투쟁으로 가득하다.
데스가움은 죽음의 신. 그가 원하는 것은 정상적인 죽음이다. 대체 무엇이 정상적인 죽음인가. 교리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산 것이 할 만큼 하다가 죽는 것'.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러니 그의 방문을 받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말라.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싸우고 또 싸워라! 그리하여 마침내 끝을 맞이하면 데스가움의 옷자락이 그대를 밤하늘의 별빛으로 돌려주리라. 나는 죽음의 신이 말하는 교리에서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짙은 긍정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은 한 독자가 내린 답일 뿐. 싸우는 사람을 읽으며 무엇을 느낄지는 각자에게 달린 문제다. 나는 '순수한 나만의 감상'과 '다른 이의 시각'을 따로따로 느끼고 비교하는 데서 또 한번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아직 권두의 추천사도 읽지 않은 상태고 다른 독자들의 리뷰도 일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이 글을 마친 후 느긋하게 읽어보려 한다. 그러니 본 리뷰를 보는 분들도 타인의 감상은 가볍게 흘려버리고 백지같은 마음으로 싸우는 사람을 접해보길 권한다.
6. 맺는 말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눈을 감은 채 부드럽게 뛰는 가슴의 고동을 들으니 형언하기 어려운 만족감에 입꼬리가 절로 말려올라간다. 닫힌 눈꺼풀 위로는 그가 인간의 손과 짐승의 앞발로 끙끙대며 장화를 만드는 모습이 선명하고, 그가 만든 장화를 신고 그가 해온 장작으로 난로를 피우며 따스한 온기에 작은 하품을 할 키나의 모습이 뒤를 잇는다. 마음 속에 또 하나의 보물이 생겼다.
부록01. 책의 외양
일단 두툼하다. 추천사, 설정집, 단편을 모두 포함하여 두권 다 310페이지 정도. 대여점용 장르소설에서 흔히 사용하는 엔터신공은 일체 보이지 않고 페이지마다 글자가 가득하므로 실제 분량은 상당하다.
표지는 죽음의 신전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배경으로 214번과 오쿠거가 앞표지와 뒷표지를 차지하고 있다.(단 1권에서는 오쿠거가 뒷표지, 2권에서는 앞표지로 순서만 바뀐다) 첫 인상은 조금 미묘하다. 중후한 색감과 캐릭터는 나쁘지 않았지만, 표지로 독자들을 낚을 만한 구성은 아닌 듯 하다. 얼굴 뭉개진 무진장 심각해보이는 아저씨와 인상 팍 쓰고 있는 이름모를 맹수 조합이니까. 약간의 사심을 담아 의견을 내보자면 두권 다 키나를 중심으로 1권 배경엔 214번, 2권 배경엔 오쿠거 정도가 베스트 조합이 아니었을까 싶다.(작중 비중을 보더라도 키나의 출연이 없는 건 납득하기 힘들다 ㅜㅜ)
내가 깜짝 놀랐던 점은 내부에 삽화가 있는데다, 무려 올컬러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퀄리티가 정말 엄청나다. 오히려 표지보다 낫다 싶은 그림도 다수 있었다. 달랑 몇장 넣어주는 수준도 아니고 1권에 9매, 2권에는 11매. 무려 스무 장의 컬러 삽화가 들어가 있고 그 전부가 고퀄이다. 일러스트는 송원석(Song won seok)님이 담당했다고 나오는데 이분 이름은 기억해 둬야겠다. (그건 그렇고 컬러 삽화는 충분히 세일즈 포인트가 되었을 텐데 책을 손에 들고 펼치는 순간까지 몰랐다는 것은 좀 아쉽다.)
종이질은 - 전문가가 아니니 잘 모르지만 - 최상급은 아닌 듯 하다. 살짝 아이보리색이 나고 책 옆구리의 절단면에 미세한 보풀이 있지만 신경쓰이는 수준은 아니다.
가격은 9000원. 이해할 수 없는 가격이다. 이수영님의 글과 십여 매의 컬러 삽화로 꽉꽉 채운 책이 단돈 9000원. 엔터신공으로 인해 글자보다 공백이 더 많고 교정교열은 발로 했나 의심스러운 대여점용 양산형 소설도 8000원인데... 이래서 이윤을 남길 수 있는지 솔직히 의문이다. 싸니까 독자 입장에서야 반가운 일이지만.
부록02. 개인적인 캐릭터 순위
3위 힉센. 2위 오쿠거. 1위 키나. 주인공? 그게 뭐죠? 먹는건가요? ... 주인공이 매력적이지 못한 게 아니라 너무 멋진 캐릭터가 많다. (게다가 몰입도가 높아서 214번과 하나된 것처럼 느껴지니 애초에 순위선정에서 제외) 힉센은 미리니름이 될 테니 넘어가고, 오쿠거 정말 멋있다. 그야말로 짐승이라는 느낌. 삶 그 자체가 목적이기에 의문도 없고 가식도 없으며 망설임도 없는 우리 살쾡이 사촌 오쿠거 최고! -_-b 특히 대지신의 기운을 받아 고롱고롱 거리는 모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움.>_<
하지만 그런 오쿠거도 키나에게는 대적할 수 없다. 가느다란 팔다리에 자그마한 몸집. 흔들림없는 눈빛으로 고통을 이겨내고 한없는 믿음으로 삶을 긍정하고 죽음을 수호하는 그녀는, 내게 숲 속의 고요하고 차가운 샘물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어느날 길을 잃고 샘에 퐁당 빠진 물고기때문에 깜짝 놀라면서도 부드럽게, 조용히 품어주었다. 그 물고기는 멍청하고 활동적이라 고요하다는 것도 옛말이 되어버렸지만, 녀석으로 인해 조금은 온기를 품게 되었으니 만족하고 있겠지. |
|
환타지 액션 어드벤처 사꾸라 반지의 제왕 플러스 글래디에이터 짬뽕 시추에이션 및 각종 알피지 게임 카피의 빈약한 상상력을 자랑하고 삼류 대본소 무협지를 연상케하는 라이트노벨 장르의 소설입니다. 라이트노벨, 아시죠? 적절한 일러스트와 함께 중, 고딩, 혹은 성인이라도 집구석에 짱 박혀 이상한 거 모으는 히끼꼬모리 같은 애들이 좋아하는 장르 소설 말이죠.
그런데 이 소설은 제법 수준이 있었습니다. 일단 작가 선생님의 묘사가 범상치 않기 때문에 중반부까지의 진행은 가히 별 다섯을 주고도 남음이었죠. 라이트노벨 특유의 말초 자극적인 내용 일색이기는 했어도 그 묘사 자체가 삼류 아마추어 같지는 않았거든요. 제법 수준이 느껴지는 좋은 문장을 구사하시길래 읽으면서도 상당히 좋은데? 했던 소설입니다.
아, 그러나 역시. 중반부에 다가가면서 힘이 급격하게 빠져버리더군요. 카피 상상력의 고갈이라고나 할까요? 빠르게 전개되던 이야기가 죽음의 신전의 신전 투사가 된 이후의 이야기를 더는 엮어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좀비랄지, 언데드랄지, 조금 유치해지는 대상들과 무의미하고 긴장감 없는 전투로 지면을 채우는가 싶더니 역시나 마찬가지로 전혀 긴장감 없이 주인공의 과거를 한 번씩 뒤집어 까는 정도로 1권이 마무리 되네요. 아아, 초반은 정말 좋았는데 말이죠.
214번이란 번호로 불리는 한 거구의 기억을 잃은 사내가, 글래디에이터처럼 대중 앞에서 검투를 하는 노예로 전락하게 된 어떤 비밀을 안고 싸우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탈출을 하게 되고 숲에서 정체불명의 생명체와 격전을 치루고는 반인반수가 되는 엽기적인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죽음의 사제인 키나, 라는 소녀의 도움으로 죽음의 신전의 일원으로 되는 과정까지가 딱, 재미있는 이야기의 끝이었습니다. 이 다음부터의 이야기는 이제, 더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 몰라 지지부진 지루하게 늘어지는 어영부영 스토리이니까요. 일단 1권은 그랬네요.
뭐, 상상의 대륙에 관한 설정집도 있고 상상의 신과 인간과 마을로 이루어진 환타지 스토리라고는 해도 이곳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죄다 게임에서 차용한 듯 느껴지는 조악한 이름을 가진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소드니, 컨틀렛이니, 하는 식의 빈약한 상상력의 무기들은 왠지 책을 읽다말고 랩업을 해야할 것 같은 충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죠. 크롤 같은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이름의 차용도 있었으나 작가 선생님이 과연 북유럽 신화를 읽고 도움을 받은 것인지는 사실 좀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작명에서 풍기는 찌질한 느낌은 없지 않았을까 싶은 거지요. 그러니까 이건, 그냥 알피지 게임을 많이 해본 사람이 뭔가 그것을 토대로 빈약한 상상력을 발휘한 결과물이라는 느낌이 아주 강하네요. 수퍼주니어에 미친 여고생이 그들의 신상으로 팬픽을 쓰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작가 선생님의 문장력과 묘사, 그리고 역동적인 분위기를 주도하는 서술방식 등은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그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니까요. 2권까지 다 읽고 난 다음에야 전체적인 구성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일단 작가 선생님의 힘 있는 문체는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분명히 남다른 감각을 지닌 작가 선생님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고요, 상상력만 어떻게 좀 보강된다면 아주 훌륭한 판타지 소설 작가 선생님이 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싸우는 사람》에서 느껴지는 첫 이미지는 용병이다. 돈에 팔려 대리전쟁을 벌이는 이들 용병, 그래서일까 그들에겐 적도 친구도 없다고 한다. 한때 적이지만 필요에 따라 동지가 되기도 하고 또 다시 적이 되어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기도 하지.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채 목숨을 건 결투를 통해 귀족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노예 241번, 어쩌면 그는 죽는 것이 오히려 더 행복할지 모르지만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고 운이 따랐음인지 결투마다 승리를 거둬 살아남았다. 탈출에 성공하고 숲에서 만난 맹수 오쿠거와 싸우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니 반인반수의 괴물이 되어 있었다. 오쿠거나 그나 살고자 하는 생존욕구가 강해 둘의 몸이 하나가 되어 살아남았다는 것이 죽음의 사제 키나의 말이다. 반인반수는 어느쪽에 속하는 것일까? 그를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까? 아니면 괴물로 취급해야 할까?
"인간은 가장 치열하게 살면서도 가장 치졸하게 죽어가는 존재입니다. 죽음에 인색하지요." (p.83) 탄생을 기뻐하면서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인간이다. 죽음의 사제보다 생명의 사제가 더 인기있는 것은 이와 같은 이치다. 아이러니한 것은 죽음의 사제이면서 살생불가라~ 살아있는 것을 죽이면 안되는 철칙이 존재한다. 그럼 상대가 사제를 해치려 하면? 그냥 얌전히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 생각해 보면 죽음의 사제가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 할리 만무, 평범한 인간의 생각으로 그들을 판단해서는 안되겠다. 죽음은 그들에게 있어 안식이자 휴식 그 자체니까. 저자의 저서로는 읽은 책인《쿠베린》,《귀환병 이야기》,《리로드》《플라이 미 투 더 문》과 아직 읽지 않은 책《콘도르니아의 반지》가 있다.
죽음의 사도가 하는 일은 '죽은 자를 해방시키는 일', 이상한 표현이지만 죽어서도 죽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예를 들어 흑마법사 하인리히 루크네에 의해 키메라가 된 존재들, 하인리히는 병들어 죽은 아내를 되살리기 위해 여러가지 실험을 했고 키메라는 그 과정에서 생겨난 존재들이다. 흑마법사 자체가 생명을 중시하는 존재들이 아니지. "케엘스텐 파린타……." "빛보다 더 밝은 것, 생명." "빛 속의 그림자, 죽음." "데스가움의 이름으로 죽음의 권리를 표하노라!" (p.122) 죽은 자를 편안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주문이다. 신전투사가 된 아이거와 오쿠거, 한 몸이기에 하나가 결정하면 다른 하나는 따라야 불화가 생겨나지 않는다. 반인반수의 괴물이 된 그들이 안심하고 편안히 몸을 누일수있는 곳은 편견이 존재하지 않는 죽음의 신전뿐이다.
죽음의 신 데스가움이 있다면 생명의 신 오카리나가 있다. 데스가움이 남성신으로 표현된다면 생명의 신은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으로 표현되어져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평등하며 냉혹하다. 인간 사회의 계급이 죽음의 사제에게 통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아뭇튼 노예 241번은 오거스틴 에히리넨 대공과 어떤 식으로든 악연이 서려있는 것 같았어. 대공에 의해 귀족이던 그가 노예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직 기억이 되돌아오지 않아 정확한 것은 알수없다. 마약에 취해 조련자가 시키는 대로 결투를 하고 승리해야 살아남을 수 있던 그, 잊어버린 과거 속의 그는 어떤 사람일까? '순리를 어기는 죽음을 용납하지 말 것' 이것이 신전투사가 된 아이거가 기억해야 할 유일한 교리다.사제가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못하는 것과 달리 신전투사는 해칠수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
|
오랜만에 무협 판타지를 읽었다. 책이 잘 읽히지 않기에 선택했다. 역시 예상한대로 속도감이 좋다. 예전부터 이름을 듣고, 몇 권의 책을 가지고 있던 작가의 작품이다. 하지만 왠지 손이 쉽게 나가지 않았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이 긴 장편인대 반해 이번 작품은 단 두 권인 것이 부담 없었다. 그리고 작가가 풀어내는 죽음에 대한 세계관은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만든다. 싸우는 사람. 제목 그대로 주인공은 싸우는 사람이다. 노예 검투사로 괴물이나 다른 노예와 싸워야 했고, 탈출해서는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리고 죽음 직전에 벌어진 일 때문에 오쿠거라는 맹수와 한 몸이 된다. 그의 오른쪽 반은 인간이고 나머지 반은 오쿠거다. 왼쪽 어깨에 오쿠거의 머리가 있고, 그의 영향력이 떨어지면 오쿠거가 활동을 펼친다. 이런 부조화는 자신을 찾고자 하는 그의 싸움 속에서 또 다른 싸움이자 조화와 공존을 위한 싸움이기도 하다. 무협 판타지답게 전투와 마법이 펼쳐진다. 괴물이 등장하고, 좀비가 움직이고, 신관과 기사들이 활약을 펼친다. 다양한 신들이 공존하고, 그 신을 섬기는 신관들이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재미난 것은 죽음의 신이 주장하는 논리다. 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하기에 귀족과 평민에 대한 구분이 특별하지 않다. 다른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이를 구분하고, 오쿠거와 한몸이 된 그를 경시하는 것에 비해 데스가움의 사제인 키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데스가움의 사제는 비정상적인 죽음으로 정상으로 돌려놓을 뿐이지 사람을 결코 죽일 수 없다. 비록 산 자들에게 심적인 위압감을 줄 수 있지만 물리적인 폭력 앞에선 절대 살생을 할 수 없다. 이런 장치를 작가는 교묘하게 엮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제목처럼 싸우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루는 한 편 그의 과거를 파헤친다. 추리나 논리나 추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혼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아내는 것이 조금 특이하다. 그것도 단숨에 드러내지 않고, 그 영혼의 정화 정도에 따라 조금씩 밝혀진다. 이름 속에 숨겨진 비밀과 과거의 아픔은 뒤로 가면서 더욱 커지는데 이것은 이 소설이 주는 재미 중 하나다. 반전처럼 펼쳐지는 과거사 기록은 마약으로 망가진 그의 뇌 속 기억을 알지 못하는 것이 다행임을 알려준다. 죽음의 신의 사제가 된 그에게 과거는 어쩌면 큰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신 중에서 죽음의 신을 섬기는 사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 것은 의미가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하고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죽음을 긍정하는 순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긍정하고 제대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를 역행하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하고, 데스가움의 사제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흔히 겉만 보고 속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죽음의 사제가 자신들에게 죽음을 가져다 줄 것이란 착각은 바로 이런 잘못된 인식과 죽음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무협 판타지를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허황되고 어이없다고 생각한다면 책을 덮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지라도 작가가 찰나 찰나 줄어드는 목숨 속에서 인간이 눈앞에 단맛에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한 부분과 죽음에 대한 이해는 한 번쯤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 중독성이 너무 강해서 탈이지만 다시 긴 무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강해진다. |
|
무협이나 판타지 소설을 많이 접해보지는 못했다. 특별히 싫어하는 장르는 아니지만, 별로 읽을 기회가 없었던 듯. 옛 추억이 돋아나는 만화방들을 이제 찾기 힘든 것처럼, 마음먹고 찾지 않는 이상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들도 가까이 접하긴 힘들었지 않았나 싶다. 뭐 결론적으로 내가 게을러서 그랬다는 소리.
작가에 대한 사전의 정보나 지식이 없었다. 성별로 솔직히 모른다. 다른 이들의 서평들을 보았을 때, 여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제 와서 작품들을 다시 살펴보니 어쩐지 여성일 것 같다는 심증이 팍팍 들기도 한다.
마약에 의지한 채 그저 눈앞에 있는 상대방을 죽이는 것만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노예 검투사 214번. 그는 자신의 이름도 과거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왜 지금 차디찬 감옥에 갇혀 짐승처럼 사육되며,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과 피비린내 나는 결투를 치러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문득 삶에 대한 강한 의문, 자유에 대한 목마름으로 탈출을 감행하게 되고, 도주 중 잘못 찾아 들어간 숲에서 야수 오쿠거를 만나게 된다. 생사를 건 싸움에서 살기 위해 서로를 죽인 214번과 오쿠거. 하지만 신은 공평하게도(!) 그들의 생명을 온전히 거두어가기 보다는, 딱 절반씩만을 가져가는데.
반인반수의 괴물을 떠오르게 만드는 214번의 모습. 그의 반은 야수 오쿠거가 차지하고 있다. 책의 표지를 보면 1권에서는 반쪽인 214번의 모습이, 2권에서는 역시 반쪽인 오쿠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서로 전혀 다른 생김새와 영혼을 가진 이들의 기묘한 동거. 이들은 서로를 죽일 수도 없는, 그렇다고 사랑할 수도 없는 묘한 협력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리고 214번은 잊었던 자신의 과거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데.
작품은 판타지 소설답게 전투와 마법이 등장한다. 그리고 기사와 신관, 여러 신들이 등장하며 작품의 배경을 탄탄하게 뒷받침한다. 한편 주인공 214번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린 여사제 키나는 그와 함께 죽음의 신을 모시며, 영혼을 빼앗긴 괴물들을 퇴치하기 위해 여정을 함께 한다.
작품을 통해 저자의 내공이 상당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 하이텔 판타지 동호회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이력을 살펴보면 수긍이 간다. 삶과 죽음에 대한 저자 나름의 정의는 이 작품을 단순한 판타지로 볼 수 없게 만드는 기분 좋은 불편함을 선사한다. 누구나 눈앞의 달콤함에 현실을 잊고 결국 죽음으로 나아간다는 표현은 오래 기억될 듯하다.
주인공 214번의 삶을 비극으로 치닫게 한 것은 전쟁이란 재난 때문이었다. 그가 끝까지 완전히 기억해 내지 못한 과거에는 전쟁으로 인해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고통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는 그 전쟁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더 큰 비극을 만들어내고 만다.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읽는 이에게 또렷이 전달되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선과 악, 죽음과 삶, 적과 동지. 어찌 보면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한 구별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자신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엇이 정말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피해야만 할 죽음이며, 무엇이 기어이 살아내야 할 삶인지, 도무지, 지금도 제대로 모르겠다.
작품은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스스로 삶을 움켜쥐고 나아가려는 214번의 처절한 분투가 담겨져 있다. 그의 치열한 여정을 함께 하며, 문득 지금의 나와, 지금의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얼마 전 화제가 된 대학생들의 ‘당신은 지금 안녕하십니까?’ 대자보가 떠오른다. 이처럼 이상한 세상에서 지금 우리가 ‘안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214번처럼 단지 숨을 쉬고 있는 것만은 아닐까. 외면과 비겁함, 두려움이라는 강한 적 앞에 무릎 꿇고, 찰나의 쾌락과 안전이라는 마약에 취해, 진정 내 안에 있는 인간성을 외면하고, 혹은 스스로 죽여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은, 공평한 죽음, 공평한 삶을 누릴 권리를 온전히 가지고 있을까. 온전히 사람이 아닌, 오직 돈만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는 세상에서, 과연 우리는 살아있는 것일까. 안녕한 것일까.
214번과 키나는 죽음을 관장하는 신, 데스가움의 사제가 되어 영혼을 잃어버린 괴물들을 다시 죽음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공평해야 한다는 키나의 말은 나에게 아프게 다가온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죽음. 공평한 죽음. 과연 이 시대에 그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도대체 훗날 어떻게 기억되고 회자될지 두렵기까지 한 2013년이 저물어 간다.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무더위가 작렬하던 7월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춥다. 몸도 마음도.
죽음이 모두에게 공평해야 한다면, 삶이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기계적인 평등이나 억압적인 획일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의 주도권, 주인의식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것을 돈, 황금, 권력에 넘겨주고 말았다. 영혼마저 이미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때문에 당장 철도노조 파업으로 인해 회사에 지각하는 것이, 철도가 민영화되어 우리의 권리가 날아가는 것보다 더 짜증나고 피곤하다. 노동자가 6000여 명이 잘리던, 그들의 생계가 당장 나락으로 떨어지던 상관없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작품을 통해 인간이라면 끝내 포기하지 말아야 할, 자신에 대한 권리를 말하고 있다.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214번 만큼, 아니 더 치열하게 싸워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지. 문득 생각이 들었다. 가슴 찔리고, 조금 아프지만, 꼭 필요한 생각이었다.
지금 이 시대는 작품에 등장하는 악마나 좀비, 괴물보다 더 무서운 것들이 우리의 삶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다. 그 괴물은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하지 않으면 없앨 수 없다. 그래서 214번과 오쿠거처럼, 우리는 한 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상식과 정의를 요구하는 ‘시민’이라는 한 몸.
괜찮은 작품이다. 다음 작품이 기대될 정도로.
|
|
귀환병 이야기의 작가 이수영님의 또 다른 작품 싸우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유행이 되다 못해 아예 정석이 되어버린 먼치킨 소설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판타지를 넘어서는 보물이라고밖에 평가할 수 없네요. 마음같아서는 별점을 999개정도 주고 싶지만 리뷰의 한계가 5개라서 5개 모두 주겠습니다. 아이거는 자기자신을 찾기위한 고뇌와 그가 겪게되는 일들은 정말 판타지장르인가 의심될 정도로 훌륭하게 잘 짜여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