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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18세기 북방 민족과 정복 왕조 연구
"10 ~ 18세기 북방 민족과 정복 왕조 연구" 내용보기
서양 역사도 물론 정주 농경 세력과 유목 민족 간의 끊임 없는 충돌이 있었지만 우리 동아시아의 경우처럼 뚜렷한 대립 구도가 형성되지는 않았죠. 대륙의 중화 문화라는 게 그 "중심성, 정통성"을 내세우는 게 무색할 정도로, 중원은 유목 민족들에 의해 침투, 약탈, "능욕"당한 체험이 잦으며, 심지어 거란의 대대적인 흥성 이후로는 정복 왕조의 통치가 "뉴 노멀"의 하나로 자리잡기도
"10 ~ 18세기 북방 민족과 정복 왕조 연구" 내용보기

서양 역사도 물론 정주 농경 세력과 유목 민족 간의 끊임 없는 충돌이 있었지만 우리 동아시아의 경우처럼 뚜렷한 대립 구도가 형성되지는 않았죠. 대륙의 중화 문화라는 게 그 "중심성, 정통성"을 내세우는 게 무색할 정도로, 중원은 유목 민족들에 의해 침투, 약탈, "능욕"당한 체험이 잦으며, 심지어 거란의 대대적인 흥성 이후로는 정복 왕조의 통치가 "뉴 노멀"의 하나로 자리잡기도 했습니다.

사마광은 당조(唐朝) 황실에서 빚어진 여러 문란한 스캔들과 정치의 난맥상에 대해, "이는 오랑캐의 습속"이라며 폄훼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 역사상 가장 화려한 국제적 문명을 꽃피우고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삼백여년의 기간을 고스란히 "이적(夷狄)의 공덕, 치세"로 돌리는 셈입니다. 어떻게 견강부회해도 자기 모순에 부딪힙니다. 이는 어떤 인위적 가치판단의 대상으로 삼을 게 아니라, 벌어진 현실 그대로를 역사로 인정, 수용하면 그만입니다. 번거로운 윤색은 곧 과장, 왜곡에 다를 바 없습니다.

한편 역사는 내내 정주 문명 측이 수세에 몰렸던 것도 아니라서, 많은 부작용과 한계가 노출되었으나 일단 흉노족을 향해 대대적인 공세를 폈던 한 무제의 군사 원정이 중국사와 세계 역사에 끼친 영향은 심대합니다. 당 초기에는 관롱 집단이 스스로 중화 문명의 적통을 자임하며 돌궐과 대립 구도를 이뤘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한계를 노출하며, 위구르, 키르키즈 등의 강성한 세력 발호 때문에 큰 고초를 겪었습니다. 임란 당시 누르하치의 원병 파견 제의를 류성룡이 거절한 것도, 안사의 난을 평정하려다 끌어들인 위구르에 의해 입은 병화(兵禍)가 너무도 길고 컸기 때문입니다.

송대에 들어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농경 민족 측의 거대한 수난사입니다. 거란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았기에 주기적 약탈과 세폐의 갈취 외에 어떤 선을 넘지 않다가, 요즘 말로 "혁신 정신의 부재"와 현실 안주 성향이 굳어지는 바람에, 대체 패권 유목 민족인 여진에 의해 밀려났습니다. 그 잔당이 서쪽으로 몰려가 세운 정치 단위조차도 얼마나 강성했던지, 아랍과 페르시아, 나아가 비잔티움 제국 등은 거란의 음사(音寫)인 "키타이"를 중국과 동의어로 여길 정도가 되었고, 이는 현재까지도 Cathay란 영단어(항공사명을 구성하기도 하는)에 남아 있습니다.

여진은 이후 5백년이 지나 권토중래하여 다시 중원을 점령하여 확고한 군사적 기반 위에 안정된 통치 시스템을 운영할 만큼 저력 있는 민족이었는데, 대개 거란도 몽골의 방계(사실은 거꾸로 된 소립니다만)로 보는 만큼, 서쪽의 유목 세력보다는 뭔가 확실히 세련된 기질, 정신적 특성이 돋보입니다. 뭐 우리하고도 아주 먼 혈연이 아니지 않습니까. 회수를 경계로 적정 수준으로만 강남을 위협하고, 화북을 다스리면서(이 역시 순수 정복 왕조로는 초유의 경험이라,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그만큼이나 선방한 그들의 노력이 갸륵하죠) 경제적, 정치적 실리를 축적, 향유한 그들의 치세도 꽤 성공적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독특한 건 당구트, 즉 서하 족입니다. 이들은 현재의 간쑤 성 일대에 웅거하며 오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고유의 역사를 이어왔는데, 간쑤 성이나 샨시 성 모두 중원에서 얼마나 가까운 위치입니까. 이처럼이나 가까운 곳에서 중화의 심장을 노려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 고유의 저력을 높이 평가해야 마땅합니다. 이랬던 그들을, 가장 격렬한 저항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칭기즈칸이 절멸 정책으로 대응했기에, 오늘날 그들의 흔적은 (그 수수께끼 같은 문자 해독과 함께) 영원히 망각 속으로 묻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서하는 비록 우리 민족과 직접 교통이 드물었으나, 이 거란, 여진 등의 막강한 세력을 상대로 그토록 오래 비등한 형세를 유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배달 겨레의 실력과 활기를 후히 평가해야 합니다. 정복 왕조의 자취는 곧 우리 겨레의 미러링과도 같다는 점에서, 특히 우리들은 이들의 지난 흥망성쇠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v*****7 2017.09.2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