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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화두로 삼고 있으면서도 기억이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기억을 파는 남자>도 분명 꼬리를 잇는 책읽기였는데, 어떤 책에서 읽고는 읽어보려고 했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습니다. 제목만으로는 자신의 기억을 누군가에게 판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 파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어 보니 과연 생계를 위해 다른 사람의 과거를 만들어주는, 그러니까 기억을 파는 일을 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백피증을 가진 흑인 남자 펠릭스 벤투라의 이야기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때 사람이었다고 전제를 하고는 있습니다만, 지금은 펠릭스 벤투라의 애완 도마뱀 에울랄리우가 펠릭스 벤투라에게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서술하는 화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도마뱀이 사람의 말을 이해할 뿐 더러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판단한다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의문을 가지고 본다면 특이한 인간이 아닌 생물이 화자로 등장하는 특이한 소설로는 처음인 듯합니다.
얼마 전에 백반증을 앓던 흑인 여성이 2번의 뇌졸중을 겪은 후에 피부색깔을 일부 되찾은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백피증과 백반증이 어떻게 다른지 찾아봤습니다. 저도 의사입니다만, 모든 의학적 사실을 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백반증은 피부의 색소를 만드는 멜라닌 세포가 후천적으로 파괴되면서 피부에 다양한 크기의 백색 반점이 생기는 질환입니다. 반면 백피증은 태어날 때부터 백색 반점이 생기는데, 유전적 소인에 의한 것이며 성장하면서 크기와 모양이 더 커지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백반증과의 차이점이라고 합니다.
이야기 초반에 나오는 「강을 위한 위로」라는 노래가 1970년대에 앙골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가사는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 어느 것도 지나가지 않고 / 그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네. / 과거는 잠들어 있는 강이요. / 추억은 다채로운 거짓말이라네. // 물은 강에서 잠자고 / 세월은 나의 가슴에서 잠을 자네. / 아, 슬픔과 고통도 / 나의 가슴에 쓰러져 잠을 자네. // 그 어느 것도 지나가지 않고 / 그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네. / 과거는 죽은 듯이 숨쉬지도 않고 / 잠을 자는 강이라네. 나는 강을 깨워 / 그를 소리치게 하리라.(13쪽)”
기억을 파는, 그러니까 고객의 신분을 세탁해주는 일을 하는 펠릭스 벤투라에게 어느 날 이방인이 찾아와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주면 만 달러를 낼 의향이 있다고 제의합니다. 자신은 사진 기자로 전쟁과 기아, 자연재해 등 끔찍한 사건들을 사진으로 담아왔는데, 이제 한 나라에 정착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끗하고 떳떳한 과거와 대가족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가족은 두세 명의 귀족부인을 포함해서 삼촌과 숙모, 사촌, 조카들, 조부모로 이뤄져야 하며 가족의 초상화나 가족과 관련된 일화도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새로운 이름과 법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확실하게 증명해줄 수 있는 문서가 필요하다고도 했습니다. 펠릭스 벤투라는 결국 의뢰자를 사진작가 주제 부슈만이라는 인물로 재창조해주고, 관련 자료까지 완벽하게 제공해줍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말미에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됩니다.
아주 인상적인 대목들이 적지 않습니다. 태양과 빛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기자의 피라미드에서는 “태양의 빛은 마치 빛나는 안개와 같이 모든 것 위에 장엄하게 내려앉는 듯 아주 생생하게 세상을 비춘다!(67쪽)”라는 에사 데케이로스의 말이 나오는데 사실인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 소설가가 한 말도 있습니다. “나는 직업적으로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기꺼이 또 즐겁게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문학이란, 거짓말쟁이가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허락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입니다.(8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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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인 무언가 보다는 기계적인 것이 익숙한 기질 때문인지 마술사적 리얼리즘의 소설은 제게 쉽지 않은 영역입니다. 읽기는 읽는데 내가 파악한 이야기의 출발지와 종착지에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한껏 쪼그라든 어깨에 책가방을 둘러메고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걸어가고 있는 기분이랄까요. 환승구간이 많은 까닭도 있는 거다, 위로해봅니다만.
일단 신선하네요, 작가. 주제 에두아르두 아구아루사. 앙골라에서 태어난, 포르투갈계 어머니와 브라질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프리카 문학에서 포르투갈어권 문학을 대표하는, 낯선 발음의 긴 이름을 가진, 아프리카 작가.
이것도 신선하네요, 화자. 전생을 인간으로 살았던 도마뱀붙이. 희귀종의 도마뱀붙이가 독자에게 기묘한 이야기들을 들려줍니다. 집중해서 듣고는 있는데 이거 참, 또 한 번 쭈그리가 되어버린 낭패감.
이거, 무엇에 관한 이야기일까요. 기억? 이름? 꿈? 현실? 기억이라는 게 뭐죠, 이름의 기능은요, 꿈이 현실인 것인지 현실이 꿈인 것인지 그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도통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어요. 확고한 신념도 없습니다. 신념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것이 확고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은요.
- 주제 부슈만이 이방인의 몸을 차지해버렸잖아요. 그 이방인이 이제는 날이 갈수록 진짜 주제 부슈만이 돼버리고 있어요. - 이건 단지 게임일 뿐이야. 나도 지금 게임을 하는 거라고.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잖아?
기억, 이름이 중요한 이유가 무얼까요. 과거이기 때문일까요. 그것들로 함축되는 과거가 미래를 빚어내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그 함축되고 압축되어 존재하는 기억과 이름을 새로이 짓고 믿어버리면 미래 그것, 내 것이 될 수 있는 건가요.
- 내가 뭔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가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죠. (…) 어느 날 오후, 섬의 끝에 있는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데 아주 놀라운 느낌을 받았소. 그것은 자유였소. 가면을 써야 하는 이런 상황이 역설적으로 나를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으로 바꾸어놓았고. 나에게는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도구가 있소.
도마뱀붙이, 미안하지만 나 잘 모르겠습니다. 책장을 덮은 지금, 분명 알싸하게 존재하는 독서후감이 남아있긴 합니다만, 그것이 무엇인지 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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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자세히 보면 도마뱀 모습에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도마뱀의 반은 사람 손과 다리가 그려져 있다. 과거엔 그도 사람이였지만, 현재는 도마뱀붙이일 뿐이였다. 화자는 도마뱀이다. 처음에 허공에서 맴도는 그가 누구인지, 실은 처음부터 알고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엔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 펠릭스 벤투라는 다른이의 기억을 만들어 준다. 새로운 조상, 뿌리, 그의 모습까지도 만들어 낸다. 어떤식으로 그가 그런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일이 가능하다는것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원래의 자신을 버리고 다른이가 된다는것은 어떤 느낌일까?
펠릭스 벤투라에게 어느날 손님이 찾아왔다. 거액을 들고 자신의 과거를 만들어 달라던 그 사람. 위험해 보이기도 했지만, 펠릭스는 그일을 하기로 한다. 펠릭스가 '주제 부슈만'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탄생시켰다. 그럴듯해 보이고 멋져보이기까지 한 '주제 부슈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이 진짜는 아닐지라도.
안젤라 라는 묘령의 여인이 나오는데 펠릭스의 연인이라고 하기엔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때론 펠릭스 꿈속에서 사람으로 나오는 도마뱀(에우랄리우)과 자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도마뱀은 천정에 붙어 있기도 하고 펠릭스의 일거수 일투족을 추적하는것 같아 보였다. 안젤라와 주제 부슈만 사이엔 묘한 전류가 흐른다. 이것이 무슨 느낌인지는 나중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갑자기 거지같은 몰골로 국가안전부의 전직 요원이었다는 에드문두 바라타 두스 헤이스가 등장한다. 아마도 이 부분이 이 책의 클라이막스가 아닌가 싶다. 주제 부슈만과 에드문두와 엔젤라 세사람의 관계는 이상했다.
이야기는 초반에 기억을 만들어 주는 펠릭스와 도마뱀붙이 그리고 주제 부슈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어찌보면 도마뱀이 화자라는 것 말고는 그다지 특별한것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화자의 이야기가 사람이였을때인지 꿈속에서인지 지금의 모습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과거와 꿈속을 넘나드는 몽환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 펠릭스라는 인물도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이 진실이고 가짜인지 이 책을 읽어 내려갈수록 흐릿해진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인종의 갈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심각하진 않다. 책속에서는 앙골라의 정치적인 문제라든지 다른 이면의 내용들도 함께 하고있다. 책전체에서 느껴지는 몽환적인 분위기가 그것을 심각하게 표출하진 않는다.
이 책을 읽고 난 내 느낌보다는 옮긴이의 글을 통해서 이 글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의 표지에서 말한 것처럼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주제 부슈만 역시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새로운 과거를 만들었다. 그의 목적은 확실했다. 정말 자유로워진것인지는 주제 부슈만만이 대답해 줄것이다. 마지막에 주제 부슈만은 목적을 이루었고, 모든것이 정리된 것 같지만, 완전히 과거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던것 같다. 과거가 없다면 현재도 미래도 없을것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꿈속인것만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