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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해항로』(장석주 , 민음사 , 2010) 에 대해서 말하기 내가 아는 장석주 씨는 『강철로 된 책들』의 저자 장석주 씨다. 시인 장석주이 글보다 수필가 장석주 혹은 서평가 장석주의 글에 더 익숙하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장석주가 시인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몽해 항로』(장석주 , 민음사, 2010)라는 시집이다. 그의 시집 첫머리에 스스로 ‘한 줄의 기적에 닿지 못하고 사산되는 문장들이 태반이다. 이 시집은 불임과 사산으로 사라진 문장들을 기리는 레퀴엠’이라고 썼다. 생각 속에서 언어 기호의 겉옷을 입지 못하고 생각 속에서 생몰(生沒)하는 것은 말을 할 수가 없다. 태어나지 못하고 떠도는 영가는 만신의 도움을 받아야만 세상에 목소리라도 전할 수 있다. 시의 몸을 입지 못한 것은 시인의 손끝에서 시의 몸을 갖출 수 있길 바래보는 것 밖에 도리가 없다. 이런 의미로 시인들은 언어의 만신이다. 만신은 시와 세계를 잇는다. 제 몸이 부서지고 헐거워져 쓰일 수 없을 때까지 감내한다. 장석주의 시편들을 읽어본 적이 없으므로 그의 시를 통시적으로 살펴 볼 수는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한 권 속에서 드러나는 생각의 편린들을 겨우 전전긍긍하며 따라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시를 읽는 것은 독자들의 몫인 듯하다. 이 언사는 매번 시집을 읽을 때마다 거르지 않고 하는 말이다. 이 말을 언제가 되어서야 그만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나는 그만큼 시에 대해서 남루하고 비루해지는 내 자신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나 안타까운 마음도 고만고만하다. 『몽해항로』의 시편은 대체적으로 짧다. 짧으면서도 노력한다. 자서(自序)에서 밝혔듯이 ‘한 줄로 압축할 것 한 줄은 전대미문의 문장으로 표현할 것’이라고 쓴 것처럼 짧은 문장 안에 긴 성찰이 들어가 있는 시편들이 제법 눈에 띤다. 생경한 표현이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둘 것인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 당신이 내게 기르라고 맡기고 내가 젖동냥해서 기른 그믐 (그믐 눈썹)’이 가까워 오면 피 냄새가 훅 하고 끼치고 ‘내 몸이 그믐이다. 가득찬 슬픔으로 가득하다.“(그믐)고 쓴다. 바다를 보고는 ’아련한 가을비 속에 죽은 고모 이마보다 찬 바다‘(협재 바다)라고 쓴다. ’구름은 만삭이다. 양수가 터진다.‘(소나기)라고 쓴다. 사막을 보고는 ’유엔 난민 지위를 얻은 /모래들의 취락 , / 고요라는 짐승들의 집단 서식지. / 뼈들의 명상센터 / 시간의 블랙홀‘(사막) 이라고 써서 가려진 사막의 이면을 끄집어낸다. 아들에게 ’세상은 꽃놀이패가 아니(바둑 시편)’라고 말하고 임산부의 둥근 몸을 보고 ‘ 한 몸 안에 두 생명이 동거하는 / 저 이쁜 몸 , 저 무덤이 피안으로 가는 출구’(저 여자!) 라고 쓴다. 소리에 대해서도 ‘침묵은 소리의 극명한 태초 / 소리의 피안이다./ 저 침묵에 귀의함으로써 / 소리는 소리의 생을 다한다.’(소리박물관) 고 쓴다. 어떤가? 의미는 소멸되지 않고 문장 속에 영면했는지 모르겠다. 혹자는 그러하지 못하다고 할 것이고 혹자는 영면했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물론 후자다. 이렇게 쓰다 보니 시인은 속세에서 피안을 살핀다. 피안이라는 염원을 가진 시인은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미 세상이 피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슬픈 사람이다. 피안인지 속세인지도 구별하지 못하고 죽을동살동 모르게 사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세상의 진실을 말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가수는 노래를 부르고 시인은 글을 써 사람들에게 전할 뿐이다. 자신이 천형(天刑)으로 짊어진 책무를 우선 해 두는 것이다. 가수는 노래를 부른 다음에야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있고 , 시인은 시를 쓴 다음에야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다. 시인이 보는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살기 좋은 곳도 아니다. ‘다리 밑에서 동네 남정네들이 모여/ 개를 잡고 있다. / 무자비했다. 개 비명이 우레 같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구나!’(초복) 라고 탄식한다. 마지막으로 뱉는 한마디 ‘이런 세상을 피안인 듯 살았구나!“ 라고 탄식한다. 세상은 복날 개패 듯이 맞아가며 사는 세상이지만 결국 이런 세상도 피안 (너머의 세계 , 현실이 아닌 세계로 알고 살았다.)으로 알고 살았다고 쓰고 결국 아들에게 ’아들아, 사는 건 / 꽃놀이 패가 아니더구나”(바둑시편) 라고 고백한다. 또한 삶은 무늬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욕망과 어리석음이 얼룩이 되었다. 시인 또한 얼룩이 되었지만 얼룩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고(얼룩과 무늬 참고 하시길) 쓴다. 10 1 31 유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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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치자마자 사상누각인 몸이 영원하다고 착각하지 마라한다. 개구리를 만나면 개똥이 뒹구는 풀밭이 되라 한다. 죽음을 만나면 꽃이 아닌 씨앗으로, 여문 씨앗으로 견디라 한다. 시집에서 하려는 모든 말이 이 첫번째 시에 모두 들어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시를 읽는 건 세포에 새겨진 바코드를 읽는 것이라며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나날이 시가 좋아지고 짧은 한 문장에 깊은 뜻이 많이 담겨 있는 글이 좋아진다. 문장은 짧고 단어는 몇 개 없는데도 자꾸만 떠오르고 힘이 되어주는 그런 글이 좋아진다. 시가 좋아 지는 건 내게 있어 신김치가 좋아지는 것과 같다. 겉절이나 갓 담근 생생한 김치를 좋아하지만 요즘은 묵은김치도 입맛에 맞다. 씹을수록 깊이 우러나오는 묵은김치의 맛은 아는 사람만 아는 것. 문장이 몸속에 절절이 스며드는 시의 깊고 깊은 맛또한 요즘 강하게 느끼는 걸 보면 이제 뭐 쫌 알려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나보다. 80년대, 90년대초반까지만 해도 시는 강했다. 시집은 우수수 쏟아져 나왔고 시인은 유명인사였다. 시가 적힌 이쁜 액자도 많이 팔았던 기억이 난다. 시란 생활속에서 마음을 다독여주고 여유를 만들어주던 것이었다. 시는 어디로 간 걸까. 그 많던 시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간 걸까. 얼마전 읽은 문정희 시인의 '지금 장미를 따라'를 읽고 눈물이 났다. 시란 그런 것이었다. 한 줄로 모든것을 품어주고 녹여주는 것이었다. 장석주 시인의 시집을 만나게되니 반갑고 고마웠다. 소리내어 몇 번을 읽었다. 읽을수록 좋았다. 작품해설을 한 문광훈 교수의 말처럼 일평생도 한 철이라면 예술만이 나를 견디게 해 주겠지. 지은이도 시를 지으며 일평생을 견뎌내는 것일까. 혹 뽕잎 뒤에 붙어 비 피하는 자벌레가 지은이일까. 협재 바다 그 아름다운 바다를 다시 보고 싶다는 글에 나는 벌써 협재 바닷가에 쭈그리고 앉아 물속에 손을 가만히 담가 보았다. 배낭 메고 나선 달팽이를 만나고는 여기서 벗어나려고 몸무림쳐보는 내 모습에 알고는 못 나선다는 그 아득한 길이 정녕 아득할지 겁이 나 배낭을 잠시 내려두기도 했다. 각질로 변하여 살을 뚫고 나온 숨어 있던 마음인 뿔을 벽에 들이 받을 땐 가끔 설명하진 못했지만 아주 가끔 미친짓을 해버리는 나를 이해해주는 듯 하여 어깨에 힘이 빠졌다. 책을 읽거나 종이에 그림이라도 그리다보면 종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열대우림이 사라져가는 것에 죄책감이 생긴다. 미친듯이 즐거워하며 책을 읽다가도 허겁지겁 햄버거를 먹다가도 숲이 파괴되는 것에 죄책감이 생긴다. 남의 살이 맛있다며 구워먹고 볶아먹고 알뜰하게 발라먹는 내 모습이 알뜰한 주부임을, 가족을 위한 건강식단임을 자처하지만 한편으론 괴기스럽다. 얼마전 통닭을 먹으며 식구들 편하게 먹이려고 우악스럽게 갈기갈기 찢어대는 모습을 보더니 남편이 좀 무섭단다. 자기 편하게 먹이려고 하는 짓인데 통닭 사진절단내는게 뭐 그리 즐거운줄 아시나봐요. 시인도 그런다. 사람의 식욕은 처절하다고. 또 위안이 된다. 사소하여 눈에 보이지조차 않았던 작은 일들을 시인의 따뜻한 눈으로 보여주고 또 다른 생각속에서 거듭나게 해 준 시를 만나게 되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바둑 수 읽기 무뎌졌다고 흑해 갈 날이 가까워졌단 구절이 아려왔다. 아직 써야 할 시들이 산더미 같은데 어딜 가시려구요. 좋은 것들은 가장 늦게 올텐데 그죠? 물 뜨러 간 어머니, 나귀 타고 나간 아버지 돌아오시지 않아 텅 빈 집이 있고 좋은 것들은 가장 늦게 오니까요. 아마 그렇 겠지요. 좋은 것들은 가장 늦게 오는 거 맞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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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전대미문의 글을 한줄로 압축할것!
최소의 어휘로 절약하여 만들어진 일상의 순간에 포착된 절경! 그리고 시를 읽다보면 죽음을 향하여 갈 수밖에 없는 삶의 여정에서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만남의 순간들을 포착한 시인의 시각에 어느 순간 나의 시선이 합일 된다.
달팽이, 매미, 벼룩, 쌀벌레, 소나기, 벼락처럼 짧은 삶의 순간들이 이토록 상쾌하고 명징하게 표현 될 수 있다는 게 통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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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형 글쓰기 작가 장석주. 모든 진지한 작가들은 실존형 글쓰기를 지향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작가로서의 지난한 삶을 버티기 위해 하루하루 「한 줄의 기적에 닿지 못하고 사산되는 문장들」을 잉태하는 이 땅의 시인들은 실존형 작가의 대표주자들이 아닐까 싶다. 실존형 글쓰기, 따지고 보면 참으로 씁쓸한 말이기도 하다.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일종의 꾸밈어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시인공화국 한국에서 이른바 실존형 글쓰기란 시를 수양의 방도로 삼는 글쟁이 도사에 대한 옹호와 응원이기도 하고, 연예오락지향적인 미디어 사회에서 사그러져가는 예술적 진정성을 고수하려는 낭만적 고매함의 발로이기도 하다.
「몽해항로」라는 제목에서 낭만을 구한 이들은 시인이 표현하는 현실주의자적 시각에 다소 놀랄 수도 있다. 낭만보다는 현실주의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담고 있어 혈기왕성한 기운을 보여준다. 그리고 으레 나이든 이들이 꾸며내기 쉬운 해탈이나 완숙과는 거리가 먼 풋풋하고 진솔한 속내를 드러낸다. 한마디로 몽해항로는 결코 순탄한 항해가 아니다. 풍랑을 헤쳐나가는 몽해항로의 주인공은 문약한 시인이 아니라 역경과 고난으로 다져진 뱃사람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인생터는 전쟁터와 다를 바 없어 염세적인 분위기도 묻어난다.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좋게 말하면
시인의 시어는 전인미답의 만년설처럼 응축적이고 독존적이다. 참으로 「한 줄로 압축될 수 없는 것은 시가 되지 않는다」. 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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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해 항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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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해항로」를 읽고 내 자신에게 솔직히 현대 시는 아직도 많이 어렵다. 쉽게 읽으려는 마음으로 접근하게 되면 더더욱 그런 것 같다. 역시 시집은 차분한 마음을 갖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는 시간 확보가 중요한 것 같다. 함축된 시어를 통해서 많은 것을 표현해주고 있는 시작품은 그래서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작품을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면서 일상생활에서 많이 활용했으면 하는 평소 생각을 해보지만 그렇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시집인 것 같기도 하다. 따라서 좋은 시집에서 찾은 좋은 시들은 큰 소리로 낭송도 하고, 또한 암기도 하여서 언제 어디서든지 시를 암송할 수 있는 멋진 여유도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나 하나의 시 작품을 만드는 시인들의 고통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하나의 시어를 만들기 위해서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탄생하는 한 편의 시는 분명히 우리 인간들에게 많은 교훈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많은 사람들이 좋은 시를 많이 대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도 절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시는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특히 자신 만의 특별한 경험이 많이 작용하리라 믿는다. 크고 작은 일을 미세하게 관찰하고 생생하게 기억하며 정확하게 기록하면서 인간과 그 주변을 돌아보면서 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탄생한 한 편의 시는 단순히 아쉬움이 안타까움의 피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의 진상과 직면하면서 삶과 정직하게 대면하고 하는 것이다. 이런 시는 바로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투시하면서 그 대안도 제시하기 때문에 우리가 시를 대할 때는 이런 자세로 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인 시인의 시 작품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많은 수작을 내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강의와 방송, 전업 작가로서 그 역량을 과감 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에 따라서는 쉽고 어렵고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작가의 혼이 들어 있는 좋은 작품이라는 것을 느껴본다. 시에 대해서는 전혀 비전문가이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역시 저자만의 탄탄한 노력이라고 생각을 한다. 시인의 나름대로의 노력의 바탕이 좋은 작품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결국 시인의 사랑의 힘이라 생각한다. 사랑의 그 큰 힘이 자신의 큰 꿈을 이어가게 되고, 시인의 꿈이 최고 좋은 작품으로 창작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앞으로도 이런 사랑의 마음으로 많은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우리 독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줄 수 있는 역작들을 창조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면서 좋은 독서시간이었음을 고백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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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해항로」를 따라 끝없이 흘러가는 한 척의 배, 장석주를 만나다. 질문자: 날씨가 많이 찹니다. 선생님 사시는 곳, 수졸재 그 연못에는 얼음이 덮이지 않았나요? 장석주: 네, 많이 쌀쌀하군요. 그래도 연못은 얼지 않았습니다. 그곳엔 늘, 생명 있는 것들이 숨 쉬고 있어서 얼음이 덮이지 않습니다. 질문자: 하하하, 그렇군요. 생명 있는 것들은 결국 어느 곳 에서건 그 생명의 열기로 자기 주위를 따뜻하게 만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여 지네요? 오늘 이렇게 추운데, 저와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요즘 근황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여전히 집필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 장석주: 예, 여전히- 그러고 보니 참 오랫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살고 있군요. 가끔 강의도 나가고, 여기저기 원고청탁 들어오면 역시 글도 써 보내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보다도 가장 우선적인 일은 항상 제 자신과 만나고, 자연과 만나서 소통하는 일입니다. 그 시간을 갖지 않고는 내가 아무리 많은 글을 쓴다고 한들 과연 생명력이 있을까 싶습니다. 질문자: 자신에 대해 무엇보다도 철저하신 분으로 느껴집니다. 이번에 제가 「몽해항로」라는 시집을 읽었는데요, 참 아련했다고 할까요? 가슴이 먹먹해지는 시편들이 참 많더군요.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신 후 지금까지 꾸준히 글과 관련되어 살아 오셨는데, 그렇게 흘러온 시절도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몽해항로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하는 외람된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한창 잘 나가실 때(웃음..^^) 선생님의 글들을 접했습니다. 모든 것들에 목마르고 갈급할 때 선생님의 글들은 큰 위로와 힘이 되었죠. 어떤 메시지들이었는지 지금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영혼의 자유 함을 노래했던 글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젊은 시절, 선생님이 만드신 책들을 읽으며 큰 위안을 받았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장석주: 하하하 그러셨군요? 정말 긴 시간을 흘러왔습니다. 그러나, 또한 한 편으로 생각하면 찰나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방금 말씀하신대로 한창 잘 나갈 때는 참 겁 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그때가 청하출판사에서 숨을 쉴 때였는데, 흔히 말하는 세상의 영화를 누리기도 할 때였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은 내 영혼이 제 자리에서 잠시 착각하고 행로를 이탈한 때였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그 시절 또한 무용한 시절이었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들이 날과 씨로 얽혀 내 인생이 되고, 삶이 되는 것이니까요. 단지, 내가 어느 곳에 가치를 더 크게 두고 살았었나 하는 문제가 남는 것이지요. 질문자: 네, 결국은 우리들의 삶에서 어느 한 순간도 경험상 우리에게 소중하지 않은 부분은 없다는 말씀이죠.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참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청하 당시 출판물과 관련해 구속까지 되신 것으로 아는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장석주: 아, 그 일이 있었지요. 그 일이 있었어요. 아팠어요. 여기가(심장을 가리키며) 많이 아팠어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떠올리고 싶지 않아요. 이미 지난 일인걸요. 내 인생에서 이미 흘러가 버린 길이니까요. 다만, 그 일이 있고 난 후 내 삶은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인가요? 허허허...... 질문자: 네, 죄송합니다. 이번 시집 몽해항로 시편들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그 일들이 떠올랐거든요. 시 전편에 흐르는 기조가 삶에 대해 달관한 듯 하면서도 분노가 녹아있고, 비탄에 잠기고, 쓸쓸하고 허무하고 그렇습니다. 단지 저만의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읽는 내내 가슴이 아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좀 장황하지만, 제가 읽었던 느낌들을 자세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울지 못하는 벙어리 종>, <그믐에 그을리고 탄 제 마음 자리는 숲>등의 행간에서는 가슴 가득하게 차오른 슬픔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얼룩이 나를 가리켜 얼룩이라 한다. >에서는 시대에게 발목 잡혔던 한 시절의 삶에 대해 억울한 심사가 느껴지고요, <초록무늬 뱀, 너를 밟은 건 실수였을 뿐이야>에서는 애써 자신을 위로하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남의 살을 씹는 것, 비루해, 비루해>에서는 철저히 깔끔하고자 하는 선생님의 정신이 엿보이고요, <마두금 이라도 울지 않는다면 나라도 울어야 하리>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더 철저한 생을 요구하시는 스스로의 강한 정신이 보여 집니다. 또한 <모기, 벼룩, 파리, 매미, 쌀벌레, 귀뚜라미, 비둘기, 달팽이, 소> 등의 날 것들을 향해 <네 본색이다. 그렇게 살지 마라>고 따끔하게 일침을 놓으시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아직도 <패착과 자충수로 끝난 일국>, <나의 한 때는 푸르렀다. 그러나 어느 덧 집은 낡았다>고 쓸쓸해하면서도 ,< 저 울부짖는 것들로 살지 않겠다. 아니다 저 발톱과 피 묻은 턱으로 어둠 속에서 울부짖는 것들로 살아야겠다. >며 자신을 추스르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여전히 <고독이 내 몸 속에 채찍질을 해 댄다>, <아들아, 사는 건 꽃놀이패가 아니더구나.> <나가고 물러설 때를 아는 것은 어렵다>라고 하시며 이 세상을 표표히 흘러가고 계십니다. 특히 협재 바다 에서는 <이 세상 다시 오면 여기를 가장 먼저 달려와 보고 싶다>고 하시며, <모란꽃이 피는 이 세상, 초록 풀 위를 맨발로 걸어봐>라고 하시며, 어쩔 수 없는 자연인으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보여 주십니다. 좀 장황했지만, 선생님의 시집을 읽으며 제가 느꼈던 감정들입니다. 뭐라고 한 말씀 해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장석주: 하하하하........ 정말 세세하게 짚어 주셨습니다. 저의 책을 그렇게 관심 갖고 읽어 주셨다니 저로서는 영광이고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행간의 의미야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자들이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봅니다. 굳이 작가가 나는 이러이러한 의미로 그 글을 썼다라는 설명이 필요 없다는 말이죠. 저는 독자들의 감상영역을 존중합니다. 그것은 내 글이긴 하지만, 내 생각까지 독자들에게 강요한다거나 부연설명을 할 것 까지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질문자의 시선과 느낌을 존중합니다. 그렇게 읽어 주셨다니, 저로서도 새로운 부분이 보여 집니다. 이것이 문학의 놀라운 역할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기도 하군요. 질문자: 네, 감사합니다. 뭐라고 질책이라도 하지 않으실까 염려했는데, 이렇게 격려를 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더 열심히 읽고, 사고의 영역을 넓히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참으로 많은 저서들을 펴내셨는데, 죄송스럽게도 최근 것들은 많이 접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올 여름내 집필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셨다는 <이상과 모던 뽀이들>과 <장석주의 장자 읽기, 느림과 비움의 미학>에 대해서만 접해 본 상태입니다. 이번 강좌에서도 강조하신 것처럼 끊임없이 상상하고 변화하라는 선생님의 의중이 잘 읽히는 글들이었습니다. 특히 <느림과 비움의 미학>을 보며, 이러한 사상적 기반위에 선생님만의 「몽해항로」가 탄생하였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선생님께서 꿈꾸는 <흑해>, 그곳을 향하여 우리 모두가 몽해항로를 따라 유유자적 흘러갔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꿈 꾸듯 흘러가자’, ‘모든 굴욕과 업보를 다 벗어 버리고, 그저 맨발로 풀밭 위를 걷듯, 살랑살랑 이 세상을 흘러가자......’ 그런 생각도 감히 하여 보았습니다. 장석주: 맞아요. 내가 꿈꾸던 <흑해>는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도착해야 할 그 어떤 삶의 종착지일지도 몰라요. 그곳이 낙원일지, 지옥일지는 모릅니다. 도착하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곳이죠. 다만, 우리는 흘러갈 뿐이죠. 그 길에서 최소한 자신을 속이는 일은 없어야 하겠고요, 자신에게 굴복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 이번 나의 시집 <몽해항로>는 결코 음울한 나의 노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나아가는 길, 그 길 위에서 쓰여 진 한편의 여행노래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이해해 주신다면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질문자: 잘 알겠습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들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만, 말 그대로 개인적인 일들이라서 차마 질문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끝으로, 함께 계시는, 갈수록 더 귀여워 지신다는 <노모>님과 아름다운 삶 누려 가시길 바랍니다. 자녀분들이 멀리 있다고 들었는데, 모두들 건강하기를 기원합니다. 더불어 선생님의 건강도 기원합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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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출판된 시는 시집이 외형적으로도 깔끔하고 휴대하기도 편해 즐겨 읽는 편이다. 시 속에서 아이디어도 얻고 마음의 위안도 얻고 무엇보다 읽고 있으면 그냥 마음이 편안하다. 간혹 도대체 무슨 뜻일까 궁금해하며 읽어내려가는 시도 있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두근거리고 기대된다. 이는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소설가나 시인에게도 적용된다. 정석주.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많은 작품을 냈다. 제목이 되는 몽해항로는 여섯 편의 시로 이우러져 있으며 시집 속 마지막에 엮여진 작품이다. 그이 작품 중에서 산문스럽게 쓰여져 있어, 시를 읽는데 산문을 읽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조곤조곤 쓰여있어 다른 사람의 일기를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제목 밑에 쓰여진 소제목뿐만 아니라 다른 시에 비해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읽어내려가기 좋았다.
전체적인 시들의 느낌은 어둡다? 살아가다 보면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보고 직접 경험하게 된다. 세상은 불공평하다는데 정말 그렇다고 느낄 때가 많고. 좋을 때도 있으면 나쁠 때도 있지만 주로 언론에서 드러나는 뉴스들은 대부분 힘들고 여겨운 사람들 이야기 혹은 사건 사고들로 이루어져있다. 정석주는 안타까운 현실을 구석구석에서 찾아내며 구체적인 시어를 선택해 써내려갔다. 시 속에 모든 감정을 담아 그의 감정이 터질 듯 하면서도 제 삼자의 이야기를 전는 듯한 느낌을 읽는 내내 지울 수 없었지만 그의 시는 그대로 내게 다기왔다. 그 시의 의미를 이해하고 말고를 떠나서. 마지막 책갈피를 넘긴 후에도 마음은 애잔하고 먹먹하다.
책 뒤에 함께 엮은 작품해설은 시를 감상하며 보지 못한 시 이야기를 들려주어 시를 두 번 읽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자세한 해설로 같은 주제의 또 다른 작품을 읽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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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밀려오는 밤이면, 시집을 꺼내게 된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로 채워졌다 해도 내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는 문학중 하나는 시(詩)다. 몹시도 고단하고 쓸쓸함으로 채워지던 마음을 부여잡던 밤, 시집을 꺼냈다. 위로를 얻으려 펼쳤다고 하지만, 내 자신조차도 무엇을 얻으려 시집을 집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현재 나를 지배하고 있는 이 마음을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펼친 시집이었건만, 시집을 읽는 내내 그리움이 더 짙어지고 말았다. 시집 가득 잠재해있는 그리움과 내가 가진 그리움이 맞부딪쳤기 때문이었다.
시를 무어라 정의할 수 있을까. 보통 사람과 다른 시선으로 일상을 바라보는 것, 모든 것을 시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 등등 나름대로 많은 의견이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 틈바구니에서도 또렷이 정의되어지는 것은 없는 것 같다.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자유로운 생각을 짧은 언어라 할지라도, 누가 봐도 수긍할 수 있도록 표현해 내는 것이라고 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 또한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고, 시집을 만날 때마다 하나로 단정 지어지지 않는 자유분방함에 늘 어리둥절해 진다. 몇 권의 시집을 읽었다고 해서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낯익었다 싶다가도 낯선 시집을 만나면 새로움이 샘솟는다. 그래서 더더욱 시를 정의할 수 없는 것이고, 시의 세계에서 여전히 입문하지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리라.
해설을 해주신 문광훈님은 '시는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을 미세하게 관찰하고 생생하게 기억하며 정확하게 기억하면서 인간과 그 주변을 돌아본다.' 라고 했다. 장석주 시인의 시는 문광훈님의 '시'에 부합하는 시였다. 모든 시인들이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해도, '인간과 그 주변을 돌아본다.'는 것을 얼마나 따르고 있는지 의문이다. 아무래도 시에 대한 지식이 없다보니 깊게 들어가 버리는 '인간과 그 주변'에 대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는지는 몰라도, <몽해항로>에서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시인은 일상의 자잘함을 모두 시로 승격시켰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웃에게 떠들지 못할 소소함을 시로써 펼쳐놓고 있었다. 그런 시들을 마주하면서, 시에 대한 어려움을 떨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나의 일상의 자잘함까지 돌아보게 되었다.
2부 앞부분에서는 곤충과 동물들에 대한 짤막한 시들이 나온다. 모기에게 남의 피를 빨며 그렇게 살지 말라고 호통을 치는가 하면, 평생을 손발 빌며 산 파리에게 남루하다는 씁쓸함을 던진다. 달팽이에게는 '사는 것 시들해/배낭 메고 나섰구나.'라고 안쓰러움을 내비치는 시들을 보며, 보통 사람과 다른 시선을 가졌다는 것을 통감했다. 1부의 <뱀을 밟다>에서는 '풀섶에서 일어난 가벼운 접촉 사고다.(중략)/너를 밟은 건/실수였을 뿐이야!'라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무릎을 딱 치며 '올 커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논두렁을 걷다 뱀을 밟은 기억이 있었기에, 내 발길질에 놀라 똬리를 푸는 뱀에게 이제라고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당시에는 너무 놀라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도망친 기억밖에 없고 종종 에피소드로 읊어댈 뿐이지만, 이 시를 빌어 나 또한 그 뱀에게 사과고하는 바이다.
그리움을 달래려다 도리어 시인이 드러낸 그리움과 마주치고 말았다는 나의 고백이 드러났던 시는 <청산에 살다>였다. 시조를 읽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무위도식하는 삶을 현대판(?)으로 그려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자연과 함께하고 싶은 소망가운데서도 나의 감정을 건드렸던 것은 그리움이었다. 자연이 아무리 삶을 위로해 준다고 해도, 그리운 사람 하나 곁에 있는 것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의 곳곳에 그리운 이가 다녀가면 온 몸과 일상에 붙어있는 후유증이 드러났다. 그리운 이가 곁에 있는 것이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런 분위기가 드러나는 시를 읽을 때마다 그래도 그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일었다. 비단 시인에게만 던지는 소망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집을 덮었을 때는 잠들기에 그리 깊은 밤이 아니었음에도,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어지럽게 펼쳐진 꿈속을 헤맸고, 몸을 뒤척이느라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머리맡에 놓인 시집을 보면서, 나를 어지럽게 한 것이 너였다며 가벼운 면박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이 몽롱해 정신을 차릴 수 없으면서도, 결국 나를 위로해 준 것이 시였음을 깨닫고 있었다. 북받치는 서운함과 그리움이 범벅이 되어버린 가운데, 약간의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시 때문이었다. 다시 들춰보아도 어제의 간절함과 위로가 다시 샘솟지 않음을 알기에, 비슷한 일상이 찾아오는 날에 다시 펼쳐볼 것을 다짐했다. 그렇게라도 내 곁에 오래도록 머물러 나의 마음을 위로해주길 바랐다. 타인의 삶에 어떠한 간섭을 하지 못할지라도, 알지 못하는 이에게 언어로 위로를 실어 나른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