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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성의 씨앗
(리뷰 제목: 영성의 씨앗 - 우리가 몰랐던 세상에 대한 그리고 사역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
원제: CREATIVE MINISTRY
저자: 헨리나우엔
역자: 송인설
<북리뷰>
학창시절을 돌아보면 다시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기쁠 것도, 기대도 별로 없었던, 그저 미래에 대한 불안과, 미래를 위해 희생되었던 현재만 있었을 뿐….
그냥 막연히 우리의 교육이 너무 주입식이고, 공부위주 아니 시험을 보기 위한 공식암기 위주가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순간 명확하게 우리의 현 교육이 왜 나쁜것인지 알게 되었다. 현재의 교육은 정말 폭력적이다. 성적으로 학생의 귀천을 평가하며, 어른이 되면 대부분 쓸모 없어지게 될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 그리고 달콤한 미래를 위해 책상에 20시간 이상을 앉아있어야 하는 고통의 연속…..
어느 누구도 왜 이 공부를 해야 하지? 하는 물음을 학생에게 주지도, 학생이 스스로 생각해 내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가기 위해,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내일을 위해 그저 공부하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어른이 되면, 현실에서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는 능력을 잃은 채 다시 내일을 향해 오늘을 희생하는 슬픈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짚어보면, 우리의 직장생활이 왜 그렇게 무미 건조한지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학창시절에 배웠던 경쟁성향이 동료간에, 부서간에 이기주의로 나오고, 그동안 경험이 많은 일방적인 상사의 가르침 또는 일방적인 회의 결론에 도달하며, 직장생활은 미래를 위한 희생의 장이라는 생각속에 직장에서는 기쁨/활기란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학교에서 바꿀 수 없다면, 적어도 가정이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 부응하며 폭력을 똑같이 행사할 것이 아니고, 학생들의 잠재력(달란트)를 이끌어 내고, 서로의 생각과 지혜를 존중해주며, 현재를 살아 갈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도록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2장 설교와 3장 목회상담에서는 한달에 한번 우리교회 중고등부에 말씀을 전하는 나로서 어떻게 말씀준비를 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설교자는 인간이 참인간으로 (참 크리스천으로) 형성되어 가는 고통스런 과정에서 장애물을 제거하는 소명을 지닌 사람이란 정의가 나에게 명쾌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청중이 “당신의 말은 곧 내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생각은 곧 내생각입니다.” 하고 고백하게 될때에 청중은 자기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는 것과 설교자는 통찰력이 사람을 자유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라는 대목에서는 아 그렇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밖에 4장 사회참여에서는 나에게 ‘왜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나에게 하는 기회를 주었다.
나는 선물(소원성취)을 주시는 분보다 선물에 더 관심이 많은 모습은 아니었을까? 그 선물을 원하되 그 분 안에 소망을 두어야 함을 잊고 산다. 그분안에 소망을 둔다면 배신감을 느끼지 않고 언제든지 신뢰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결과를 그에게 자유롭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신앙의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4장의 내용중 아래의 글은 봉사에 있어서도 교만했던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내가 주는 것이 내가 받은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진정으로 줄 수 없다.”
마지막으로 5장 경축에서는 마음속 깊은 중보기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주고 있다. 자신이 현재에 있어야 상대방을 볼 수 있고, 서로 그 순간 같이 존재함으로써, 서로의 고통과 고민을 느끼게 되며, 그럴 때 진정한 기도가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느낀 단점은 처음 몇몇 부분에서는 “스코토시스”등 이해하기 난해한 말들이 나온다. 그리고, 각 장마다 결론부분에서 저자의 깊은 성찰의 결과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너무 끼워 맞추려 하지는 않는지 생각하게 된다. 예수그리스도의 생애가 아니더라도 그분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게 하고 죽은 영혼을 살리지 않는가? 나를 변화시킨것과 같이…..
<내용요약> -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과 리뷰자의 생각을 첨삭하였음.
1. 교육 - 지식의 전달을 넘어서 폭력적 학습 방식에서 구속적 학습 방식으로 오늘의 학교는 더 이상 자유로운 시간을 뜻하는 스콜라가 아니다.
1) 폭력적 과정으로서 교육 (1) 경쟁성: 우수한 성적을 받고자 경쟁하고,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생도 다른 학생의 점수가 자기보다 더 낮아야 비로소 행복하다. 어떻게 하면 그의 의견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나의 의견을 고수할 까 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2) 일방성: 현재의 교육은 능력있는 사람이 능력없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기위한 노력. 이 목표가 실현되면 선생과 학생은 각각 더 이상 선생과 학생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선생은 강자이고, 모든지 알아야 한다. 학생은 약자이고, 선생님과 의견에서 대치되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철저하게 일방적인 과정이다. (3) 소외성: 현재의 학교는 단지 모의 연습장이다. 그 순간으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학생들이 수업을 지루해하고, 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때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언젠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고맙게 생각할 날이 오리라는 맹목적 믿음을 가지고 꾹 참고 견뎌야 하는 기간으로 생각한다. 그 교육에서 진정 학생의 현재는 소외된다.
2) 구속적 과정으로서의 교육 꽃은 우리에게 존재는 행위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터득할 수 있게 해주는 스승이 필요하다. 스승은 우리가 누구이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어 우리를 존재의 근원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1) 잠재력을 이끌어 냄 교육은 상대방의 잠재력을 이끌어 내고 이를 통해 서로에게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 학생은 자기체험을 선생에게 이야기 해야 하며, 선생은 그 이야기를 통해 통찰력과 이해를 얻는다. 그렇게 함으로 선생은 선생으로서의 능력이 나오게 된다. 경쟁이 없어지고 선생이 더 이상 두려운 심판관이 아닐 때, 학생들을 학습으로 초청할 수 있으며, 선생은 비로소 선생이 된다. (2) 쌍방성 학생이 선생에게 배울뿐만 아니라 선생도 학생으로부터 배운다. 선생도 모르는 문제를 모른다고 기꺼이 인정한다. 선생과 학생이 서로 배우려는 자세로 학습에 임한다면, 그 학습은 지루하지 않은 창조적 과정이 된다. (3) 현재성 진정한 교육은 학생의 현재를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다. 미래가 현재 실현되게 한다. 더 좋은 세상은 눈에 보이는 일상 생활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현재의 폭력적인 교육방법에서 비폭력적 세계의 창조를 기대할 수 없다. 학교는 비폭력적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형성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학습은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되며, 학점이나 학위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 과정이다. 배움은 삶 속에서 지속적인 혁신을 요구한다.
3) 학습에 대한 저항 (1) 그릇된 가정 학생은 선생이 그들에게 주는 것에 따라 선생의 가치를 평가한다. 그러나, 그 선생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기꺼이 그를 그대로 받을 때,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된 선생을 만나게 된다. 주는 것이 받는것보다 행복하다. 그러나, 주는 것이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그에게 주는 즐거움을 허락해야 한다. 선물은 상대가 기쁘게 받을 때 비로서 선물이 된다. (2) 부당한 압력 성적이 우수하고, 높은 학위를 가질 때 훌륭하고 능력있는 인간이 된다고 믿게 만드는 현대교육과정의 치명적 오류에 빠져있다. 이 사회는 지적 성취를 형식적으로 인정하는 일에 지나친 관심을 갖도록 부당하게 압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개인의 필요를 채우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지도 못하고, 창조적 삶의 기초를 형성할 수 있는 통찰력을 얻지 못한다. (3) 자아 대면에 대한 공포 학습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도록 자기 대면을 해야 한다. 우리는 무력하고, 죽을 것이며, 죄에 눌려있고, 천박한 욕망과 혐오스런 야심을 갖고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 2. 설교 - 이야기의 반복을 넘어서 통찰력과 허용성
설교의 목적은 인간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적 통찰력을 얻게 함.
1) 메시지의 문제 사람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그 메시지를 받아 들이는 사람이 기꺼이 들으려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1) 메시지의 반복 설교내용이 반복되면 창의적 반응을 기대하기 어렵고 설교는 설교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 (2) 메시지에 대한 두려움 설교메시지가 동일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는다면 자기삶을 변화시킬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삶을 변화시킬수 있는 진리를 그래서 대면하기를 두려워한다.
2) 메시지 전달자의 문제 (1) 느낌의 부재 많은 설교자가 청중에게 전혀 생소한 느낌, 사상, 질문, 문제등을 거리낌없이 생각없이 쏟아 놓는다. 이보다 더 혐오감을 주는 것은 설교자가 청중의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듯이 말하는 경우이다. 그럴때 청중은 무감각해지거나 적대감을 표현함으로 설교자에게 “나는 당신과 함께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2) 신학적 관점에 대한 집착 청중은 청중나름의 신학을 갖고 있다. 설교자의 가장 큰 위험은 자기만 신학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청중을 자기 사고 방식대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를 통해 설교자는 “청중을 내처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3) 통찰력으로 인도하는 사람 설교자는 인간이 참인간으로 (참 크리스천으로) 형성되어 가는 고통스런 과정에서 장애물을 제거하는 소명을 지닌 사람. 설교자가 이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을 돕는 두가지가 대화(dialogue)와 활용(availability)이다. (1) 대화의 능력 대화는 설교자가 청중속으로 쉽게 접촉해 들어감으로써 청중이 자기 체험을 가지고 응답하게 하는 것. 설교자와 청중사이에 진정한 마음의 만남이 있을 때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진다. 이런 대화가 이루어질 때, 청중은 자기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당신의 말은 곧 내 말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생각은 곧 내생각입니다.” 하고 고백하게 된다. (2) 활용성 설교자는 기도, 대화, 고독속에서 얻은 삶의 경험을 모두 청중이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목회는 결국 자신의 삶의 체험을 이웃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설교자는 통찰력이 사람을 자유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그래야 무관심과 적대감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옥토가 된 영혼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다.
3. 목회 상담 - 기술적 반응을 넘어서 능력과 관상
1) 영성과 목회자의 정체성 (1) 자기긍정 인간이 자기존재를 모르면 그는 방향감각을 잃고 눈앞의 욕구만 채우고, 환각, 성, 마약등으로 도피하다가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된다. 목회자도 자기존재를 긍정 하여야 하며, 다른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귀한 존재/자녀로서의) 자기 존재를 알게 하는 것. -> 너자신이 되어라. 그러면 창조적으로 살 수 있다. (2) 자기부정 자기를 주안에서 긍정한 목회자는 바로,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종으로 무익한 종으로 고백한다. -> 너 자신을 버려라. 그러면 하나님이 네 안에서 이루실 것이다.
2) 영성과 목회적 관계 (1) 계약 도움을 요청하고 주는 것도 계약의 일종이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데 준다면 또는 A라는 도움을 요청하는데, B라는 엉뚱한 답변을 줄 때 낭패(불필요한 목회자에 대한 실망)를 보기 십상이다. 계약이 완성되려면, 우선 목회자는 도움을 요청한 자가 진실로 무엇을 원하는 지 스스로 깨닫게 하고, 목회자가 그것을 줄 수 있는 지 알게 하는 것이다. (2) 언약 계약은 한쪽이 이행하지 않으면 무효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백성과 언약을 체결하셨다. 언약은 무조건적으로 섬기겠다는 것이다. 목회는 계약이 아니고 언약이다. 그래서 상대방이 원치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무조건적으로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적 성공을 사랑의 기준으로 삼지 말도록 도전하신다.
3) 영성과 목회적 접근방법 목회자가 훈련받을 때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경험을 기록하는 것. (1) 역할 규정 목회자는 자신의 역할을 신중하게 정의할 때, 다른 사람의 역할에 대하 가르칠 수 있다. (2) 관상(묵상) 나는 목회자로서 “어떻게 하면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보다 “이 사람(이 환경)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경험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해야 한다. 신앙인에게는 어떤 형태의 만남도 우연이 아니다. 목회는 우리가 섬기는 사람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지속적 추구 목회는 우리가 섬기는 사람의 모습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가는 여행.
4. 사회 참여 - 조직의 운영을 넘어서
기독교 사회 운동가 많은 교역자와 목회자는 부상자를 치료하지만 전쟁을 종결시키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낀다. 내가 어떻게 문제를 가진 사람을 도울 수 있는가? 가아니라 내가 어떻게 문제를 가진 사람이 적어지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을 도울 수 있을까?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그럼에도, 교역자는 여러가지 대안을 자기 손으로 일일이 다 준비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오히려 인간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산재해 있는 수만가지 사적인 이해 관계를 공동의 관심사로 통합하고, 숙명론을 극복하고, 사회적 책임을 볼 수 있는 비전을 제공하고, 많은 구체적 행동을 넘어 신앙안에서 기독교적 공동체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교역자가 그의 독특한 방법으로 사회운동가가 되는 것이다.
1) 사회운동가의 함정 (1) 성과중심주의 우리자신의 편견(성과지향) 때문에 진정 세상을 개선하고 인간을 돕기 보다는 오히려 방해하는 일이 많다. (2) 권력의 위험 주도권을 쥐고 계획을 추진하는 사람이 그 일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사회운동을 하는 목회자도 고삐를 쥐고서 다른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려고 한다. 가장 깨닫기 어렵고, 또 극복하기 어려운 권력의 위험은 감사를 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정말 다른사람에게 봉사하고도 감사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은 힘들다. (3) 교만의 위험 세상은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신은 회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유혹이다. 허버트 맥케이브(Herbert McCabe)의 말 기독교 교역자를 위한 가장 그럴듯한 모델은 혁명 지도자이다. 목회자는 진실로 혁명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혁명이 아니고, 영적인 혁명이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혁명이란 바로 복음의 선포이다.
2) 기독교 사회운동가 기독교적 사회운동가는 한사람 한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며, 그 들이 속해있는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행동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 (1) 소망 사람이 생각하는 희망은 소원의 또다른 이름일 경우가 많다. 어른은 자가용을 갖고 싶어하고, 병자가 낫고 싶어하고,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인생이 확실한 욕구로 차 있으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마다 실망과 곤욕, 분노와 무감각을 맛볼 위험이 크며 어디선가 어떤 식으로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흔히 교역자나 목회자는 이런 소원성취적 사고의 희생자가 된다. 내 나름의 (보다 잘사는 이웃 또는 보다 많은 구원받은자라는) 소원을 두고, 그 성취여부를 자기 긍지의 척도로 삼으려한다. 이것은 선물(소원성취)을 주시는 분보다 선물에 더 관심이 많은 모습이다. 우리는 그 선물을 원하지만 그 분 안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배신감을 느끼지 않고 언제든지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결과를 그에게 자유롭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신앙의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성과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다. 마틴루터킹이 그렇게 강력한 영적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록 지금 당장 자유를 원했지만, 또한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고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 소원하지 말고 소망하라 (2) 창조적으로 그들을 수용하라 내가 주는 것이 내가 받은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진정으로 줄 수 없다. 슬럼가와 게토에서 봉사하는 사역자들은 그곳 어린이 의 미소와 사람들의 따뜻한 대접, 표정과 이야기, 그들의 지혜, 선량한 마음씨에서 부요함과 아름다움, 애정과 인간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3) 책임의 분배 진정한 지도력은 과제의 위임에 있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공동의 문제를 토의하고,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계획하고 실천해야 한다.
5. 경축 - 형식의 예식을 넘어서 삶에 순종하고 삶을 용납하라
자기생명이 단 하나 밖에 없음과, 삶이 이것과 다른 어떤 길이라는 환상에 대해 죽을 때, 생의 기쁨을 발견한다.
이로 보건대, 교역자는 우리가 삶을 경축하고, 숙명론과 실망에서 벗어나게 하며, 단 한번 뿐인 생명과 하나님의 사역을 부단히 인식하게 해 주는 사람이다. 교역자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상황을 정면으로 대처하고 그 상황속에서 생을 향유하고 축하하게 만들 소명을 지니고 있다.
1) 우리는 어떻게 생을 경축하는가? 기독교적 경축은 음주가무와 상관없다. 경축은 오직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실재임을 깊이 깨달을 때 가능하다. 삶이 귀중한 것은 보고 만지고 맛볼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어느날 결국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1) 긍정 우리의 현 상황에 대한 완전한 긍정이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그대로 수용하자.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현재를 사는 능력을 대부분 상실해 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축하할 만한 어떤 것이 현존해야 그것을 경축할 수 있다. 자신을 현재 자신이 서있는 그 위치에 있게 하라. 그러면 진정한 자신을 알게 되고, 다른 사람의 존재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경험 속에서 발견한 것을 기꺼이 상대에게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함께 걱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진정한 방법으로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 고통까지도 서로 느끼게 되어 진정한 기도가 되는 것이다. (2) 기억 과거가 없다면 현재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 우리의 과거는 부끄러움, 죄의식을 안겨줄 수 도 있고, 교만과 자기 만족을 불러 일으킬 수 도 있다. 생을 경축하는 사람은 이런 과거를 역사적 체험으로 삼아 있는 그대로 용납한다. (3) 기대 삶을 긍정하고 과거를 기억한다면 미래를 경축의 순간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2) 경축이 가능하도록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일은 내일일어날 것이라 믿는다. 과거는 잘못이용한 기회의 연속으로 전락한다. 현재는 끊임없는 성취에 대한 염려로 전략한다. 미래는 바라던 것을 드디어 손에 넣는 거짓 파라다이스로 전락한다. 이런 사람들이 삶을 경축하게 하려면 실제로 교역자자신이 삶을 경축하는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1) 자연에 대한 순종하는 사람 자연은 우리에게 생명이 존재하기 때문에 귀중한것만이 아니라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어도 귀중한것이라고 가르친다. (2) 인간에 대한 순종하는 사람 인간에 귀를 기울여, 그가 삶을 경축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3) 하나님에 대한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소리를 듣고, 부르심을 이해하는 사람은 다른사람도 자기와 같은 체험을 맛볼수 있도록 그길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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