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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세계 문학에는 19~20세기 초에 이르는 세계 근현대문학 100년을 대표하는 9개 어권 총 102명 작가의 114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얼마 전 '체호프 단편선'(민음사)을 읽고 그의 글이 더 읽고 싶어서 체호프의 글이 실려 있는 이 책을 6년 만에 꺼내들었다.
본 선집에서는 19세기 초의 낭만주의 시기부터 20세기 전반의 쏘비에뜨 시기에 걸쳐, 러시아 단편 소설의 정수를 보여주는 주요한 작품들을 선정했다. 작품 선정의 기준으로는 양식사적 측면에서의 중요성을 고려함과 동시에, 각 시기의 사회상과 역사적 배경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는 가의 여부를 중시했으면, 가능한 항 단편소설의 날카로운 형식적 특성을 잘 살린 작품들을 고르고자 애썼다.-p5 두 역자는 러시아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 작가 11명의 13편의 단편으로 이 책을 구성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뿌슈킨- 한발> 결투에서 총상으로 사망한 뿌슈킨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썼을까? 결투를 하게 된 두 남자,한 남자는 두려움조차 보이지 않고 태평한 모습을 보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대를 보고 격분해서 쏘아야 할 한 발을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둔다.남은 한 발의 총알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니꼴라이 고골-외투>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된 낡은 외투를 버리고 새 외투를 사야만 하는 아까끼는 정말 열심히 아끼고 모아서 새 외투를 장만한다. 하필 그날 강도를 만나 옷을 빼앗기고 만다.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외투를 찾기 위해 고급관리를 만나 부탁도 해 보지만,그들은 거만한 모습들만 보일뿐 진정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톨스토이-무도회가 끝난뒤> 무도회에서 만나 같이 춤을 춘 아가씨에게 푹 빠져버린 이반. 집으로 돌아와서도 흥분이 가시지 않아 그녀의 집으로 향하던 그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그 장면을 보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텐데... <안똔 체호프-입맞춤> 식사 초대받아 간 자리에서 랴보비치는 홀로 동떨어져 어두운 방에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어떤 여인의 입맞춤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으로 착각을 한 거였다. 모든 것이 따분하게만 느껴졌던 라보비치의 눈에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보인다. <이반 부닌-일사병> 배에서 만난 두 남녀가 어느 부두에 내려 하룻밤을 보내고 여인은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 떠난다. 여행중 생길 수 있는 하나의 해프닝이라 생각했는데,그녀가 떠난 후 찾아온 생각지도 못했던 공허감때문에 쨍쨍한 태양 아래서 도시를 하염없이 배회한다. 갑지기 찾아온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카메라 한 대가 그를 따라다니며 완벽하게 담아내려고 하는 듯한 묘사가 일품이었다. '안톤체호프'를 떠올렸는데, 체호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역자의 설명이 있었다. <이반 부닌-가벼운 숨결>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라게 되는 건 저주일까? 축복일까? 본인이 인식조차 못하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꺽으려고 하는 남자들. <안드레이 쁠라또노프-암소> 송아지를 잃은 암소의 모습을 안타까이 여기는 소년 바샤,집 옆 기찻길에서 고장난 기차를 움직이도록 기관사를 돕는 소년 바샤. 특별할 것 없는 얘기다 싶었는데 묘하게 여운이 길게 남았다. <미하일 불가꼬프-철로 된 목> 의학부를 갓 졸업하고시골 병원에 부임한 스물네살의 의사는 위급한 환자가 오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하고 있었다.그러던 어느날 밤, 기도가 막혀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 세살짜리 아이를 안고 엄마와 할머니가 병원으로 온다.수술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그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메스를 드는데...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현실의 목소리를 교차시킴으로써 긴장감을 극대화 시키고 있었다. <막심 고리끼-스물여섯과 하나> 사랑할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것에 힘을 얻는다.그런 대상이라도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보고싶은 대로 보고,믿고싶은 대로 믿어서 결국은 스스로를 망치는 사람들이 여기 있었다.
러시아 소설하면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등의 장편소설만을 떠올렸다. 이 책에서 만난 단편 소설들은 러시아 문학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글들이 쓰여진 시기가 러시아로서도 격변의 시대였기에 전반적으로 분위기는 어두웠지만 글은 간결하고 담백한 느낌을 받았다. 러시아의 차가운 날씨만큼이나 명쾌하다고 해야할까? 한 자리에서 러시아 단편 소설을 이렇게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을듯하다. '일리야 레핀'이란 화가를 통해 러시아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었는데,안톤 체호프와 이 책을 통해 러시아 단편소설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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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와 노래속에 강렬한 액센트와 전형적인 멜로디가 섞여있는 나라를 고르라면 러시아를 선택하고 싶다. 대중문화속에도 쉽게 녹아드는 러시아적 운율과 리듬감은 우리의 정서에도 적당히 섞여들어 귓가에 익숙하게 맴돌기도 한다. 대중가수인 심수봉과 임주리가 부른 “백만 송이 장미”가 그렇고 드라마 모래시계의 삽입곡 “백학”이 그러하다. 예전에 백화점 마감시간을 알리는 데 흔히 쓰였던 노래 “Those were the days, my friend”도 원곡은 러시아에서 왔다고 하던가. 지난 여름 동부유럽의 지방도로를 달리며 올려다본 하늘의 낮게 깔린 구름들과 그와 대조되는 듯 개나리빛이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밭을 여러 번 지나치면서 이데올로기가 그들의 숨통을 막아놓기 전의 역사와 문학을 손아귀에 쥐고 싶은 강렬한 순간적 충동이 일었다. 지금 이 순간 푸쉬킨을 읽는다면 어떨까? 톨스토이 <부활>의 영상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그 때 그런 기억을 안고 폴란드의 구도시를 돌아다니며 옛왕궁의 정취와 성당의 처연한 스테인드 글라스에 시선을 뺐겼다.. 웅장하고 위압적인 사회주의 체제의 동상과 건물들은 소박한 사람들의 미소와 얼마나 대조적이던지, 구동부 유럽이 그러할진데 러시아는 직접 보면 어떨까하는 궁금증도 증폭되었다. 2009년 유로비젼 송 콘테스트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고 하는데 러시아도 이제는 엄연한 유럽의 일부가 되어간다. 창비문학이 선보인 러시아 단편문학의 번개맞은 듯 순간적이고 날카로운 강렬함을 어떻게 설명할까 많이 망설였다. 어디선가 익히 들어봤던 작가들의 이름이지만 그들의 작품성향과 사상의 자유로움은 왠지 낯설었다. 아마도 자주 접하지 못한 소극적인 글읽기 탓이라 여기고 글 한편 한편에 집중해서 읽었다. 진지함이 배여있는 글 속에 서서히 드러나는 반전과 인간사 애닳음의 섞임이 종일 책읽기의 몰입을 강요했다. 알렉산드로 푸쉬킨의 <한 발> 총알을 장전하고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는 결투를 그려보았다. 영화을 통해 무척이나 많이 본 적이 있는, 애모하는 귀부인 사이에서 결투하는 잘 생긴 숫총각들의 그림도 그려진다. 이 단편은 주인공을 모욕한 상대방과 결투를 신청한 뒤 자신이 쏠 한 발을 상대가 가장 행복한 시기에 돌려줄 것을 약속하는 심리적 긴장감을 억누르는 듯한, 세월의 시간앞에서 주인공 내면의 긴장이 해소되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니꼴라이 고골의 <외투> 책읽는 내내 나를 사로잡은 단편이다. 잘난 것 하나 없고 항상 뒤쳐지는 말단 공무원인 주인공의 가련한 삶이 헤어질대로 헤어진 외투와의 에피소트에 처절하리만치 듬뿍 담겨있다. 수직적 상승체계속에서 수평적 관계는 찾아볼 수 없이 외로운 일상과 대치하던 주인공, 가진 자들의 방치로 그는 불쌍하게 죽지만 그의 영혼은 유령이 되어 자신을 방치하던 관리들의 일상을 괴롭히려 든다. 외투를 향한 강한 집착과 티끌모아도 여전히 티끌인 주머니속사정을 유려한 텍스트로 그려낸 개인적으로는 가장 인상에 남는 단편이다. 레프 똘스또이의 <무도회가 끝난 뒤> “그러니까 당신들 말씀은,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제 스스로 알지 못하고 모든 게 환경에 달려 있다, 말하자면 환경이 해를 끼친다 그 말이시군요. 하지만 나는 모든 건 우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 내 이야기를 해드리죠.” 로 시작하는 이야기. 젊은 시절 무도회에서 만난 아름다운 그녀와 연대장인 그녀의 아버지를 향한 존경과 흠모의 눈빛은 이내 그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으로 무르익는다. 무도회가 끝난 뒤 주인공은 아름다운 그녀 아버지의 너무도 다른 면모를 목격하는데, 잡혀 온 죄수에게 고문과 일격을 가하는 잔인하고 끔찍한 야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이내 사랑도 사그라들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과의 작별을 고한다. 우연히 목격하여 알게 된 내면의 심사로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부유함과 가난함, 귀족과 민중의 삶을 다시금 돌아보는 톨스토이의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안똔 체호프의 <슬픔>과 <입맞춤> 나의 슬픔은 무척이나 깊다. 남들은 나의 슬픔을 들어 줄 아량이 없다. 아니 관심이 없다. 그래서 나의 슬픔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억울함으로 가득하다. 주인공 마부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일상의 되풀이되는 지리한 시간속에서 삮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는 그의 슬픔을 들어 줄 마땅한 사람이 없음에 좌절하고 내리깔린 허무에 젖어든다. 각자 따로인 세상, 타인과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걸까? <슬픔>이 타인과의 경계를 그린 작품이라면 <입맞춤>은 타인에 대한 상상과 기대가 한정된 공간속에서 이루어진 찰나의 사건이지만 그 여파는 무한한 공간성을 가지고 있다. 일생에 단 한 번 첫키스의 짜릿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가. 나는 아무래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번은 스치고 지나갔을 입맞춤의 기억을 어두운 공간에 배치하고 스스로 그 급작스러운 느낌을 간직하고픈 주인공의 감성이 고집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짜릿한 첫키스의 흐릿한 그림자때문일 것이다. 막심 고리끼의 <스물여섯과 하나> 밑바닥 인생 스물여섯명의 빵공장 인부들과 그들의 초라한 일상에 한줄기 햇살인 따냐라는 여인의 스토리이다. 비참함에 찌들면 판단력과 가치관에 치명적인 상실을 가져오는 걸까. 노예나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남정네들이 바라보는 소녀 따냐는 순수함의 대명사이지만 곧 그들은 그녀의 순수함을 시험하려든다. 일명 똘기가 발동한 남정네들은 따냐의 순결을 대놓고 멸시하며 희망의 빛이자 여신의 이미지를 창녀화시킨다. 희망을 잃어버린 남정네들. 진실을 찾은 듯하지만 도리어 그들은 속을 알수 없는 깊은 비참함으로 추락한다. 따냐는 그들의 비인간적인 멸시를 박차고 나가는 열혈녀의 모습으로 보여진다. 미하일 불가꼬프의 <철로 된 목> 의학드라마 <하얀거탑>의 한 대목이 생각나는 단편이다. 젊은 시골의 의사가 디프테리아에 걸린 세살 난 아이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도망가고 싶은 무력감을 무릅쓰고 기도절제술에 성공하여 이름을 날린다는 이야기이다. 치료와 수술과정속에서 의무감과 책임감을 회피하고픈 인간의 나약한 모습은 경험과 자신감 결여의 전문성 부재라는 커다란 개인적 자괴감의 결과였으리라 생 각된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좋은 결과가 나왔지만 의사로써의 튼실한 경험과 경력을 쌓아가는 첫동기 마련의 가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보았다. 이삭 바벨의 <편지> 아들이 아비를 죽이는 패륜을 행하고도 죄의식없이 바로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안에 그 내용을 담아 보낸다. 어린 아들에게는 눈물이나 죄책감보다는 본능적 욕구, 배고픔과 추위 해결만이 가치대상일 뿐이다. 아주 짧은 글이지만 충격은 크다. 상당히 말을 아끼며 쓰여진 텍스트때문에 현실의 이야기같지 않게 느껴질 뿐이다. 나제쥬다 떼피의 <시간> 시간의 흐름이란 덧없고 부질없으며 과거의 영예와 아름다움은 영원하지 않다는 단순하지만 순수한 인생의 진리를 알게 하는 단편이다. 레스토랑에서 친구들과 한껏 어울리며 “귀부인의 전설”로 수다를 떠는 사이 옆테이블의 늙고 게걸스럽게 음식을 탐하는 노파가 과거 “귀부인”의 주인공임을 드러내는 허무하고도 무상한 인생 끝자락 이야기. 덧없고 덧없다. 에브게니 자먀찐의 <동굴> 러시아 혁명이후 달라진 세상의 뒷자락속으로 사라지는 인간의 고뇌와 삶의 지겨움이 묻어나 있는 작품이다. <광에서 인심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보수적인 가치와 먹물근성이 있는 지적 소유자인 남편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없어보이는 도둑질까지 하지만 현실은 나아지지 않고 머릿속은 궁핍해진다. 병든 아내의 제안, 죽어야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을 동굴안 음침한 묘사로 가슴속에 한바탕 비바람을 불러일으킨다. 독약과 아내를 남겨둔 채 동굴밖으로 나온 남편, 그 밖은 동굴안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반 부닌의 <가벼운 숨결>과 <일사병> 아이돌에 열광하고 가벼운 가쉽거리에 중독되어있는 현대인의 감성이 <가벼운 숨결>같지 않은가. 부풀어 오를대로 성숙한 열다섯 소녀 올랴의 가소로운 육체적 탐미는 백치의 그것에 가깝다. 단어의 속뜻을 알지 못하는 답답한 미성숙이 보인다. 그게 어디 올랴뿐일까 <일사병>은 원나잇스탠드가 그 설정인데 격렬한 사랑이후 쿨하게 떠난 여인의 부재와 마주한 주인공 남자의 상실감과 정신적 공황상태를 묘사한 글이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에 타들어가는 상실감을 일사병처럼 멋지게 비유한 작품이다. 안드레이 쁠라또노프의 <암소> 송아지와 암소, 어린 아이의 시선과 어른들의 세계과 우연하게 교차하는 길목에 철로가 나온다. 철로에 멈춰선 기차를 움직이게 돕는 아이, 그 기차에 치어죽는 암소의 운명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마치 세상은 달라질 게 없는 것처럼 암소는 고깃덩어리가 되고 아이는 그 고기를 씹게 되는 그럼으로써 어른의 세상과 동화되는 비극적 현실이 만들어진다. 인간은 슬프디 슬픈 존재인가보다.. 충분히 읽고 충분히 느낀 책읽기였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투영하는 문학의 세계는 언제나 매혹적이다. 문학을 읽는 즐거움은 바로 이런데에 있는 것 같다. 한 권으로 만난 러시아 단편에 문학의 세계가 열리고 다양한 내면적 경험과 마주한 기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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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세계문학 선집 9권을 받아들고 나니 뿌듯해진다. 읽을책이 많이 생겼다는것 자체보다도 언젠간 읽어보고 싶은 작품들이기에, 더구나 창비에서 발간을 했으니 그냥 읽기만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9권 어디에도 순서가 없으니 어느걸 먼저 읽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맨위에 있는 책부터 읽기 시작한다. 러시아편이다. 책을 보니 그래도 아는 작가들이 많이 나오니 반갑다. 그런데 러시아 작가들이 쓴 소설들을 번역한 작품들을 읽을라면 항상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냥 ‘푸쉬킨’,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고리끼’… 이러면 되는데, 왜 ‘뿌쉬낀’, ‘똘스또이’, ‘안똔 체호프’ 하는지를 모르겠다. 그것이 더 원음에 충실한건지, 어떤지는 몰라도 이미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이 있는데… 책에 실려있는 작품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뭔가 처음에 “이것이다”라고 생각나게 하는 것은 없지만 곰곰히 곱씹어보게 만들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나와 타자와의 문제이다. 나에게 닥친 일은 단지 나에게 일어난 일 일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이 없다. 단지 한 순간의 위로를 해줄수는 있겠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람들은 까드막히 잊어버리고 만다. 단지 자신만이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뿐이다. ‘안똔 체호프’의 소설 [슬픔]에서 마부 미오나는 일주일전에 죽은 아들을 생각하고 있다. 누구에겐가 말을 하고 위로를 받고 싶다. 그러나 마차를 타는 승객도, 숙소의 동료도 그의 말을 들어줄 생각들이 없다. 누군가 듣는 사람이 탄식도 하고, 한숨도 쉬고, 맞장구도 쳐주고 해야 빨리 슬픔에서 벗어날수 있건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미오나는 자기가 모는 말에게 얘기한다. 말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건초를 먹기도 하고, 주인의 손위로 숨을 내쉬기도 한다. 역시 ‘체호프’의 [입맞춤]에서 주인공 랴보비치도 마찬가지이다. 야영지로 이동중 지역에 사는 장군이 장교들을 저녁만찬을 초대한다. 길을 잘못 들어 깜깜한 방에 들어서자 웬 여자가 볼에 입맞춤을 한다. 아마 자기가 기다리던 사람인줄로 착각했으리라. 랴보비치는 행복한 상상을 이어가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동료들에게 얘기하지만 조롱만 당하고 만다. 이 소설들은 대부분 19세기 후반에 쓰여진 것 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에겐 전혀 관심이 없는 인간들의 이기심을 누군가에게 자신의 사정을 말하고 싶은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들어내고 있다. 13편의 단편 중에는 또한 내면의 갈등들을 그린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그 갈등들이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는 것 같다. 소설을 읽고 주인공의 슬픔을, 아픔을, 황당함을 독자 스스로 느껴보라고 하는 것 같다. ‘알렉산드르 뿌쉬낀’의 [한발]은 주인공인 씰비오의 친구가 쓴 글이다. 명사수인 씰비오는 자신을 모욕한 사람과 결투를 신청하고, 자신의 차례가 되었지만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조롱하는데 격분하여 한발을 남겨둔다. 그리고 그 사람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남겨놓은 그 한발을 집행하기 위하여 떠난다. 5년후 화자는 시골에 정착하게 되고 그 동네 사는 백작과 사격얘기 끝에 씰비오 이야기를 하게 된다. 백작은 바로 씰비오가 결투를 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씰비오는 백작부인이 옆에서 용서를 빌고, 백작이 죽음 앞에서 초조해 하자 그 모습으로 되었다며 한발을 쏘지않고 갔다고 한다. 이제 책을 읽고 난 우리는 백작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헤아려야 한다. ‘이삭 바벨’의 [편지]에선 붉은여단에 근무하는 꾸르 쥬꼬프가 고향에 있는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화자가 대신 써주고 있다. 일년 전쯤 부대내 배신자가 있어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 헌데 적의 중대장을 하고 있던 아버지가 페쟈형을 칼로 난자질하여 죽인다. 꾸르는 간신히 도망쳐 나온다. 쎄본형이 적들을 찾아 다니다 숨어있는 아버지를 발견한다. 병사들을 마당에 나오게 하고 쎄본형이 아버지를 처형하려 준비를 한다. 쎄본은 주인공을 마당에서 나가게 한다. 편지를 다 쓴 화자가 묻는다. 아버지가 싫으냐고? 꾸르가 예하고 대답한다. 어머니가 좋으냐고? 꾸르가 다시 예하고 대답한다. 우리는 아버지는 차치하고 아들들과 어머니의 마음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런가 하면 우리는 ‘안드레이 쁠라또노프’의 [암소]에선 암소의 마음도 헤아려주어야 한다. 철로 선로지기의 작은 앞마당 헛간에 사는 암소의 새끼 송아지가 아프다. 바샤의 아버지는 수의사에게 보여주기 위해 데리고 가고, 아버지가 늦어지자 바샤가 열차를 통과시키기 위해 건널목으로 간다. 언덕을 올라가지 못하는 기차를 올라갈수 있도록 바샤는 선로에 모래를 뿌리며 도와준다. 저녁 늦게 돌아온 아버지는 송아지를 도살장에 팔았다고 한다. 암소는 돌아오지 않는 송아지를 생각하면서 밤새 운다. 다음날 일을 끝낸 암소는 들판으로 사라지고 그 다음날 아침에야 돌아온다. 그리고 일을 하기는 하지만 우유는 나오질 않는다. 어느날 바샤가 학교에서 돌아오니 건널목에 기차가 서있다. 기차밑엔 깔려죽은 암소가 있었다. 마치 말을 하는 것처럼 피하지도 않고 기관차에게 왔다고 한다. ‘레프 똘스또이’의 [무도회가 끝난 뒤]에서는 우리의 삶이 언제 어떻게 바뀌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한다. 주인공은 소설속의 화자인 이반 바실리예비치이다. 그는 삶이란 환경이 아니라 우연한 사건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반은 한 무도회에서 바렌까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연대장의 딸인 바렌까는 무도회의 꽃이었으며 이반과 춤을 춘다. 사랑에 빠진 이반은 무도회가 끝난뒤 집에 돌아와서도 흥분을 가라 앉히지 못하고 새벽거리로 나선다. 그곳에서 이반은 도망자를 붙잡은 병사들이 장교의 명령에 따라 구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장교는 바로 바렌까의 아버지인 연대장이었고, 도망자는 계속해서 자비를 애원하지만 연대장은 들은척도 하지 않는다. 연대장에게 무슨 사정이 있을거라 생각한 이반은 그 사정을 알기 위해 아무리 생각해보지만 결국은 알수가 없다. 그 후 시도때도 없이 그 모습이 생각나는 바람에 이반은 희망했던 군대생활은 물론 아무일도 할 수가 없게 되고 결국은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사랑도 식어 버린다. 그러면서 이반은 말한다. 사건이 어떻게 벌어지고, 무엇으로 인해 사람의 인생 전체가 변질되어 방향이 바뀌어버리는지를 알게 되었냐고.. 사랑과 폭력과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우리의 삶이 어느 한 순간의 우연한 사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이해하느냐고 묻고 있다. 책에 수록되어 있는 13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두가지 생각이 떠 오른다. 한가지는 20세기 초반 우리나라의 신소설이라 불리는 작품들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할 얘기는 많은데 아직은 다 얘기할수 없는듯한 느낌, 읽고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내용이 잡힐 듯 하는 느낌, 아마 내가 처음 그 소설들을 접할 때 러시아 작품들도 같이 접해서 그런건지도 모른다. 또 한가지 떠오르는 것은 음악다방이 생각난다. 모든 다방에 DJ들이 있어 사람들의 신청곡을 틀어주고 하던 시절, 소위 음악다방 이라는 것이 있어서 클래식만을 틀어주곤 했다. 종로2가 YMCA 건너편에 있었던 月光다방엘 자주 갔었던 것 같다. 시끄럽지 않다는 이유로, 고상한척(?) 할수 있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러시아 소설들을 읽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단편 [한발]을 읽으면서 생각난 月光다방이 마지막 단편 [암소]를 다 읽을 때까지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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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설과 달리 그는 단테스와의 결투로 인해 사망까지 하게 되였으니 말이다. 정말,러시아인들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림과 글을 통해 마주한 이 장면은 결코 무모해 보이지 않는다.오히려 낭만적으로까지 비춰진다.그것이 문학의 힘이겠지만 말이다. 어쨋든,폼생폼사의 장면을 달거워(?)하지 않았던 나에게 뿌슈킨의 단편 <한 발>은 또 다른 느낌으로 전해지게 되는 계기가 되였다. 비이성적으로 보이기만 했던 저들의 모습에서,묘한 애정이 느껴지게 되였으니 말이다.<한 발>이란 소설은 이 그림 한장으로 설명이 왠지 다 되어버린 기분이 드는건 그래서 인지도 모르겠다.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화는 단연코 문학이었으리라. 이러한 소설가들의 영향으로 인해 19세기 미술가들은 세계 최고의 스토리텔러들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 말을 언급하는 이유는,러시아 그림의 매력에 빠지면서 러시아 문학이 궁금해진 나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렵고,난해하고,왠지 심오할 것만 같았던 러시아 문학과 친해질 수 있었던 동기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레핀의 그림을 통해 먼저 '한 발'의 느낌을 경험 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파벨 페도토프의<새 단장:관리가 첫 단장을 마친 직후의 아침>이란 그림은 고골의 <외투> 속 말단 관리인이 생각나게 했다.역시 그림으로 먼저 만났던 나에게 무슨 관리인이 이렇게 초라한 것인지..소설 속에서 충분히 그림 이상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였다. 물론 만나는 작가마다 모두 그림이 떠 올랐던 것은 아니다.^^ 무도회가 끝난뒤를 읽으면서는 이 전 부터 해 왔던 생각,간혹 방송을 통해 부정축제를 저지른 관리자들의 자녀들 혹은 그와 친분이 있는 이들이 관리자를 변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져 보게 했다.
"인간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제 스스로 알지 못하게 모든 게 환경에 달려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말처럼 우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개인적으로 전자라고 생각 하는 편인데,저자는 '우연'이라고 했다. 책의 설명처럼 독자의 고민은 정말 여기부터 시작되게 한 작품이었다~
체호프의 '슬픔'은 또 어떤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슬픔'이란 것에 대한 반전이다,라는 인상을 받았다. 최근 읽었던 <보통의 존재>라는 책에 보면 함께 슬퍼하는 것보다 함께 기뻐해 줄 수 는 있는 사람이 더 없는 것 같다는 그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슬프다는 것은,무엇인가를 잃었다는 것으로 오지만,힘들고 고단할때 이야기를 들어 줄 이가 없다는 것이 더 슬픈 것이다.라는 정의를 내려 주고 있는 것 같았기때문이다. 의무적으로 건내는 위로의 한마디 말 보다, 그의 슬픔을 들어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없다면..당신은 슬퍼해야 한다?!
러시아 그림을 통해 이제 막 러시아 문학의 매력을 조금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체호프나 고골의 작품들이 어렵게(?)읽히지 않아 너무 다행이었다.아마도 그림들 덕분이었을게다. 그러나 <암소>,<가벼운 숨결>,<시간>등은 교과서적 느낌도 들고,조금 지루한 느낌도 있었다. 그렇지만 절반 이상의 성공이었으니 대만족이라 할 수 있겠다.
덧붙임...스페인 문학을 읽을 때는 작품의 설명이 오히려 도움이었는데 러시아문학은 꼭 그렇지 않았다. 특히 암소,일사병등이 그랬던 것 같다.어렵지 않고 아주 짧은 단편이니 번역자의 설명은 책을 먼저 읽은 후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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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스또이나 도스토옙스키를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나라가 러시아겠지요. 그만큼 대문호가 많은 나라 아닌가 싶습니다. 저작도 워낙 방대한 분량으로 남아있어서, 러시아 문학을 접할 때 이 두 작가로 시작해서 둘로 끝나버리는 (읽다 지쳐서일까요) 경우도 적지않은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선집이 가지는 장점이 분명해집니다. 일단 작가나 대륙권이 아닌 나라를 단위로,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선정했다는 점입니다. 보다 많은 작가, 번역된 작품을 접할 기회가 없어 아직까지 만나보지 못한 작품을 싣고 있지요.
뿌슈낀, 고골, 똘스또이, 체홉, 고리끼는 확실히 유명한 작가이고, 해당작가의 선집도 적지않게 출판되어 있지요. 단편 한편을 보아도 작가의 문체나, 단편소설의 짜임에서 유난히 도드라지는 작가의 개성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을 선정한 것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거나 단순히 세간에 많이 회자되는 작품 위주로 선정했다면 오히려 아쉬웠을 것입니다. 작가 특유의 문체가 돋보이면서도 지나친 번역투의 문장으로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일이 없는, 역자의 훌륭한 번역도 큰 장점입니다.
불가꼬프나 바벨, 떼피, 자마찐 등은 이 선집을 만나고 얻은 큰 수확입니다. 그간 찾아보기 힘들거나 몰라서 읽어보지 못한 러시아 작가를 이렇게 추천받을 수 있는 것이 이 책의 기획에서 가지는 최고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자마찐의 작품을 만나본 것이 특히 좋습니다. 문체나 구성 면에도 작가의 개성이 분명한 동시에, 러시아를 배경으로 했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랄까요.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 가난한 사람들의 겨울나기, 지식계층이나 무산자인 사람들이 머무는 차디찬 집을 <동굴>로 묘사하는 점은 어두운 상황에서도 유머러스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재기넘치는 표현들을 사용하면서도, 시대와 가난, 자살을 선택하는 점에서의 고민들도 놓치고 있지 않았습니다.
마치 수험생 참고서 같은 <더 읽을거리> 박스글에서 주는 정보 덕택에 자마찐을 더 만날 정보를 바로 얻을 수 있는 점도 좋습니다. 작품을 시작하는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적절한 작품 줄거리 설명과 배경 설명도 학생들이나 작가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정보라 여겨집니다.
단편소설이라는 선집을 통해 러시아 문단의 스틸컷같은 새로운 그림을 보게된 것 같네요. 새 맥락 안에서 작품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이, 이러한 기획의 최대의 장점 아닌가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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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문학전집 러시아편 박현섭 박종소 엮고 옮김 창비 刊
늘 느끼는 거지만 러시아 알파벳은 디자인 난수표 같으다. 뭐든지 별다른 문화로 보인다. 알렉산드로 뿌슈낀의 [한 발] 쏘비에뜨 혁명 전의 제정 러시아의 브르조아들 간에 명예를 니꼴라이 고골의 [외투]는 [검찰관]의 경우와 같이 제정 러시아의 관료사회의 병폐를 다룬 안똔 체호프의 유명성은 러시아 문학의 브랜드를 이루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현진건의 뿌슈낀이나 고골 똘스또이 고리끼 바벨 등은 순탄치 못한 종말을 겪는다, 러시아 작가들의 러시아 문학은 시대를 구분하지 않고 읽고나면, 가슴이 알싸한 작품성에 중독성이 강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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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에서 <창비 세계문학> 시리즈를 출간 소식을 접하면서 내심 눈도장을 찍고 있었다. 그냥 아무런 저항의 틈도 없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일었다. 누구나 알만한 세계대표 문학이란 것이 내게는 어렵고 난해해 아주 높은 벽임에도 그 벽을 오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내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전집 시리즈 형식의 책은 탐탁치 않아하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본, 영국, 미국, 프랑스, 스페인 등등의 9 나라들 중에서 '러시아'를 가장 먼저 손에 쥔 것은 바로 '막심 고리키'때문이다. 러시아 문학하면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이란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작가들이다. 하지만 내겐 '막심 고리키' 또한 호기심이 마구마구 샘솟는 작가 중에 하나이다. 솔직히 <무도회가 끝난 뒤> 속 소개되고 있는 9명의 작가-모두 11명의 작가의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톨스토이와 막심 고리키를 제외하니 9명이다-들은 너무도 낯설고 생소할 뿐이었다. 또, 고백하자면 지금껏 러시아 대문호의 대작들 만나지 않았다. 몇번인가 시도를 하다가도 제대로 탐해보기도 전에 포기하고 뒤돌아서기 바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솟구치는 호기심을 또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책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다양한 작가와 작품들에 압도당했다. 짧은 이야기 속 삶을 농밀하게 그려내고 있는 예리함에 매혹되었다. 기대했던 막심 고리키의 작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산업화 기계화 속 몰개성화, 몰인간성의 모습을 날카롭게 풍자하고 있는 이야기는 시대를 뛰어넘으면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근 100여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지면서 우리의 모습이 여실이 비춰지는 듯해 씁쓸하기도 하였다. 또한 러시아를 대표하는 각양각색의 작가들과 작품들은 끊임없이 작가에 대한 호기심,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가라면 '외투'라는 이야기로 만난 '니콜라이 고골'이다. 독특한 이름의 말단 관리의 외투를 둘러싼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중간중간 사설처럼 등장하는 이야기 전개 방식이 꽤나 독특하면서 인상적이었다.
작품과 작가에 대한 소개와 해설 그리고 '더 읽을거리'를 통해 다른 작품들에 대해 호기심을 부채질한다. 한 권의 책을 통해 다채로운 러시아의 대표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손쉽게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러시아의 문화와 역사를 맛보면서 '러시아'에 대한 호기심도 배가되었다. 다소 아쉬움이라면 '된소리'로 표기되고 있어 거북하였다. 톨스토이로 익숙한 내겐 똘스또이로 표기되는 것은 과연 2010년에 출간된 책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왠지 낡은 아버지의 책장 속 먼지 자욱한 책을 펼치는 느낌이라고 할까? 익숙하지 않은 된소리표기는 러시아의 익숙한 지명조차 생소하게 만들어 글을 읽는데 방해가 되기도 하였다. 뭐 그런 아쉬움을 뒤로하고 엄선된 작품 자체에만 심취해 이야기를 되새김질하다보면 또다른 나라의 작품들 역시 손에 쥐고 싶어진다. 대작가들의 대작품의 높은 벽에 고개를 떨구기보다는 한 권의 책 속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면서 삶의 깊이와 내밀함을 느껴보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서둘러야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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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예술은 열정적이고 역동적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좋아하는 작가도 꽤 있고, 굉장히 디테일한 글과 화려한 언어구사는 클래식하면서 질리지 않는 고고함이 흐른다. 이번에 읽은 이 책은 11명의 러시아 작가의 단편 소설을 엮은 것이다. 러시아의 유명 작가는 총망라된 듯한 화려한 면면은 글 어귀마다 느껴진다. 레프 톨스토이의 [무도회가 끝난뒤]라는 제목에 혹해 집어든 책이었는데, 여러명의 다른 러시아 작가를 만날 수 있어 흥미로웠던 책이다. 오랜만의 안톤 체홉의 글도 그랬고,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 톨스토이의 긴밀함도 좋았다. 무엇보다 지금껏 접해보지 못한 막심 고리끼의 단편과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글도 무척 흡입력이 있었다. 단편이 좋은 점이 여럿 있겠지만, 짧은 글에서 작가가 의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집약해서 모여주고 있는 압축미를 뽑지 않을 수 없겠다. 고전 문학의 백미는 무엇보다 클래식한 전개와 슬로우한 표현이다.... 천천히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집중하게 하는 묘한 분위기라고 해얄까. 게다가 내용이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다는 것. 고전 문학의 매력이 지금도 퇴색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게 아닐지...내가 아날로그적인 감성에 끌려 더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소개나 대략저인 소설의 전개를 소설 첫 부분에 실은 부분도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모르는 작가에 대한 작은 팁을 얻고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특히 러시아 발음대로 쓰여진 것도 좋았던거같다. 대부분의 역서들은 미국식 발음으로 되어있는것에 비하면 좀더 러시아 소설로의 접근성을 높이는듯 했다.
긴장감있게 시작되는 푸쉬킨의 [한 발]은 총으로 하는 결투의 그 총 한 발이다. 이 작가 자신이 결투로 생을 마감했다고 하니 참으로 인생은 기가막힌거같다....! 인생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에 무너지고, 말도 안되는 사소한 일로도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는 건 새삼스러운 말도 아니지만, 결투에서 빚어진 자신의 한 발이 어떻게 자신과 타인의 인생을 결정짓게 되는지를 생각하면 터무니 없기도 하고 인간은 참으로 단순하기도 이상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된다. 하긴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도 뒤틀리게 살아가는 것도 모든게 한 순간이 모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결과물인지도 모르겠다. 니꼴라이 고골의 [외투]는 외롭고 소외된 평범한 소시민의 보잘것없는 인생을 외투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어렵게 모아 새 외투를 장만한 그 말단 관리는 새 외투를 입은 첫 날 외투를 도둑맞는 불운을 당한다. 어찌보면 외투를 장만하기 까지 힘들지만 행복한 소망이 있었다면 그것이 이루어진 순간 그 행복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린다. 아무도 그의 사정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한 존재의 무가치함에 슬퍼지기도 했다.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한 인간의 초라하고 외로운 뒤안길에 누구도 함께 해주길 거부한다는 거.. 생애 처음으로 찾아 온 기쁨이었을 새 외투의 따사롭고 행복한 촉감이 그에게 준 시간은 너무나 인색했다. 새롭게 만들어질 외투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영혼의 안식을 누렸던 한 인간의 작고 소박한 행복은 쉽게도 사라져 버린거다. 결국 그 뒤에 그의 외투를 찾기위한 고독한 사투는 죽음을 뛰어넘어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괜스레 서글퍼진다. 한 인간의 외롭고 또 외로운 인생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사람 누구나 느끼고 있는 근원적인 외로움'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하다. 누구에겐가 진정으로 이해받고 있는건지, 외투처럼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줄 누군가를 만들기 위해 인간은 계속 싸우고 있는건 아닌지, 이상하게도 유령이 되어서도 자신의 단 하나의 행복이었던 외투'를 찾기 위해 방황하며 떠도는 그의 영혼이 십분 이해되기도 했다. 그에게 외투는 그냥 외투가 아니라 완전한 사랑'같은 존재였던 거다.
사건은 다르지만, 안톤 체홉의 [슬픔]도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과 그 슬픔을 사람들에게 전해 위로를 받고자 하나 누구도 귀기울여 들어주지 않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보여진다. 결국 마부인 그가 그가 끌던 말에게 자신의 아들의 부고를 전하는 아버지의 절절한 슬픔이 그려진다. 누구에게도 위로 받지 못하는 슬픔이라니, 울고 싶은데 누구도 받아주지 않는 먹먹함이라고 해야하나...내 슬픔을 공감해 줄 누군가가 절실한데 아무도 없다면 얼마나 더 슬플까. 장례식장에 모이는 조문객들이 망자를 그리고 남은자의 슬픔을 위로하는 것은 당연한건데, 그 무한대의 슬픔에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는다면 홀로 견뎌야하는 슬픔은 배가될 것같다. 이 아버지의 슬픔이 극적인 긴장감을 주는것은 외면당하는 슬픔때문인 것같다. 또 다른 [입맞춤]은 체홉의 가볍고 경쾌하지만 쉬이 흘려 버릴 수없는 사건을 통해 공감을 이끌어 낸다. 어느 무도회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헤프닝'을 통해 인간 심리를 묘사하고 있다. 재미나기도 살포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여인에게 입맞춤을 당한 남자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는 모습이 누구나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누구일까? 더 아름답게 더 고혹적으로 그려지는 묘령의 여인은 천상의 피사체가 된다. 결국 아무것도 아니고 확인 할 길 없는 정말이지 헤프닝에 불과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통해 남자가 느끼는 황홀한 만족은 어쩌면 확인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지 모른다. 결코 실체가 상상을 뒤집을리 만무하니 말이다.
이외에도 러시아 단편소설의 면면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작품이 실려있다. 우선은 단편이라 읽기에도 수월하고 러시아 사회의 모습과 역사적 배경들도 경험해 볼 수 있었던거 같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읽은 책이어서 그런지 여러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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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편을 읽음으로서 창비 세계 문학을 세 번째로 접하게 되었다. 된소리 발음의 표기법이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나는 이 전집이 참 마음에 든다. 평소 단편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점을 생각해보면,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뿐.^^ 도대체 이 단편들의 무엇이 내 관심을 끄는 걸까. 러시아편은 무척이나 화려한 작가진이 눈길을 끈다. 알렉산드르 뿌슈낀에서부터 레프 똘스또이, 안똔 체호프, 막심 고리끼, 미하일 불가꼬프에서부터 니꼴라이 고골과 이삭 바벨, 나제쥬다 떼피와 예브게니 자먀찐, 이반 부닌과 안드레이 쁠라또노프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라의 작품들은 한 작가당 두 세 편의 작품이 소개된 반면 러시아편은 거의가 한 작가당 한 작품이 소개되고 있다. 아마도 19세기 문학사를 이끈 유명 작가들이 러시아에 대거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전에 읽었던 일본편이나 영국편에 비해 러시아편의 단편들은 각 작가들의 특성을 가려내기가 쉽지가 않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인간 밑바닥의 삶을, 인간 본연의 모습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고 작품마다 임팩트가 강하다. 너무나 교육적이어서 앞으로는 장편만 읽겠다고 다짐하게 만든 똘스또이의 작품인 <무도회가 끝난 뒤> 조차 전혀 그의 단편인 것 같지가 않다. 이렇게 한 흐름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을 엮은 분의 노력 덕이었는지 아니면 그 시대를 풍미하던 러시아 문학의 대표적 특성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창비 세계 문학을 읽게 만드는 힘인 것은 분명하다. 너무나 닮아있는 이 작품들 덕에 이 작품이 누구의 작품인지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읽었지만 그럼에도 각각의 단편들은 분명히 하나하나 잘 살아있다. 짧지만 강렬해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갑자기 불쑥 생각나게 만든다고나 할까. 아마도 내가 이 전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힘 때문일 것 같다. 다음엔 또 어떤 나라의 작품을 읽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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