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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중국이나 일본은 역사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그만큼 그들은 역사를 자랑스러워하고 미래 발전의 발판으로 삼으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역사라는 것은 참 희한한 가치평가를 받고 있다. 역사를 역사학자에게 맡겨두지 않고 역사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분류하고 있다. 특히 현대사 100년은 매우 뜨거운 감자이고 역사에서 '계륵'에 해당된다고 보는 무리들이 있다. 이들은 20세기의 전반기에 해당하는 앞의 50년을 거의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중, 고등학교 교육에서 일제의 지배를 무시하거나 미화한다. 심지어 안중근 의사나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라고 한다. 그들은 후반의 50년을 더 강조하고 반공 교육을 강화하려고 한다. 그래서 모든 논리를 반공 이데올로기에 맞춘다. 독재 정치로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이 유린되고 정치의 희생물이 된 추악한 사실에 대해서는 경제 발전의 성과만으로 덮어버리려고 한다.
이처럼 현대사 100년이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 그들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과거의 전과 기록은 없던 걸로 하자는 것이다. 자기들의 반대파들은 전부 빨간색을 씌운다. 그러면서 자칭 자기들을 보수라고 한다. 그들은 보수가 아닌데 그런 이름표를 붙이면, 역사의식 없는 국민들에게는 먹히기 때문이다. 이 뜨거운 감자를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에 따라 한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 중에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이 경제학, 윤리학, 법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역사학에서는 문외한이면서도 역사학자들의 학문적 성과를 정치적 관점에서 재단하고 있다. 역사는 惡意로 써서는 안된다는 저자의 논리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이들의 논리를 보고 있는 일반 백성들은 이들의 논리에 현혹되어 부화뇌동을 하거나 자신들도 자신의 정치 관점으로 역사를 보려고 한다. 이런 부류의 국민들은 역사를 무슨 여론 조사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가보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의 진위 여부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것 중의 하나가 '단군 신화'에 관한 것일 것이다. 그것은 단군 신화의 내용이 신이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삼국 통일이 삼국의 비주류였던 신라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조선의 명맥을 이어받지 못했던 신라 계통의 후손들은 고조선의 역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고조선을 인정할 것인지와 관련해서 고려 시대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 준다. 그러면 양자의 다른 견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학문적 관점을 아니라도 하나의 궁금증을 자아나게 한다.
사회과학이 하나의 학문으로써, 하나의 결과에 원인을 찾는 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다른 결과는 일차원적인 선형관계가 아니라 다차원적인 혼돈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현재나 과거의 인간들의 이야기를 원인과 결과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은 매우 주관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주관적인 특징은 연구자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다. 이는 다른 가치관을 지닌 자의 반론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서로 다른 가치관들의 논쟁에서는 어떤 가치관이 절대적으로 옳은 지를 판단할 수가 없다. 지식의 한계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는 것이 어려운 경우에는 양자를 짬뽕하는 절충적 견해이다. 이는 어는 누구의 편도 들기 어렵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견해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런 견해는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써 취할 견해는 아니라고 본다. 짬뽕 좋아하는 것은 일곱살배기 어린이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3학점 짜리 교양 국사를 듣고 있는 기분이다. 허승일 선생님은 서양의 역사를 모던 역사학과 포스트모던 역사학으로 나누면서 랑케, 토인비, 카, 니체, 뤼젠, 마르크스 등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역사가들을 총출동 시키고 있다. 그들의 견해를 통시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고 있다. 역사는 무엇이고 역사학의 대상은 무엇인지, 역사 발전의 법칙은 어떤가에 대해서 아카데믹하게 서술하고 있다. 단지 서양의 역사학을 서술하고 있다. 다만 동양의 역사학에도 기전체, 편년체 등의 일정한 패러다임이 있음에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서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사변적 역사철학은 역사를 거시적 틀로 바라 보면서 역사의 패턴을 창조하고 미래를 추측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아놀드 토인비처럼 역사를 회전하는 바퀴로 보는 순환론적 역사관, 헤겔이나 마르크스처럼 역사는 직선처럼 발전한다는 진보적 역사관, 역사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한다는 역사관이 있다. 맨 나중의 역사관은 인간은 역사로부터 교훈적이거나 유익한 어떤 것도 배울 수가 없다고 한다.
분석적 역사철학은 역사의 접근방법에 대한 논쟁이다. 이는 역사는 과학이거나 문학, 수사학으로 접근하려는 것이다. 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와 관련하여, 서술적 역사철학은 1980년대, 이른바 포스트모던 시대를 분기점으로 하여 舊서술적 철학과 신서술적 역사철학으로 나뉜다.전자는 '과거 자체'와 '역사가'의 관계가 문제이다. 객관주의자인 랑케는 과거 자체 역사라고 하면서 역사가 자신은 말살시킬 것을 요구한다. 객관주의자인 크로체, 콜링우드는 현재의 아들인 역사가가 과거를 재현하는 연구주체임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Carr는 양자의 형평성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현재와 과거를 아우른다. 이들 모더니즘의 역사가들은 국가 중심의 정치사,유물변증법에 입각한 경제사,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 중심의 역사를 서술하는 아날학파 등이 있다.
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현재 국사학계의 주류인 한영우 선생님의 '다시 찾은 우리 역사'를 기본적으로 한 번 쯤은 읽어 본다. 그의 책은 대한민국의 역사만을 다루고 있고 다른 국사책에 비해서 주관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그는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역사를 매우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 땅의 역사는 300년을 주기로 중흥의 길을 걷는다고 한다. 15세기의 세종, 18세기의 영조와 정조에서 역사발전 법칙을 제시하고 21세기에 다시 한번 중흥을 맞이랗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나이를 먹어 가면서 그의 생각에 공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역사가 오히려 퇴락의 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역사의 뜨거운 감자는 영원히 미해결의 뜨거운 감자로 남을 것이라는 노파심을 갖는다. 그러다가 100년 전의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이런 경우가 실제로 일어난다면, 인간은 기억효과와 학습효과에 의해서 독립운동은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행적의 과거를 취급하는 역사가는 일어난 과거와 과거 자체의 참된 것을 말하여서 후세들에게 교훈을 주고 유익함을 주어야 한다는 자신의 역사관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렇지 못하고 있다.
혼돈의 20세기를 뒤로 하고 21세기에 접어들어 10년이 지났다. 그런데 지난 시대의 혼란의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기를 실패한 대한민국의 역사가 제대로 되기에는 아직까지는 어지럽기만하다. 이제는 그 잘못된 길을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는 끝없는 대화라는 Carr의 말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과거는 과거에 지나지 않는 역사가 지나지 않게 되어 버렸다. 첫 단추가 근사하지 않은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과거의'역사'는 무슨 존재적 의의를 지닐까? 이 문제는 판도라의 상자에 지나지 않을까? 그럼 미래의 역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제대로 된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기에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역사가 되어 가고 있다. 더구나 사람들도 점점 부의 무한대의 탐욕에 관성이 생기고 있다. Auto-Bahn을 무제한의 속도로 달리는 역사가 되고 있다. 자신들이 불을 향해가고 있는 불나방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지 못한다. 단지 미래에 대한 핑크빛 무지개만이 세상에 수를 놓고 있을 뿐이다. 이제 행복한 역사를 추구한다는 것은 숭전히 개인의 문제로 남았다. 국가는 소수의 엘리트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역사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내가 무엇을 해야할 지는 명백해 보인다. 사실에 입각해서 쓰되 창작하지 말고 과거를 말하는 사실을 거울로 삼아 사람들에게 도덕적 훈계로써 생활의 유익함을 주라는 감계주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춘추필법과 사마천의 사기의 기전체의 정신이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시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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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내 인생이 변화되는 계절 이라면, 여름은 내가 무엇가를 경험하고 배우는 계절인듯 하다. 이번에 읽은 책 '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 ' 역사를 좋아하는 내게, 역사는 무엇인고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 가에 대한 개념을 잡혀준 책이라고 말 할 수 있을것 같다.
책을 쭈욱 읽고 나서 블로그에 글을 적기 전에, 이책에 대한 리뷰를 한번 검색해봤는데, 다행히 별로 없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꼈다. 통섭을 먼저 읽었을때랑, 진화심리학을 읽었을때랑, 종교전쟁을 읽었던 그런 느낌이 든다고 할까...
아마도 이런 책이 널리 읽힐 책은 아니겠지만, 내가 봤을때, 분명 값어치가 있는 책이라고 느끼기 때문에 훗날 누군가가 이책을 다시 펼쳐 있을 동기가 될수 있도록 적어 봐야 겠다는 생각한다.
아리스토 텔레스를 서양에 소개했던것은 사실 아베에로스로 불리우는 이슬람 철학자가 아닌가, 책을 적는 사람 못지 않게 그것을 소개 하는사람 도 중요 한것 같다. 뭐 어떤가 이정도의 허세 있는 태도는 ㅋㅋ
저자는 허승일 교수님으로 서울대 교수로 재직중인것 같으며, 이 책 출판사도 서울대 출판부 , 아마도 역사 서적에 대한 학술적인 가치를 직접 출판 하는곳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08년도에 읽었던 '대항해시대' 주경철 교수님 서적도 동일한 출판 부에서 출판해 나온것 같으니 말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 대부분은 역사가 어떤것인지 알고는 있다. 흘러간 과거의 내용들을 수많은 서적과, TV프로그램, 영화, 연극과 같은 문화들을 통해서 재생산되어지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 역시, 과거에 적혀져 있는 이야기들에 역사들로 역사를 정의하고 소비하고 기억해 내고 있을것 같다.
그러나, 그것을 공부하는 학자들이라면 다른것이다. 역사 라는 하나의 단어 안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논의 거리들, 즉 단순히 재생산된 이야기가 아닌 역사 그 자체에 대한 철학과 이론들에 대한 논의에서 오는 역사 라는 무언인가?
이 질문은 의외로 아주 깊은 질문인게 분명 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에 1부에 해당하는 수많은 학자들와 이론가들이 이렇게 많이 자기 주장을 논하지 않았을테니깐 ..
그렇다. 이 책에 1부는 '역사는 무엇인가' 에 대한 것을 다각도의 방면으로 소개 했음을 알수 있다.
1부에 적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사변적 역사 철학 (2) 분석적 역사 철학 (3) 서술적 역사 철학
사변적 역사 철학은 간단히 말해,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는가 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깐. 둥근 원 과 같이 무한 반복되는 순환 적인 역사 인가아니면 역사는 직선 과 같이 진보 하는가 그리고 만약 역사가 진보 한다면 그 목표 방향은 어디인가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순환한다는 관점 도 국가가 순환하는가 문명이 순환하는가 또는 지구나 우주와 같은 거대한 시공간이 순환 되는가 , 아니면 과거에 위대한 시기가 있었는데 그 시대가 지나서 쇠퇴해지고 마는가 식으로 구분될수도 있습니다. 이를 논했던 사람으로는 폴리비오스, 슈펭글러, 그리고 토인비 입니다.
계속 무한 반복된다는 점에서 니체의 영원회귀 라는 생각도 떠오르고, 불교에 윤회라는 관점도 떠오르면서, 문명의 생성과 쇠퇴과 이 지구에서 끊임없이 무한 반복된다는 생각들은 여러가지 대중매체에서 다루었던 재미있는 내용과 일치 합니다.
목표에 따라 역사가 진행된다는 시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종말로써 그것을 준비해야 되는 관점에서의 역사,콩도르세의 진보산과, 헤겔의 관념사관 맑스의 유물 사관으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관점에서는 어떤 방향성에 따라 역사가 진행된다는 관점을 제시 하고 있으며,
이중에서 몇몇 관점들은 실제로도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이런 역사관이 잘못될 경우, 정치적 사회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관점을 외부에 강요하여 불가피한 충돌을 일으킬수도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문명의 충돌과 같은 시각을 제시했던 새뮤얼 헌팅턴이나, 역사의 종말을 노래했던 후쿠야마 같은 이들, 부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자 가 가지고 있는 새천년에 대한 강한 믿음 이 모두, 이런 직선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생길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무한히 반복되는 역사의 패턴 보단, 나선형과 같이 쇠퇴의 시기도 존재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조금씩 어떤 방향을 따라 진보해 나간다는 나선형 진보적 시각을 옹호 하는 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명의 쇠퇴나, 파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성상 소멸로 사그라지게 만들수 있으면서, 그런 과정들을 거쳐, 조금더 나은 세상을 아주 조금씩 만들어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발전하고, 인간은 번영합니다. 다만 그중에서 멸망하고 부숴지고 디폴트 되어 완전히 새롭게 시작되는 상황도 존재 할수 있지만, 기원전 4000년 전보단 지금이 훨씬 더 나아지것처럼 앞으로 1000년이 지나고 나서 지금의 시대 보단 더 나은 세상에 사람들을 살아가고 있을것이라 믿습니다.
분석적 관점은, 역사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에 대한 관점입니다. 역사는 과학인가, 역사는 예술즉, 문학과 같은 수사적인 관점인가에 대한 논의있고 대표적인 학자로는 험펠과 헥스터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과학이라는 거대한 힘이 지금 우리가 처한 세기에 강한 기준이 되는것처럼, 과학 적이고 합리적인 방법론을 통해 역사를 돌아 봐야 한다는 관점은 신뢰감과 보편성을 무기로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예술적인 관점에서의 역사라고 한다면 진실을 말하기 위해 설명에 감정을 불어 넣어 독자로 하여금 즐거움 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물론 후에 나오겠지만, 이 두가지 관점 모두 랑케에 빚을 지고 있으면, 2부에서 저자가 주장할 내용이지만, 이 두가지 요소는 역사 를 생각한다면 모두 고려해야 할 요소로 주장합니다. 역사는 수사학이자 과학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마지막으로 현재 크게 위협 받고 있으면서도 역사학이라는 세계를 넓히고 그것을 읽는 사람들의 사고 폭을 넓히는 역사와 역사가에 대한 관점에 질문을 던지는 서술적인 관점에서의 역사 철학입니다.
모던적 역사 철학이나, 포스트 모던의 역사 철학, 어디에 비중을 두는가. 등으로 치열하게 논의되는 내용들을 이곳에 포함되어 있었고 이렇게 많은 역사학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만날볼수 있는 좋은 시기였습니다.
아마도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과학적인 역사로의 '랑케' 관점 , 유명한, 자아를 소거 하여 역사가는 오직 객관적인 사실로써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딜타이, 리케르트, 크로체,콜링우드, 지금도 역사 하면서 386분들 강하게 추천하는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까지 ... 사실 이들의 주장하는 내용을 이해 하기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근본 관점이 밑바닥이기 때문에, 일일히 대조하면서 정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이들이 치열하게 머리 끄덩이 잡고 싸운것은, 역사 의 주체나, 비중을 두는것은 역사 라는 '사실' , '역사가' 라는 인물인가 차이라고 볼수 있으며, 교묘히 사실과 역사가의 위치를 적당히 조절하여 ,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며, 자기 자랑질을 한 EH 카 관점으로 나눠어 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EH 카와 다른 방향을 제시한 가디머의 관점을 소개해 줍니다.
이어, 역사를 어떤 관점으로 서술해야 된다는 점에서, 역시 정치사적으로 랑케를 시작으로 맑스, 전체적인 관점으로 역사를 봐야 한다고 본 아날 학파, 보벨이 이야기한 심성사, 밑으로 부터의 역사를 이야기 한 노동자들의 역사를 좌파들과는 다른관점으로 본 영국 학자 '홉스본' 까지...
그리고 포스트 모던학자들을 이야기 하면서, 젠킨스 나 헤이든 화이트 등 을 통해 새롭게 떠오르는 관점으로써 역사를 바라보게 하고, 에번스의 글로써 마무리 짓습니다.
포스트 모던의 관점으로 새롭게 바라보게 된 미시사,심성사,일상사 의 부분이 역사학의 연구 지평을 넓히것은 부인할수 없지만, 그 관점 역시 역사학의 한 방법론에 따른 비판적 계승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까지는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들의 소개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공이 역사학이자, 철학 이었다면야 더 깊이 들어가서 각 세부적인 학자들의 관점을 이해 하고 논할수 있겠지만, 쌩판 모르는 사람이 치열한 학문적 논의를 따라가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역사가 가지고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 해준다는 점에서 1장이 보여진 백과사전과 같은 분류와 정리는, 역사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에게 아주 좋은 서적이라고 될수 있다고 봅니다.
이어 2부는, 실제 저작가 하고 싶은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학술서적이라는 느낌이 듬뿍 드는 책으로, 그 논의를 따라 가기 위해선, 역시 헤르도토스 나 투키디데스 와 같은 그리스 역사학의 아버지에서 부터 거대 희랍 철학 에 대한 앎이 전제로 되어야 하며, 이어 랑케를 통해 나온 역사의 관점을 분류해서 설명하여, 과학으로써 역사, 예술로써의 역사중, 예술로써의 역사를 이야기 했던 랑케의 위치를 재정립하고 포스트 모던의 역사를 이끌어 낸, 니체를 다시 무덤에서 불러와, 그 역시 랑케의 관점을 통해 역사를 보았다는 증명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나온 역사학의 논리적 증명은 뤼젠을 통해서, 모던 역사학의 반격을 부르짓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부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를 시도 했다면, 2부는 책의 제목과 동등하게,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 에 대한 모던 역사학자가 포스트 모던역사학에 내미는 논박서적이라고 이야기 할수 있겠습니다.
그러기에, 1부 보단 더 지독한 2부를 따라 가다 보면 머리가 욱씬 거리며, 난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자아 정체성의 혼란이 도래 할지도 모르지만 엉덩이 무겁게 읽다 보면, 그럼에도 불구 하고 현재 모던의 역사학, 그러니깐 사실로써의 역사가 가지는 흔들리지 않는 가치를 논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한권의 서적으로 얻을수 있는것 꽤 많습니다.
첫번째가. 역사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에 대한 답이고 두번째가, 역사는 누가 주체가 되는가, 정보난 증거론 제시한 문서들인가, 그것을 발굴하는 역사가 인가 , 그리고 어떤 것을 관점으로 쓰여져야 하는가? 왜써야 하는가? 누구를위해 써야 하는가? 에 따른, 역사를 보는 다양한 관점을 이해 할 수 있으면 마지막으로 현대 모던 역사학과 포스트모던 역사로 불리우는 역사의 관점에서, 현대 모던 역사학의 논박하는 내용이 담긴 긴 증명 에 대한 내용을 얻고 갈수 있습니다.
읽으면서 랑케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맘에 들었고, 젠킨스가 생각했던 역사는 누구를 윈한것인가? 에 대한 질문도 다가 왔으며, 스쳐만 지나갔던 홉스본, 랑케, 카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 졌고, 맹목적으로 'EH 카' 의 역사관만 되풀이 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역사 관점을 제시 해주어, 제목과 어울리는 내용이 담겨진 좋은 책을 읽게 되어 기뻤습니다.
물론.. 읽는이의 능력이 함량 미달이라는게 문제지만, 상관 없겠지요. 지식의 소비자는 생산자들이 만들어 놓은 맛있는 지식들을 낼름 낼름 맛있게 먹은면 되니깐요..
역사란 무엇인가. 내가 정리한 역사는 '과거의 기억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세가지 모두에서 진실된 정보로써 과거가 중요 하지만, 그것을 필요에 의해 해석하는것은 현실이며, 그렇게 해석된 수많은 것들로 인해 미래를 대비한다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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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 일부 극단적인 포스트모던 역사 이론가들은 랑케에 대해 돈키혼테식으로 공격을 한 셈이었다. 왜냐하면 랑케는 분명 역사는 과학인 동시에 예술이라고 천명하면서, 역사를 쓸 때는 사건에 대한 독자의 역사적 상상력을 이끌어내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 모던 역사학의 아버지인 랑케의 사론과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니체의 사론을 냉정하게 비교 검토해 보면, 양자는 차이점 보다는 오히려 공통점이 더 많다. … 5쪽 랑케는 왜 역사가는 자기 자신을 말살하고 과거가 본래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를 오직 역사적 사실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종교적인 면으로서, 그가 독실하고 경건한 루터파 신자였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로 랑케가 가지고 있는 개별관, 발전관, 보편관과 같은 철학적인 면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다음으로 그는 각 역사적 시대 모두가 독자적인 성경과 의의를 지니며 그 자체로서 완결되어 있다고 봄으로써 역사를 하나의 중단없는 직선적 과정이라고 보아 온 종류의 콩도르세류의 계몽주의적 진보관과 낮은 단계에서 보다 높은 단계로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 헤겔의 역사관을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 그렇지만 랑케는 역사가가 오직 신의 계시 또는 신의 발자취인 역사적 사실들을 마치 신성문자를 해독하듯이 정확하게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예술적으로 재창작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71-74쪽 랑케는 분명 역사는 과학인 동시에 예술이고 강조해서 말했건만, 후세의 대부분 역사가들에 의해 예술로서의 역사 부문인 반쪽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오로지 역사는 과학이라는 부문만 전면에 내세우는 어리석음이 전해졌다. … 카는 아주 교묘한 수사학의 트릭을 써서 어찌보면 초기의 니체보다도 더 랑케 사론을 크게 왜곡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랑케를 과거의 대명사로, 딜타이, 크로체, 콜링우드를 현재의 강조자로 확연히 양분하고 과거만을 중시하는 랑케나 현재만을 강조하는 헤겔 계열의 신관념주의자들 모두 다 잘못이라고 질타한다. 그리고 나서 마치 경천동지의 새로운 주장이나 하는 것처럼 과거와 현재를 평등 관계로 놓고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아주 그럴듯한 수사 기법을 씀으로써 독자들을 매료시키고 속인다. 이것은 카가 처음에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말했다가 중간 단계에서는 과거사회와 현재 사회와의 대화로 둔갑시키더니 종말에는 과거사회와 미래사회와의 대화라고 한 데서 그 가증스러움은 여실히 드러난다. 서양 고대의 정통 사론을 거의 그대로 계승하여 받아들였던 랑케야말로 정작 역사는 미래를 겨냥하여 써야 한다고 시종일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랑케의 사론은 단지 루키아노스의 시론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 랑케는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과 역사는 다 같이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이 역시 소크라테스와 투키디데스의 전통을 이어받아 진실을 강조하는 루키아노스를 모방한 것이다. … 마지막으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부문은 랑케나 루키아노스 양자가 모두 역사는 과학이며 동시에 예술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루키아노스는 역사가를 조각가에 비유한다. … 조각가처럼 역사가도 과거의 진실을 마치 거울에서 보는 것처럼 재주껏 기술을 발휘하여 생생하게 나타내야 한다고 루키아노스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진실에 즐거움을 더하는 다른 아름다운 표현 수단 중 한 가지가 시라고 하면서, 루키아노스는 역사가를 시인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는 특히 전투 대형과 지상이나 바다에서 벌어지는 전투 장면을 묘사할 때는 가급적 최대로 시적인 맛을 풍겨야 한다고 아주 강조한다. 그러나 그는 추호도 진실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전제 하에 시의 경지로 몰입해서는 안 된다는 결연한 의사 표시를 하고 있지만 말이다. 189-200쪽 랑케의 사론이 바로 30세를 갓 넘긴 니체에게 역사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한 것이었고, 포스트모던 시대에 메타히스토리로 유명하게 된 헤이든 화이트가 랑케의 역사를 문학이라고 규정하게 된 근원은ㄹ 이루고 있는 것이다. … 이거스의 언급대로 니체가 포스트모던 사론의 원조로 생각될 만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 발상이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학파, 정확히 말해 플라톤 이전의 소피스트들, 그중에서도 특히 고르기아스의 사고와 그 방식을 거의 그대로 수용, 번안각색해 포스트모던 역사 이론가들에게 전해 준 것뿐이다. 말하자면 포스트모던 사론의 원조는 고르기아스이고, 니체는 단지 양자 간의 중개자라 해야 더 정확하다. … 니체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문화의 중심 인물들을 소피스트들이라고 극찬학 h나서, 그들이 바로 자신의 선구자, 동업자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이것이 니체가 포스트모던 사론의 원조이기보다는 오히려 소피스트들의 사상의 중개자였다는 발상의 근원이다. … 역사가 픽타(허구)를 다루는 문학, 철학, 문화 시학, 예술이라는 소위 포스트모던 사론 및 역사의 원조는 고르기아스였다. 그렇다면 니체는 알게 모르게 포스트모더니스트의 고르기아스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느끼도록 다만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말하자면 양자의 중개자였다는 것이 더 올바른 평가가 아니겠는가. 227-26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