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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근사하다. 읽고 싶은 생각이 확 들게 만드는 제목이다. 제목 선정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생객해 본다. 그리고 표지 이미지도 이색적이다. 꼭 무슨 전쟁을 소재로 다룬 책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언덕 위에 2 마리의 말을 탄 2 명의 전사, 그리고 왼쪽 위에 검독수리 한 마리가 그러한 인상을 가지게 만든다. 그러나 읽어 나가면 그 인상이 너무나 오해였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그리고 간결체로 된 문체, 부제의 제시, 삽화의 나열로 쉽게 읽혀 나가게 만드는 책이다 어린 아이의 성장 과정을 그려서 그런지 그리 어렵거나 심각한 내용이 없다. 하지만 내용은 우리들에게 의미있게 다가온다.
책은 한 소녀(이름이 갈샨)가 도시의 아파트에 살다가 양 때를 기르는 할아버지의 차궁(유목민들의 이동식 마을)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153일 동안 겪는 일이 주된 이야기다. 처음에는 할아버지(이름이 바이타르)의 그 차궁에 가는 것을 소녀가 무척 싫어한다. 그러나 소녀의 집에서 소녀의 동생이 태어나게 될 상황이고, 소녀를 돌봐줄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소녀의 아버지(이름이 리함)는 할아버지가 사는 차궁에 소녀를 보내놓기를 원한다. 그런 연유로 소녀는 할아버지와 있는 것을 너무 싫어하면서도 그곳으로 가게 되고, 그를 태워온 우랄(큰 자동차, 소녀의 아버지가 몰고 있다)이 소녀가 자는 틈에 돌아가 버린다. 그렇게 되어 할바버지와 손녀 둘이 한 공간에서 살게 된다. 이 책은 그 둘이 한 공간에 153일 살면서 이루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야기는 몽골의 대초원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바이타르는 갈샨에게 말 타는 법부터 가르친다. 갈샨은 리함으로부터 말 타는 법을 알고 있었지만 바이타르에게 한 필의 말을 자신의 말(말 이름은 제무쇠)로 배당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말을 익숙하게 탈 것을 요구받게 된다. “저기 가면 마구가 있다. 이 말을 타라. 말이 너한테 익숙해 지도록 만들어. 말을 걸고, 네 냄새를 맡게 해라. 너를 기억하게 해. 그놈을 타는 것이 걷는 것만큼 익숙해져야 한다.” 바이타르가 갈샨에게 말을 주면서 한 말이다.
바이타르는 갈샨에게 몽골 초원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은연중에 가르친다. 갈샨은 어떻게 바람에 맞서고, 어떻게 양 때들을 돌보고, 어떻게 식사를 하고 어떻게 사냥을 하는가 등을 배워나가게 된다. 광야에서 양 때를 기르는 미친 늙은이, 검독수리를 길들이고 검독수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날 수 있는 늙은이, 양 때들의 병을 단번에 알아내고, 양 때를 지키기 위해서 무서운 짐승과도 맞서는 늙은이 바이타르와 함께 하면서 갈샨도 차츰 초원의 삶에 익숙해져 간다. 말달리기에서 바이타르를 눌러 주겠다는 오기를 부리게 되기도 하고, 말의 물을 먹이기 위해 먼 곳까지 혼자 갈 수 있게도 된다. 그러면서 검독수리를 날리는 바이타르의 모습을 보게 된다. 바이타르는 검독수리(이름은 크하르 어르신)를 길러 그의 눈으로 초원을 보고 그의 눈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갈샨은 경외의 눈으로 그것을 보게 된다.
결국 갈샨도 검독수리(이름이 쿠다야 어르신) 한 마리를 바이타르를 통해서 부여받아 기르게 된다. 그리고 부리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독수리로 만들며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 나가기 시작한다. 더 넓은 초원을 보고, 멀리 있는 사냥감도 보며, 양 때들에게 위험한 것들도 보아나간다. 바람의 움직임도 보고, 일기의 흐름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여남은 소녀는 성장을 해나가게 된다. 그러면서도 집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게 되고,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삶을 힘들어하면서 날짜를 하나하나 헤아려 간다. 그것이 지나쳐 하루를 오랜 시간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던 중 책을 읽을 줄 모르는 바이타르를 위하여 갈샨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어 주게 되고, 차츰 둘 사이의 거리감이 좁아져 간다. 날을 한겨울로 접어들고 학교에 보내지 않는 갈샨 때문에 힐방 쭈과아(그 지역의 교육 감독관)가 찾아와 학교에 보내라고 반강제적으로 바이타르에게 말한다. 다음에 올 때는 강제적인 처리를 하겠다고 경고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이타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겨울에 다부카르 쭈트(죽음의 흰가루라 불리는 눈보라, 폭풍)가 다가올 것을 알고, 겨울 동안은 힐방 쭈과아가 다시는 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지역에 쭈트가 찾아온다. 엄청난 기세로 쭈트는 온 세상을 휘저어 놓고, 사방을 초토화 시켰다. 이 시기 동안 갈샨은 바다와 노인을 읽어주면서 할아버지와 어려움을 나누어 나간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난로를 피워도 추위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러한 게르(유목민들의 집)안에서 죽음의 고통을 이어 나간다. “우리가 사는 땅은 두 발로 선 사람만이 살아남는 땅이다. 엉덩이를 땅에 붙이면 죽게 돼.” 바이타르가 할머니의 죽음을 회상하면서 갈샨에게 하는 말이다. 그런 가운데 쭈트는 지나갔지만 온 땅이 얼어붙어 먹을 것도 구할 수 없는 세상이 된다. 이럴 때 검독수리의 도움으로 사냥을 하면서 간신히 연명해나가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바이타르는 많은 양 때를 잃어버리게 된다. 남은 양 때들을 그곳에 사는 늑대들이 또 노리게 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바이타르는 양 때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생명을 내어놓고 짐승들과 싸우면서 그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한다. 그러는 가운데 상처를 얻고, 갈샨이 죽음 직전에 놓인 그를 구하게 된다. 그리고 간호를 하면서 식량까지 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갈샨은 그의 검독수리 쿠다야 어르신의 도움을 받아 생계를 유지해 나가면서 바이타르를 간호하게 된다. 시간은 흘러 바이타르가 건강을 회복해 나가게 되고, 계절도 봄으로 다가가게 된다. 이제 갈샨이 그곳을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사실 갈샨은 초원의 생활을 쭈트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힘들어하면서 날짜를 헤아려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쭈트로 인해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그것을 잊어 버렸다. 날짜 계산도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게 되었다. 그만큼 성장한 것이다. 나중에 집에 돌아갔을 때, 친구들의 놀이를 하자고 부른다. 그는 거절한다. 친구들의 놀이가 아무른 감흥을 그에게 주지 못한 것이다.
이 책은 한 아이가 어떻게 참된 삶의 지식을 소유하게 되는가를 그려나가는 성장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책과 책상에만 배움이 있다라고 생각하는 일부의 교육자들에게 참으로 의미있는 생각거리를 제공하는 책이 아닌가 한다. 삶과 죽음의 문턱을 지나치면서 생생하게 체험한 지식, 그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책을 읽으면서 십여 세의 소녀가 궁구하고 보아나간 것을 우리도 감동으로 바라볼 수 있고, 간접체험으로 느낄 수가 있다. 대초원의 웅대한 자연을 경외감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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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겨울 풍경과 유목 전통, 소녀의 성장담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주위의 아는 어린 친구들에게 다 권하고 싶다. 몽골 유목민의 생활과 조드에 대해 알고 싶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는데, 다 읽을 때까지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몰입했다. 그래서 재무쇠란 말을 타고 계곡의 샘까지 질주하는 장면에서는 내 심장 또한 터질듯 방망이질쳤고, 조드 눈보라를 맞는 장면에서는 내 얼굴에 얼음이 끼는 듯했다. 검독수리의 위치에서 초원을 조감해 보는 장면에서는 내 눈이 다 어질어질했으며, 마지막으로 독수리가 소녀의 맨살을 드러낸 팔에 앉았다가 날아오르는 대목에서는 내 팔뚝이 다 아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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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 지났지만 아직도 차가운 바람이 칼날 되어 살을 에는 시린 겨울의 잔상이 남아 행동에 불편함이 따른다. 그래서인지 여느 해와는 달리 혹한을 힘겹게 보내며 따스한 봄날을 고대하고 남단의 매화 꽃소식이 반기며 지내는 이들이 많은 지도 모를 일이다. 움츠려 들었던 마음을 쫙 펴고 생기를 찾아 활발히 움직이는 봄은 새로운 희망의 전령사이다. 드넓은 산악 지대에 말을 탄 두 사람이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며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 그려진 표지는 또 다른 호기심을 자극하며 책 속으로 빠져들게 하였다. 153일의 겨울을 읽는 내내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생존하기 위해 힘쓰며 지냈던 시간들이 엄숙함을 더한다. 뜻하지 않은 일로 사랑하던 부모 슬하를 떠나 갈샨이 미친 늙은이로 치부하던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여린 소녀가 생활 속에 점점 단련되어 가는 과정을 조명하고 있다. 손녀가 적대감으로 대했던 할아버지의 삶을 오롯이 받아들이며 유대감을 형성하기까지의 감정의 파고를 지켜보는 것도 더 큰 울림을 준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돌연한 일로 외로움과 싸움을 벌이며 마음 속 빗장을 지른 채 바스락거리며 윤기 없는 생활을 이어갈 때가 있다. 어떤 예고도 없이 엄습한 불행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쉽게 헤어날 수 없는 시련으로 몰아넣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던 노인들이 지혜롭게 난관을 헤쳐 나갈 열쇠를 쥐어 줄 때가 많았다. 어찌 보면 교과서적인 지식보다는 삶의 이력에 녹아든 지혜가 막힌 물길을 열어 줄 때가 더 많음을 차차 알게 된다. 바이타르가 갈샨에게 ‘검독수리’ 부리는 법을 가르치며 차궁에서 살아남는 법을 손녀 스스로 터득해 나갈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갈샨이 수족처럼 부리며 살아야 할 재무쇠를 다루며 양떼를 돌보는 일을 돕는 과정은 목자의 길을 잇는 통과의례로 비춰졌다. 바이타르는 손녀 갈샨을 가족의 울타리로 영입하여 자신의 목숨이 다하더라도 가업을 이어갈 후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갈샨이 부모 곁을 떠나 온 날을 일기장에 기록하며 153일을 채워나가는 과정은 그리움을 상쇄하며 소통하는 법을 배워 나간다. 야생의 검독수리 쿠다야를 길들이고 하늘로 비상하는 독수리에게 어머니 소식을 묻기도 했다. 다알라 역시 딸을 그리워하며 하늘 위를 나는 독수리를 보면서 그리움을 띄워 보낼 수 있었다며 회고하였다. 척박한 산악지대에서 초원을 찾아 이동하며 게르를 짓고 생활하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그동안의 경험에서 나온 예지로 내일을 대비하며 오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삶의 진정성을 가늠케 한다. 할아버지 바이타르는 한평생 말과 양떼를 돌보는 일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고 불평이나 푸념을 삼가는 대신 동물들을 보호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악천후 연속인 상황에서 고독을 견디며 자신의 입지를 지켜나가는 일이 녹록치 않음을 절감한다. 혹독한 추위와 맹수의 위협 아래서도 좌절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맞서는 대목은 죽을지언정 패배할 수는 없다는 메시지를 넌지시 일러 주는 듯하다. 죽음처럼 몰아치는 눈 폭풍과 늑대의 공격으로 돌보던 양 떼를 잃고, 얼마 남지 않은 양 떼를 지키기 위해 짐승과 사투를 벌이는 대목은 갈샨이 문맹인 할아버지를 위해 읽어 준 노인과 바다 속 노인을 연상케 한다. 산티아고 노인이 필사적으로 상어 떼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고 했던 것처럼 바이타르는 늑대의 습격으로부터 양떼를 지켜내려고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 것이다.
연약한 생명의 죽음으로 살아간다는 바이타르의 말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 역시 먹이사슬의 순환 속에 놓여 있다. 혹독한 추위와 맹수의 습격에 맞서 싸우느라 지쳐 착란 증상을 보이는 할아버지를 위해 손녀 갈샨은 정성을 다한다. 무엇보다 고도의 정신력으로 쓰러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며 동토가 녹아내릴 때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힘겹게 버텨나갔다. 갈샨은 검독수리와 함께 꿈꾸는 동안만 유일하게 추위와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쿠다야가 꿩을 사냥해 갈샨을 주는 대목은 생명체와의 연대를 더하는 것처럼 비춰진다.
걸림돌이 많은 척박한 황무지에 가까운 산악지대에서 생명체를 기르며 살아가는 일은 녹록치 않은 일이다. 재무쇠의 얼굴에 매달린 고드름이 물방울 되어 흘러내릴 때 갈샨은 짧은 이별 긴 만남의 시간 속으로 여정을 떠났다. 할아버지가 건강을 회복한 것처럼 갈샨은 그토록 바라던 부모를 만나 기쁨을 나누었고, 갓 태어난 여동생을 만나 새로운 가족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자연 재해로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남은 양들을 돌보기 위해 다시 차궁으로 발길을 돌리며 자신이 걸었던 길을 의연히 걸어가려 했다. 아타스 바이타르는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온갖 위험과 고초를 극복하며 살아가는 노익장의 면모를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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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일의 겨울! 초등 고학년 이상의 남아나 여아 구분없이 읽기에 매우 적당한 성장소설이다.
내용은 우리 영화 '집으로'를 연상하게 한다. 엄마의 출산 때문에 초원에 혼자사는 유목민 할아버지에게 153일 동안 맡겨진 갈샨. 아이는 할아버지(바이타르)를 '미친 늙은이'라 생각하지만, 바이타르는 손녀에게 양떼를 돌보는 법 등 자연과 순화되어 살아가는 법을 전수한다. 갈샨에게 재무쇠를 주고 능숙히 타도록 유도하여 계곡의 샘까지 달리는 장면이나, 손녀에게 검독수리(쿠다야 어르신)를 길들이도록 도와주는 대목에선 할아버지의 무한한 따스함과 저 먼 세월 징기스칸 후예들의 기상이 저절로 느껴진다. 겨울이 오고 견딜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서는 혹독한 눈보라에 더해지는 늑대의 출현은 절망과 위기에서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나무 늑대'! 삭사울 가지로 만든 이것은 바람에 반응하여 늑대울음같은 거칠고 음산한 소리를 내어 늑대를 불러들인다. 양 떼를 늑대에 잃은 할아버지는 이를 이용하여 늑대무리를 처치하려하지만 오히려 늑대에게 당하고 만다. 할아버지를 찾아나선 갈샨은 늑대와 마주치고 위기의 순간 검독수리 쿠다야가 하늘에서 나타나 늑대를 물리친다.
눈이 녹아 길이 열리자 아버지와 함께 다시 집으로 돌아온 갈샨은 사랑하는 어머니 품에 안기고 동생을 품에 안아본다. 길에는 친구들이 놀고 있지만 이제 친구들과 어울리기엔 이미 자연의 일부분이 되어 훌쩍 커버린 갈샨이다. 초원에 남아있는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 하늘에서 쿠다야가 날아와 팔에 앉았다가 다시 날아오른다. 엄마 다알라가 중얼거린다. "매일 밤 꿈에 저 검독수리가 찾아와서 네 소식을 전해주었어.(175쪽)"...
저자는 몽골의 초원 위에서 펼쳐지는 노인과 소녀의 휴먼다큐같은 스토리를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와 연결시켜 플롯을 풀어가고 있다. 평원과 바다, 그 무한한 삶의 공간에서 자연이 주는 역경을 이겨내는 인간 정신의 의지 등등 곳곳에서 얼개의 역할을 한다.
청어람주니어가 친환경 콩기름 잉크를 사용하여 인쇄한 이 책에서 번역자는 가능한 우릿말을 많이 쓸려고 노력한 바가 엿보인다. 산아제한 시절 "잘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부럽다"는 말들을 많이 했다. 그때는 우스개 같았지만 저출산 시대에는 딸하나 키우는 집도 많다. 여아에게 호연지기를 느끼게하는 읽을거리일 뿐만 아니라 남아에게도 용맹과 모험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책임을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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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우리와 다른 세대(그것이 위든 아래든)의 생각이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예전에는 그 세대차이란 것도 어느 정도 두터운 층이 있었기에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을 겪었다면, 요즘은 그런 것마저도 없어 ‘단절’을 경험하기 십상이다. ‘153일의 겨울’은 그런 점에서 여러 가지로 생각꺼리가 많은 소설이다.
갈샨은 몽골의 이콰투루우라는 도시에서 살고 있는 소녀다. 몽골하면 징기스칸과 대제국이 떠오르지만, 지금의 몽골은 심각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뒤늦게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여러 부작용도 함께 겪고 있는 중이다. 몽골에서도 갈샨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는 전통의상을 차려 입고 서양 사람들과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받는 ‘사진낚시’를 하는 아이보라와 같은 아이도 있고, 그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만 어쩔 방법이 없는 갈샨과 같은 아이도 있다. 갈샨의 아빠인 리함은 48톤짜리 트럭인 ‘우랄’을 운전한다. 이콰투루우 아이들에게는 리함의 ‘우랄’은 굉장한 볼거리이자 놀거리이다. 그런가하면 갈샨의 할아버지가 사는 시골은 도시인 이콰투루우와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이 존재하는 곳이다. 대외적인 몽골의 변화는 몽골 사람들의 삶도 여러모로 바꿔놓았다.
비단 몽골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서양의 문물과 제도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상대적으로 도시가 그러한 변화를 일찍 겪기 마련인데, 그러다보니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은 무시되기 마련이고, 전통적인 삶은 낡고 고루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 소설은 도시에서 살던 갈샨이 엄마의 임신으로 인해 시골에서 153일간의 겨울을 시골에서 할아버지인 바이타르와 함께 지내면서 겪은 일들이다. 바이타르와 리함, 그리고 갈샨은 각기 다른 세대를 대표한다. 바이타르는 전통적인 삶을 살아왔고, 남들이 뭐라 하든 여전히 그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리함은 전통과 현대의 경계에서 윗세대와의 갈등을 겪고 있지만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가하면 갈샨은 바이타르의 삶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미친 늙은이’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동생을 무사히 낳을 수 있도록 요양을 해야 해서 갈샨은 바이타르와 153일간의 겨울을 보내게 된다. 바이타르는 갈샨이 태어났을 때 가족의 미래를 짊어져야 할 첫 손주가 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그러나, 갈샨과 바이타르가 처음 만났을 때 “너로구나, 네가 갈샨이로구나. 내 손녀딸...”(p.31)이라고 말하는 바이타르의 말에서는 애정이 느껴졌다.
바이타르와 갈샨은, 마치 기름과 물 같은 존재처럼 살아왔지만, 이 겨울을 함께 보내면서 점차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그런 변화가 생긴 것은 바이타르가 갈샨에게 ‘검독수리’를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다. 바이타르가 갈샨에게 남자에게만 가르친다는 ‘검독수리’를 가르쳤다는 것은 갈샨을 자신의 가족의 미래를 짊어질 손주로 인정을 했다는 뜻일 것이다. 야생의 ‘검독수리’가 갈샨과 하나가 되는 과정은 인간이 야생의 생물을 길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그와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매사냥’과도 같은데 그 과정도 거의 동일하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방법이다. 바이타르는 ‘검독수리’뿐만 아니라 하늘의 바람과 땅의 마멋과 생쥐들, 그리고 눈송이 하나까지도 허투루 보지 않고 날씨를 예측한다. 슈퍼컴퓨터도 날씨를 제대로 예측해내지 못해 엉터리 기상예보를 하기 일쑤인 최근의 일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바이타르와 갈샨이 북쪽의 무서운 바람인 쭈트와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는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노인과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바이타르와 갈샨이 대결을 벌이고 있는 쭈트는 자연현상인 혹독한 추위만을 이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몸으로 체득하고 느껴야 하는 것들을 무시하고, 글이나 배우고 숫자나 배워야한다는 교육 제도와, 말이나 양을 키우고 그들을 보살피며 하나가 되어 가는 삶을 하찮게 보는 도시의 문명과 기계적 삶과 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 번 읽고 또 읽어도 좋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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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일의 겨울’ – 독특한 제목과 독특한 이름의 주인공. 물론 그들의 나라에서는 독특한 이름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굉장히 생소한 이름들이었기에 좀더 흥미가 갔다. 아직 너무 어려서 정말 소녀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 어린 여자아이와 그녀가 ‘미친 늙은이’라고 부르는 한 노인의 짧다면 짧을지도 모를 153일간의 동거. 그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갈샨의 어머니인 다알라가 둘째를 낳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갈샨을 할아버지에게로 보내기로 결심하게 된다. 몸이 무척이나 약한 어머니를 이모가 돌보도록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여러 번이나 유산을 경험한 뒤라서 그 결정을 나무랄 수도 없는 상황… 하지만 갈샨은 자신도 모르게 ‘미친 늙은이’라는 말을 뱉어내어 아버지 리함에게 얻어맞을뻔할 정도로 너무나도 싫은 상황이었던 것 같다. 그만큼이나 서로를 이해할 시간조차도 없이 단절된 생활을 해왔던 것이리라. 전통적인 삶을 고수하며 황야에서 살아가고 있는 갈샨의 할아버지 바이타르는 검독수리를 길들여 그의 눈으로 보고 또한 그와 함께 날 수 있는 노인이었다. 그러한 그에게 있어서 영어선생이었던 갈샨의 어머니와 갈샨은 눈에 차지 않는 존재들이다. 양을 돌볼줄도 모르고 말을 잘 탈줄도 모르는 ‘쓸모없는 존재들’ 인 것… 그러한 할아버지와 153일간이나 같이 살아야만 하는 갈샨은 눈앞이 막막하다. 하지만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바이타르 또한 그랬을 듯 싶다. 이 책은 현재와 전통의 단절과 세대의 단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현재로 대표되는 주인공 갈샨은 아버지가 영어선생을 하는 어머니와 결혼해서 트럭 운전수로서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기에 전통적인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는 소녀이고 전통으로 대표되는 그녀의 할아버지 바이타르는 그 전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인간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만남에서 트러블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 두 사람은 서로에게 원하지는 않았었지만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얻게 된다. 그 무언가를 얻게 되는 그 과정을 이 책은 투명하고 간결한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의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많은 옛것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요즈음… 갈샨이 그 황야에서 얻었던 것들을 바라보고 또다시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하는 것들을 바라보며 가슴이 아픈 것은 나만은 아닐 것 같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편리함을 얻는 대신에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물론 그것 뿐만이 아니라 전통만을 고집하던 할아버지 바이타르가 온전하게 자신의 손녀 갈샨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도 볼 수 있다. 사거리의 거북이 시리즈 중에서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게 된 책이다. 첫번째는 거북이 장가보내기… 이 두 책은 가끔씩 꺼내서 읽으면서 내용들 되새겨도 좋을 그런 책들로 나중에 우리 공주님이 꼭 읽어줬으면…하고 바라면서 소중하게 책장에 모셔놓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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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문득 이 아이가 정말 여자 아이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말 이 모든 것을 견디고 이겨낸 아이가 여자아이였다면 그 춥고 외로운 몽골의 땅에서 어떻게 견디어 냈을까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아무리 집이 좁더라도 이 어린 여자아이를 그 험한 산 속으로 보내어야 하는 부모는 어떤 마음으로 그 결정을 내린 것일까라는 것이다. 이 책의 처음 몇 장을 읽으면서 도무지 이 여자 아이의 부모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기까지 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그 환경을 너무도 잘 알면서 그곳으로 꼭 보내려는, 그리고 아이에게 잘 지낼 것이라는 아침 인사도 없이 아이가 자는 동안 할아버지에게 맡기고 그렇게 훌쩍 떠날 수 있는 것인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여자 아이는 속으로만 마음을 삼킬 뿐이다. 아이가 이렇게 속이 깊으니 그 험한 몽골의 산으로 갈 수 있었으리라. 이 아이는 어쩌면 갈샨의 고집스런 삶을 닮았을지도 모른다. 혼자 몽골의 척박함을 이겨내고 있는 할아버지에게 갈샨은 손녀가 아니라 자신을 닮은 또 다른 자신을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통의 여자 아이들이라면 견디어내기도 힘들었을텐데 갈샨은 신기하게도 어려운 고비마다 지혜를 찾기도 하고 이겨내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좀 더 자라게 된다. 몽골! 참 거친 곳이다. 이 글 속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갈샨과 할아버지는 험한 삶을 산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이지만 보이는 것과 불편한 것과 힘든 것만 있는 것만 아닌가보다. 절대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는 갈샨의 할아버지의 고집과 자신의 평범한 집으로 돌아온 갈샨의 모습을 보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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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하면 가까운 듯하면서도 먼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좀처럼 많은 사람들이 가 보지도 않았고, 문명이 발달하지도 않은 추운 느낌의 지역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게르', '양' '초원' 이 정도의 상식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153일의 겨울'은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감동깊은 소설이다.
이 책의 저자는 프랑스 파리 출신의 '자비에 로랑 쁘띠'이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미지의 세계,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삶을 상상했단다. 우리가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우리와 멀리 떨어져 거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즐겨 만들어 내곤 했는데, 그것은 독서란 가장 아름다운 여행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 역시 우리들이 상상으로 만 꿈꾸었던 곳의 이야기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이콰투루우'에 살고 있는 갈샨은 엄마 다알라가 몇 번의 유산끝에 임신한 아이를 무사히 출산할 수 있도록 수천 킬로 떨어진 할아버지가 계신 '차궁'으로 떠나게 된다. '이콰투루우'가 아파트도 있고, 개발이 한창인 곳이라면 '차궁'은 넓은 초원위에 게르만이 우뚝 솟아 있는 오지인 것이다. 그곳에는 20여개의 게르가 있었지만, 지금은 할아버지인 바이타르의 게르만이 있는 곳이다. 문명의 발달에 눈을 돌리지 않고, 넓은 광야에서 양떼를 키우면서 검독수리를 길들이면서 고집스럽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고독한 늙은이이다. 갈샨은 그동안 할아버지를 몇 번 보지도 않았으며, '차궁'에 가서 153일동안 살아야 한다는 것이 못내 마땅치 않아서 안가겠다고 발버둥을 치지만 허사이다. 갈샨은 바이타르에 대해 '나는 당신이 싫어 미친 늙은이 같으니라고!'(p35) 라고 거침없이 외칠 정도로 정이 안 가는 할아버지이다. 언덕위에서 보이는 것은 풀, 바위, 하늘뿐, 반대편은 절벽에 가까운 위험한 너설언덕... 할아버지 바이타르는 손녀 갈샨에게 말을 타게 하는데, 아흐레만에 할아버지를 이길 수 있는 실력이 된다. 할아버지가 길들이는 검독수리. 바이타르는 손녀의 검독수리 길들이는 능력을 인정해서 새로운 검독수리를 구해주고 길들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이름은 '쿠다야(하늘)어르신' '갈샨은 검독수리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창공 높이 떠 계곡과 산을 내려다 보고, 숲과 계곡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아주 작은 움직임까지 살핀다. 엄마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침대에 누워 배에 손을 얹고 태동을 느끼거나, 책을 읽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p63~64) 할아버지로부터 검독수리 길들이기를 배우기 시작하던 날 갈샨은 처음으로 할아버지를 '아타스(할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리고 저녁에는 할아버지에게 '노인과 바다'를 읽어 드린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손녀는 양떼를 몰고, 검독수리를 길들여 가면서 새로운 삶의 모습을 배워 나간다. 학교 공부보다 더 값진 삶의 지혜를 자연을 통해서, 검독수리를 통해서 배우게 된다. ![]() 할아버지는 넓은 광야에서 일어나는 모든 기후변화까지도 예측할 수 있을 정도의 혜안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 불어닫친 눈폭풍속에서 할아버지는 손녀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양떼들과 말을 지키기 위해서 사투를 벌인다. 눈폭풍에, 그리고 먹이에 굷주린 늑대의 습격으로 부터 양떼를 지키기 위한 할아버지가 위기에 봉착하고, 손녀는 할아버지를 지키기위해 갖은 고생을 다한다. '엉덩이를 땅에 붙이면 죽는 땅, 두 발로 서 있는 사람만이 살아 남는, 가혹한 땅' 153일의 추운 겨울날,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내면서 할아버지를 지키는, 그리고 손녀를 지키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계속 전개된다. 이 와중에 검독수리는 꿩 사냥을 하여 갈샨의 발밑에 먹이감을 떨어뜨려주는 행동까지 한다. 길들여진 검독수리의 은혜갚음이라고 해야 할까. 절망과 힘겨움만이 남아 있는 그곳에도 겨울은 지나고 봄이 온다. 얼음이 녹아 한 방울, 한 방울 물이 떨어지는 모습.... 갈샨에게는 '차궁'의 생활이 거칠고 힘든 야생의 삶이지만 대자연의 삶의 경이로움과 삶의 지혜와 행복은 그 어떤 곳에서도 맛 볼 수 없는 값진 것이다. 엄마의 출산으로 갈샨의 153일이 아닌 151일의 광야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광야를 떠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양떼를 돌보는 일에 행복을 느낀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코맥 매카시의 '로드'가 생각났다. 대재앙으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곳에서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남쪽을 향해서 한없이 걸어가던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로드'의 배경이라면 '153일의 겨울'은 몽골의 광야에 우뚝 솟은 한 채의 게르, 그리고 자연속에서 할아버지와 손녀가 서로를 알아가면서 길들여지는 과정과 눈폭풍속에서의 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나가는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읽어주는 '노인과 바다'가 할아버지의 인생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 더군다나 작품의 글들의 묘사가 너무도 세밀하여서 마치 몽골의 광야에 내가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사실적이고도 생동감이 있게 쓰여 졌다.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 책은 초등학교 고학년의 학생들부터 어른들까지 모두 읽기에 좋은 작품이기에 부모님들이 학생들과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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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치는 근육이 탄탄해 보이는 말 위에 앉은 어른과 아이. 그리고 하늘 높이 허공을 가르는 검독수리. 황량한 겨울의 산 위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TV 다큐멘터리에서 말을 타고 광활한 대지를 힘차게 달리는 몽골 사람을 간간히 본 적이 있다. 이 책은 바로 그곳 몽골 평원, 그리고 어린 소녀 갈샨의 이야기이다. 갈샨의 동생을 임신한 엄마가 너무 심한 입덧으로 고생을 하니 갈샨의 아빠는 갈샨을 할아버지 댁에 5달 동안 보내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영어 선생으로 평원의 생활에는 쓸모없는 직업을 가진 며느리에 대를 이어야 하는 첫 손자가 아들이 아닌 딸이어서 적잖이 노여워하는, 편안한 도시 생활을 마다하고 광야에서 양 떼를 돌보며 검독수리를 길들이는, 양 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이리떼와 맞서 싸우는 늙은이. 바이타르. 오랜 출장 생활 때문에 가족을 온전히 돌볼 수 없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그 바이타르에게 자신의 어린 딸을 맡기는 것이다. 갈샨은 그런 할아버지가 싫었다. 미친 늙은이라고 말했다가 아빠에게 맞을 뻔도 했다.
싫든 좋든 현실은 갈샨을 몽골 평원으로 내몰았다. 하루하루를 집에 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갈샨을 처음엔 인정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집안의 남자에게만 허락된 검독수리 길들이기를 가르치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의 겨울도 춥다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브카르 쭈트(죽음의 흰 가루)라고 불리는 눈폭풍을 이겨내고, 뼛조각 하나까지도 남김없이 해치울 것 같은 그 짐승의 발톱과 이빨로부터 할아버지를 구해낸 갈샨이 그렇게도 대견할 수 없었다.
인상적인 구절이 있는데 갈샨을 학교에 보내라고 독촉하는 교육과 감독관에게 바이타르가 한 대답이다. (중요한 부분만 적었으며 중략한 대화가 있음) “읽을 줄 아냐?” “읽는 거요? 읽는 거야 오래전에 배웠죠.” “좋아. 그럼 셈은?” “당연하죠!” “그럼, 양 젖은 짤 줄은 아냐?” “아직 그렇게 잘하지는 못해요. 이제 막 시작한 거니까요.” “그럼, 늑대가 양 떼를 공격하면 막을 수 있냐?” “늑대요!” “들었나, 힐방? 내 손녀는 자네가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네. 그리고 내가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손녀가 모르는 것들이지. - 중략.”
아마도 갈샨이 바이타르와 함께 했던 153일은 단순히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가 있던 시간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 중요한, 어떻게 보면 대안학교에 다닌 것 아니었을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동안 말이다. 이 책을 보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애니메이션이 떠올랐다. 좀 더 혹독하고 현실적인 내용의.
청소년을 위한 책이지만 살아있는 것 같은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한 구절 한 구절 사이에서 몽골평원의 황량함과 재무쇠(갈샨의 말)의 거친 호흡과 불뚝거리는 근육, 쭈트의 잔인함, 소녀와 할아버지의 가족애 그리고 검독수리와의 서로에 대한 신뢰로 인해 삶을 유지했던 일로 인해 내 마음까지 훌쩍 자란 느낌을 받았다. 갈샨 또한 이런 마음이었겠지? 언젠가 몽골 평원에 가게 되면 검독수리와 호흡을 맞추는 갈샨을 만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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