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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이상 문학상 대상은 박민규의 <아침의 문>이었다. 대상작품답게 정교하게 엮은 소설의 정석이란 생각과 함께 그동안 개구쟁이처럼 느꼈던 작가의 인상을 다르게 바꾼 작품이기도 했다. 최종심까지 올라왔다는 편혜영의 <통조림>도 재미있었다. 통조림 공장에서 갑자기 사라진 공장장의 이야기가 스릴러처럼 섬뜩했지만 내심 내가 만약에 통조림 공장에서 근무했다면 나 역시 지인들에게 색다른 선물을 했을 거라는 평범한 생각을 했다. 손홍규의 <투명인간>도 신선했다. 아버지의 생일선물로 아버지를 '투명인간'취급하자는 가족들의 의기투합이 결국 가족의 해체와 부성의 존재 축소, 미래의 가족관계에 대한 의미까지 생각해보게 한 멋진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을 다시 찾아 읽은 이유는 배수아의 <무종> 때문이었다. <무종>은 내가 배수아 작가의 이름 앞에 '관심'이란 수식어를 붙였던 작품이었다. 배수아는 독자에게 호불호가 갈리는 작가이기도 하다. <무종> 역시 한 페이지에 한두 개뿐인 긴 문장으로 독자를 질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작가의 글에서 집중해 읽을 수록 멀리 떨어져 있던 문장들이 서로 손붙잡고 있는 것을 발견해내는 독서의기쁨을 얻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떨어진 나뭇가지를 무심코 오래 씹다가 어느 순간 고이는 단맛에 중독되는 기분 같은 거.
이 작품을 처음 읽을 땐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릿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이 강물이 검은 기름의 눈동자를 번득이는 것은 철제 난간과 흉한 화단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는 문장을 읽으며 문득 내가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과 함께 한 번 더 읽어서 그것을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을 쓴 것은 작가지만 어떻게 읽는가는 독자의 몫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화자인 '나'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자신과 인연을 맺은 한 모형비행기 수집가의 죽음이다. 어떤 인연인지 구체적으로 나와있진 않지만 모형비형기 수집가는 작가인 '나'를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었고, '나'가 가진 꿈에 대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모형비행기 수집가의 권유로 무종의 탑이라는 곳에서 열릴 예정인 낭독회에 가는 중이다. '나'는 택시 안에서 무종의 탑을 세운 사람과 낭독회를 하는 작가의 이름이 똑같이 '무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간신히 시간에 맞춰 도착한 곳에서 '나'는 모형비행기 수집가와 늦은 식사를 하게 되는데 그때 서로를 바라보면서 "그 바라봄은 심장에 통증과 부자유를 유발하는 종류의 것"이라고 하면서도 "우리를 가장 훌륭하게 꿈꾸게 하는 것은 다름아닌 통증이나 부자유일 것"이라고 말한 부분에서 "나"에게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특별한 사람임을 고백하고 있다.
'나'에게 여행이란 모험과 휴식의 의미가 아니라 '글을 쑬 수 있는 새로운 셋방'을 찾아가는 일이다. '나'는 돈과 시간이 있을 때마다 셋방을 얻기 위해 비행기를 탔는데 독일에서 만난 이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나'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준다. 하지만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비행기 추락으로 죽고 '나'는 그 기억을 가슴 속에 묻어 버린다. 그러다가 우연히 묵게 된 프랑크푸르트 홀바인 거리의 셋집에서 이 기억을 꺼낼 수있는 계기가 생긴다. 셋집의 주인 남자는 은퇴한 엔지니어인데 그가 젊은 시절 출장을 간 도시에서 방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울 때 지인의 소개로 소년이었던 모형비행기 수집가의 방에 머문 적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이 집에 손님으로 머물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인부부의 정원에 초대 받은 어느 날, 함께 커피를 마시던 부인이 아주 오래 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부인은 수십년 동안 열어보지않았던 상자를 집안에서 찾게 되었는데 그 안에는 대학생 시절 오빠와 교환한 편지묶음이 들어 있었다. 사리진 줄 알았던 남매간의 애틋한 사랑이 되살아난 부인은 그 편지를 오빠의 일흔 세 번째 생일날 낭독하게 되었고, 일 년 후 오빠가 세상을 떠났지만 편지를 들으며 행복해하던 오빠를 떠올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오빠를 보낼 수 있었다는 부인의 이야기였다. 다음 날, '나'는 베를린으로 돌가가기 위해 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모형비행기 수집가에 대한 꿈 이야기를 부인에게 한다.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모형비행기 수집가가 어젯밤 꿈속에 나타났다. '나'는 그에게 생전에 하고 싶었던 말을 하게 되는데 그 말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신과 함께한 모든 일들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살갗을 감싸며 흐르는 기묘한 따스함'을 느낀 일들과 이방인인 '나'에게 베풀어준 친절함에 감사하다고, 이말을 들은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나'에게 새처럼 높이 오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때 그는 깊은 잠에 빠진 얼굴로 보였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숨 막힐 듯 답답했던 안개가 조금씩 걷힌 느낌이다. 배수아 작품을 대하는 독자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릴 것 같다. 한 쪽은 오래 공들여 작품을 읽으며 감탄 할 것이고, 한쪽은 조금 읽다가 책을 던져버릴 것이다. 작품에서 제목의 '무종'은 독일사람 이름이라고 했다.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우리 말에 그 뜻이 다섯가지나 나와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배가 안개 속을 항해하거나 부표 따위에서 종을 쳐서 위치를 알리는 신호'라는 뜻이 이 내용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무종은 안개종이었다. '나'는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현실에 부딪칠 때마다 여행을 떠난다. '나'가 흐릿하기만한 현실에 막막해할 때나 바다에 던져놓은 부표 앞에서처럼 망설이고 있을 때 모형비행기 수집가는 문득 나타나 무종을 쳐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안개 속 같은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나'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었음을 느낀 '나'는 그에게 미처 전달하지 못했던 감사와 미안함을 가슴 속 깊은 방안에 가둬 둔 것이다. 그리고 꿈과 이야기를 통해 가슴 안에 짙게 깔려 있던 안개를 흘려보낸 것은 아니었는지. 이렇게 나는 <무종>을 안개 속을 걷듯 천천히 더듬어 가며 읽었다. 다 읽고 나서 돌아보니 안개가 사라진 뒤에 나타난 마을처럼 이야기가 또렷이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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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월이면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기다린다.
하지만, 소시적의 넘쳐나는 기대와 궁금증은 이미 사라져 버린지 오래고, 그냥 해마다 구입하다보니, 책장의 컬렉션을 구성하고자 하는 시츄에이션일 뿐. 그닥 의미는 없다.
다행히도, 올해는 박민규가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열렬한 팬은 아니지만, 은근 그의 글을 좋아하는 나의 입장에서 무척 반가운편이지만, 과연 이 소설이 대상감이였나 하는 생각은 슬그머니 든다. 칙칙한 주제를 칙칙하지 않게 전개해 나가는 그의 문체의 특성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불편함없이,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글보다 더 좋았던 것은 그의 최우수상 수상 후기(?),소감(?) 그런 것..그의 글쓰기에 더 많은 박수를 보내고, 격려를 보내고 싶어졌다. 나는 attitude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데 글쓰기에 대한 그의 그것은 우아하게, 진심으로 갈채를 보내고 싶어진다.
그러나...올해도 어김없이 이상문학상은 자기 덫에 빠진다. 즉, 예전만한 포스가 담긴 글이 없다는 것이다.
제일 웃긴건 심사평이다. 심사평을.. 콧구멍 파면서 읽었다....차라리 심사를 하지 말고 소설을 쓰지 그러세요, 하고 말하고 싶은걸...(참아야지 어쩌겠냐--;;)
일단 박민규의 글에 대해서는 별로 흠을 잡고 싶은 생각이 없다. 눈여겨 본 작가는 '통조림 공장'인가 하는 작품을 편혜영이 특이했고... 윤성희는 예나 지금이나 그닥 발전이 없어보였다.--;;
그리고...배수아의 글을 보다가는... 확 찢어버리고 싶었다.--;; (이상문학상이라고 '이상'스럽게 접근했음이 분명하렸다.)
써놓고 보니... 한 해 동안 열심히 고생해서 쓴 글일텐데... 꼴랑 돈 만원주고 책 사 읽으면서도 이런 악평도 없는 듯 싶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손에 꼽는다. 그렇지만, 난 앞으로 한 30년은 더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살 것 같다 따라서,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주옥 같은 딱 한 작품을 기다리고 있으니, 악평에 대한 딴지는 없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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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괴물이라 부르긴 좀 그렇잖아? 그래서 만들어 낸 단어가 인간이 아닐까, 그녀는 생각했었다. (P. 20) 괴물을 인간이라 부른다고 해서 피해될 거 없잖아, 그치? 좋은 게 좋은 거야. 좀 그럴싸하게 들리는 인간이라고 부르자, 약속?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인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가로젓지 못하겠다. 되는 대로 막 쓴 것 같기도, 고심 끝에 이런 생각에 이른 것 같기도 한 작가의 표현에 킥킥 웃다가 씁쓸해 했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이므로. 연초가 되면 습관처럼 구입하게 되는 이상문학상 작품집, 책장에 두고 묵히다 며칠 전 동 트는 새벽에 읽었다. 간혹 잠에서 깨어 눈이 말똥말똥해지는데, 어쩌면 박민규의 ‘아침의 문’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세안한 덕분인지, 여름이라도 새벽은 한기를 제법 모을 줄 알아서인지 더없이 개운했다. 수없이 많은 세상의 문 중에 아침의 문을 발견한 작가의 상상도 뛰어났지만, 두 개의 아침의 문이 마주하는 순간으로 유도하는 작가의 서사가 독자로 하여금 숨을 죽이게 한다. 삶과 죽음이 결국 문 하나 열고 나가는 행위에 지나지 않음을 말하다가도, 누군가는 이미 오래전에 거쳐 온 문과 또 누군가는 앞으로 열게 될 문을 묶어내며 태어나는 자와 죽으려는 자의 뜨거운 만남을 유도한다. 괴물을 인간이라 부르는 무대라도 꽤 재밌다고, 서로를 설득하는 것 같다. 편혜영의 ‘통조림공장’, 김중혁의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김애란의 ‘그곳에 밤 여기의 노래’도 영화의 잔상처럼 스치지만 박민규의 <아침의 문>처럼 깊이 박히진 않았다. 에두르지 않고 불필요한 공간을 없애 한층 몰입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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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 때쯤이면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사서 읽어왔는데. 언젠가부터는 내가 그냥 좋아서 찾아 읽는 게 아니라 직업적 의무감으로 읽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책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읽는 내 자신이 나이가 들면서 좀 변하여 이전보다 재미를 덜 느끼는 것이리라 짐작해 왔는데.
아후, 모르겠다. 아니다, 알 것도 같다. 수상 작가들이 내 나이보다 어려지면서 내 흥미가 떨어진 건가 그런 생각도 든다. 60-70년대 수상집들을 읽을 때에는 그저 존경스럽다는 마음이었고, 80년대 수상집들은 동시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본다는 동질감에 매번 읽고 있는 자신이 뿌듯하기까지 했고, 90년대 수상집들을 지나오면서는 들쑥날쑥 하다가 2000년대로 와서는 어라? 실망스럽기도 한데? 수상작이 이런 글이란 말이야? 혼자 반문하기도 했고.
그래도 한 해 한 번 나오는 책이니, 읽어 봐야지 하는 마음만은 여전하니, 앞으로도 읽기는 계속 읽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읽는 맛이 쓰다. 그것도 많이 쓰다. 안 읽어도 된다면 좋겠지만 그래도 안 읽을 수 없다 싶으니 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담긴 소설 어느 한 편에서도 유쾌한 맛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그렇게 느낀 원인은 글 자체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있는지도 모른다. 답답한 세상, 답답하게 살아가는 사람, 답답한 미래, 그리고 답답한 글. 책 처음에 나오는 수상작부터 마지막 심사평에 이르기까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답답해서, 이토록 답답한 글을 읽고 있는 내가 답답해서 소설들을 읽는 내내 좀 슬펐다. 이전의 소설들은 끔찍하게 슬펐어도 희망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는데.(1988년 임철우의 붉은 방은 얼마나 무서웠던 글이었나.)
그나마 박민규의 글에 대한 내 인상이 조금 나아졌다는 것, 배수아의 글에는 여전히 내가 끌리지 않는다는 것, 기억해야지 싶은 작가는 없었다는 것. 괜히 손해 본 느낌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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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 수상자가 결정되기 전, 친구랑 우연히 얘기를 나누다가 올해는 누가 받을 것인가 이야기가 나왔다. 박민규를 좋아하는 친구는 그의 당선을 점쳤는데,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아직 박민규의 작품이 받기엔 이르지 않을까 라고 말했다. 그렇게 얘기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규가 올해 수상자라는 뉴스가 나왔다. 마치 거짓말처럼. 나는 그 뉴스를 보자마자, 좀(아니, 많이!) 놀랐다. 그리고 내 예상이 빗나가서 좀 화가 났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내가 읽은 박민규의 작품들을 생각해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별로 읽지 않았다. 언젠가 단편 하나를 읽고 깔깔깔 웃었던 게 다인가? 그게 다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다. 수상 작품집이 나오자마자 부리나케 주문했고 열심히 읽었던 건.
아,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수상작과 자선 대표작, 수상 소감과 문학적 자서전을 읽었는데 그의 작품보다 “자서전은 얼어 죽을”이라는 제목을 단 문학적 자서전이 더 기억에 남는 거다.(이렇게 파격적인 제목을 단 문학적 자서전이 예전에 있었던가? 없다. 일부러 예전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뒤적여 보기까지 했다.) 아무튼 “죽음과 탄생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파격적 메타포로 압축”했다는 평을 받은 이번 수상작, <아침의 문>보다도 나는 박민규라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갔다. 밤하늘의 별이 유독 잘 보인다는 강원도의 “지극히 평범한 주택가의 단칸방”에서 휠체어에 앉아 보조용 테이블을 끼우고 그 위에 노트북을 얹어 글을 쓰는 소설가가 더 기억에 남더란 거다. “소재의 과격성과 어울리는 파격적인 서사기법이 돋보이는 수작”, “‘문’이라는 은유를 통해 되살린 ‘희망’의 연금술” 등의 찬사를 받은 <아침의 문>보다도, “적어도 문학적 자서전이란, 책을 백 권 정도는 쓴 인간들이나 논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자서전은 얼어 죽을‘이라는 제목을 달 수 있는 한 소설가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더란 말이다. (작품보다 작가의 개인 생활에 더 관심을 가지는 모양새라니......)
아무튼 다시 그의 작품 이야기로 돌아가서...... 인터넷 자살사이트에서 만나 자살을 시도하다 혼자 살아남은 사람, 원치 않는 아이를 임신하여 상가 옥상에서 아이를 낳는 여자. 다시 자살을 시도하던 남자는 건너편 옥상에서 이제 막 삶이라는 문을 열고 나오는 아이를 발견한다. <아침의 문>은 뭐 그런 이야기다. 과격한 소재에 어울리는 파격적인 서사기법이라고 하는데, 글쎄. 그의 자서전이 더 파격적으로 다가오는 내게 소설은 그다지 파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자선 대표작으로 실려 있는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가 좀 더 파격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두 작품 다 박민규식의 유머가 있었다.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는 역시 ‘박민규라는 작가는 참 재미있게 글을 쓰는 작가구나.’하는 생각을 확실하게 굳혀 주었다고나 할까.
나는 어떤 문학상이든 심사평과 수상 소감을 꼼꼼하게 읽는 편인데, 이번 수상 소감은 아무래도 내가 읽은 수상 소감 중 몇 번째 안에 기억될 것 같다. 이런저런 얘기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고, 솔직한 심정과 느낌을 간결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박민규는 “그저 한 편의 단편을 썼을 뿐”이라며 “감사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쓰겠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의 수상 소감을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문학적 자서전을 읽고 나는 이 작가에게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휠체어에 앉아 “인간은 언제나 장애로 가득 찬 존재임을” 느끼며 글을 쓰며 강원도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지구에서 글을 쓰는 인간이야.”라고 속삭이기도 하는 작가.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떻게 써야 고통스럽지? 그런 고민을 한 적도" 있을 정도로 “소설은 그냥 쓰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작가. 순전히 글을 쓰고 읽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양보하고 손해를 보고 화를 내지 않는다는 작가. 이런 작가가 더 열심히 쓰겠다고 하니,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는 당신의 작품, 더 열심히 읽겠습니다.” (그동안 단편 하나라니, 너무했지.)
(앗, 그러고 보니 같이 실려 있는 작품들(우수상 수상작)에 대한 얘기를 너무 안 했다. 도저히 읽을 엄두가 안 나는 몇몇 작품을 빼고, 모두 읽긴 했다. 그중에서 김애란의 작품은 애잔했고, 편혜영의 작품은 독특했다. 윤성희의 작품은 발랄했다. 그러면서 좀 쓸쓸하기도 했고. 심사평을 읽으면서 느낀 건 소설을 바라보는 관점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취향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전혀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작품이 수상 후보작(우수상 수상작)으로 실려 있는 것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더욱 강해졌다는 얘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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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인가 94년인가?
머리 나쁜 내가 기억하는 연도는 그닥 중요한게 아니고.
매년 생일이 돌아오듯, 매년 발간되는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손에 들고.
글 잘쓰는 사람들의 글모음집을 보노라면 세상 차암~~~ 살맛 난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 아직은 괜찮게 세상이 돌아가는게 아닌가 하고.
무엇보다 박민규작가의 수상소식이 기뻤다. (그저 팬이다 -_-)
xx 상을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 없고, 그게 또 그렇게 권위(?)있다 생각하진 않지만 (이건,순전히 무지한 한개인의 의견일뿐이니 딴지 걸지 말아달라!)
좋아하는 작가 군이 상을 받는다는건 꽤 흐뭇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살림살이가 조금쯤 나아지시려나?)
아직까지 소설의 힘을 믿는 이들이 있다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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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은 내게, 일종의 부채같은 책이다. 그래도 '국어'를 한답시고 있는 사람으로서 한 해에 한번 나오는 이 책을 안 사기에는 마음이 좀 그렇다. 하지만 '소설'을 본격적으로 공부하지 못한 나는, 이 책에 실리는 다양한 단편 소설들이, 소설 뒷부분의 해설을 읽지 않으면, 혹은 읽더라도 의미가 제대로 와닿지 않아 약간의 자괴감마저 들기도 한다.
어쨌든.
올해는 '박민규'가 수상을 했다는 기사를 읽었고, 아내가 먼저 읽은 책을 이제야 읽었다. 솔직히 두 편의 소설은 읽지 않고 뒤의 해설만 읽었지만, 뭐 그 정도야... 여전히 막민규는 나름대로 '파격'을 구사하고 있었고, 그의 손 안에서 한없이 무거운 주제는 일상의 것으로 바뀌어 다가온다. 그의 재주가 부럽다. 그의 전작 '삼미수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는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이 옳은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최근 읽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이의 다른 생각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다. 아내도 재미있게 읽어 더 의미있던 책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 '아침의 문'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느것이 되었든, 사실 소설입네, 이상문학상입네 하며 굉장히 무게감있게 다가오는 내용이지만, 나의 삶과 그리 멀지 않은, 식상한 말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주제들일 것이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그려낼 수도 있고, 한없이 무겁게 그려낼 수도 있는, 그의 재주가, 다시 부럽다.
작년 말이었나, 문학상 시상식에 타이거 마스크 비스무리한 것을 쓰고 나타난 박민규의 모습이 기억난다. 자신감, 파격, 재미있는 삶. 그의 인생도 부럽다. 그나저나 박민규여서 한 5년만에 이상문학상을 구입했는데, 이제 그가 수상을 했으니, 한 5년 또 안 사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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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상 우수상에도 꾸준히 이르을 올렸던 작가라 언제쯤 대상을 받을까 했는데 이렇게 받게되네요
제 주변에서는 박민규적 소설을 난해하고 거북하게 생각하더라고요
2004년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2005년 갑을고시원 체류기 2008년 낮잠 2009년 龍龍龍龍 2010년 아침의 문
이상 탄생 100년에 맞게 정말 준비된 사수 아닐까요
'아침의 문'은 자살을 기도하던 남자와 몰래 아기를 낳고 죽이려던 미혼모를 등장시켜 생명의 가치를 이야기한 소설입니다
삶과 죽음 그 속에서 허우적 거리는 우리들을 바라보며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 가야 하는 미미한 존재의 가치를 잘 들어 내 주신 거 같습니다
우수작들 또한 가슴을 움직이게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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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글을 읽는중엔 사회 풍자적인 면에선 이외수 작가와 오버랩되고, 읽고나선 오쿠다히데오가 겹쳐진다. 읽을땐 키득키득거리다가도 읽고나면 결코 우습지만은 않았다는거, 뭔가 가슴 한구석이 응어리 남는듯.. 사실 개인적으론 김애란의 "그곳에 밤 여기의 노래'에 한표를 더져주고는 싶지만 ㅋㅋ 뭐 어련히 대단한 심사위원들이 선정한 작품인거에 부정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배수아의 글이 왜 이상문학상에 실려있는지 내가 배수아를 이해못해서인지 배수아의 난해한 문체가 참 거슬린다. 뭘 말하자는건지 일기를 쓰는건지 혼잣말인지... 이번 이상문학상집을 읽으면서 느낀건.. 작가가 누구인지 모르고도 내용을 먼저 읽다보면 누가 쓴글인지 그 작가만의 스타일이 느껴진다는거였다. 작가들만의 고집인지.. 그 틀을 벗어나기 싫은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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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라는 사내를 2004년 혹은 2005년?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만났다.
그리고 가장 최근 '핑퐁'을 통해 그를 만났다.
신형철의 평론집에서 소설을 문제해결의 공간이라고 이야기할 때, '박민규'의 해결은 리얼리티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텍스트로 그를 다시 만났다.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만일, 하물며]
주인공의 옥탑방에서 자살카페의 회원들의 자살이 성공하고, 성공하지 못한 그는, 화장실에서 잡지를 보며, 느닷없이 자위를 한다(성충동은 삶에의 에너지가 아니었던가? 아무려나..)
10월 새벽, 편의점으로 가서 비스킷과 우유를 먹고 토하고 또 먹는다. 이를 지켜본 여점원, 괜찮은지를 묻고, 그는 다시 옥탑방을 향해 간다. 편의점의 그녀는 만삭인 배를 붕대로 감았던 배를 잠시 풀며, '괴물'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렇다고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는 '떠나간 남자'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진통이 시작되고, 다리를 타고 내리는 양수를 느끼며, 화장실을 찾다가 어느 건물 옥상으로 향하고, 붕대를 입에 물고 출산을 시작한다.
그는 실패한 자살의 재시도를 위해 옥탑방에 들러, 이미 성공한 사람들을 바라 보다 유서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펼쳐본다. "엄마, 미안해, 엄마 감사해요." 밑도 끝도 없는 유서를 바라보고, 옥탑방 밖으로 나와 샌드백이 메어있던 쇠고리에 넥타이를 매고 목을 거는 순간, 건너편 건물의 옥상에서 아이를 낳는 그녀를 본다.
아침, 그는 죽음의 문으로 다가서려 하고, 아기는 삶의 문으로 삐져나오고 있다. 아기의 실체를 바라본 그는 그녀에게 소리치고, 그녀는 그러면 안되는 걸 알면서도 아기를 잠시 안아보고,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아기가 귀엽다고 잠시 생각한다. 남자는 뛰어 내려가 건물로 올라가고, 여자는 이미 사라졌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그는 아기를 안아든다.
죽음과 삶이 교차되는 그 문, 그 지점에서 화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문단과 문단은 종결되지 않은 문장의 중간 쯤에 커다른 간극을 만들내면서, 겨우겨우 이어진다.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는 것을 증언이라도 하듯. 만약, 하물며... 만약, 죽으려고 했다면, 하물며 살지 못할 게 무엇인가?라고 결론 내리기에,
박민규는 그리 다소곳하지 않다. 의미를 찾아내는 것조차가 그에게는 어쩌면 결례인지도 모른다. 다만 아침의 문을 통해 죽음이 미끄러져 가듯, 삶이 미끄러져 나왔다. 그 뿐이다.
그가, 소통의 희망을 찾고 있다고 말하는 평론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자선 대표작: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켰어요, 문학적 자서전: 자서전은 얼어 죽을...이라고 말하는 박민규가 소통의 희망을 찾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 같은 예감 같은 것.
파리눈을 연상시키는 그의 독특한 안경이 다만, 한 번 써보고 싶을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