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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를 말하는 이 책에 이렇게 서평이 안 달릴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지경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바로 이런 사소한 사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법이다. 물론 [정의란 무엇인가]처럼 사람들이 사놓고도 안 읽는 책들이 있다고도 하지만, 이 책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읽어 보려고도 하지 않는 이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일까? 우리나라처럼 이념적이고 원리적이고 극단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사회에서 차이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는 똘레랑스야말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민주시민의 덕목인 것이다. 똘레랑스는 공존의 미학이다. '너 죽고 나 살자'가 아니라 모두 다 윈윈하자는 공존의 심미안을 가진다. 똘레랑스는 차이에 대한 성찰이성의 성숙된 자세다. 똘레랑스는 보통 너그럽게 받아들인다는 '관용'으로 번역하기 쉬운데 역자인 홍세화 씨는 오히려 참고 받아들인다는 '용인'이라는 번역을 제시한다. '관용'보다 '용인'으로 번역한 이유는 똘레랑스가 민주시민의 의무적인 덕목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역자는 똘레랑스가 논어에 나오는 '화이부동'과 매우 가까운 개념임을 강조한다. 이 책의 저자인 프랑스 정치학자 필리프 사시에는 똘레랑스가 소수자, 약자를 위한 사상적 무기이자 민주주의 성숙의 무기라고 정위한다. 그리고 똘레랑스의 가치는 민주시민들로 하여금 단지 반성과 성찰에만 머물지 않고 공존과 자유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오해가 있기 쉬운데, 똘레랑스는 무턱대고 아무 것이나 용인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가령 '악법도 법이다'는 똘레랑스의 지지자들에게는 개풀 뜯어 먹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똘레랑스는 한계가 있다. 똘레랑스는 극단주의자들 ,광신자들, 사익추구집단들과 같은 앵똘레랑스한 행위에 대한 단호한 반대와 저항을 의미한다. 예컨대 인종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는 인종주의는 똘레랑스 지지자들이 가장 불용인하는 사회악이다. 다시 말해서 인종차별주의는 앵똘레랑스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홍세화 씨는 여기에 지능과 학벌 그리고 경제력에 따른 차별인 '지적 인종주의'를 덧붙인다. 이런 지적 인종주의는 '계급에 따른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이른바 엘리트주의라는 것도 지적 인종주의의 또다른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사회에서 지적 인종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는 역자의 의견에 크게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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